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등(1부)
정성록
샘가에서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무명 바지를 허리 아래로 끌어내리고 양팔을 땅에 짚고 등목을 쳐달라고 했다. 아버지의 등은 보통 소들보다 짐을 몇 바리를 더 짊어진 힘센 소의 등을 보는 것 같다. 두레박으로 차가운 샘물을 퍼 올렸다. 단단한 근육들로 뭉쳐진 넓은 아버지의 등에 쏟아부었다. 물살은 등 골짝을 타고 시원하게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열다섯 살 때부터 팔십이 넘도록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살았다.
일본 강점기에 신학교가 생겼다. 서당을 다녔던 아버지도 신학교로 옮겨서 다니게 되었다. 열네 살 때 두 살 위인 엄마와 혼례를 올리고는 상투를 틀고 학교에 다녔는데. 일본 선생의 회유와 강압에 상투를 잘렸다. 집 대문채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할아버지는 왜놈한테 정신까지 팔아먹었다며 매로 타작하듯 아버지를 때렸다. 할아버지가 무서워 안채에 있던 새색시인 엄마에게 말 한마디도 건네지 못하고 그날 밤 아버지는 집을 나왔다.
갈 곳이라고는 영동 골에 사는 고모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고모 집엘 가려면 강을 몇 개 건너고 험준하기로 소문난 달암산(다람쥐) 재를 넘어야 했다. 한밤중 여우 울음소리는 굽어 돌던 산길을 계속 따라 내려왔다. 아버지는 오십여 리를 밤새 걸어 새벽녘에 고모 집 사립문에 들어섰다. 그리 넉넉지도 않은 고모부에게 돈을 빌려 나룻배로 낙동강을 건너 왜관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탔다. 처음 탄 기차의 기적소리는 마치 할아버지 호령 소리처럼 들렸다. 희뿌연 유리창처럼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부산항구에 도착했다. 험한 산길을 걸어 불어 터진 발과 매 맞은 데가 쓰리고 아팠지만, 몸보다 더 아픈 마음을 관부연락선에 싣고서 험난한 파도에 흔들리며 대한 해협을 건너갔다.
상투를 튼 열다섯 살 어른이었던 아버지는 어색한 단발머리 소년이 되어 이방(異邦)의 땅 오사카에 닿았다. 떠나온 집을 생각하며 무작정 걸었다. 낯선 일본 땅이지만 벼들이 황금물결을 이루는 들판은 한국의 가을 풍경과 닮아 보였다. 마침 가을걷이하고 있는 어느 집에 일손을 보태주며 며칠을 머물렀다. 농사일이 끝나고 일할 곳을 찾아 나고야로 가 잡화상 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낮에는 물건을 배달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곳 일본인 잡화상 주인은 정직하고 성실한 아버지에게 2년 만에 직원 두 명을 붙여서 가게를 하나 내어 주었다. 아버지의 호를 달고 시작한 '호산 상회'는 언어장벽 없이 이용하는 가게가 일본에 와있던 한국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었다. 나고야에서 가장 잘되는 큰 가게로 발전하였다.
꽤 넓은 일본식 이층 살림집도 장만하고 엄마에게 편지를 보냈다. 열다섯 살 어린 신랑은 신혼 방 장롱문만 여닫다가 냅다 옷만 끄집어서 사랑방으로 숨던 신랑이었다. 서로 부끄러워 손 한번 잡아보지도 못했다고 했다. 편지를 가슴에 품고 연락선을 타고 오는 내내 그때처럼 엄마는 무척 설렜다.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어엿한 청년으로.’ 상상하며 내린 오사카항에서 마중 나올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도 아버지는 사업이 바빠 대신 고향 마을에서 일본에 간 사람이 피켓을 들고 마중을 나왔다.
호산 상회는 언제 어느 때든 사람들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형제처럼 반겨주었다. 베풀기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소문을 듣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밀고 들었다. 열두 살짜리부터 오십 살이 넘는 다양한 연령대로 배운 정도도 제각각이었다. 한자를 줄줄 읽는 사람과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라도 어느 섬에서 강원도 어느 산골짝에서도 아버지 이름 석 자 적힌 쪽지 한 장을 들고 찾아왔다.
아버지 등은 점점 무거워졌다. 그때 아버지 나이 열아홉 살이었다. 살림집 1층에 상회 물건을 두던 넓은 창고를 다다미방으로 개조해서 그들을 기거토록 했다. 농한기인 겨울에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 칠십여 명이 기거했다고 했다. 그들을 마냥 먹이고 재울 수가 없어 고민이 커진 아버지였다. 우선 일본말을 몰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냈다. 고물상이었다. 지리도 익힐 겸 손수레 하나씩 내주어 골목마다 다니면서 고물들을 주워 오게끔 했었다. 고물이 나오는 곳도 유심히 살펴보고 괜찮은 곳에 일자리가 있으면 이직하도록 해주었다.
주워 온 고물과 폐짓값은 그날그날 장부에다 적립시켜주었다. 그들은 어느 정도 장부에 돈이 모이면 아내나 가족들을 데리고 왔다. 아내들에게 양말 짜는 기계(답비)를 서서 한 대씩 나눠 주었다. 아기를 키우면서 틈틈이 짠 양말을 호산 상회에서 팔아 이익금을 나누어 주었다. 고물상도 점점 커졌다. 주워 온 폐지로 종이 공장도 차렸다. 고물상과 호산 상회는 나고야 일대에서 한국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는 디딤판이 되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좋은 논 이백 평 값이 일 원 하던 시절 아버지는 하루에 9원을 벌었다고 했었다.
식민지 백성으로 사업하다 보면 어려운 일과 보이지 않는 횡포가 심했다. 아버지는 이에 맞서려면 돈과 힘을 길러야 한다며 유도도 게을리하지 않아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유도 유단자였다. 웬만한 상대는 다 제압하지만, 때론 위협적이고 불량스러운 보험회사 직원들에게 보험을 들어주면서까지 유대관계를 원활히 해야 했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다 보니 일본 사람들과 생각지도 않은 마찰이 수시로 일어난다. 이를 방지하고 분쟁이 일어나면 아버지는 해결사가 되었다. 십 팔 년 동안 식민지 백성으로 타국의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외풍을 막아준 아버지의 등이었다.
아버지는 들에서 일하다가도 가끔 일본에서 살면서 겪은 이야기를 소 되새김질하듯 들려주었다. 태평양전쟁이라는 높은 파도에 휩쓸려도 떠밀리지 않고 버텨온 아버지였다. 시원한 샘물 한 두레박을 다시 퍼 올려 아버지의 넓은 등에 한 번 더 쏟아부었다. 아버지의 넓은 등에 은빛 물살이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