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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는 교부들을 잘 평가하고 가톨릭에 기울어 있는 교부는 배제하고 개신교 정통주의에 이어질 교부들의 신학을 수용하고 그의 개혁신학에 차용하였다. 고대 기독교 신학자 중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많이 참조하였다. 교부 이후로 중세 천주교의 암흑 속에 인문주의의 횃불을 밝힌 에라스무스의 인문학과 언어학의 도움도 상당히 받았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은 것은 루터와 비슷한 부분이기는 하다. 우리는 중등교육 사회 과목에서 플라톤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아퀴나스로 이어진다고 대강 배웠다. 플라톤-아우구스티누스 흐름은 종교개혁에 간접적 영향을 주었고 이는 루터∙츠빙글리 모두에게 나타난다. 츠빙글리는 성경 다음으로 건전한 교부들∙아우구스티누스∙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을 구분선 아래에 타붙하여 올리고, 가독성을 위하여 글의 분량을 조절해 추후에 또 올릴 예정이다.
(중략) 예를 들어, 츠빙글리가 어떻게 그리고 언제 개혁자가 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관점은 츠빙글리의 사상을 진술하는 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츠빙글리가 루터의 글을 읽기 전에는 본질적으로 에라스무스적인 개혁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종교개혁자가 된 것은 루터를 통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츠빙글리는 루터와 에라스무스를 결합시킨, 즉 그리스도교와 고전적 고대의 두 흐름을 합체시킨 인물로-쾰러(Köhler)의 견해이다.-이해되기도 하고, 혹은 1520년대 와중에 루터와 다소 달라지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루터파 개혁자로-다른 이들의 견해이다.-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츠빙글리가 루터와 별개로 개혁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츠빙글리가 특별히 에라스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개혁자요 신학자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서 그는 다른 많은 요인들과 사람들의 영향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츠빙글리가 루터와 맺은 관계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또한 그것이 츠빙글리의 사상에 대한 진술을 압도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츠빙글리의 사상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츠빙글리의 사상은 그 자체의 용어들과 강조점들 안에서 진술되어야 한다. 이것이 본 연구의 근저에 있는 확신이다.(중략)
1515년 혹은 1516년에 츠빙글리가 에라스무스를 만났을 때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인문주의자들의 왕자였던 에라스무스는 성서와 교부문학뿐 아니라 고전에도 능통한 인물이었다. 근원에 대한 인문주의적 관심은 에라스무스를 그리스와 로마의 언어와 문학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신약성서와 교부들에 대한 연구로 인도하였다. 그는 그리스어 신약성서, 격조 높은 라틴어 신약성서, 그리고 교부들의 저명한 작품집들을 출판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재생을 위해 일하였다.
츠빙글리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성서를 향하도록 해준 것은 에라스무스의 영향이었다.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에라스무스는 스콜라주의로부터 성서를 해방시켜 준 인물이었으며, 그의 영향 아래 츠빙글리는 스콜라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문주의적인 의미에서 신학자가 되었다. 츠빙글리는 근원, 특히 그리스어 신약성서로 향하였고, 교부들을 연구했으며, 본문에 대한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접근을 익혔다. 이제 츠빙글리를 사로잡은 것은 스콜라 학자들이 아니라 교부들이었으며, 그의 서고는 암브로시우스, 아타나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바실리우스, 크리소스토무스, 키프리아누스,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 오리게네스, 키릴루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이레나이우스,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 그리고 락탄티우스의 저작들을 포함하게 되었다.
에라스무스가 끼친 영향의 첫 열매는 종교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미로』에서 볼 수 있다. 3년 전에 나온 『수소의 우화』는 이런 점을 결여하고 있다. 성서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종교개혁 신학에서 우리는 오랜 기간 지속되는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에라스무스와 츠빙글리 사이에는 많은 접촉점들이 있다. 두 사람이 공유하는 가정들이 있었는데, 특히 두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에 대한 강조와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보는 플라톤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이 공통으로 강조하는 것들도 있었는데, 특히 외적인 경건보다 내적인 것을 더 강조하였다. 두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많이 유사하여, 특히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과 철학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차이점도 있었다. 특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대한 이해와 의지의 자유에 대한 견해에서 달랐다. 두 사람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후에 에라스무스가 1522년에 나온 츠빙글리의 『아르케텔레스』(Archeteles: 시작과 끝)에 대해 비판한 것이나, 츠빙글리가 1525년 『주석』 (A Commentary)에서 의지의 자유에 대해 비판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루터와 달리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에 대해 계속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중략)
1522년에 와서야 츠빙글리의 저술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온전한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1516년에 시작된 것이 몇 년이 흐르기까지는 완전히 성숙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언제나 이른 시기를 지적한다. 자신이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던 때를 언급한 경우가 1520년대에 몇 번 있었는데, 비록 정확한 연대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전반적인 설명은 분명하고 일관성이 있었다. 그는 루터의 영향을 받아 개혁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요한복음, 요한복음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석들, 바울의 편지들에서 복음을 배웠음을 하나님이 증언해 주실 것을 간구하였다. 그는 1515년 무렵에 바젤에서 면죄부가 사기임을 보여주었던 토마스 비텐바흐의 논쟁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에라스무스의 시도 언급하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그리스도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중재할 수 없다는 믿음을 이 시에서 배웠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백성들이 모든 선의 원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을 찾지 않는 것을 그 시가 애도하고 있다고 이해하였다. 츠빙글리는 자신과 적대자들의 근본적인 차이는 그리스도와 그의 대속적인 죽음을 신뢰하느냐 피조물을 신뢰하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가 이 발견을 자신의 삶에서 근본적인 전환점으로 간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것은 또한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와 종교개혁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부처는 츠빙글리와 비슷한 입장이었고 루터는 반대의 입장이었다.
츠빙글리의 복음 설교는 그리스도와 성서를 향한 그의 호소를 모두 포괄하였다. 1522년의 『하나님 말씀의 명료성과 확실성』 (The Clarity and Certainty of the Word of God)에서 그는 자신이 7, 8년 전부터 전적으로 성서에 의존해 왔고,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에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으며, 주석가나 해설자들에게서보다는 하나님에게서 지식을 얻고자 애쓰고 있다고 밝혔다. 같은 해에 그는 『아르케텔레스』에서도 구원을 위해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할 것을 말하고 있다.
츠빙글리가 1522년과 1523년의 성서와 복음에 대한 자신의 이해(이때 분명히 종교개혁적인 인식이 있었다.)와 취리히 사역초기에 자신이 지녔던 생각 사이에 연속성이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아인시델른에 있을 때나 글라루스 체류 말기에 지녔던 견해에도 연속성이 있다고 본점은 주목할 만하다.(ZI 88.10-89.2; II 14.11-14) 많은 학자들은 아인시델른과 글라루스에서의 츠빙글리는 개혁자라기보다는 에라스무스주의자였다고 보고 있다. 츠빙글리가 자신의 목회사역에 연속성이 있다고 본 것은 20년 후에 부처가 에라스무스와 루터 사이에서 연속성을 보면서 에라스무스가 구원이 의례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것이라고 밝혔다고 기록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와 루터 모두를 하나님이 세운 사람들이라고 보았고, 참된 종교가 무엇인가를 배우는 데 있어 성서뿐 아니라 그들과 교부들의 역할 모두를 인식하였다.
에라스무스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루터와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역할은 무엇인가? 츠빙글리는 자신이 루터에게서 복음을 배웠다는 것을 분명하게 부인했으며, 자기 지역에서 사람들이 루터에 관해 듣기 2년 전에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였다. 츠빙글리가 루터로부터의 독립성을 주장하려고 한 것이 부분적으로는 이단으로 몰릴 위험 때문이었다고 보는 데는 의혹이 있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이 여전히 츠빙글리가 루터에게 의존했다고 주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독자적이었다는 츠빙글리의 주장을 받아들일 만한 타당한 이유들이 있다. 리히(A. Rich)의 연구는 츠빙글리가 루터의 글을 읽었을 때 루터에게서 자신이 이미 지니고 있던 견해에 대한 확증을 발견했고, 이미 개혁된 것이 아니라 개혁의 와중에 있는 것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루터를 보았던 것 같다고 밝혔다. 츠빙글리가 루터에게서 결정적이라고 본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었다. 루터가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골리앗에 대항한 다윗처럼 교황에 대항하여 용기 있게 행동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정확한 역할도 가늠하기 힘들다. 이것은 츠빙글리가 여백에 남긴 메모들의 연대측정과 연관되어 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뿐 아니라 글라루스와 아인시델른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를 연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츠빙글리 자신이 밝히고 있는 바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분명히 성서와 복음에 대한 그의 이해를 심화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더욱이 츠빙글리 신학에서 중요한 요소와 강조점들은 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에 남겨둔 난외주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난외주의 연대문제 이외에도,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서에 대한 더 깊은 연구로 이끌었는가 아니면 성서에 대한 연구가 그를 아우구스티누스와 교부들에 대한 연구로 이끌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츠빙글리 사이의 유사점은 넓고도 깊다. 둘 사이의 유사점은 두 사람 신학의 플라톤주의적 성향과 더불어,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에 대한 그들의 인식에서뿐 아니라 성서와 성례에 대한 그들의 이해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1515-16년에 일어난 변화의 배후에는 아마도 많은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어를 배운 것, 비텐바흐의 논쟁, 에라스무스의 시를 읽고 그를 만나고 그의 작품들을 깊이 연구한 것, 그리스어로 바울서신들을 필사한 것뿐 아니라, 아마도 1515년 9월의 마리냐노 전투에서 목격한 스위스의 참혹한 패배, 아인시델른에서 목회할 때 여자문제로 인해 실수한 경험들이 그런 요인들이었다. 1515-16년에 일어난 변화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츠빙글리가 취리히에서의 첫해에 복음과 성서에 대해 보다 심오한 이해에 도달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음과 같은 많은 경험들이 여기에 기여하였다. 요한, 아우구스티누스, 바울에 대한 연구(그 연대에 상관없이),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보여준 루터의 모범, 같은 해 그가 겪은 흑사병의 고통과 이후 시를 통한 이 사건의 회상, 1520년 7월 24일자 편지가 보여주는 취리히에서의 목회에서 겪은 명백한 좌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처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과 씨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받아들이게 된 일 등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많은 경험들의 영향력이 어떠하든지, 아무도 성서 그 자체의 중추적인 역할을 배제할 수는 없다. 성서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만났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깨달았다. 하지만 성서와 더불어 우리는 에라스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라는 두 명의 성서 해설자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다.
W. P. 스티븐스 지음, 박경수 옮김,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pp. 25~54.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츠빙글리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과 신학, 학문에 대해서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서양사, 교회사의 중요 이슈입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에 도움을 준 인물이지만 자유의지론을 주장하여 개혁자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정황을 아래 Daun 백과사전이 상세하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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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5a1723a
보니까 학문적으로는 종교개혁에 도움을 주고 신앙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부족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카톨릭 측은 에라스무스가 종교개혁에 기반을 제공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종교개혁이 폭력적이어서 반대한 것처럼 기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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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방대한 지적 능력의 소유자로서 저서를 통해 종교개혁의 기반을 제공하였으나 폭력과 혁명에 대한 기피와 안정 지향적 성향으로 본격적인 종교개혁운동은 반대하였다. 1524년 루터와 개혁 논쟁을 시작, ≪Diatribe de Libero Arbitrio≫(1525)와 ≪Hyperaspistes≫(1526) 등을 남겼으며, 후기에는 교회와 개혁가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파리대학은 1525년부터 1542년까지 저서들을 판금시켰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부분적으로 완화되었으나 그의 저서는 오랫동안 교황청 금서목록에 올라 있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천주교가 직접 작성한 자료라서 어투에 뭔가 저의가 깔려 있네요.
에라스무스가 루터 츠빙글리는 물론이고 여타 종교개혁자들과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친 이유는 그가 인문학의 최고 대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문주의자들의 왕자"로 호칭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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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자들의 왕자"라는 칭호를 누렸고, 순수한 라틴어 문체를 구사하는 고전적인 학자였다. "최고 영광의 기독교 인문주의자"로도 불렸다.[1] 그는 헬라 그리스어의 신약성서를 라틴어로 새롭게 다시 번역했다. 이는 서방교회의 기독교 사상에 의문을 표시하면서 서방교회의 종교 개혁과 종교개혁 찬성파와 반대파가 천주교와 개신교로 분리된 이후에 개혁 반대파였던 가톨릭 개혁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의 다른 작품으로 《우신 예찬》, 《기독교 기사의 안내서》등이 있다. <--- 위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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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와 우신예찬은 중학교 사회(세계사) 책에도 나옵니다.
이 카페에도 나온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얻은 탤런트를 에라스무스가 종교개혁에 전달해 준 것 같습니다.
에라스무스가 지식적인 기반을 종교개혁에게 제공하고도 정작 종교개혁에 가담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신앙이 미숙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는 자유의지 부분에서 막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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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 논쟁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루터가 에라스뮈스에게 쓴 편지를 유스투스 요나스가 1526년에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본격적으로 루터를 비판하기로 결심했을 때 다룬 주된 논점은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문제였다. 에라스뮈스는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 diatribe sive collatio)을 통해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없다고 본 루터의 견해를 비판했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루터는 《노예의지론》(On the Bondage of the Will)을 저술한다. 이 책에서 루터는 에라스뮈스가 기독교도가 아니라고까지 주장했다. 이에 대해 에라스뮈스는 《히페라스피스테스》(Hyperaspistes)를 두 편에 걸쳐 쓰며 자신을 변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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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 이외에도 에라스무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위키 백과를 참조하세요!
https://ko.wikipedia.org/wiki/%EB%8D%B0%EC%8B%9C%EB%8D%B0%EB%A6%AC%EC%9C%84%EC%8A%A4_%EC%97%90%EB%9D%BC%EC%8A%A4%EB%AE%88%EC%8A%A4
@장코뱅 요나스 박사의 이름은 이 카페 루터의 탁상담화에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에라스무스의 탤런트가 종교개혁에 전달되고 그 이후의 신앙은 하나님의 섭리에 달린 것 같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좋은 글을 잘 읽었습니다.
이단과 사이비는 무지몽매하게 갑툭튀를 하지만, 츠빙글리와 종교개혁은 교부들의 신학과 인문학에 대한 배경과 실력을 잘 갖추고 주님의 손길에 의하여 선하게 잘 사용된 것 같습니다.
공감합니다.
이 책에 의하면 츠빙글리가 에라스무스에게서 배운 것 중 가장 큰 소득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시다는 것과, 구원은 의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온다는 것인 것 같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그 속에서 어떤 구절이라도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에라스무스와 종교개혁자들은 이 점에서 큰 수확을 했다고 봅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