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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9장: 사울의 회심과 베드로의 사역으로 이어지는 복음의 확장
1. 박해는 선교의 씨앗이 되었다
반갑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말씀을 공부할 수 있으니 참으로 소망스럽습니다.
지난주에는 박해가 오히려 선교의 씨앗이 되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도행전 8장 1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여기서 ‘유대와 사마리아’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시면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는 그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점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도들보다 흩어진 성도들, 특히 빌립과 같은 집사들을 중심으로 사마리아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마리아에서 복음이 전파되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도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빌립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처럼 사도행전 8장은 박해로 인해 흩어진 성도들이 오히려 복음을 널리 전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제 9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2. 사울의 등장과 기독교 역사에서의 중요성
사도행전 7장 마지막 부분에는 스데반이 순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사울이라는 청년이 등장합니다. 8장 1절에서는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게 여겼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사울은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부터 비로소 사울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성경 66권에서 모세와 사도 바울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큽니다. 모세는 구약의 율법과 오경을 기록한 인물이며, 바울은 신약성경의 여러 서신을 기록한 핵심적인 인물입니다. 바울이 기록한 서신은 일반적으로 13권으로 인정되며, 히브리서를 바울의 저작으로 보는 견해를 따르면 14권으로 계산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중요한 인물인 바울의 회심과 사역이 본격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하는 장이 바로 사도행전 9장입니다.
3. 사울의 위협과 사기가 등등하여
사도행전 9장 1절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여기서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라는 표현은 사울이 얼마나 격렬하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울은 단순히 기독교에 반대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처벌하려는 적극적인 박해자였습니다.
2절을 보면 사울은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대제사장에게 요청합니다.
이 배경을 이해하려면 당시 유대 사회의 정치적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유대 사회 내부의 종교적·공동체적 사안은 산헤드린과 같은 유대 지도机构의 권한 아래 처리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산헤드린의 의장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울이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요청했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허가를 구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찾아 체포하기 위해 당시 유대 사회의 제도적 권한을 이용하려 했다는 뜻입니다.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내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한 뒤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가 사용하는 표현에 주목해 봅시다.
사도행전 9장 1절은 그리스도인들을 ‘주의 제자들’이라고 부르고, 2절은 그들을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소개하면서 이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합니다.
첫째, 주의 제자들입니다.
둘째,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도’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호도스(hodos)*이며, 길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는 기독교 신앙을 하나의 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기독교 신앙을 ‘도’라고 부를까요?
예수님께서 친히 답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 자신이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어떤 종교적 교리를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동양의 여러 사상에서도 ‘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도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님은 길에 관한 지식만을 알려 주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전도사’라는 말은 교회의 직분이나 직책을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그러나 본래 전도란 복음을 전하는 일이며, 그 중심에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알리는 사명이 있습니다.
4.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만나신 예수님
사도행전 9장 3절입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사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에게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이 비쳤습니다. 나중에 바울은 이 빛을 한낮의 햇빛보다 더 밝은 빛으로 묘사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사울의 회심 경험은 세 차례 기록됩니다. 9장에서는 사건 자체가 서술되고, 22장과 26장에서는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사람들 앞에서 다시 설명합니다.
같은 사건이라도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강조점과 설명 방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경험을 꾸며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 가운데 전달하려는 상황에 맞게 어떤 부분을 강조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간증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증할 때는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을 무조건 다 이야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과 듣는 사람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통해 자신을 인도하셨는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선별하여 전해야 합니다.
이제 사울에게 일어난 사건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 4절입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여기서 두 가지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이고, 다른 하나는 귀로 들을 수 있는 음성입니다.
사울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리고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이 말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대답합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여기서 ‘주여’라고 불렀다고 해서 사울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어지는 “누구시니이까?”라는 질문을 보면, 사울은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강렬한 빛과 초자연적인 음성을 경험한 사울은 그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분을 ‘주여’라고 부른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 1절에서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이 이제는 땅에 엎드려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극적인 변화의 시작입니다.
5.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도행전 9장 5절에서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 말씀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직접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그가 박해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을 자신을 박해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누군가 부모의 자녀를 괴롭히면 부모도 고통을 느낍니다. 자녀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부모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박해를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사울의 폭력이 예수님을 향한 폭력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를 괴롭히고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주님을 섬긴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과 깊이 연결되어 계십니다.
예수님의 “나는”이라는 선언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나는’이라는 표현은 때때로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시며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표현은 하나님의 존재와 자기 계시를 나타냅니다.
신약성경의 헬라어에서는 ‘에고 에이미(egō eimi)’, 곧 ‘나는 …이다’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부활과 생명, 길과 진리와 생명, 참포도나무로 소개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58절에서도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자신이 계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 교사에 그치지 않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영원한 존재이심을 드러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만나신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심으로써 사울의 인생뿐 아니라 신앙의 토대까지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6. 주님께서 사울에게 맡기신 사명
사도행전 9장 6절에서 예수님은 사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예수님은 사울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알려 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직접 만나셨지만, 앞으로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시는 일은 다른 사람을 통해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시고, 사람을 통해 일하시며, 서로 협력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사울의 모든 선택을 강제로 결정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부르시고 사명을 맡기셨지만, 사울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자신의 삶으로 순종해야 했습니다.
이후 사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되어 갑니다.
함께 가던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들었을까?
사도행전 9장 7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 하고 서 있더라.”
그런데 사도행전 22장 9절에는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두 구절을 함께 읽으면 어떤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사울과 함께 가던 사람들도 빛과 소리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울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사울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직접 보거나 그분의 정체를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소리가 들렸느냐 들리지 않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말씀을 이해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일상적인 영어 표현으로 설명하면 *hearing*은 소리를 듣는 행위를 가리키고, *listening*은 주의를 기울여 듣는 행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다만 두 단어의 의미는 문맥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도행전 9장과 22장의 표현 차이도 원문과 문맥을 함께 살펴보아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 동사 ‘아쿠오(akouō)’는 ‘듣다’라는 뜻이며, 문장에서 어떤 격의 명사가 연결되는지에 따라 듣는 대상이나 방식에 차이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같은 현장을 경험하더라도 모두가 같은 의미를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같은 말씀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소리만 듣고 지나갑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깊이 귀 기울여야 합니다.
7. 사울의 눈이 어두워지고 사흘 동안 금식하다
사도행전 22장 6절을 보면 바울은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정오쯤 하늘로부터 큰 빛이 자신을 둘러 비추었다고 설명합니다. 한낮의 밝은 햇빛보다 더 강렬한 빛이었습니다.
그 빛을 경험한 사울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사울은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8절입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사울이 이제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자신이 진리라고 확신했던 것을 위해 살아왔지만, 예수님을 만난 순간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9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여기서 주목할 점은 ‘보지 못하고’와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의 차이입니다. 보지 못한 것은 신체적으로 볼 수 없는 상태였지만, 먹지 않고 마시지 않은 것은 자발적인 금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왜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을까요?
성경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두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 계시며,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신앙과 행동을 완전히 새롭게 돌아보아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머물렀습니다. 이 기간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더 깊이 배워야 했습니다.
8.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보내시다
사도행전 9장 10절부터는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등장합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그가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아나니아의 대답은 사무엘상에서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일어나 ‘직가’라고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다소 사람 사울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직가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곧은’이라는 뜻과 관련된 명칭입니다.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이 있는 구체적인 장소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 주셨습니다.
앞서 사울은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11절에서는 그가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성경은 사울의 기도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지만, 그가 주님을 만난 후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한 사울이 환상 중에 아나니아가 찾아와 자신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 주셨고, 아나니아에게는 그 일을 실행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두려워하는 아나니아
그러나 아나니아는 곧바로 순종하기 어려웠습니다.
사도행전 9장 13~14절에서 그는 사울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고 말씀드립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해를 끼쳤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울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자신을 해칠 수도 있는 사람에게 직접 찾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입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 말씀은 사울의 사명을 설명하는 핵심 구절입니다.
사울은 이방인뿐 아니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의 범위는 특정한 민족이나 사회적 계층에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평범한 사람과 권력자 모두가 복음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릇은 주인의 뜻에 따라 사용됩니다. 어떤 그릇은 귀한 음식을 담고, 어떤 그릇은 다른 용도로 사용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릇의 크기나 겉모양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맞게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셨다는 것은 사울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사명을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셨다고 해서 그의 앞길이 평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6절에서 주님은 사울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 보여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사명뿐 아니라 고난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것입니다.
9. “형제 사울아” — 복음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관계
사도행전 9장 17절입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이 장면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나니아에게 사울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결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찾아가는 것조차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나니아는 사울을 향해 이렇게 부릅니다.
“형제 사울아.”
이것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닙니다. 복음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관계를 보여 줍니다.
이전에는 박해자와 피해자였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의 과거만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를 찾아갔고, 하나님께서 그를 새롭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직접 만나셨지만, 그를 돌보고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아나니아를 통해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시고, 다른 사람을 통해 그 부르심을 확인하게 하시며, 공동체 안에서 함께 성장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새롭게 하실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돕는 아나니아가 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잘못만 바라보며 그를 배척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삶에 행하실 새로운 일을 믿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명과 사명
이 장면에서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의식입니다.
둘째는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일을 맡기시고 보내셨다는 의식입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사울에게 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아나니아를 통해 주님께서 자신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은 교만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겸손과 순종의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면, 나는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면, 나는 맡겨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소명과 사명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으로 연결됩니다.
10. 사울이 다시 보게 되고 침례를 받다
사도행전 9장 18절입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사울은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전에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울이 이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의 회심은 단순히 생각을 바꾸거나 종교적 견해를 수정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으며, 새로운 삶의 방향을 받아들인 사건이었습니다.
침례는 그가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후 사울은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바치게 됩니다.
11. 사울의 첫 번째 전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사도행전 9장 20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사울은 회심한 뒤 곧바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전한 핵심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놓인 고백입니다.
요한복음 1장 1~18절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 교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시며,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관한 지식만 쌓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고 그분을 믿으며,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 21절을 보면 사울이 전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놀랍니다.
그들은 사울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제는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님을 전하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더욱 힘을 얻었습니다.
22절은 그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며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을 당황하게 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표현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를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지 증거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리나 제도를 전하더라도 그 중심에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복음의 중심은 제도 자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12. 다메섹에서 탈출한 사울
사울이 예수님을 담대하게 전하자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 23~24절은 그들이 사울을 죽이기 위해 밤낮으로 성문을 지켰다고 기록합니다.
다메섹을 빠져나가려는 사울을 붙잡기 위해 성문까지 감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제자들은 밤에 그를 광주리에 담아 성벽으로 내려보냈습니다.
이렇게 사울은 다메섹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사울의 회심이 단순히 개인적인 감동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마자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이 자신의 이름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그의 사역 초기에 현실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13. 사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다
사도행전 9장 26절은 사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제자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이해할 만한 반응입니다. 사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정말 변화되었는지, 아니면 교회 안으로 들어와 다른 사람들을 붙잡으려는 것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의 사건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갈라디아서 1장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7~18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회심한 뒤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다른 사도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후 3년이 지나서야 예루살렘에 올라가 게바, 곧 베드로를 만났으며, 그와 함께 15일을 머물렀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9장의 사건들을 읽을 때는 시간의 흐름을 주의해야 합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탈출한 뒤 곧바로 예루살렘에 간 것으로 단순하게 이해하면 갈라디아서의 기록과 연결하기 어렵습니다.
사도행전은 사건을 간결하게 서술하기도 합니다. 다른 성경의 기록을 함께 살펴보면 생략된 시간과 사건의 흐름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뒤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하고, 복음을 이해하며, 앞으로 감당할 사명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다만 아라비아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준비했던 것처럼, 사울에게도 회심 이후 사역을 준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상황이 같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신 뒤 그를 준비시키시는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4. 바나바가 사울을 받아들이다
사도행전 9장 27절입니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울이 예루살렘에 돌아왔지만, 제자들은 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때 바나바가 등장합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그가 주님을 만난 경험과 다메섹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사실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바나바는 이전에도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사도행전 4장 36절을 보면 그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으로,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를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나바라고 불렀습니다.
바나바는 훗날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동역자가 됩니다. 마가 요한도 초기 선교 활동에서 그들과 연결되는 인물입니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사촌으로 소개됩니다(골로새서 4장 10절).
여기서 바나바의 역할을 주목해 봅시다.
바나바는 사울의 과거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살펴보고, 그가 실제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공동체에 설명했습니다.
누군가의 과거가 어두웠다고 해서 그 사람의 미래까지 어둡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변화된 사람을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도록 돕는 중재자가 필요합니다.
바나바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을 함께 읽기
여기서 갈라디아서 1장 18~19절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회심 후 3년이 지나 예루살렘에 올라가 게바와 15일을 함께 지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형제 야고보 외에는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 기록을 사도행전 9장 27절과 함께 읽으면, 사도행전에서 사용된 ‘사도들’이라는 표현을 무조건 열두 사도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교회 지도자들과 공동체의 상황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는 한 구절만 떼어 읽기보다 관련된 다른 구절과 비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기록의 배경과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5. 예루살렘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
사도행전 9장 28~29절은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담대하게’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사울은 더 이상 자신이 믿는 바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공개적으로 증언했습니다.
그가 예전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복음은 사울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의 지식과 열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열정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데 자신의 열정을 쏟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데 그 열정을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단순히 성격이 온순해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열정이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되도록 변화되는 것도 포함합니다.
16. 사울이 다소로 가다
사도행전 9장 30절입니다.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사울을 죽이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자 형제들은 그를 가이사랴로 데리고 가서 다소로 보냈습니다.
이렇게 사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자신의 고향 지역인 길리기아의 다소로 가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1장의 기록을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게바와 15일을 함께 지냈습니다. 이후 다소로 돌아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다소에서 정확히 몇 년 동안 머물렀는지는 성경이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라비아에서의 기간과 다소에서의 기간을 각각 특정한 연수로 확정하는 데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울이 회심한 뒤 즉시 사도행전 전체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한동안 기록의 중심에서 물러나 있었고, 그 사이 사도행전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복음이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사람을 부르신 뒤 즉시 전면에 세우지 않으십니다. 준비하는 시간과 기다리는 시간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17.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다
사도행전 9장 31절입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 구절은 사도행전 9장의 중요한 결론입니다.
앞에서는 박해가 있었고, 사울의 회심이 있었으며, 그가 다시 박해를 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은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갔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교회의 성장 방식입니다.
첫째, 교회가 평안했습니다.
둘째, 교회가 든든히 서 갔습니다.
셋째, 주님을 경외했습니다.
넷째, 성령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더욱 성장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사람의 숫자만 늘어나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을 경외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믿음 안에서 든든히 세워지는 공동체입니다.
또한 이 구절에서 사도행전의 표현이 달라지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회당이나 제자들, 형제들이 등장했지만 이제는 ‘교회’라는 표현이 중심에 놓입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모임을 가리키는 반면,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물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적 배경과 회당을 통해 활동하기도 했으므로 두 집단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사울의 이야기는 잠시 뒤로 물러납니다.
사도행전 9장의 후반부부터는 베드로의 사역이 다시 중심에 놓이고, 10장과 11장에서는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는 중요한 사건들이 이어집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 가운데 베드로의 사역과 바울의 사역은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전해지는 과정을 보여 주는 중요한 축입니다.
사울은 다소로 가게 되었고, 이제 성경의 기록은 다시 베드로의 사역으로 이어집니다.
다음으로 사도행전 10장과 11장에서 베드로를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핵심 요약 정리
1. 박해는 오히려 선교의 씨앗이 되었다.사도행전 8장에서 예루살렘의 박해로 흩어진 성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을 전했다.
2. 사울의 회심은 복음의 능력을 보여 준다.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복음의 증인이 되었다.
3.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신다.“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말씀은 성도들에게 가해지는 박해를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4.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예수님은 사울을 직접 만나셨지만, 아나니아를 보내어 그를 돌보고 공동체와 연결하셨다.
5. 복음은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사울에게 아나니아가 “형제 사울아”라고 부른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보여 준다.
6. 소명과 사명에는 순종이 필요하다.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확신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과 충성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7. 전도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사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약속된 그리스도이심을 전했다. 복음의 중심은 제도나 사람의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이다.
8.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준비하는 시간이 있을 수 있다.사울은 회심 직후 곧바로 지속적인 선교 활동의 중심에 서지 않았다. 아라비아와 다메섹을 거친 뒤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다소로 갔다.
9. 바나바는 변화된 사람을 공동체와 연결했다.그는 사울의 과거만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행하신 일을 증언했다.
10. 건강한 교회는 주님을 경외하고 성령의 위로로 성장한다.사도행전 9장 31절은 교회의 성장이 단순한 숫자의 증가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든든히 세워지는 과정임을 보여 준다.
핵심 메시지:하나님은 박해자를 복음의 증인으로 변화시키시며, 사람을 통해 사람을 부르시고 세우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변화된 사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모든 사역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두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