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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인가?: 나(자아)는 누구인가?
2025, 03 26 춘분지나 엿새:
-한식(寒食)열흘 전, 청명(晴明) 절후 다음날, 한식의 유래는 건조한 날씨에 불조심하라고 하며, “찬밥 먹어라”는 금언이었다.(의성에서부터 안동, 영덕, 영양, 청송 지역으로 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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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서양 철학에서 형이상학(또는 자연배후학)이래로, 세계(코스모스)에서 볼 수 없는 것(l’invisible)한 것이 네 가지라 한다. 시간, 공간, 아데아, 아톰이다. 이 중에서 앞의 두 가지 시간과 공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제기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천지인 속에서 천문지리로,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話頭)로 제기되었다. 여기서 화두란 문제제기기로서 던져져 있을 수 있으나, 인간 종(또는 인류)이 그 시작과 끝을 인간의 역량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현자는 지금도 그렇다고 본다.
시간과 공간을, 즉 하늘과 땅을, 인간의 머리(오성이든 이성이든)로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서양철학사는 두 갈래의 길을 갔다. 하나는 삶의 터전에서 찾으려 하는 현자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을 다루는 방식을 찾으려는 지자의 길이다.
자연신과 유일신의 길도 이런 두 갈래의 각각 한 측면이었다. 유일신의 지배는 자연신을 배제하였다가, 배척하다다, 점점 악마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유일신앙의 지배는 인간을 하나의 틀 속에서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런 논리적 관심과 달리, 현자는 두 갈래 길에서 삶의 터전의 중요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또한 인간을 대상으로 삼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길을 찾는다.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이 산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로써 인간들에서 각 개인은 누구(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유일신앙에 벗어나기 위하여, 14세기에 제기되면서, 인간이란 종에서, 그 종의 부분으로서 나(我, 자아)는 누구 하고도 바꿀 수 없고, 배제 또는 배척할 수 없는 대상임을 자각한다. 그러면 자아의 영혼은 인류 또는 인간의 영혼들과 다른 양식(양태)로서 현존하느냐는 것이다. 이로써 인류 또는 인간의 양태보다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자아(나)에 대한 사유는 유일 신앙 속에서 자아와 차이를 문제 삼으면서 르네상스가 도래했다.
17세기의 영혼과 신체든, 18세기 유물론이든 관념론이든, 19세기의 실천과 이론이든, 이런 두 갈래의 길에 대한 해석과 추론의 길이었다. 20세기에는 또다른 기술의 발달로 당연히 이론이 우선일 것으로 여겼으나, 이 기술이 인간을 이롭게 하는 국면보다, 인간을 기술의 종속으로 끌고 가려는 듯하였다. 그래도 인간의 길이 있다고 여길 때, 인간이란 이미 지역과 나라에 국한 되는 삶의 현존을 넘어서 전지구적이었다. 새 기술의 발달은 개인들 사이에 소통들이 무한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나(자아)는 누구인가는 여전히 셋째 화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인도 사상에서 나온 불교가 이런 문제거리에서 일찍이 성찰하고 명상하였다고들 말한다. 인도에서도 서양의 시간과 공간과 같은 화두의 첫머리에 브라흐만(Brahman)을 제기한다. 브라흐만은 성스럽고 절대적이며, 불가사의한 권능으로 여기며, 실재성이자 온의식이라 한다. 그리고 이 실재성 속에 자기 스스로를 느끼며 사유하는 아트만(Atman)이 있다고 한다. 아트만은 숨결, 생명의 원리, 본질, 온자아이라 여긴다. 불교는 힌두이즘의 시대를 지나 철기시대의 초기에 성립하면서, 인간의 화두였던 브라흐만(우주의식, 온자아)에서보다, 개인의 화두인 아트만에로 관심을 돌렸다. 그럼에도 자아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도, 추구의 단초를 자아에 출발한다는 소승이 있고, 자아는 온우주의 산물이듯이 대중과 더불어 나아가 생명과 더불어 닦아야 한다고 한다.
인류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원전 오륙 세기에 아트만에 또는 영혼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리고 우주영혼 속에서 개인영혼의 지위(위상)가 있지 않을까하는 사유에 이르렀다. 왜 현자(또는 걸승)는 인간의 삶이 시간적으로 유한하고 또한 공간적으로 한정된 삶을 살면서, 고통, 고민, 고뇌, 비참, 불행 등을 감수하고 사는가. 이에 대해, 걸승들이 그런 삶들을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길인지 보여주고자 하지만, 싯달다는 그 무소유 거지로서 사는 것이 자아(아트만)를 넘어서 브라흐만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으리라. 궁정을 떠날 때 싯달다의 화두는 온우주 속에서 자아의 위상을 찾으면, 자아와 더불어 온우주도 이해할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온우주와 인류(인간종) 사이, 우주영혼과 자아 사이의 관계 또는 연관이 시공의 화두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서양 철학사를 들여다보면, 이중분절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논쟁(선문답)과 논리적 분할을 이어왔고, 나아가 이런 담론들의 평결문들(게송들)을 작성하면서 발전 또는 확대되었다고들 한다. 인간에게서, 자연 탐구든 유일신앙 탐구든, 이중분절과 같은 이중화의 길은 철학사이든 종교사이든 서로 연관 없이 진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중분절(붙어있으면서도 굴절하는) 있는데 비해, 사유의 발전에서 이분법적(따로떨어져 붙어있을 수도 떨어져 있을 수도 있는) 갈림길로서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 후자에서 상동구조가 아니라 상사구조로서 여긴다. 상사구조로 여길 때 철학은 학문으로, 종교는 문화로, 제 갈을 가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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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사유의 발전 과정에서 우주를 화두로 삼았다가, 자아를 화두로 삼는 것이 인간 사고에서 세분화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닌지. 말하자면 인류라는 류적항목, 인간이라는 종적항목을 벗어나서 개인이라는 하부 종적항목의 부분으로 나아간 것이 아닌지. 층위로 보면 인류, 인간, 개인이 있고, 인류 위에 상위의 류적 관념으로 신을 또는 부처를 설정한 것은 아닌지. 이런 논의는 4분할은 동서양에서 수도없이 많은 현자와 지자, 성자와 성현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따져 보았고, 여러 평결들은 선문답의 이야기로, 보편논쟁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유의 발전(또는 발달) 과정은 맑스가 말한대로, 물질적 생산과 구조의 변화에서 의식의 변화가 오고, 의식의 변화는 삶의 양태의 변화를 가져 오는 것이 아닌지. 말하자면 인류가 도구 사용을 발전시키고, 생산물이 인간들의 삶을 바꾸어 놓아서 사유하는 방식도 달라진 것은 아닌지. 그래서 사유의 변화는 또한 다른 방식으로 도구의 발달, 학문의 발달에 영향을 주어 삶의 터전을 바꾸어 놓은 것은 아닌지. 이 삶에서 지식의 발달과 특히 의학의 발달은 삶을 편안하고 편리하게 바꾸어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인간(개인)의 삶은 시간적으로 한정되고 공간적으로 부분적이라는 것을 벗어날 수 없다. 여기에 색불이공 공불시색을 붙이는 것은 말씨의 기표놀이에 불과하다. 그것은 한정적이란 사유의 영역이 아니라, 신체의 영역이라 한다. 신체는 세계(우주)에 왔다가 간다. 의식(사유)은 가는지 오는지를 구별할 수 없다면서 생과 사를 구별하는 기준을 달리하는데서, 종교가 주사위(아자르) 놀이를 한다. 그런데 자아(나)가 왔다가 간다는 것이 왜인지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면, 불교에서 자아의 화두가 제기된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철학사는 자아에 대한 논의를 신체를 통하여, 상상을 거쳐서, 인류의 미래에 대한 가상성의 담론을 제기하였고, 가상성의 평결론은 아직도 갈길이 남아있듯이, 불교에서 자아의 화두는 여전히 중요하다. 유일신앙이야 신으로 돌아가면 되니까, 평결론을 쓸 필요도 없다. 서울 안 가본 자가 서울 가본자를 이기듯이, 하늘나라를 말하는 자가, 하늘나라를 우주라고 하는 자를 이긴다고들 한다.
신체를 지닌 또는 신체 속에서 자아가 있다고 하고, 신체가 사라져도 자아가 있다고 한다. 둘 다 맞는 말인가? 이로부터 철학과 종교는 다른 응답을 할 것이다. 신체 없는 자아가 없다는 쪽을 속물로, 신체 없이도 자아가 있다는 쪽은 마치 성스러운 인격인 것으로 착각한다. 둘 다 신체가 없어지면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자아라는 것이 인간 종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인격)으로 이름을 지닌 자로서 남아있다고 여긴다. 역사에 이름이 남듯이 말이다. 그 이름을 다시 되 세기는 자들도 각 영역에 따라 다를 것이다. 자아는 영혼과 신체의 분절인가, 전통적으로 이분법인가? 선승은 문제를 홀로 집중하는 이를 건드리지 않지만 무어라고 말하는 찰나, 죽비를 날릴 것이다.
여기서 자아의 이중성에 대한 선문답들이, 철학적 문제제기들이, 무지하게 많이 생산되었다. 고대철학에서부터 현대 철학에까지 존재와 현존에 대한 온갖 담론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다. 그럼에도 헤겔같은 크리스트교신학자들은 변증법적으로 하나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신부는 신앙으로 하나를 주장한다. 철학자들은 이것을 착각 또는 공상으로 여기지만, 여전히 2천년동안 착각과 공상이 제국주의를 거쳐서 제국에서 지배권과 명령권, 그리고 전쟁권까지 유지하고 있다. 불교에서 이런 담론들에 대한을 대립적 논쟁(평결론들)을, 한마디로, 불이(不二, 둘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마치 질문자보다 더 많이 아는 자 또는 진리를 지닌 자처럼답하면서 답이 되었다는 것처럼 착각에 빠진다. 걸승은은 불이(不二)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걸승은 개구측착 임을 안다. 일찍이 소크라테스가 한 수(게송)를 배운 고르기아스에게서도 있는데, 소씨보다 먼저 고씨는 ‘전체(우주영혼 또는 인간영혼)를 알 수 없다’고 하여,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소씨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말을 했는데, 후계자들 걸승은 그 말이 소크라테스의 말이 아니라고 하면서, 스승 소씨를 걸승의 시조로서 옹호했다. 하나님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자들이야 말로 화두를 모르는 자들이다. 이런 개구즉착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첫 화두에 대해 말로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불가지론도 아니며, 아마도 정해지지 않았고 지금까지는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 부정(不定)론자에, 부정신학에 가깝다.
자아를 먼저 탐구하면서 성찰과 집중을 하는 쪽을 서양 철학사에서 유아론(唯我論)이라 하고, 또한 사회 속에서 자아와 자기편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꾸면 온영혼의 세상(평등세상, 화엄세상, 하나님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정치적 편향에서는 소아병자(小兒病者))라 하고, 프로이트의 후계자들은 파라노이아(편집증자)라 한다. 서양 철학사 전체는 자아를 벗어나 온영혼을 화두를 두고, 온영혼의 안에서 자아의 사유를 할 것을 권한다. 이에 비해 불교에서는 아트만(Atman)의 화두를 성찰하고 명상하면 브라흐만(Brahman)에로 집중할 수 있다고 여긴다. 말하자면 자아의 관통이 대승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도 자아에서 우주영혼으로 이를 수 있다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주영혼의 이해 없이 자아를 알 수 없다는 길도 여전히 다른 한 길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 길을 한편 선승들은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서양 철학자는 전칭판단에서 특칭판단들의 다수성을 인정해야하며, 특칭판단으로부터 전칭판단을 추구하는 길은 오류하기도 하고, 또한 특칭판단들 사이의 논쟁을 반대(대립)관계라 하며, 하나의 특칭판단이 전칭판단을 수용한다고 해서, 다른 특칭판단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것을 소피스트라고 한다. 소피스트의 사유가 잘 못이라기보다, 한 자아의 특칭(부분)판단을 기준으로 다른 자아의 특칭(부분)판단을 적용하고 재단하는 것이 오류이며 착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재단하는 것은 적용의 오류임에도, 한 종교를 고집하며 다른 종교를 잘못 또는 악마화 하는 것이 세계를 비극과 전쟁으로 몰아부쳤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유하는 것이, 논리의 사유가 먼저가 아니라, 삶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철학자들의 견해였다.
인류는 기나긴 역사를 거치면서, 어느 시대에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주요 화두로 삼았고, 그 인간의 영혼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명상과 집중(선정)을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생산력의 발달로, 손과 몸이 자유로워지면서(증기기관과 원동기의 발명으로), 인간들이 너도나도 사유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면서, 개인 또는 자아라는 소주제가 소화두를 넘어서 진솔한 화두인 것으로 제기 되었다. 그래서 자아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는 화두는 온우주의 화두와 맞먹는다. 이제는 대승적 차원에서 또는 우주영혼적 차원에서, 우주영혼 또는 온생명의 기원과 귀결에 대한 탐구 없이, 자아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개인은 나(자아)를 명상하고 집중한다. 그 자아만큼이나 타인과 타자(지구, 천체)와 관계와 연관 없이 화두의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도 알면서, 그래도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부터 사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듯이, 자아의 터전인 신체로부터 사유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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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간의 사유든 또는 개인의 사유든, 성찰과 집중이든 터전과 신체를 벗어날 수 없다. 묘하게도 서양철학에서 열아홉에 쯤에서(어느 종교든 거의 열일곱쯤에서 입문을 허락한다. 절집이든 수도원이든 말이다), 습관과 관례에서 벗어나 화두로서 형이상학을 제시하고 있다. 화두를 완전히 다룰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런 화두들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한다. 그 화두가 볼 수 없는 것들(시간, 공간, 이데아, 아톰)만이 아니라, 규정할 수 없는 것들(행복, 아름다운, 선행, 죽음) 등이 무엇인지 또는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를 내면에 깊이 간직하면서, 젊은이가 진행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화두를 고민하면서, 화두를 해결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자아(인간)를 다루어야 한다고 한다. 인간은 또는 개인은 삶의 터전 속에 있다. 그 터전에서 자신도 하나의 대상이지만, 자신과 더불어 살아가며 숙명적으로 부딪히는 대상들과 관계를, 온우주와 자아의 관계처럼, 탐색하며 성찰해 나가야 한다. 이런 성찰의 노력과 역량이 자아에게 있는지를 고민하기보다, 그 성찰의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내공을 쌓으면서, 브라흐마와 아트만, 대우주와 소우주, 신체와 영혼의 연관들에서 계열들과 발산들, 그리고 인연연기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답이 먼저 있기보다, 찾아들어가는 과정과 저넘어로 가는 길에서, 자아는 범아의 영역(연결망)을 이루고, 그 이룬 만큼의 우주적 삶을 살다가 세상을 뜰 것이다.
터전에서 대상과 타인을 숙명적으로 관계 맺을 수밖에 없다. 노력의 과정을 겪으면서 자아의 연결망에서 자아는 자신도 모르게 운명을 만든다. 이 운명의 연결망을 잘 만들 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은 그만큼이나 많은 노력 또는 수행을 한다. 그 과정이 무한히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그 순간까지 흐름을 지속한다. 그 대상과 타인의 소중함과, 그리고 접속과 배치에서 쓰이거나 또는 버려질지라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현자의 길이다. 쓰고 버리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아의 필요와 안녕에만, 또는 탐만치에 빠져 대상과 타인을 다루는 쪽을 인문주의자(humaniste) 또는 상품자유주의자(liberaliste)라 부른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동안에 온영혼의 그물망의 덕(기적, 은총, 음덕)을 입고 사는 만큼이나 그물망에 맞게 선업을 쌓으며 실천하는 쪽은 인도주의자(humaitaire) 또는 인성자유주의자(libertaire)라 한다. 후자의 현자들은 전자의 지자들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 지식이 철학적으로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도 현자는 그들의 작업을 존중하며, 공부해야한다. 타자와 타인을 다루는 방식의 발전은 과학사의 발전과 같이 가기 때문이며, 또한 의식의 확장과 온자아의 다양성을 발현하는 길을 볼 수 있다. 다양성의 발현이 자유이다.
서양철학사는 중세의 마남사냥을 거치면서 유일신앙과 다투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현자의 길을 모색하는 부류이다. 이에 비해 다른 한편 유일신앙과 같은 길에서 지식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다. 양자 사이의 대립(l’opposition)는 죽 있어왔다. 이 둘째 부류가 지구상을 모든 것을 지배하고 명령하는 체제를 만들면서, 이 부류는 부분(특칭)판단을 전칭판단 속에서 자유라고 하는데, 현자들은 거꾸로 그 자유가 복종의 자유, 굴종의 자유라고들 한다. 불교는 확정적이고 절대적 완성자를 긍정하지 않았기에, 지식과 대립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불가지론과 부정신론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삶의 터전에 끊임없이 노력하게 하는 것은 모든 개인이 또는 인류가 용화세계를 건설하자는 바램(믿음) 또는 희망(신앙) 때문일 것이다. 이는 다양성 또는 다양체의 발현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종교는 강요와 명령이 아니라, 문화의 다양체를 발현하는 자유의 발현과 은총(자비)의 실현이다.
서양철학은 현자의 길에서 화두에서 자아로, 자아의 실재성을 찾는 의식의 발전으로서 과학들의 발전을 따라가 보고, 그리고 세상의 삶에서 인류의 자유와 다양한 문화의 실현으로 가는 평천하, 용화세계, 코스모폴리탄(만민평등)의 실현을 추구하는 것이다. 입말을 문자화하면서 일반화된 법률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은, 생산력의 발달 다음으로 누리소통의 과정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 시대의 변화에서 인물(인격)들이 등장하고 있고, 다양한 연결망의 점들(소자아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것이다.
자아의 화두는 개별과학들(논리학, 수학,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을 탐구하는 지자의 도움을 받고, 나아가 인간과학들(사회학, 역사학, 정치경제학, 인류학, 언어학)과 문화과학들(문학, 예술, 스포츠, 영화) 등에서 다양하게 펼쳐질 것이다.
(4:23, 58NMF) (5:22, 58NMFF)
첫댓글 서양 철학사에서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첫째 화두는 "나 또는 영혼"일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이 "나(자아)"를 풀기위해 두 개의 화두가 먼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데아세계(하늘), 지상의 세계(땅), 그리고 그 중간에 데미우르고스(인간)를 넣었을 것이다.
데미우르고스는 무엇인가? 누구인가?
이 셋째 화두가 서양철학의 역사 내내, 대화, 논의, 논쟁, 담론, 파라독사를 낳았다.
말하자면 산중의 선승이 말하는 "개구즉착 동념즉괴"이다.
삶의 터전에서 사건이 문제가 된 것은
19세기 전반기에 꽁트의 사회학에서
그리고 이어서 후반기에 등장한 맑스의 정치 경제학에서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