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물을 10리 밖 작은 개울에서 끌어오지만 넓고 멀리 있는 논은 가물면 물을 얻을 수 없어 매년 수확할 수 없었다. 선생은 이것을 보고, “이것은 우리 논이 위쪽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우리 논을 밭으로 만든다면 가물어도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지만 저 사람들은 논에 물이 들어가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라고 하고는 즉시 자기 논을 밭으로 만들었다. 선생이 남의 사정을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溪流, 引十里外水小灌, 廣遠者, 旱不得潤, 年比不穫. 先生曰, 是我水田, 在其上故也. 吾水田之燥可食, 彼非水田濕, 不可穡, 卽田其水田, 其推恕及人如此.
출처 :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 : (權斗經, 1654-1725)
제자 이덕홍의 기록을 보면 퇴계 선생의 논이 있는 지역으로 물을 대기 위해 시냇물을 10리 밖에서 끌어왔다고 합니다. 토계 앞을 지나는 시냇물은 온혜 위쪽에서 흘러내립니다. 그런데 시냇물은 넉넉하지 않았고 물을 대어 줄 지역은 넓었습니다. 이 때문에 가뭄이 들면 물꼬로부터 멀리 떨어진 논까지 물길이 미치 지 못해 해마다 벼를 수확하지 못하는 농민들이 많았습니다.
퇴계가 이 물을 위쪽에서 끌어들여 모내기를 하면 아래쪽의 바드랫길(도산초등학교 자리에서 낙동강 쪽의 논)은 물이 부족하여 모내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선생은 자신의 논을 밭으로 바꾸면서 다음처럼 말하셨습니다. “우리 논이 상류에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다. 나는 비록 마른 밭으로 사용할지라도 먹고 살 수 있지만 저들은 논에 물을 적셔주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선생의 논이 상류에 있기 때문에 먼 곳의 논에는 물이 닿지 못해 벼가 자라지 못하는 것을 알고 이렇게 논을 밭으로 바꾸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이익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어려운 입장에 처한 이들의 형편을 헤아리는 배려의 마음은 우리 시대 모두가 본받아야 할 마음입니다.
≪퇴계집(退溪集)≫
조선 중기 이황(李滉, 1501-1570)의 유고(遺稿)를 엮어, 선조(宣祖) 32년(1599)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간행(刊行)한 책으로, 총 68권 31책이다. 이황의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호는 퇴계(退溪)이다. 이 문집은 제자 조목(趙穆, 1524-1606) 등이 엮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간행되어 여러 종류의 중간본(重刊本)이 남아 있으며, 판본도 목판본과 필사본이 있다. 조선 중기에 성리학을 독자적인 학문(學問) 체계로 수립하고, 후에 영남학파의 종주(宗主)가 되어 우리나라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퇴계의 저술을 모은 책으로, 이 시기의 사상사 연구(硏究), 특히 성리학의 이해 수준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원집(原集) 49권, 별집 1권, 속집 8권, 외집 1권, 연보 3권, 언행록 6권으로 되어 있다.
≪퇴계언행록집(退溪言行錄)≫
조선 숙종(肅宗) 때 학자인 권두경(權斗經, 1654-1725)이 퇴계 이황의 언행(言行)을 기록한 책으로, 제자들과의 문답 등 여러 방면에 걸친 퇴계의 언행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