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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기의 역사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무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무기는 역사적으로 사회와 기술의 진보, 그리고 정치적인
움직임의 결과물이다 그렇지만 무기의 진화는 다양한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이 글에서는 이러한
복잡한 현상의 원인과 그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 중 하나인 베이커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무기는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발전은 다양한 원인에 기인한다 첫 번째 원인은 군사적인
요구와 특수한 상황에서 무기의 필요성이 발생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전투와 방어의 필요성은 인류의
삶에 무기를 필수적으로 만들게 했다 그 결과로 활과 화살, 창과 방패 등의 초기 무기가 생겨났다
두 번째 원인은 기술적인 발전이다 고대에는 철기술과 금속 가공 기술의 발전이 무기의 진화를 촉발했다
철로 만들어진 무기는 더욱 효과적이고 강력했으며, 그로써 전투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또한 화약의 발견과 화학 공학의 발전은 화기의 등장을 이끌었다 화기는 전투의 다양한 측면에서 혁명을 일으켰으며, 총격전과 대포 발사 등에 의해 전쟁의 양식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세 번째 원인은 정치와 사회적인 변화이다 국가 간의 경쟁과 충돌은 무기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군사력의 경쟁으로 인해 무기의 혁신과 개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며, 이로 인해 무기는 점점 더 강력해지고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제 베이커의 역할을 살펴보자 베이커는 무기의 역사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이름은 현대
전투와 군사 기술의 발전과 불가분한 관계가 있다 베이커는 군사 역사에서 무기 시스템과 전투 전략에 혁신을
가져온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그의 기술적인 업적과 전투 전략의 혁신은 현대 군사의 모습을 크게 바꿔놓았다
2. 인류와 무기
뗀석기인 주먹도끼
간석기인 주먹도끼
무기는 인류 역사와 함께 해온 인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도구이자,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정체성 중 하나와 같다. 인간의 신체에는 강력한 턱 힘, 날카롭고 긴 이빨이나 발톱 등, 공격에 사용하기 좋은 부위가 없기 때문에, 인간은 맨몸으로 동물을 사냥하거나 맹수에 대적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 대신 인간은 지능과 고도로 발달한 손, 손가락 덕에 도구를 활용할 수 있었고, 곧 일부 도구는 무기로 쓰이기 시작했다.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무기는 가공되지 않은 나무토막이나 동물의 뼈, 적당한 크기의 암석 덩어리 등이었지만, 선사시대 초기부터 역사상 최초로 뚜렷한 용도를 목표로 '제작'해낸 진정한 가공 무기를 유용하게 된다.
이후 이전의 원시적인 무기보다 더욱 본격적인 철제 무기와 집단화를 통해 인류는 절대다수의 동물보다 전투적인 우위를 얻는 데 성공했으며, 총기의 발명과 발전 이후로 개인이 동물을 대상으로 한 체급 및 수적 열세를 완전 극복하게 되며 지구에 있는 모든 생물의 정점에 서게 되어 먹이사슬에서 완벽하게 해방되었다. 그러나, 총은 화룡점정의 역할로 먹이사슬 분쇄에 종지부를 찍었을 뿐, 인간은 이미 호모 사피엔스로 종 분리가 된 초기부터 진출하는 지역마다 원시적인 칼, 활과 화살, 특히나 창[1] 등의 무기로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지 오래였고, 인류가 가는 곳마다 인류가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대형 동물들은 급감하거나 멸종의 길에 이르렀다. 총기가 등장하고서야 동물들에 대한 우위에 선 것이 아니다.
싸움은 무기와 마찬가지로 인류 역사와 함께했기 때문에, 무기는 같은 인간을 죽이는 데에도 많이 쓰였다. 이는 인류가 무기와 집단화를 통해 먹이사슬을 극복하고 정착 생활을 통해 세를 불리며 동족 외 경쟁 동물이 사실상 사라지고, 이에 따라 인류 집단이 거대해지면서 집단 사이의 영역과 이해관계가 겹쳐 전쟁이 고도화되며 심화한다. 동물이 더는 심대한 위협이 되지 않게 되고, 농업이 본격화되고, 영토, 재산과 정치의 개념이 생기며, 전술과 전략이 발달하는 등 전쟁 행위가 점차 고도화된 이유로, 선사 시대부터 현대까지 사용된 절대다수의 무기들은 더이상 사냥용이 아니라 같은 인간 또는 인간의 군대를 무찌르는 대인전을 상정하여 발전하였다.
무기가 전쟁 수단인 병기로써 거듭나 고급화, 고성능화되며 고도로 조직화한 인간 집단인 국가에서 본격적인 무기의 제작과 사용은 대개 국가가 전담하는 것으로 변모한다.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억누르는 데에 무기를 제한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냉병기 시대에는 장인이나 손재주가 좋은 일반인이 수준급의 무기를 제작하는 것이 가능했고, 농기구나 공구 같은 일상적인 도구들이 유사시 전쟁용 무기에 필적하는 성능을 내기도 했기 때문에, 봉기나 반란으로 국가가 무너지기도 하였으나, 화기의 시대에는 국가에서 법으로 허용하지 않는 한 고성능의 무기, 즉 제대로 만들어진 화기를 손에 넣거나 적절한 지식과 재료, 장비를 구비하기 힘든 개인이 만드는 것이 무척 어려워지며, 화기를 제한받는 피지배층이 화기를 보유한 지배층을 뒤엎기 몹시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되었다. 오늘날 여러 국가에서 개인의 총기 소유가 금지되어있는 것 역시, 명목상 국민의 안전 보장을 핑계로, 실질적으로는 무기 규제를 통한 국가의 통제력 확보 및 국민의 저항 봉쇄로 해석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민중에게 무기는 부당한 공권력과 맞서 싸우는 저항을 상징하는 요소다. 한국의 죽창, 미국의 산탄총이 그 예. 특히, 건국 역사 전반에서 총기가 큰 역할을 한 미국에서는 총기가 자유와 개척의 상징으로 받들어져, 총기 범죄가 끊이지 않음에도 총기 옹호론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확보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주에서 민수용 총기의 생산과 판매가 자유로워 무수히 많은 총기가 민간에 풀려 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총기가 민간에서 돌고 있기 때문에, 이제 와서 뒤늦게 규제해봐야 준법 시민의 자기 방어 능력을 제한하고, 밀수를 통해 불법으로 도처에 널린 총을 구할 터인 범죄자들의 편의를 봐주게 될 뿐이라는 암울한 시선도 있다.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덕에 미국에는 역사상 단 한번도 독재 정권이 들어선 적이 없다는 썰도 있다.
무기의 등장과 발전은 악수를 비롯한 사회적 예절이 생겨난 이유로 유력하다. 항시 무기를 소지하는 문화권에선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무기가 동원된 싸움이 벌어져 목숨을 잃을 수 있었고, 이러한 사태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상호 간에 예의를 갖추는 문화가 발생했다는 설이 알려졌다. 요즘 들어 사회 문제가 된 갑질 문제도 따지고 보면 총기를 비롯한 각종 무기 소지를 엄격히 규제하는 대한민국의 환경으로 인한 부작용으로도 볼 수 있다. 너도 나도 총들고 다니는 곳에서 그랬다간 벌집 되는 수가 있으니까.
베이커의 업적 중 하나는 무기 시스템의 개량이다 그는 총기의 정확성과 사격 속도를 크게 향상시킨 새로운
디자인의 소총을 개발했다 이러한 새로운 무기 시스템은 병사들에게 뛰어난 화력을 제공했고, 전투의 결과를 크 좌우했다 또한 베이커는 화기 시스템과 방탄 조끼의 개발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의 기술적인 업적은 현대 군사 기술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고, 이는 전쟁에서의 우위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무기 발전의 원인과 베이커의 역할은 군사 역사와 기술의 진보에 대한 중요한 개념을 제시한다 무기의 역사는 인류의 필요성, 기술의 발전, 정치와 사회적인 변화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베이커와 같은 혁신적인 인물은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며, 현대 전투와 무기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역할을 한다 무기의 역사와 미래는계속해서 진화하고 있으며, 이는 인류의 역사와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결론적으로, 무기의 역사와 발전은 다양한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이러한 원인 중 하나는 군사적인
필요성, 기술적인 발전, 그리고 정치와 사회적인 변화이다 베이커와 같은 혁신적인 인물은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며, 무기의 진화와 현대 전투에 큰 영향을 끼친다 무기의 역사와 미래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의 세상과 안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주제이다
. 여러 시대에 사용되었던 '무기와 갑옷을 다룰 때, 우리는 '석시시대'부터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시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도저히 정할 수 없다
. 원시시대 플린트 무기 제조인들의 생산품들을 장기간에 걸쳐 주의깊게 신중히 연구한 뒤에 살펴보면, 어떤 독특하고 특유한 성질들이 발견된다. 바로 더없이 정교한 예술작품들의 경우에 똑같은 일이 이루어질 수 있듯이, 이런 성질들을 통해 각기 그 지방과 시대가 단정될 수 있다
. 로마인들이 갈리아에 침입했을 때 언제나 쇠로 만들어진 방어용 갑옷을 입고 있었고, 또 공격용 무기도 모두 같은 금속으로 제작된 것이었지만, 똑같은 시기에 갈리아 인들의 무기는 청동과 철로 만들어져 있었고, 명백히 두 금속 모두 매우 귀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 갈리아인들 사이에서 형뻘 금속인 청동 대신 철로 대체된 것은 다름 아닌 칼 때문이었다. 이 변화는 불행한 결과를 수반한 것으로 밝혀졌다. 갈리아 인들은 이 금속으로 실제로 쓸모가 있는 무기들을 벼려낼 수 있을만큼 철 제련법을 깊이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갈리아 인들(켈트족)이 로마 시대 초기에 이탈리아에서 로마 인들에게 패한 것(기원전 297)은 용맹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바로 무기 제조인들의 기술과 경험이 결정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 정강이받이는 우리가 백랍으로 알고 있는 합금과 비슷한 금속으로 만들어졌던 것 같다. 이 초기 갑옷의 나머지 부분은 그것을 착용한 전사가 사용한 모든 공격용 무기(어떤 화살촉들은 제외하고)와 함께, 어떤 합금으로 이루어졌든 확실히 철제품은 아니었다. 그것은 소수의 화살촉을 제외하고는 모두 청동 혹은 경화 놋쇠-즉, 중세시대에 사용된 최상의 '래턴(일종의 황동)'과 같은, 그리와 주석의 합금-라고 칭할 수 있는 합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고대인들은 때때로 이 극히 중요한 합금에 소량의 은, 혹은 심지어는 금까지 추가했다
. 기념품들에 나타나는 근위대의 방패는 거의 언제나 화려한 조각물로 장식되어 있다
. 야만족들의 화살 사용법을 다루면서 어느 정도 널리 퍼진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따뜻한 기후대의 야만인들은 모두 해로운 독을 준비하는 과정에 익숙하고, 또 그들이 이런 독 속에 화살촉 끝을 담그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가 바로잡고 싶은 그릇된 생각은, 이 독이 발라진 화살이 전쟁과 사냥 중에 닥치는 대로 사용된다는 가정이다. 이것은 실제로는 사실이 아니다. 독이 발라진 화살은 거의 전적으로 사냥에만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종족들의 법과 비슷한 일반적인 무언의 양해로, 야만족들의 전사들은 적일지라도 사람에게는 독이 발라진 화살을 발사하지 않는다
. '여러 종교전쟁'이 한창 진행될 때(1575년경)에야 비로소 중기병들의 본래의 갑옷이 어느 정도 뚜렷하게 쓰이지 않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무렵에 무질서와 혼란이 모든 병과에 스며들었다. 군인들이 대부분 자신들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할 정도로 규율이 아주 느슨해졌다고 느꼈다. 그래서 다수의 군인이 독단적으로 흉갑이나 상체 갑옷을 제쳐두고, 그 대신 단순한 버프코트(소, 들소의 무두질한 가죽으로 만든 코트)나 가죽 튜닉을 몸에 걸쳤다
. 13세기에 접어들어 얼마 안되어서 군사장비에 또다른 변화가 생겼다. 우리는 이 변화를 그 시대 민간복장의 변화에 상응한 결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초기의 군사장비의 모든 변화는 단순히 시대마다 일상생활의 공통적인 복장에서 널리 유행하는 것을 추종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어도 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다리를 덮을 수 있도록 자락이 갈라져 있는, 윌리엄 정복왕 시대의 긴 쇠미늘 튜닉은 당시에 늘 사용되었던 같은 종류의 의상을 곧바로 흉내낸 것이었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코이프가 달린 미늘 갑옷도 12세기 초에 나타날 때, 일상적인 '베스티투스 프란시스쿠스vestitus francissus'-당시의 일상적인 프랑스의 복장-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처음에는 평시의 복장에서, 다음에는 그 결과로 전시의 복장에서 한쪽 변화가 다른 쪽 변화의 뒤를 이었다. 그리하여 13세기 초에는 미늘 갑옷의 소매가 팔목을 덮을 때까지 길어지고, 미늘 갑옷 자체가 다리 중간까지 내려오도록 만들어짐으로써, 짧은 튜닉이 긴 로브로 바뀐 패션을 따랐다
. 강철 갑옷을 없애버린 것은 다름아닌 바로 화약이었다. 따라서 전쟁상의 저 대혁병이 완료되기 전에는 갑옷의 강도의 무게가 점점 더 증가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무기는 설사 계속 보다 강해지지는 않고 있었다 하더라도 확실히 언제나 파괴력의 확대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 '잉글리시 롱 보우'라 불리는 장궁長弓으로서, 길이가 5.5피트에서 6피트(170~180cm)에 달해, 중세 영국인의 평균 키인 5피트(150cm)보다도 더 컸다. 주목(단단하고 분홍색이며 가구 따위에 쓰이지만, 예전에는 활의 좋은 재료로 알려져 있었다)으로 만들어진 이 활은 적어도 240야드(219m)의 사정거리에서 날카롭고 미늘이 달린, 강력한 화살을 발사했다. 화살 자루에는 기저부 가까이에 깃털이나 길고 가는 가죽 조각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것들을 고대의 아폴로나 디아나(아르테미스)의 조각상에서 보이는 그런 화살통 속에 넣지 않고, 다발로 한데 묶어 허리 벨트에 매달고 다녔다. 그리고 궁수는 막 전투를 시작할 때 화살 다발을 풀어헤치고 그것들을 촉이 바깥쪽으로 향하도록 왼발 아래쪽에 내려놓았다. 따라서 그는 화살이 필요할 때에는 허리를 구부리고 손에 하나씩 집어들기만 하면 되었다
. 그냥 단순히 활과 대臺로만 구성된 석궁은 장궁보다 명중률이 높았지만, 그와 동시에 사용에 불편하고 무거워 운반하기에도 어렵다. 또한 비가 올 때 습기로부터 보호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궁보다 사정거리가 상당히 짧다. 사정거리를 똑같이 증가시키고 싶을 경우에는 석궁의 힘을 크게 늘릴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려면 활시위를 강하게 잡아당길 수 있는 기계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것은 무게와 불편함이 더욱 추가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 사용되던 석궁에는 하나같이 다 기계장치로 잡아당겨지는 시위가 달려있었다. 그리고 석궁이나 쇠뇌에는 각기 '암사슴의 발' '지레' '회전 도르래' 로 블리는 세 종류가 있었다. 곧 알게 되겠지만, 이런 종류의 석궁들 사이의 차이점은 전적으로 활을 구부리고 시위를 잡아당기는 데 사용되는 각각의 수단들에 있다
. 루브르의 진열실에 있는 필리프 드 샹파뉴의 초상화가 이 갑옷이 루이 13세의 통치시대(1610~43)만큼 늦게까지 착용되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렇지만 갑옷이 방호를 더 이상 착용하지 않게 된 뒤에도 초상화에서 자주 품위있고 명예로운 의상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명심해두어야 한다
. 15세기에 견고한 갑옷을 착용한 중기병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려는 목적에서 채택된 방법은, 궁수나 석궁 궁수들로 하여금 제일선에서 기사들에 맞서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가능한 한 많은 말을 죽임으로써 적의 첫번째 돌진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2선, 즉 활잡이들 뒤쪽에서는 중기병들이 말에서 내리긴 했지만, 완전무장을 한 상태로, 그리고 창을 앞으로 내민 채 밀집대형을 형성하고 있었다
. 1703년에 프랑스의 왕(루이 14세)이 '포고령'을 내려, 보병부대에서 모든 미늘창이 폐기되고, 그 대신 총을 교체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이런 포괄적인 변화-아주 오랫동안 프랑스의 군사체계 속에 도입된 가장 중요한 변화-의 시대이다
. 루이 13세 시대(1610~43)에는 군도軍刀의 날이 특별한 특징을 지니고 있지 않다. 자루에는 정반대되는 굴곡을 갖고 구부러져 있는 십자형 날밑이 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굽은 것이 자루 끝을 향해 위로 쭉 뻗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이 칼날을 향해 늘어져 있다. 칼을 몸 뒤에 착용하는 습관은 이 시대에 시작되었다. 이런 식으로 무기를 착용하는 것은 스카프처럼 몸통을 가로지르는 어깨끈, 즉 '보드릭baudric'에 그것을 붙들어 맴으로써 이루어졌다. 이 끈은 매우 짧기 때문에 칼자루가 등을 때렸다
. '포(artillery)'라는 말은 본래의 참된 의미로는 싸움터에서, 특히 포위공격 작전에서 사용되었던 모든 종류의 병기를 뜻했다
. 16세기 후반기 동안에 독일에서 '박격포'가 발명되었다. 이것은 포신이 짧고 포강砲腔이 큰 대포의 일종으로, 거기에서 '포탄(shell)'이라 불리는, 폭발하는 큰 중공中空발사체가 방출된다. 이 포탄에는 그 안에 화약을 조심스럽게 넣은 약실이 있고, 포탄이 예정지에 이를 때 포탄에 뚫려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삽입된 신관 혹은 화승(도화선)에 의해 이 화약에 불이 붙는다. 이 구멍은 점화 구멍이 아니라, '눈(eye)'으로 불린다
. 1535년이 되고 보니 프랑스 군의 대열에는 석궁 궁수가 단 한 명도 없었다
. 초기의 무기와 갑옷은 명장들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그것들은 과학자들의 생산품이다
. 석궁과 노포 사이의 관계로 인해 자연스럽게 휴대할 수 있는, 따라서 자기만의 병기로 개개의 병사들이 갖고 다니면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대포의 축소된 형태를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적인 착상에 따라 손으로 쏘는 화기, 즉 소화기가 14세기에 발명되었지만, 처음 발명되고 나서 거의 3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할 정도로 이 무기의 오랫동안 잠복된 여러 가지 특질을 궁극적으로 계발하는, 연이은 개량의 진전 속도가 매우 느렸다
. '캘리버 총caliver' 과 '수발총燧發銃(fusil)'은 보다 가벼운 종류의 머스킷 총이다. 켄트의 펜셔스트에 있는 병기고에는 초기의 머스킷 총과 캘리버 총의 실례가 28정이나 보존되어 있다. 이중 일부는 총신이 원형이고, 어떤 경우에는 총신이 총구까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총신 몇 개는 그 뒤에 돋음새김된 소용돌이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그리고 3개에는 1595년이라는 연대가 새겨져 있다. 또 다른 것들보다 더 풍요하게 장식된 1개에는 1595년이라는 연대와 함께 "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RIENS SANS DIEU)"는 금언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 이 책은 찰스 바우텔이 P. 라콤의 프랑스 어 저서를 영어로 옮기고 서문과 주해를 단 것이다. P. 라콤은 프랑스의 중세 갑옷을 상세히 논하고 있고, 여기에 찰스 바우텔이 같은 시기의 영국의 무기와 갑옷에 대한 장章을 덧붙이고 있다. 바우텔의 장에는 묘지의 조상들(문장이나 갑옷의 세부장식들의 주요 출처)의 광범위한 일람표와, 그것들을 동판에 새겨 인쇄한 조각가들에 대한 안내서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들은 본래의 조각품들이 많이 손상당하거나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전해진다
3. 전쟁에서의 무기
무기가 가지는 의의는 세 가지로 정리 할 수 있는데, 첫째는 맨몸의 허약한 전투력의 한계를 극복해주고, 둘째는 신체의 강약과 격투실력의 차이 따위를 완전히 무의미하게 만들며 셋째는 무기에 맞설 수 있는 건 오로지 무기 뿐이다.
짐승들에 비해 많이 허약한 순발력과 운동능력을 지닌 인간이 어떻게 표범, 늑대[3], 심지어 호랑이나 곰까지 이기고 먹이사슬의 정점에까지 올라갔는지 생각해보면 쉽다. 이 말은 즉, 평범한 사람이 칼이나 방망이 따위만 들어도 왠만한 대형 맹수 급 이상으로 강력해지고, 총 이상의 무기를 든 사람은 그 어떠한 맹수보다도 강력한 상대라는 것이다.[4]
다 떠나서 인간끼리의 싸움에서 무기는 떼어놓을 수 없고, 그 무엇보다 확실하고 훌륭한 대화수단, 그리고 믿음직한 친구이다. 인간은 피지컬과 운동능력이 훨씬 강한 먹이사슬 정점의 맹수들을 상대로도 발전되는 무기와 지능으로 극복해서 싸워왔던 만큼[5], 사실상 무기와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전투에서 인류는 무기를 기본적으로 활용한다. 그래서 무기를 이용한 전투에선 체급이나 순수한 맨손 격투기술[6][7]의 비중은 줄어들고 무기의 숙련도가 전투력 대부분을 결정한다.[8] 생각해보면 무기의 파괴력부터 맨손과는 비교불가인데, 무기들 중에선 가장 약한 편인 작은 둔기라도 맨주먹보단 훨씬 더 강하다.[9] 손에 아무것도 없는 주먹 만으론 상대가 아무리 작고 약한 어린애라도 하나 제대로 죽이기도 어렵고 자기보다 훨씬 더 싸움을 잘하고 덩치가 큰 사람이 상대라면 저항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손에 무기가 있다면 상대가 누구건 심지어 숙련된 격투가든 2미터 넘는 거한이건 상관없이 맨몸이라는 전제하에 손쉽게 무력화, 심지어 살해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무기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전투력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당장 현대의 전쟁터, 심지어 길거리 범죄현장 등에서도 맨손으로 설치는 사람은 볼 수 없다. 사회가 불안할수록 무기는 거의 생활필수품이 된다. 과거 치안이 불안했던 시대에는 맹수와 도적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선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현대나 중세의 군인/경찰들은 무기술[12]/사격술을 최우선으로 연마해왔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발전되는 무기와 그로부터 파생된 전투술이 효율적이면서도 흉악한 전투수단이자 전투기술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4 전쟁의 원인
플러드와의 전쟁 때문에 인류는 막대한 손실에 의한 자국영토의 상실로 인하여 이를 보강하고자 확장을 꾀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선조의 행성들로 침공을 가하게 된다. 평소에 호전적인 종족으로 인류를 평가했던 선조는 이들이 자기네 행성에 대해서 단순 무력점령이 아닌 행성을 완전히 초토화 시키는 궤도폭격을 동반한 대량살상[6]에 대해서 분노하였고 이로 인하여 전면전이 발발하게 된다. 특히 선조는 우리 은하에서 자기네들 다음가는 열강이 된 선대 인류가 오만하고 편협하게 구는 것이라 판단하였다. 그러나 당시 인류는 플러드와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고 동시에 이들이 플러드로부터 행성을 정화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전쟁을 치르면서 밝혀지게 된다
5. 서양의 전쟁과 무기
아스테카에서는 전쟁이 매우 중요했지만 상비군은 없었다
아스테카 군대는 귀족 출신의 소수 직업군인과 대다수 평민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상비군은 없었다. 평민은 농업이나 상업 등 생업에 종사하다가 필요할 때 징집되었다.
아스테카에서 전쟁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남자는 모두 군사교육을 받았다. 평민 자제는 15세에 이르면 학교에 입학시켜 전사로 양성했다. 귀족학교에서는 귀족 자제를 지휘관, 즉 직업군인으로 육성했다. 평민이든 귀족이든 20세가 되면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전사(오른쪽)의 뒤를 따라가는 소년(『멘도사 고문서』 62r)소년은 방패와 식량 등 전쟁 물자를 운반했다. 그러나 전투에는 가담하지는 않았다.
출정할 때는 대부분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화려한 복장으로 제왕다운 위엄을 갖추었기 때문에 멀리서도 왕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장군과 전사는 물론 사제와 소년도 전쟁에 참여했다. 소년은 전쟁에 필요한 식량 등 물자를 운반하는 짐꾼이나 각종 정보를 전달하는 전령으로 일했다.
각종 보급품의 운송은 순전히 등짐에 의존했다. 보급대원 한 사람이 책임질 수 있는 전사는 두 명에 불과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원정에 나설 때는 군대가 이동할 경로에 위치한 정복지에 관리를 사전에 파견해, 필요한 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했다.
군대 조직이나 편제는 매우 복잡해서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이론적으로 최상위 부대 단위는 8천 명으로 구성했다. 이를 다시 400명 단위로 나뉘고, 최하위 부대 단위는 20명이었다. 이밖에도 작전상 200명이나 100명 단위로 부대를 운용하기도 했다.
2. 단칼에 말을 절단 낼 정도로 예리한 공격용 무기
무기는 당대의 기술 수준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아스테카인은 실생활에서 바퀴나 축력을 이용하지 못했다. 철기를 사용할 줄도 몰랐으므로 무기는 돌이나 나무로 제작했다.
무기의 종류는 다양했다. 대표적인 공격용 무기로는 검, 투창, 투석기, 활, 창, 곤봉이 있었다. 방패, 갑옷, 투구 등의 방어용 무기도 다양했다.
아스테카의 공격용 무기
에스파냐인이 ‘검’이라고 부른 무기는 길이가 1m 내외이고, 모양은 납작한 빨랫방망이와 유사하다. 주로 참나무로 만들었는데, 칼날에 해당하는 양면에 흑요석이나 부싯돌을 일렬로 박아놓았다. 코르테스와 함께 아스테카 정복에 참여한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의 말에 따르면, 이 검은 기마병의 말을 단칼에 절단 낼 정도로 예리했다.
아스테카의 검(모형)에스파냐에서 보관하던 검은 1884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전하는 유물은 없다.
투창은 메소아메리카에서 고대부터 사용하던 무기로, 작은 창을 끼워서 손으로 던지는 도구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투창의 길이는 60cm이다. 창촉은 흑요석, 물고기 뼈, 구리, 부싯돌을 뾰쪽하게 다듬어서 만들었다. 투창은 활과 함께 비교적 먼 거리 공격에 사용했다.
아스테카의 투창과 사용법
투석기는 말 그대로 돌을 던지는 무기다. 용설란에서 뽑은 섬유로 망을 만들고, 그 안에 둥글게 다듬은 돌을 넣어 던졌다.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아스테카 군대와 싸울 때, 우박처럼 쏟아지는 돌멩이 때문에 부상자가 속출했다고 전할 정도로, 실전에서는 매우 위협적인 무기였다.
3. 착용자의 신분과 계급을 보여주는 방어용 무기
아스테카의 방패
방패는 모두 원형이었다. 재료나 장식은 여러 가지를 사용했다. 대부분 동물 가죽, 야자수 잎, 대나무, 선인장 섬유로 만들었다. 소박하게 장식한 방패도 있고, 새의 깃털이나 금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방패도 있었다. 깃털 장식은 방패 소유주의 신분이나 전과(戰果)에 따라서 색깔, 모양, 형태가 달랐다.
치치미틀 투구를 쓴 전사(『멘도사 고문서』 67r)대부분의 아스테카 전사는 전투복을 착용했다. 솜과 같은 충전재를 안에 넣고 누빈 옷이었다. 모양은 조끼와 유사한데, 몸에 꼭 맞도록 뒤에서 끈으로 묶었다.
투구는 나무나 동물 뼈로 만들고, 깃털로 장식했다. 독수리, 늑대, 재규어, 퓨마 등 야생동물의 머리로 만든 투구도 있었다. 인간을 잡아먹는 악마 치치미틀은 아스테카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였는데, 그 모습을 본뜬 투구를 착용해 적에게 공포를 심어주기도 했다.
아스테카에서 전사다운 전사가 되려면 포로를 잡아야 했다. 포로 1명을 잡은 전사는 왕을 알현할 수 있는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복장은 일반 전사와 차이가 없었다. 포로를 2명 이상 잡은 전사는 팔다리까지 감싸는 일종의 갑옷을 착용했다.
전사의 계급(『멘도사 고문서』 64r)생포한 적의 수에 따라 전사의 계급, 복장, 무기가 달라진다. 위 맨 오른쪽은 포로 1명을 생포한 전사이다. 가운데는 왼쪽부터 순서대로 포로 2명, 3명, 4명을 생포한 전사이고, 아래는 왼쪽부터 포로 5~6명을 잡은 ‘오토미 전사’, 7명 이상을 잡은 ‘삭발 전사’이고, 맨 끝은 장군이다.
갑옷은 착용자의 계급에 따라서 색깔과 장식에 차이가 있었다. 『멘도사 고문서』를 보면, 적을 2명 생포한 전사는 고깔모자에 빨간색 줄무늬 전투복을 입었고, 3명을 생포한 전사는 나비 문양의 전투복을 착용했다. 4명을 생포한 전사는 재규어 무늬의 전투복과 헬멧을 썼다.
아스테카인은, 사냥하면서 거칠게 살아가는 오토미족을 야만인으로 취급하여 경멸했다. 그러나 강인한 체력과 재빠른 동작으로 포로를 많이 잡은 전사에게는 오토미 전사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마지막으로 삭발 전사는 닭 벼슬 모양으로 가운데머리만을 남기고 모두 삭발했다. 이러한 고위 전사가 군대에서 어떤 직책을 맡았는지는 알 수 없다.
4. 농한기에 군대를 일으켜 전쟁을 벌였다
군사작전회의(『피렌체 고문서』)정복전쟁에 앞서 장거리 상인이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상대방 도시국가의 지리와 건물을 파악하여 작전을 수립하고 있다.
전쟁은 농사와 기후조건을 고려해 늦가을부터 봄 사이에 치렀다. 이 시기는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여서, 행군과 도하 등 군대의 이동이 용이했다. 또 옥수수를 비롯한 각종 농작물을 추수해 식량이 넉넉하고, 농한기여서 농업에 종사하는 평민을 전사로 차출하기에도 적당했다.
공격은 보통 이른 새벽이나 오전에 개시했다. 전투 중이라도 날이 저물면 일시적으로 철수했다. 밤에 전투를 벌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전장에서는 50m 거리를 두고 적과 대치했다. 이때는 귀청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시끄럽게 방패를 두들기고 함성을 질러 기세를 올렸다.
전투 장면(디에고 두란, 『인디아스 역사』)검으로 백병전을 벌이는 뒤쪽으로 투창을 던지는 전사의 모습이 보인다.
공격 개시 명령은 소라껍질 나팔이나 작은 북을 이용했다. 명령이 떨어지면 먼 거리 공격이 가능한 활, 투창, 투석기를 발사했다. 이어지는 백병전에서는 검이나 곤봉을 사용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지휘관의 명령 없이 공격하는 전사와 퇴각 명령이 없었는데도 후퇴하거나 도망가는 전사는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사형에 처했다.
아스테카군은 계략에 상당히 능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소년들에게 전투복을 입혀 적의 우측을 공격하는 척하다가 정예군으로 좌측을 공격해 적을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아스테카식 성동격서 전술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전술을 사용했다.
5. 아스테카군의 전투 방식, 적을 죽이기보다는 생포하다
검투시합(『토바르 고문서』)포로는 커다란 돌에 묶인 채 종이 등으로 만든 형식적인 무기를 들고 완전무장한 베테랑 전사와 대결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4명에서 7명까지 상대했다. 결코 승리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시합에서 진 포로는 인신공희의 희생물로 바쳤다.
아스테카의 전쟁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적을 죽이기보다는 포로로 잡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전술적으로 생포보다는 살해가 더 용이한 경우에도 되도록이면 부상을 입혀 생포했다. 생포된 적은 손을 뒤로 묶거나 발을 묶어서 테노츠티틀란으로 이송했다.
공격하기 전에 적이 항복하거나 공물을 바치면 포로를 잡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어김없이 포로를 잡아갔다. 이렇게 사로잡힌 포로는 노예가 되거나 인신공희의 제물로 희생됐다. 포로를 석방하거나 몸값을 받고 풀어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스테카와의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갔어도 꿋꿋하게 저항한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틀라스칼라 연합왕국이다. 이런 도시국가는 아스테카에 대한 적개심이 드높았으며, 후일 에스파냐 정복자들과 동맹을 맺고 아스테카를 멸망시키는 데 일조했다.
참고로, 아스테카군이 에스파냐 정복자들에게 패배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적을 살상하기보다는 생포하려는 전투 방식을 꼽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에스파냐 정복자에게 새로운 전투 방식을 배운 아스테카인은 닥치는 대로 적을 살상했기 때문이다.
6. 동양의 전쟁무기
1) 중국도
기가 다양해서 전통적 대도 중 작은 것은 1.7 m 정도로 사람 키만 했고 큰 것은 3 m 이하였다. 무게도 제각각이라 평균을 내기 어렵다. 특히 근접전, 난전, 선상전에서는 그 뛰어난 위력을 보여 남송의 장수인 악비는 거느린 보병들한테 금나라의 중무장 기병인 괴자마를 상대로 "말의 머리는 보지 말고 말의 다리만 보고 대도로 공격하라."라고 명령하여 무적의 군대였던 괴자마를 크게 무찔렀다. 또한 명나라 장군 유정(劉綎)은 무게가 120근이나 되는 무거운 대도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유대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명나라 이후에 들어선 청나라대까지 대도로 무장한 보병부대가 있을 정도였고, 태평천국 운동에서도 많은 태평천국군이 사용하여 한때 '태평도'라고도 불렸다.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 터지는 군벌 시대에 들어서는 60~150 cm 정도로 크기가 줄어들어 휴대성이 좋아져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민간에서도 호신용, 무술수련용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대도의 구조상의 이점은 무게중심이 칼날의 말단부로 쏠려 베기의 위력을 크게 증가시켰다는 것이다. 이 덕분에 대도는 절단력이 놀라웠다. 다만 칼날에 힘과 무게를 실어 베어 가르는 기법에 적합하도록 무게중심이 손잡이보다는 칼날 쪽에 있음은 취급의 편의성이란 부분에선 단점이었는데, 이런 점은 일본도와도 비슷했다. 일본도 또한 생각보다 다루기 쉽지는 않았음도 무게중심이 손잡이보다는 칼날 쪽에 있어서였는데, 대도도 그러한 점에서는 약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대도의 손잡이에는 폼멜이 있어서 취급하기가 일본도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다.
직봉풍전쟁, 북벌전쟁 당시 북양군벌은 병사들이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려 하면 즉시 대도로 썰어서 군대를 독전했다고 한다. 중일전쟁 당시의 군용 대도는 근본적으로 전통적인 대도의 디자인을 계승했으나 휴대성을 고려하여 길이는 심플하게 규정되었다. 국민당을 비롯하여 군벌들이 제각기 정한 교범마다 조금씩 치수는 달랐으나 대체적으로 칼날은 60 cm 전후, 손잡이는 30 cm 정도로 전체길이는 1 m를 넘지는 않는 수준을 유지하였다. 국가나 군벌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나온 것도 있고 대장간에서 따로 주문해서 사용하기도 했기 때문에 실제 기록사진들을 보면 길이와 비율이 다 다르다.
손잡이가 긴 대도를 따로 박도(朴刀, Podao[1])라고 지칭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상 엄밀한 구분이라 하긴 어렵고 혼용에 가깝다. 이런 형태는 손잡이가 두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길어 쌍수대(雙手帶)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국 강남 지방에서 특히 많이 사용되었다고 하며 남파 계열의 대표적인 병장기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러한 대도 말고도 전통적인 중국도, 즉 우미도(牛尾刀)/유엽도(柳葉刀)/안모도(雁毛刀) 등의 도검 계통의 도(刀)를 사용한 사례가 확인되고 유물도 소수 존재한다.
조선시대 형정도첩에 그려진 참수용 대도 | 조선 후기의 언월도 |
조선의 망나니가 장비한 참수용도 역시 바로 이 대도였다. 중국 강남의 오구도 같은 도를 가지고 술을 뿜으며 춤추는 것은 20세기 사극에서 타국의 사형 집행 방식을 섞어 창작된 것이며, 조선시대 그림에서 묘사된 대도를 든 망나니의 모습은 이와는 상당히 다르다. 또한 조선 후기로 가면 극단적으로 짧아져서 거의 중국의 대도와 똑같이 변한 버전도 있는 모양이다. 일종의 수렴진화. 다만 이건 대도라 불리진 않고 반월도 혹은 그냥 언월도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추노에 나오는 송태하의 무기가 이것이다.
7. 한국형 신궁
신궁 제원 | |
개발사 | 국방과학연구소(ADD) |
단가 | 1억 8천만 원(2005년) |
개발 | 2005년 |
엔진 | 고체 추진 모터(Solid state motor) |
중량 | 19.5kg |
길이 | 1.68m |
직경 | 80mm |
속도 | 마하 2.1 |
사정거리 | 5km, 7km 도달 시 자폭 |
비행 고도 | 3.5km |
탄두 | 미스트랄 미사일보다 작음 |
유도 방식 | 적외선 수동 호밍, fire and forget(발사 후 망각) |
발사 플랫폼 | 휴대형 또는 삼각대 |
한국군은 영국의 재블린, 미국의 FIM-43 레드아이나 FIM-92 스팅어, 러시아의 이글라 등 다양한 보병 휴대용 대공미사일을 써보았기에, 이들의 장점을 모아 바로 신궁이 등장한다. 이 중 외형은 프랑스의 미스트랄보다 러시아의 이글라에서 많은 것을 차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BCU.
무게는 미스트랄보다 6 kg 정도 가볍고 명중률은 95% 이상이다. 가격은 5천만 원 정도 더 저렴하고 미스트랄과 같은 기능인 대적외선 방해대응능력(IRCCM)과 목표물이 반경 1.5 m 이내로 접근하면 폭발하는 근접신관까지 있어 효율성이 높다. 대표적인 보병용 대공미사일인 스팅어는 휴대성을 극대화하려다 보니 탄두중량이 작아서 근접신관이 없다. 신궁은 근접신관과 표적기의 비행 방향과 나란하게 접근하여 격추하는 기능이 있다. 적기의 조종사와 엔진 등을 노릴 수 있어 더 효과적이다.
스팅어 계열보다는 휴대성이 떨어지지만 휴대용 대공미사일 중에서는 수준급의 사거리를 자랑한다. 보병용 대공미사일은 미사일 탐색기를 냉각시키고 목표를 조준해야 한다. 보통 BCU라 불리는 배터리와 냉각장치가 합쳐진 장치를 이용하는데, 사용가능시간이 1분 내라 BCU를 다 사용하면 쏠 방법이 없다. 그래서 '휴대용'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대기하다가 관측조의 지령을 받으면 탐색기를 냉각하고 발사준비 한다. 이런 탓에 고속 전투기/고속 공격기는 사전에 아군 레이더 등으로 지령을 받지 않으면 맨패즈로 격추하기가 어렵다. 레이더가 없더라도 PRC-999K 등 무전기나 TRS를 갖춘 관측조로 조직을 이루어 운용하기가 필수다.
그러므로 프랑스는 빠르게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거치대 방식 미스트랄 지대공미사일을 개발했다. 대한민국 역시 미스트랄 운용 경험으로 신궁을 개발하였다.
기존에 운용한 미스트랄과는 세세하게 차이점이 있다. 특히 ATPS(추적훈련장비) 장비가 그렇다. 미스트랄 추적훈련장비를 만지다 신궁을 만지면 신세계. 장비의 간소화는 물론이고 운용면에서도 상당히 편하다. 미스트랄은 실제 미사일의 BCU 역할인 별도의 아르곤 가스탱크와 잡다한 장비가 필요하다. 반면 신궁은 ATPS 미사일과 배터리팩 하나면 끝이다. 아르곤 가스를 사용하는 편이 열원 추적은 잘 되지만 훈련을 자주 하기 어렵다. 반면 신궁은 배터리만 충전하면 얼마든지 계속 할 수 있다.
또한 전용 적외선 야간조준기를 장착 할 수 있어서 빛이 없는 상황에서도 운용할 수 있다.
국산 탐색기 적용 전의 시커 기술이 러시아의 이글라 및 스트렐라 기반이라 그런지, 실제 운용자들 사이에서는 명중률이 미스트랄보다 떨어진다는 평가를 듣는다. 두 기종 다 매뉴얼상으로는 명중률이 90%가 넘는데, 실사격 결과에 따르면 미스트랄은 저 수치에 근접하는 정확도가 나오는 반면 신궁은 그에 상당히 못 미친다. 확실히 서방 쪽 시커 및 전자공학 기술이 러시아에 비해서 높은 듯.
실질적으로 방공진지의 죽창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진지에서 같이 운용되는 타 대공병기들의 경우 천마 미사일을 제외하면 탄막을 통해 적기를 견제하는 것이 목표일 뿐 유도무기가 아니기 때문에 헬기와 같은 저속기가 아닌 이상 적기를 격추시키기가 힘들다. 그러나 신궁 내지 미스트랄은 시험사격에서 적어도 명중률 70% 이상인 유도무기이다. 단거리 방공유도무기라 미사일이 가볍고 기동성이 매우 좋기 때문에 사정거리 내로 들어온 적기 입장에서는 매우 위협적이다. 따라서 방공진지에서 고속의 적기를 격추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자 강력한 죽창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만큼 탄약 발사식 대공포에 비해서는 재장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개발사인 LIG넥스원은 신궁을 2연장, 혹은 4연장 자동발사기에 탑재하여 포항급 등의 초계함이나 닷지트럭에 얹어 단거리 대공망을 구성하려고 구상 중이다. 프랑스에는 먼저 미스트랄 지대공 미사일을 6연장화하여 사드랄 CIWS로 쓴다. AN/TWQ-1 어벤저 같은 사례도 있다.
이 LIG넥스원이 제안한 자동발사기는 K-30 비호 체계에 2연장 발사대 2개를 장착, 도합 4발이 장착되는 형태로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비호의 단점인 최대사거리 부족을 보충하게 되었다. 비호 복합 형상은 2013년 KUH-1 수리온 전력화 행사때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창정비마다 순차적으로 추가부착하는 형태로 개량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외에도 보병 운용 발사대 중 2연장 발사대 역시 LIG넥스원이 자체개발하여 여러 행사에 공개하고 있다. 미스트랄 등을 의식하여 해외수출용으로 개발했다고 한다
2011년에 인도에 수출을 시도했지만 최종계약에는 실패했다.기사. 게다가 미스트랄을 만든 프랑스의 MATRA社에서 특허와 관련된 소송을 걸어 해외수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16년 5월 29일 국방기술품질원에서 국산 탐색기를 탑재한 신궁의 품질인증 사격시험이 성공했다고 밝혔다. 휴대용 대공무기 '신궁'에 국산 탐색기 탑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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