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정씨(烏川鄭氏) 영천시(永川市) 대전동(大田洞) 기타 마을
◎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良巷里)
◎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仙源里)
◎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城谷里)
◎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忠孝里)
◎ 영천시 자양면 귀미리(龜尾里)
◎ 영천시 자영면 노항리(魯巷里)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모든 정씨(鄭氏)의 득성조(得姓祖)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斯盧)의 6부촌(六部村) 가운데에서 취산진지부(嘴山珍支部)의 촌장(村長) 지백호(智伯虎)가 서기 32년(儒理王9) 유리왕으로부터 다른 5촌장들과 함께 성(姓)을 하사받을 때 본피부(本彼部)로 개칭되면서 정씨(鄭氏) 성을 하사받은 것이 시초이다. 우리나라 정씨는 후대에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본관을 달리하나 모두 지백호의 후손인 셈이다.
연일정씨(延日鄭氏, 迎日, 烏川)의 시조인 정종은(鄭宗殷)은 득성조(得姓祖) 지백호(智伯虎)의 원손(遠孫)으로 신라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으며, 후손 정의경(鄭宜卿)이 영일호장(迎日戶長)을 지내고 영일현백(迎日縣伯)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이 본관을 영일(迎日)로 하였다. 본관은 영일(迎日)의 옛 지명을 따라 연일(延日)로, 영일(迎日)에서도 본고장인 오천(烏川)고을 이름을 따서 오천(烏川)으로 쓰기도 했으나 근래에는 대개 연일(延日)로 통일해 쓰고 있다.
연일정씨(延日鄭氏, 迎日, 烏川)는 시조를 다르게 하는 두 개의 파가 있다. 이 두 파는 신라 6부시대의 지백호의 후손으로 그 중간 계보를 잃어버려 서로 촌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족보 및 종친회를 각각 다르게 하고 있다. 신라 때 간관(諫官) 정종은(鄭宗殷)을 도시조로 하고 그 후손인 정습명(鄭襲明)을 1세조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정극유(鄭克儒)를 1세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가 있다. 정습명은 고려 의종(毅宗) 때의 중신으로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냈다.
연일정씨는 조선시대에 5명의 상신과 3명의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유명 인물로 지주사공파는 충신, 효자, 의인으로 일컬어지는 포은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조선 현종 때의 우의정을 지낸 정유성(鄭維成)과 정유성의 손자인 양명학의 거성 정제두(鄭齊斗), 선조 때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킨 정대임(鄭大任), 효종 때 학자 정극후(鄭克後), 고종 때 산수화에 능했던 정문승(鄭文升) 등이 있다.
또 감무공파로는 조선시대 중엽 송강 정철(鄭澈)이 유명한데, 시조의 윤선도와 함께 우리 고전문학의 쌍벽으로 불리는 가사의 최고봉이다. 그는 당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당쟁에서 서인의 영수로 동인세력과 끝까지 맞서 싸운 투사였고 좌의정의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의 아들 정홍명(鄭弘溟)은 인조 때 대제학을 지냈으며, 정철의 현손인 정호(鄭澔)는 영조 때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정호 손자 역시 대제학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증손 정이환(鄭履煥)은 참판과 제학을 지냈다. 그밖에 고려 공민왕 때 오천군(烏川君)에 봉해진 정사도(鄭思道)와 영조 때 우의정 정우량(鄭羽良) 등을 들 수 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연일 237,218명, 영일 46,922명, 오천 22,033명이 있었다.
현재 영천시에는 오천정씨 집성촌이 여럿 있다. 옛적 청통면 서산리(瑞山里)가 영천시에 편입하여 된 대전동(大田洞)과 영천시 임고면(臨皐面)의 선원리(仙源里)와 자양면(紫陽面)의 성곡리(城谷里), 충효리(忠孝里), 귀미리(龜尾里) 노항리(魯巷里) 등인데, 생원공파(生員公派)로 임란 의병활동에서 큰 공을 세웠던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 선생 후손들이 자긍심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는 전통 반촌 집성마을들이다.
오천정씨의 영천 입향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충숙왕복위6∼1392.공양왕4) 선생의 부친 고려 증문하시중(贈門下侍中)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운관(鄭云瓘) 공이 부인이 영천이씨인 인연으로 처가곳으로 옮겨 세거한 이후부터라고 한다. 임고서원(臨皐書院)이 있는 안 골짜기에 부원군의 묘소가 있으니, 9세손(九世孫)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정익(鄭榏)이 중립(重立)하였다는 고려증문하시중일성부원군정공지묘(高麗贈門下侍中日城府院君鄭公之墓) 표석(表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公諱云瓘,系出烏川樞密院知奏事.諱襲明九世孫,公娶膳官署丞永陽李約之女,生圃隱先生,先生年十九公歿,後十年妣歿,祔葬道一洞,皆廬墓三年後,贈公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日城府院君,贈妣卞韓國大夫人,卽先生權恩也,事蹟有譜在今略焉].
이 외에도 포은선생의 화난(禍難)이 자신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일족인 판서(判書) 정광후(鄭光厚)공 손자인 생원(生員) 정문예(鄭文裔) 공이 처음 영천시 도동(道洞)에 터전을 잡았다가 처가곳인 대전동(大田洞)으로 옮겨 살면서 같은 마을에 살았던 영천이씨 대전(大田) 이보흠(李甫欽)과 처남남매간이 되었는데, 훗날 그 후손으로 선무랑 정차근(鄭次謹) 공이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피해 영천 자양면(紫陽面)에 옮겨 세거하게 됨으로써 지금 임고면의 선원리, 자양면의 성곡리, 충효리, 귀미리, 노항리 일원에 후손이 큰 문중을 이루게 되었다.
정세아(鄭世雅.1335∼1612년.광해군4) 공의 자(字)는 화숙(和叔), 호(號)는 호수(湖叟), 노촌(魯村) 정윤양(鄭允良)의 아들. 공은 1535년(중종30) 영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워 1558년(명종 13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자기 수양과 후학을 기르는 것에 만족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유례없는 불행인 임란은 공을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왜군이 영천성을 무너뜨리고 서울로 진격하자 왕이 몽진길에 나서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이즈음 영천(永川)에서는 권응수(權應銖), 정대임(鄭大任), 김응택(金應澤), 최응사(崔應泗) 등 뜻있는 선비들이 창의를 하였는데 공 역시 아들 의번(宜藩), 안번(安藩), 수번(守藩)과 9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국난극복에 앞장섰다. 신녕(新寧)의 박연(朴淵)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고, 경주(慶州)에서 관군(官軍)과 더불어 언양(彦陽)에서 올라오는 적 400여 명을 참살하고 혹은 격퇴했으며, 영천성 수복 전투에서도 역시 큰 공을 세웠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 권응수, 정대임 등과 경주성 탈환전에 참가한 공은 아들 의번과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박진의 부대와 합세, 친히 선봉장이 되어 혈전을 벌였다. 그 때 적의 기습으로 절도사의 군사가 무너지고 공의 의병만 고군분투하면서,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마침내 적을 몰아내고 성을 되찾았다.
이 전투에서 아들 의번은 공이 적에게 포위된 것을 보고 적진을 향해 돌진해 포위망을 뚫었고, 공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번은 공의 탈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좌충우돌하면서 계속 공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부친을 구하기 위해 세 차례나 포위망을 드나들면서, 몸은 적의 총칼로 만신창이가 된 채 계속 싸우다가 탔던 말이 총알에 맞아 포위당하게 되고, 결국 휘하 장수 10여 명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의번이 마지막 적진에 뛰어들 때 같이 참전했던 종 억수(億壽)에게 ‘군사가 패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전사한 줄 알았음) 나는 장차 도적들의 손에 죽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너는 따를 필요가 없으니 집으로 가거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억수는 울면서 “주인과 종의 의리가 군신이나 부자의 의리와 같다고 압니다. 이제 주인이 죽기를 결심하는데 종이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말하며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 후 의번의 시신을 찾지 못한 공은 시신 대신 그가 남긴 시와 친구들이 쓴 만사와 제문을 모아 입던 의복과 함께 관에 넣어 장사를 지냈는데, 그 무덤을 시총(詩塚)이라 한다. 그의 묘소 아래에 함께 죽은 억수의 무덤 시총(詩塚)이 있으며 주인과 함께 묘제(墓祭)의 상(床)을 받는다.
전쟁이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이르자 공은 군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맡기고 자양(紫陽)으로 돌아가 은둔했다.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여러 번 천거했으나 사양하였고, 나중에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을 잠시 지내고 곧 사직한 뒤 장현광(張顯光) ·조호익(曺好益) · 이준(李埈)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전란이 평정된 뒤에 선무원종 3등공신에 책록되고, 1612년(광해군 4년) 서세하니 향년 78세였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환고사(環皐祠)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 ‘호수실기(湖叟實記)’가 있다. 시호는 강의(剛義)이다.
한 집안에 한 사람이 창의해도 나라로부터 칭찬을 받을 일인데 4부자가 함께 창의했을 뿐 아니라, 적의 총탄이 빗발치는데도 자기 일신보다 아버지를 구하려다가 전사한 의번은 나중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충신, 효자로 정려가 내려졌으며, 안번과 수번은 영남충의단에 제향되었다.
특히, 주인의 가혹한 학대를 벗어나고자 오히려 왜군의 앞잡이가 된 종들이 허다했던 시대에 억수가 주인과 함께 전사한 것은 아랫것들이라 하여 함부로 대하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감쌌기 때문일 것이다.
영천시 대전동에 호수 선생의 종택이 있다. 호수종택(湖叟宗宅)은 영천시 유형문화재 제90호인 목조와가(木造瓦家) 맞배지붕의 건물인데, 광해군 5년(1643)에 해남현감(海南縣監) 정호례(鄭好禮)가 ‘工’자 형으로 건립한 전통양식의 한국식 건물이다. 정호례 현감은 호수공의 장손(長孫)이다. 이 건물 북쪽 약200m지점에 호수 정세아 장군의 위패를 봉안한 환고사(環皐詞)가 있다. 또 호수 종택 주변 밭 가운네에 우국충정이 녹아 있는 노거수 향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정호례(鄭好禮 1064-1672) 공의 자는 위보(衛甫), 영천읍 석동에서 내금위장 수번(守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증 호조참판 의번(宜藩)에게로 양자를 갔다. 뒤에 해남(海南)고을에 살았으며 병자호란 때는 어가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성을 지켰다. 평생에 왜구의 물건을 쓰지 않았으며 해남고을에는 공의 선정비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여기 대전동에 또 양계(暘溪) 정호인(鄭好仁)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지은 양계정사(暘溪精舍)가 있다. 정호인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가 자견(子見), 호 양계로, 호수 선생의 손자이다. 1627년(인조 5)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호조정랑 등을 거쳐 양산(梁山)·합천군수·진주목사와 남원도호부사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에는 영천 의병장으로 활동했으며, 대동법(大同法)을 정하여 부역을 균등하게 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양산에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저서에 1790年(정조 14) 후손이 간행한 《양계문집》 목판본이 있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에 있는 청호서원(靑浩書院)에 배향되었다.
정사(精舍)는 정호인과 그의 아우 어봉(魚峰) 정호문(鄭好問)이 함께 학문을 닦고 공부하던 곳이다. 1640年에 창건되고 그 후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중건하였다는 중재(中齋) 이호대(李好大)가 쓴 중건기문이 있다.
본래 정호인이 관직에서 일시 향리로 돌아와 경관이 좋은 지금의 위치에 초가 몇 칸을 짓고 문인들과 함께 양계에서 시를 읊으며 후학을 양성하고 《근사록(近思錄)》을 연구하던 학당이었다. 지금의 정사는 1700년대에 후손들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고현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 주변경관이 빼어나다. 마을의 좁은 골목을 지나 정사 입구에 들어서면 최근에 건립된 관리사가 있고 이어 양계정사가 보인다. 정사의 전체적인 배치는 동향의 ㄹ자형 배치인데, 조선 후기의 건물로는 보기 드문 특이한 양식이다.
이들 연일정씨와 연관하는 유적으로 하천묘역(夏泉墓域)이 유명하다. 하천묘역은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 78번지에 있으며 면적이 34정보(町步)가 넘는데, 영천지방에 세거(世居)하고 있는 오천정씨(烏川鄭氏) 가문의 문중(門中) 묘역이다.
산세(山勢)가 내룡(內龍)이 기룡산(騎龍山) 줄기라서 힘차고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가 분명하며, 안산(案山)이 수려하여 누가 봐도 뛰어난 명당(明堂) 자리로서의 조건을 갖추게 된 셈이다. 풍수지리설(地理風水說)에는 장풍득수(藏風得水)가 잘되어야 하는데 청룡, 백호가 병풍처럼 둘러서서 사나운 바람을 막아 줄뿐만 아니라, 산소의 좌향(坐向)이 남향이니 양지바르고 바람기 없기로는 더 할 수 없이 좋아서 장풍(藏風)을 얻은 셈이고, 댐이 큰 호수(湖水)로 묘 앞에 가득 찼으니 득수(得水)는 이 보다 나은 산소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수위(首位) 선무랑(宣務郞) 정차근(鄭次謹)의 묘를 비롯하여, 아들 노촌(魯村) 정윤양(鄭允良), 손자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 증손자(曾孫子) 백암(栢巖) 정의번(鄭 宜藩), 처사(處士) 정유번(鄭維藩), 호군(護軍) 정수번(鄭守藩) 3형제와 80여인의 묘가 있다.
원래 이 묘역은 승려(僧侶)를 두어 수호하였으나 부역(負役)의 과다로 승도(僧徒)를 폐지하고 산직(山直) 5가구를 두었다가나 현재는 하천종약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묘역 서편 언덕에는 하천재(夏泉齋)를 비롯하여 1976년에 영천댐 건설로 곳곳에 산재해 있던 지방문화재인 강호정(江湖亭), 삼휴고택(三休古宅), 삼휴정(三休亭), 오회당(五懷堂), 사의당(四宜堂)을 이건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 묘역 둘레에는 수 백년 된 노송(老松) 수 백 그루가 둘러서서 묘소 수호는 물론 경치를 한결 아름답게 하고 있다.
영천지방 3대 길지로 꼽히는 명당 중 하나인 하천(夏泉) 묘지(墓地)를 점지(點地)한 유래로 이 묫자리를 얻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정효자(鄭孝子)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 온다..
효자로 이름난 정윤양(鄭允良)은 호는 노촌(魯村), 조선조 중종(中宗) 때 사람이다.그 아버지 선무랑공(宣務郞公)이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피하여 영천의 대전(大田)에서 이곳 노항(魯巷)으로 옮겨올 때, 겨우 다섯 살이었지만 효성이 지극한 아이라 해서 원근 사람들이 이름대신 모두 정효자(鄭孝子)라고 불렀다.
어린 나이에도 소학(小學)에서 배운 대로, 혼정신성(昏定晨省)은 물론 자식의 도리를 다하려고 무한히도 애를 쓰곤 했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어린 정효자는 옷을 벗고 자리에 눕는 일이 없었고, 조석(朝夕)으로 먹는 것조차 잊고 곁에서 병간호를 지성으로 하였으므로 보는 이마다 감탄하였다. 끝내 아버지가 별세하자 애통해 하는 모습이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애처로웠으며, 초종장례(初終葬禮)를 행함에 있어서 예법(禮法)에 어긋남이 없었다.
어느 한 곳에 묘터를 잡아 미리 광중작업(壙中作業)을 하며, 상주가 친히 몰관(沒棺)에 필요한 흙을 채로 치고 있을 때, 마침 스님 한 분이 그 앞을 지나가다가 그 제자와 더불어 말하기를,
“저 상주는 좌우(左右)에 사람이 많이 있는데도 6덕(六德)을 갖춘 사람으로서 몸소 흙을 치고 있으니 그 정성스러운 효심(孝心)으로 좋은 터를 얻을 터인데 어찌하여 여기다가 터를 잡느냐? 여기서 멀지 않는 곳에 좋은 터를 두고서....?”하는 말을 일꾼이 듣고 상주에게 고하니,
상주가 그 스님의 뒤를 십 여리나 쫓아가서 말씀드리기를 “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내가 들었는데 그 길지(吉地)가 과연 어디입니까?” 하니 스님이 말하기를,
“내가 상주(喪主)의 정성스러운 효성(孝誠)을 보고 좋은 터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바 있는데 상주가 이미 들었고 또 정성스럽고 간절함이 이와 같으니 내가 가리켜 보이리라”
하고 기룡산(騎龍山) 기슭으로 인도하여 지팡이로 혈(穴)을 짚으면서 하는 말이,
“이 혈은 기룡(騎龍)의 좌장혈(左掌穴)이니 부귀(富貴)를 겸하여 가운(家運)이 융성(隆盛) 할 것이며, 힘차게 내려 쏟는 기룡의 정기(精氣)를 받았으니 위인(偉人)이 태어날 징조(徵兆)요, 또 청룡 백호가 세 겹으로 되어 있으니 크고 귀한 판국(版局)에는 손세(孫世)도 아주 좋을 것이오”
라고 했다. 정 효자는 노승(老僧)을 집으로 모셔 다가 후하게 대접할 생각으로 집으로 가자고 소매를 끌었으나 끝내 사양하며 노승(老僧)은,
“신령(神靈)의 명(命)을 받고 온 설학(雪學)이오,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니 오늘은 길이 바빠서 가야 하오 너무 심려하지 마시오”
하고는 기어이 길을 떠나갔다. 그 후 정효자는 여묘(廬墓) 3년을 마치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 문하(門下)에 가서 학문을 닦아 훌륭한 인물(人物)이 되었다고 한다.
묘하(墓下) 하천재(夏泉齋.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3호)는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78번지 연일, 오천정씨(烏川鄭氏) 문중 묘소와 강의공(剛義公) 정세아(鄭世雅)의 신도비를 수호하기 위하여 진주목사인 정호인(鄭好仁)이 조선 인조 15년(1637년)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들은 후대에 중건된 것으로 보이며 영천댐 수몰지구로 편입되어 1976년 7월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경내에는 추원당(追遠堂), 신도비각 등의 건물이 있는데 모두 단순하고 소박하게 짜여져 있고, 기타 오회공종택(五懷公宗宅) 등 여러 문화재가 자리잡고 있다..
강호정(江湖亭, 경북유형문화재 제71호)은 호수(湖叟) 정세아(1535~1612)의 학덕과 충의(忠義) 정신을 기려 후학들이 세운 정자이다. 본래는 호수공이 선조 32년(1599)에 만년의 강학처로 영천 자양현 노항촌(魯巷村)의 자호천 언덕에 자호정사(紫湖精舍)를 세운 것이 시초이다. 세월이 흘러 본래의 자호정사는 무너져버렸고, 조선 정조 경술년(1790)에 후학들이 옛터에다 정사를 다시 복원하였다. 그리고 집 이름을 호수의 자호(自號)를 따라 강호정(江湖亭)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또 다시 2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자 강호정이 있던 자리는 모두 영천 자양댐으로 수몰지역이 되기에 이르렀다. 정부에서 문화재 보존책으로 문화유적들을 옮기는 계획안을 내놓았을 때 자손들과 유림에서 협력하여 병진년(1973)에 자양댐이 내려다 보이는 기룡산 하천(夏泉)의 호수 묘소 아래로 이건해 놓았다. 아울러 호수의 손자되는 호신(好信)이 세운 삼휴정(三休亭)과 또 후손들의 정자 오회당(五懷堂), 사의당(四宜堂) 등도 모두 강호정 뒤편으로 옮겼다.
오회공종택(五懷公宗宅.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2호)은 임진왜란 때 의병의 활약으로 영천, 경주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정세아의 넷째 아들인 정수번(鄭守藩)이 그의 셋째 아들 삼휴당(三休堂) 정호신(鄭好信)의 분가주택으로 조선 광해군 12년(1620)경에 건립한 것이며 묘우(廟宇)는 효종 6년 (1655)에 세워졌는데 영천댐 건설공사로 1977년 3월에 현 위치로 이전·복원하였다. 주택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가적지붕이고, 묘우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사의당(四宜堂 경북 유형문화재 제74호)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강학당(講學堂)으로, 조선 영조 8년(1732)에 정중호(鄭重鎬)의 형제인 중기(重岐)·중범(重範)·중락(重洛) 등이 우의를 더욱 돈독히 하고 학문연구와 제자교육을 위해 지은 것이다. 원래는 자양면 용산동에 지은 것을 영천댐 건설로 인하여 1977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
오회당(五懷堂.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6호)은 오회당 정석현(五懷堂 鄭碩玄)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영조 3년(1727) 관찰사 권대규(권대규)의 후원으로 건립하였으며, 영천댐 건설공사로 1977년 3월 현 위치로 이전·복원하였다. 소박하게 짜여진 건물로 지붕의 형태는 맞배지붕 좌우에 눈썹지붕을 덧달아 마치 팔작지붕처럼 보이게 하였는데, 이런 형태는 이 지역에는 흔히 볼 수 있다.
영천에 거주하는 연일정씨 문중은 위밖에도 세거지 주변 도처에 아주 많은 문화재를 소유, 관리하고 있다. 우선 임고면 양항리(良巷里)에 최근 국가가 대규모로 성역화(聖域化)한 임고서원(臨皐書院)을 필두로 선원리의 환구세덕사(環丘世德祠), 함계정사(涵溪精舍), 산수정(山水亭), 정용준가옥, 매산고택 등이 있고 멀지 아니한 자양면 충효리에 충효재(忠孝齋) 등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