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글라스펠 ‘사소한 것들’(새로읽는 고전:103)
◎여자라고 늘 당하고만 살까/
“남편의 부당한 폭력 그것을 응징한 아내 동병상련 여자만이 그녀를 공정히 심판할 수 있다”
단막극 ‘사소한 것들’이 오늘날 고전으로 자리잡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이 작품이 관객을 흥분시키는 흥미진진한 살인 미스터리극이면서 동시에 깊이 있는 심리적 통찰력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리라.
해일 부인과 피터스 부인은 남편 살해 혐의로 감옥에 갇혀 있는 이웃 미니 포스터 라이트 부인의 험난했던 삶을 재구성하게 되며,이 과정에서 두 부인과 관객은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여성이 공통으로 겪는 고통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 이 극의 기본 골격이다.
그러나 이 극의 절정과 결말은 살인사건의 전개 과정이나 왜 라이트 부인이 살인을 저질렀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해일 부인과 피터스 부인이 직면하는 심리적 딜레마로 이뤄진다.
두 부인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감추고 심지어 이웃 친구 라이트 부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단서들을 없앰으로써 보안관이나 검사 등과 같은 남성 공직자들에게서 법적 행사권을 빼앗고 정의 구현을 자신들의 소관으로 만들어버린다.
○흥미진진 살인 미스테리극
라이트 부인이 경험했던 것을 그대로 경험했던 여자들만이 오직 그녀의 판관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언뜻 미미하게 보이는 두 부인의 이 사소한 반란은 여성의 남성 공권력에 대한 강력한 도전일 수 있다.
이 극의 제목이 시사하고 있듯 이 극은 여성의 관심을 차지하는 ‘사소한 것들’과 남성의 관심사인 ‘매우 중요한 것들’ 사이의 대조를 중심으로 발전된다.
극이 진행되면서 사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 때문에 두 부인은 라이트 부인의 죄와 그 동기를 알게 되며 이를 입증할 중요한 증거마저 발견한다.
한편 남자들은 ‘중요한 것들’(공적이고 이성적인 것? 그러나 작품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에 대한 관심과 ‘사소한 것들’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범행의 단서를 찾지 못한다.두 부인이 목격하게 된 라이터 부인의 짐은 어수선하고 무엇인가 정돈되어 있지 않다.
특히 그의 주요 활동공간이었던 부엌에는 여러가지 물건이나 일들이 미완성 상태로 아무렇게나 나뒹굴어져 있다.더러운 수건,제대로 닦이지 않은 냄비,반만 닦인 테이블,구어지지 않은 빵,하다 만 바느질과 그 보따리.
보안관과 검사에게 이러한 것들은 라이트 부인이 주부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갖추지 못한 것을 입증해줄 뿐이다.그러나 이 두 부인에게 부엌에 흩어져 있는 이와 같은 미완성의 물건들은 포스터 부인의 흥분된 상태를 반증해주는 증거들이다.
○여자들이 주목하는 ‘사소한 것들’
그들은 여기서 존 라이트 살인사건이 있기 전날 밤 라이트 부인이 일상사를 제대로 행할 수 없을 만큼 그녀에게 큰 일이 벌어졌음에 틀림 없다고 인식한다.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보이면서 이 두 부인은 점차 살인의 동기를 입증하는 단서들,즉 거칠게 부서진 빈 새장과 바느질 상자 속의 목이 비틀려 죽은 새를 발견하게 된다.이 두 가지에서 부인들은 인간사회에서 서로의 교제와 삶의 활기를 거부한 라이트 부인의 남편 존 라이트가 새의 목을 비틀어 죽임으로써 그녀의 유일한 위안처를 처분했으며,이 사건은 그녀로 하여금 살인에 이르게 하는 발단이 되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일에 신경쓴다고 공언하는 보안관과 검사의 눈에 이러한 단서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들은 바느질 바구니를 뒤적이며 라이트 부인이 하다 만 바느질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두 부인을 조롱하면서 정작 문제의 핵심은 놓치고 만다.
그런데 바느질과 같은 사소한 것들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을 비웃는 이와 같은 남성들의 태도가 이 두 부인으로 하여금 라이트 부인과 연대하고 남성 지배에 항거하도록 유도한다.
두 부인은 점차 그녀가 냉혹하고 비정한 남편과 함께 아이도 없이 살면서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이해하게 된다.그들은 과거 성가대에서 노래 부르기를 즐긴 쾌활했던 그녀가 결혼 후 완전히 바뀐 환경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고 삶의 활기를 찾기 위해 카나리아 새를 친구 삼아 키우며 살았다는 점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새장에 갇힌 카나리아와 집 안에 갇힌 포스터 부인의 운명의 유사성도 발견한다.
이 과정에서 부인들은 그들의 삶도 미니의 그것처럼 텅 비어 있음을 깨닫고 미니와 공감하게 된다.
특히 피터스 부인은 첫 아이를 잃고 혼자 있었던 다코디 생활의 외로움과 어린시절 남자아이가 고양이를 죽였을 때 그녀가 느꼈던 살인충동을 기억해내며,라이트 부인의 남편 살해동기를 마음 속 깊이 이해한다.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두 부인을 은연중 그녀를 구해내는 공모로 유인한다.
보안관과 검사가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하고 현장을 떠날 때 두 부인은 협조해 사건의 단서가 된 죽은 카나리아를 해일 부인의 오버코트 주머니 속에 감추는데 성공한다.
증거를 감추면서 보안관과 검사를 떠나보내는 두 여인의 작은 공모,이것은 앞으로 미니를 가부장적 법정의 가혹한 처벌로부터 구해낼 것이 틀림 없다.
○남성들의 비아냥을 되레 조롱
또한 이 공모는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비아냥거림을 한껏 조롱하면서 남성들에게 간접적으로 반격을 가한다.아니 그것은 그 이상의 일을 이룩한다.
두 여인은 여성들만이 존 라이트의 죽음에 관련된 증거를 찾을 수 있으며,오직 여성들만이 그 사건을 공정하게 판단할 자격이 있다는 점을 충분히 입증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포스터 부인은 가해자나 범인이라기보다 그녀의 남편과 사회가 만들어낸 희생물이란 점을 명백히 밝혀냈다.
만약 그녀가 어느날 밤 남편을 질식시켜 그의 생명을 앗아갔다면,그것은 오직 존 라이트가 긴 세월 조금씩 그녀의 삶을 질식시켜 그녀에게서 생명을 빼앗아갔기 때문인 것이다.
◎글라스펠은 누구/금세기 초 미국 연극계 주도한 여성 극작가
미국 문학과 연극계의 선구자였던 여성 극작가 수전 글라스펠(1882∼1948)은 미국 아이오와주 출신으로 그곳 디모인에 소재한 드레이크대와 시카고대에서 수학한 뒤 주로 뉴욕에서 활동했다.1913년 조지 크렘 쿡과 결혼해 1916년 프로빈스타운 플레이어스 극단을 창단했다.유진 오닐 등 20세기 초의 영향력 있는 극작가들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이 극단의 창설은 미국 현대 연극사에 획을 긋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글라스펠은 이 극단과 7년 동안 운명을 같이하면서 11편의 극을 썼으며,오닐과 함께 표현주의를 미국 무대에 소개했다.대표작으로 ‘사소한 것들’ 외에 ‘억압된 욕망’ ‘버니스’ ‘변두리’ 등이 있으며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스의 삶을 극화한 ‘엘리슨의 집’(1930)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오닐의 그늘에 가려 70년대 이전의 20세기 연극사에서 글라스펠의 공로는 거의 잊혀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러나 70년대 여성운동에 힘입어 그녀의 작품들이 재발굴되면서 글라스펠은 20세기 초기의 중요한 미국 작가로서 명성을 되찾았
<이희원 서울산업대 영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