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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장 세족과 성만찬
13장을 공부하게 되겠는데요. 다시 한번 총정리를 하면 요한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고 하는 사실 이제는 선명히 이해하시죠. 요한복음은 1장 1절부터 18절, 아 그거는 암기해 주셔야 합니다. 1장 1절부터 18절까지가 요한이 직접 겪어보지 못한, 그의 눈으로 보지 못한 그러나 계시로 깨닫게 된 내용,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Pre-existence), 그렇게 말하죠.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에 관한 그 본질적 선언을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에 하지요. 우리가 믿는,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분 예수님께서는 단지 인간 왕이라든지, 단지 우리를 구원한 종이라든지, 단지 사람으로서 그저 우리의 스승이나 구주가 되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셨다 하는 선언을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에서 하시죠. 끊임없이 확인하고 반복해야 할 이것에 대한 우리의 믿음, 끊임없이 재점검해야 되는 내용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 그다음 요한복음 1장 19절부터 12장까지는 예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지를 우리 인간들에게 보여주는 일곱 가지 표적이 나왔었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9절부터 12장 마지막 절까지를 표적의 책이라 부르고, 예수 우리 주님의 십자가로 가는 길을 계속해서 영광, 영광, 영광이라고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일을 통해 우리 주님이 영광을 받으셨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요. 오늘 처음 참여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다시 한번 표현해 드리면, 요한복음 1장 19절부터 12장 마지막 절까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는 일곱 가지 표적이 언급되고, 동시에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일곱 가지 자기 선언이 표현되고, 여러분 말씀드렸죠? 동시에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을 향한 일곱 번의 고백이 나타난다 그랬습니다. 그 내용들은 아직 다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나타날 때 하나씩 다 확인하도록 하고, 일곱 가지 표적은 12장까지로 다 지나갔기 때문에 지난주에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각각의 표적의 의미까지 우리 함께 살펴보며 공부한 바가 있습니다.
자, 그런데 요한복음 13장부터 20장까지를 ‘영광의 책’이라 이렇게 부른다고 했는데, 그 영광의 책에 영광이라는 단어의 내용은 십자가인데, 요한복음 13장부터 20장 전체가 다 십자가에 관한 혹은 십자가로 가는 십자가의 책이지만, 그 안에서 또 하나 구분해야 할 것은 기억해 주십시오.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를 뭐라고 부르는가 하면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 The Last 강화, 흔히 성서학자들은 그렇게 표현합니다. ‘예수의 다락방 강화’. 그런데 다락방 강화가 13장부터 17장 전체일까?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다락방 강화라는 단어, 다락방이란 단어를 좀 사용하지 않습니다. 조금 이따 설명드리겠습니다만 예수님의 마지막 여러 말씀들 중에서 13장, 14장이 다락방에서 하신 말씀임이 틀림없고요. 15장부터는 뭔가 장소를 옮겼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게 13장, 14장의 공간적 배경은 다락방이고, 시간적 배경은 예수님의 수난 주간 중 목요일 밤입니다.
다 함께 13장 1절을 보시죠. 요한복음 13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제 그 십자가로 가시는 그 주간의 목요일 저녁, 요한복음은 월, 화, 수까지의 기록을 전혀 하지 않아요. 마태, 마가, 누가는 다 있어요. 그런데 요한은 여기로 푹 건너뛰어서 설명합니다. 13장 1절 첫 단어, “유월절 전에” 이렇게 씁니다. 유월절은 금요일이에요. 금요일 오후에 예수께서 유월절 양으로 죽으시잖아요. 정확히 말하면 사실 이 “유월절 전에”라고 했는데, 이 유월절 전에는 정확히 말하면 하루 전이에요. 목요일 저녁이니까요. “유월절 전에” 하고 그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세족 예식 하신 다음에 그다음에 성찬식으로 들어가거든요. 소위 최후의 만찬입니다. 예수 주께서 마지막으로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잡수신 바로 그 심각한 이야기, 그때 있었던 심각한 사건. 그게 수난 주간 목요일 저녁에 있었던 일인데, 목요일 밤에 있었던 일인데 그 최후의 만찬이 있기 전에 있었던 일이 여기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어요. 요한복음에만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세족 예식을 기록하기 전에 요한복음 13장 1절로 3절에서 이 세족 예식이 있기 전 서론이 나옵니다. 이 서론은 철저하게 그날 세족식에 있었던 그 사건의 전후 맥락에 대한 요한 자신의 설명입니다. 일종의 내레이션이라 그러지요. 해설입니다. 그런 맥락을 이해하고 한번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13장 1절, “유월절 전에”, 이건 시간적 배경을 설명해 주는 표현이죠.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여러분, 이 표현, ‘때를 아신다’는 이 표현은 우리 예수님에게 적용되는 대단히 독특한 표현입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때와 관련된 표현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다 함께 요한복음 13장 바로 전 장인 12장을 한번 보시죠. 요한복음 12장 23절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뭐라 그러나요? “왔도다” 했습니다. 여러분, 여기 요한복음 12장 23절에서 예수께서 “때가 왔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그 전까지는 뭐라 말씀하시는지 볼까요? 다 함께 8장 20절을 보세요. 요한복음 8장 20절에 보면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그다음 뭐라 그러나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라.” 8장 20절까지는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 이렇게 표현하지요.
그런데 더 유명한 성경절,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거 아시죠? 다 함께 요한복음 2장 보시죠. 요한복음 2장 4절에 보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뭐라 말씀하세요?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러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러니까 요한복음 2장에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 그다음 요한복음 8장 20절에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예수께서는 그렇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하는 표현을 종종 언급하시는 거예요. 하나 더 있다면 7장에도 나옵니다. 7장 6절과 30절에도 나와요. 그러니까 2장 4절, 7장 6절, 30절, 그다음 8장 20절까지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이, 12장 23절에 와서 아까 읽은 대로 “내 때가 왔도다” 하고, 그다음 13장 1절에서 요한이 친히 뭐라 말씀하세요?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 미리 더 찾아볼까요? 17장 1절입니다. 17장 1절에 보면, 이 17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공중 기도거든요. 17장 1절에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그럽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2장 4절, 7장 6절, 8장 20절까지는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다가, 12장 23절, 13장 1절, 17장 1절에서는 “내 때가 왔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수께서 내 때가 왔다라고 말씀하시는 순간이 언제부터입니까? 십자가가 바로 앞에 왔을 때입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무슨 일을 하실 때, 이런 마지못해 이런 걸 하라고 이야기하셔도 내 때가 아직 이르러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실 때의 ‘내 때’는 십자가의 때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당신의 때를,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미션에 대한 인식, 자기 사역의 타이밍에 대한 인식이 선명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이때에 와서 자기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십자가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이렇게 본문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이건 요한이 지금 설명해 주는 겁니다.
그다음 하단을 보시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자기 사람들이라고 하는 ‘이디오스(idios)’라는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his own’, 그 자신의 진짜 백성, 자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다음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렇게 썼습니다. 이 단어를, 이 표현을 우리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 표현을 누가 기록했어요? 요한이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이 뭐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장면이에요. 그런데 선생님에게 발 씻김을 당한 사람이 누구예요? 이 사건을 기록하는 요한 자신이에요.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것은 이 모든 사건이 끝나고 난 이후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보다도 훨씬 더 후에, 복음서 제일 마지막으로 기록한 게 요한복음이거든요.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이때 이 장면을 자기 스스로 떠올리며 기록하는데, 그때 선생님이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기며 다가오셨을 때 요한 자신도 선생님에게 발 씻김을 받았거든요. 그때도 요한은 “선생님, 제가 씻기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왜 요한이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여기에 어쩌면 요한의 심정을 우리가 깊이 들여다보면서 다시 생각해 본다면, 요한이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는 이 표현을 남긴 것은 ‘나 같았으면 이때 주님처럼, 선생님처럼 못 했을 것 같아’ 하는 자의식이 너무도 선명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지요. ‘이때만큼은 이놈들아 뭐 하는 거야 하고 혼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그때도 선생님은, 우리 선생님은 이렇게 하셨어’라고 하는 요한 자기 자신의 깨달음이 깊이 투영되어 있는 표현이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입니다. ‘나 같으면 안 사랑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라는 자기 심정을 예수님께서 발 씻겨 준 장면 맨 앞에다가 미리 표현하고 있는 거지요. 이게 주님의 속성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속성 앞에서 자꾸 우리의 수준으로 우리 주님의 그 사랑의 심정을 제한해서 이해하면 안 되지요. 그야말로 주님은 사랑하시되, 그 속을 다 들여다보고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를 다 헤아리는 그런 상황에서도 주님은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하는 것을 요한은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2절입니다. 요한은 그때 장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이어지는 사건에서 너무 중요한 사건이 유다의 행동이었어요. 그날 그 다락방에서 세족 예식과 관련돼서 이 장면을 기록하려고 할 때 요한의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아주 부담되는 사건이 유다의 행동이었거든요. 그래서 그 유다의 행동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먼저 합니다. 2절을 보시죠.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우리는 요한복음 13장 2절의 기록을 통해서, 사도 요한의 이 표현을 통해서 한 사람의 생각이 다만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신학적 설명을 얻게 되지요. 마음에 생각이 작동하는 장소가 마음이라고 하는 표현을 쓰고요, 그 마음에서 움직이는 인간의 인지 작용을 생각이라고 표현하고 있죠. 구태여 헬라어 원어를 동원하지 않겠습니다. 이 번역 그대로입니다. 마음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쓰고 생각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이 표현을 유다가 마음속으로 예수를 팔겠다는 생각을 하더라고 쓸 수 있거든요. 그런데 요한은 뭐라고 표현했나요? “마귀가 벌써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 요렇게 요한이 표현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 구절에 의하면 한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반역적 생각은 그 자신에게서부터 비롯되는 자연적 발상이라기보다, 어떤 초자연적 악한 존재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라고 하는 표현으로 요한이 기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제 3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죠. 그다음 3절입니다. 저녁 드시기 전이 아니고요, 저녁 먹는 중입니다. 3절, 무슨 뜻이에요, 여러분? 팔레스타인에서 밥 먹을 때는 반드시 여행을 끝내고 밥 먹을 때 먼저 발을 씻겨 줘야 돼요. 그런데 저녁 먹기 전이 아니고 저녁 먹는 중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발을 씻겨 줘야 하고 손을 씻어야 하는데 제자들이 아무도 그걸 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거지요. 그래서 발도 안 씻은 채 식사를 시작하게 됐어요. 이 저녁 먹기 전이 아니고 저녁 먹는 중이라고 하는 이 단어를 통해, 제자들 사이에서 발도 안 씻고 서로 눈치 보면서 식사를 시작한 그 분위기를 다 캐치해 내야 합니다. 그래서 발도 안 씻고 먹는 제자들을 둘러보던 선생님이 기다리다가 직접 일어나시죠.
자,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아시고’가 몇 번째 나왔어요? 예수님의 세족 예식이 시작되기 전에 예수님이 그러한 행동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를 나타내 주는 두 가지 ‘아시고’가 나왔습니다. 13장 1절에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3절에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반복 강조하는 거지요. 주님께서는 정확하게 당신이 어떤 타이밍에 와 있는지를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13장 1절과 3절이 세족 예식을 직접 거행하신 예수님의 동기를 두 번의 ‘아시고’라고 하는 동사로 설명한 다음에 4절부터 이제 주님이 시작하십니다.
4절,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러니까 아까 3절에서 ‘저녁 먹는 중’이라고 하는 단어와 ‘저녁 잡수시던 자리’라고 하는 이 단어에서 제자들의 분위기가 다 캐치돼야 된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눈치 보고 안 움직이고 있다가 선생님도 그냥 시작하는가 보다 하고 식사를 먼저 시작했다가, 저녁 드시다 말고 선생님이 일어나신 겁니다. 그 나머지 내용은 다 자세히 읽지 않습니다. 이 사건에서 주님이 보여주시는 교육 방법 한마디로 뭐죠? 모델링, 시범이죠. 군대 가면 늘 시범 보여주잖아요. 숙달된 조교가 시범을 보여주면 되는데, 이때 선생님께서 그야말로 시범을 보여주심으로, 모범을 보여주심으로, 사례를 직접 실천하심으로써 그의 제자들이 따라가야 할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델링 교육, 아주 전형적으로 보여주시는 거지요.
자,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다음 봐야 할 성경절 5절,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이랬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몇 번째쯤 되었는지를 몰라요. 제자들 베드로에게 이르기 전까지 몇 명이나 발을 닦아주셨는지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가 없어요. 12명 중에 반쯤 오셨는지, 한두 명 하셨는지, 한 명만 하고 그다음인지, ‘시작하여 이르시니’라는 말을 통해서 보면 베드로가 시작은 아니에요. 그러나 그전에 베드로에게 이르기 전에 한 명인지 두 명인지를 우리가 몰라요. 여하튼 5절에서 “시작하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라는 이 말을 통해, 제자들이 누구로부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식사하던 중에 선생님이 식사하시다 말고 일어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발을 씻기 시작하셨는데, 제자들이 그 발을 내밀고 그냥 있을 만큼 다른 제자들의 발을 씻길 마음이 없었던 거지요.
이때 제자들은 선생님에게 발을 내놓고 있을 만큼 뻔뻔했던 게 아니고, 그렇게 하면서까지라도 내가 발을 씻기기 시작하면 다른 제자들의 발을 다 같이 씻겨야 되기 때문에, 누구의 발도 나는 씻기고 싶지 않은 제자들의 마음 상태를, 그 마음 상태가 얼마나 굳게 닫혀 있었는지를 ‘시작하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에서 읽어내야 하지요.
그다음 베드로의 반응에서 또 읽어낼 게 있습니다. 베드로가 뭐라고 반응을 하지요? “선생님, 제가 하겠습니다” 안 합니다. 베드로가 뭐라고 하나요? 6절 하단에 보면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그럽니다. ‘안 됩니다’ 그 말이에요. “선생님, 제 발 씻으시려고요?” 그 뒤에 말은 안 되지요. “선생님, 제가 씻길게요” 이렇게 해야죠. 어차피 발을 서로 씻겨줘야 하거든요. “제가 씻길게요”가 아니고 “제 발은 못 씻깁니다”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 발 씻길 마음은 베드로에게 없는 거예요. 그때 선생님이 뭐라 그러시나요?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주님이 하시잖아요. 십자가를 앞두고 하시는 말씀이거든요.
8절, 베드로가 확언합니다. 못을 박습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여러분, 이 말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선생님, 제가 씻기겠습니다” 지금도 그 말을 안 합니다. 발 씻김의 전제는 내가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거예요. 여기서 뭘 알 수 있나요? 예수의 제자들로 형성된 제자 공동체 사이에서도 제자들끼리 서로를 섬기는 일이 정말 어렵구나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교회에 가서 교인들끼리 높고 낮음을 다투고 싸우는 일은 예수께서 3년 반 동안 직접 데리고 다녔던 이 제자들에게서도 끝까지 반복되었던, 마지막까지 지속되었던 어쩌면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본질이지요. 베드로도 끝까지 자기가 발을 씻기겠다고 나서지 않고 “내 발 못 씻기겠다”고만 합니다. 그런 부분 우리가 함께 읽어내야 되겠죠.
그러자 예수께서 우리 주님이 선을 딱 그어버립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이건 뭐 베드로에게 벼락 치는 말이잖아요. 왜냐하면 베드로는 자기가 수제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상관이 없다고 하니까 이건 기겁할 일이니까요. 우리가 잘 알듯이 베드로가 곧바로 뭐라 반응하죠? “목욕시켜 주세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하니까 10절을 이해해야 됩니다.
10절 보시죠. 10절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이걸 하나의 세리머니로 국한해서 표현하면 무슨 뜻이에요? 기독교의 의식으로 제한해서 표현하면 ‘침례(세례)받은 사람은 세족 의식만 하면 돼’ 그렇게 의식의 용어로, 의식의 실천으로는 제한적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런 의식적 차원에서 말하지 않고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하는 이 말을 신학적 의미, 그리스도인 경험의 차원으로 이해하면 무슨 뜻일까요?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고백했던 사람,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매일의 삶 속에서 겪게 되는 작은 실족들, 작은 실수들, 그리고 연약함으로 저지르는 죄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근본적으로 돌아섰다기보다 관계의 훼손이기 때문에, 그 관계의 훼손을 복원하는 회개의 삶을 반복하면 된다라고 하는 의미가 있는 거지요.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매일매일 침례를 반복하며 ‘하나님, 나 이제부터 하나님 섬길 거야, 그러니 침례를 다시 받을 거야’ 하고 침례를 수없이 반복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주님께서 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발 씻는 경험은 매일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기 때문에 ‘매일매일 반복되어야 하는 삶이야’라는 말씀을 주님께서 해주신 거지요.
그다음 12절부터 뒤에 20절까지입니다. 12절부터 20절은 예수께서 이 세족 예식을 행하신 목적과 이유에 대해서 직접 설명하시는 거지요. 13절 보시죠.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선생이고 주다. 그다음 14절,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여기서 예수께서 세족 예식을 행하신 이유가 예수의 입을 통해 선명하게 설명되죠. 세족 예식을 주님께서 직접 행하신 목적입니다. 말로 가르치시니까 제자들이 잘 안 하니까 주님께서 행동으로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말에 의한 교훈이 있고 행동에 의한 교훈이 있지요. 세족, 형제의 발을 씻긴다, 그 근본정신이 겸손인 것은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죠. 사람이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겸손해야 한다는 이 사실은 예수께서 말로만 보여주신 게 아니고 행동으로 보여주신 교훈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겸손을 실현하는 것은 가장 본질적 덕목이다 하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래서 저나 여러분이나 살아가면서 다 우리가 ‘나 잘난 맛’에 살아가잖아요. 그런데 요한복음 13장의 이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세족식을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는 의식적으로 또 의도적으로 ‘너 잘난 맛’에, 너를 섬기는 마음으로 마음의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자꾸만 자각하고 성찰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훈련(Practice), 그것을 우리들의 삶 속에서 구현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되죠.
여러분, 그런데 이 세족식을 거행하는 중에도 우리 주님의 마음에 계속해서 부담되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뭘까요? 13장 2절에서 요한이 가룟 유다를 언급했죠. 그런데 10절을 보시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할 때 우리 주님의 말씀 속에 뭐가 언급되어 있나요? 1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다는 아니니라”, 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11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이건 요한의 설명이죠. 예수께서는 “다는 아니니라”라고만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요한이 나중에 요한복음에서 이 세족 예식을 기록하면서 ‘아, 예수께서 그때 다는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우리 선생님이 유다 생각하고 하신 말씀이야’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겁니다.
다시 어디를 보는가 하면 18절을 보시죠. 이 장면에서 세족 예식을 행하시면서까지도, 그 순간에도 우리 주님의 마음에 부담이 됐던 일. 18절,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이게 시편 41편 9절의 인용이거든요.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이 말이 무슨 말이에요? 이게 속담이에요, 여러분. ‘내 떡을 먹는 자가 발꿈치를 들었다’ 이 말은 구약 시대에 사용하던 속담입니다. 구약 시대에 뒤에 가서 용변 보는 것을 ‘발을 가리운다’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사울이 다윗을 쫓으러 가다가 굴에 들어갔을 때 “사울이 발을 가리러 들어가매” 그런 표현이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상에서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하는 이 말은 배신을 가리키는 구약의 속담 같은 표현입니다. ‘내 떡을 먹는 자,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배신한다’ 시편 41편 9절에 나오는 구절의 의미예요.
예수께서 지금 발을 씻기시는 이 장면에서 시편 41편 9절의 ‘친구가 배신한다’는 그 구절을 인용하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베드로가 “내 발을 씻기지 못합니다”라고 말하기까지 베드로가 마지막이었는지 중간이었는지 몰라요. 그러나 제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아마도 베드로가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무슨 뜻이에요? 요한도 발 씻김을 받았고 유다도 발 씻김을 받았다는 거지요. 적어도 베드로가 마지막이 아니라면 베드로 발 씻기신 다음에 또다시 제자들 나머지 다 씻기신 거지요. 그러니까 이때 발 씻김을 받지 않은 제자가 한 명도 없으니까 유다의 발까지 주님이 씻기신 거지요.
그러면 지금 예수를 팔 생각을 마귀가 그 마음에 이미 집어넣고, 이 선생님을 언제 팔아넘길까 생각하고 있는 유다도 예수님 앞에 발 내밀고 선생님한테 씻김을 받은 거지요. 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선을 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른바 루비콘강을 건너는 것처럼요. 회개의 가능성이 끊기는 순간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회개의 가능성이 끊기는 순간이 언제였을까요? 요한복음 13장에서 우리는 그걸 읽어내야 합니다. 어쩌면 그 순간이 선생님이 자기 발을 씻기고 일어날 때까지 수없이 고민했을 겁니다. ‘아, 그만둘까? 선생님, 죄송합니다 할까?’ 유다가 자기 발에 선생님의 손이 닿는 그 순간마다 얼마나 갈등했겠어요.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가 마음을 바꾸지 않고 끝내 발을 다 씻길 때까지 그냥 있는 그 순간이 딸깍 선을 넘어가는 순간이죠.
예수께서 어쩌면 유다의 발을 씻기신 다음에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고 나면 ‘아, 선생님이 그때 그런 심정이었구나’ 하고 믿게 하기 위해서 미리 말씀하시는 거지요. 20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끊임없이 ‘보냄을 받은 자’로 묘사한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다음 21절부터 30절까지는, 이제는 세족 예식의 순간에도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힘들게 했던 유다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세족식 이후에 진행되는 최후의 만찬 순간을 유다를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21절, 주목해서 봐야 할 구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이거 하이라이트 하셔야 됩니다. 세족식 하신 다음에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는데, 그 순간도 주님의 마음은 괴로우셨습니다. 그 괴로우신 이유에 대해 13장 2절에서 힌트가 주어졌고, 10절에서 주님이 미리 표현하셨고, 18절에서 강조하셨다가, 21절에서 아예 ‘괴롭다’는 단어까지 쓰셨습니다.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을 다 읽으시는 선생님의 마음이 ‘괴롭다’라는 말로 성경에서 요한에 의해 표현되고 있는 거지요.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아예 제자들을 향해 명시적으로 말합니다. 제자들이 서로 누구인지 묻습니다. 다 아시는 대로 최후의 만찬 그림에 그려진 것처럼,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식사 자세가 비스듬히 누워서 상대방의 품에 안긴 것처럼 되잖아요. 예수께서 누워 계시고 예수의 품에 요한이 안겨 있는 듯이 보이는 상황이지요.
23절,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사랑하시는 자’는 요한이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관습적 표현이죠. 요한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나 사랑했거든’ 이렇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지요.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 있는지라.” 24절, 베드로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야, 선생님한테 누구인지 물어봐” 하자, 25절,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26절,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품 안에 안겨서 이야기했기 때문에 요한은 그 대화를 들었지만, 주변 제자들은 못 알아들었습니다. 예수의 품에 안겨 있던 요한과 주님만의 대화였습니다.
27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여기에 중요 표시를 하세요. 요한의 신학적 설명이에요. 요한복음 전체를 통틀어 ‘사탄’이라는 단어는 여기만 나옵니다. 아까 13장 2절에서는 요한이 뭐라 표현했어요? “마귀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벌써 넣었더니”, 처음부터 그렇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떡 조각을 받은 후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건 요한이 뭘 이야기하는 겁니까? 유다는 선을 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그 순간 유다는 완전히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걸 요한이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라고 기록했습니다. 떡 조각을 받는 순간이야말로 유다가 돌아섰어야 할 마지막 기회였는데, 요한이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가 완전히 사탄에게 장악당한 순간이었던 거지요.
27절 후반부,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요한과 예수님만의 대화였기 때문에 나머지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전혀 모릅니다. 29절,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한지라.” 제자들은 ‘선생님이 코스트코에 가서 물건 사 오라고 보내시는가 보다’, ‘가난한 사람 도와주라고 보내시는가 보다’ 생각했다는 겁니다.
30절,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더라.” 이렇게 해서 유다가 나갔습니다.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발 씻김을 넘어서서 예수께서 주시는 조각을 받아들고 일어서서 나가는 그 순간이 사탄이 그 속을 완전히 장악한 순간이라고 신학적 해석을 해주고 있는 거지요. 이렇게 해서 가룟 유다의 운명이 결정(Fixed)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돌아서지 못할 선을 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가룟 유다와 우리 주님의 관계를 보면서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유다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되겠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31절입니다. 드디어 영광의 책이 본격적으로 기록을 시작합니다. 31절,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여러분,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왜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이제 십자가가 확실해졌다는 뜻입니다. 가룟 유다가 선생님을 팔려고 나갔기 때문에 이제 십자가의 길은 확정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 아버지께도 영광입니다.
32절,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여러분, 이거 문법적으로 어렵습니다. 31절에서는 이미 영광을 받았다고 과거형으로 말했는데, 32절에서는 하나님이 그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라고 미래형으로 말합니다. 이 영광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이 ‘영광’이라는 단어 속에 다 압축되어 표현된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유다가 나감으로써 십자가가 확정되어 영광을 받으셨고, 그 십자가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승천시키셔서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승리, 부활의 승리, 승천의 승리, 이 모든 구속사의 전 과정이 31절과 32절에서 ‘영광’이라는 단어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33절입니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하면, ‘전에 나를 핍박하던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죽음의 길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제자들아 너희도 지금은 내가 가는 죽음의 길, 십자가의 길에 함께 올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살아 계실 시간이 하루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죽음의 길로 가신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런 괴로운 심정 속에서 34절에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유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계명은 유언의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새 계명일까요? 구약 레위기 19장 18절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이미 나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새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네 자신을 사랑함 같이”였지만,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기준이 자기 자신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바뀐 것입니다.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의 궁극적인 의미와 제자의 표식을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36절부터 38절까지는 베드로의 배신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이 나옵니다. 13장은 우울하게 마칩니다.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예언으로 끝납니다. 유다는 나갔고 베드로는 목숨을 바쳐 주를 따르겠다고 장담하지만, 38절에서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으로 마칩니다.
요한복음 13장은 목요일 저녁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 전에 행해진 세족식을 통해 구속사적 의미와 예수님의 심정, 가룟 유다의 배신 과정을 신학적이면서도 심리학적으로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이제 유다는 나갔고 11명의 제자가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11명의 제자에게 주님께서 다락방에서 마지막으로 주시는 말씀이 요한복음 14장입니다.
요한복음 14장 31절 마지막을 보면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 때문에 다락방 설교는 14장에서 끝났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 비유는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으로 가시며 달빛 아래 포도밭을 지나실 때 주신 교훈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13장과 14장을 정리하면, 13장은 다락방에서 거행된 두 가지 예식인 ‘세족식과 성찬식’이며, 14장은 그 예식 후 다락방을 떠나기 전 제자들에게 남기신 ‘예수님의 다락방 설교’입니다. 그렇다면 다락방을 떠나시기 전 예수님께서 남기신 마지막 교훈은 과연 어떤 내용일까요?
핵심 요약 정리
요한복음의 구조적 특징:1:1~18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 1:19~12장은 7가지 표적이 중심이 되는 ‘표적의 책’, 13~20장은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다루는 ‘영광의 책’입니다. 13~14장은 다락방을 배경으로 하며, 15장 이후는 감람산으로 이동하며 주신 교훈입니다.
‘때’에 대한 자각:공생애 초기(2:4, 7:6, 8:20)에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셨으나, 십자가를 목전에 둔 시점(12:23, 13:1, 17:1)부터는 “때가 왔다/이르렀다”고 선언하시며 구속사의 타이밍을 명확히 인식하셨습니다.
세족식의 의미 (모델링 교육과 섬김):식사 중에도 서로 눈치 보며 발을 씻기지 않던 제자들에게 친히 본(Model)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목욕과 발 씻기:목욕은 단번에 받는 구원(침례/세례)을 의미하며, 발 씻기는 매일 짓는 죄와 연약함을 씻어내는 일상적 회개와 관계 회복을 의미합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과 영적 분기점:마귀가 생각을 넣었을 때(13:2)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고집하던 유다는, 예수님이 씻겨주시는 손길과 떡 조각을 받는 마지막 은혜의 순간마저 거절함으로써 사탄에게 완전히 장악되어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게 됩니다(13:27).
십자가의 역설적 영광:유다가 배신하러 나간 순간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영광이며, 이는 부활과 승천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새 계명의 기준:“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구약)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신약)로 사랑의 기준이 ‘예수님의 자기희생적 십자가 사랑’으로 격상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