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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6)
하나님 사랑의 Reflection & Response
요일 3:11~18
I. 서론
우리는 몇 주 동안, 하나님 안에 영원히 거하는 자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써, 모두 지나가 버리고 마는,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영원할 것입니다. 이들은 적그리스도의 미혹에 빠지지 않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소망하고,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을 소망하고, 죄를 멀리하고, 의를 추구하며 이 땅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형제들을 미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마지막 부분은 오늘 함께 나눌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드리면, 성경 구절이 하나 생각나실 것 같습니다.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나눌 차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 사랑의 그리스도인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II. 본론
11절,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지난 시간에 살펴본대로, 사도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들이 이 복음과 함께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도 함께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더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데, 가인과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12~15절이 가인과 관련된 설명이고, 16~18절이 예수님과 관련된 설명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이유는 가인은 형제를 미워하여 살인한 자의 대표이고, 예수님은 형제를 사랑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분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12절,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사도 요한은 먼저 “가인 같이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것은 그가 악한 자, 마귀에 속한 사람임을 들어낸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차이점을 “분별하는 것”에 대한 강조합니다. 지난 주일 본문 마지막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요일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니까,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기록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가? 2) 의를 행하며 살고 있는가? 3) 형제를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12절,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가인이 아우를 죽인 이유는 가인의 행위는 악했고, 아벨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부분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창 4:1~8,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신학자마다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지에 대한 의견이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물에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벨은 양의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린 차이점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제물의 가치에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첫 수확이라는 말이 없음) 제사를 드린 것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에는 동물로 드리는 번제도 있지만,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첫째 것을 드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양의 첫 새끼에 흠이 있었으면, 그것으로 제사를 드리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첫 번째로 수확한 땅의 소산에 문제가 있었으면, 그것으로 제사를 드리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고,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 혹은 예배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의외로 쉽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4~5절을 읽어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나옵니다. 4~5절,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배는 기본적으로 제물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함께 드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예배 시작할 때,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요 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예배자의 예배를 받으신다 (혹은 인정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찬양을 부를 때, 그 가사를 마음으로 부를 수도 있고, 건성으로 (즉, 성의 없이 대충 겉으로만) 부를 수도 있습니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에 나오는 적그리스도들도 한 동안 교회 안에 있었기 때문에,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믿고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라는 진리를 믿고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간단히 “Heart”와 “Head”로 드리는 예배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Heart는 영으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이고, Head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heart와 head가 빠진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가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가 드린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창세기를 기록하면서 가인이 드린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을 수 없는 예배였을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은 예배였다고 정의했습니다.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사도 요한은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12절,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가인의 행위 즉, 가인의 제사는 악한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한 중요한 주제를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과 악은 윤리적인 부분을 포함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가인은 윤리적으로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잘못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세는 선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말했고, 사도 요한은 악한 행동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Heart가 있습니까? 영으로 마음으로 예배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Head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진리로 예배 드리고 있습니까?
그 다음 주절인 1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13절,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세상이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할까요? 그 이유는 우리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하나님은 빛이시고, 세상은 어둠이기 때문에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빛 가운데 살려고 할 때,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지 않으면, 즉, 우리에게 아무런 박해도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빛 가운데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거짓 선지자들은 모든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말만 전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한다면, 우리는 빛 된 삶,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4절,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우리가 주의해서 읽어야 할 부분입니다. 형제를 사랑함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말씀드리면, 사랑의 행동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조건은 언제나 단 한 가지입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고넬료 이야기를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행 10:1~5,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고넬료는 로마 군대 백부장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구원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이야기가 나옵니다. 행 11:13~15, “그가 (고넬료) 우리에게 (베드로와 그 일행)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만약 기도와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천사가 나타나서 베드로를 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가능한데, 그 믿음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말씀을 들음으로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입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이란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즉, 메시아)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 다음 구절입니다. 15절,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성경은 언제나 마음의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구절을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입니다.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말하는 그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것을 우리를 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가치 있는 것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더 가치 있는 것을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함께 운동하는 친구 중에 인도에서 온 친구가 있습니다. 제보다 5살 정도 위인데, 제가 미국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는 아마도 가장 부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친구가 테니스장에 올 때마다 빨간색 2인승 스포츠카를 몰고 옵니다. 적어도 10만불은 넘는 차일 것입니다. 하루는 테니스를 치다 말고,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주차장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보니, Hunter’s Creek Community 관리하는 분들이 몰고 다니는 소형트럭이 자신의 차 옆에다 주차를 하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자기 차를 긁지나 않나 하고 걱정하는 눈빛으로 쳐다 본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제가 다른 친구와 운동하려고 테니스장을 갔는데, 그 친구가 차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보이지 않고, 그 친구의 아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학교를 다니는 그 친구의 아들이 아빠 차를 몰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아끼는 차라도 자신의 아들에게는 빌려 주는구나.” 다른 사람이었으면, 안 빌려 주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소중한 차를 빌려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이유는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없어서 실수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중요한 말을 합니다.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으십니까?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먼저 형제는 누구를 말할까요? 옥한흠 목사님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옥한흠, “성경에서 형제라는 말은 아주 가까운 사이를 가리킵니다. 눈을 뜨면 날마다 보고 만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족일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교인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형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족이나 친구나 교인이나 이웃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 보낼 수 있는 말씀일까요? 만약 이 말씀을 무시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죽여야 가능합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이 말씀은 실천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이와 비슷한 본문이 많이 있습니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만일 우리 삶에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내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한 알 그대로 살아 있다면, 아무런 열매도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무리와 제자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무리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자기 십자가도 지지 않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기적에 환호해서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치유에 도움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유익이 있을 때만,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반면,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이 비록 고난의 길일지라도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16절에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한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본문인 것입니다. 이런 각오가 된 사람은 그 다음 본문이 오히려 쉽게 느껴집니다.
17절,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본문의 구조가 상당히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눅 10:30~34,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의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제사장: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레위인: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
사마리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핵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못 본 채하고 지나가는 것은 도와줄 마음을 닫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 이야기 끝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눅 10:36~37,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지식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사마리아인 보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더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새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영혼이 메마르지 않도록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다음, 우리에게 익숙한 구절이 나옵니다.
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여러분은 이 구절을 읽을 때, 좀 이상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냥, “우리가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으로 하자”라고 해도 될 텐데,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저만 이상하게 느꼈습니까? 저는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의 유일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혀는 우리가 잘 알듯이 말을 만드는 곳입니다. 혀를 움직이지 말고, 발음을 해 보세요. 말이 만들어 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진실함은 행함을 만드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진실함이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진실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는 “알레티아 (ἀλήθεια)”라는 단어인데, “진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실 때, “진리”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혀가 말을 만들듯이, 진리가 행함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진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앞 구절에서 말하는 진리입니다.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리스도인이 사랑을 행해야 하는 동기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는 진리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사랑의 유일성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사랑과의 차별성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동기로 사랑을 실천합니까? 1) 천국이 있다면, 천국 가기 위해서 2) 윤리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니까 3) 선행을 하면 기분이 좋으니까 4) 가난한 사람들이 불쌍해서 등등.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에”
그러니까, 받은 사람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 사랑을 형제들에게 돌려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사랑에는 자기 자랑이 있을 수 없고, 대가를 기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몸소 보이신 예수님의 본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존 스토트 목사님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Reflection이자 Response”라는 말을 했습니다.
III. 결론
마지막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만 설명을 해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Reflection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예전에 창세기 강해에서 설명을 드렸듯이,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당시 열방의 왕들은 자신이 통치하는 곳곳에 자신의 형상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그곳에 있지는 않지만, 그 형상을 통하여 그 땅이 자신이 통치하는 구역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이 문화적 배경을 알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어야 함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의 이방 나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Reflection 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Reflection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다른 우상들과 함께 섬겼기 때문에, 주위 이방 나라들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고 어그러진 재판을 했기 때문에, 주위 이방 나라들은 하나님을 사랑과 정의의 신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행해야 하는 사랑은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Reflection 이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요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1)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 (그리스도인)으로 알고 있습니까? 2) 우리의 이웃들은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이웃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된 지식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 사랑의 Reflection 이자 Response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내가 죽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 것입니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서는 예수님을 절대로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이번 한 주간 살아가면서 날마다 죽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만이 드러나는 한 주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큰 영광 받으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