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도전과 응전(Challenge and Response)’의 기록들
“네가 눈으로 본 그 일들을 너는 잊지 말고 네 사는 모든 날 동안 네 마음에서 그 일들이 떠나지 않도록 하고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려라” (신명기 4:9)
유대인들은 삶의 굽이굽이마다 죽음과 직면해야 했다. 그들의 삶은 생활이 아닌 생존이었고,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유대인들은 승리보다 패배를 더 기억한다. 영원히 그 아픔을 기억함으로써 고난과 고통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절기 역시 대부분 조상의 고난을 기억하며 그 아픔에 동참하는 차원이다. 유월절(Passover,페사흐, פֶסַח )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여 년간 살았던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다. 당시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자, 하나님은 마지막 10번째 재앙으로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멸하는 재앙을 내리기로 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재앙을 피할 수 있게 문설주에 흠 없는 어린 양의 피를 바르도록 알려준다. 그때 발랐던 어린 양의 피를 기억하기 위해 유월절에는 온 가족 3대가 모여 양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다.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당시 조상들의 어려움과 급박함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유대인들이 영원히 아픔을 기억하는 이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킨 후 급하게 이집트를 빠져나오느라 미처 누룩을 넣지 않은 밀가루 반죽을 만들어 탈출했다. 무교절은 이러한 고난을 잊지 않기 위해 제정되었다. 무교절은 절기 이름이 말해주듯 ‘고난의 떡’이라 불리는 무교병, 곧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으며 7일 동안 지킨다.
칠칠절(שבועות 샤부오트)’은 모쉐가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광야에서 살아남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밀 수확을 하게 된 것을 고맙게 여기는 추수감사절이기도 하다. 유월절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라면, 초막절은 40년간 시내 광야에서 보낸 고난을 기억하며 노예 의식을 털어버리고 주인의식을 장착하는 절기다. 그래서 초막절 7일간 유대인들은 집 마당이나 회당 뜰에, 아파트일 경우 베란다에 초막을 짓고 온 가족이 초막에서 식사하고 잠을 잔다.
지난 3000여년간 유대인들이 겪은 고난과 형극의 역사는 그야말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13세기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의 시련을 겪고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다른 부족들과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른다. 그들의 경전 ‘토라’는 민족 전체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다 탈출해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의 기록이자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기록이기도 하다.
통일왕국 전성기 다윗과 솔로몬 왕 이후 유대인들은 다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진다. 그리고 이민족에 의해 차례로 멸망당했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당한 남유다왕국 유대인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50여 년간 노예 생활을 하게 된다. 이른바 바빌론 유수기이다. 그 시절 기록된 예레미야 같은 예언서들은 슬픔과 울분에 가득 차 있다. 그 뒤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점령하면서 가나안 귀환이 허용됐지만 일부만 돌아가고 많은 사람이 바빌론에 눌러앉아 살면서 2500년 방랑의 역사가 시작된다.
기원전 332년 그리스의 알렉산더 왕이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와 접촉한 모든 나라가 마치 마술처럼 그리스화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투쟁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이후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서양문명을 대표하는 양대 기둥이 된다.
주 후 2세기에는 로마제국과의 치열한 항쟁 끝에 결국 나라를 잃고 민족이 뿔뿔이 흩어져 디아스포라(離散) 시대로 들어선다. 가나안에서 쫓겨나 세계 곳곳에 흩어져 여러 문화 속에 섞여 살았다. 그러면서도 다른 문화에 흡수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아라비아반도에서 서기 570년에 무함마드가 탄생하면서 유대인들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시작됐다. 유대인들은 이슬람 신앙을 인정할 수 없었고 결국 두 종교는 상극이 되었다. 12세기에 이슬람 근본주의가 발흥하면서 핍박과 학살이 시작되자 유대인은 기독교 국가인 스페인 왕국으로 탈출했다.
1077년 예루살렘이 셀주크 튀르크족의 손에 떨어지자, 비잔틴제국은 우르반 2세 교황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교황은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해 ‘이단자’들을 죽이는 것은 십계명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이로써 십자군이 출발도 하기 전에 유럽 전역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특히 대부업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이 채무자들에 의해 집단으로 몰살당했다. 200년간의 전쟁 내내 유대인들은 기독교와 이슬람 양쪽으로부터 혹독한 박해를 당했다. 십자군 전쟁 이후에도 박해는 계속되었다. 밀폐된 지역인 게토에 집단 거주하면서 유대인임을 나타내는 옷을 입어야 했다.
유럽에 흑사병이 강타했을 때도 기독교인들은 그 책임을 유대인에게 전가하여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 유대인 박해 중 최악은 히틀러 치하에서였다. 1942년 나치 독일은 모든 유대인을 집단수용소로 이주시켜 대량 학살했다. 전쟁 기간 중 무려 600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유대인의 역사를 보면 유대민족은 형극의 역사를 반드시 영광의 역사로 돌려놓는 힘을 갖고 있다.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결코 잊지 않는다.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코스트 추모관(야드 바쉠:'이름을 기억한다'라는 뜻)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용서는 하지만 망각은 또 다른 방랑으로 가는 길이다.”
“망각은 또 다른 방랑으로 가는 길이다.”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를 펴내며 그 가설들의 중심축은 ‘도전과 응전’ 및 ‘창조적 소수와 대중의 모방’이라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환경의 도전에 대해 성공적으로 응전하는 인간 집단이 문명을 발생시키고 성장시킨다. 이렇게 성공적인 응전을 통해 나타난 문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창조적 인물들이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다수의 대중까지 힘을 결집해야 한다. 이때 대중은 일종의 사회적 훈련인 ‘모방’을 통해 그들의 역할을 수행한다. 수 많은 문명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은 유대인 역사는 고난으로 점철된 도전과 응전의 반복이었다. 시련의 담금질을 통해 그들은 더욱 성숙해지고 강해졌다. 고난이 바로 은혜였다. 그들은 절망 속에 살았기에 희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고, 슬픔을 알기에 기쁨의 가치를, 어둠을 알기에 밝음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을 정복했던 강대국들은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고난을 기록하고 시련을 기억하여 되새김으로써 그 아픔을 잊지 않는 것이 다시는 그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만드는 유대인들의 지혜이자 유월절의 가르침이다. <월간샤밧> 유월절의 많은 의미 중 가장 큰 메세지는 기억(Rememberance)일 것입니다. 과거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그 기억을 다음세대에 전달함으로 스스로를 일깨우고 존재의 이유를 사유하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습니다. ▶ 월간 샤밧을 만드는 사람들... https://www.shabbat.co.kr/소개
월간샤밧 니싼호가 발간되었습니다. 유월절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주문: http://www.israelacademy.co.kr/st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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