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에 있던 이성계는 이방원과 그의 일당에 의해 정몽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극도로 진노하였다.
“방원이 이놈! 포은을 누가 죽이라고 하더냐! 그는 나의 절친한 벗이자 국가의 기둥이다. 그런데 멋대로 살해하다니....... 어진 재상을 죽였으니 이는 국가에 대한 불충이오, 아비의 벗을 죽였으니 불효 막심한 놈이다. 네 어찌 충효를 생명으로 알라는 나의 뜻을 거역하느냐.”
그때 이방원과 정도전, 조준 등이 일제히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오히려 대인을 해칠 것입니다. 결코 불효 불충이 아니옵고 충효의 바탕에서 취한 행동이니 노여움을 푸십시오.”
이성계: 무어라? 저런, 저 죽일 놈들....... 여봐라, 당장 활과 칼을 가져오너라.“ 중상을 입고 자리에 누워 극도로 흥분한 이성계는 잠시 넋을 잃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이미 죽었거늘 무슨 소용이 있으랴! 정몽주는 죽을 당시에 56세였는데 이성계보다 한 살이 아래였다. 정몽주의 시체는 그대로 버려졌다가 송악산에서 내려온 승복차림의 사람들에 의해 풍덕 땅에 묻혔다. 그 승복 차림의 사람들은 바로 백운거사 이수인과 용천검사 문하에서 무술을 배우던 성윤식과 그의 아내였다. 그곳을 지키던 병사들은 정몽주의 시체를 거두어 가는 것을 발견하고 그 수상한 일행을 뒤쫓았다. 그러나 뒤쫓던 수십 명의 병사들은 귀신 같은 솜씨의 검객들에게 모조리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그들은 칼등으로 쳤기에 모두가 다시 깨어나긴 했으나 이미 수상한 사람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무렵 황희는 집에 들어앉아 주야로 공부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몽주가 피살되었다는 말을 듣고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도중에 백운거사를 만나 정몽주의 시신을 거두어 묻겠다는 말을 듣고서 미리 풍덕 땅으로 가서 묘터를 잡았다. 전에 지우도사에게서 배운 것을 십분 응용하였다. 정몽주의 묘터를 잡은 후 시신을 염할 때였다. 그의 품에서 피묻은 종이가 나왔다. 거기에는 시조 한 수가 적혀 있었다. 정몽주의 어머니가 죽던 날 아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 내용을 읽어본 후 모두가 숙연함을 느꼈다.
황희가 제문을 지었다. 그리고 나서 무덤에 술을 붓고 절을 올리려고 할 때였다. 뜻밖의 인물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그는 바로 김자수(金自粹)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형조판서 벼슬을 지냈던 사람이었다. 황희의 부친과 친교가 있기에 황희와도 아는 사이였다. 황희 : ”대감께서 여기 어인 일이십니까?“
감자수 : ”포은의 시체를 거두고자 기회를 노렸으나 워낙 경비가 삼엄하여 엄두를 못냈다네. 그래서 기회를 엿보던 중이었지. 그때 여기 의혈남아들이 포은의 시체를 거두어 가는 것을 보고 그 뒤를 따랐지. 정말 귀신들도 울릴 정도의 놀라운 무술 솜씨더군.“ 황희: 그러셨군요. 여기 인사 올리시지요. 형조판서 상촌(桑村) 김자수 대감이시오. 황희가 소개를 했으나 모두들 경계하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그러자 김자수가 이렇게 말했다.
김자수: 나는 포은 정몽주의 절친한 친구요. 그가 죽자 곧 스스로 벼슬을 물러났소. 산중으로 들어가고자 했으나 친구의 시신을 거두지 못해 그 주변을 배회했던 것이오. 귀공들의 갸륵한 뜻을 가상히 여긴다오. 조금도 의심하지 마오. 그제서야 오해가 풀렸다는 듯이 저마다 인사를 나누었다. 황희가 소개를 하였다.
”한 분은 천하의 수재이고, 다른 두 분은 부부 사이로 천하 제일 용천검사에게서 무술을 수련하여 달인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황희의 소개를 듣고 김자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참으로 아까운 인물들이 때를 못 만났구먼. 좋은 세상이 온다면 황공, 그대가 꼭 천거하시게.”황희 : 대감께서 하교하신 뜻, 깊이 새겨두고자 하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합동으로 무덤에 절하고 술을 붓고 제사를 드렸다. 정몽주의 무덤은 봉분도 없고 비석도 없어 아주 초라하였다. 그럴 만한 여유도 없거니와 드러내놓고 무덤을 쓸 수 있는 처지도 못 되었다. 그들은 무덤 앞에 둘러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자수에게 황희가 물었다.
황희: 대감께서는 돌아가신 포은 선생과 절친한 사이인 줄 알고 있습니다. 서로 시로 화답한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시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김자수는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 지난날 정몽주와의 우정을 회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몽주가 죽기 직전에 자신의 선영을 살펴보고자 떠난 여행길에 내게 이런 내용의 시를 지어 보내주었지.”
소군루가 좋다는 말을 듣고 비 오는 날 으스름녘에 올라보았네
푸른 풀빛은 길에 우거지고 붉은 복사꽃은 집을 덮었어라
봄날의 짙은 수심은 술과 같은데 세상 인심은 황라비단처럼 엷구나
슬픈 회포에 잠겨 남행하던 나그네 비틀 거리는 당나귀 타고 서울로 향하네
“정몽주의 시에는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는 우국충정이 깃들어 있지. 그는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조상의 선영을 찾았던 것일세. 그의 시를 읽고 느낀 바 있어 나는 이렇게 화답했지.”
충신 열사들은 어디 가고 여기에 없는고
날아가는 산새만이 옛봄을 그리워하네
대궐 안뜰의 꽃도 모진 바람에 다 늙었어라
임금님 사랑하시던 나무 빛도 빗 속에 초라하네
아아, 날이 이미 저문 이 추운 청향각에서
오직 그리운 것은 나라 구할 충신의 덕이로구나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씻으며
고공의 섬돌에서는 누가 가엾은 임금을 위로할 것인가
정몽주와 나는 이미 고려의 운명이 다 기울었다는 것을 알고 죽기를 각오하고 신흥세력에 항거하고자 했지만 역부족이었네. 결국 그는 충절을 지키며 의롭게 죽어갔네. 나도 이미 노년기에 접어든 몸, 그 친구의 뜻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이네. 그리고 정몽주의 의대와 관복은 내가 보관하기로 했네.
황희가 물었다. 황희 : 선생님은 장차 어쩌실 것인지요?
김자수 :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새로 나라를 세울 것이네. 사실 고려는 국운이 다했고 너무나 무능하고 부패하였네. 오랬동안 충신을 내치고 간신들이 들끓어 회생 불가능한 상태이네. 그러니 구세대는 가고 새세대가 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네. 그것이 역사의 순환법칙이지. 황희: 그렇다면 새나라가 들어서면 거기에 협조하실 의향이 계신지요? 김자수 : 그것은 절대 아니네. 나는 역사의 필연성과 시대의 변화를 말했을 뿐이라네. 나라는 망할지라도 민족은 영원한 것이지. 그러므로 나는 정몽주처럼 한 시대의 정신적 사명감을 투철하게 지니고 살신성인을 구현, 민족 정기를 수호하는 귀감이 되고자 한다네. 황희 : 저는 지금부터 선생님을 스승님으로 모시고 뒤를 따르고자 합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김자수 : 허허, 실패한 사람에게서 무엇을 배우겠단 말인가. 나는 이미 기우는 역사 뒤편으로 사라질 사람이고 그대들은 동이 터오는 새 세상을 맞아 눈부시게 활약할 역사의 주역들인데...... 그러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고 했으니 굳이 따르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네. 결국 황희는 김자수의 뒤를 따라가기로 했다. 성윤식과 그이 부인은 후일을 기약하고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김자수의 뒤를 따라나서는 황희에게는 앞으로 어떠한 운명이 전개될 것인지?
정몽주가 죽음을 당하자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세력은 왕실을 옹호하려던 많은 중신들과 종실을 일망타진하였다. 공양왕을 폐위시키니 고려는 31대 왕, 475년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정몽주가 죽은 지 불과 백 일 남짓하여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태조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이성계는 그때까지도 병석에 있었는데 이방원 및 그 추종 세력들이 왕으로 추대, 여러 번 사양하다가 주위의 끈질긴 간청에 못 이겨 왕위에 올랐다. 오래 전부터 목자득국(木子得國)이라는 말이 민중들 속에 떠돌았는데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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