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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20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루카 12,35-38)
Blessed are those servants
whom the master finds vigilant on his arrival.
말씀의 초대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그는 아담이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을 통하여 인류는 구원되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을 극복할 힘이 주어졌다. 우리 삶을 어둡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제1독서). 주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깨어 있는 삶’이다. 신앙인은 그렇게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그에게는 주님의 은총이 늘 함께한다. 교회 일도 자신에게 맡겨진 것은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숨은 일도 보시는 주님께서 갚아 주시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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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복음 말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감동한 주인이 종을 챙겨 준다는 내용입니다. ‘깨어 있음’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어떤 삶이 그것일는지요?
주인은 주님이시고, 종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부터 ‘깨어 있음’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인님’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 있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삶’의 핵심입니다. 내 뜻과 다를 경우, 내가 놓여 있는 ‘현실’을 돌이켜 봐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조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소나무는 비탈에서도 잘 삽니다. 뿌리가 강한 탓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도 ‘소나무 같은’ 이들이 많습니다.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바르게’ 살려는 이들입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 삶’입니다. 사람보다 하느님을 생각하며 살아갈 때, 건강한 뿌리가 만들어집니다. 어떤 시련에서도 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삶은 언제나 공평하지 않습니다. 세상 역시 변덕이 심합니다. 한결같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뜻’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위로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소나무처럼 언제라도 ‘푸른 꿈’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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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잠자지 않는다고 깨어 있는 삶이 아닙니다. 때와 장소에 어울리게 사는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언젠가 하리라 마음먹고 있다면 ‘지금’ 해야 합니다. 언젠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이 있다면 ‘지금’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현재와 어울리는 삶입니다.
시간뿐 아니라 장소에도 어울리게 살아야 합니다. 몸은 성당에 있는데 마음은 집에 가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곳에서는 기도해야 하고, 일하는 곳에서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핸들을 잡고서 정신은 엉뚱한 데 가 있다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난 일을 후회하느라 현재를 놓치고, 앞날을 걱정하느라 지금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룹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장차 다가올 일도 미리 만날 수는 없습니다. 어제는 그랬더라도 오늘은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자유가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깨어 있는 종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이 말씀은 현재에 충실하려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 실천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내 등의 짐> -양승국신부- 오늘 미사를 도와주러 오신 한 자매님께서 식사가 끝나자마자 "빨리 집으로 가야한다"고 일어나셨습니다.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면 좋을텐데...무슨 일이냐?"고 여쭸더니 "집에 영감님이 계셔서, 점심 준비를 해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연세가 꽤 지긋하신 분이셨기에 제가 농담조로 "영감님한테 전화하셔서 오늘 점심은 짜장면 시켜 드시라. 이제 그럴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자매님은 펄쩍 뛰시면서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발걸음을 재촉하셨습니다. 영감님 점심준비를 위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시는 자매님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보기 좋아 보였습니다. 그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 준비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루 온종일 직장에서 시달릴 남편을 생각하며 정성껏 그리고 진지한 모습으로 맛갈진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의 모습처럼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태어날 아기에게 필요한 유아용품들을 목록에 따라 차근차근 준비하는 산모의 모습은 그 자체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흐뭇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키워드는 "준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준비되어있다는 말처럼 가슴 흐뭇하고 뿌듯한 일은 다시 또 없는 것 같습니다.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매사에 충실하다는 것, 그래서 삶에 여유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가끔씩 한 선배 신부님의 충고가 생각납니다. "여러분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청소년들 앞에 서지 마십시오." 가끔씩 저도 삶에 쫓기다보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활동하셔서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기도 하지만 제대로 준비하지 않음으로 인한 결과는 대체로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횡설수설, 우왕좌왕, 좌충우돌을 반복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수도자로서 가장 좋은 준비, 준비중의 준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봅니다. 그 준비는 다름 아닌 영적인 준비이겠지요. 또한 영적인 준비의 핵심은 "깨우침"이겠습니다. "돌아보니 삶의 모든 국면이 다 은총이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깨우침",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십자가도, 행복도 불행도 모두가 주님께서 주신 것이었음을 자각하는 깨우침"이 우리 삶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좋은 글"이라는 홈페이지에서 읽은 "내 등의 짐"이란 글을 읽고 큰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과 함께 또 다른 깨우침을 위한 여정을 새 출발하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내 등의 짐>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남의 고통을 느꼈고 이를 통해 사랑과 용서도 알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미숙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가 되어 그것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성숙시킨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의 짐 때문에 나는 늘 나를 낮추고 소박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기쁨을 전해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물살이 센 냇물을 건널 때는 등에 짐이 있어야 물에 휩쓸리지 않고, 화물차가 언덕을 오를 때는 짐을 실어야 헛바퀴가 돌지 않듯이 내 등의 짐이 나를 불의와 안일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게 했으며, 삶의 고개 하나하나를 잘 넘게 하였습니다. 내 나라의 짐, 가족의 짐, 직장의 짐, 이웃과의 짐, 가난의 짐, 몸이 아픈 짐, 슬픈 이별의 짐들이 내 삶을 감당하는 힘이 되어 오늘도 최선의 삶을 살게 합니다.
감동은 라디오를 타고.. -노우진신부- 아침 일찍 청주로 출발해서 하루를 그곳에서 보냈다. 부탁받은 미사와 강의를 끝내고 대전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라디오를 듣다가 어느 방송인지는 모르지만 결혼 1년 6개월된 부부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맞벌이 부부였던 이들은 오랫만에 남편의 직장 앞에서 만나 집으로 같이 들어가기도 약속했다. 시간 11시 30분경 늦은 시간에 만난 이들은 남편의 자가용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부인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이야기하더란다. 지하철 역에서 추위에 떨며 나물을 팔고 있는 할머니는 보았는데 그냥 지나쳐온 것이 마음이 걸린다는 내용이었다. 남편은 그 이야기를 듣고 차를 돌려 지하철 역으로 향했고 3천원에 남은 것을 다 살 수 있음에도 1만원을 드리고 남은 나물을 모두 사왔다는 것이다. 이들은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뿌듯했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아내를 만나게 된 것에 감사드리며 남편은 운전하는 동안 부인의 손을 꼭잡아주었다는 얘기다. 아나운서는 감동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를 마치며 그 아내의 마음도 아름답고 아내의 말을 듣고 지하철 역까지 차를 몰고 간 남편의 마음도 너무도 아름답다고 말했다. 나 역시 그 방송을 듣는 내내 마음이 큰 감동으로 벅차올랐다. 한 사람의 친절과 사랑이 이토록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구나! 하는 생각을 깊이 하게되었다. 오늘 바오로 사도께서는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 부부의 순수하고 훈훈한 이야기가 공중파를 타고 흘러가는 순간 그 방송을 듣는 많는 사람들이 받았을 감동을 생각하면 작은 힘이지만 그 영향으로 인해 거대한 힘이 되는 사랑의 속성을 생각하게 한다.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순종할 때 우린 어쩌면 너무도 큰 감동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다리는 이의 기쁨 -상지종신부- 하느님께서 저에게 오십니다. 말씀으로, 옆에 있는 벗으로, 크고 작은 사건으로 오십니다. 하느님은 오시는 분입니다. 당신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제 자리로 들어오시는 분입니다. 제 자리가 하느님의 자리가 됩니다. 오시는 분이기에 제게 하느님이십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제 어깨를 두드려주시기 위해 꺾인 제 다리를 주물러 곧추 세워주시기 위해 하느님은 저에게 오십니다. 오셔서 제 종이 되신답니다. 주님이신 분이 종이 되신답니다. 종이 되시려는 당신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꼭 오시는 분이시니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말씀으로 오시는 주님을 함께 생활하는 벗들을 통해서 오시는 주님을 제게 주어진 일들과 제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마음의 불을 밝히고 믿음의 눈을 떠 깨어 있으면 됩니다.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인지요. 주님께서 저의 종이 되어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새벽을 열며 소개로 만나게 된 남자와 여자,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빠다킹신부
“주님을 가슴으로 느끼는 순간 내 마음은 위로와 평화로 든든합니다” -홍성만신부- 예수님께서 사시던 유다 지방 사람들은 의복을 길게 늘어뜨려 입었기 때문에 일하는 데 방해가 되었으므로, 일할 때는 허리에 띠를 매어 옷을 걷어 올렸습니다. 또한 등잔은 배 모양의 접시에다 무명으로 심지를 만들어 담은 것이었는데, 그 심지는 언제나 깔끔이 손질되어 있어야 불을 켤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늘 준비된 상태에서,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라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그렇습니다. 깨어 준비된 상태에서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합니다. 주인이 종들을 식탁에 앉힌 다음 시중을 듭니다. 우리는 체험을 합니다. 주님을 만나는 순간, 주님께서 나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님을 가슴으로 느끼는 순간, 내 마음은 위로와 평화로 든든합니다.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담담합니다. 사실 주님께서 나에게 봉사하시며 나를 섬기시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 22장 27절입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맞습니다. 어린 자녀를 부모가 돌보듯 주님은 나를 돌보십니다. 구체적인 삶 속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깨어 있어 그때그때마다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주님께서 그를 인도하십니다. 삶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깨어있어 주님을 맞아하면 됩니다. 그 주님께서는 나를 인도하시며 나를 섬기십니다. 중요한 것은 늘 깨어 있어, 나를 한없이 품어주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일입니다.
영원한 현역(現役)
- 이수철 신부- ‘영원한 현역’은 수도자인 제가 즐겨 사용하는 말마디입니다. ‘하느님의 병사’인
준비된 만남 -노미화- 초등학교 교사도 오래하면 쉬워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나름대로 고정된 틀이 있어 거기에 맞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 수업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초임 때처럼 아이들 앞에서 떨지는 않지만 오히려 뻔뻔해진 것 같아 이것도 별로 좋은 일 같지 않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 대상이 참된 것인지 아니면...
기도는 기다림... -이호자 수녀- 하느님의 축복은 한정되어 있는 것일까? 이사악이 야곱에게 준 축복을 에사오에게는 나누어줄 수 없었던 것처럼.(창세 27,'37) 그러고 보면 세상만사는 평형저울의 원리란 말인가? 승자의 영광 뒤에는 반드시 패자의 눈물이 있듯이.
기다림의 선물 -이선희 -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세상이 나를 알아줄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긴 호흡이 필요한 일에서부터 그리운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거나 짧게는 전철을 기다리는 일까지, 그 정도가 어떠하든 기다리는 일은 기대와 두려움이 섞여 언제나 팽팽한 긴장을 느낍니다.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지는가 봅니다.
깨어 있다는 것, 잠자고 있다는 것, 자기성찰 -이성우- ‘깨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습니까? 깨어 있다는 것은 잠자지 않는다는 말이겠지요. 깨어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다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은 잠자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루한 줄 몰랐습니다. -최명숙 목사-
요즘처럼 먹을거리가 흔하지 않던 어린 시절, 어느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이웃집에서 이사를 왔다며 커다란 접시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붉은 팥고물 찰떡을 먹음직스럽게 담아가지고 왔습니다. 순간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동생을 업고 시장에 가시고 안 계신 때였습니다. 나는 먹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공부하던 책상 위에 떡 접시를 올려놓고 신문지를 펴서 떡에 닿지 않도록 살짝 덮어놓고는 어머니를 기다렸습니다. 먹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돌아오셨을 때 먹다 남은 떡 접시를 보여드리기 싫었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양승국신부- <있을 때 좀 더 잘할 걸>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있어 인사이동 때 마다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이들입니다. 오래전 일이 생각납니다. 정들었던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다른 곳으로 둥지를 틀기 위해 떠나던 아침이었습니다. 형들한테 맨 날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던 녀석, 못 얻어먹어서 삐쩍 마른 강아지 같던 한 꼬맹이가 계속 저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바빠 죽겠는데 자꾸 왜 그러냐고 하니, 자기도 저랑 같이 가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난감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원망과 아쉬움 섞인 아이들의 눈동자들을 뒤로 하고, 또 다른 길을 떠나면서 얼마나 후회가 막심했는지 모릅니다. 계속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한 생각은 ‘있을 때 좀 더 잘 할 걸’이었습니다. 같이 살 때, 한번이라도 더 품에 안아주고, 한번이라도 더 눈길 주고, 한번이라도 더 용서해주고, 조금 더 뛰어다니고...그렇게 살 걸, 하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니, 늘 준비하고 깨어 기다리고 있어라’고 당부하십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장 기대하는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묵상해봅니다. 아마도 평생을 하루처럼, 하루를 평생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을 마지막처럼, 오늘이 내 일생의 전부인양, 그렇게 진지하게, 철저하게, 심혈을 기울여,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요? 이웃을 바라볼 때도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못 볼 사람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모습, 오늘 배당된 일을 시작하면서 내게 주어진 마지막 업무로 여기는 모습이 아닐까요? 한 선교사 신부님께서 회의 차 긴 배 여행을 다녀오셨답니다. 기나긴 여행이었기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치셨던 신부님이셨습니다. 비마저 추적추적 내려서 그런지 초라한 부두에는 마중 나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배에서 내려서니 뜻밖에도 한 할머님이 신부님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본당 내에서 가장 가난한 할머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신부님의 모습이 나타나자 그녀의 얼굴이 활짝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외쳐대는 할머님의 말에 의하면 “신부님이 안계시니 마음이 너무 허전해서 벌써 사흘 전부터 부두에 나와 있었다. 배가 도착하는 시간만 되면 비까지 맞아가면서 목이 빠져라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님은 신부님 앞으로 봉지 하나를 내밀었는데, 풀어보니 거기에는 손때가 묻을 만큼 묻어있는 이상하게 생긴 큰 떡이 여섯 개나 들어있었는데, 보아하니 불상 앞에 놓아둔 떡이 틀림없었습니다. 그 할머님을 바라보며 신부님은 이런 진리 하나를 깨달으셨답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기쁜 일중에 기쁜 일 한 가지는 ‘한 인간이 적어도 다른 한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다시없는 귀한 존재’로 여기지는 것입니다(A. J. 크로닌, ‘천국의 열쇠’, 바오로 딸 참조).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아마도 그분께서 가장 기뻐하실 삶의 모습은 위의 신부님과 할머님 사이 같은 그런 그림 같은 모습의 삶이 아닐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자체로 삶의 기쁨이며 희망인 그런 관계, 한 며칠 못 보면 허전하고 쓸쓸해서 못 견딜 정도의 그런 관계...
'기다리는 사람' -유광수신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처럼 인간은 기다리는 존재이다. 기다리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왜 이토록 기다리는가?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 모든 만물을 다 주었지만 거둘 짝이 없는 것을 보시고 아담에게서 갈비대를 뽑아 거둘 짝을 만들어 주셨다. 그랬더니 아담은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하고 행복해 하였다. 이처럼 인간은 혼자서는 행복하지 못하고 거둘 짝을 만날 때에서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다.
남자: 혹시…, 담배 피우나요?
여자: (호들갑)어머~, 저 그런 거 못 피워요~!
남자: 그럼, 술은?
여자: 어머~, 저 그런 건 입에도 못 대요~!
남자: 그렇다면 지금까지 연애는?
여자: 연애요~? 전 아직까지 남자의 ‘남’자도 모르고 살았는걸요?
남자: 정말 순진하시군요! 전 솔직히 반갑긴 하지만 무슨 낙으로 사시는지?
그러자 여자는 환한 미소를 띠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자: 호호호~~~, 거짓말하는 재미로 살아요!
거짓말하는 재미로 산다고 말하는 이 여자의 말에 웃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모습을 간직하면서 사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여기에 자유롭지 않은 것 같네요. 바로 나를 드러내려는 욕심에, 다른 사람들에게 더 잘 보이려는 마음에 거짓말이라는 옷을 입을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결국 드러날 거짓말인데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말함으로 인해서 난처하게 될 때도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진실되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께서 보실 때 어떠한 표정을 지으실지 상상하여 보면 얼굴 들기가 힘들어 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행복한 사람은 깨어서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깨어서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것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거짓말 등으로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장 벌을 당할지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말과 행동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말이 생각납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다.”
우리 곁에 있는 그 행복을 우리는 왜 찾지 못할까요? 바로 자기를 드러내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 욕심 때문에 거짓된 자기를 만들게 되고, 그래서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가 아닌 주님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은 진실된 자기 자신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 행복을 간직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들 앞에 다가올 미래는 항상 밝을 것 같습니다. 즉,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미래만 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으로 준비하지 않는다면 결코 밝은 미래는 나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조그만 있다가’, ‘내일 하지 뭐…….’라는 말은 절대로 밝은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당장’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사랑하고, 지금 당장 봉사하고, 지금 당장 희생하면서 주님의 뜻을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다가오는 미래는 분명히 밝을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맙시다. 습관 되어요.
수도자들에게 영적 전쟁은 죽어야 끝이기에 수도자들은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긴장을 풀 수 없는 게 수도자들의 삶이라는
것이지요. 비단 수도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하느님의 ‘영원한 현역’입니다. 그런데 마치 제대나 한 것처럼 세상 것들에
빠져 긴장을 풀고 냉담한 많은 이들을 보면 얼마나 위태해보이는지요.
마치 전쟁터의 병사들이 군기가 빠져 무기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훈련도
소홀히 하는 경우와 흡사합니다. 이러면 세상의 온갖 유혹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알게 모르게 몸과 마음이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결코 영적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습니다. 훌륭한 병사는 사기충천하여 깨어 준비되어 있습니다.
체력을 단련하고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병사요, 평상시 무기 점검도
철저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병사인 신앙인의 삶도 이와 흡사합니다.
과연 하느님의 병사로서 믿음, 희망, 사랑의 무기는 충분한지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기다리는 종처럼 늘 주님을 기다리는
깨어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요?
나는 하루 종일 교실에만 앉아서 수업하는 것이 힘들다. 그런 날이 이삼 일 지속되면 견딜 수 없다. 머리가 아프고 답답해 아이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게 된다. 학교 뒷산에 올라가 새로 돋아난 풀이며 꽃을 발견한 아이들이 소리칠 때 비로소 살맛이 난다. 즐겁게 노래하고 땀 나도록 뛰고 난 뒤 수돗가에 몰려가 세수하고 교실로 돌아오면 비로소 가슴이 시원해지고, 아이들도 나도 얼굴에 생기가 돈다. 그런데 우리 반이 늘 소란하고 시끄럽게 보이는 모양이다. 여섯 학급 작은 학교에 아이들도 열댓 명 적은 숫자이니 그 아이들이 뛰고 떠들어 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나. 그런데도 이것이 윗분들 보기엔 영 거슬리는 모양이다. 올해도 몇 번이나 교장실에 불려갔다. 그때마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불끈 솟곤 한다. 학급 담임 중에 나이도 제일 많은데 아이들이 떠든다고 불려 다니니 참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수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아이들 앞에 섰을 때다. 이런 날은 모든 일이 힘들게 느껴진다. 언제까지 더 교단에 서게 될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수업까지 아이들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삶이 아닐까!
-이윤벽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의 삶은 항상 기다림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학생들은 시험을 잘 쳐서 빨리 훌륭한 사람이 되려는 기다림, 처녀 총각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려는 기다림, 가장은 직장의 승진을 기다리고, 우리 재래시장 상인들은 빨리 시장경기가 풀려서 장사가 잘 되기를 기다리겠죠. 특히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편안한 죽음과 그 이후에 하느님과 함께하는 행복을 기다릴 겁니다. 이처럼 기다림은 우리를 동물과 달리 인간으로 특징짓게 할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산골 마을에 고을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 고을의 포악한 사또는 백성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지 자기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기에 그 백성들은 비참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전혀 희망을 찾을 수 없고 힘든 날을 살아가야 하는 고을 사람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희망의 메시지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언젠가 고을 사람들 중에 힘센 장수가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장수가 고을 사또 무리들을 물리치고 그 고을에 평화를 가져오고 행복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어느 날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힘센 장수가 될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이 소식에 모든 고을 사람들은 기뻐 날뛰며 장수가 될 아기의 부모에게 축하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부모는 하루하루가 지나 갈수록 불안해지고 초조해졌습니다. 우리아기가 커서 그 힘세고 포악한 사또 무리와 싸운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 싸움에 패배한다면 온 집안사람들이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겁니다.
어느 날 저녁 아기의 부모는 결정합니다. 고운 모습으로 자고 있는 아기 얼굴에 베개를 덮어 누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기야, 아기야, 이쁜 아기야! 다음에 세상에 태어나걸랑 이런 험한 세상이 아니라, 좋은 세상에 태어나거라.”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을 두고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 대상이 참된 것인지 아니면 거짓된 기다림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을 실현할 때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을, 한마디로 “우리의 사심”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이재영 신부-
1992년 10월 10월 28일 신문이나 방송을 크게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 날 세상 종말이 와서 예수님께서 공중으로부터 재림하게 되고 성도들은 하늘로 산채로 들려 올라가는 ‘휴거’가 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다미선교회 목사를 비롯하여 그 휴거설을 추종하는 신도들이 함께 모여 그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날 세상 종말은 오지 않았고 사람들은 또 다시 사이비 종교 운운 하면서 잠시 흥분하다가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1994년 다시 한번 휴거설이 방송이나 신문을 장식한 일이 있었고 그 날도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말세론자의 종말론에 쉽게 빠져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 어느 곳에도 정해진 날짜에 사람들이 공중으로 빨려 올라가고 예수님이 재림한다든지 하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서 전반을 통해 아무리 살펴보아도 예수님이 ‘종말이 언제 어디에서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고, 게다가 당신 자신 뿐 아니라 천사들도 모르며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들 자신도 언제 어디서 종말이 오는지 거기에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고 지금 여기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만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요 종말을 잘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언제 어디서 종말이 오든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의 삶에 충실하라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녘에 오든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이 비유말씀을 지연되는 재림의 상황에 적용시켰습니다. 문지기의 비유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비유는 문지기의 막중한 책임을 강조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집들은 도로로부터 떨어져 높은 담으로 분리되었고, 집 대문으로부터 떨어져 다른 주거지들과 함께 위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입구에 문지기의 집이 세워져 몇 세대의 집들을 지켰습니다. 문지기의 보수는 한 울타리 안에 사는 세대들이 공동으로 부담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한 담장 안에 사는 세대들의 재산과 안전은 문지기의 성실성에 달려 있었습니다.
문지기는 주로 야근을 하고 낮에는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일할 때인 밤에 깨어 있지 않고 잠자는 것은 문지기의 존재이유의 상실을 의미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양 우리의 문지기로 비유하시기도 했었습니다. 문지기가 깨어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들고 서서 완전한 준비를 갖추어 인내하며 주인을 고대하고 기다리듯,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세상의 것들에 유혹되어 정신이 다른 데에 붙잡혀 잠든 상태가 되지 말고 정신을 가다듬어 깨어서 주님의 오심을 설레는 가슴으로 준비하여 기쁘게 주님을 영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삶은 불확실성으로 감싸여 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은 주님이 주셨기에 확실한 시간이지만, 내일은 주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나에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처럼 큰 창고를 짓고 넘치는 풍요를 내일부터 즐기자고 있으나, 그 날 밤이 그 부자의 마지막 종말이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 신앙인들도 오늘이 나의 마지막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깨어 기도하며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깨어 있어 문을 두드리는 주님을 위해 즉시 일어나 빗장을 벗기고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기쁨으로 주님을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럴 때 오히려 주님은 당신이 띠를 띠고 우리를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 줄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비추어 나는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잠시 반성해보도록 합시다. 충실한 문지기로서의 직분을 다하고 살아가는지 아니면 주님이 늦게 오시겠지 하며 꽤를 부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충실한 문지기로서의 삶을 잘 살았기에 빨리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고대하며 살아갔습니다. 우리도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주님 앞에 떳떳이 나설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마라나타’ 하고 크게 외칠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아멘.........◆
얼마 전 말기암으로 투병중인 한 젊은 엄마의 치유를 위해 여기저기 기도를 청한 일이 있다. 공교롭게도 기도 부탁을 받은 할머니 한 분은 그 다음날로 발가락에 금이 가서 꼼짝도 못하고 깁스를 하고 있다면서 전화로 환자의 병세부터 묻는 게 아닌가. 그런데 희한하게도 환자는 조금 차도가 있어 산책까지 하고 왔다는 소식이다. 그렇구나,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구나.
인간에게는 귀소본능이나 절대의존 감정 외에도 수평유지 본능이 있다고 한다. 누군가 부를 누릴 때 다른 누군가는 굶주려야 하며, 많이 배운 사람이 있으면 못 배운 한을 안고 사는 사람이 있으며, 누군가의 웃음 뒤에 누군가의 슬픔이 있으며,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그 누군가는 불행을 짊어져야 한다는 말인가?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따르는 게 필연이듯이.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수평을 유지하기 위해서 건강한 이는 병약한 이를 위해, 부유한 이는 빈한한 이를 위해, 명예를 누리는 이는 무력한 이를 위해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대로 강자가 약자를 짓누르고 유식한 자가 무능한 자를 배척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오히려 그들을 존경하고 감사하며 나누는 게 순리인 것 같다.
누구든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실 것이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더욱더 청할 것이라는 주님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은혜를 구해야겠다.
미사 때마다 주님을 모시는 우리는 과연 어떠한 자세로 그분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언젠가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 언제 어떻게 오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북아메리카 대륙에만 사는 어떤 소나무는 몇십 년을 씨앗의 형태로 땅속에 있다가 산불이 나면 그 열을 받아 종자의 껍질이 벌어지면서 발아가 된다고 합니다. 산불이 나서 토양은 비옥해지고 경쟁이 될 만한 다른 식물들이 없는 땅의 주인이 되고자 기약 없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죽음의 땅을 기회의 땅으로 만들기 위한 그 소나무의 기다림은 정말 상상이 안 됩니다.
또 참나무 중에는 땅 위에서는 분명 나무로 크고 있는데, 땅속에는 굵은 뿌리의 형태로 살아 있는 경우가 있답니다. 참나무의 전생치수(前生稚樹)라고 한다네요. 도토리가 땅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싹이 터도 크게 자랄 수 없는 조건이라면 위로 자랄 것을 포기하고 흔적을 남깁니다.
그리고 뿌리에 살아 있던 눈에서 이듬해 다시 싹을 올리고 다시 실패하고, 다시 싹을 올리고 다시 포기하고,이를 몇십 번 반복한 결과랍니다.땅속에서 얼만큼의 세월을 견뎌내야 그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큰 그늘을 만들며 빛나게 살아가는 걸까요? 당장 결과를 보지 않으면 이내 지쳐버려 그늘을 드리우지 못하는 저의 조급함에 경종을 울리는 참나무 얘기입니다.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사랑의 가장 좋은 행위는 묵상하고 보는 것입니다. 당신이 좋아하고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들에 대한 과거의 지식과 경험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배제하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하려고 해보십시오.
그들을 잘 안다고 생각해서 미처 눈여겨보지 못하고 놓쳤을지도 모르는 것들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친밀함은 진부함과 맹목적 권태를 낳기 때문에 놓치고 지나치는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새롭게 볼 수 없는 것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끊임없이 새롭게 발견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는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해보십시오. 먼저 그들에게 당신이 싫어하는 어떤 점이 있는지 관찰하고, 공명정대하고 초연하게 그들의 결점을 연구하십시오.
이것은 그들에게 ‘우쭐거린다, 이기적이다, 거만하다’ 등의 꼬리표를 붙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어떤 사람에게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 에 이런 일은 정신적인 나태를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을 독특한 그 남자 혹은 그 여자로 보는 것은 어렵고 도전적인 일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태도는 사랑과 용서로 바뀔 것입니다.
결점에 대한 연구가 끝나면 이제 당신이 싫어했기 때문에 전에 보지 못했던 그 사람의 감추어진 보물을 찾아보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에게 일어나는 태도의 변화나 느낌을 관찰하십시오. 그들을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그들에게는 어떤 봉사의 행위보다도 무한한 사랑의 선물이 됩니다.
이제 당신에게도 똑같은 선물을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 기묘한 사랑의 태도로 말미암아 당신이 당신의 자아를 향해 변화되고 있다는 즐거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행하고 있는 이 행동의 근본 동기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 살고 있는가?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은 나에게 유익하고 옳은 길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나의 영혼 구원에 도움이 되는가? 나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 이 길을 가겠는가? 지금 내가 행하고 말하고 있는 것은 내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나의 소망과 일치하는가?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내 영혼이 간절히 바라는 나의 깊은 소망인가? 아니면 나의 얄팍한 욕구인가?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고 의식하고 곱씹으며 가고 있다면, 나는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면, 나는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잠자고 있는 영혼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다가오셔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눈 감고 자고 있는 사람이 무엇을 알아보겠습니까?
깨어서 가는 길은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길이지만 충분한 대가가 주어지는 길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꼭 필요한 출발점인 것입니다.
어머니는 떡 접시에 김이 다 가시고 식어갈 즈음 돌아오셨습니다. 긴 시간이었지만 기대감으로 지루한 줄 몰랐습니다. 나는 옆집에서 이사를 왔다며 가져왔노라는 보고와 함께 보란 듯이 말짱한 떡 접시를 곱게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마음에 먹고 싶은 것을 참고 기다린 것에 감동을 받으셨고, 나는 어머니의 칭찬과 함께 고물이 약간 식어서 말라가는 떡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그때처럼 그렇게 주님을 기다리며 인내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기대감에 부풀어 그분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때 어머니를 기다렸던 것처럼 속히 오시기를 바라고 있는지….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늘 드리는 신앙고백처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라는 고백이 진심이라면, 그렇게 그분의 오심을 참으로 믿는다면 말입니다.
아무튼 인간은 늘 기다리는 존재이다.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를 채워줄 대상을 기다린다.
인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기다린다. 아침을 먹었으면 점심을 기다리고 점심을 먹었으면 저녁을 기다린다. 봄이 왔으면 여름을 기다리고 여름이 오면 가을을 기다리고 겨울을 기다린다.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무엇을 기다리느냐에 따라서 인간은 기다리는 것을 받게 되고 얻게 된다. 어린이는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고 회사에 처음으로 입사를 하였으면 승진을 기다린다. 신학교에 들어가면 신부가 되기를 기다리고 수도원이 입회하였으면 서원 때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누구를 기다리는가? 인간은 끊임없이 누구를 또는 무엇을 기다리지만 완전히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것을 또 다른 사람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인간을 완전히 채워 줄 수 있는 분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그분과 행복하게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분 그분이 누구인가? 그분은 하느님뿐이시다. 인간이 기다리는 분 그분은 하느님이시다. 왜 하느님을 기다리는가? 하느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신랑이시다.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것은 기쁨이다. 신부가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만큼 더 간절한 것은 없다.
신부는 오직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기 위해 살고 그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안고 살아간다. 신랑이 몇 시에 올는지 모르지만 낮이든 한 밤중이든 늘 신랑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신부의 삶이고 존재 이유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가리켜 신랑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간절히 기다려야할 신랑이시다. 신부의 행복은 기다리던 신랑이 와서 그분을 시중 드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의 기다림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날게 될 때까지 항상 기다림의 생활이 될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때 모든 기다림은 미완성으로 남을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인생은 쓰다가 마는 편지, 부르다 마는 노래일 것이다.
준비와 기다림
-박상대신부-
준비와 기다림. 이 둘은 형제지간 쯤 된다. 준비는 미리 마련하여 갖추는 것이고, 기다림은 오거나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을 미리 마련하여 잘 갖추고 있으면서 무엇이 오거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안성맞춤이다. 다가오는 수능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한다면 수험생들은 사전에 그만한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이고, 내일 단풍놀이를 가기로 했다면 계획에 따른 사전 준비를 꼼꼼히 해야 할 것이다. 준비를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 했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어디 한 두 번인가.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내일이 세상의 종말이라 치자. 그렇다면 종말을 앞두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종말을 잘 맞이할 것인가? 오늘 복음이 마침 준비와 기다림에 관한 내용을 들려준다. 복음은 우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라.”(35절)는 예수님의 명령을 보도하고, 이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들려준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발견된다.(마태 24,43-51; 마르 13,34-36) 여기서 준비와 기다림이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것이 분명하다.
복음서가 집필되기 전에 모든 복음공동체에 확실하게 퍼져있었던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심판자와 하느님 나라의 왕으로 오실 것과, 다른 하나는 그 오심의 시각이 임박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시급하게 닥쳐와야 할 재림사건이 자꾸 지체하자 초기 교회공동체 안에 초조함과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적절한 입장표명이 4복음서 저자 모두의 숙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설과 원전(原典)을 토대로 제각기 예수님의 공생활 마지막 시기에 맞추어 세상의 종말과 재림사건을 보도하고 있다.(마태 24,1-44; 마르 13,1-37; 루가 21,5-36; 요한 14,1-3; 16,16)
루가가 집필한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승천을 앞둔 예수님께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1,6)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결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1,7) 하고 대답하신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왕국창건과 세상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것인데, 그 날과 그 시각은 한밤중이 될지 새벽녘이 될지(38절)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재림의 날과 시각이 아니라, 분명히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믿는 이의 태도는 준비와 기다림뿐이다. 교회는 그 동안 2,000년의 긴 세월을 준비하고 기다려 왔고, 최종적인 그 날과 그 시각을 향하여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지난 세월동안 사라져간 사람들 안에서 그 날과 그 시각을 보았다. 이 말은 한 인간의 죽음이 바로 그 날과 그 시각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를 뿐,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다 안다. 그러므로 알 수 없는 죽음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살아가는 것이다. 허리에 띠를 띠고 산다는 비유의 뜻은 항상 근면하게 일하고 남에게 봉사하는 자세를 말한다. 등불을 켜 놓고 산다는 비유는 자신 안에 죄악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밝게 살아가는 마음자세를 뜻한다.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가 생(生)을 마감할 때, 즉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께서 그를 기쁨과 평화의 식탁에 초대하여 도리어 그에게 봉사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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