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중인 1951년 1월 문경군 동로면 적성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민가 800여 호를 불태우는 청야(초토화)작전을 펼친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가 발견됐다.
전쟁 중에 민가나 민간인의 식량이 적군의 은신처나 군량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작전이 동로지역에서 있었다는 내용이 기록된 문서는 국학연구회가 문경지역의 근현대사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2009년 6월 동로면사무소에서 발견됐다.
아래 문서는 군수나 도지사 등 상급기관의 주요 인사가 동로지역을 방문했을 때 관내현황을 보고하기 위해 작성했던 단기4288년부터 4294년까지 7년간의 관내현황보고서를 한 군의 서책으로 묶었던 문서의 일부이다.
보고서 원문 내용의 내용은
‘戰災現況 : 檀紀四二八四年 一月十三日 人民軍先發部隊數萬名의 侵入으로 因하여 數日間 熾熱한 戰鬪가 展開되여 我軍의 作戰上 不得已하야 北部一帶 民間人 家屋 八百余戶를 燒失하였으며(財物一切) 戰鬪間에서 人命被害가 數十名에 達하는 그 慘狀은 目不忍見이었으며 面民全體는 如此戰災로 基因되여 于今까지 生活困難을 免치 못하는 現狀임’‘戰災民의 災害一覽表 家屋燒失戶數 七五六 戶, 仝上棟數 一,一七一 棟, 仝上間數 四八九五 間, 釜鼎및食器 七三,二四十個, 衣類및 衣籠 四四,六四一 占, 食糧被害 二,七四六 石, 雜穀被害 一,千八十 石, 牛 一八五 頭, 豚 三四九 頭, 鷄 五五三 首, 現金 一七五千, 其他 五一,六一十, 死亡者 四三名, 重傷者 二八名’
전재현황 : 단기 4284년 1월 13일 인민군 선발부대 수만 명의 침입으로 인하여 수일 간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어 아군의 작전 상 부득이하여 북부일대 민간인가옥 8백여 호(재물일절)를 소실하였으며 전투 간에서 인명피해가 수십 명에 달하는 그 참상은 눈으로 볼 수 없었으며 면민전체는 이러한 전재로 인하여 지금까지 생활 곤란을 면치 못 하는 실정임.
戰災民의 災害一覽表
재산손실 |
가옥소실 | 솥 및 식기 | 의류 | 식량피해 | 잡곡피해 |
소실호수 | 소실동수 | 소실 간 수 |
756호 | 1,171동 | 4,895 | 73,240개 | 44,641점 | 2,746석 | 2,080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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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 돈(돼지) | 계(닭) | 현금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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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두 | 349두 | 553수 | 175,000환 | 51,610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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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문경전투(채희영 편저)에도 1951년 1월 12일부터 15일까지 4일 동안 동로면 적성리 일대에서 아군과 인민군 간에 벌어졌던 적성리 전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전투는 단양지역에서 동로 벌재를 넘어 낙동강을 낀 상주방면으로 진출 하려던 인민군 제10사단 예하연대 병력 3천여 명과 이들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지금의 동로파출소에 본부를 둔 미 제10군단 특별공격대대(대대장 배동걸 소령)예하 병력 300여 명, 경찰, 청년방위대를 포함한 수비군 간에 사활을 걸었던 4일 간의 전투인데, 그 전과를 보면 적 사살 1,247명, 포로 79명, 각종소총 370정, 82mm박격포 2문을 노획하는 혁혁한 전과를 거둔 아군의 승전이었다고 하고 있으나, 아군에서도 군인 전사 9명, 부상2명, 미군부상 2명, 민간인 사망 4명, 경찰부상 2명 청년방위대원 7명이 전사한 피해를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아군이 작전상 부득이하여 민간인 가옥 8백여 호를 소실했다는 초토화 작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