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미
허상문 / 영어영문학
언젠가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대표작 〈야경〉을 오랫동안 감상한 적이 있다. 렘브란트의 대표작이자 불멸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그림은 외견상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투쟁하는 네덜란드 시민민병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렘브란트 말년의 쓸쓸하고 외로운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렘브란트는 빛에서 어둠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한 작가였다. 빛이 화려할수록 영혼의 빛은 흐려진다고 생각하면서 어둠을 표현하기 위해 밤에만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빛이 남기는 어둠은 한 장의 거대한 여백이 된다. 인간은 항상 빛을 좇으면서 어둠은 쉽게 지나치지만, 빛과 대조되는 그림자와 어둠이라는 여백만큼 삶에서 중요한 것은 없다.
여백, 어둠, 그림자, 이런 단어들은 비현시적이고 비물질적인 것들의 가치를 표현하는 수단이다. 일반적으로 여백은 무언가를 쓰고 남은 빈 공간을 의미한다. 여백은 단순히 비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남겨둔 공간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때로 여백은 일정한 용도로 사용하고 남은 나머지를 뜻하는 자투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여백은 의외로 많은 곳에서 인정받는 영역이다. 특히 미술에서는 주요 조형 기법으로 인식되어 작품의 본질을 담아낼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으로 다루어진다고 한다. 오히려 꼭꼭 채워진 공간보다 더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표현의 수단으로 활용된다. 미술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여백은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다.
우리 삶에서 여백은 ‘여유’라는 소중한 의미로 재생된다. 여백은 비어 있는 공간이지만, 채워질 내용을 생략한 가능성의 공간이다. 지속성이 약속된 비워진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여백은 앞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여유’라는 더 의미 있는 공간이 된다. ‘여유’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친숙한 단어이며 의미일 수 있다. ‘여유로운 시간’, ‘여유로운 사람’, ‘여유로운 삶’은 모두 긍정적이며 새로운 가능성을 의미한다. 물론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면 ‘여유’가 많다는 것은 무슨 일에 느슨하거나 결과 이행이 지연되거나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흔히 ‘여유’는 느긋하고 차분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세상에서 정말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은 좀처럼 본 모습을 함부로 모두 드러내지 않는다. 또한 어느 분야에서든 진짜 중요한 사람은 쉽게 자기 모습을 전부 드러내지 않는다. 꿈이라든가 희망, 행복을 어떻게 물질로만 치환할 수 있는가? 그림자와 여백으로 보이지 않는 비현상적 가치로 남아 은근히 보이는 틈새와 비워진 공간은 더욱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 적절한 여백은 적절한 채움의 다른 표현이다. 인생에서도 덧셈을 할 때보다 뺄셈을 할 때가 더욱 힘들고 어렵다.
인생을 살아오면서도 여백은 늘 불안한 공간을 의미했다. 무언가 가득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채워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삶의 여백, 관계 속의 여백을 이해하지 못했고 여백은 늘 온전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곳이라고 여겼다. 여백을 인정하지 못하고 채워 넣는데 급급한 우리는 항상 갈등과 고민에 휩싸인다. 모두가 워낙 열심히 살아가는 탓인지 잠시의 여백을 인정하지 못한다. 공간은 꼭꼭 메꾸어야 하고, 비어 있는 여유로운 시간을 용납하지 못한다. 자신과 세상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공백의 시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잠들기 전에 지난 하루의 일을 생각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다가올 오늘을 생각한다. 상대방의 삶 속에 녹아있는 여백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의 기준과 관점으로 채워나가기 급급하다.
그렇지만 조금만 여유롭고 차분한 마음으로 삶의 여백을 바라보면 앞으로 남은 시간에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 새로운 눈으로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좀 더 여유롭고 느긋한 마음을 가지면 숲길을 걸으면서도 ‘아, 여기 이런 꽃이 피었네’ ‘오늘 우는 새 울음소리는 더욱 즐겁게 들리네’라고 느끼게 된다.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면 인생도 사람도 올바르게 볼 수 없다. 여백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여유가 있어야 계절마다 다시 피는 나무와 꽃, 오고 가는 사람들이 표정을 통해 이 세상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여백은 이렇게 빨리 흘러가는 세상에서 인생은 좀 더 오랫동안 바라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런 의미에서 노년은 어느 때보다 ‘여백의 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일생의 삶을 마감하는 노년은 어느 때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생길을 마감하게 되는 시기이다. 노년은 삶의 여정 중에서 마음을 비우고 지난 시간을 바라보면서 삶을 마무리할 때이다. 서산에 지는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면서 노년은 담담한 마음으로 삶의 여백을 마음에 담을 수 있다. 욕망과 경쟁이 모두 떠난 자리에는 사랑과 너그러움이 가득하다. 가지고 싶은 마음보다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고, 미워하는 마음보다 사랑하고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자리를 채운다.
사람들이 무시하거나 가치 없다고 여기는 생각들에 대해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는 것은 세상의 모든 존재를 향해 또 다른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다. 보이는 세계에 머물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성숙한 눈을 통하여 가능하다. 세상에서 무시되거나 가치 없다고 평가되는 곳에서 더욱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들이 많다. 우리가 스쳐 지나치는 작고 의미 없는 곳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면 여백의 의미는 더 깊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여백의 의미는 삶의 그림자를 만들고 빨리 흘러가는 세상을 좀 더 오랫동안 여유롭게 바라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여백은 버려지거나 쓸모없는 공간이 아니다. 비어 있음으로 써 사유와 명상이 가능한 곳이다. 자투리가 없고 모든 것이 가득하게 채워져만 있으면 이 세상은 지나치게 완벽하고 몰인정한 곳이 된다. 여백이 주는 여유로움의 공간은 인생과 세상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적당한 여백은 적당한 채움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렘브란트가 ‘빛과 어둠의 화가’로 불리는 것은 빛 속에서 어둠을, 어둠 속에서 빛의 여백을 통해 숭고한 인간애를 표현하고자 한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빛을 좇지만, 렘브란트는 빛 뒤에 가려진 어둠이라는 거대한 여백을 바라본 것이다. 인생과 세상의 모습을 온전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빛 뒤에 숨어있는 그림자와 어둠이라는 여백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첫댓글 교수님, 옥고 고맙습니다. 색깔은 곱지만, 쌀쌀한 바람결에 흔들거리는 '단풍'처럼 마음을 때립니다. 렘브란트 그림 앞에 섰던 순간도 떠오르고, 명암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넵! 여백을 즐기는 시간을, 그리고 그 속에 스미는 감사를 찾아 누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