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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四 부, 고대가요.고시조.판소리
1.향 가
가. 서동요비 (薯童謠碑)
1) - 서동요 -
善花公主 主隱
他密只嫁 良置古
薯童 房乀
夜矣卯乀 抱遣去如
2) 옛 백제 서울 사비의 남궁지宮南池
삼국유사에 이 南池가에 살던 과부가 못의 용과 사랑하여 낳은 이가 서동이며 나중에 백제의 武王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어렸을 때 마를 캐어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랏 사람이 맛똥 薯童이라 불렀다. 이때 신라 眞平王의 공주 善花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의 서울로 들어가 마로써 아이들을 꾀어 끌어 자작의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서동요 노래는 무심한 아이들의 입을 빌어 온 서라벌 장안에 퍼진 끝에 신라대궐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조정의 백관은 노래의 내용을 문제삼아 선화공주를 귀양보내게 하였다. 귀양가는 도중 서동이 공주를 배행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사랑하여 부부가 되었다. 당초 서동이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한 노래가 서동요로서 현존하는 향가로는 그 중 오랜 노래이다. 현재 三國遺事에 남아 있는 서동요는 향찰식 표기로 되어 있으나 대체의 뜻은 다음과 같다.
선화공주님은 맛똥 방을
남 그윽히 얼어두고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리하여 서동은 선화공주와 같이 백제에 와서 나랏사람의 신망을 얻어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고 한다. 가난하되 슬기로운 무명의 소년이 미모의 공주와의 사랑을 이루고 더없이 높은 임금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고 하는 서동의 이야기를 통해 백제인의 낭만을 되새기고 후대에 길이 기리고자 여기 서동의 노래를 풀어 돌비에 새기고 그 뜻을 기록하노니 뜻 있는 이 걸음을 멈추고 이곳 남지변 옛 자취를 눈앞에 그리소서.
문학박사 황패강이 글을 짓고
문학박사 김동욱이 글씨를 쓰고
부여군과 전국시가비 건립동호회에서 공동으로 세우다
1987년 5월 일
<서동요비> 비음에는 전국시가건립동호회회원 90여 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어 고전문연구자는 물론 전국 국어국문학자들의 면면을 볼 수 있어 1980년대까지의 생존자를 알 수 있다.
3) 서동과 선화공주의 전설
백제시대 이궁離宮 터로 알려진 궁남지 일대에는 兒名을 薯童이라 했던 무왕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사비시대에 왕궁남쪽 못 가에는 궁궐에서 나와 혼자 사는 여인이 궁남지의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으니,그가 바로 백제 제 30대 왕인 무왕 璋이다..” 서동의 어머니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성으로 키웠다.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효성이 지극한 장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궁중에서 한 노신이 찾아와 왕의 밀명을 전하였는데 신라의 서라벌에 침입하여 국정을 탐지하라는 것이었다. 서동은 기꺼이 받아들여 마를 파는 상인으로 위장하여 신라에 잠입,탐지활동을 충실히 수행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사랑이 싹트게 되었다. 그러나 서로는 국적과 신분이 달라 맺어질 수 없는 사이임을 알았다. 두 사람은 지혜를 짜내 서동요를 지어 퍼뜨리기로 하였다. 서동은 서라벌의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마를 나누어주며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서 서동 도련님을 밤이면 몰래 안고 간다”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온 나라에 퍼져나갔다.결국 대궐에가지 알려지게 되어 오해를 받게 된 공주는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를 미리 알고 있던 서동은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 기록은 궁남지에 있는 안내문이다.삼국유사의 내용을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요인을 가미한 전설이라는 점에서 이해하기는 쉽지만 신성한 면은 감하여 있다. 宮南池는 삼국사기에 <백제무왕35년(서기634)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목 가운데 섬을 만들어 선인이 사는 곳을 상정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연못은 백제 무왕때 만든 왕궁의 정원이었으며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든 것으로 삼국 중에서 백제가 정원을 꾸미는 기술이 앞섰으며 일본에까지 전파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4) 남궁지宮南池의 포룡정기抱龍亭記
궁남지의 抱龍亭이라는 글씨는 김종필이 썼으며 포용정 조성경위를 알 수 있는 기록으로써 참고할만하다.
夫餘邑 東南里(一名 마래) 所在(史蹟제135호) 宮南池는 名稱이 百濟本紀에 穿池於宮南이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亭子名稱도 百濟 第30代 武王의 母后가 이 池邊 지금 八角亭이 있는 곳에서 交龍而生 小名薯童 즉 武王을 誕生하였다함이 三國遺事에 記錄되어 있다.
이곳 궁남지는 무왕 35년 3월에 始掘되었고 사안에 植以楊柳와 水中島嶼를 擬方丈仙山하여 별개의 仙界를 이루어 百濟王宮의 苑囿로써 호화로운 지소였음을 말하여주다가 백제의 社稷이 일시에 넘어진 이후 一千三百餘年이나 放置되었던 것이다.湖中島嶼 石假山에는 당시에 심었던 버들 개아지가 면면부절하여 四十年前까지 存續生長하였으며 개수시에는 陶瓦 把手 土器片 灰 礎石 등이 무수히 出土된 것으로 보아서 지금 포룡정이 당시 政閣基址였음을 알 수 있고 주위지세로 보아서 현재 호면보다는 삼배정도는 넓었던 것을 알 수 있는 한편 우리 나라 苑囿(원육)池로서 유일무이한 最古의 池沼인 것으로 推測된다.
이 亭子에 올라서면 동편에 小崗抱枝山(花枝山) 西麓에는 무왕母后가 居處하였다는 別宮址가 보이며 南으로 大旺里 平野의 穀倉地帶가 있어 풍성한 農産物이 군민을 物的으로 돕고 있으며 西方에는 백제佛敎의 遺産 寶品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던 軍守里寺址가 있고 北은 扶蘇山을 鎭山으로 古都 泗泌城의 宮闕과 六佐平의 官衙를 연상할 수 있고 新興夫餘의 시가가 한 눈에 보인다.(이하 생략)
1873년 8월 일 /부여군수 정찬경/
위의 <夫餘文化史碑>와 <抱龍亭記>에 육좌평과 達率, 恩率, 德率 등과 將德, 施德, 對德 등의 品階가 보이는데 이는 百濟 古爾王 27年(260)에 制定된 6 佐平. 16 官品의 制度를 말한다. 16 官品이 佐平 및 ‘率’系列, ‘德’계열, 武名계열의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은 각기 紫色,緋色,靑色의 공복을 입어 구별되었다. 中央의 政治기구는 6 佐平制를 기본으로 하였으니, 이에는 內臣좌평, 內頭좌평, 內法좌평, 衛士좌평, 朝廷좌평, 兵官좌평 등 여섯 직분이었다.
포용정 벽에는 서동요가 포용정기와 함께 걸려 있다. 石雲 崔訓基의 글씨다.
宮南池에는 옛날 심었던 버드나무가 울창해 있는 것은 물론 연,수련,菖蒲,노랑꽃창포 등이 정성스레 가꾸어져 있고 꽃동산이 조성되어 있으며 꽃동산을 지나 연밭을 지나면 나당연합군에게 최후까지 대항했던 백제 계백장군과 오천 결사대의 구국충정을 영원토록 기리기 위하여 花枝山(48미터) 남록에 세운 조형물 ‘백제오천결사대출정상’이 한 여름 더위인데도 그 위엄을 더하고 있다. 화강석 백제문과 청동의 오천결사대출정상의 높이 8.8미터의 당당한 위용은 황산벌 전투에서 연합군에 4전 4승하였던 백제군의 기상과 중하단의 아치문에서의 백제인의 예술적인 우수성을 아울러 포용하고 있다. 부여읍 곳곳에는 百濟金銅大香爐가 부여의 얼굴로 새겨져 있다. 이것은 백제 사비시대인 6-7세기에 작품으로 국보제 287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국립부여박물관 앞에 실물크기의 11배로 확대해놓은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것으로 전체는 받침부,몸통부, 뚜껑부,꼭지부 등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설명에 의하면 부조상 중 龍은 수중동물 중 陰을 대표하는 동물로,천상계인 정상에는 陽을 대표하는 봉황을 두고 있어 불교와 도교,음양사상 등 백제인의 정신세계를 함축하고 있다 하였다. 그리고 몸체에는 연꽃잎과 수중생물,동물 들을 배치하였다.
나. 신라 설화 -연오랑 세오녀 비
경북 포항시 구룡포 대보에 간 것은 2003년 2월 5일, 이 날은 눈이 내려 육지도 바다도 하얀 날이었다.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는 삼국유사 紀異篇에 나오는 설화로 잘 알려진 이야기다. 첫머리를 보면,
1) 연오랑 세오녀 설화
第八,阿達羅王 卽位四年 丁酉(157년) 東海濱有延烏郞.細烏女 夫婦而居. 一日延烏歸海採藻 忽有一巖(一云一魚)負歸日本 國人見之曰 此非常人也 乃立爲王....(중략)
藏其綃於御庫爲國寶 名其庫爲貴妃庫 祭天所名迎日縣 又都祈野
제8대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157년)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가서 해초(미역 종류)를 따고 있던 중 갑자기 한 바위(혹은 한 고기라고도 한다)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 ‘이는 비상한 사람이다’ 그래서 왕으로 삼았다.(일본제기를 살펴보면 전후에 신라사람이 왕이 된자 없으니 이것은 변읍의 소왕이고 진왕은 아닐 것이다.)세오는 그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괴이히 여겨 가서 찾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이 있음을 보고 또한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또한 그 전처럼 세오를 싣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보고 놀라서 왕께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세오를 귀비로 삼았다. 이때 산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이 없어지니 일관이 말했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 나라에 있었던 것이 지금 일본으로 가버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일어났습니다. ’ 왕은 사자를 일본에 보내어 두 사람을 찾았다.연오는 말했다.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이니 이제 어찌 돌라갈 수 있겠소.그러나 나의 비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거요.’이에 그 비단을 주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아뢰었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그런 후에 해와 달이 그 전과 같았다.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라 하며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迎日縣 또는 都祈野라 했다.(전거: 삼국유사)
2) 호미곶과 ‘迎日’에 대한 소고
연오랑 세오녀상에 새겨진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다. 연오랑 세오녀상은 포항시민의 오랜 숙원으로 세워진 것이라 한다. 연오랑 세오녀는 한국일월문화의 상징으로 해맞이의 성지인 이 땅에서 웅비하는 한민족의 나아갈 길을 밝히는 영원한 빛이 될 것을 기원하고 있다. 한편, 포항문화의 큰 물줄기를 이루었던 연오랑.세오녀 부부는 신라초기 영일지역의 소국 근기국(勤耆國) 의 인물로 신라 8대 아달라왕 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길쌈과 제철기술 등 선진문화를 전파하고 그 곳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에서 日月精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세오녀가 짠 비단을 제물로 삼아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이를 다시 회복했다는 이야기는 이 고장이 예로부터 일월숭배와 제천의식의 국가행사처였음을 알려준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영일의 해맞이는 육당 최남선 등에 의해 朝鮮十景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으며 오늘날 포항의 호미곶(虎尾串)이 한국에서 가장 해가 먼저 뜨는 곳이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어 새 즈믄 해 1월 1일 한민족해맞이 축전이 국가행사장으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다‘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영일(迎日), 제천의식, 일월숭배, 호미곶’ 같은 말을 주목할 수 있다.
대보 등대박물관을 보거나 그 옆 자연석에 세긴 <장기갑호미등(長鬐岬虎尾嶝)>를 보는 순간 영일이 지리적으로 비상한 곳임을 알게 한다. 자연석에는 ‘大甫는 옛부터 自然景觀이 秀麗하여 六堂 崔南善 先生의 [朝鮮常識] 地理篇에 大韓十景의 하나로 記錄하고 있으며 朝鮮 明宗朝 風水地理學者 格庵 南師古 山水秘錄에서도 이곳을 虎尾嶝이라 하여 범꼬리라 부른다’ 하였다. 곶(串)은 지명 밑에 붙어 그곳이 ‘꼬챙이‘ 또는 죽침같이 튀어나온 곳을 가리킨다.
연오랑.세오녀 설화가 우리에게 확인하는 바는 迎日이란 ‘해맞이’(迎逢太陽也)를,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을 迎日縣 또는 都祈野라 한다는 것이다. [漢書] 교사지상(郊祀志上)에 황제영일추책(皇帝迎日推策) 또는 추측미래지삭망(推測未來之朔望)이란 말에 주목할 수 있다. 황제가 새해 해맞이를 하여 나라의 점을 쳤다는 것이다. 策이란 점치는 것이다. 또는 다가올 미래를 일월삭망으로 추책하는 것을 영일이라 했다. [注]에 瓚이라는 신하가, ‘해와 달이 지고 뜨는 것으로 미래를 추측하는 것을 ‘해맞이’라 하였던‘ 것이다. 삭(朔)은 해나 달이 돋는 시간, 즉 역(曆)을 의미한다. 옛날 천자가 세말(歲末)이나 동계(冬季)에 제후들에게 朔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이때 삭이란 역(曆) 또는 천자의 政令을 말한다. 그러나 어느 시간을 하루의 시작으로 보는냐는 국가마다 달랐을 것이다. 夏에서는 해가 돋을 무렵을 하루의 시작으로 보았고 殷에서는 닭소리로써, 周에서는 밤중(夜半)을 하루의 시작으로 본 것 같다. 따라서 영일현에서는 일월숭배와 제천의식이 실제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성스러운 곳이다. 근기국(勤耆國)의 근기란 근시(勤蓍)에 힘쓴 나라라는 의미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연오랑.세오녀는 당시 영일을 담당했던 무격(巫覡)이고 그 무격과 정치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말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것이다. 연오랑의 ’오(烏)‘와 세오녀의 ’오(烏‘는 까마귀 즉 태양을 말하는 것이니 영일의 제천의식을 설화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포항 대보에 와서 연오랑.세오녀상을 보고 한국에서 해가 제일 먼저 돋는 곳임을 알고 잠시 생각해본 것이다. 아울러 여기에는 <새 천년의 빛> 조형물이 육지와 바다에 있어 찾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제 조형물의 설명을 들어보자.
3) ‘새 천년의 빛‘과 ’큰 손‘ 조형물
첫째, 광장의 왼손과 동쪽 바다의 오른손은 전쟁과 갈등과 배타적인 지난 천년의 <한 손의 시대>를 청산하고 평화와 희망과 번영으로 온 인류가 화해하고, 서로 돕고 함께 사는 새 천 년의 <두 손의 정신>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둘째, 영일만 호미곶은 한반도의 최동단에 위치하여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돋는 곳입니다. 여기 이 ‘영원의 횃불’은 새 천년이 시작된 2000년 1월 1일 이곳 영일만 호미곶의 첫 햇빛으로 채화하였습니다. 이 불은 변산반도에서 채화한 지난 천년의 마지막 일몰불과 남태평양의 피지섬에서 채화한 새 천년의 일출 불과 함께 조국의 평화 통일과 사해 동포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의 불로 존치될 것입니다.
셋째, 조형물의 형태는 묵은 천년을 나타내는 아랫부분의 사각뿔과 새 천년을 상징하는 윗 부분의 역사각뿔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이 영원과 화합을 뜻하는 원형의 고리로 연결됨으로서 지난 천년과 새 천년의 연속적인 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횃불의 火盤은 이와 같은 새 천년의 빛과 정신을 사방으로 확산하는 태양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2000년 1월 1일 아침
새 천년의 빛, 이 날은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바람도 세게 불었다. 카메라에 눈이 앉아 동해 바다를 찍지 못하게 했다. 육지와 바다가 구분되지 않고 천지가 눈으로만 통일되었다. 즈문 해 영일만은 햇빛대신 눈이 내렸고 그 넓은 바다와 하늘 가운데를 갈매기가 비행하며 날아다녔다. [호미에술](2002년 8월) 제8집에 청도 출신의 젊은 시인 이일기의 <호미곶에 와서>라는 시가 있다. 이 날 눈이 숨쉴 겨를도 없이 쏟아졌자만 바닷새의 그 자유로운 비상을 주목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를 동의한 것이다.
사랑하는 이여/동해의 맨 끝 벼랑/낭시곶에 서서//맨발로 황급히 달려오는 /저 흰 웃음의 마중을 보아라// 산과 들녘에서 실없이 /허파에 바람만 꾸겨 넣지 말고//짓푸른 생명이 요동치는 /호미곶 낭시곶에서//오직 바람만으로 /이승을 자유로이 나는/저 바닷새를 보아라// 이 시인은 나와 초면도 없는 젊은 시인인 듯 하지만 바다가 보이지 않는 청도에서 살고 있다. 이승을 자유로이 나는 바닷새를 보고 허허로운 자유를 본 것이다. 호미곶을 소재로한 수편의 시 중에서 이 한편에 주목한 것은 툭하면 相生이니 새 千年이니 하는 말에 식상한 때문이다. 시에 정치구호 같은 욕망이 들어 있다면 미친 악마들이 굿판에 와서 판 깨는 일밖에 더 있겠는가.
장기초등학교에는 유배차 영일에 와서 살았던 우암 송시열, 다산 정약용의 사적비(2001년 11월 10일)가 있다. 정약용은 장기를 거쳐 강진으로 유배갔던 것이다.
2. 백제가요
가. 정읍사 노래비
하 노피곰 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드 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거논 잠그를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나. - 기다림의 미학 -
백제가요 정읍사는 한 여인이 사랑하는 님을 기다리다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슬픈 사랑 이야기다. 기다림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어쩌면 인내이고 희생이며 용서이고 그리움이며 사랑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사랑할 수가 있고 사랑받을 수 있다.2002년 6월 - 정읍사 설화소설 <그천년의 기다림> 중에서 발췌 - /원광대 미대 서예과 교수 여태명 쓰고/원광대 미대 환경조각과 정진환 만들다/
다. 정읍사 도해(圖解)
제1도 : 아픈 사랑 이야기, 소금행상을 하면서 노모와 샘바다에 정착한 도림이 월아 낭자를 흠모하게 되면서 보름날 큰 샘거리 숲정이 왕버드나무밑에서 단소를 불면서 애타게 구애한다.
제2도 : 목숨건 언약, 월아 낭자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도림과 豪族의 정혼자 해장이 목숨을 건 내기 중 무서운 망해봉 산정에서 도림이 두려움에 떨며 단소 소리로 호랑이를 퇴치한다.
제3도 : 또 하나의 삶, 목숨을 건 내기에서 살아 돌아온 후 도림과 월아 낭자가 보름달이 휘영청한 숲정이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제4도 : 꿈같은 세상의 나날, 샘바다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게된 도림,월아의 풍년제,가무장면과 결혼 후 아들을 낳고 행복하 한 때를 보낸다.
제5도 : 돌아올 수 없는 길, 마지막 이별이 되어버릴 남편이 소금행상을 위해 대처로 떠나는 모습과 어린 아들과 동구밖에서 배웅하는 월아의 안타까운 이별.
제6도 : 달임에게 소식을 물어, 동아오지 않는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며 달님에게 남편의 안위를 기원한다.
제7도 : 끝없는 기다림,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정읍사 노래를 읖조리다 망부석이 되어버린 슬픈 정읍사 여인 월아.
제8도 : 피로 물든 땅, 소금행상을 나간 남편(도림)이 백제난에 징발당하여 병사가 된 후 신라군과 접전을 펼친다.
정읍사 공원에는 <정읍사 가비>가 동상과 함께 서 있다. 그 오른 쪽으로 비켜서 정읍사 기념관이 있고 전북과학대학 건물이 완성되었다. 기다림의 미학은 정읍사 전래 설화를 시각적으로 미화하여 정읍사람들의 정신세계에 자리잡게 하였다.
3. 경기체가
가. 금성별곡 가비
1) 위치
전남 나주 향교는 나주시 교동32-3번지에 있다. 향교주변은 어딘지 모르게 안정감이 있다. 공터가 넉넉히 있고 전국제일의 우수선정향교라는 프랑카드가 있다. 문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는데 초등학생이 담을 넘어가라고 일러준다. 담을 따라 들어가니 비석가가 있고 迎欄門이 있다. 거기에 박성건의 금성별곡가비가 서 있다.
나주는 필자로서는 초행길이었지만 유서깊고 안정감을 주는 곳이다. 천년고도인 나주는 소백산맥이 줄기차게 맘마가 달리는 형세로 蘆嶺을 이루고 錦城靈峰이 머리를 일으키는 형국이다. 영산강이 동북방으로 감돌아 평야를 누비고 서남방으로 흘러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다. 나주향교는 전주와 더불어 사장관의 하나로 급제자가 476명이나 배출된 곳이고 성종 10년에 오한 선생 박성건이 교수로 재임시에 10인의 급제자를 내어 이를 경사로 축하연에 금성별곡 6장을 읊은 것이라 한다.그런데 안내서에는 성종 10년, 문학지도에는 성종 11년으로 나와 있고, 박성건은 교수 또는 금성군수로 각각 나와 있으니 두루 역임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가비에는 금성교수로 재임하였다 한다. 나주향교는 조선초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바, 임란후 서울의 성균관을 복원할 때(선조34년)나주향교의 건축양식을 모방했다고 한다. 건물의 배치는 전묘후학(前墓後學)으로 서울의 향교와 같은 양식이다. 전교 이원택 씨는 반갑게 맞으며 향교에 대한 소개를 말씀해주었다. 이 전교는 군북무시절 대구 K-2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며 과거를 회상한다.
2) - 錦城別曲 -
海之東 湖之南 羅州大牧 錦城山 錦城浦
亘古流峙 爲 鍾秀人才 景幾如何
千年地勝 民安物阜 千年地勝 民安物阜
爲 佳氣總룡 景幾何如 (一章)
朴 敎授 大先生 時居皐比 施五敎 叩兩
端 諄諄善誘 爲 振起文風 景幾何如
慇斯懃斯 函丈從容 慇斯懃斯 函丈 從容
爲 師明弟哲 景幾 何如 (四章)
金叔勳 崔貴源 父母俱存 羅渙興 羅慶源
兄弟無故 羅振文 羅處光 始起家風
金崇祖 洪貴枝 年少才能 羅顯羅빈 四寸兄弟
共上蓮傍 景幾何如
何伊樂乎 一鄕人材 何伊樂乎 一鄕人材
爲 十人同年 景幾何如 (五章)
나. 錦城別曲歌碑에 대하여
朴成乾(1418-1487)은 咸陽人으로 字는 陽宗이요 號는 五恨인바 工曹判書와 都承旨 등을 지낸 彦과 靈岩 朴氏의 남으로 이것 羅州 땅에서 태어났다.成宗 3年 문과에 급제하여 長水縣監을 역임했다.成宗 11年 (1480)에 錦城敎授로서 재임하던 중 그의 생도들인 金叔勳 崔貴源 羅渙興 羅慶源 羅振文 羅處光 金崇祖 洪貴枝 羅顯 羅빈의 열사람이 함께 進士로 급제하는 경사가 났으므로 공이 錦城別曲 六章을 지어 그 기쁨을 나타내었다. 이는 경기체가 형태의 시가문학으로 국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금자탑을 쌓은 것이다. 公은 그 성품이 깨끗하고 뜻이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벼슬을 내놓고 靈岩의 鳩林里에 은거하여 間竹亭을 짓고 여생을 여생을 자연과 벗하며 후진교화에 힘쓰다가 향년 70세로 한뉘를 마쳤다. 蘭浦 朴氏와의 사이에서 오남일녀를 두었는데 장남 權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이 되고 후손인 省吾는 증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공의 문장이 어찌 그 일문에 그쳤겠는가 문생중에 김숭조는 문과에 오른 뒤 벼슬이 司諫院 司諫과 執義에 이르렀으며 그밖에도 모두 그 당대에 문명을 떨친 이들이 많았다. 이에 전국의 선비들이 정성을 모아 고장에 가비를 세움으로써 지난날 큰 선비들의 공적을 기리며 뒤를 이를 후학들에게 살아 있는 거울이 되고자 한다.
1992년 12월 8일
한국문학비 건립동호회장 이상보 짓고
오한 제17대손 형재 삼가 쓰다
4, 고시조
가. 고려조
1. 역동 우탁 易東 禹 倬 시조비
한손에 막대잡고 또 한손에 가싀쥐고
늙는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더니
백발이 제 몬져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舍人 역동 우 탁 작
檀紀 四三二八年 乙亥 七月
靑蓮庵 鶴山 書
2. 길재(吉再) 시조비
가. 구미시의 금오산
구미시 터미널에서 12번 버스를 타면 갈 수 있으나 간격이 멀다. 택시로 가려면 구천 원 정도 들 것으로 추정된다. 2004년 4월 22일 (목) 금오산에 있는 고려조 길재의 채미정을 찾았다. 채미정은 금오산 주차장 건너편에 있는데 거기서 길재의 시조 <회고가>와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필 ‘채미정 정화 기념비’를 볼 수 있다. 흥기문을 지나 왼편의 채미정을 보고 경모각에 이르면 길재의 영정과 숙종어필이 있다. 또한 숙종의 어필오언구 <좌사간(左司諫) 길재>라는 한시와 영조대왕이 예조정랑 경대관을 보내 치제케한 어서 등을 볼 수 있다. 경모각 옆에 비각이 있는데 비문에는 ‘고려문하주서야은 길선생유허비(高麗門下注書吉先生遺墟碑)’가 남아 있다. 이하 길재의 고시조와 관련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나. 회고가(懷古歌)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冶隱 길재(1353-1419)
다. 좌사간 길재(한시, 숙종의 어필 오언구)
금오산 아래 돌아와 은거하니 (歸臥烏山下)
청렴한 기풍은 엄자릉에 비하리라 (淸風比子陵)
성주께서 그 미덕을 찬양하심은 (聖主成其美)
후인들에 절의를 권장하심일세 (勸人節義興)
라. 채미정정화기념비(글, 이효상)
금오산은 남숭산(南嵩山)이라 하여 해주 북숭산과 더불어 삼한의 영산으로 이름이 높다. 창공에 드높은 기상은 실로 의연한 데 기암절벽 아득히 부서지는 폭포는 깊고 맑은 정기를 더욱 왕성케 한다.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는 남역을 열어 기름진 들녘이 풍성하다.
일찍이 고려 충신 충절공 길재 선생이 이 산에 은거하시어 곧은 절의를 지켰으니 후세의 숭앙을 받아 마땅도 하다.
야은 길재 선생은 고려 삼은의 한사람으로 1386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간 박사를 거쳐 문하주서에 이르렀으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 후 조선의 새 왕조가 건국하여 태학박사를 내렸으나 두 앙조를 섬길 수 없다고 거절하고 선산에서 후진교육에 힘썼으니 그의 학통은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에 이어내렸다. 이 곳은 길재 선생이 ‘푸른 대는 송죽의 절의가 굳고 시냇물은 밤낮으로 욕심을 씻는구나 마음 속 밝고 맑아 허튼일 없으니 이로부터 도의 단맛을 깊이 알리라.’ 하시던 실로 유서깊은 곳이요 1768년 선산 선비들이 이터에 채미정을 건립하여 선생의 학군과 충절을 기리던 곳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속에 건물이 쇄락하고 담장이 허무러져 그 면모가 초라하더니 1977년 9월 바정희 대통령의 분부를 받들어 무놔공보부는 경내의 건물을 보수하고 석교를 다시 놓아 경성을 유현하게 정화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금오산 산정의 정취를 느끼면서 길재 선생의 맑고 곧은 충절을 배우게 될 것이다.
1978년 6월/표면제자 대통령 박정희/글 이효상/글씨 김충현
나. 조선조
1. 이직 시조비李 稷 時調碑
가. 답사
1999년 11월 6일(토), 경북 성주군 가야산 백운동산록하 국민호텔 입구 주차장
나. 이직 선생 시비
가마귀 검다하고 백노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희고 속 검을손 너뿐인가 하노라
다. 비음
이 직(1362-1431) 성주 이 씨 長庚의 후손이며 자는 우정(虞廷) 호는 형재(享齋)로 성주군 요암면 송곡에서 仁敏의 아들로 태어나 16세인 1377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제학을 지냈다. 1392년 조선조 태조를 도와 2 등 공신으로 성산군에 봉해졌으며 1393년 도승지 중추원 학사가 되었고 1399년 왜구의 침입을 막았으며 1402년 대제학이 되고 1405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412년 성산부원군에 봉해지고 1414년 우의정 1424년에는 영의정으로 1427년까지 나라 일을 돌보는 동안 세 번이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참여하여 외교에 이바지하였다. 1403년에 주자소의 책임을 맡아 계미자를 만들었으니 독일보다 52년이나 앞선 금속활자를 만들고 나라의 안과 밖의 불의에는 굽힐 줄 모르는 선비로서 청렴하고 뭄무를 겸비한 성주 출신의 과학자이며 문장가이신 선생의 시호는 文景이라 하다.
건립고문 엄환섭 외 4인,건립위원 성수근 외 37인
라. 건립기
형재 선생의 시조를 새겨 모든 사람들의 표어로 삼기 위하여 뜻있는 분들의 협조를 받아 성주문화원에서 건립하게 되었다
600여 년이나 지난 오늘 충청도에서 검은 돌을 싣고와 늦게나마 우리 손으로 제작하게 되었으니 선생의 사상과 훈계는 맑고 푸르며 세세토록 영원하리라
글 문화원장 임길상/글씨 홍강 이봉호
2. 고산 윤선도 시조비(1)
가. 가사(歌詞): - 어부사시사 -
우거시 벅구기가 프론거시 버들숩가 이어라이어라
漁村 두어집이 속의 나락들락 至匊怱至匊怱
於어 思 臥와 말가기픈소희온갇고기 뛰논다 (春)
夕陽이 됴타마 黃황昏혼이 갓갑거다 셰여라
셰여라 바희우희에 구븐길 솔아래 빗겨잇다
至匊怱 至匊怱 於思臥 碧벽樹슈鶯聲셩이
골골이 들리다 (夏)
水슈國국의 히드니 고기마다 져읻다
닫드러라 닫드러라 萬만頃경澄딩波파의 슬지容용與여자
至匊怱至匊怱 於思臥 人인間간을도라보니머도록더윽됴타 (秋)
외로운 솔혼자어이싁싁고여라
여라 머흔구룸 恨티마라 世셰上샹을 리온다
至匊怱至匊怱於思臥波파浪랑聲셩을厭염티마라
塵딘喧훤을막도다 (冬)
(漁父四時詞 中 春夏秋冬 一首 씩)
나. 고산 선생 詩碑記
孤山 先生 詩碑를 세우기 爲하여 1977年 10月 14日 코리아나호텔에서 뜻을 같이한 學界重鎭들이 發起準備委員會를 열고 全國을 通하여 發起人을 選出한 뒤 그해 12月 19日에 發起人 百餘人士가 한국일보사에 모여 孤山 尹善道先生詩碑建立委員會를 結成하였다. 建立地는 南山으로 하고 詩는 五友歌로 정하였으나 서울市의 慫慂에 의하여 서울대공원으로 변경하되 공원의 공사가 완성되는 대로 진행하기로 하였다 때마침 先生의 播馥地인 海南 蓮洞에 政府에서 遺蹟을 補修하고 유물관인 忠憲閣을 세웠다. 이제 이 곳에 먼저 또 하나의 詩碑를 세우기로 하여 漁父四時詞 중에서 春夏秋冬 각기 一首를 골라 碑面에 새기고 그 陰에 簡略한 詩譜를 붙이기로 하였으니 이 漁父四時詞는 先生의 수많은 歌詞 中에 白眉的인 作品으로서 聾巖, 退溪의 遺響을 이어받아 새로운 腔調(강조- 노래)를 창조하였으며 韓中歷代諸家의 漁父詞를 集成하였을 뿐 아니라 그 淸雅하고도 興겨운 가락은 愛國的인 思想에 의한 民族의 멋이 넘쳐 흘러내린다. 工事가 장차 끝날 제 이 小碑를 세워 實事를 記錄한다.
다. 고산 윤선도 선생 詩譜
先生의 本貫은 海南이며 字는 約而요 諡號는 忠憲이다.
1587年 6月 21日,漢城 東部 年華坊에서 태어나다
1618년 慶源配所에서 遺懷謠五首와 雨後謠一首를 짓다
1628年 鳳林 麟坪 兩大君의 師傅가 되다
1637年 丙子亂 때 千里 勤王했으나 講和하였음을 듣고 回船하여 甫吉島 芙蓉洞에서 樂書齊를 짓고 餘生을 보내다
1640年 水晶洞에서 金鎭洞日記를 짓다
1642年 金鎭洞에서 山中新曲을 지었으니 五友歌 六首, 漫興六首, 朝霧謠一首, 夏雨 謠二首, 日暮謠一首, 夜深謠一首, 饑世嘆一首
1645年 金鎭洞에서 山中續新曲二首, 秋夜搡, 春晩吟, 古琴歌一首, 贈伴琴一首,初筵曲 二首,罷宴曲二首를 짓다
1651年 芙蓉洞에서 漁父四時詞 四十首, 漁父詞 餘音 一首를 짓다
1652年 承政院 承旨를 辭任하고 楊州 孤山村에서 夢天謠 三首 짓다
1661年 三水配所에서 敍懷文을 짓다
1671年 6月21日 享年 85歲로 樂書齊에서 易簣(역궤)하다
1690年 海南 五賢祠에 配享되다
1749年 英祖 乙巳에 不祧(조)典이 내리다
1968年 先生의 手蹟 및 文獻을 寶物 第 482호로 古宅은 史蹟 第 167호로 지정되다
1979年 政府에서 遺物展示館 忠憲閣을 古宅내에 세우다
1980년 12월 세움/시비 안동후인 김충현 근서/시비기 진성후인 이가원 근찬/11대방손 재승 근서/
녹우당(綠雨堂)은 해남 윤씨의 종가다.고산의 4대조부인 효정(호,漁樵隱)이 연동에 살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연동리의 비자(榧子)나무 숲은 500년전에 심은 것(천연기념물 제241호)이고 은행나무, 곰솔이 우거져 있다. 필자는 날이 어두워 찾은지라 고산유물관을 보지 못했다. 껍데기만 보고 온 것은 아닌지 늘 송구한 것이다.
라. 시조 - 오우가(五友歌) -
내 버디 몃치나 니 水石과 松竹이라
東山의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밧긔 또 더야 머엇리
(오우가 중 첫 수, 글쓴이 배재식)
3. 이매창 시비
가. 매창묘와 유희경
이매창묘는 전북 기념물 제65호로 부안군 부안읍 봉덕리 부안군 문화원과 함께 있다. ‘이 무덤은 조선시대의 명기 이매창이 잠든 곳이다’라고 말한다. 매창은 조선 선조 6년(1573)에 부안현의 아전인 이탕종의 딸로 태어났으며 자는 천향 이름은 계화,계생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계유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붙인 것이다.그녀는 부안지방의 유명한 기생으로 시조와 한시에 능하였고 춤과 거문고 솜씨도 매우 뒤어났다고 한다.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시대 여류시인으로 쌍벽을 이룬다.‘하였다. 매창은 시조와 한시 등 58수를 남겼다고 안내문은 말하고 있으나 연구서에 의하면 500여 편이 있었으나 현재 전하는 것은 시조 6수, 한시 60여 편이 [매창집]에 전한다한다.
매창은 기녀였고 후손도 없으므로 그의 생애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매창(1573-1610)은 이탕종(李湯從)의 딸로 아전과 기녀 간의 서녀로 보고 있다. 그는 비록 시재로서 명성을 날렸던 것이나 <憶昔>이라는 시에 ‘此生愁恨與誰伸‘이라 하여 태어남의 외로움을 하소연할 수 없음을 시로 읊었다. 따라서 후세에는 매창의 사랑을 유희경과 이룰 수 없었던 애틋한 사랑으로 보고 있다.
매창은 기녀가 된 후 진사 서우관과의 사랑을 들 수 있다. 서우관을 따라 서울에서 3년을 지내다 부안으로 내려와 1년을 지낸다. 그후에 만난 사람이 村隱 劉希慶(1545-1636)이다. 유희경은 서얼로 명시인이었다. 강화인으로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인품이 고결하고 소박하며 임란시 의병활동을 한 사람으로 서울 원동의 枕流臺에서 詩友와 사귀었다 유희경이 부안에 갔을 때 매창을 만난 것인데 이때 매창의 나이 20세 전후 유희경은 48세라 한다. 유희경이 <계랑에게 주는시>(贈癸娘)에
일찌기 남방에 계랑의 명성을 들었더니/
시와 노래재주가 낙양을 감동시킨다고/
이제와 실제로 만나보니 /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 하구나/
라고 시와 노래에 뛰어났음을 확인하고 있다. 이같이 유희경과 매창은 깊이 지낸 사이였다(巫山雲雨下來頻). 이후 언제인지 모르게 둘은 헤어지게 되고 유희경이 매창을 그리워하는 시만 남는다. 매창은 다시 장성현감 김제군수를 지낸 묵재 李 貴를 만나게 된다. 1601년에 허 균은 부안을 지나며 매창을 만났으나 우정을 지키려 매창은 자기의 조카딸을 허균에게 소개한다. 매창은 다시 부안현감으로 오는 尹 銑을 만나게 된다.
매창은 1607년에 유희경과 10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으나(重逢癸娘) 매창은 시를 지어 열흘만 있으라 한다(唯趁論詩十日期). 그후 1609년 9월 허 균은 매창에게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보낸다. 매창이 죽은 후 유희경은 <매창을 애도함(悼玉眞)>이란 시를 남긴다.
아름다운 혼이 상여를 타고 백운 간으로 살아졌구나
하늘은 멀어 아득한데 돌아올 기약 없네
매창은 경술년(1610) 38세로 죽으니 모든 시인들이 그의 요절을 무상해 하였다. 부안 남쪽 봉두리 공동묘지에 거문고와 함께 묻었다가 매창뜸(뜸 : 한 동네 안에서 따로따로 몇 집씩이 한데 모여 있는 구역 - 필자)) 으로 옮긴 것이다.1655년에 비석을 세웠고 1668년 부안 개암사에서 [매창집]을 발간한 것이다.
뛰어난 시인의 자질을 타고났으면서도 당시의 계급사회로 인해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억울과 울분, 끝없는 사랑과 고독 속에서 활화산으로 자신을 불태우다 삼십대에 요절한 매창 시인의 사랑과 인간 그리고 그가 남긴 절창의 시들은 현대인들의 가슴에 애절한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
나. 매창을 노래한 시비
1) - 매창묘에서 -
金 民 星
봉두뫼 매창뜸에
흰점 구름 가쁜 듯 머무르고
가던 바람 도사리는 양지바른 幽宅
가랑잎 임자없이 뒹구는 잔디밭에
약주 한 잔 붓고
지그시 눈감고 엎드리면
들릴 듯 말 듯한 거문고 소리 소리
아주 먼 곳 사람인 것 같고
아침 저녁으로 친해온 얼굴인 것 같고
혹은 할머니 같고, 누님 같은
달빛으로 살으신 님
한 서린 사랑의 불씨를 묻고 간 이 강산에
지금은 梨花雨 대신 낙엽이 한창이오.
2) 여담
김민성 시인은 2003년 2월 3일 작고할 때까지 부안군문화원장으로 재직하였다. 그런데 김민성 시인 집안과 매창과의 관계는 특별한 것이다. ‘매창이 죽은지 300여 년이 지나 마모된 매창의 비석을 주도하여 다시 세운 이가 당시 부안 감찰로 있던 김민성 시인의 증조부 金邦煒 공이었고, 1974년 4월 27일 선친 金泰秀의 정재로 서림공원에 매창시비가 세우지게 되었다. 김민성 시인은 매창전집 1.2.3.4권(852쪽)을 합본하여 발간하였다.그러한 김민성 시인을 2004년 3월에 만나러 갔으나 이미 작고한 뒤였다. 일년 전에 돌아가신 것이다. 문화원을 곁에 두고 정작 김 시인을 찾지 않고 서림공원을 돌며 시간을 허비했던 것을 기억한다. 왠지 선뜻 사람만날 기분이 나지 않았던 것인데 직원에게 확인을 해보니 작고했다는 것이다. 이승과 저승의 사람간에 놓여 있는 건너지 못할 마음의 벽이 있었던지 이날 나의 행동은 그러했다. 매년 4월 26일은 매창문화제가 열린다. 서림공원에는 ’扶士의 塔‘이 있다.예로부터 산수가 수려하여 인재가 많은 부안 희망찬 새 천년을 ...을 부르짖고 있었다. 여직원은 현재로선 매창전집을 구할 수 없다며 김 시인에 대해서는 지난 해 전북일보에 자세히 났다는 것이다. 필자는 김 시인이 남긴 마지막 시 <눈물>을 읽고 있다.
눈물이 헤퍼졌다/
밥을 먹다가도 이야기를 하다가도/
그냥 눈물이 나온다//
아직 老欲이 남았는가/
때가 되면/
저녁 노을처럼 스러져가야 할 몸인데 /
아직도 미련이 남아서 그럴까 //
나무잎 떨어지는 소리/
어느 방랑자의 고독한 흐느낌인가/
나도 조용히/
이대로 떠나갔으면 하는데/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지지 못하는/
虛想을 안고/
이 밤도 가슴 아려 운다/
운다//
김민성 시인은 1960년에 자유문학으로 등단,시집으로 [파도가 밀려간 뒤], [그 꿈에 살고 싶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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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시비
1) - 梅 窓 뜸 -
가람 이 병 기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梨花雨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아래 홀로앉아 그 누구를 생각는지
두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 하구나.
羅杉裳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았다.
2) - 어수대(御水臺) -
이 매 창
千年 엣 절에 임은 간 데 없고
御水臺 빈터만 남아 있고나
지난 일 물어 볼 사람도 없이
바람에 학이나 불러볼거나
王在千年寺 控除餘御水臺 往事憑誰問 臨風喚鶴來
3) - 梨花雨 -
이 매 창
이화우 흩날리제 울며잡고 이별한 님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가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4) - 매창을 생각하며 -
劉 希 慶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뿌릴 제 애가 끊겨라.
娘家在浪州 我家住京口 相思不相見 腸斷梧桐雨
5) - 임 생각(閨怨) -
이 매 창
애끊는 情 말로는 할 길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半남아 세였고나
생가는 情 그대도 알고프거든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相思都在不言裡 一夜心懷鬢半絲 欲知是妾相思苦 須時金環減舊圍
6) -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
許 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아직 남아 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 쯤이면
그 누구가 설도의 무덤 곁을 지나려나
妙句堪擒錦 淸歌解駐雲 偸盜來下界 窃藥去人群 燈暗芙蓉帳 香殘翡翠裙 明年小桃發 誰過薛濤墳(哀桂娘)
위의 7 편 외에 <가을>,<명월암에서>,<취하신 님께> 등의 시비가 있다.
라. 여담
명창 李中仙 묘비문 -
매창의 시비가 있는 서림공원에 명창 이중선의 묘가 있다.
명창 이중선은 언제 어데서 누구의 딸로 태어났는 지 잘 모른다. 다만 그가 全羅道 어느 경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나 1920년대 이 땅의 失意에 빠진 겨레 魂을 소리로 달래고 가락으로 부추기다가 몸과 마음을 한마당 소리로 불사르고 겨우 서른을 넘긴 꽃다운 나이에 한방울의 이슬처럼 사라져간 名唱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뿐이다. 중선의 언니 花中仙은 당대최고 명창으로서특히 춘향가중의 사랑가를 잘 불러 사람들의 얼을 사로잡을 때 중선은 애절한 흥타령과 육자백이 가락으로 우리의 한을 달래 주었다. 중선이 언니와 함께 이 나라 방방곡곡의 소리마당을 누비다가 1932년 부안읍내 어느 집 골방에서 한많은 생애를 마치자 나라 안의 모든 명기 명창들이 소복차림으로 상여채를 메고 소리葬으로 애도하니 원근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슲음을 함께 하였던 일은 지금도 이 고장에 전설처럼 전해온다. 이 곳은 여류시인 이매창이 쉬고 있는 五里峴의 매창뜸이다. 중선이 간 지 56년 봄 가을로 꽃 한 송이 술 한잔 따르는 이 없으니 標石은 마멸되고 가시덤불은 묘를 덮어 미망하기 그지 없었다.이에 이 고장 국악동호인들이 뜻을 모으고 구악협회부안지회장 김종락님이 주선하니 인간문화재 박동진 김소희 박귀희 여사 등 많은 국악인들이 뜻을 같이하여 이제 묘역은 다듬어지고 돌비도 세워졌다.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한맣은 세월을 살다 가버린 우리의 명창 이중선은 삼가 이 곳에서 편히 쉬시라. 서기 1988년 4월/ 김형수 찬/ 변산 김윤길 서/
4. 송순 宋 純 시비
가. 비음
송 순은 1493년 潭陽에서 출생,자는 守初,호는 俛仰亭 중종 명종 때의 학자로 명종 때 右參贊을 지내고 담양 霽月峯 아래에 石林精舍와 俛仰亭을 짓고 시작으로 여생을 보냈으며 저서에 [企村集], 작품으로는 <면앙정가> 등이 있다.1581년 91세로 졸하였다. /1974년10월 15일/향토문화전승개발위원회 찬/ 雲谷 박중래 씀/
나.
風霜이 섯거친 날에 피온 黃菊花를
金盆에 득 담아 玉堂애 보내고저
桃李야 곳이온양 마라 님의 을 괴라
다. 여담 : 전주, 정읍, 광주를 다녀와서(제1차)
1996년 8월 7일(토)은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의 개교기념일이다. 이틀 연휴가 되는 것이다. 지도,카메라, 안내서 등을 준비해서 일찍 전주로 간 것이다.9시 20분 두 번 째 차를 탈 수 있었다. 50여 분을 기다려 전주행을 탔더니 승객이 단 4명 뿐이다.남자 셋,여자 하나, 이렇게 승객이 적은데도 운영이 될까 걱정을 해도 소용이 없는 듯 퍽 까다롭게 생긴 운전사는 속력을 다하여 88고속도로를 달린다. 편도 일차선을 중간중간 추월할 때 그리고 마주 오는 차와 아슬아슬하게 피해나갈 때 조마조마한 것이다. 전북의 풍경을 처음 대한다는 기대감을 어쩔 수 없는 설레임이었다. 지리산 입구의 푯말이 보이는데 ,저북장수군, 검은 기왓골이 즐비하고 장수 덕유산 갈림길, 장수호텔, 80,40 찻간거리 80킬로미터,남원교차로 남원 아이.씨11시 07분에 남원시 도착이다. 전주 56키롤미터 남았다는 안내판,춘향터널,버선밭,임실군,전주 임실 계속 차는 전주를 향해 질주한다.나는 여유를 가진다.전주는 17번 국도 안내판은 여러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대둔산 전주, 임실, 오궁리미술촌
여행의 감정에는 나이가 문제될 것 같지 않다. 청년시절 여행을 가는 기분이나 지금 갑년을 앞둔 나이의 여행감정에는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3시간 40여분에 전주시에 이르렀다. 시가지 풍경이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으나 정동영 국민회의 대변인의 위세를 느끼게 하는 맞은 빌딩 위에 ‘김영삼 대통령은 대선 자금을 공개하라’는 현수막을 세 개나 걸어놨다. 전주에는 필자가 차자아야할 공원이 두 개가 있다.덕진공원과 다가공원이다.먼저 덕진공원을 물으니 남자걸음에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라 한 노파의 말을 듣고 걸어보자는 쪽을 택한 것이다. 등에 땀이 배고 40여 분을 족히 걸었다. 입장료를 주고 들어가니 아늑한 고원 분위기, 짜임새 있는 구성 그리고 공원 가운데 연꽃이 넙적한 이파리를 한껏 자랑하고 있다. 최영희 장군의 동상을 비롯하여 동학혁명군금남군 정충신 등 의 기념비가 있다.김해강, 이철균,신석정의 시비,연꽃이 있는 공원못을 한 바퀴 정문으로 나오니 가설무대 광장에는 노인들이 다수 앉아서 놀고 있다. 토요일마다 전통문화 행사가 있는데 오늘은 없는 날이다. 대구와는 다른 예술을 접하고 사는 도시다. 다시 다가공원으로 간 것이다.더위와 피곤이 겹쳐 기운이 없다. 다가공원에는 의외로 안내 푯말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가교를 건너 바로 학교 앞에 있음을 안 것이다. 가람 시비, 유허비,공덕비 들이 즐비하다. 전주에서 서정주의 헌시비를 찍으러 다시 덕지공원 족을 향해 전주시 발복동 삼양사를 찾아간 것이다. 삼양사 본 건물 앞에 있는 서정주의 헌시비를 찍으러 왔다 하고 부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수위실 책임자로부터 일언지하에 툇자를 받았다. 대구에서 이 전주가지 왔다고 햇으나 이 회사내 풀 한 포기도 찍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회사 내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비문만 찍는다 하였으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지역감정이 다소 묻어나는 수위실 책임자의 말을 원망하면서 돌아섰으나 걸어서 찾아간 필자에겐 더 없는 수치심을 안겨준 일이었다. 이 통에 정읍행만 지체하게 되었다. 라면을 생산하는 삼양사 전주지사의 외래객 방문 출입금지조치가 강경함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사전에 문서로 허락을 받아야한다는 이유는 그를 듯 하지만 방문 이유를 제대로 듣지도 않은 채 툇자를 놓는 건 냉대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터미널로 되돌라와 정읍행 버스를 타고 도착한 것이 저녁 8시경이다. 정읍시에서는 황금장 여관에서 일박을 하고 무료하니 보내면서 집에 전화할 여유를 찾지 못 했으니 지친 것이다.이튿날 아침 6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전화번호부에서 찾은 망부상을 찾아간 것이다. 택시료 1500원에 정읍사공원에 도착, 정읍시 박물관,신축중인 도서관,망부상동상, 망부사를 둘러보고 아직도 이른 새벽에 아침운동을 나온 사람들을 보면서 몇 개의 사진을 찍는다. 주변에는 정읍사 횟집, 정읍사 공원, 정읍시 서점 등이 있어 백제의 유일한 노래 ‘정읍사’가 이젠 생활의 일부로 침투되어 있는 한 예를 보는 것이다. 개교 45주년의 정읍중학교와 얼마를 나오면 정읍고등학교가 있는데 퇴임교장이 휴식터에 인재대망론을 써 놓았다. 정읍시에는 정읍천이 남북으로 흐르고 양 켠에 도로가 있다. 버스를 태워준 기사에 감사하고 여관에 들러 짐을 챙겨서 정극인의 시비를 찾아 칠보면행 벗를 탄 것이다. 칠보교 다리에 내리니 아침 8시다. 마을 노인의 안내를 받아 무성서원에 들렀다. 최고운 선생 ,신 잠 등 향배를 하던 서원, 건물이 낡아 개수가 요구되는 시기인데 측량기사 남녀 한 쌍이 열심히 측량을 하고 있다. 불우헌의 가사비문을 기곡하고 묘지를 찾아 나섰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10시가 넘어서니 힘이 소진되어 다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시내로 들어오는 4톤 짐차를 타고 젊은 기사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건축일을 한다는 그 기사는 자격증만 7개를 땄다며 월 3백만원을 받는다고 자랑한다. 필자는 그를 칭찬해 주었다. 젊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능력이 있어 일찍 많은 자격증을 딸 수 있었는가 하고 묻기도 한 것이다. 자격증 시대를 살면서 자격증을 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거기엔 쓸쓸한 면도 지울 수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정읍시 터미널에서 아침을 먹고 광주행 버스를 타니 여행이 순조롭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만족한 것이다.
광주에서는 광주공원, 사직공원을 찾아 취재를 했다.택시로 광주를 가는데 웆너기사가 피식 웃더니 ‘아저씨 혹시 철학하는 사람 아니예요’ 하고 묻는다. 여기서 철학이란 관상보고 작명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내 외양을 보고 하는 말로 짐작이 된다.더구나 일요일인데 가방 하나 들고 모자는 눌러쓰고 공원을 찾으니 관상쟁이라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공원 입구엔 벌써 2,3인의 철학자가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한 사람은 열심히 열을 올리고 있고 나머지는 손님이 없다. 내 운명도 모르고 사는 데 남의 운명을 점칠 것인가. 서툰 철하자라도 남의 운명을 어떻게 말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조지훈의 헌시비 ,김영랑과 박용철의 시비,광주공원에는 노인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 군데군데 노인들은 이발해주는 모습도 보인다.시설이; 없는 곳에서 하는 이발이란 봉사자가 하는 이발일거라고 생각되는 모습이다. 작은 규모의 정자와 벤치시설은 쓸모가 있는 것이다. 다시 사직공원을 올랐다.오르막 왼편에 kbs광주 방송국, 다시 광주여성회관이 있다.
광주여성회관에는 ‘기회와 희망의 전남 건설’? 여하튼 어떤 미래를 고대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어 호남인의 숨은 야심을 ㅑ엿볼 수 있었다. 사직공원에는 고전시비 7기,현대시비 3기가 있다.모두 광주시에서 세운 것이다.사지공원에는 사직단이 있어 매년 음 2월과8월초 戊日에 제례를 올린다 한다. 남쪽의 흙은 赤土라 하여 가운데 적토를 평지로 하였다. 고전시비는 어느 도시보다 먼저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각 3.로주변에 세워놓아 경사가 가파르다 .따라서 관심 있는 사람이 찾을 경우 접근이 힘든 위치에 서 있는 것이 흠이다. 니콘 카메라가 고장난 것이다. 취재를 마치고 하산 모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있으니 오후 4시다. 아 홀가분하다. 할 일을 다 했다는 기분이다. 김치찌개를 시켜 먹었다. 전라도 아줌마와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의 기질을 이야기 하는 사이 시간은 흘러갔고 결론은 어디가나 사람 사는 곳은 별 차이가 없다는 데 이른 것이다. 4시 35분 대구행 티켓을 사니 순서는 ㄸ끝인데 자석은 일 번 자리다. 이날 고속도로는 소통이 잘 되었으나 화원 근처에서 차가 밀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장장 5시간만에 귀가하게 되니 몇 년만에 집에 온 기분이다. 집에서는 전화연락이 없어서 걱정을 했다 한다. 바쁜 일정으로 시비를 주마간산격으로 본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윤선도의 오우가는 생략한다.
5. 강원도 영월 왕방연 시조비
가.
천만리 머나 먼 길에
고은 님 여희옵고
내 마음 둘듸업서
냇가에 안자시니
저 물도 내 안 같도다
울어 밤길 예놋다
나. 비음
이 곳은 1457년 10월 24일 금부도사 왕방연禁府都事 王邦淵이 단종께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을 가눌 길 없어 청령포를 바라보면서 시조를 읊었던 곳이다. 1617년 병조참의 용계 김지남 兵曹參議 龍溪 金止男이 영월 순시 때 아이들이 이 시조를 노랫가락으로 부르는 것을 듣고 다음과 같이 한시를 지어 후세에 전하였다.
千里遠遠道 美人離別秋 此心無所着 下馬臨川流 川流亦如我 鳴晦去不休
천리원원리 미인이별추 차심무소착 하마임천류 천류역여아 명회거불휴
2016.4.8
6. 금남군 정충신錦南君 鄭忠信 시비
가.
空山이 적막한듸
슬피 우난 져 杜鵑아
蜀國興亡이
어제 오날 아니어날
至今히
피 나게 우러
남의 애를 긋나니
나.
정충신(1576-1636), 호 만운(晩雲), 출전[甁歌3],이조 인조 때의 공신,광주사람,광해군 때 만포첨사를 지내고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금남군에 봉군됨.
7. 송강 정 철 시비와 송강 문학관
가. 위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 송강마을 앞
나. 시 조
새원 원주되여 柴시扉 고텨닷고
流뉴水슈靑청山산을 벗샤마 뎌뎟노라
아야 碧벽蹄제 예손이라커든 날나가다 고려
일구구칠년 오월 송간시조를 문영오 쓰다(초장에서 ‘새원’은 고양 신원동 송강마을)
다. 송 강의 자취
字는 계함(季函),호는 송강 본관은 延日이며 돈령부 판관을 지낸 유침(惟沈),모친은 안팽수(安彭壽)의 따님.
1536년 윤 12월 6일 4남 2녀의 막내로 서울 장의동에서 출생
1562년 (27세) 문과에 장원
1565년 (31세) 율곡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에 발탁
1570년 (35세) 부친상을 당하여 신원동 송강마을에서 3년 간 시묘
1573년 (38세) 모친상을 당하여 다시 신원동 송강마을에서 3년 간 시묘
1580년 (45세) 강원도 관찰사,장편가사 관동별곡을 지음
1585년 (50세) 乙酉年 兩司의 論斥을 입고 4년 간 신원동 송강마을에 살다
1590년 (55세) 좌의정
1593년(58세) 12월 18일 강화에서 타계
1594년 2월에 공양 신원동 송강마을 선영에 장사 지냄
1655년 진천으로 묘소이장
저작으로 <송강가사> 2권 1책, 문집 11권 7책이 전함
이 곳 신원동 송강마을은 송강 정철이 부모의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했고 정치가로서는 가장 비참한 시기에도 왕성한 작품구상을 하며 살던 곳으로 그의 호를 딴 지명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마을의 서쪽으로는 송강고개가 있고 동편에는 곡능천을 가로막아 농업용수로 사용하는 송강보가 자리잡고 있다. 절벽 밑으로 송강낚시터가 잇고 부.모 .장자의 묘가 북쪽(화산)에 있으며 만년에 아끼던 기생 강아의 묘는 송강의 묘가 진천으로 이장된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어 마을 사람들은 ‘강아아씨 묘’라고 애정을 담아 부른다.
위대한 시인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뜻있는 고양시민의 성금으로 이 마을에 이 기념시비를 세운다.
1997.6.1./정철시비 추진 건립위원회 위원장 고양신문 발행인 이은만/ 시비 제자는 任昌淳 書/
라. - 율곡에게 주다(贈 栗谷 二首) -
(이때에 율곡과 더불어 동서의 당의(黨議)를 논쟁하다가 의견이 사호 배치되었다. 그래서 이 작품이 있음)
말하고프나 말하면 때(垢)가 될거고
입 다물자니 다물어도 티끌이 되네.
말하나 안하나 티끌이요 때라
쓰자고 보니 벗님이 부끄럽소.
그대의 말이 짐작이 있는건지
나의 의사가 요라이 없는건지.
마침내 무르익어 합치되는 날
이 맛이 길다는 것 알게 될거야.
欲言言是垢 思黙黙爲塵 語黙皆塵垢 臨書愧故人
君言有酙(짐)酌 我意沒商量 爛漫同歸日 方知此味長
마. 義妓 江娥墓와 ‘자미화’
송강 정철과 사귀었던 의기 강아의 묘는 송강마을에 지금도 있다.
김갑기(청주대)가 제자를 쓰고 고양시 관민이 후원하여 세운 것이다.
- 자미화 -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그 예쁜 얼굴은 玉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長安을 바라보지 말라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리라
바. 강아(江娥)
송강 정 철이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시 남원의 동기인 紫薇를 사랑하자 세상사람들이 송강의 강자를 따서 강아라 불렀다. 송강은 1582년 9월 도승지에 임명되어 강아에게 석별의 詩를 지어주고 임지인 한양으로 떠났다. 그 후 강아는 송강에 대한 연모의 정이 깊어 함경도 강계로 귀양가 위리 안치중은 송강을 찾았으나 임진왜란이 나자 선조 대왕의 특명으로 송강은 다시 소환되어 1592년 7월 전라,충청도 지방의 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강아는 다시 송강을 만나기 위해 홀홀 단신으로 적진을 뚫고 남하하다가 적병에게 붙잡히자 의병장 李亮의 권유로 자기 몸을 조국의 제단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적장 소서행장을 유혹,아군에게 첩보를 제공하여 결국 전세를 역전시켜 평양탈환의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강아는 素心 보살이란 이름으로 입산 수도하다가 고양 신원의 송강 묘소를 찾아 한 평생을 마감하였다.
1998년 10월 9일/고양시장신동영/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장 이은만/
8. 남명 조식南冥 曺植 시비 외
가. 시조비
頭流山 兩端水를
녜 듯고 이 보니
桃花 은 물에
山影조 잠겨셰라
아희야 武陵이 어오
나 옌가 하노라
남명 선생 시조를 후학 정문장 쓰고
두류청년회 세움 정축년 11월
나. 조식 시비
1)- 욕 천(浴川) -
全身四十年前累/
千斛淸淵洗盡休/
塵土徜能生五內/
直令刳(고)腹付歸流//
냇물에 목욕하며/온 몸이 쌓인 사십년 간의 허물/천섬 맑은 물에 모두 씻어버리네/만약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
丁丑秋 閔性洙 근서/1997년 11월 敬義청년회
2) -제덕산계정(德山溪亭) -
請看千石鐘
非大扣(구)無聲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
천석들이 종을 보게나!/크게 치지 않는다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네./어찌하면 저 두류산처럼/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을까?//
다. 남명 선생의 유적지를 찾아서
첫 번째 찾은 것은 1999년 2월 3일(수)이다. 이 날은 진주,산청,원지,덕산면 사리마을을 갔다 돌아나왔다. 모 문학지도 안내서를 참고하여 진주에서 산청읍으로 바로 갔는데 산청읍 터미널 구내매점 아줌마의 말에 의하면 남명 선생 묘소를 잘못 찾아왔다는 것이다. 원지로 가서 다시 사리마을로 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주에서는 바로 덕산 (사리마을)로 가는 버스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추위를 이겨내려고ㅜ 여러 번 몸짓을 하면서 산청이라면 옛날 들은 바에 의하면 오지임을 아는 터에,눈을 들어보니 산정이나 기슭에 흰눈이 그득 쌓여 있는게 아닌가.원지에 내려 전북에서 노동자로 왔다는 중년 남자가 버스표를 바꿔주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말을 듣고 교화해줄 것을 요구하라고 하여 표를 교환한 것이다. 원지에서 덕산이 곧 사리마을이고 거기에 남명의 묘소가 있음을 안 것이다.
입춘 추위가 살을 에는 들판을 걸어가며 물어물어 마을 뒷산에 오르니 얕은 산 중턱에 남명 선생 묘가 덩그렇게 앉아 있다. 추운 날씨인데도 묘소에 오르니 훈기가 돈다. 선생의 묘소 앞에서 절을 올렸다. 학문과 사상이 높을 뿐 아니라 의를 중시한 그의 제자들이 암란때 대거 의병을 일으켜 조국을 지켰다는 사실과 징사(徵士)로서 추앙을 받는다는 점에서다. 남명묘소, 부인 송씨묘소, 山天齋,덕천서원,시조비,세심정,지리산 자연석 등을 둘러 본 것이다. 묘소앞의 묘갈명과 축대에 비스듬히 세워둔 석비를 가능한 찍었다.묘소의 비명은 남명의 우인 창녕인 성운의 찬이다. 입석은 ‘선생 몰후 385년 병신 시월 개립하였다.즉 1957년에 다시 입석한 것인데 축대에 세워둔 묘갈은 6.25때 입은 상처인 듯 서너군 데 탄흔이듯 보인다. 신도비비음에 ’송시열 찬’이란 글자가 보여 신도비가 송시열의 찬임을 알게한다. 그런데 비문에 있는 징사란 무엇인가. 사전적 뜻으로는 學行을 並美하였으나 부름(徵召)에 나아가지 않은 선비라 한다. 魏初에 중국의 돈황지방에 경전 주석에 이름 난 周生列이 있었고 晉에서는 도연명이 남악에 숨어사는 자라 하여 징사라 불렀다 한다.살아서는 징사로 자연에 묻혀 살았으나 죽어서는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이란 벼슬을 받았다.문정공은 그의 시호다. ‘끝까지 참 선비의 자세로 남은 이는 남명 뿐’이라는 율곡의 말은 저간의 사정을 잘말한 것이라 하겠다.율곡의 문하인 송시열이 비문을 썼다는 것도 그의 선비됨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관리인은 뒷산은 그냥 뒷산으로 알뿐이라하면서도 앞산을 비름산,묘소는 풍수설에서 잠두설이라 한다는 것이다. 누에의 머리에 해당하는 형국이라는 것이다.건너 비름산에서 봤을 때 완맘한 산들이 포개어져 누운 형국이라는 짐작이 가는 것이다. 보통 산세는 좌선룡,우선룡,직룡,회룡,순룡 역룡 등으로 용의 기세로 말할 터인데 잠두설로 보는 건 산세가 순하다는 것인가. 덕천은 서북의 지리산 천왕봉이 솟아 있고 그 곳에서 발원한 물이 중리,삼장으로 갈라져 흐르다가 兩塘에서 합쳐져 德川을 이루고 들판이 전개되면서 덕산이 거기 있다는 것이다.주산이 지리산 천와봉이라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은 문화재보호구역이라 정화사업을 하는 까닭으로 머지 않아 이사를 가야한다는 말을 했다. 덕산의 버스 정류장에는 앉을 의자가 없다.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과 시골 현지인들이 몇 십분 혹은 1시간 가까이 버스를 기다리다 타는 데도 승객들이 앉을 의자가 없다. 그리고 덕산에서 단성까지 버스료가 900원인데 덕산과 단성 사이 산고개에서 하차하여 마을로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류소가 없어 세워주지 않는 것을 보았다. 짐작컨대 다음 정류장에서 산고개까지 되돌아오려면 도보로 30분 가량 소요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사는 끝내 정류소가 없다는 이유로 지나쳐 가는 것이다. 그날 승객은 60대 할머니인 듯 하였다. 지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시비의 일종인 것이다.
라. 남명 선생 묘갈명(墓碣銘)에서
남명의 友人 창녕 大谷 成 運이 찬한 묘갈명은 남명의 일생을 정확하게 전하고 있다. 선생의 행적을 몇 가지로 나누어 말하고자 한다.
첫째,어린시절: 공은 태어남에 체격이 우람하고 용모가 빼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전중함이 어른과 같아 또래들을 따라 장난치지 않았고 놀이도구도 도한 손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8,9세때 병으로 자리에 눕자 모부인이 걱정하였다. 남명은 “하늘이 사람을 낼 때 어찌 헛되이 하겠습니까? 지금 제가 다행히 남자로 태어났으니 하늘이 반드시 저에게 부여한 바가 있어 저에게 이룰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여기 있는데 제가 어찌 오늘 요절함을 근심하겠습니까?라고 하니 듣는이가 비법하게 여겼다.
둘째, 친구사귐: 벗을 사귐에 반드시 단정히 하여 그 사람이 벗할만한 하면 비록 포의라도 왕공처럼 높여 예로서 공경하고 벗하지 못할 사람이면 비록 벼슬이 높고 귀하여도 흙으로 만든 인형같이 여겨 함께 낮기를 부끄러워하였다.
셋째,학자의 태도: 학자는 잠을 많이 자지 말것이니 사색공부는 밤중에 더욱 전념할 수 있다. 매양 글을 읽다가 긴요한 말이 있으면 반드시 세 번 거듭 읽었으며 붓으로 이를 기록하여 ‘學記’라 이름하였다.
넷째, 학문의 요체: 창과 벽 사이에 ‘敬義’ 두 자를 크게 써서 학자들에게 보이고 또 스스로 경계하였으며 병이 위독함에도 오히려 敬義說을 들어 간곡히 문생에게 훈계하였다.
다섯째, 죽음과 유족: 임종시에 부인들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잠자듯이 편안히 하였다. 부인은 남평 조씨 로 충순위 수의 따님이니 공보다 먼저 별세하였다. 아들 딸 둘을 낳았는데 아들은 먼저 죽고 딸은 만호 김행에게 시집갔으니 맏사위 김우옹은 현재 승무원 정자이고 둘째사위 곽재우는 학문을 닦고 있다. 방실에서 삼남일녀를 낳으니 아들은 次石,次磨,次矴이다
여섯째, 성운의 銘: 하늘이 덕을 내려 어질고 곧았으니, 가드어 몸에 지녀 自用하기 넉넉했네. 남에게 펴지 못해 은택 보급 못했으니, 時勢인가 命運인가 백성 無祿 슬플 분!
9. 김덕령 장군 시비
가. 위치 : 광주시 사직공원 도로변
나. 비음
충징공 김덕령 장군은 1567년 무등산하 忠學里에서 탄생,자는 경림(景棽)이오 임란 때 형 덕흥과 함께 기병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당인의 모함으로 1596년 29세로 요절했으며 영조 때 병조판서 및 좌찬성의 증직과 충장의 시호를 받았다.
향토문화전승개발위원회 찬/남룡 김길구 서/1974년 10월 15일 세움/광주시 건립/
다.
春山의 불이나니
못 다 핀
다 붓논다
져 뫼 져불은
물이나
잇거니와
이몸의
업슨불이나니
물 업서 노라
(忠壯公 金德齡)
10.. 이순신 장군 시비
가. 광주 사직공원 내.
이순신 장군은 1336년 서울에서 출생 호는 淸江으로 선조 때 무과에 올라 임진왜란 때 수군통제사가 되어 십여 차례의 대해전에서 왜적을 격파 나라를 구한 성웅이다. 1598년 노량해전에서 순절하였으며 시호는 忠武요 亂中日記와 시조 한 수가 전해지고 있다. 글씨는 毅齊 許百鍊 서예가/1974년 광주시 세움/
나. 이충무공한산대첩비문
壬辰亂이 일어난 지 83 일만인 7月初 8日 공은 전라左水使의 몸으로 이미 玉浦 唐布 두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더니 이 날, 다시 피란민 金千孫에게서 왜적들의 정보를 듣고 全羅右水使 李億祺와 慶尙右水使 元均 등과 더불어 견乃梁에 이르러 보매 과연 왜적선이 바다를 덮어 진을 쳤으나 판국이 좁고 물이 얕아 싸우기에 어려울뿐더러 육지로 쫓겨 도망가기도 쉽겠다 하여 閑山島 앞바다로 끄을고 나와 모조리 무찌를 계획으로 짐짓 물러나는 체 하였더니 적선들이 따라 나오는 지라 한바다까지 이르러 公은 급히 명령하여 龜甲船을 선봉으로 鶴翼陣을 치게하고 대포와 화살을 섞어 쏘니 연기는 하늘을 덮고 형세는 자못 우레아 같은 속에 順天府使 權俊과 강陽縣監 魚泳潭 등이 적진으로 달려들어 層閣船을 깨뜨리고 적장을 무찌르자 전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 날이 어둡도록 싸워 이기니 적선73척은 남김없이 깨어지고 왜적의 죽은 자가 무릇 9000여 명인데 公은 이날 밤 russo랑에서 머물고 초 9일에는 바람李 거세므로 거제 溫川島에서 밤을 드새고 이어 초 10일 새벽 安骨浦로 달려가 왜적선 42척을 도다시 꾀어내어 閑山島 앞바다에서 모조리 쳐부신 뒤 11일에는 왜적의 시체들을 열 두 무데기에 쌓아 불태우고 12일 閑山島에 이르니 도망간 왜적들들 400여 명이 주려 쓸어졌는지라 이곳 군사들에게 그들의 처지를 부탁하고 다시 전라도 금산 지경 정세를 걱정하여 麗水 본영으로 돌아가니 이것이 이름난 한산대첩이요 이로 말미암아 왜적들이 西海를 거쳐 올라갈 뜻을 다시 감히 품지 못 하였으니, 어허 그 높으신 공이 어찌 이 날 싸움으로써 표창받은 正憲大夫로 족할가보냐 이에 우리 동포들의 길이 잊지 못하는 뜻을 받들어 감히 노래하여 기리되
鶴翼陣 펼침이여 큰 물결 뒤눕도다
불화살 날림이여 아우성 치는도다
왜적들 쓸어 짐이여 고기밥이 되었도다
저 님이 계심이여 겨레 목숨 건지도다
호올로 지킴이여 눈물이 겨웁도다
閑山섬 큰 싸움이여 꿈속에도 서리도다
단군 紀元 4288(1955)년 9월 일
鷺山 이은상은 짓고 완산후인 이순필은 쓰다
11. 백 호 林悌 시비
가. 시비(1)
임제는 1549년에 출생, 본명은 羅州요 자는 子順 호는 白湖, 楓江이요 선조 때 대과에 뽑혔으나 사임하고 명산을 주류하며 시문생활에 전심하였다. 저서에 [ 使], [추파지], [원생몽류록] 등이 있으며 1587년 요절하였다. 1974년 11월/송곡 안규동 서/광주시 세움/
靑草 우거진 골에 자다 누엇다
紅顔알 어듸두고 白骨만 무쳣이
盞자바 勸리 업스니 그를 슬허노라(백호 임제)
나. 시비(2)
1) 위치 :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141번지, 信傑山 중턱
2) - 탄금등대 -
칼튕기며 行帥臺에 오르니 기운이 솟는다
초라한 벼슬자리 내모습 쓸쓸하여라
찬가을 바다 교룡이 꿈틀대고
구름깊은 長白山엔 호랑이 득실대네
世上에 태어나 滿洲땅을 못삼키고
어느때 다시 서울로 돌아갈건가
잔비우고 말타고 돌아서니
아슬한 저 하늘엔 안개걷히네
다. 白湖公 墓碣 原文 및 譯文碑
백호공의 諱는 悌요 字는 子順이며 姓은 林氏로 羅州人이다. 先代는 高麗때 顯達하였으며 朝鮮朝에 이르러 諱 枰이 成宗때 武科에 뽑혀 섬돌아래서 방패를 들고 임금을 모시다가 湖南兵馬虞候가 되셨다. 한때 喟然히 탄식하시기를 일찍이 父母를 잃고 외롭게 成長하여 집안을 일으켜서 三品官에 이르름도 또한 충분하다고 하셨다. 祭祀 지내는 일에 삼가히 하고 宗族에게 화목함으로써 家庭의 敎訓이 되게하셨다. 그 뒤가 諱 鵬이니 己卯士禍를 당하여 太學이 諸生들을 거느리고 궁궐을 지키며 抗爭하였는데 그 사실이 己卯黨籍에 나와 있다. 뒤에 登科하여 慶州府尹을 역임하셨다. 그 분이 諱 晉을 낳아 威勢와 名聲으로 嶺南 湖南 湖西 關西北의 五道 節度使가 되셨다. 장수로 있은지 數十年에 貨利를 사사로히 하지 않아 집안에는 두꺼운 깔개하나 없었다. 寧邊과 耽羅府에 政淸碑가 있다.그분이 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며 어머니는 南原 尹氏로 左參贊 諱 李孫의 四代孫이다. 公은 明宗 四年 西紀 1549年 12月 20日에 태어나셨는데 남이 따르지 못하는 天才로 하루에 수천마디 글을 외웠으며 文章이 豪宕하고 시에 더욱 뛰어났었다. 宣祖 9年 監試에서 蕩陰賦와 留犢試를 올려 進士 三等으로 뽑혔고 다음해 大科에서 二等으로 등제하셨다. 文詞가 날로 갈수록 世上에 有名해졌는데 그 무렵에 東西 朋黨論이 일어나 선비들이 명예로 다투며 相互間에 올려주고 끌어내렸으나 공은 마음 기우리지 않으며 그들과 무리 짓지 않았다. 또 自己를 낮추며 남에게 附阿하는 일은 좋아하지 않았으니 그런 理由 때문에 벼슬이 顯達하지 못했다. 當時에 어떤 當路人이 持論을 좋아하여 成敗가 左右되던 사람이 많았는데 公은 그의 門앞을 지나면서도 만나보지 않고서 저자야 사람의 얼굴만 지녔을 뿐 귀신의 날뜀이다, 禍가 곧 미치리라고 말하셨는데 그 몇 년 뒤에 果然 패하였다. 이름난 山川에서 노닐기를 좋아하셨고 일찍이 俗離山에 들어가 大谷 先生을 스승으로 섬기셨다. 당시의 선비들이 대부분 공을 法度外의 사람으로 보았으며 그들이 취했던 바는 文詞일뿐이었다. 그러나 贊成 李 珥, 學士 許 筠, 使君 楊士彦 등 몇 사람은 그분의 奇氣를 인정했었다고 말해진다. 전에 高山 道察方으로 北關에 나가 楊使君, 許學士, 太常 車天輅 등과 함께 駕鶴樓에 올라 酬昌錄 한 권을 지은 게 있다. 또 西北道 兵馬評事와 關西都事가 되셨으니 모두 宣祖때의 일인데 지금까지도 그곳 關塞의 地方에서는 往往 그분의 읊은 시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벼슬은 禮曹正郞 兼 史局知製敎에 그치셨다. 宣祖 24年 서기 1587년 8월 11일 돌아가시니 나이 39세시다. 楓江, 白湖, 碧山, 嘯癡는 모두 別號인데 만년에 고치기를 謙齋라 하였다. 楓江은 錦城의 서쪽에 있으니 지금 林氏의 舊業이 있는 곳이며 白湖는 玉果縣에 있는데 無盡藏이라 이르기도 한단다 恭人 慶州 金氏는 大父의 諱가 千齡인데 성종때에 有名한 분으로 直提學이며 父의 諱는 萬鈞으로 中宗 明宗때에 大司憲이던 분이다. 어머니는 順興 安氏다. 明宗 3年 7月 3日에 태아나 公보다 一年 위인데 공이 돌아가신 4년째의 12월 6일에 돌아가셔 合葬하였다. 墓는 나주의 會津 위에 있다. 아들은 地,埈,坦(탄),게인데 모두 豪擧로 名族이라 稱하였다.埈은 仁祖가 中興한 초엽에 行誼로 獻陵參奉에 除授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게는 叔父인 文化 縣令 懽(환)의 后系가 되었는데 추천하는 사람이 있어 앞으로 크게 쓰임을 받을번 했으나 戶曹佐郞에 그쳤다. 女壻三人에는 兵曹佐郞 金克寧, 贈領議政 許喬厚, 陵參奉 楊汝栢이다.
지금 子孫으로 姓氏를 이어 오는 사람이 三世에 걸쳐 몇 사람뿐이다 원은 網을 낳아 젊어서 才名이 있었는데 進士에 올랐으나 不幸하게 早折하였다. 網이 楨과 楮를 낳았다.
外孫 許 穆 삼가지음/ 己巳 西紀 一九八九年 四月 日 謹竪/
라. 林 白湖의 舊碑와 미수(眉叟) 許 穆
백호의 묘소는 信傑山에 있다. 신걸산은 나주의 진산인 錦城山의 줄기로 영산강을 바라보며 봉우리들이 수려하게 뻗어 있다. 이곳에는 나주 임씨의 10세 소윤공 휘 鳳이하 17세 백호공 휘 悌 등의 산소가 있는 곳이다. 영성각에 안내된 첫구절이다.영성각은 나주시 다사면 가운리 141번지다. 사실은 나주로 오는 도중 백호의 비를 발견하고 좌회전하여 목포,무안,영산포로 갈라지는 삼거리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차를 세웠다. 가운 주유소가 있는 가운삼거리이다. 창계서원이 자연석에 새겨져 있는데 창계서원은 호남의 학자 林泳(1649-1696)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부제학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학문연구에 바친 학자이다.그 창계서원이 있는 뒷산이 신걸산이고 그 신걸산 중턱에 백호의 묘소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신걸산에 오르니 영산강을 막아 있는 듯 두 개의 산줄기가 좌우로 뻗었고 그 사이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신걸산엥서 바라본 전경은 앞이 확틔여 있는 것이 거칠 것이 없었다.
묘비는 1989년에 세운 번역비가 있고 그 왼편에 구비가 있다. 구비는 판독이 어렵지만 ‘浿江別十首 影 白湖公新筆을 14세손 采駿이 保存하고 禮曹正郞知製敎 白湖林公之墓 叔人 金氏祔,崇禎紀元後 四 辛丑四月 日立가 보인다.8代孫 主賢 載洙 謹書’만 읽고 내려온 것이다.
비문을 쓴 허 목(1595-1682)은 본관이 양천이다. 자는 文父,호는 眉叟,시호는 文正이다. 헌종 1년 (1660)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기간을 두고 송시열 등이 주도한 세력에 예송논쟁을 벌였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영의정에 임명된 유일한 인물이다. 허목은 퇴계와 남명의 양문을 출입한 정 구의 제자로서 동강 김우홍의 신도비문은 미수의 해서체다. 미수의 유필은, 고전체로 ‘東海頌’을 지어 동해파도의 피해를 막았다는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가 현재 모사된 비문이 육향산에 옮겨져 있고 정구를 모신 성주의 회연서원에 남은 과주문자 현판 삼 점(玉雪軒,望雲軒,不愧室)을 볼 수 있다. 서체에서 단연 앞서 나갔던 미수의 서체를 두고 당시 이정영과 홍길주가 모함하고 혹평하였으나 미수는 중국의 서체를 벗어나고자 했던 창조적인 예술관을 가졌던 인물이다. 역사서 [동사], 예서[경례유찬] 등이 있다.
12. 퇴계 退溪 시비
가. 경부 연주군 청량산국립공원 입구에 청량가비가 있다.1996년 8월 9일에 답사.
나.시비
1) - 淸凉歌 -
청량산(淸凉山) 육육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白鷗)야 날 속이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桃花)야 물 따라 가지 말라 어자(漁子)알가 하노라.
2)-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
청산은 어찌하야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난 어지하야 주야에 긋지 아니난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 상청하리라
([도산십이곡] 중 제십일곡, 글쓴이 동계 박명찬)
다. ‘退溪’에 대하여
안동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없겠지만 안동은 볼 것이 많아 하루 일정으로는 어림없다. 이런 가운데 2004년 11월 4일 (목) 오후는 필자에게 매우 기쁜 날이다. 퇴계종가 李東恩 옹과 직접 인사를 나누었던 날이기 때문이다. 육사문학관을 방문하기 위해 가는 도중 퇴계종택에 들렀다가 마침 퇴계 선생 종손과 인사를 하게 된 것이다. 친구 4명과 함께 종가를 둘러보았는데 모두 수 인사만 하고 지나치자 이 옹이 필자를 보고 방으로 들어오라 하며 미리 자리를 하고 방석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정례인사를 나누고 먼저 이동은이라고 소개하고 어디 사는냐 또는 고향이 어디냐는 등 퇴계 선생의 풍모를 보는 듯 백수를 헤아리는 귀골로서 정신이 정정했다. 필자는 지난 2001년 8월 남명선생탄생500주년 기념행사 때 퇴계문하에서 참석하여 소개를 하고 대화하였다는 것을 전했다. 이 옹은 “그렇겠지요” 하고 그에 대한 의견은 길게 언급하지 않는다. 군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며 적극적인 표현을 아끼는 것일까, 淡水라는 말이 생각났다. 필자는 준비없이 만난지라 일상적인 대화만 나누고 밖에서 서성이는 친구들을 핑계하고 무거운 자리를 일어선 것이다. 대문 밖에서 기다리던 친구들은 웃으면서 내가 어떻게 하나를 주시한 터였다. 이 경우 이-숍 우화가 생각나서 친구가 묻기를, ‘이동은 옹이 너더러 무엇이라 하더냐?‘고 묻는다면 ’양반 아닌 친구들과 같이 놀지 말아라, 하시더라‘고 해주고 싶었다. 친구들 가운데는 입만 열면 양반자랑으로 분위기를 압도하려는 술책을 부리는 지라, 원래 시원찮은 양반이 양반자랑을 한다고 침을 놓고 싶었지만 자존심 건드리는 말이라 삼가던 터였다. 눈치 하나 빠른 그들은 끝내 입을 다물고 이동은 옹과 무슨 대화를 주고 받았는가를 묻지 않았던 것이다. 퇴계선생 종택은 원래 건물은 없어지고 1929년에 선생의 13대 嗣孫 하정공(霞汀公)이 사림 및 종중의 협조로 옛 종택규모를 참작하여 지금의 터에다 새로 지었다 한다. 정면6간 측면 5간의 口자형으로 높은 석축 위에 둥근기둥과 네모기둥을 혼용하여 지은 건물이다. 종택의 우측에는 秋月寒水亭이 있다. 팔작지붕건물이다.
퇴계구택 대문 앞에는 안동의 서예가 石溪 金台均이 쓴 글씨로 <퇴계의 시비>가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 退 溪 -
신퇴안우분(身退安愚分)
학퇴우모경(學退憂暮境)
계상시정거(溪上始定居)
임류일유성(臨流日有省)
에서 ‘퇴계’란 호를 찾을 수 있다. 몸도 물러나고 학문도 물러나 노경이 걱정되지만 산수를 벗삼아 하루를 돌아본다는 대유학자의 유유자적하는 면을 상상할 수 있다.조선의 유학자로서 중국사전에 유일하게 주자학 저서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퇴계 선생은 현실에서 물러나 오직 학문에 전념하면서 후학들을 가리쳤던 주자학의 태두이다. 그러한 ‘퇴계’시를 필자가 남석서실에서 서예를 배우고 있을 때 이미 영남권에서는 중견작가로서 지면이 있었던 서예가 석계가 썼다는 것에 호감을 더한 것은 물론이다.
13. 농암가비 聾巖歌碑
가. 도산서원 입구에
도산서원 입구에서 백여 미터 들어가면 왼쪽으로 농암가비가 서 있다.
1982년 9월 16일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 회원일동은 세우고 심재완은 글을 쓰고 권영철은 일을 맡다 회원은 곽동훈,김광순,여증동,황패강 등
나. 농암가
聾巖에 올라보니 老眼이 猶明ㅣ로다
人事ㅣ 變 山川ㅣ 가가
巖前에 甘木甘丘이 어제 본 예라
다. <농암가> 序
이 노래는 농암 옹이 오랫동안 서울에서 벼슬하다가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다. 농암에 올라 산천을 둘러보니 어찌 두려운 감이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옛날의 자취가 그대로임을 알고 기뻐하여 이 노래를 지은 것이다.
라. 이현보(李賢輔),
세조 13-명종10(1467-1555) 자는 비중(斐仲), 호는 농암, 본관은 영천, 32세 때 식년문과에 급제, 사관, 정언,동부승지, 부제학,경주부윤,76세 때 호조참판에 이르러 낙향함, 저서로 [농암집]이 있다.
14 유석 남형우 시조비
- 독립투사 瘐石 南亨祐 선생 순국기념비 -
가. 담은 비저 비저
담은 비저 비저
문어지고
지게는 바람마자
어졌네
찬 뎡지 빈도마에
압산새 왓다간다
아희야 배곱다말고
글일거라
1926년 북경에서 유석
나. 고령읍 연소공원
선친께서 해외망명 생활 중 상해에서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기신 후 가족과 더불어 망국의 서러움과 고난을 겪던 시절 그 당시의 심정과 사정을 읊은 시조이다.
(女息 基玉/성주 이봉호 씀)
위치: 고령읍 지산리 연소공원 내,대자는 서경보 소자는 이봉호 씀.
다. 비음
여기 조국 광복을 위하여 풍찬노숙(風餐露宿) 중국대륙을 주름 잡다가 병든 몸으로 동아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에 항거하신 독립투사 한 분이 계시니 이 분이 바로 향토 고령이 낳은 유석 남형우 선생이시다. 선생은 일지기 1874년 7월 27일 이 곳 內上洞에서 출생하시니 숙종때 兩館大提學을 지낸 壺谷 선생의 9 세손이요 순조때 고령 현감을 지낸 石耈公의 현손이며 相實公과 吳해사 여사의 차남으로 본관은 의령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강직하며 정의감이 투철하였으며 남을 울리고 웃기는 웅변이 있었다.30세가 되도록 고향에서 한학을 닦으시다가 1908년 뜻한 바 있어현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에 법과에 입학하시고 재학중에 안희제 김동삼 윤병호 서상일 박중화 등 동지와 항일무장 투쟁단체인 대동 청년당을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910년 졸업과 동시에 모교의 전임강사로 피임되고 교수로 재직하면서 1915년 조선국권회복중앙총본부조직,1919년,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차장 1920년,교통총장 1921년,신대한동맹단조직 단주가 됨, 신채호 박용만 이동휘 등 1925년 [다물단]조직 1928년 만주 할빈에서 활동, 교포교육과독립정신고취에 진력 수토병과 과로 1931년 귀향에서 투병생활 1943년 3월13일, 자결함 (생략)
嗚呼라 ! 선생의 일생은 짧았어도 애국정신은 영원한 것이어서 광복된 조국에서는 빛나는 건국포장을 바치고 이 고장 애국인사들은 선생의 높으신 뜻을 길이 받들고자 이 돌을 바치면서 나에게 글을 청하기에 내도한 추모의 정성으로 대강 그날의 행적을 적고 노래 한 장을 바친다.
伽倻山 높푸르고 大伽川 굽이 친다
우리님 구국 貞忠은 山高水長일러라
영남대문리대교수 달성 서경보는 삼가 지어 대자를 쓰고 성주 이봉호는 삼가 소자를 서서 독립투사 유석 남형우 선생 순국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삼가 세운다 1984년 6월
15. 김상덕 사적비의 이가원 시
가 .위치
고령의 주산을 향해 올라가면 주산 어귀에 광복지사 令洲 金尙德의 사적비문에 이가원 박사의 비명이 있다.
나.시비
놈들을 몰아내고 舊疆을 恢復할세
遼雪 三十餘年 氣槪가 壯할시고
조국광복 되었으나 同室操戈 슬프외다
北으로 달린 檻車 한줌 흙이 되단 말가
옛 伽倻 父祖 靑山 淨土가 無恙하니
魂아 돌아오시어 이 곳에 머무소서
1992년 11월 /문학박사 진성 이가원 근찬/청도 김문배 근서/
(2련에서 함차(檻車)란 죄인이 타는 수레)
다. 여담
1) 대가야국성지인 고령일원의 역사와 문학
[三國史記] 卷第34에 高靈郡本大加耶國 自始祖伊珍阿豉王(一云 內珍朱智) 至道設智王 凡十六世 五百二十年 眞興大王侵滅之 以其地爲大加耶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治爐縣本亦火縣 등등의 기록이 있다.
고령은 역사에서 대가야국 왕조문화가 500여 년간 이어온 역사의 장일 뿐만 아니라 선사시대의 설화가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나와 있어 주목되는 곳이다. 고령에는 대가야국성지, 가야시대의 고분군, 악성 우륵의 자취가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등으로 역사적 주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곳이다. 이런 가야국의 역사적 명맥을 현재는 고령의 젊은 문학인들이 뒤에서 받치고 있다는 생각이다.
2) 대가야국성지(大加耶國城址)와 ‘이석기(移石記)’
이 곳은 서기 42년 뇌실주일(腦室主日)이 대가야국을 세워 그 왕조와 문화가 16대 520년 간 번영했던 유서깊은 성터이다.
<移石記>일제는 1939년 4월 당시의 조선 총독 남차랑(南次郞)으로 하여금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고 고대 일본이 대가야국을 지배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함과 아울러 한국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임나 대가야국성지비를 세우게 하였으나 광복 후에 비문속의 임나(任那)와 남차랑(南次郞) 등 문자만 삭제하고 존속해 오다가 독립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의 요청으로 성지비를 역사 전시 자료로 삼기 위하여 1986년 12월 5일 독립기념관으로 옮겼다. 이제 우리 조상의 슬기를 찾고 올바른 민족정신과 국가관을 정립하며 찬란했던 대가야문화를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군민의 뜻을 모아 다시 이 자리에 대가야국성지비(大伽倻國城址碑)를 세웠다. 1990년 12월
대가야국성지비가 있는 그 너머로 고령의 주산이 보인다. 대가야고분군, 주산성, 삼림욕장 그리고 몇 기의 시비가 있다. 고령이라 하면 군으로서는 지역이 좁다하지만 고령은 고대문화의 삼절(철기문화,토기문화, 음악(가야금)문화)을 이루었던 곳으로 기원후 42년부터 520년 간 유지하다가 기원후 562년에 신라 진흥왕에게 병합되었다는 사실, 그러나 이진아시(伊珍阿豉)를 시조로하는 대가야국은 5,6세기에는 후기가야 연맹의 주도세력이 되어 발전해갔다는 대가야국의 도읍지였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지금도 고대문화의 자취가 곳곳에 배여 있고 가야유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양전동 암각화는 농경시대의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암벽화로 말하고 있으나 선사시대 문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아울러 가야대학 구내에 있는 高天原高地碑는 일본황실 선대 고향임을 밝히는 근거라는 주장도 있다. 우리 나라 최초로 확인된 순장묘인 고령 지산동 44호 고분을 발굴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한 돔형의 대가야왕릉전시관이 있다. 사적 제79호인 지산동 고분군은 대소 고분 200여기가 주산의 정상부에 분포되어 있는 등 출토유물을 볼 때 백제와 일본 고대국가와의 빈번한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양질의 고령토를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낸 가야토기가 재현되고 수출까지 하고 있어 옛 명성을 잇고 있다.
3) 고령의 명륜당(明倫堂)
대가야국성지비 옆으로 고령의 향교 명륜당이 있다. 明倫堂은 ‘新安 朱熹書‘라 밝혔다. 명륜당이란 성균관이나 향교에서 교생들에게 강학하던 곳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 어디를 가든지 지방교육기관으로 향교가 있고 향교의 중심에 명륜당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령의 향교 명륜당에는 주희의 친필(?)이 걸려 있다. 주희의 친필인지 모사인지는 물론 아는 바 없다. 그러나 친필이 아닌데 ’신안 주희 서‘라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물론 직감에서다.
주자학을 전공한 한국정신문화원 韓亨祚 교수는 ‘공자는 잠언적이고 맹자는 웅변적이라, 사람이 사는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냐에 대한 유학의 설계도는 보여주지 않았다. 주자학은 그러나 난공불락이었다. 심오한가 싶으면 단순하다고 유혹하고 풀리겠다 싶으면 어느 새 뒤얽혀 있었다. 이를테면 사슴가죽에 쓴 가로왈자 같은 것’이라 했다. 그는 ‘주희에서 정약용으로’라는 학위논문을 마치면서 다시 정약용에서 주희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제시한다. 한 교수는 실학이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면 주자학은 현실적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근대의 실패와 요청 앞에서는 실학이 천양되어야 했지만, 지금 근대의 성취를 바탕으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에서는 단연 주자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자학은 타자와 사회, 사회성과 일상성 위에서 통합하는 과감한 기획을 시도했고 지침과 방법을 제시했다. 개인,사회,자연의 전 층위에서 포괄적으로 응전하고 있는 동양철학은 주자학뿐이라 하였다.
주자학을 거론할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으로서 이에 덧붙일 말은 없다. 한데 최근 어떤 동양철학자는 한국의 근대화는 실패한 근대화라고 지적하고 진정한 한국의 근대화는 민중에 의한 정치혁명을 성공시킨 2004년 4월 25일이라 말한 적이 있다. 주자학을 보는 견해가 다를 수 있는 것이지만 한 교수는 한국의 근대화가 이룬 성과를 토대로 주자학을 보려는 것이라면 진보적인 견해로는 한국의 근대화를 부정하는 단계에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근대화의 시기를 어떻게 규정하든 현 시점에서 주자학이 제시하는 방법에서 찾을 것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러한 주희 즉, 朱子의 친필이 고령 향교의 명륜당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주희란 누구인가. 주희는 송나라 松之의 子로서 자는 元晦 후에 仲晦라 하였고 만년의 호는 회옹(晦翁)이다. 회암(晦菴),자양운곡노인(紫陽雲谷老人),창주병수(滄州病叟) 등 호가 있다. 원적은 무원(婺源), 堂名은 자양서당 혹은 무이정사(武夷精舍),추봉하기를 신국공(信國公),휘국공(徽國公)이라 한다. 유학의 학통은 주렴계, 정명도, 정이천, 나장예, 이연평으로부터 이어 받은 것이지만 주희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 하여 주자학이라 하고 있다.
주자학은 理氣二元論으로 종합할 수 있지만 太極一理로 모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陸九淵의 학을 心學 주희의 유학을 理學이라 하여 구분하고 있다. 주자의 유언을 집록하고 소석(疎釋)한 사람은 송나라에 주재지,여정덕, 명의 구예지,청의 이광지,장백행이 있고 조선에 이황의 朱子書節이 있다 하였다.
주육이동(朱陸異同),주희의 유학과 육구연의 유학은 무엇이 다른가. 윤리학에서는 주희의 先知後行을, 陸學에서는 知行合一을, 本體論에서는 주희의 理氣二元論, 육학에서는 理一元論 등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學人은 마땅히 양자의 이론을 융합하고 조화해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명륜당을 보고 생각해본 것이다.
4) 고령 良田洞 岩刻畵
경북 고령군 고려읍 장기리에 보물 제 605호로 지정된 양전동 암강화가 있다. 이 유적은 높이 3미터, 너비 6미터 정도의 산비탈 절벽에 겹둥근무늬 십자무늬 탈모양 등을 쪼아서 새긴 선사시대의 암벽그림이다. 겹둥근무늬는 세겹인데 모두 4점으로 흔히 해나 달 등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와 함께 탈모양은 17점이나 새겨져 있어서 이 암벽그림의 성격을 짐작케 한다. 탈은 위가 넓은 사다리꼴 얼굴에 사방으로 수염 같은 것을 뻗게 하였으며, 중심에는 선을 그어 아래 위로 구멍을 새겼는데 ,눈.코.입 등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러한 형태는 울주 반구대(蔚州 盤龜臺)나 시베리아 암벽의 탈과는 차이가 있다.
이들 둥근무늬나 탈모양 등은 우리나라 선사 암벽그림을 대표하는 울주 암벽그림에 비해서 그 모양이 상당히 단순화되었고 기법 역시 도식화 내지 형식화 되었으므로 제작 연대는 근처에서 발견되는 석기. 토기와 비슷한 청동기 후기 내지 초기 철기시대로 생각된다. 이것은 사람들이 농경의식때 사용하던 종교적인 뜻을 가진 암벽그림으로 생각되며 우리 나라 선사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6. 악성 樂聖 우륵기념탑건립기와 서수생의 시
가. 답사 : 2002년 12월 9일(월), 영하5도. 경북 고령군 고령읍
나. 樂聖 于勒 先生
그 옛날 千四百餘年庚 前大伽倻는 갔건마는 公의 예술적 聲名은 千秋月과 더불어 不滅의 光彩,公은 大伽耶 嘉實王의 命을 받아 十二絃 伽倻琴을 창제하였다.
十二絃이란 一年 十二月을 상징한 哲學的 근거에서 十二音階를 全用한 科學的 構造이니 현대양악기의 피아노 음계가 全半音을 合하여 十二인 것과 符合함으로써 그 갸륵한 天才的 두뇌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大伽耶가 新羅에게 亡하자 忠州에서 眞興王의 命을 받고서 弟子 階古, 法知, 萬德을 新羅에 보내어 伽倻琴을 傳
承하였다. 公의 十二曲과 三人門徒의 改作 五曲 外에 首足尼文의 烏鼠鶉 三曲에 있었으며 가야금을 大樂에 編入한 뒤에 國中에 널리 퍼져 河臨調嫩(눈)竹調에 共百八十五曲을 算하였다. 忠州 大門山 아래 琴休浦가 있고 江上에 彈琴臺가 있어 于勒의 彈琴處라 일러오는 유적지이지만 이곳 高靈 琴谷이 創琴 作曲하였던 첫 由緖地였다.
우리의 전통정서를 움직여 주는 춘향전 흥부전 등 판소리가 이 가야금 伴奏 속에 오늘도 울러 퍼진다. 겨레의 갸륵한 가얏고 旋律타고 팃기 없는 민족 정서가 생동한다 그래서 이곳 유서지에다 1963년에 민간단체인 于勒紀念碑建立委員會에서 碑身만을 세워 놓은 것을 이번에 郡費 945만원을 들여 드디어 竣工하였다
聖于勒의 創琴 혁공(奕功)을 후세에 길이 빛내기 위하여 한 돌에 새겨 기린다.
푸르른 琴谷 옛터 聖于勒 계신 말이
열 두 줄 가얏고에 大伽情 가득 실어
저 江山 바람등 타고 울려 퍼진 太古音
/1977년 5월/문학박사 달성 白江 徐首生 撰/연석 김보산 서/
17. 악성 난계 박연(蘭溪 朴堧, 1378-1458, 고려 우왕4년-조선세조3년)
2023년 10월 11일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농민문학기념관에서 ‘난계 박연의 재조명’문학포럼이 있었다. 필자가 주제발표자로 나섰으나 당시 나는 소설 <흙의 소리>를 제대로 읽지 않은 상태였다. 원론적인 이야기만 했다. 그러나 Latin 어가 로마의 작은 도시 라티움에서 나왔듯이 영동은 한국음악, 한국문화의 Latium인 것을 <흙의 소리>에서 확인하다고 했다. 2023년 11월 11일 ‘농민의 날’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이동희 장편소설 <흑의 소리>출판기념회를 국악신문사에서 열었다. 당시에도 서평으로 ‘박연의 삶과 꿈 형상’을 이야기했다. 소설을 탐독하고 안병찬 화백의 ‘악성 난계 박연의 영정에 관한 소고’라는 글을 읽고서야 난계의 영정이 고려 공민왕의 영정을 그대로 사용했음을 알게 된다. 안병찬 화백은 난계 영정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특히 삼자 계우(季愚)가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사육신과 함께 처형된 상황에서 구명도생도 어려운 판에 영정제작이 가능할 수는 없을 것이며 특히 영정에 부부가 그려지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이조판서 겸 예문관대제학 난계 박공의 신도비문의 명 (銘)이다.
하늘이 거서를 내리시어 /아악을 열어주셨네/ 진실로 지끅한 사람이 없다면 / 누가 그 학문을 전하리오(天降秬黍 以開雅樂 苟無至人 孰傳其學)
훌륭하신 선생께서 / 후복에서 나시어/ 가슴 속에 경의 형상을 그리니/ 대장이 이에 회복되고 /입으로 생황의 소리를 익히니/ 함지가 이에 이어졌네(顯允先生 起於侯服 胸畵磬形 大章是復 口習笙聲 咸池是續)
곡조가 비로소 바로 잡히니/ 이 누구의 힘인가/ 명 나라 사신이 음을 살피고는 / 감탄읗 나느구나 / 사신이 명을 지어 / 그 업적 영원히 드리우리(宮商始正 是誰之力 天使審音 爲之歎息 史臣作銘 永垂無極)
5. 가사(歌辭)
가. 불우헌 정극인 가사비
1) 위치: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2) 비음
선생은 靈光 丁 氏로 자는 可宅이요 호는 不憂軒 또는 茶軒, 茶角이다. 아버지 진사 坤과 어머니 竹山 安 氏의 둘째 아들로 조선 태종 원년 辛巳(1401) 8월 6일 경기도 광주군 豆毛浦里에서 태어났다.
세종 11년 (29세) 사마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 유생으로 관생들로부터 추앙을 받다. 때에 조정에서는 불도를 숭상하자 선생은 관생들과 더불어 항소하고 임금께 나아가 極諫한한 탓으로 세종의 진노를 사게되어 북방으로 유배되었다가 바로 석방되자 부인 九臯 林 氏 고향인 泰仁 고현내에 내려와 초가삼간을 세워 불우헌이라 게액하고 농사를 짓는 한편 송죽을 가구고 학문에 전념하여후진 교육에 힘쓰다. 文宗 원년(1451) 遺逸로 천거되어 廣興倉 副丞이 되었으며 단종 원년(1453)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부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단종이 손위되자 직을 사임하다.그 동안 십년에 걸쳐 성균관 주부,사헌부 감찰 등 내외직을 역임하다. 예종 때 태인현 훈도로서 사가원 獻納이 되고 저언을 제수하다. 성종 원년(1470) 선생의 나이 70세로 치사하고 고현내로 돌아오니 성종은 선생에게 佐里原從功臣으로 서훈하였다. 성종 2년 (1471) 국정에 관한 4조와 민생의 질고에 고나한 4조를 진상하니 성종은 이를 가납하여 유서를 내리다. 선종 3년(1472)에는 특지로 종삼품직 散官을 내리어 중직대부로 가자되어 거듭 통정대부에 오르다. 또한 전라감사에 하명하여 혜양토록 하니 선생은 성은에 감동되어 不憂軒曲과 短歌 時歌 등을 지었으니 상춘곡도 이 무렵에 이루어지다. 성종 6년(1475)에는 고현 내에 鄕飮酒禮를 마련하고 향약을 시행하니 우리 나라 민간 향약 제도의 연원이 된다. 선생은 80의 고령으로 상경하여 성종께 사은하고 時弊三條를 아뢰어 사주의 은총을 입다. 성종 12년(1481)8월16일 향년 81세로 서거하니 칠보면 무성리 죽사동 은석산 기슭에 안장되다. 인조때 무성서원에 배향되고 정조때에 이르러 자헌대부 예조판서로 추증되다.
賞春曲은 한국가사문학의 효시로 선생의 503 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빛나는 업적을 영원히 기리고져 이에 가사비를 세우다. / 1984년 9월 11일/정읍군수 宋河徹 짓고 씀/
3) - 상춘곡賞春曲 -
紅塵에 뭇친 분네 이애 生涯 엇더고 녯 사 風流미가 미가 天地間 男子 몸이 날만 이 하건마 山林에 뭇쳐 잇서 至樂을 것가 數間茅屋을 碧溪水 앏픠 두고 松竹 鬱鬱裏에 風月主人되여셔라 엇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도라오니 桃花杏花 夕陽裏에 퓌어 잇고 綠楊芳草 細雨中에 프르도다 칼로 아 낸가 붓으로 그려 낸가 造化神功이 物物마다 헌다 수풀에 우 새 春氣 내 계워 소마다 嬌態로다 物我一體어니 興이 다소냐 柴扉에 거러 보고 亭子애 안자보니 逍遙吟詠야 山日이 寂寂 閑中眞味 알 니 업시 호재로다 이바 니웃드라 山水 구경 가자스라 踏靑으란 오 고 浴沂란 來日새 아에 採山고 나조 釣水새 괴어 닉은 술을 葛巾으로 밧타노코 곳나모 가지 것거 수 노코 먹으리라 和風이 건 부러 綠水 건너오니 淸香은 잔에 지고 落紅은 옷새진다 樽中이 뷔엿거 날려 알외여라 小童아려 酒家에 술을 믈어 얼운은막대집고 아 숳을 메고 微吟緩步야 시냇의 호자 안자 明沙 조 믈에 잔 시어 부어 들고 淸流 굽오보니 니 桃花ㅣ로다 武陵이 갓갑도다 져 이 긘 거인고 松間 細路에 杜鵑花 부치들고 峰頭에 급히 올나 구름 소긔 안자 보니 千村萬落이 곳곳이 버러 버러 잇 煙霞日輝 錦繡 재폇 엇그제 검은 들이 봄빗도 有餘샤 功名도 날 우고 富貴도 날 우니 淸風明月 외에 엇던 벗이 잇올고 簞瓢陋巷에 흣튼 헤음 아니 니 아모타 百年行樂이 이만 엇지리
[不憂軒集에서]
4) 무성서원(武城書院)과 현가루(絃歌樓) 창건기(創建記)에 대하여
무성서원에는 ‘무성서원중수기’가 있고 뜰 가운데 무성서원창건비가 있으나 육안으로 판독하기는 어렵다. 사적 166호,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다. 서원은 신라말 유학자인 최치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 태산 (태인)태수를 지낸 최치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성종 15년(1484)에 세워 태산사(泰山祠)라고 불렀는데조선 숙종 22년(1696)에 나라에서 무성서원이란 이름을 내렸다. 현 거물은 현종 10년(1844)에 다시 고친 것으로 고운 선생 외에 신잠, 정극인,송세림,정언충, 김약묵, 김 관 등의 제사를 함께 모시고 있다.사액한 연도는 병자년 11월이다.
武城書院重修記 모두에 말하기를, ‘대현으로서 작은 고을에서 정사에 종사한 것은 편암함을 구하고자한 것은 아니다. 학문과 제반정사에 진력한 것은 곧 군자가 벗을 사귀기 위해 絃歌를 일으키기 위함이라 할 것이니, 대저 군자란 모임의 자리(莞翕,완흡)를 마련해야하는 것인데 동방에서는 최 문창후와 신 영천 두 선생에 의해서다. 두 선생은 다같이 태산현을 다스렸으니 태산현을 무성이라 이름한 것을 어찌 우연이라고만 할 것인가?‘라고 하여 무성이란 서원명은 대현 최고운의 선정에서 나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武城書院絃歌樓創建記‘와 ’絃歌樓重修記‘가 훼손되고 마모되었으나 부분적으로는 독해가 가능한 것도 있다. ’泰山祠‘ 양 기둥에는 ’士林首善 聖朝賜額‘이라 하여 숙종이 내린 사액서원임을 말하고 있다. 무성서워은 대원군 서원철폐령 때에도 철폐를 면하여 가장 오래된 서원 중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무성서원 현가루창건기’에 의하면,樓를 絃歌로 이름한 것은 서원이 무성의 선비로 말미암음이라 자래적인 것이라 하였다. 그것보다는 ‘중수기‘에 보면, 무성서원은 호남에서 가장 먼저 세운 서원인데 고운 최 선생을 주로 향사한 곳으로 여섯 선생을 배향하였다. 선생은 태산을 다스렸다. ’ 군자가 벗을 사귀듯 무성을 다스린 것은 현가(악기와 노래)로써 백성을 교화한 연고로 ’武城‘이라 사액한 것이다.’라고 ‘무성’과 ‘현가’의 관련성을 해명하고 있다. 아울러 ‘각처(남북)의 선비들은 매달 초하루와 춘추향사에 배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론과 익힘을 이 현가루에서 하였고 이 현가루에서 유풍. 교화의 승계에 힘쓰기를 계속하였던 것’이다. 동양에서 왕조시대 정치의 근간이 禮樂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칠보면 무성리 銀石山에 불우헌공 墓表가 있다.
나. 노계蘆溪 시가비
1) 노계 시가비를 찾다
1996년 3월 1일 (금). 3.1절 77돌인 이 날, 날씨는 몹시 찼다.영하 7,8도에 바람조차 세게 불었는데 영천에 이르니 대구 추위는 저리 가라한다. 둘째 아들은 도착하자 추위 탓인지 짜증을 낸다. 영천 터미널에서 새로 놓은 영천교를 지나려니 귀가 어는 것 같고 바람을 동반한 추위는 도시의 추위가 아니다. 영천 창구동 입구에서 지나는 스님을 만나 노계 박인로비가 있는 위치를 물으니 임고에 있다 한다. 영천의 명승지 朝陽閣(瑞世樓)를 둘러보고 지난 날 교직에 있을 때 보낸 수년의 세월이 얼핏 뇌리를 스친다. 모두가 지나간 세월이 아니던가. 서세루에 높이 걸린 역대 한시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영천이 고향인 박삼달 씨가 보내준 서세루 문집을 생각한 것이다. 누각마다 서원마다 유명 시인의 시만 단골처럼 현액되어 있다면 그것도 문제가 아니던가. 버스를 기다려 임고행 버스를 탄 것이다. 영천 임고에서 중화요리로 점심을 먹고 임고서원을 들렀다. 임고서원은 고려 때 정포은 선생이 학문을 하던 곳이나 큰 자물통으로 채어놓아 근접을 막아놓은 터에 뜰 안에 있는 오백년 된 고목만 보고 올 수밖에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다시 임고 우항리로 한 시간 여 걸었다. 임고파출소에 문화재 책자가 있다는 경찰관의 말을 들었지만 현지에 가보기로 한 것이다. 우항리에는 ‘청풍당 유허비’가 있다. 청풍당은 바로 노계 선생의 12 대조가 되는 분이다. 노인정에 들러 찾아온 뜻을 말하니, 노계비는 영천 북안면 도천동에 있으며 향토사학자 박병일 씨를 찾으라는 것이다. 돌쳐 임고 중학교까지 걸어나와 힘 빠져 걷고 있는데 대구 가는 타이탄이 영천까지 태워주겠다 한다. 대구에서 사업을 하는 중앙기계제작소 사장의 배려로 영천읍까지 와서 다시 경주쪽 임포행 버스를 탄 것이다. 생각하면, 아까 스님이 말한 임고는 임포였던 것이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것이었는데 잠시라도 스님 탓을 한 것은 추위 때문이었을까.
영천 북안면 도천 일동까지 버스를 두 번 갈아 타야한다. 박병일 씨를 찾으니 대구로 출타중이다. 박 씨의 손녀 손자를 데리고 동네 안 쪽으로 얼마를 가니 <노계시비>가 서 있다. 반가움이야 말할 수 없는 것, 경북 고속도로변이다. 가비는 우람한 자연석을 세워놓았는데 주변엔 쇠똥,잡목,철조망이 흩어져 있고 냄새 또한 장난이 아니다. 노계비는 동네 앞에 외롭게 우뚝한데 철책은 단단하고 높아 접근을 불허하고 있다. 날이 어두워 사진 몇 장 찍기가 급급하다. 머뭇거리다가 대구 가는 버스가 끊겨 걱정을 하고 있는데 마침 어느 대구 가는 승용차를 탈 수 있었다. 환자를 태우고 병원가는 길이다.
2) - 조홍시가早紅柿歌 -
盤中 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柚子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이 없을새 글로 설워 하노라.
一九八四年 三月 日 慕山 沈載完 씀
3) 청구영언 - 한음이 부탁한 시
이 노래는 어떻게 만든 것인가. 옛날 신해년 봄에 증조 할아버지 한음 재상이 만호 박인로로 하여금 술회케한 노래다. 세대가 오래되고 노래도 전하지 않아 후세에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남몰래 마음으로 감개한 지가 오래 되었다. 후손 윤문은 이 해 경오년 봄에 영천 군수를 제수받았다. 인로는 이 지방의 토백이 사람인데 그 노래는 지금까지 유전되고 있었다. 박인로의 후손 역시 생존하는 바 어느 날 저녁에 몇 사람이 모여 후손 進善(세자시강원 벼슬)으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고 이를 들은 일이 있다. 하물며 후생으로서 외람되게 지팡이에 의지하여 용나루 산수를 밟음에랴. 서러운 마음이 더욱 격하여 눈물이 저절로 쏟아진다. 장가 三曲과 단가 四章을 함께 새기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겨우 널리 전하게 되었다. 이해 3월 3일이다.(청구영언,진본)
시비건립 찬조자명단을 보면, 비석제공에 김지평, 대지제공 김진삼,장비쟤원 육군제3사관학교장 기타 찬조자로 학계에서는 조윤제,심재완,김창규,조동일, 배학보 등의 면면이 보인다.
향토사학자며 노계 선생의 12대 손인 박병일 씨는 영천군 북안면 도천리 459번지에 주소를 두고 있다. 1996년 4월 7일 두 번 째 영천 쪽으로 차를 몰았다. 영천 조양각에 들러 전날 보지 못했던 백신애 시비와 작사가 왕평 이응호님을 위해 지었다는 ‘황성옛터’ 가비를 보고 영천문화원 김종식 총무국장의 주선으로 <영천문학> 창간호에서 백신애 특집을 복사한 것이다. 영천읍에서 50여리 떨어진 영천 북안면 도천리의 <노계가비>를 재차 찾은 것이다. 가비 옆으로 道溪書院이 있고 마루 안 쪽에 九仞堂이란 액자가 있다.
4) 노계가·비蘆溪歌.碑
白首에 訪水尋山 太晩줄 알건마 平生素志를 벱고야 말랴 너겨 赤鼠三春에 春服을 새로 닙고 竹杖芒鞋로 蘆溪 깁흔 골에 혀 마참 차오니 第一江山이 님 업시 려다 古往今來에 幽人處士들이 만히도 잇것마 天怪地秘야 를 주랴 남겨다 躊躇良久타가 夕陽이 거읜 적의 섭彼高岡야 四隅로 도라보니 玄武朱雀과 左右龍虎도 그린이 잣고야
山脈친 아 藏風向陽 靑蘿 허혀드러 數椽蝸室을 背山臨流야 五柳邊에 디어두고 斷崖千尺이 가던 龍이 머무 江頭에 둘렷거늘 草草亭 두 間을 구름구름 띈 긴 솔 아래 바휘 디켜 여러내니 千態萬象이 아마도 기이코야 峰巒은 秀麗야 富春山이 야 잇고 流水 盤回야 七里灘이 되야거든 十里明沙 三月 눈이 되엿다 이 湖山形勝은 견졸 뇌야 업
/이상보 근서/ 1980년 11월 일 립/ 전국국어국문학시가비건립동호회 김동욱
5) 박노계집 판본朴蘆溪集板本
경북 유형문화재 제 68호,
소재지: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천동
이것은 조선 仁祖때의 시인 朴仁老의 文集인 蘆溪集을 간행하기 의해 만든 板本이다.
박인로(1561-1642)의 자는 德翁,호는 蘆溪, 無何翁, 본관은 밀양이며 영천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詩文에 뛰어났으며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水軍으로 종군 선전관을 거쳐 萬戶를 지냈다. 도학과 애국, 자연을 사랑하는 것을 사상적 바탕으로 하여 전쟁 중에도 詩情과 救國忠情 넘치는 작품을 많이 남겼고, 가사문학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노계집은 한시문과 가사 시조 들을 수록한 3권 2책으로 판본 수량은 55매이다.
그 중에서 특히 太平詞, 莎堤曲, 陋港詞, 船上嘆, 獨樂堂 영남가, 노계가 등 7편의 가사와 오륜가, 조홍감 등 68수의 시조가 지금까지 전해져 국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다. 고산 윤선도 가사비
1) 가사: - 어부사시사 -
우거시 벅구기가 프론거시 버들숩가 이어라이어라
漁村 두어집이 속의 나락들락 至匊怱至匊怱
於어 思 臥와 말가기픈소희온갇고기 뛰논다 (春)
夕陽이 됴타마 黃황昏혼이 갓갑거다 셰여라
셰여라 바희우희에 구븐길 솔아래 빗겨잇다
至匊怱 至匊怱 於思臥 碧벽樹슈鶯聲셩이
골골이 들리다 (夏)
水슈國국의 히드니 고기마다 져읻다
닫드러라 닫드러라 萬만頃경澄딩波파의 슬지容용與여자
至匊怱至匊怱 於思臥 人인間간을도라보니머도록더윽됴타 (秋)
외로운 솔혼자어이싁싁고여라
여라 머흔구룸 恨티마라 世셰上샹을 리온다
至匊怱至匊怱於思臥波파浪랑聲셩을厭염티마라
塵딘喧훤을막도다 (冬)
(漁父四時詞 中 春夏秋冬 一首 씩)
2) 고산 선생 詩碑記
孤山 先生 詩碑를 세우기 爲하여 1977年 10月 14日 코리아나호텔에서 뜻을 같이한 學界重鎭들이 發起準備委員會를 열고 全國을 通하여 發起人을 選出한 뒤 그해 12月 19日에 發起人 百餘人士가 한국일보사에 모여 孤山 尹善道先生詩碑建立委員會를 結成하였다. 建立地는 南山으로 하고 詩는 五友歌로 정하였으나 서울市의 慫慂에 의하여 서울대공원으로 변경하되 공원의 공사가 완성되는 대로 진행하기로 하였다 때마침 先生의 播馥地인 海南 蓮洞에 政府에서 遺蹟을 補修하고 유물관인 忠憲閣을 세웠다. 이제 이 곳에 먼저 또 하나의 詩碑를 세우기로 하여 漁父四時詞 중에서 春夏秋冬 각기 一首를 골라 碑面에 새기고 그 陰에 簡略한 詩譜를 붙이기로 하였으니 이 漁父四時詞는 先生의 수많은 歌詞 中에 白眉的인 作品으로서 聾巖, 退溪의 遺響을 이어받아 새로운 腔調(강조- 노래)를 창조하였으며 韓中歷代諸家의 漁父詞를 集成하였을 뿐 아니라 그 淸雅하고도 興겨운 가락은 愛國的인 思想에 의한 民族의 멋이 넘쳐 흘러내린다. 工事가 장차 끝날 제 이 小碑를 세워 實事를 記錄한다.
3) 고산 윤선도 선생 詩譜 (고시조 참조) )
라. 퇴석 김인겸 가비
1) 답사:2005년 3월31일 ,위치:공주시 공주교 북쪽 들머리
2) - 일동장류가日東壯遊歌 -
쳔신만고하고 십생구사하야
장하고 이상하고 무섭고 놀나오며
붓그럽고 통분하며 우섭고 다행하며
믜오며 아쳐롭고 간사하고 사오납고
고이고 궁조하며 참혹하고 불상하며
비하고 긔특하며 뫼히하고 노하오며
해하고 깃븐일과 지루하고 난감한일
갓가지로 조차적어 수년만의 도라온 일
자손을 뵈자하고 가사를 지어내니
만의 하나 긔록하되 지루하고 황잡하니
보시되 웃지말고 좌석이나 하옵소셔
(일부 글자가 독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음)
3) 비음 -[동사록東槎錄],[동사수창록東槎酬唱錄]의 저자
선생의 휘는 인겸(仁謙)이며 자는 사안(士安) 호는 퇴석(退石)이다. 안동 김 씨 15세손 청음(청음) 상헌(상헌)님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昌復 어머니는 서주의 딸 인동 장씨시다. 단군기원 4040년에 나셔서 4105년 6월 18일에 졸하셨다. 47세에 진사 57세에 계미통신사행의 三방서기로 일본을 다녀왔다. 뒤에 지평(砥平)현감을 지냈다. 저술로는 한문 동사록(東槎錄) 동사수창록(東槎酬唱錄)과 가사 일동장유가가 있다. 선생은 성품이 곧고 굳으며 의협심이 강하고 행실은 맑고 깨끗하였다.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고 멋과 익살을 즐긴 풍류객이셨다. 한 하늘 아래서 같이 살 수 없는 일본인들에게 명문장으로 국위를 떨치고 국문학사상 불후의 명작 일동장유가를 지은신 지 225년이 되는 오늘 선생의 인품과 유운(遺韻)을 사모하는 후진들이 가가자의 정성을 모아 생시의 선생의 옷자락 펄럭이며 건너다니시던 이 오얏나루 언덕에 조그만 한 덩이 돌을 세워 선생의 자취를 다음과 같이 명을 지어 기록한다.
비단 가람 유유한데 물은 돌에 빛이 맑아
곧은 성품 밝은 행실 불의 부정 못보셨네
아름다운 글재주는 동해 건너 드날리어
임진왜란 그 큰 죄를 한 붓으로 다스렸네
이국에서 만난 표민(漂民) 지친처럼 보살피고
문필보국 마친 뒤엔 원님되어 제민(濟民)했네
가는 세월 멀어지니 퇴석리가 무릉동(武陵洞)돼
아는 사람 없건마는 끼친 향 낸 피고 피네
단기 4322년 (1989) 7월 일/ 후학 희당 최강현은 짓고/모산 심재완은 쓰다
4) -일동장류가 -실학자 김인겸의 장편 기행문
조선조 후기의 실학사상은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갖가지 사회적 모순에 직면하면서 그 해결책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개혁사상이었다. 이러한 실학의 시기를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18세기 전반으로 경세치용학파를 말한다. 즉 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이어지는 계보였다. 이 시기는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하는 중농주의,제도상의 개혁을 특징으로 한다. 제2기는 18세기 후반의 이용후생학파로 류수원-홍대용-박지원-박제가-이덕무 등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박지원을 중심으로 부국책으로 상공업을 일으켜야한다고 주장했다. 제3기는 19 세기 전반의 실사구시학파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실학을 돕기 위해서 필요한 이론연구를 담당했던 것으로 들어난다. 즉 김정희의 금석학,경서, 전고의 고증을 주로하는 학파였다. 이들은 청의 고증학을 도입했기 때문에 북학파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조선조 실학파를 구태여 드는 것은 본저에 이미 홍대용,김정희, 이익, 정약용 등 많은 실학자들의 문학비를 소개하였던 연유로 전반적인 관계 속에서 파악할 것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일동장류가>를 지은 김인겸은 연대로 보아서 제2기 이용후생파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김인겸의 기행문은 정음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의 과학적 치밀성과 근대적 국학의식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현존 기행가사 중 국외기행가사는 중국을 여행한 <연행가>와 일본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쓴 <일동장류가> 등 두 편 뿐이다. 국내 기행가사는 대개가 양반들의 귀양살이를 다운 <북천가>와 <만언사>등 유배문학이 있을 뿐이다.
어쨌든 일본측의 수교요구로 영조 39년 계미(1763) 8월에 통신사를 차출하여 500명을 일행으로 일본으로 가는데 이를 ‘계미통신사’라 부른다 일정은 영조 39년에 8월 3일에 한성을 출발하여 장장 11개월여를 머물다 돌아오는 장기여행이었다. 2행 1구로 되어 있는 ‘일동장류가’는 일 천여구로 되었다 한다. 김인겸의 일동장류가를 문학사에서 특별히 다루었던 장덕순은 <장편기행문이나 지루하지 않은 것은 도처에 기지와 해학을 삽입하였고 이국의 진경과 암흑면의 이면상을 놓치지 않고 묘사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비문에서 三房서기란, 당시 정사에 조엄,부사에 이인배,종사관에 김상익,제술관에 남옥 그리고 서기에 세 사람이 있는데 성대중,원중거,김인겸 등이었다.
김인겸은 만이蠻夷의 풍속이나 예절이라도 산업을 일으켜 이용후생을 할 수 있는 진기한 사물과 제도가 있을 경우 소상히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한다. 계미통신사가 일본을 갈 당시 전국에서 흉년이 들어 기민이 속출하고 민심이 흉흉한 시기였음을 감안할 때 김인겸은 제민의식이 철저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기행문 중에 왜녀들이 젖을 내놓고 유혹하는 장면,일본에 대한 적개심 또는 일본의 야만적 풍습에 대한 비판을 볼 수 있지만 일기 중에 ‘효자토란(孝子土蘭 ),수긔(水機), 배다리(舟橋), 물방아(물레방아),길(도로) 등에 관하여 소상히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남진 있난 겨집들은 까맣게 이에 칠하고 뒤흐로 띄를 매고,
과부 처녀 간나희난 앞으로 띄를 매고 이에 칠 아녔고나,
유부녀는 이에 까만 칠을 한다는 일본 풍습을 알 수 있다.
마. 윤희순의 <안사람 의병가>
1)답사 : 2005년 4월 위치 : 천안시 독립기념관 내
2) <안사람 의병가>
- 여성 의병장 윤희순 -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치면/ 왜놈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있나/ 우리도 나가/ 의병하러 나가 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禽獸)에게 붙잡히면/ 왜놈 시정(施政)쏘냐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3) 윤희순 여성의병장 약전
윤희순 선생은 1860년 서울에서 해주 윤씨 익상의 따님으로 태어나 16세에 고흥 류씨홍석의 장남 제원과 결혼하였다. 1895년 시아버지와 남편 등이 을미의병투쟁에 나서자 선생은 <안사람의병가><병정가>등을 지어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고 <왜놈대장 보거라> 등의 경고문과 성토문으로 일제만행을 규탄하였다. 1907 정미의병투쟁때는 군자금을 거두고 여자의병을 조직, 화승총 화약을 만드는 것을 돕는 등 의병활동을 하엿다. 국권을 빼앗기가 1911년 가족과 중국으로 망명해 환인현에서 ㄷ창학교 분교인 노학당을 운영하여며 항일인재를 기르고 세 아들을 독립운동에 투신케하였다. 대한 독립단을 조직해 활동하던 장남 돈상이 일본 경찰에 잡혀 고문으로 순국하자 울분으로 식음을 전폐한지 11일만에 1935년 8월 1일 서거하였다. 중국 요녕성 해성시 묘둔(에 안장4년 10월 20일 정부 후원으로 고국에 봉환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의치: 천안시 천안독립기념관 내)
6. 민 요
가. 밀양 아리랑 민요비
1) 소재지: 경남 밀양시 내일동 영남루 부근
2) - 밀양 아리랑 -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 섣달 꽃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정든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1995년 8월 15일
백윤길 회장 외 회원일동 세우고/청아 신용옥 글씨를 쓰다
3) 밀양 영남루嶺南樓를 찾다
보물 제147호. 이 건물은 新羅 景德王(재위 742-765)때 이 자리에 세워졌던 嶺南寺가 廢寺가 되고 흔적만 남게 되자 고려 恭愍王 14년 (1365) 당시 밀양군수 金 湊가 신축하여 절 이름을 따서 嶺南樓라 한 것이다. 조선 世祖 5년 (1459)에 밀양부사 朴世煦(후)가 중건하였으나 壬辰倭亂때 兵火로 타버렸다. 그 뒤 仁祖 15년(1637)에 밀양부사 沈 興이 다시 중건하였고 현종 8년 (18420에 실화로 불에 탄 것을 李寅在가 밀양부사로 부임하여 현종10년 (1844)다시 개창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본루는 조선 후반기의 우리 나라 건축미를 대표할만한 국내 제일의 누각이다. 부속 건물로는 凌波堂과 枕流閣의 兩 翼樓를 비롯하여 四柱門,一柱門,客舍인 天眞宮이 있으며 뜰에는 유명한 石花가 깔려 있다.
영남루에는 강성여화,강좌웅부,교남명루 등의 명필이 있으며 이은상이 지은 독립의열사숭모비가 있다.조선유림들의 파리장서비가 있어 일제하 유림들의 곧은 뜻을 읽게하고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밀양박물관이 있고 사명대사가 밀양출신이라 역시 동상이 서 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서화가 전시되어 있다. 곳곳에 사진 촬영금지 한다는 말이 붙어 있다. 한국은 국내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한다는 말이 수없이 붙어 있어 가히 <금지문화>천국임을 알 수 있다. 서화를 보호하기 위해 촬영을 금한다는 뜻인데 지나치게 문화권위주의에 젖어 있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의식문제가 아닌가 한다. 국가에서도 귀중한 문화재를 제대로 보호하지도 관심도 소홀히 하면서 서민들이 드나드는 박물관이나 예술관 미술관 도서관 유물관 등에서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숨겨놓고 보호한다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는 있다. 중국의 고구려역사도 무관심 일변도로 치닫다가 결국은 당한 것이 아니던가. 중국역사 박물관에 가보면 십수 년 전에 이미 고구려역사 분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충무공 역사까지도 중국속국의 장군으로 대대적으로 내용을 밝히고 있는데 말이다. 국가기밀도 줄줄 새고 있는 나라에서 출입금지.촬영금지,접근금지가 왜 그리 많은 나라인지 금지문화를 융통성 있게 했으면 하는 것이솔직한 마음인 것이다. 무슨 전시회를 한다해 놓고 막상 가면 중요한 대목에서는 출입금지가 붙어 있고 모 대학도서관에서는 개교기념행사때는 주민에게 도서관을 개방한다고 잔뜩 선전해놓고는 며칠 후에 가면 출입을 제한하는 것은 예사이고 박물관의 전시는 입장료는 받으면서 중요한 내용은 공개하지 않는 것이다. 선조유물을 보호하고 있는 문화재 유물각과 유사한 문화재소장자들은 내용을 공개하여 후학들의 관심을 도모하기보다는 껴안고 내놓지 않으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교제비가 필요로 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박물관을 지나 밀량 阿랑祠 곡절많은 계단을 내려오면서 생각해본 것이다.
4) 아랑전설의 곳 아랑각
경남 문화재자료 제26호,소재지: 경남 밀양시 내일동 영남루 구내, 유천강을 내려다보며 산비탈 가파른 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아랑각은 조선조 명종(1545-1567)때 이 고을 부사의 딸로서 성은 윤 씨 이름은 동옥(혹은 정옥)이며 재화와 자색이 빼어난 처녀로,하루저녁 유모의 꾀임에 빠져 영남루 달구경을 갔다가 괴한의 핍박을 받고 죽음으로써 순결을 지켜 처녀의 귀감을 보여준 아랑전설의 주인공이다. 그 후 고을 사람들이 아랑의 죽음을 슬퍼하고 정순을 기리어 사당을 세워 혼백을 위로했다고 하나 그 창건연대와 흥폐사실은 미상이다.
1930년에 군민들의 많은 성금으로 영남루를 중수하면서 그 여재로 “정순 아랑지비”라는 비석과 함께 각을 지어 아랑각이라 했으며, 지금의 아랑사는 1965년에 뜻있는 시민들의 힘을 모아 낡은 비각을 헐고 맛배지붕의 삼칸 사당과 삼문의 정문으로된 현 건물들이 중창된 것이다.
사당내부에는 아랑의 영정과 위판을 봉안하였는데 영정은 한때 친일작가라 하여 배척받았던 이당(以堂) 김은호 金殷鎬가 그린 것이다. 매년 “아랑제” 행사를 통하여 선발된 규수들의 주관으로 제향을 받들고 있으며 대밭속 아랑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곳에는 지금도 표석이 남아 있다. 아랑의 높은 정절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누구도 머리 숙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도록 높이 앉아 있다. 여인의 정조를 생명으로 지킨 아랑 처녀, 지금도 유천강을 흐르는 잔잔한 물결 바라보며 자신의 비운을 달래고 있다.
나. 전봉준의-새야새야파랑새야-
1)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간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보리
2) 전북지방 문학 찾기
전라북도 일원의 시문학비를 찾았다. 2004년 1월 5-7일 2박 3일의 일정이다.
2004년 甲申年,주변에서는 ‘해돋이’를 구경간다고 들떠 있다. 한 해를 시작하는 첫날,돋는 해를 본다는 것은 그해의 행운과 건강과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희망에 찬 생각에서다.
동해로 경주 어디로 하다못해 앞산 어디로 해돋이를 보러가는 사람들,언제는 적극적으로 밤을 새우며 남들 가는 해돋이를 보러 달려간 적이 있었던가마는 해돋이 있다는 새해 아침에도 늦잠을 잔 것이다. 그런데, 새해 1월 2일 (금) 차남을 따라 마산엘 갔고 바다가에서 회를 먹다 전부지방 답사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1월 5일 마산행 아침 6시30분 차를 타고 1 시간만에 마산에 도착한 것이다. 30분 정도 시간이 절약된 것이다. 마산에서 중재 성호와 합류하여 가장 가까운 남원을 향한 것인데 중도에서 송흥록.박초월 생가터 표지를 보고 차를 돌린다. 말로만 듣던 동편제의 산실인 송흥록 명창과 박초월 명창의 생가터를 보고 잘 정비된 손질도 그러하거니와 거기서 울리는 예술적인 옛 자취를 본다는 감회에서 대구와는 다른 고장임을 확인하는 순간을 맛본 것이다. 무대에서 창자와 고수가 창을 시연하는 장면에서 삶의 여유를 찾은 듯 하다. 조선사회의 엄격한 신분제도에도 오직 전통예술을 체계화하고 보편화하는데 일생을 바쳤을 송흥록 명창과 박초월 명창의 위대성을 확인하는 순간,필자의 때늦은 방문이 얼마나 무지하고 편견에 매어 살았던가 하는 생각이다. 관리인은 상식적인 설명을 하면서 이 일대가 조선조 이태조의 황산대첩지였음을 듣고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가 보통의 마을이 아니라 예술적인 혼과 피끓는 위국충정의 곳임을 느끼고 돌아선 것이다. 송흥록의 생가는 초가지붕에다 돌담으로 울타리를 한 전형적인 농가의 모습이다. 그런 곳에서 민족의 소리를 찾아내고 서민의 아픔을 창으로 하늘에 울린 명창을 예사로 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장수군에서는 논개생가,논개사당, 변영로시비, 정인승생가와 문학비, 장수향교를 찾았다.
무주군으로 달려 나제통문 휴게소에 있는 문학평론가 김환태 문학비를, 정읍시에서 일박하고 정읍시의 정읍사가비,칠보면에 있는 정극인의 상춘가비와 묘지,최고운 선생을 모신 무성서원 일원, 황토현에 잇는 전봉준의 동학혁명기념비를 찾았다.고창군의 인촌 김성수 생가,미당 서정주문학관,신재효 생가와 가비와 고창 판소리박물과을 보고 부안군으로 가서 신석정고택,매창공원의 매창시비, 문화원 김민성 시인 찾기, 변산반도로 가서 신석정 시비를 보고 변산온천리조트에서 일박을 한다. 1월 7일에는 군산시(진포)로 달려가서 월명공원의 채만식문학비,<탁류>배경지 답사를 위해 군산시내로 가서 고태수가 있었던 조선은행,내항,세관,미두장 군산부두 창고와 들다리,군산 학생도서관, 고 은시인의 생가, 채만식 생가와 묘지를 보고 다시 익산시로 옮겼다. 익산에서는 여산면 초산리의 이병기 생가와 시비, 묘 등을 보고 일정을 마무리한다.
다. 공갈못 노래비
1) 연밥 따는 노래 -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다는 저 처자야
연밥 줄밥 내 따줄께/이내 품에 잠자 주소
잠자기는 어렵잖소/연밥 따기 늦어 가오
상주 함창 공갈못에/연밥 따는 저 큰 아가
연밥 줄밤 내 따 줌세/백년 언약 맺어 다오
백년 언약 어렵잖소/ 연밥 따기 늦어 간다.
2) 상맥회에서 1988년 세운 ‘공갈못 노래비’는 ‘향토를 사랑하는 우리 상맥인은 향토문화의 전승과 보존을 휘해 옛 터에 기념비를 세운다‘고 하였다.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것은 시기가 늦으면 따지 못하는 일이다. 임과 사랑하고 언약맺는 일보다 시기를 놓칠 수 없는 연밥이 더 중요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생계와 관련되는 일이리라. 채연요(採蓮謠)인 공갈못 노래는 공갈못 형성 연혁과 관련되어 있다. 현 상주시 공검면 양정리 199번지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축조의 역사는 삼한 - 고령 가야국 시대로 소급된다. 당시에는 영남 제일의 인공 호수였던 것이다.1195년 상주 可錄 崔 正 汾(빈)이 중수한 것으로 규모는 못의 둘레가 약 8.8 킬로미터 못의 깊이는 약 6미터 였다 한다. 그 후 고종 광무연간에 한성부윤 이채연이 축소하고 1959년 농경지대화되어 2 천여 평으로 축소되었다 한다.
‘공갈못’ 명칭은 일반 사회에서 들을 수 있는 ‘공갈’친다는 어감과 다르지 않아 왜 공갈못이야 하는 의문을 낳는다. 공갈못 명칭은 공식적인 안내에 의하면, 功建堤, 空骨池, 公卷堤, 恭儉池, 공갈못 등이다. <‘공갈못’의 말 뿌리>에 대해서는 한글학회 경북지회의 [한글경북] 창간호(1979년 6월 30일) 를 참고할 수 있다. (비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3) 비음 : 공갈못은 삼한시대에 축조된 못으로 고려사에는 명종 25년(1195)에 최정빈이 수축하였고 증보문헌비고에는 못둑이 880보 못둘레가 22리로 기록되어 있다. 호반의 크기나 아름답기로도 내력이 깊은 못이다. 공갈이란 아이를 넣고 둑을 쌓았다는 매아설화(埋兒說話)에 의해 이름이 붙여진 공갈못은 쌍룡연문의 전설이 있고 용갈이로 풍흉년을 점치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많은 영지로 알려졌다.
1958년 함성토지개량조합에서 五台貯水池를 신설하자 못의 기능을 잃게되어 1962년 농토로 바꾸어서 식량증산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못은 없어졌으나 우리나라 모심기 노래의 백미인 연밥 따는 노래의 애잔하고 구성진 가락은 오늘에 이어져서 애환을 달래주고 있다.옛 자취와 정취가 깃든 이 곳에 이 글을 새겨 길이 전하고자 한다.
라. 거문도와 ‘거문도 뱃노래’
1) - 거문도 뱃노래 -
거문도 뱃노래는 ‘다섯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사소리 - 고기를 잡으러 떠나기 전 고사를 지내는 소리
*놋소리 - 어장터로 노를 저어 가며 부르는 소리
*월래소리 - 그물을 당기며 부르는 소리
*가래소리 - 고기를 배에 퍼 실으면서 부르는 소리
*썰소리 - 만선을 하여 돌아오면서 부르는 소리
2)-가.고사소리(고사를 지내면서 부르는 주문과 노래)
주문 : 서천군 사마석 해동조선 전라좌도 관은 여수시 면은 삼산면 앉은 좌천 ㅇ ㅇ 리 ㅇ 살 ㅇ ㅇ 선왕님께 구축발언은 다름이 아니오라 악살 희살 모진놈의 관제구설 해담욕설 우환자작 근심수를 일시소멸 시켜 주시옵고 돛대 위에 봉기 꼽고 봉기 위에 연화 받게 점지하여 주옵소서.
노래 :
헌원씨 배를 무어 이제불통 헌 연후에 후생이 본을 받어 다 각기 위업허니 막대한 공이 아니냐
하우씨 구년치수 배를 타고 다스릴적 오복의 정한 음식 구주로 돌아들고 오자서(伍子胥)건네주고 분오(奔吳)할제 노가(櫓柯)로 건네주고 해성(垓城)에 패한 장수 오강으로 돌라들어 우선 대지 건네주고 공명의 딸 조화는 동남풍 빌어내고 조조의 백만대병 중류로 화공허니 배 아니면 어이하리
舟謠謠而 輕揚하니 도연명의 귀거래 海闊허니 고범주라 張翰의 江東去요 임술지 추칠월의 소동파 놀아 있고 지국총총 어서와 허니
고예승류무정거(고예승류무정거)난 어부의 즐거움 계도난이 (계도난이) 화장포난 오희월녀 채련주요 타고발선(타고발선) 허고보니 어선이 아니냐
우리 선원 열세명 어업으로 위업허니 경세 우 경년 (경세우경년) 표백설한(표백설한)을 다니다가 오늘날 이 바다에 고사를 드리오니
동래신 청용이며 남해신 적용이며 서해신 백용이며 북해신 흑용이며 중앙신 황용이며 강한지장(江漢之將)과 천택지군(川澤之君)이니 하감하여 주옵소서.
3) - 나. ‘썰소리’(만선이 되어 돌아오면서 부르는 소리)
(메기는 소리)에헤- 어이기여/우리 쥔네 마누라/ 궁둥이 잘 친다//에헤 어이기여/ 에-이 멸치 잡아 보리풀고/쌀팔아 자식들 먹고/ 우리 집에 웃음꽃 피네//에헤 어이기여/에-어기어 다 들어오네/에-돌아온다 봉기 시라/에- 궁창 마지 소리 맞소/에헤- 어이기여
(받는 소리)에헤 -어이기여/에-헤 이에/에-에-에//에헤 -어이기여//
거문도 뱃노래는 어민들이 고기를 잡으러 나가면서 또는 어장을 하면서 만선이 되어 돌아올 때 흥겹게 부르는 구전 노동요로 400여 년의 전통을 가진 노래다. 현재 전남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거문도 서도에 거문도 뱃노래 전수관이 있을 정도로 중요시하고 있다. 앞소리는 모가비(인부나 광대 같은 낮은 牌의 우두머리-필자)가 매기고 뒷소리는 젓꾼들이 한다. 그 외에 거문도에는 ‘거문도 술비소리’가 있다. ‘술비소리’는 칡덩굴이나 짚으로 밧줄을 꼬면서 노동의 고달픔을 잊으며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부른 노동요였다. 칡덩굴이나 짚을 이어주면서 부르는 <에이야라 술비야>와 흥겹게 부르는 <에헤야 술비> 등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갈매기와 같이 자유롭고 마음껏 날 수 있는 바다와 하늘이 있는 거문도, 발레리의 ‘얼마나 순수한 솜씨로 다듬어 내는가‘라는 그의 묘비가 이 거문도 해변에 있을 법한 분위기, 다만 조선의 개항초기에 이곳을 군함으로 드밀었던 영국군의 묘 수기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거문도에는 1시간 거리에 白島라는 39개의 돌섬이 절경으로 앉아 있으니 이광수의 [무정]에 나오는 영채의 아버지 박 진사(박대령)가 이 곳 거문도에서 사형을 당했다니 거문도는 이래저래 근대사의 질곡에서 외면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마. 흥타령 碑
1) 답사:2005년 4월1일 ,천안시 천안삼거리공원
2) - 흥타령 -
천안삼거리 능수버들은 흥
제멋에 겨워서 흥
축늘어 졌구나 흥
에루화 좋다 흥
성화가 났구나 흥
3) 天安三巨里
천안시의 천안삼거리는 옛날부터 三南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로다. 따라서 과객들이 이 천안에서 묵거나 쉬어가는 곳으로 여관업이 성했고 선비와 기생과의 사랑이야기 등이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전라도 고부 고을의 선비 박현수와 기생 능소와의 사랑에 관한 전설은 천안삼거리에 얽힌 이야기다. 하여 천안삼거리는 흥타령으로 알려진 민요의 고장이다. 위의 ‘흥타령 비’는 그 같은 내용을 알려준다.
天安 三巨里
天安 三巨里 흥타령민요의 고장
天安 地安 人自安이라 일컬어
하늘 아래 가장 평안한 곳
그 순후한 인정에 넘치는 삼남의 길목
한 그루의 능수버들 박현수 선비와
능소 아가씨의 애련한 속삭임이
길손의 걸음을 즐겁게 한다
천년 그 묵은 향기속에 희망찬
내일을 여는 天安人의 그 웅비의
나래를 편다
바. 문경새재 민요비
문경 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링쇼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 애기 손질에 놀아난다
문경 새재 넘어 갈 제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문경새재 민요비는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에 있음,조령 제2관문과 제3관문 사이)
사. 구전 민요 <양산가>비
1)위치 : 충북 영동 송호리 국민관광지,문향의 숲
2) 가비(구전)
양산 수풀 속에 무구리 장게가 논다
장게가 논다 장게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양산 백사장에 금자라가 논다
자라가 논다 자라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양산 창포장에 잉어가 논다
잉어가 논다 잉어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세
난들가서 배잡아 타고
모링이 돌아서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3) 陽山歌한시)
敵國爲封逐 荐食我邊疆 赳赳花郞徒 報國心靡遑 荷戈訣妻子
欶泉啖糗粮 賊人夜劘壘 毅魂飛劍鋩 回首陽山雲 矗矗虹蜺光
哀哉四丈夫 終是北方强 千秋爲鬼雄 相與歆椒漿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편 소재-
적국위봉축 천식아변강 규규화랑도 보국심미황 하과결처자 삭천담구량
적인야마루 의혼비검망 회수양산운 촉촉홍예광 애재사장부 종시북방강
천추위귀웅 상여흠초장
길이길이 명복을 누리옵소서 천추에 빛나는 호국의 영령
북족 원수칼 끝에 쓰러지다니 오호라 슬프다 우리 대장부
타오르는 불기둥 살벌하고나 돌이켜 바라보니 양산의 구름
장하도다 나라 위해 목숨바쳤네 무찌르던 어느 날 놈들 칼날에
풍찬노숙 싸움 터로다 창을 메고 내 집을 멀리 떠나 와
나라 위한 충정 어이 참으리 용맹스러운 화랑의 무리
나의 조국을 침노하나뇨 도야지 같은 원수의 나라
원문 번역문
4) 비음
비봉산과 천태산의 은은한 자락 아래 펼져진 양산벌은 역사의 애환과 함께 유유히 흐르는 금강물을 모금하며 陽山 八景 중의 으뜸임을 자랑하고 있다. 더욱이 이곳은 삼국시대 때 신라와 백제와의 끊임없는 격전지로서 신라 태종 무열왕(655) 2년 백제와의 싸움에서 순국하신 김흠운 장군의 죽음을 애도한 “양산가”의 발생지이다.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당시 전세가 위태함에 이르러 부하 장수가 우선 몸을 피할 것을 애원하였으나 장군은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맞겼거늘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하랴.‘ 말씀하시며 화랑정신으로 끝까지 용전하다 최후를 마치셨다. 이에 비 전면에 장군을 추모한 오언 한시를 새기고 배면엔 원문 번역과 이 지방에서 구전되어 오는 민요를 음각하였다. 우리 민족의 영원한 숨결과 항전을 재조명하는 뜻에서 비의 형태를 북의 형상으로 올려 선조들의 우렁찬 함성소리를 되올려 보며 국민관광지 사업의 일환으로 이 노래비를 세우는 바이다.
영동 군수
7. 판소리
가. 남원의 두 명창 - 동편제
1) 가왕 송흥록
소재지는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이다.
이 곳은 가왕 송흥록(宋興祿)과 국창 박초월(朴初月)이 살았던 곳으로 10가구의 주민을 이주하고 그 시대의 초가형태로 2000년 7월 28일 복원하였다.
송흥록(1780년경-1863년경)은 조선 정조 초기 권삼득의 고수송첨지의 아들로 태어나 12세에 백운산 월광선사에게 공부하였고, 철종 10년 (1859) 정 3품 통정대부 벼슬에 제수된 조선말기 순조.헌종.철종대에 걸친 명창으로 계면조.진양조의 완성,메나리조 도입과 모든 가사를 집대성하여 판소리의 중시조라 불리며 가왕 칭호를 받았다. 춘향가의 옥중가 중에서 귀곡성(鬼哭聲)이 장기이며, 제자 박만순과 동생 光祿,광록의 아들 우룡,우룡의 아들 萬甲으로 이어지는 송문일가의 소리를 이루었다. 생가 터에는 <공간구성의 원리>표지가 있다. 송흥록의 업적을 기리는 곳을 직선적인 길은 동편제 판소리의 미학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여러 개의 둥근 조형물은 진양조의 24박을, 5개의 사각기둥은 메나리조의 구성음을 2개의 石蓮池에 담긴 물은 계면조에 세련미를 보인 송흥록의 비곡을 듣고 청중들이 흘린 눈물을 상징화한 것이라 한다.
2) 명창 박초월
박초월(1916.9.17-1983.11.26)은 12세에 김정문(金正文)에게 흥부가를,송만갑지도로 춘향가.심청가.수궁가를 전수하였고, 1961년 한국국악협회 초대 이사장취임과 한국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수궁가 보유자로 지정받았다.1983년 숙환으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신세계공원에 안치되었다가 제자와 국악계의 성원으로 2000년 8월 28일 운봉읍 가산리 산 1-12번지로 이장하였다.고 행적을 밝히고 있다. 박초월 명창은 전통 국악을 한 보람을 그의 후반기에서 대접을 받고 살다간 인물로 보여 섭섭함은 오히려 덜한 느낌이다.
3) 여담
남원의 비전 마을에는 송흥록의 고택 옆으로 이성계의 <황산대첩비문>이 있다. 이 비문은 역사가 신석호가 짓고 서예가 김기승이 쓴 비로 이성계가 고려말 우왕 6년(1380)에 이 곳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비인데 일제강점기에 대첩비를 파괴한 것을 1957년에 다시 세운 대첩비다. 한자로 쓴 <황산대첩지비>는 대제학과 경연을 지내 김귀영이 찬한 글이다. 글에 의하면, 만력 3년 가을 전라관찰사 박계현은 글을 올려 말하기를, 雲峰의 동족 60리에 황산이 있는데 이는 태조 강헌대왕이 왜구를 처서 승리한 땅입니다. 세월이 흘러가고 지명조차 잘못되어 가는 길을 머뭇거리게 하여 지점을 식별할 수가 없게 되었다.진실로 수 천년 후 고하자를 막론하고 인멸이 더하여 장차는 그 위치를 잊게될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이에 하나의 큰 돌을 세워 잊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어쨌던 황산은 이성계가 왜구가 오백여 척의 배를 이끌고 진남포에 들어와 갖은 횡포를 일삼던 중 최무선에 의해 달아난 패잔병들은 계속 경상.충청도를 넘나들었다. 이것을 이성계,양광,변안열 등이 합세 왜군을 전멸시킨 대첩이다. 이 승리로 왜구가 차차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 보성의 서편제 - 박유전 명창
전남 보성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보성역에 가보았다. 좁은 역광장 양켠에 상점들이 있고 광장 가운데 분수가 물을 뿜는다. 분수대 앞에 ‘보성역제정유래’의 탑이 서 있다. 말하기를, 보성군은 삼한시대에는 마한국에 속했으며 백제 근초고왕 24년(369년)에 백제국에 병합되어 백제성왕 16년(538년)에 군현제로 개편하면서 伏忽郡이 되었다가 삼국통일 후인 신라 경덕왕16년(757년)엥 지금의 지명과 같은 보성군으로 개칭하였다.고려조에 들어와 山陽이라는 별호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성종 15년(996년)에는 貝州라고 개칭하였으며 현종 9년(1018년)에 다시 보성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보성역은 1936년에 철도가 신설되면서 역사를 지은 것이다. 보성군의 명칭이야 어쨌든 보성은 그보다 판소리 서편제로 이름난 곳이 아니던가 하는 생각이다.
[조선창극사]에는 ‘西便制는 朴氏로부터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박씨란 朴裕全을 말한다. 판소리에서 동편제와 서펀제는 섬진강을 경계로 나누어지는 것인데 섬진강 서북은 송흥록 명창을 중심으로 하는 동편조와 섬진강 서남부인 보성을 중심으로 하는 박유전의 서편조로 나누어진다. 대체로 동편제는 꿋꿋한 우조(羽調) 성음이고 서편제는 구슬픈 계조(界調) 성음으로 구분하고 있으나 보성소리 岡山제는 계면조와 우조를 포함하는 박유전의 독특한 창법이다. 여기서 ‘강산제’란 섬진강 서남쪽 일대의 서편제권에서 박유전이 살았던 보성 강산마을을 주축으로 한 보성소리를 강산제라 칭하고 정재근,정응민이 보성을 근걸지로 활동한 반면 이날치(李捺致),정창업(丁昌業)은 담양,함평이 자신의 활동무대였다.
박유전(1835- )은 전북 순창군 복흥면 마재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마재마을은 하마재와 상마재가 있는데 박유전은 상민과 천민이 사는 상마재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광대사회인 신청(神廳)소속의 무당소리꾼이었다. 몰골이 흉칙하게 생겼고 애꾸눈에 얽은 얼굴이었다. 당초에는 유전의 형이 소리꾼이 되려고 스승 金世宗(1825-1906)의 지도를 받았으나 강바치하는 날(시험) 소질이 없는 것으로 판명나자 박유전이 소리꾼이 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김세종의 지도를 받고 3년 후 전남 보성 강산리로 이사를 간 것이다. 보성소리 강산제는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다. 박유전이 득음(得音)한 해를 철종4년 (1853)으로 치고 있다. 그는 우조를 계면조로 변형시켜 득음한다. 帝巖山에서 귀곡성을 득음하고 덜미소리,용추폭포,새소리 등으로 수련하여 23세인 1858년에 세상에 나온다.1870년은 계면조 세상으로 바뀐바 되는 것이다. 대원군이 박유전의 소리를 듣고 ‘참으로 아름다운 소리로다. 그 아름답기로는 천하제일읜 금강산보다 더 아름답고 장엄하다’ 했다 한다. 서편제 지역은 ‘삼성삼평’이라고 한다. 三城은 보성,장성,곡성이요 삼평은 남평,함평,창평이라 한다. 섬진강을 중심으로 하는 동편제와 서편제, 산수의 형상은 인간의 성격은 물론 목소리(예술)까지도 바꾸어놓는 힘이 있는 것이다. 명창의 고장인 섬진강 동쪽과 서쪽은 옛 사람들도 달리 보았으니 東을 일러, 千峰月出格, 西을 일러 萬樹花爛格이라 비유했던 것처럼 인간에게 미치는 정서가 상이했던 것이다. 명창의 고장 보성을 지나며 서편제 한 자락 듣지 못하고 차를 몰게되니 아쉽기가 한이 없는 것이다. 송흥록의 동편제와 박유전의 서편제를 동시에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말한 것이다.
다. 고창의 도리 신재효 가비桐里 申在孝 歌碑
1) 桐里 가비
고창읍내 흥문거리
두촌나무 무지기안
시내우에 정자짓고
정자겨태 포도시렁
포도테 연못이라
(자서가)
姓貫은 平山 申氏
이실在 효도 孝는
帳籍의 啣字이요
일백 百 근원 源은
친구간의 字號로다
아핀 碧梧桐은
壬申生과 同甲이요
里號는 桐里오니
너도 工夫 하량이면
가끔 - - 차져오소
에용 - - 어허
우겨라 방아로구나
2) 비음(碑陰):
동리(桐里) 신채효 선생은 1812년 이 곳 고창에서 태어나 평생을 판소리의 연구와 발전에 몸바친 어른이시다. 일찍이 학문을 깨우치고 절약하여 모은 재산으로 이웃에 널리 덕을 베풀었다. 虹門거리에 시냇물을 울 안에 들여 조촐한 집을 짓고 이 곳에서 우리 근대 판소리상의 새장을 열었다.그가 지은 노래로는 춘향가 심청가 박흥보가 퇴별가 적벽다 변강쇠가 등 개작 판소리 여섯 마당이 있고 이 밖에도 방아타령 광대가 등 수많은 가요와 한시가 지금껏 남아 있다.
동리는 일찍이 우리 판소리의 예술성에 착목하여 가객들 사이에 전승되어 온 작품들을 정리하고 비로소 이를 집대성한 분이다.1984년 서거 백주년을 맞아 동리는 정부로부터 민족문화를 빛낸 명인으로 추대되었다. 여기 그를 기리는 전국의 학자들과 동호인들이 정성을 모아 그의 큰 뜻을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한다.
/1984년 12월 27일 백주년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 입/고창문화원 판소리학회 판소리보존연구회 시시문중/ 이숭녕 김현룡 황패강 이두현 최운식 정상쾌 上垣外憲一/ 문학박사 김태준 짓고/ 학술원 회원 김동욱 쓰다/
3) 신재효 고택
고창에 있는 신재효 고택은 중요 민속자료 제39호로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 있다.
사진의 집은 신재효(1812-1884)가 살면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조선 철종 1년 (1850)에 건립한 것이다. 원래는 주변의 물을 끌어 마루 `밑을 통해 서재 밖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만든 운치있는 집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파묻혔고, 연못만 복원하였다. 신재효는 심청가 적벽가 등 판소리 여섯마당을 체게화하였으며 판소리의 창극화와 함께 판소리 사설을 집대성하는 등 우리 나라 판소리의 발전에 커다란 공을 세운 사람이다.
아울러, 신재효를 한국의 세익스피어라고 평가하고 있다.
광대소리를 위해 만장의 기염과 소담한 자료,이론적 유산을 남겨놓은 생전의 업적은 판소리의 성자라는 것이다. 그는 서민 판소리 문학의 이론가요 연출가이며 광대의 지휘자로서, 광대들 뒤에서 그 사설을 정리하여 준 숨은 공로자로 해박한 지식과 절묘한 기법으로 판소리 사설의 창작과 집대성이란 필생의 대업을 이루었다. 순조 12년(1812년) 11월 6일 고창현 천남면 서문리(현 고창읍 읍내리)에서 신광흡의 1남 3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업적은 당시 몹시 천대하고 멸시하던 광대와 우리말과 글을 홀로 사랑하고 키우고자한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가람 이병기는 신재효의 업적을 문학사상의 ‘기적인 사업’으로 지적하였다.
동리 고택 옆으로 고창·판소리박물광이 있다. 우리 나라 판소리의 계보와 명창들의 인물소개가 있고 판소리를· 체험할 수 있는 체험장이 마련되어 있다. 판소리는 계보를 크게 셋으로 나누고 있다. 서편제, 중고제, 그리고 동편제 셋이다.
첫째,서편제 계보로는 김연수-김창환-정창업-이날치,박유진,김채만-정재근-정응민-조상현,정권진,성우향,박춘성」 등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