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빨간 고무장갑
송 복 련
나는 열 손가락으로 세상을 읽는다. 엄마보다 먼저 가 닿아보는 감촉들은 무디어서 둥글거나 모나고 길거나 짧다. 피부는 말랑말랑하고 매끄러운데 지문은 유난스럽게 오톨도톨하다. 세 끼를 마친 그릇들을 설거지하면 잘 미끄러지기도 하지만 엄마가 좋아하는 도자기를 만질 때는 더 조심한다.
밥그릇의 우묵한 깊이 속으로 엄지에 힘을 주어 설거지한다. 배불리 먹은 한 끼가 힘이 되었을 거라 믿는다. 주로 미역냄새나 된장냄새가 풍기는 대접들이 넉넉해서 다루기가 쉽다. 보기보다 까다롭고 신경이 쓰이는 건 접시들이다. 크고 작은 얼굴들은 저마다 개성이 달라 쉽게 봤다간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이라도 빼먹고 깨뜨린 날은 ‘손끝이 야물지 못하고 답답하다.’ 꾸중을 듣는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서운해지다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길까 종일 꺼림칙하게 보내고 있을 엄마 생각에 깨진 파편들을 주워 담으며 조각난 마음을 수습한다. 식성 좋은 아버지와 아들, 다이어트 중이라 깨작거리던 딸과 늦게 식사해서 맨 먼저 놓는 엄마의 수저를 마지막으로 닦는다.엄마의 어깨가 덩실거리기라도 하면 나도 덩달아 춤을 출 기세지만 식구들이 빠져 나간 조촐한 밥상 앞에서 풀기 없이 앉아 있는 날은 같이 시들해진다. 그날 먹은 음식들의 흔적을 지우는 게 성가시긴 해도 오래 마른 손으로 걸려 있는 건 무료하다.
오래 된 출생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개울가에는 풀리지 않은 얼음이 허옇게 이발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덟 식구들이 벗어놓은 산더미 같은 빨래를 이고 얼음 깬 물에 빨래를 주무르던 엄마의 손도 나처럼 빨갰다. 방망이 소리는 자주 끊어지며 언 뼈마디에 호호 입김을 불어넣던 엄마. 겨울의 때를 씻어내며 더디 오는 봄을 기다렸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태어난 이유이리라. 늘 축축하게 젖어있던 엄마 손을 지켜주고 싶었다. 허리 펼 날 없는 엄마를 물샐 틈 없이 막아보려고 애썼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나의 팽팽한 탄력과 질긴 근성을 사랑하게 되었다.
빨간 립스틱 같은 빛깔을 가진 나도 한때 욕망을 품었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사는 처지라 허전한 속을 꽉 채워주는 이를 만나고 싶었다. 무너진 자존심을 일으켜 세워주는 당신과 한 몸이 된다면 전쟁터 같은 삶도 살만하다고 여겼다. 당신의 온기를 느끼며 기꺼이 낡아 가리라. 구정물에 몸담아 맛보는 매운 맛도 거품 물고 걸러낸 파편들을 떠나보내는 보람으로 살겠다고 했다.
하지만 조금은 헐렁한 간격으로 만나도 괜찮다며 한 발 물러섰다. 적당히 둥글둥글 사는 것도 지혜라 하니,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며 고고한 척 해봐야 일없이 삭아지는 모습은 애잔하기만 하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어떤 만남이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나 혼자 굳은 일을 감당한다고는 하지만 궁리하고 움직이는 힘은 만남에서 나온다. 우라질 놈의 세상이라고 불평하는 순간에도 서로가 힘이 되었을 때 세상은 살만하지 않던가. 칼날 같이 무서울수록 서로 지켜주는 힘으로 살아가는 거라고 터득했다.
게는 위험한 족속, 언제 뚫고 들어와 방심한 손가락을 물어뜯을지 모르니 겁이 난다. 등딱지의 뾰족한 침도 조심스럽긴 마찬가지. 칼이 손끝을 스치려는 순간에도 잘 견뎠는데 게를 막아내지 못하면 내 운명은 끝장이 난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지 못해 비명을 지르며 구급약을 찾아 떠난다면 무슨 염치로 버텨낼까. 물이 나를 관통하는 순간 이별을 맞으며 한때 당신의 일부가 되려고 했던 나도 지쳐 허물어지거나 던져진다.
혹여 내가 구정물을 좋아하는 줄 알지만 그건 커다란 오해다. 워낙 정갈함을 좋아하다보니 오물이다 싶으면 수색대처럼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을 뿐이다. 원래 구정물이 있는 건 아니지 않던가. 서로가 섞여 어우러져 사는 세상에서 정처럼 묻어나는 것들이다. 본래 깨끗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거늘, 설거지할 때는 와그락자그락 소리에 짜증이 묻어난다. 잡아당겨 뽑혀나간 내 손을 함부로 내팽개쳐버린다. 나도 성깔이 있는지라 자주 젖어 있으면 녹아버린다. 무디어진 지문에 구멍이 나면 더 이상 궂은 일에 방패가 되어줄 수 없다.
내가 가장 보람으로 삼는 건 엄마의 손을 지켜줄 때다. 부지런한 엄마와 함께 닦아내어 반질거리는 그릇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 속이 다 개운하다. 청춘의 손은 아니더라도 고운 손으로 식구들에게 따뜻한 밥을 지으셨으면 한다.식탁에는 식구들이 둘러 앉고 수저소리와 재잘거림과 투정이 들려오는, 그런 저녁을 그린다. 설거지를 마친 나는 수도꼭지 위에서 허리를 접고 잠을 청한다.
전등을 끄자 어둠이 깊게 내리고 젖은 엄마의 손도 쉬고 있다.
첫댓글
이미 읽었던 글인데 다시 읽어도 졸습니다.
그렇지요~~저도 또 읽어보고 싶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