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의 붉은 가을 산
그림같은 물 속에 산하나 잠겨 있다
이제 산도 쉬는 시간이 되었나보다
물을 수평으로 접으면
물위의 산과 물 속의 산이 꼭 맞을 대칭의 산이
깊어가는 가을 바람에 젖고 있다
가까이서 돌하나 던지면
푸른 무게로 침잠한
물 속의 산이 깨어져 일렁거렸다
산자락에 널부러진 가을꽃들도
모두 깨어져 핏빛으로 일렁거렸다
너무 맑아 고요하고
너무 푸르러 무서운 물 속의 산길을 타며
한 쪽 다리 절룩이는 노인하나
끙끙대며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철쭉
총탄 구멍 숭숭한 목조 건물 앞에서 나는 본다
슬픔처럼 불타던 저 철쭉꽃을
잊을만하면 다시 떠오른 우리들 까까머리 이야기
손풍금 가늘게 울리는 복도 따라 다가가면
머루 알처럼 눈 큰 여선생
칠판에다 또박또박 글씨를 쓸 때마다
유리창 밖 빼꼼 고개 내밀고
쳐다보던 저 비밀한 꽃들
한 송이 추억처럼 비가 내리면
여선생의 눈물처럼 내 마음 흥건히 젖고
나도 풀밭에 누워 하늘을 본다
맨 몸으로 바람을 밀고 가는
저 구름의 눈물겨운 생애를 본다
장독대 위 가을 하늘
포근한 바람과 맑은 햇살이
마당가를 쓸고 간 오후였다
장독대를 빙 둘러싼 맨드라미들이
불길처럼 달아오르고
그 불길에 휩싸여 봉숭아는
씨방을 탄알처럼 터뜨리고 있었다
하늘을 보니 가을이었다
성큼 높이 오른 하늘은
새털구름을 서편으로 밀어내며
허공가득 가을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 냄새에 취해 날아온 고추잠자리
술 취한 듯 허공을 돌다가
장독대 고인물에 벌겋게
물오른 몸을 비춰보고 있었다
대설주의보
대문 밖을 나서면
차디찬 바람 코를 베어갈 듯 알알하다
밖은 욕설같은 눈발로 뒤척이고
마주앉는 나무들 뜬 눈으로 밤을 새운다
눈발에 길 잃은 새는
제 갈 길 찾지 못해 더듬거린다
포르릉 날다 어질어질 쓰러지며
얼어붙은 날개쭉지 쭉 펴고 몸도장을 찍는다
이대로 죽어 눈발에 묻히면
먼 훗날 신비한 화석으로 태어나리
어디선가 종소리 들려온다
어지러운 눈발에 묻힌 교회 종 탑
별빛처럼 눈알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밤하늘에 젖는다
작별
어느 날 꽃 한송이 환한 웃음꽃 맺지못하고
떠나간다는 작별없이 싸늘한 지상에 몸눕힐 때
안개처럼 물밀져 오는
슬픔의 그림자를 어찌하란 말입니까
한때는 싱그러운 여름을 사모하듯
나뭇가지 뜨겁게 달군 적도 있었지만
고운 얼굴이야 팔자도 사나워
이내 웃음꽃 맺지 못하고 싸늘히 식어갑니다
누가 가슴 아프게 살아온 꽃들의 열정을 알까마는
그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날 땐
아픈 허리 똑똑 꺾어 책갈피에 끼우고 다니던
그 꿈 많은 시절을 어찌 가슴에 묻겠습니까
아파도 아프다 말하지 못하고
늙어 달콤한 향기 피울 수 없어
모두에게 버림받고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저 분분한 꽃잎들이 슬픈 무덤의 강을 이룹니다
낙화
광주리에 꽃을 따 담는다
손길이 지난 자리마다 남는 꽃의 상처
손바람만 스쳐도 쉽게 떨어진다
누군들 저 아픔을 알겠는가
모두 다 부질없다고
식음을 전폐하며 꽃을 피웠을 나뭇가지
제 풀에 지쳐 절망처럼 꽃을 떨어내버린다
봄꿈
마당 위의 구름을 넋나간 듯 쳐다보는
백지장처럼 마른 노파가 있다
사나흘 구름을 사모하며
마당의 살구나무가 폭죽처럼 팡팡 꽃잎을 터뜨린 날이었다
그 때 어둡던 방안까지 빛이 들어와
마음 속으로 아련한 저승길을 내고
노파는 하루치의 짐을 챙기며 저승갈 준비를 한다
그러다가 끝내는 마루에 털썩 주저앉아
저렇게 이승의 묵은 땅에서 영영 살 수 없을 까
물기어린 노파의 눈동자에
덕지덕지 만장을 매단 상여 한 대 턱 멈추어선다
온 몸 무더위에 젖은 노파
박제처럼 누워 꿈을 꾸는 어느 봄날이었다
목백일홍이 그린 노을 3
영원히 싱싱할 줄 알았던
내 몸이 서서히 시드는 걸 알았다
잘게 파인 잔주름 속으로
삶에 지친 가난이 지나가고
성긴 머리숱에서
박제처럼 말라가는 내 뼈저린 삶을 보았다
새악시의 꽃방처럼
환히 꽃불을 뿜어 올렸던 앞마당엔
절망으로 떨어져 누운 꽃잎들이 가득했다
따사로운 햇살이 쓸고 간 그늘에는
가을하늘 붉게 물들이던
꽃잎의 한숨 만이 남아있었다
목백일홍이 그린 노을 2 |
안개의 고향은 산골이었다
새벽녘 커튼을 열고 산을 바라보면
안개는 늘 슬픔에 젖어있었다
산골에서 피어올린 그리움처럼
안개는 내 마음 속으로 길을 내고 있었다
그 때 내 마음의 깊은 심연에서
날개를 털며 빠져나가는
한 무리의 새소리를 들었다
안개는 여전히 슬픔에 젖어있었고
그 때마다 목 백일홍 화사한 꿈을 꾸고 있었다
모처럼 내린 햇살도
적적한 나뭇가지에
십자수 같은 붉은 꽃술을 깔아주었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목 백일홍을 한 폭의 풍경화로 담으리라
오랜만에 닫혔던 커튼을 다시 열었다
햇살 스며드는 커튼 사이로
아직도 시들지 않는 목백일홍 환하게 피어있었다
칼금
지진처럼 갈라진 아스팔트 틈새로
여린 풀들이 일렬횡대로 솟아오른다
기름진 땅을 나두고
아스팔트 벼랑에 뿌리를 내린 풀들이 위대하다
그러고도 저토록 예쁜 꽃을 터뜨릴 수 있다니
황금의자에 폭신한 몸을 묻고도
제 더러운 이름을 퍼뜨리는 희대의 왕들보다
그래도 이름없는 풀들이 더 영악하지 않느냐
아스팔트 틈새로 솟아오른 풀들은
그 냥 풀들의 대열이 아니다
목까지 차오르는 욕망을
칼금처럼 끊기 바라는 여리디 연한 풀들의 소원이다
늦가을의 승천
한여름 풀벌레처럼 목소리 저리 정정하더니
비에젖고 바람에 시달리며
여든 세월 뚝심으로 견디더니
늦은 가을저녁 살포시 지는 해처럼 떠나셨지요
성모상 앞 양초 두 개 훤히 불꽃을 밝히는
어머니의 방,
세간 살이 하나 없어
뻥뚫린 동굴처럼 빈 방 너무 허전합니다
늦은 가을 쏟아져 내리는 하얀 꽃잎의 순결처럼
죄없이 가신 어머니,
속세에서 부대끼던 마음 속의 어두움은
일렁이는 두 자락의 촛불로 몰아내시고
가을 산꽃 술렁이는 환한 길로
허리 쭉 펴시고 당당하게 걸어가세요
꽃은 제 눈물을 먹고 잘 자란다
꽃에는 얼마나 진한 아픔이 있을까
쳐다보는 눈에서 눈물이 난다
붉은 색실로 수를 놓은 듯한 꽃봉오리
오늘보니 해맑은 눈물이 묻어있다
소나기 한줄기 뿌리지 않아도
꽃은 제 눈물을 먹고 잘 자란다
꽃잎 한 장 따서
책갈피에 꽂아놓았던 작년 봄날,
꽃잎 묻은 책갈피가 붉게 물들어 있다
책갈피의 꽃은 누구의 사랑을 노래할까
꽃에는 정말 알 수 없는 진한 아픔이 있다
눈꽃
하늘에서 땅까지는 천리 만길
별빛이 내려와도
단시간에 닿을 수 없는 몇 억년의 길을
눈발은 제 몸 잘게 쪼개
땅으로 흩뿌리고 있다
무한창공의 길이란
그 옆으로 꽃처럼 반짝이는 별빛만 있어
별빛만 않고 뛰어내려도
아득하기만 한 허공이다
꽁꽁 언 몸 녹아
금방 눈물범벅 되어 흘러내릴 운명이지만
그래도 눈발은
지상에 뿌리를 내리고
한 다발 눈꽃 무리무리 피운다
눈꽃을 보면 안다
햇살 사라져도 반짝이는 것은
땅에 대한 그리움
너무 크기 때문이란 것을.
가슴 따스한 별이 되거라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알리라
꽃망울 터져 향기 솔솔 풍길 때의 심정을 알리라
꽃은 사랑하기 위해 피는 것이 아니라
사랑 받기 위해 피어난 것이라는 걸 알리라
죄 없이 땅에 떨어진 꽃잎아
그대 얼마나 아플까
상처도 없이 죽어가는 꽃잎에 핏물이 낭자하다
벌들도 날아와 꽁무니 몇 번 까닥이다가
애도의 울음소리 슬프게 내고 휑하니 날아가 버린다
그대 꽃잎아,
하늘의 별이 되거라
연한 꽃가지에 매달려 가슴 졸이고 사느니
차라리 아득한 하늘 끝 북극성 옆에 자리를 잡아
영원히 꺼지지 않을 별이 되거라
물새들의 사랑법
꽃잎이 둥둥 떠서
떠내려가고 있네
꽃배로 고이 접혀
성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
누군가는 저 꽃잎 건져내
사랑이란 이름 써 넣고
다시 띄워 보내고
누군가는 저 꽃잎에
눈물 몇 방울 흘리며
울적히 개울가를 걸어 가겠네
그러면 물새들도
긴 개울 따라가다가
지친 꽃잎 머무는 자리
점찍어 놓고
다시 돌아 오겠네
그리고는 알려 주겠네
우리들의 사랑이
모두 저기 모여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