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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은 우주진리의 깨달음"
운 허 (耘虛) 큰스님 (1892-1980)
부처님이 성불했다고 하는 것은 우주진리를 체험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지혜가 우주의 진리와 일치한 것이고,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 가지고 우주의 진리대로 우리 중생에게 사십 오년동안 설법을 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이 성불하신 후에 듣는 이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모든 중생(衆生)들이 여래와 꼭 같은 지혜(智慧)와 덕상(德相)이 있건만 망상(妄想)과 집착(執着) 때문에 증득(證得)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지혜란 말은 마음 작용을 가르친 말이고 덕상이라는 말은 몸을 가르친 말인데 모든 중생이 부처님 마을과 부처님 몸과 꼭 같다고 했으니 우리는 그 말씀에서 중생이 부처님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망상(妄想)과 집착(執着) 때문에 부처님이 되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망상이라고 하는 말은 허망(虛妄)하다는 말인데 허망하다는 말은 진실하지 않다는 말이며 진실하지 못한 생각이 망상이고 우리가 가진 생각은 무슨 생각이든지 다 망상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 가지고 부처가 되겠다고 하는 생각까지도 망상입니다.
또 우리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니까 우리가 하는 말은 죄다 망상이고 망상을 끊겠다고 하는 생각까지도 망상이며 허망한 생각, 우주의 진리와 일치하지 못하는 생각이 다 망상입니다.
집착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무슨 빛을 보든지 소리를 듣든지 이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것이고 좋은 모양이고 좋은 음악이라 하는 그것이 집착이며 한번 좋다고 한 것을 인식한 다음에는 한 걸음도 물러나지 못하고 언제든지 좋다고 하는 것에 속박되는데 이 속박에서 해탈해야 됩니다.
부처님이 된다고 하는 것은 속박에서 해탈하는 것을 가르친 말이고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집착을 떠나야 된다는 말은 집착을 해탈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중생으로부터 부처된다고 하는 것은 까맣습니다. 1년, 2년, 10년, 100년 지나서 될 것 같지 않고 망상과 집착이 있는 한 우리는 중생이며 망상과 집착이 없어지는 때 비로소 불(佛)이 됩니다.
망상과 집착이 어떻게 없어지느냐? 망상과 집착은 우리가 짓는 것이기 때문에 망상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부처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지가 지금부터 2600년이 되는데 우리가 불교 공부를 하는 이유는 부처를 배우기 위해서 법을 듣는 것이며 부처님과 중생의 경계선은 바로 망상과 집착이 있고 없는데 달려 있어서 망상 집착이 없는 이는 부처요, 망상 집착이 있는 이는 중생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누구나 망상 집착이 없으면 성불할 수 있는 것이니까 부처되는 일이 어렵지 않다고 했으며 부처님이 우주진리 그대로 말씀하신 것은 일체 중생 사람 뿐 아니라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이런 모든 중생이 성품으로 보아서 부처님과 꼭 같다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부처님이 우주의 진리를 깨달으시고 하신 말씀은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현상이 실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해가 뜨고 달이 지는 일이라든지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일이라든지 이것이 모두 우주의 현상인데 이 모든 우주의 현상은 인연에 의지해서 생겼다가 인연에 의지해서 없어지는 것이니까 참된 모양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늘은 어떻게 생겼고 땅은 어떻게 생겼으며 그 중간에 있는 별은 어떻게 생겼는지 또 중생들은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이처럼 중요한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면 이 우주(宇宙)안에 있는 모든 현상은 까닭 없이 생기거나 우연이나 자연히 생기는 것은 없고 모두 다그럴만한 인연이 있어 가지고 생기기 때문에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주의 진리를 눈으로 볼 수가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눈, 코, 마음은 모두 형상과 모양을 가지고 가상(假像)을 인정하게 되어 있으며 우리의 눈과 귀와 코와 마음을 가지고 우주의 진리를 직접 알아보지 못합니다.
우주의 진리를 알려고 하면 우리의 망상과 집착이 없어져야 되는 것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이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 가지고 부처가 되었으니까 부처 된다고 하는 말은 우주의 진리를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증(證)한다고 하는데 증이라는 것은 우주의 진리와 내 마음이 일치한다는 것이나 내 마음이 망상을 가지고는 일치하지 못하니 망상이라는 것이 지혜로 바뀌어져야 일치하는 것이며 망상이 우주의 진리와 일치되도록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처음 공부할 때 시작은 망상을 가지고 하지마는 나중에 성불할 때에는 망상이 아니라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시기를 우주(宇宙)의 모든 현상(現想)이 인연(因緣)에 의지해서 생겼다가 인연이 다하면 없어진다고 했는데 그것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중생들이 잘 알지 못하니까 부처님이 경에서 중생이 잘 알도록 비유했는데 어떻게 비유를 했는고. 하니 금을 가지고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어 놓은 금방에 가 보면 금으로 만든 귀걸이도 있고 비녀도 있고 술잔도 있는데 우리가 거기 가서는 술잔과 귀걸이와 반지, 비녀는 보게 되지마는 금은 보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우리 눈은 모양 있는 것을 보게 되지 모양 없는 것을 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산에 가면 나무가 있고 돌이 있고 흙이 있는데 이것은 우주의 형상이고 모양이며 인연에 의지해서 생기는 것이지 이것이 우주의 진리(眞理)가 아니며 우주의 본체(本體)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의 본체를 보아야 합니다.
"자아(自我)의 본체(本體)"
우리는 모두 나라고 하는 존재를 가지고 있는데 나라고 하는 것은 부모가 주신 육체로 된 몸과 우주가 생기기 전부터, 시작되는 데가 없을 때부터 있는 우리의 마음이라는 그 두 가지를 가리켜 우리는 나라고 합니다.
육체는 인연을 따라서 없던 것이 생겼기 때문에 그 인연이 다 하면 죽어서 없어지지마는 우리의 마음자리인 우주의 진리는 없던 것이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없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몸은 죽어서 없어지지마는 몸이 죽어서 없어질 때 우리 마음이 따라서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만 아니라, 우리가 생각해 보아도 생긴 것은 없어지지마는 생긴 것이 아닌 것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 이치에 지당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우리 몸은 죽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죽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또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에는 윤회(輪廻)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윤회라고 하는 말은 바퀴와 같이 돌아가는 것, 바퀴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 가는지 시작이 없이 늘 돌아가는 것으로서 한번 밑의 땅으로 갔던 것은 다시 위로 올라가고 위로 갔던 것은 다시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이 육취(六聚)에 순회하는 것을 윤회라고 했습니다. 천상이나 사람은 바퀴가 위로 올라간 것과 같고 지옥(地獄),아귀(餓鬼),수라(修羅),축생(畜生)은 바퀴가 밑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고 해서 윤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처럼 윤회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이 윤회하는 것인데 우리의 마음은 우주의 진리이고 바로 부처될 성품이기 때문에 윤회는 하지마는 우리 마음이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이 몸이 없어질 때 마음도 다 없어져서 아무 존재도 없어지는 것 같이 생각하기 쉽지마는 이치적으로 따져 보아도 그렇고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 보아도 그렇고 부모가 낳아주신 육신은 죽어 없어지지마는 부모가 낳아주신 것이 아닌 영원무궁하게 있는 우리 마음자리는 없어지지 않고 윤회하여 가서 생을 받아서 나는데 어떻게 되어서 우리 몸은 죽는데 마음자리는 다른데 가서 생을 받아 나는가?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면 그것은 업(業)의 힘인 우리의 업력(業力)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업(業)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중생이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데 입으로 말을 하거나 몸으로 움직이거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업을 짓고 있는데 다른 사람과 만나서 말하는 것도 업이 되고 몸을 움직여서 행동하는 것이 다 업이 되는 것이며 업 가운데에는 선(善)한 업도 있고 악(惡)한 업도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이롭게 한 행동은 선한 업이 되어서 선한 업을 지은 사람은 언제인가는 복(福)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지은 업은 그것이 힘이 되어서 없어지지 않는 까닭에 업력불멸(業力不滅)이 되는데 이것이 과연 어디에 있느냐 하면 우리 마음 가운데 업의 종자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업이라는 자체가 모양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업에는 많고 적은 것이 없으며 따라서 업에 대한 인연(因緣)이 돌아오게 되면 그 업에 대한 과보를 받게 되는데 선한 일을 한 사람은 복을 받게 되고 악한 업을 지은 사람은 불행(不幸)한 과보를 받게 되며 이것은 비단 중생뿐만 아니라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가, 모든 현상이 다 인연에 의지해서 생겼다가 인연이 다하면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천명이나 만 명이나 다 얼굴이 다르고 마음도 다르고 또 몸이 건강한 사람도 있고 건강하지 못한 사람도 있고 총명하지 못한 사람도 있고 행복하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있어서 이런 모든 것이 제각기 왜 다른고. 하면 과거에 업을 지은 것이 있기 때문에 다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눈이 잘 생겼고 어떤 사람은 코가 잘 생겼고 혹은 귀가 잘 생긴 사람도 있고 손이 잘 생긴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자기가 과거에 지은 좋은 업이 모여서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얼굴은 과거에 지은 업의 그림자로서 이것은 내가 지은 것이기 때문에 떼어 버릴 수가 없고 언제든지 내 생긴 얼굴 모양을 그냥 가지고 여러 사람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불우한 사람도 많이 있고 고칠 수 없는 병을 가진 사람도 많이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남의 모함(謀陷)을 받아 가지고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고 남한테 얻어맞아서 얼굴을 상(傷)했다고 할 수도 있어서 세상 사람들은 다 남을 탓하지만 실상(實相)은 자기가 지은 업 때문에 자기가 잘못해서 얼굴이 못 생긴 것은 생각하지 않고 혹 부모가 잘못 낳아 주어서 이렇게 되었다든지 다른 사람 때문에 불행하게 되었다고 남을 탓 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면 내 행복과 불행을 곁의 사람이 조금도 건드리지 못하고 행복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없고 불행을 행복하게 해 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해인사(海印寺)에 있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은 부처님이 중생에 대해서 말씀한 것인데 대개가 원인이 있어 가지고 결과가 생긴다고 하는 인과(因果)를 얘기한 것으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하는 불제자(佛弟子)도 이것을 잘 안 믿고 있는데 항차 불제자가 아니고 부처님의 말씀을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조금 불완전한 불제자로서 분명한 불제자라고 하면 잘 믿어야 할 것인데 믿지 않는다고 하면 그만치 우리는 부처님께 대한 신심이 부족한 것이고 내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행복하게 살고 불행하게 사는 것이 전부 다 내가 전생(前生)에 지은 업(業)의 과보(果報)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믿는다고 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내가 다른 사람 때문에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남을 원수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남도 나를 미워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마음은 항상 즐거울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이 있는 곳은 언제나 극락세계이고 천당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참으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하면 부처님이 말씀한 것을 하나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고 그대로 행해야 됩니다.
"참회(懺悔)"
성철(性徹)스님은 누가 와서 불법을 물어도 먼저 절을 삼천 배(三千拜)를 시킵니다. 한번이나 열 번, 스무번 절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지마는 천 번을 절을 하려고 하면 힘듭니다. 업장(業障)이 가득한 사람에게 부처님 경계를 얘기해야 망상, 집착이 가득한 범부가 어떻게 듣느냐? 들어도 모를 것이니 삼천 번 절을 해서 업력(業力)이 원만히 녹아 없어진 후에 법을 일러준다, 아마 이런 생각으로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회(懺悔)하는 데에 절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절을 하는 데라고 해서 절(寺)이라고 했는지 모릅니다. 어떻든지 절을 많이 하는 것은 자기가 지은 업장(業障)을 소멸(消滅)하는 것이고 업장이 소멸되어야 복을 받는 것입니다.
저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면 햇빛이 비치지 않고 구름이 걷히면 으레 햇빛이 비치는 것과 같이 우리 몸에서 업장이 녹으면 틈이 생기는데 그 틈으로 복이 오는 것이지 아무리 절에 가서 부처님께 마지를 지어 놓고 절하고 촛불 켜고 향 사른다고 부처님이 복을 가지고 있다가 한 주먹씩 떼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 불공(佛供)을 올리고 정성(精誠)을 들이면 복을 받게 되는 것은 부처님이 부처 되려고 애 쓸 때, 보살(菩薩)도 부처 될 일을 할 때 그 서원(誓願)이 모든 중생에게 고통을 없이 하고 기원(祈願)을 성취(成就)해주어야 하겠다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본원(本願)입니다. 부처님의 기원(祈願)은 이 우주 안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처님의 본원을 찾지 못 하는 것은 업력이 두텁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 물이나 유리와 같이 깨끗해지면 복을 받게 되는데 여러분이 절에 가서 마지를 올리고 불공(佛供)을 할 때에는 여러분의 마음이 깨끗해져서 부처님 마음과 꼭 같지는 못하겠지만 는 부처님 곁에 간 마음으로서 부처님 마음과 비슷하게 될 때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침 햇빛이나 달빛이 흙이나 돌 위에는 그 그림자가 드러나지 않고 물 가운데나 유리에는 역력히 들어 나는데 그것은 흙이나 돌은 깨끗하지 못하고 물이나 유리는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물이나 유리와 같이 깨끗하면 부처님의 원력에 의의지한 복을 으레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일체 중생이 다 부처가 될 수 있고 부처님과 같은 지혜와 덕상(德相)을 가졌다고 하는 것을 부처님말씀과 또 우주의 진리에 의지해서 말씀을 드렸고, 또 그 다음에는 복 받는 얘기를 했는데 이 세상의 모든 행복과 불행은 우리의 업력 때문에 되는 것으로, 업력을 소멸한 그 자리에 오는 것이 복이기 때문에 부처님에게 빌어 가지고 복 받으려고 하지 말고 내가 복 받을 업을 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곁에 있는 사람이나 이웃에 있는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생각을 가진 이는 드물고 대개는 자기만 이로우려고 하는데 자기도 이로워야 되겠지만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해서 보살행(菩薩行)을 하는 것이 바로 자리이타(自利利他)인 것입니다. 그러니 일생동안 자리이타의 행을 해야만 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배우는 이를 보살이라고 하면 십지(十地)이상 되어서 부처님의 말씀이나 뜻을 배워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여 부처님께 따라 가는 그런 이를 보살(菩薩)이라고 하는데 요새는 어떻게 된 것인지 어째서 여성 불자를 보살이라고 그러는지 어느 큰 스님에게 물어보니까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보살이 아니고 보사(補寺)다. 왜 보사냐 하면 대개 여성신도들은 살림살이를 두고 불법을 배우기 위해서 절에 가서 아침저녁으로 예불(禮佛)하고 또 염불(念佛)을 하면서 어디 가서 시주도 얻어 오고, 이래서 절을 도와주는 일을 하기 때문에 여성신도를 보사라고 한다.」이런 말은 내가 생각하기에 억지가 섞인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성신도를 보살이라고 하는 정의를 이렇게 내렸습니다. 「절에 중이 되려고 가는 사람은 처음에 다 행자라고 해서 여행자, 남행자로 있다가 사미계(沙彌戒)를 받으면 사미가 되고 얼마 후에 비구계(比丘戒)를 받으면 그때 비로소 비구가 되는데 보살은 보살계를 받았다고 해서 보살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내 의견을 다른 큰스님에게 얘기를 했더니 그 말이 그럴 듯 하다고 수긍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 주장은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고 해서 보살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가 불자라고 하면 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거사(居士),보살(菩薩),이래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불교를 배운다는 것이며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부처님을 배운다는 것이고 부처님을 배운다는 것은 부처님 말씀한 그대로 잊어버리지 않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똑 같으니까 내가 부처 될 수 있고, 내가 부처님과 똑 같다는 자존심을 가져야 합니다.
요즈음 승가에서는 내가 즉 부처인데 다시 더 부처될 것이 무엇이 있느냐?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만이 다 옳은 것이고 또 내가 부처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부처가 남을 욕한다든지 남과 시비하지는 않을 것이며 내가 부처라고 자처하면 나도 자연히 부처님과 같은 행동을 하게 되고 부처님 말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도 부처 성품을 가졌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부처가 될 공부를 하면서 악업을 짓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는 어디 갖다 놓든지 불제자가 틀림없고 또 다른 사람이 저 사람은 부처님이다 라는 말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한 이야기를 옳다고 생각해서 실행에 옮김으로써 여러분들이 부처되는 길로 가까워진다고 하면 이 법문은 상당한 효력을 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