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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시선집『허물벗기 연습』
鄕愁의 精神分析, 金松培 詩人의 歸還
金 鍾 柱 (문학평론가. 김종주정신과의원 원장)
1. 은유와 환유의 정신분석
자끄 라깡은 문학도들한테 강의할 때 “프로이트는 끓임 없이 주장하기를 문학수업이 분석가가 되는데 첫째가는 필수조건”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문학을 이해하는 기초로서 정신분석을 가르치기 보다는 정신분석 그 자체가 문학연구의 한 분과라는 뜻으로 말 한 것이다.
라깡은 정신분석학의 대상을 별개의 개체인 개인으로부터 간주체(間主體)의 변증법으로 바꿔 버렸다. 전통적으로 정신분석학의 대상은 인간으로 여겨왔으나 분석경험이 간주체의 대화를 강조하게 되고 자아라는 것이 간주체의 관계에서 형성된다고 믿으면서부터 이런 변화가 생겼다. 다시 말해서 정신분석의 대상은 ‘우리가 말을 걸게 되는 그 사람’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말을 거는 그 사람이 문체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의 대상은 문체다.
라깡을 읽는데 가장 큰 장벽은 라깡의 문체다. 라깡한테는 문체가 대담자라면 라깡 읽기의 장애물은 다름 아닌 독자 자신이다. 라깡은 실제의 독자한테 말을 걸지 않는다. 오직 상상의 독자한테만 말을 걸 수 있다. 따라서 독자는 자신과 텍스트 내의 대담자와의 사이에 불일치를 느끼고 그 자리를 메꾸지를 못하는 그 점이 라깡 읽기의 가장 큰 어려움이 된다. 다시 말해서, ‘라깡이 말을 거는 그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독자가 감당하기에 부적절한 느낌이 들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라깡의 텍스트 가운데서도 가장 수수께끼 같아서 독자를 실망시켜 주는 부분이 바로 은유와 환유에 대한 알고리듬이다. 이 연산식은 숫자가 아닌 문자로 구성 되어 있어서 문자에 집착하는 라깡의 태도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환유 ƒ (S...S') S ⋍ S (-) s
은유 ƒ (S'/S) S ⋍ S (+) s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은유의 공식에는 (+)라는 더하기 기호가 있다. 이것을 라깡은 ‘가로줄의 교차’라고 부르는데 이 (+)부호는 가로줄에 수직선을 교차시킨 것이다. 이처럼 라깡은 평범한 더하기 기호를 표의 문자로 변형시켜 논리-수학적 표기법에 익살의 낌새를 가미시킨다. 이 두 공식은 일찍이 소쉬르의 공식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 언어학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러나 S/S라는 공식은 라깡의 창작이다. 이 공식은 ‘소기 위의 능기’라고 읽어야 한다. ‘위의’라는 말은 두 가지를 분리시키는 가로줄과 연결된다. 뿐만 아니라 능기는 대문자로 쓰고 위에 놓여져 있다. 결국 라깡은 ‘능기가 의미를 지배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사실 소쉬르는 소기를 가로줄 위에 올려 놓았었다. 여기서 능기란 문자를 말하고 소기란 뜻을 말하니까 라깡은 문자에 권위를 부여하려는 의도를 내비친 것이다. 정신분석적으로 위와 아래라는 개념은 심층심리학과 관련된다. 그러니까 가로줄 아래에 있는 소기는 무의식 속에 깊숙이 억압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이 소기는 소문자와 이태릭체로 쓰여 있어서 좀 더 이질적인 것이니까 빨리 제거되어야 하고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만들어 준다.
[ƒ]는 함수를 의미한다. 은유의 함수인 (s'/s)는 쉽게 이해된다. 라깡은 은유를 ‘다른 것을 대신하는 단어’로 정의한다. 대치된 단어(옛 능기)는 새 단어(능기)의 소기가 된다. 그러나 환유의 함수인 (S...S')는 좀 더 인유적이고 좀 더 생략적이어서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라깡은 환유를 ‘단어 대 단어’의 관계로 정의하고 있다. 이것을 야콥슨은 인접관계라 불렀다. 구체적인 담론에서 한 줄에 배열된 두 능기들의 관계이다. 예를 들면 한 문장이나 한 단락에 있는 두 단어 사이의 관계일 수 있다. 환유의 차원에서 능기는 오로지 사후적으로만 완전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유의 함수 (S...S')에 대한 능기는 오로지 그 자체가 환유이기 때문에 그 문장을 이해하려면 전체적인 문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환유는 더욱 표의문자와 닮은꼴이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은유의 함수 (S'/S)에 대한 능기는 그 자체가 은유다. 따라서 S/s' 가 S'/S로 대치되듯이 대치되는 옛능기를 제공하기만하면 된다.
각각의 알고리듬에는 두 개의 괄호가 합동기호(⋍)의 양쪽에 하나씩 있다. 먼저 환유의 공식에서 보면 오른쪽엔 빼기기호인 가로줄이 있고 왼쪽에는 S와 S'가 수평배열을 하고 있다. 은유의 공식에서는 S와 S'가 수직배열을 보인다. 야콥슨은 환유의 배열을 언어의 수평차원으로 보고 은유를 수직차원으로 보고 있다. 라깡은 두 가지 공식을 ‘수평적 의미 사슬’과 ‘수직적 의존성’이란 용어를 도입해서 표현하고 있다. 라깡은 수평성을 불충분함과 연결시키고 수직성이 충분함과 온전함과 풍부함을 약속해 주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환유의 공식에서는 왼쪽에 있는 S와 S'의 수평배열이 오른쪽의 가로줄과 쌍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은유의 공식에서 왼쪽의 S와 S'는 수직배열인데 비해 오른쪽의 괄호 안에는 수직선이 아닌 십자를 놔두고 있다. 십자는 수평선과 수직선이 교차하는 이차원인데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흔히 가로줄을 세로로 그어 내린 수직선만을 보려고 한다.
라깡의 텍스트는 두 가지 서로 모순된 독해를 초래할 수 있다. 한 가지는 수직성에 부여하는 특권이고 또 한 가지는 수직성을 이차원적 배열과 혼동하게 만드는 일이다. 만일 수직성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은유를 선호하는 경향과 연결된다면 더하기 기호의 이차원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은유에 환유가 꼭 필요함을 암시해 주는 일이라 할 것이다. 사실 라깡은 [정신병]이라는 세미나에서 “환유는 처음부터 존재해 왔고 또 은유가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신분석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더하기와 빼기 사이, 즉 결여와 비결여 사이의 이러한 이분법적 대립은 성 차이와 조응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남근적인 것과 거세된 것의 대립처럼 성 차이에 관한 이분법적 오독(誤讀)을 초래 할 수도 있다. 라깡은 은유와 환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은유의 의미 효과는 능기 대 능기라는 수직적 대체에서 만들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시(詩)의 효과 또는 창조의 효과이다. 수평으로 배열된 슬픈 구조인 환유는 오로지 결여만을 제공할 뿐이다. 은유는 시(詩)의 극치와 창조의 극치에 이르도록 해준다. 라깡은 ‘은유의 창조적인 번득임’이라는 표현에다가 ‘시적(詩的)인 번득임’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은유와 시에 연결되는 이 ‘창조’라는 단어는 성적(性的)인 생식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환유 공식에서 S는 생략 부호를 사이에 두고 s'와 떨어져 있지만 은유공식에서 S'는 위에 올라와 있다. 의미 효과를 내는 항(項)인 S'는 이렇게 환유에서는 잠복되어 있고 은유에서는 발현되어 있다. 잠복되어 있다는 것은 언젠가 나타나리라는 의미로 예기적(豫期的)이다. 발현되어 있다는 것은 수직적 배열을 심층심리학과 관련지을 때 윗항이 표면에 떠올라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S'가 의미 효과를 내는 항을 가리키고 그러한 효과를 성적인 창조와 관련시키면서 우리는 ‘잠복된’ S'에서 ‘숨겨진’ 여성의 성기를 연상 할 수 있다. 남성의 성기는 발현되어 있다.
은유를 시에 연결시키고 환유를 소설에 연결시키려던 야콥손의 매력적인 시도처럼 라깡도 분명히 은유를 시에 연결시키고 환유를 사실주의에 연결시키고 있다.
환유는 상징적 형태라든가 시적언어와 대조되는 사실주의적 형태의 창조성을 드러낸다. 여성의 성의 그림자는 사실주의와 환유의 결합형태로 자주 나타난다. 이처럼 환유라든가 인접성에 의해 여성의 성은 암시되기도 한다.
현상에서 겉으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모두를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라깡은 “영원한 유혹”이라 말했다. 여기서 ‘겉으로 가장 뚜렷한 것’이란 은유의 수직성에 부여한 특권이다. 이 ‘영원한 유혹’ 때문에 언어학자들이 은유를 더 선호하는 듯한 편견을 보이게 된다. 라깡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모두 그런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유혹’이다. 이러한 매혹적인 착각은 상상계에 속한다. 거부한다고 해서 건너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두 가지 비유방법에 따른 해석상의 차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은유적 해석이란 텍스트 내에서 어떤 능기를 대신하게 되는 다른 능기를 공급해 주는 일이다. 반면에 환유적 해석이란 연상에 의해 만들어진 전체 텍스트를 공급해주는 일이다. 이러한 환유적 해석을 ‘여성적 독해’라고도 부른다. 환유는 노예 신분이다. 따라서 주체는 가로줄의 강압적인 힘에 굴복하게 된다. 오히려 은유는 그러한 힘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런데도 은유가 만들어지려면 환유의 여성적 속성인 요령과 에움길을 빌려와야 한다. 환유의 이런 속성 덕분에 사회적 검열이라는 장애물을 교묘히 피해 갈 수 있다. 남성적인 은유는 솔직할 수 있고 또 여성의 성(性)을 속박하는 장애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렇지만 은유는 여성적인 환유에 의지해야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드디어 “환유는 처음부터 존재하고 은유가 가능해지도록 만들어준다.”는 라깡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어른들의 성 모형이 여성에게 의지하는 남성의 의존성을 보여주는 것처럼 은유의 십자 속에서 가로줄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남근은 감춰져 있을 때에만 그 역할을 해낸다”라고 라깡은 주장한다. 그런데 감춰진 남근은 모성 남근이라는 프로이트의 개념을 연상시켜 준다. 은유와 환유의 알고리듬에서 S'는 아무래도 남근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독해가 이뤄진다면 환유야 말로 은유보다 더 남근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수직성 대 수평성이라든가 남성 대 여성, 은유 대 환유와 같은 양극적인 대립은 결국 동일시와 경쟁성이 작동되고 있는 상상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이 된다. 은유에 특권을 부여하는 ‘영원한 유혹’을 해독할 수 있는 한 가지 해독제는 은유의 십자 가운데서 수평선을 인식하는 일이다. 그것은 또한 환유의 가로줄이 근본적으로 은유와 연루 되어 있음을 아는 일이다. 이러한 인식은 자신의 정체가 구성되어 가는데 있어서 처음부터 존재하는 경쟁적인 타자를 깨우쳐 주려는 라깡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다.
2. ‘날 수 없는 혼백 하나’의 능기
구조주의 언어학을 빌려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재해석해 온 라깡은 소기가 아닌 능기를 우선으로 삼는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다양한 시 읽기가 혼란에 빠졌던 것도 알고 보면 소기를 찾아내려는 무리한 시도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소기를 추구하는 독해는 실패 할 수밖에 없다. 소기는 능기 밑으로 미끄러져 무의식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능기는 이미 소기를 떠나 혼백처럼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김송배의 시선집『허물벗기 연습』은 이러한 과정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어서 독자는 새로운 시 읽기를 강요당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홑꽃잎 뒤풀이(9). 鳶」은 떠도는 능기의 새로운 변형을 제시하고 있어 주목된다.
날 수 없는 혼백하나
전깃줄에 매달려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다.
창공 녹아내린 소나기에
녹슨 전신을 헹구며
이승에도 저승에도
수신되지 않는 전문은 희미하고
외올 가느다란 꿈 풀면서
얼래에 감아둔 한 생명
감사나운 바람을 만나
활활 타오르는 아지랑이였다가
천길 벼랑을 꽂는 무지개였다가
찢어진 오장육부를 말리면서
짙고 푸른 넋
정말 어쩌다가 낙오되어
눈감은 채 떨고 있다.
제 4연은 그냥 맹목적으로 떠도는 능기가 아님을 분명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비록 얼래에 감긴 외올 가느다란 실로 연결된 연은 ‘감사나운 바람을 만나’ ‘활활 타오르는 아지랑이였다가’ ‘천길 벼랑을’ 내리 꽂았다가 다시 무지개처럼 비상하는 자유스러워 보이는 능기의 모습 그대로이다. 무지개처럼 떠올라서는 아지랑이처럼 타오르다가 내리 꽂다가 다시 떠오르는 반복된 운동을 기대해도 좋다. ‘감사나운 바람’에서 능기와 소기가 헤어지는 계기를 읽을 수 있다. 마치 구조주의 언어학자인 소쉬르의 s/S를 S/s로 옮겨 놓는 라깡의 바람 같아 보인다.
그러나 시의 그물에 사로잡힌 언어 한 조각은 이젠 전깃줄에 매달려 ‘날 수 없는 혼백 하나’가 되어 버린다. 더 이상 날 수 없다 하더라도 이러한 능기는 소기로 쉽게 해독(解讀)되지 않는다. ‘안개 짙은 서울에서’ 찾아보려 해도 찾아지지 않는 ‘디오게네스’(「서울허수아비」)다. ‘들판에 서서 참새 한 마리 만나지 못하는’ ‘허수아비’다.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수신되지 않는 희미한 전문이다. “이승 언 빨래줄에 걸려있는 낡은 한 올의 기억”(「묘지송」)으로 남을 뿐이고, 빨래줄에 나부끼는 헌 빨래(「흔들리는 그림자」)가 되고 만다.
이미 연은 의인화 과정을 통해 생명력을 얻었다. ‘얼래에 감아둔 한 생명’이었다가 ‘찢어진 오장육부를 말리면서 짙고 푸른 넋’이 되어 버렸다. 오장육부란 한 방에서 내장을 의미하기 때문에 현대과학의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우리의 생명과 질환을 총괄하는 상징적인 의미로서의 은유로 봐야 할 것이다. 겉이 아닌 내장은 심층심리학적 개념으로는 속마음, 즉 무의식을 연상케 한다. 무의식을 ‘말린다’고 하면 의식화(意識化)로 봐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의 정신분석이 무의식의 자료들을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하게 된 까닭은 바로 소기의 추구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가닿을 수 없는 소기를 추적한다는 것은 말짱 헛된 몸짓일 뿐이다.
여기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어떤 매듭 같은 것에 걸리는 느낌을 주는 어휘가 있다. 마지막 연의 제 3행이다. ‘정말 어쩌다가 낙오되어’이다. 시인의 의미사슬에 걸려든 능기를 ‘낙오된’ 것으로 보고 있는 관점이다. 적극적으로 붙잡은 게 아니라 대열에서 떨어져 뒤쳐진 능기란 뜻이다. 소극적인 태도다. 적극적으로 나서봐야 별 수 없더라는 체념을 내포하고 있어서 안타깝다. 그러나 ‘정말 어쩌다가’라는 부사구가 ‘낙오’라는 어휘에게 고정된 의미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낙오되는 일이 좀체로 없는데 참으로 드물게 낙오됐다는 뜻으로 먼저 읽힌다. 그러나 시인은 분명히 ‘누구에겐가 말을 건네고 있는’ 중이다. 라깡의 문체에서처럼 그 대담자가 상상의 인물이든,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이든, 아무튼 화자의 설정은 자연스런 일이다. ‘정말 어쩌다가’가 그 화자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면 전혀 다른 의미로 읽어내야 할 것이다. 능기 하나가 낙오되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드디어’날 수 없는 능기 하나를 붙잡을 수 있었기에 ‘짙고 푸른 넋’임을 알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붙잡고 보니 ‘눈감은 채 떨고 있’다. 감사나운 바람도 잤다. 미풍만이 살랑대는 전신줄에 걸려 마치 구조신호라도 보내려는 듯이 떨고 있다. 구조가 필요하다며 떨고 있음은 불안을 느끼는 몸짓이다. 더구나 눈을 감고 있다. 너무 아찔한 상황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천길 벼랑’의 끝에 매달려 있다면 불안에 떨 수 있다. “수천 길 벼랑 아래로 아래로만 곤두박질”(「묘지송」)한 경험이 있었다면 극도의 불안상태인 공황장애라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다.
라깡은 불안의 본질을 “아찔한 오르막으로 기어올라 혼돈으로 다시 미끄러져 떨어질 위험”으로 정의하고 있다. 인간은 통일체를 이룰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언제나 자기통달(自己通達)을 예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출발했던 혼돈 속으로 다시금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끊임없는 위험을 수반하게 된다. 라깡에 의하면 거울단계를 거치면서 비록 착각이긴 하지만 이러한 자기통달을 예기해 본다. 이 단계를 거쳐야만 언어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 속으로 진입할 수 있다. 상징의 세계 속으로 들어온다는 뜻이다. 그럴려면 비록 허구일망정 자아가 구축되어야 한다. 이러한 예기의 결과가 바로 불안이다.
3. 은유의 궤적
라깡이 제시한 은유의 알고리듬에서 볼 수 있듯이 은유의 의미효과는 능기 대 능기라는 수직의 대체에서 만들어진다. 은유에서는 새 능기가 옛 능기를 대체한다. 옛 능기를 소기로 삼고 새 능기를 능기로 삼는 수직배열을 보인다. 이러한 수직의 대체에 의해서 시의 효과가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은유가 시의 극치에 이르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은유가 창조의 번득임을, 시적인 번득임을 만들어 낸다. 그런 작품이 하나 있다.
무지개 지우고 떠난
풀꾹새 울음소리
밤 되면 고향 먼 에움길에 깔리는데
제 마음으로 남아
어느 날 바람이 된 텃밭 감나무
주저리로 달려있는 떫은 전설은
오뉴월 불볕
흰 구름 한 조각
가슴 깊이 묻어 두고
따갑게 흘러간 시냇물
오늘도 찾지 못한 무지개빛
아픈 그림자들만
빗속에서 헤어지고
젖은 채로 지워지고
초가지붕 위
하얀 박꽃잎 하나
풀꾹새 울음으로
가슴 앓운 소리여
--「풀꾹새 울음」 전문
이 작품은 다섯 연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오직 한 문장이다. 그 뼈대를 이루는 메시지를 “풀꾹새 울음으로 하얀 박꽃잎은 가슴 앓은 소리가 된다.”로 추려 낼 수 있다. 이처럼 맛을 잃은 메시지를 시적인 번득임으로 창조해 가는데 은유의 수직배열이 그 몫을 해내고 있다. 풀꾹새 울음소리는 텃밭 감나무로 대체됐다가 흰 구름 한 조각으로 다시 대체 된다. 이러한 대체는 헤어지고 지워진 ‘아픈 그림자들’을 거쳐 하얀 박꽃잎에 이른다.
이처럼 매끄러운 은유의 궤적을 달려가는 데에도 우리를 잠시 멈췄다 가도록 하는 맺힘들이 있다. 그 맺힌 고리에서 ‘수평적 의미 사슬’이라 부르는 환유구조를 만난다. 풀꾹새 울음은 고향의 먼 에움길에 깔리고, 텃밭 감나무에는 떫은 전설이 열리고, 흰 구름 한 조각은 따거운 시냇물과 함께 흐른다. 아픈 그림자들은 빗속에서 헤어지고 비에 젖어 지워진다. 마침내 고향의 초가지붕 위에 핀 하얀 박꽃을 보다가 밤에 우는 풀꾹새 울음으로 인하여 가슴 앓는 소리를 듣는다.
풀꾹새 울음소리는 직접 고향에 가닿지 못한다. 먼 에움길을 돌아가야 한다. 은유가 만들어지려면 환유의 여성적 속성인 요령과 에움길을 빌려와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적 검열이라는 장애물을 교묘히 피해갈 수 있다. 이렇게 은유는 여성적인 환유에 의지해야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라깡은 “환유는 처음부터 존재하고 은유가 가능해지도록 만들어 준다.”고 말한다.
전설은 고향에 전해오는 이야기다. 그러나 씹기도 삼키기도 거북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뱉을 수도 없는 그런 떫은 이야기들이다. 오뉴월이면 배고픈 시절이었다. 그 당시에 가슴 깊이 문어 둔 이야기들이다. 무지개나 무지개빛을 띄우는 그런 것을 찾으려고 고향엘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까지도 찾지 못한다. 오늘에야 겨우 아픈 그림자들을 만났을 뿐이다. 그마저 젖은 채로 지워지고 있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무지개나 무지개빛을 띄우는 그런 것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생텍쥐베리는 “향수란 뭐라 규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정신분석적인 문맥에 따라 생각해 보면 억압 때문에 욕망은 그 대상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욕망은 회귀와 상관없는 향수를 불러온다. 정신분석적으로 회향병이란 잃어버린 모국인 엄마의 자궁으로 되돌아가려는 동경이다. 하지만 자궁이요, 고국이요, 근원인 어머니는 다시 되찾을 수 없는 과거가 되기 때문에 주체는 되돌아 갈 곳을 잃고 헤매게 된다. 낯선 이국땅에서 소외되고 만다. 마침 이 시선집의 첫 작품(「거울 속에 앉아서」)에서도 ‘나를 알아보는 목소리’가 들리고 나를 꾸짖는 소리가 들리다가 ‘어머니. 원점에 다시서렵니다.’라는 신음소리가 들린다.
사그릇을 가지고 몇 가지 실험을 시도했던 작품 (「그릇, 그 몇 가지 실험 1. 존재의 슬픈 확인」)에서는 그릇이 놓여지는 위치의 변환을 꾀하고 있다. 먼저 ‘불가마에서 달구어지고 부엌에서 달그락 달각 서로 부딪치다가 어두운’‘살강’에 놓여지던 그 그릇은 어느 날 사금파리로 깨져 ‘저 골목’에서 슬픈 신음소리를 토해내게 된다. 위치의 수평적 이동을 통하여 환유가 지닌 슬픈 구조를 확인해 내고 있다.
은유들이 곱게 자리를 바꾸는 또 하나의 작품이 있다. 원래부터 바람의 속성이란 움직임 그 자체이겠으나 「바람」에서의 바람은 단순한 자리바꿈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 맛이 있다. 먼저 「바람」은 ‘멀리서 쓰러진다’로 시작되는데 인생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 다음엔 하늘이 엷게 흔들리더니 저녁 새떼가 바람처럼 돌아가 눕는다. 그렇게 해서 잠시 비었던 하늘이 엷게 흔들리더니 저녁 새떼가 바람처럼 돌아가 눕는다. 그렇게 해서 잠시 비었던 하늘이 ‘빗살고운 무늬로 어른거린다.’ ‘오늘밤’에는 그 바람소리가 ‘귀에 젖은 물소리’로 흐른다.
가끔 기상천외의 은유를 만난다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다. 라깡은 연산식에다 숫자대신 문자를 대입해서 문자위주의 정신분석을 강조하고 나섰는데 오히려 시에서 은유를 만날 수 있다니 그런 작품 하나가 있다. 「허물벗기 연습」이라는 이 시선집의 표제시이다. 먼저, 흙먼지 하늘 가득 진눈깨비와 ‘섞이는 날은’ 한 까풀씩 껍질을 깎아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날은 어쩌다가 한 번씩 찾아오는 날일 것이다. 그러니까 며칠에 한번 혹은 몇 달에 한번 일 수도 있다. 그러다가 맨살 할퀴는 바람이 불고 피흘리며 벗기는 횟수가 ‘하루에 열두 번’이란다. 그래도 다 벗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능기가 은유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살아가는 연습을 위해서는 ‘날마다’ 허물을 벗어야 하든가 또는 벗고 싶다고 말한다. 여기서 ‘날마다’는 하루에 한 번씩이라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허물이란 한번에 말끔히 벗어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은유의 궤적이 시적인 번득임이라든가 창조적인 번득임을 만들어 낸다고 말했다. 붉은 벽돌집의 창문으로 기어오르는 담쟁이 덩굴(「담쟁이」)이 바로 그 능기 역할을 해내고 있다.
나는 지금 이쯤에서 망설여야 하리라
붉은 벽돌 틈새로 아직 여물지 못한
희망은 잠시 창문으로 흐르는 불빛으로 말려야 한다.
구름처럼 떠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못내 아쉽게 되돌아보는 행적이지만
용케도 기어오른 삶의 줄기가 현기증으로 나불댄다.
뻗어나간 욕망만큼 무거운 사색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조심스러이 다시
기어올라야 하는 창살에는 불이 꺼졌다.
아아, 지금쯤에서 지혜를 예비하는
옷깃을 잠시 손질하고 태초에 씨앗으로
묻혔던 땅바닥을 돌아볼까
그대 머리 위 내리는 한 줌 별빛만 줏으며
끝내 돌아보지 말아야 할 어지러운 벼랑 끝
아스라한 바람소리
--「담쟁이」전문
담쟁이 덩굴이란 능기는 붉은 벽돌 틈새로 기어오른 ‘아직 여물지 못한 희망’이었다가 삶의 행적을 뜻하는 ‘삶의 줄기’로 변환된다. 제 3연에서는 주르르 흘러내렸다가 다시 기어올라야 하는 무거운 ‘사색’이 된다. 그리고는 태초에 땅바닥에 묻혔던 자신의 씨앗을 되돌아본다. 결국 이 담쟁이 덩굴은 머리위에 내리는 한 줌의 별빛을 주우려고 한다.
덩굴의 끝에서 새로 돋은 연약한 새순이 벽돌 틈새에 자신의 줄기를 붙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그쯤에서 잠시 망설여야 한다. 창문을 통해 새어나오는 불빛으로라도 이 희망을 단단히 굳히고 싶다. 벽을 다 기어올라 지붕을 넘으면 구름이 흐르는 허공으로 솟구쳐야 한다. 의지할 곳이 없다. 정말 용케도 거기까지 기어오른 삶의 행적을 되돌아보게 된다. 울퉁불퉁한 삶의 덩굴이 저 아래에서 아스라히 꿈틀거린다. 그때 바람 한 줄기가 연약한 새순을 흔들어댄다. 까마득하게 높이 기어오른 이 허공에서 현기증을 느낀다.
대상조차 알지 못한 채 한없이 뻗어나가던 욕망이 그 무게를 감당치 못하고 주르르 흘러내리겠지만 그래도 다시 조심스럽게 기어오른다. 그 욕망에 대한 사색마저 깜깜해진다. 욕망이란 그 대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충족 될 수도 충족시킬 수도 없는 일이다. 되돌아가고 싶지만 갈 곳을 모르는 욕망을 회향병이라 했다. 이럴 때, 은유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능기가 바로 고향이다. 근원이라 해도 좋다.
이처럼 담쟁이 덩굴의 연약한 새순과 그 줄기와 그들의 욕망에 대한 깜깜한 사색을 거쳐 드디어 제4연에 도달하게 된다. 이 시선집에서 흔히 만날 수 없던 감탄사, ‘아아,’로 시작되는 연이다. 어떻게 읽힌들 무슨 상관이겠는가마는, 어두운 사색을 거쳐 터져 나온 감탄사라서 뭔가 깨달음 같은 증후를 내비치는 것으로 들린다. ‘지금쯤에서 지혜를 예비하는’ 씨앗, 이미 태초에 땅바닥에 묻혔던 씨앗을 되돌아 봐야겠다는 것이다. 태초에 땅에 묻혔던 씨앗이 지금에 와서야 지혜를 예비하는 것을 깨달았단 말인가? 아니면 그 씨앗이 지혜를 예비하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는 것인가?
아무튼 그 씨앗이 지금 품고 있는 지혜가 아니라 ‘예비하는’ 지혜를 알겠다는 뜻이다. 아직 지혜로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그 씨앗이 지혜를 예기하고 있음이다. 그것을 ‘지금쯤에서’ 알았다는 것이다. 그 깨달음은 이미 첫 연에서부터 예기되어 있었다. 역사라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예기(豫期)와 사후작용(事後作用)의 변증법에 의해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마무리를 보자. 그대 머리 위에 내리는 ‘한 줌 별빛’이라는 의외의 은유에 봉착하게 된다. 이 작품의 시간대는 분명히 밤이다. 더구나 창문의 불마저 꺼진 깜깜한 밤이다. 바람도 자버린 고요한 밤인가 보다. 그만큼은 알겠다. 한데, 담쟁이 덩굴의 소망이 ‘별빛 한 줌’을 줍는 일이라니?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 줌’을 줍는다면 그건 소박한 작은 소망이다. 그런 작은 소망을 성취하기 위해 아스라이 어지러운 벼랑 끝까지 올라와 있다. 용케도 올라와 있다. 하지만 바로 앞 연에서 삶의 줄기를 타고 태초에 씨앗이 묻혔던 땅바닥까지 되돌아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의 역사를 되돌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바람이 분다. 연약한 새순은 흔들린다. 아스라한 벼랑 끝에 매달린 것이 불안의 본질이라 한다. 별빛이란 능기를 소기로 번역할 수는 없지만 깨달을 것 같은 불안을 느낀다. 그처럼 읽어 볼 수 있다.
4. 마지막 도착하는 언어들
시니피에를 찾을 수 없으리라고 아무리 라깡이 가르쳐 준다 해도, 수많은 시인들이 죽을 때까지 시를 써야 하는 운명적인 삶을 살아오고 또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계속 그 소기를 찾아 나설 것 같다. 왜냐하면 ‘기다림은 오래도록 끝나지 않는 서러움 그래도 기다려야 하’니까. ‘피어나기 위한 기다림은 아름다운 약속’이니까(「홀꽃잎 뒤풀이(2). 닻」).
시인이 가는 길은 ‘오직 지팡이 사랑’이라고 한다(「미로실험」). 더듬이를 잃어버린 한낱 미물의 ‘제자리 찾기’ 라고도 한다. 두 눈을 부릅뜨고도 파란 하늘이 보이지 않고 신작로가 지워지고 아스라하게 시간이 흘러갔어도 바람소리에 실려 들려오는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그 방향을 알려준다. 그것은 회귀점에 가까이 왔다는 희망이다. 그런데도 그 먼 길을 가노라면 유년의 기억으로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 길은 두 눈을 감은 채 사랑을 찾아나서는 길이다. 그때에는 오직 가녀린 지팡이에 의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지팡이마저 흔들린다면 더듬이를 잃어버린 미물이 제자리를 맴도는 일이 될 것이다. 회귀점에 가까이 올수록 맴돌기 쉽다. 그래서 더욱 이 미로 같은 길을 통하려는 실험을 중단할 수가 없다.
시인은 마침내 마지막 말들이 도착하는 종점에 서게 된다. (「종점에 서서」).
마지막 도착하는 / 언어들이 / 어둠 속에서 비워진다. / 슬픈 것들을 실려 보내고 / 불이 꺼진 종점 / 만남과 떠남이 / 늘 내 마음에서 / 뒹구는 바람소리 / 달빛도 무디어진 / 이 밤 / 어디선 가 실려 올 / 몇 개의 환희를 기다리며 / 한 아름 / 어둠을 지우고 / 마지막 설레임으로 / 종점 은 휴식이었다.
종점의 풍경은 이렇다. 달빛도 무디어지고 불마저 꺼진 깜깜한 밤이다. 그러한 종점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언어들은 저절로 비워진다. 슬픈 언어들을 실려 보내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종점도 물론 은유겠지만 만남과 떠남이 마음 속에서 늘 뒹굴며 내는 소리인 ‘바람 소리’가 우리를 사로잡는 능기다. 회자정리라 해서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진다. 헤어진 사람을 그리워하며 언젠가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런 만남도 떠남도 마음 속에서 뒹굴고 있다.
그러나 능기와 소기 역시 서로 만났다가 헤어질 수도 있다. 바람은 움직임이다. 마음 속에서의 움직임이란 역동적인 것이다. 어수선한 만남과 떠남이 끝난 자리엔 잠시 휴식이 찾아들 것이다. 그때 한 아름이나 되는 어둠을 지우고서 또 한번 마지막으로 도착할 지도 모를 언어들을 가슴 설레이며 기다린다. 어디인지 몰라도 그곳으로부터 꼭 실려올 것 같은 마지막 몇 개의 언어들이 가져다 줄 환희를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기대와 실망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 같다.
언뜻 날 수 없는 능기 하나를 붙잡은 것 같아 다다른 것처럼 생각했음직하다. 그렇다면 잠시 쉬고도 싶었을 것이다. 역시 종점에 이르렀다면 그땐 쉬어야 한다. 쉰 다음에 가슴 설레이는 능기를 찾아 나서기 위해서라도 쉬어야 한다. 그래서 종점이 은유라는 것이다. 은유에서 옛 능기가 새로운 능기로 끊임없이 대체되는 것이다. 이처럼 대체되는 움직임이 과연 끝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시인이 회귀할 지점은 어디란 말인가? 어떤 궤도를 달리든 회귀점 근방까지는 갈 수 있을 것 같다. 가는 길에 시인은 시의 번득임을 창조해갈 것이다.(96. 5.『예술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