|
서른 살 어머니, 일흔 살 그 아이
/이영복
지금도 어머니 품이 그리워진다. 그곳엔 내 짧은 감성으론 표현할 수 없는 안온하고 평안한 향기가 있었다. 십 년 오 개월, 삼천 칠백 오십일은 어머니와 함께한 가슴 저린 사연들이 가득하다. 세월의 강물은 쉬지 않고 흘렀다. 칠십을 한참 넘긴 내 삶의 자양분이 된 기억을 하나하나 불러보고 싶다. 희미해가는 추억의 편린들을 짜 맞추어 본다. 아련한 그리움이 파노라마처럼 하나둘 천천히 나의 시계(視界)로 펼쳐진다.
/신식 어머니
작고 깜찍한 경대가 있었다. 붉은 포마이카 색상에 자개로 문양을 낸 아담한 크기였다. 얼굴만 들여다볼 수 있는 둥근 거울이 있었고 아래엔 서랍도 하나가 있었다. 몰래 서랍을 열어보면 코티 분 갑과 동동구루무, 그리고 작은 붓이나 연필같이 생긴 화장 도구들이 올망졸망 정갈하게 들어있었다. 그 안에는 향긋하고 포근한 어머니 냄새가 물씬 나를 감싸 안는다.
와인병 병마개를 따다 보면 곱던 어머니 얼굴이 내게로 다가온다. 병마개 재료인 코르크나무껍질은 어머니의 화장용품으로 긴히 쓰였다. 투박하지만 탄력이 있고 두께가 제법 있는 그 껍질 덩이를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펴 숫으로 만든다. 그리고 적당히 조각내어 눈썹을 곱게 그리셨다. 가루가 옆으로 번지지도 않았고 마치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눈썹에 검게 묻어나는 것이 신기했다.
코르크나무껍질이 바로 포도주 병마개라는 것을 알았다.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어렵게 구해 갖다 드렸더니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꼭 안아주셨다.
어머니는 동동구루무를 작은 통에 덜어 담고 코티 분을 적당히 섞어 개어서 양 볼에 바르시었다. 어떤 때는 분첩으로 토닥토닥 두드리기도 했다. 입술연지는 바르지 않았지만, 분홍빛연필 같은 것으로 살짝 경계선만 그리시었다. 코티분 향기는 곧 어머니 냄새였다.
겨울철 나들이할 때는 수박색 공단 두루마기에 하얀 양털 목도리를 두르시었고, 여름철에는 하얀 세모시 치마저고리를 갖춰 입으셨다. 품격 있고 당당한, 그리고 아는 것이 많고 사리에 밝은 어머니를 동네 사람들은 신식 여성이라 불렀다. 나는 그 신식이라는 말이 듣기에 좋았고, 신식 어머니는 곧 나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자수 액자와 솜바지
안방 벽엔 액자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큰 노송 아래 학이 두 마리가 수 놓여 있었다. 새하얀 깃털의 몸통에 목덜미와 꼬리 부분엔 검은색이었고, 정수리의 빨간색이 돋보였다. 한 쌍의 학이 보기가 좋았다. 또 하나의 액자엔 민들레꽃 숲에 암탉이 병아리에 모이를 골라주고, 기세등등 수탉은 진 붉은색의 벼슬을 치켜세우며 위세를 뽐내고 있었다. 크레용 색상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반짝이는 비단 색실로 한 땀 한 땀 그려진 솜씨가 신기했다.
스물세 살 육촌 누나가 있었다. 어머니와 뜻이 잘 맞았고 거의 우리 집에서 밤낮을 함께 지내기도 했다. 자수나 뜨개질 또는 한복을 만드는 법을 배우며 가끔 친구들도 불러와 저녁엔 유행가 가사를 적어가며 노래도 했다. 누나의 친구들은 대개 아버지의 학교 제자들이었다. 나는 누나들에게서 나는 향긋한 분 냄새가 좋았다.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좋으셨다. 누나는 어머니가 자수 틀에 그려주는 그림대로 수를 놓아 민들레꽃 액자도 만들었고 베갯모도 만들었다. 베갯모는 작지만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다. 빨간 바탕엔 화려한 꽃이 피었고 병아리를 품은 암탉의 모습이나 높은 벼슬을 상징하는 학을 수놓기도 했다. 누나는 혼수품으로 하나둘 알뜰하게 준비해 두었다.
당시에는 웬만한 옷가지는 스스로 만들어 입어야만 하던 시대이다. 어머니가 아끼던 물건중엔 한복을 만들 때 쓰이던 곡선으로 된 자도 있었고 ㄱ자 자도 있었다. 저고리를 만들 때 쓰는 옷본도 많았는데 그곳엔 연필로 이상한 문양을 그려 놓기도 했고 곳곳에 일본글자로 내가 알지 못하는 표식을 해놓은 것들이었다.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그걸 가만 놓아두지 않았다. 어머니가 안 계신 틈을 노려 방바닥에 펴놓고는 퍼즐을 맞추듯 저고리 모양을 만들어 보았는데 좀 이상한 데가 있었다. 동정 끝에서 내려오는 앞섶이 비스듬히 굽어 있고 마무리가 뾰족하게 치켜진 것이 눈에 거슬렸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잘못 그린 것 같았다. 용기를 내어 잘 드는 칼을 찾아 반듯하게 잘라냈다. 보기에도 좋았고 잘했다 싶었다.
나중에 그것을 안 어머니는 호되게 나를 꾸짖었다. 눈물을 찔끔 흘리며 다시는 그 물건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싹싹 빌었다. 어머니는 버려진 조각을 다시 찾아내더니 얇은 천을 덧대어 풀칠해서 원상회복을 시켜놓았다. 내 생각엔 그것이 더 이상했다. 지금도 나는 한복 저고리를 입은 여인을 보면 앞섶을 살펴보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어느 날 어머니는 광목천을 잘라 검정 물감으로 염색을 하더니 곱게 다듬이질을 하셨다. 자리를 깔고 옷감을 재단하여 바닥에 커다란 ㅅ자 모양으로 만드셨다. 목화솜을 고르게 펼쳐 널더니 대바늘로 군데군데 시침을 해서 그걸 뒤집었다. 내가 입을 두툼하고 푹신한 바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신기했다. 눈밭에 굴러도 춥지 않을 것 같았다.
한데 막상 입어보니 이상했다. 좀 허전했다. 다시 살펴보니 바지 밑단이 트여 있었다. 즉 앉으면 엉덩이가 드러나는 구조였다. 배앓이가 심했던 나를 위하여 차가운 겨울 날씨에 바지를 내리지 않고 용변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해서 만든 옷이었다. 창피해서 안 입겠다고 떼를 쓰니 혼내기는커녕 깔깔 웃으시었다. 나는 속상한데 웃으시는 어머니가 더욱 미웠다.
다음날 일어나서 다시 보니 밑단이 곱게 꿰매져 있었다. 하지만 그 솜바지를 입은 기억이 별로 없다. 아니 몇 번 입어 봤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학교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레 바지저고리를 입을 일이 적어졌고 어머니가 뜨개질로 만들어 주신 털실 스웨터를 입는 걸 좋아했다.
/나를 길들인 음식
미역국에 소고기를 넣어 끓이는 줄은 몰랐다. 백합 조개를 넣고 끓이는 줄만 알았다. 어머니는 자잘한 백합 조개를 따로 가려 미역국을 끓여 주셨다. 내가 좋아하니 생일이 아니어도 기회가 되다면 언제든지 끓여 주셨다. 특히 미역귀가 좋았다. 뽀얗게 우러나온 백합 조개 국물에 오독오독 씹히는 미역귀가 정말 맛있었다.
지금은 단무지라 하지만 그때는 다꾸왕이라 했다. 가을철엔 어른 팔길이만큼이나 굵고 긴 왜무를 뽑아 울타리에 걸쳐 햇빛에 말린다. 꾸들꾸들 적당히 건조된 무를 쌀겨와 노란색 색소를 넣고 소금으로 버무려 투박한 옹기에 갈무리했다.
입이 까다로운 나는 고춧가루를 조금 뿌리고 깨소금으로 맛을 내줘야만 먹었다. 요즈음은 그런 단무지는 보기가 어렵다. 어쩌다 일식집에 가면 볼 수 있는데, 쪼글쪼글하고 샛노란 다꾸왕을 보면 정성스럽게 옹기를 닦으시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봄이 되면 꼭 우족을 사 오신다. 지금이야 정육점에서 깨끗하게 손질되어 오지만 그때는 달랐다. 누런 털과 발톱이 그대로 붙어있었다. 아궁이에 불을 피워 털은 그을리고 두꺼운 발톱을 제거한다. 짚풀로 쓱쓱 닦아 내고 자귀로 토막 내어 살점 하나라도 버려질까 꼼꼼히 모은다. 그을음을 물로 씻어 내고는 장작불로 가마솥에 푹 고아 낸다. 대개는 소 양(위)을 손질하여 함께 끓인다. 중간에 살점이나 양을 따로 건져내어 뽀얗게 우려 나온 국물에 건더기로 넣어준다. 꼬들꼬들한 식감은 지금의 어느 유명 식당에서도 찾을 수 없는 특별한 맛이 있었다.
매년 거르지 않고 해주시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그 우족탕 한 그릇에는 내 허약한 다리에 힘이 생기고 뼈가 튼튼해지라는 어머니의 염원이 함께 담겨있었다. 당시에는 간에는 간, 신장에는 신장이 약이 된다는 민간요법을 신봉하던 시대였다.
사람들은 어머니를 서천 댁이라 불렀다. 서천엔 맛있는 생선이 많이 나는 곳이다. 지금이야 생물로 요리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씨알 굵은 조기나 민어를 소금물에 바짝 말려 자반으로 만들어졌는데 외할머니가 오실 때마다 품질 좋은 것으로 골라 사 오셨다. 어머니는 밥 투정하는 나를 밥상 앞에 앉혀 놓고는 하얀 쌀밥에 물을 말아 숟가락에 얹어 떠먹여 주셨다. 짭짤하고도 개운한 맛이 여름철 내 입에 잘 맞았다. 우리 집에 매일 놀러 왔던 같은 반 친구 을수는 십수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때의 내 처지가 너무 부러웠다고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갈치 머리가 맛있었다. 어머니는 항상 두툼한 가운데 토막을 내 앞에 놓지만, 나는 굳이 갈치 머리에 손이 먼저 간다. 마치 시계를 수리할 때 핀셋으로 부품을 하나둘 집어내듯 갈치 머리뼈를 발라내어 살점만 빼먹는다. 눈알 주변의 말랑한 살점이 맛이 있었다. 비릿하고 짭조름한 생선 맛에 길 들으며 나는 조금씩 성장했다.
기회가 된다면 갈치 한 뭇을 사고 싶다. 몸통은 아이들에 양보하고 머리만 따로 모아 소금에 푹 삭힌다. 곰삭은 갈치 머리에 매운 풋고추를 얹어놓고, 뚝배기째 밥솥에 쪄내어 옛날처럼 발라 먹고 싶다.
/ 내 생일과 팥밥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둘째 큰아버지 댁에 짐을 꾸려 이사했던 첫해 동짓달이었다.
며칠을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둘째 어머이, 곧 내 생일이 오는데 떡은 안 해도 좋구…
팥 밥도 좋아 하닝게, 그걸 해주면 좋겠어요” 하고 말했다.
둘째어머니는 그냥 한번 미소만 띤 채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않았다.
내 생일이 다가오니 공연히 걱정되었다. 떡도 해야 하고 특별한 반찬도 마련해야 하는데 그런 번거로움을 둘째 큰어머니께 끼쳐드리고 싶지가 않았다. 생각 끝에 팥밥 하나로 생일상을 때우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랜 생각 끝에 어렵게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생일날은 왔고 그조차 아무 일 없듯이 그냥 지나쳐 버렸다. 섭섭하기는 했지만 당연하다 생각했다. 더구나 한 달 후엔 사촌 동생 생일이 오지 않는가.
나는 생일날은 특별한 날이라 알고 있었다. 꼭 떡도 하고 국도 끓이고 여느 때보다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어머니는 내 생일에는 정성을 다하셨다.
동짓달이 되면 내 생일날이 오길 기다린다. 수수 팥 떡은 빠지지 않았다. 수수를 곱게 빻아 경단을 만들어 끓는 물에 넣는다. 경단이 동동 떠오르면 조리로 건져 준비된 팥고물에 묻혀 낸다. 이를 수수 망새기라 했는데 나는 별로였다. 찰지기는 했지만 조금 깔깔한 감촉이 입에 맞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굳이 수수 팥 떡을 만드신 이유는 내게 액운을 막고자 하는 숨은 의도가 있으셨던 것 같다.
나는 호박고지 떡을 좋아했다. 내가 좋아하니 큰 시루에 넉넉하게 만드셨다, 큰집에도 보내고 이웃집에도 돌렸다. 지금처럼 생일 파티를 여는 것은 아니었지만 동네 친구들도 불러 조금씩이라도 고르게 나누어 주셨다. 어머니는 내 생일을 주변에 좀 더 많이 알리고 싶어 하셨다.
떡은 정성이 많이 드는 음식이다, 지금이야 떡집에 주문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귀한 음식이었다. 끼니를 걱정하는 서민들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부족한 양식을 덜어내야 하고, 만드는 품이 많이 들어야 한다. 불린 쌀을 절구에 넣고 힘들게 찧어 고운 체에 걸러 가루로 만든다, 여기에 고명으로 쓰일 콩이나 팥 같은 곡물도 따로 준비해둬야 했다. 어머니는 계절 따라 텃밭에 수수도 심고 콩이나 팥도 고루 심었다. 서리가 내리면 호박고지도 미리 준비해 두었다. 철없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힘들고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사촌 동생은 생일이 나와 한 달 차이다. 공교롭게 중간에 설날이 있어 나이도 학령도 한 살 터울이 생겼다. 누나들이 있었지만, 장남이니 당연히 집안에서 최우선 대우를 받았다. 어머니가 내게 쏟은 정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사촌 집에선 보살핌도 생일 차림도 넉넉하게 받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했다.
한데 내게 섭섭한 일이 생겼다. 겨울방학이 오니 둘째어머니의 친정 조카 상연이가 고모 집에 놀러 왔다. 나이도 비슷하니 사촌 동생과 셋이 친구가 되어 장난도 치며 어울려 놀았다. 어느 날이었다. 때아닌 인절미를 만들고 아침상은 제법 잘 차려 나왔다. 알고 보니 상연이 생일이라 했다. 한 달 사이에 셋의 생일이 비슷하게 들어있었다.
순간 둘째 큰어머니가 너무 섭섭했다. 나만 따 돌림 받은 것 같아 서러웠다. 뒷산에 올라 소나무 아래서 혼자 눈물을 훔치며 다짐했다. 앞으로는 내 생일날을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어머니 보호 아래 그동안 누려왔던 모든 호사도 함께 잊어버리기로 작정을 했다. 이후 동짓달이 되면 애써 날짜를 헤아리지 않았다. 어린 마음속에 박힌 옹이는 세월과 함께 더디게 더디게 아물어갔다.
정성스레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의 수수 팥떡과 호박고지 떡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아리게 남아있다.
세월은 흘러 지금은 사촌 동생이 먼저 세상을 달리했지만, 상연이와는 요즈음도 가끔 소식을 전하는 사이다. 친구에게도 사연이 있었다. 경찰이셨던 아버지는 625 동란 전사자로 둘째어머니의 큰 오빠였다. 할머니 슬하에 어렵게 자라는 친정 조카의 생일을 고모로써 그냥 넘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지난여름엔 친구가 사는 포항에 초대받아 껄껄 웃으며 옛 추억으로 밤을 지새웠다.
/김영환 아저씨.
전깃불도 없었던 시골 밤은 유난히 어둡고 깜깜했다. 학교 사환으로 일하던 동네 형이 노란 봉투 편지 한 통을 전해주고는 허겁지겁 도망쳐 가버렸다. 겉봉은 풀칠해져 있었지만, 누군가 미리 뜯어본 흔적이 역력했다. 동네 사람들은 어머니에 관심이 많았다. 아마도 혼자되신 어머니께 군산에서 자주 오는 편지가 수상하고 궁금했던가 보다.
십 리가 넘는 면 소재지 우체국에서 오는 우체부는 동네 우편물을 가끔은 학교 교무실에 부탁하고 가는 경우가 있었다. 방안에는 등잔불에 길쌈하던 마실꾼들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화내기는커녕 웃으시며 봉투를 뜯어보고는 내용을 크게 읽어주었다. 보낸 이는 외가 쪽 친척 오라버니였는데 성(姓)이 다르니 오해가 있을 만도 했다. 군산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김영환 아저씨였다.
어머니는 군산에 자주 가시었다. 그때 금강에는 강경에서 군산까지 정기 왕복 여객선이 있었다. 주로 여객선을 이용하셨지만 일 년 농사를 끝낸 후에는 도정을 끝낸 쌀가마니를 작은 목선에 가득 싣고 가실 때도 있었다. 쌀을 군산에 내다 팔면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떼를 쓰며 어머니를 따라나서기도 했었다. 군산에 가면 신기한 것이 많았다. 집채보다도 수십 배 더 큰 기선도 있었고 자동차도 구경할 수 있었다. 아저씨네 집은 일본식 주택이었는데, 천정에 유리 창문이 달린 멋진 집이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형과 바로 위 누나도 있었다. 기상이 형은 교과서 이외에도 참고서나 만화책이 많았다. 다 배운 책은 한 학년 아래인 내게 물려주었다. 그중엔 두꺼운 ‘전과 지도서’가 있었는데, 학년 전 교과서의 문제 풀이와 해답이 있어 숙제하기가 아주 편했다. 시골 학교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귀한 책 들이라 헌 책이었지만 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바나나가 먹고 싶었다. 그림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 낮선 과일의 맛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먹고는 학교 친구들에 자랑하고 싶었다. 몇 번이나 조른 끝에 어머니는 바나나 하나를 사주셨는데 값이 제법 비쌌던 것 같았다. 한 입 베어 먹어보니 맛은 별로였다. 단맛은 생각보다 덜했고 떫은맛이 있었다. 그 돈으로 사과 열 개를 사 먹는 것이 더 낫겠다 싶었다. 그래도 그 당시 또래 친구들 중엔 바나나를 구경하거나 먹어본 사람은 나밖에 없을거라 생각하니 어깨가 으쓱했다.
어머니가 군산에 다녀오시면 선물이 가득했다. 열두 가지 색 크레용도 있었고, 내 발에 꼭 맞는 신발도 사 오셨다. 그중엔 아저씨네 공장에서 만들어진 형광색 플라스틱 수통이 신기했다. 소풍 갈 때 어깨에 멜 수 있게 만들어졌는데, 여러 개 가져와서는 집안에 학생이 있는 친척 집에 나누어 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플라스틱 생활용품들이 국내에 처음 도입되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동안 목선에 싣고 가신 쌀값 대부분은 아저씨 공장 운영 자금으로 빌려주셨던 것 같았다. 군산에 자주 다녀오실수록 나는 좋았지만, 어머니 한숨은 늘어만 갔다. 한때 잘 나가던 아저씨 공장 형편이 어려워지는 것 같았다.
더구나 어머니는 논 다섯 마지기를 새로 사셨는데 잔금을 치르지 못해 상심이 크셨다. 남들에 빌려주었던 장리쌀을 돌려받지 못했고, 아저씨께 빌려준 쌀값도 끝내 받지 못했다. 종내에 애만 태우시던 어머니는 서른네 살 나이에, 열한 살 나를 홀로 남긴 채 멀리 가셨다.
세월이 지나 열대여섯 살 되던 때인 것 같다. 힘들게 살다 가신 어머니 생각하니 늦게라도 내가 나서서 쌀값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가로 수소문하여 아저씨를 소식을 들으니 군산에서 사업을 접고 본래 고향으로 돌아가 사신다 했다. 마음먹고 날을 잡아 찾아 나섰다. 길을 몇 번이나 물어가며 깊은 산촌에 들어서니 어느 노인 한 분이 있었다.
키 크고 당당하던 군산에서의 그 아저씨는 없었다. 노인은 나를 보고는 엉뚱하게도 먼 산만 쳐다보며, 오늘 산에 올라 다람쥐 굴에서 새끼 몇 마리 잡았노라 자랑하며 멋쩍게 웃었다. 때는 나라에서 수출장려책으로 해외에 팔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지 모아 팔던 시대였다. 다람쥐 새끼는 수출 업자들이 꽤 괜찮은 가격으로 사 간다고 했다.
몇 개월 지나서 내게 등기우편물이 왔다. 당신도 많이 미안했었다는 내용의 편지와 얼마 안 되는 금액이 찍힌 전신환 한 장이 들어있었다. 순간 가슴이 찡하였다. 되돌려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돈이라도 받아야만 아저씨 마음도 편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마음속 어머니께 거간의 사정을 고해드렸다.
지금은 아저씨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만 기성이 형과 그 누나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도토리 선생님
도토리 선생님은 초등학교 1, 2학년 때 나의 담임 선생님이셨다. 키가 크고 바지가 잘 어울리는 선생님이셨다. 당시에 바지 입은 여자 어른은 드물었다. 키가 큰데 왜 도토리라는 별명이 붙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랫말 김부자 집 따님이셨는데 시골에서 보기 드문 신여성이셨다.
나의 담임이니 당연히 어머니와 친할 수밖에 없었겠다. 내가 가는 곳이면 학교이든 이웃 동네건 어머니의 촉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가끔은 학교에도 들르시고 담임 선생님이나 교장 선생님까지도 만나시고 친교를 두터이 하셨다. 어쩌다 감기에 걸리면 약 먹을 시간에 맞추어 한약을 달여 학교에 오실 정도로 극성이었다. 당시에는 학부모가 학교에 오가는 자체가 드물었던 시기였다.
어쩌다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시기도 했다. 어머니와 유성기도 들으시고 소설책 이야기도 함께 나누었다. 울타리 앞에 나란히 심어진 사탕수수는 내가 좋아하던 주전부리다. 굵고 잘 익은 수숫대로 골라 토막 내어오면 스스럼없이 함께 즐기기도 하셨다. 유성기에서 나오는 노래는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 나애심의 ‘과거를 묻지 마세요’ 등 지금 들어도 흥얼거릴 수 있는 곡들이다. 나는 옆에서 태엽을 돌리기도 하고 SP판에 쓰는 바늘을 뾰족하게 갈아 놓기에 바빴다.
어머니는 소설책 읽는 것을 좋아하셨다. 가끔은 선생님 댁의 책을 빌려 보시기도 했다. 그 심부름으로 김부자 집에 가는 일이 있었다. 그 집에는 갈대를 쌓아놓은 오래 묵은 누리가 있는데 거기에 집을 보호하는 업(구렁이)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조금 무서웠지만, 선생님이 맛있는 것도 챙겨 주셔서 오히려 심부름이 즐거웠다.
세월이 지나 어머니는 가셨고 선생님은 결혼하여 서울에서 사신다는 소식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대전에 터를 잡고 살던 어느 날이었다. 어떻게 아셨는지 전화가 왔다. 친척 집 혼사가 있어 대전에 오신다고 했다. 잊지 않고 찾아주신 게 너무나 고마웠다. 나는 마침 새 아파트로 이사도 했고 처음으로 산 르망 자동차도 있었다. 갈마동 백년예식장에서 둔산동 내 집으로 모셔와 사는 모습도 보여드렸다. 때마침 추석 전이라 내 아이들과 함께 송편도 만들었다.
선생님은 뜻밖의 선물을 주셨다. 눈이 쌓인 학교 앞 언덕에서 찍은 빛바랜 흙 백 사진 두 장이었는데 어머니와 선생님 그리고 나와 육촌 누님이 함께 있었다. 낯익은 사진이었다. 내가 고향에서 대전으로 이주해 오면서, 챙겨 오지 못하여 늘 안타까워했던 사진이었다. 어머니가 오신 듯 그 시절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그려져 왔다. 선생님은 잠시 머물렀지만 가실 땐 눈물을 보이시며 내 손을 꼭 잡아 주셨다.
소식도 끊겼고 세월도 많이 흘렀다. 선생님은 어떻게 내 소식을 찾아 알고 계셨을까.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먼 곳에서 지켜보고 계셨을까. 혹시 저승에 계신 어머니와 어떤 교감이 있으셨던 건 아닐까. 어머니와 인연이 있는 또 다른 어느 분도 나를 지켜보고 응원하는 이는 없을까?
한없이 작아지는 일흔 살 아이는, 오늘도 서른 살 어머니의 크나큰 그늘에서 편히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2023.08. )
첫댓글 어린 시절의 아련한 이야기들을 촘촘하게 엮어 내신 기억력에 감탄합니다. 큰 작품을 보여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좋은 인연들에 감사하는 게 당연한데 저는 그 기억들이 어디론 가 도망가 버렸답니다.
이 선생님의 감동적이며 뭉클하기도 한 작품을 읽습니다.
유년의 기억을 섬세하게 집필하심에 감탄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