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악제를 계승하였으나 고려 말기에 미비된 점을 바로 잡지 못하다가 세종 때 박연 등 여러 신하가 《주례(周禮)》·《통전(通典)》·《율려신서(律呂新書)》 등 중국의 옛 전적을 참고하여 아악을 만들고 8음(八音) 악기의 종류를 말한다
[1]을 구비하고 아악보를 만들어 옛 주(周)의 제도에 가깝게 바로잡았다.
임진왜란으로 문묘악은 다른 궁중음악과 더불어 흩어졌으며 광해군 때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준하여 복구하였지만, 이어서 병자호란으로 일시 중단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아악복구 사업을 계속하였나 영조 때에 비로소 제 모습대로 바로잡았다. 그러나 성종 때보다 규모가 작았으며 이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편집]
아악에는 아악기가 쓰이고, 당악에는 당악기가 쓰이고, 또 우리의 향악에는 향악기가 주로 쓰이게 마련이다. 문묘제례악에 사용되는 악기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아악기만을 용납하고, 당악기는 물론 향악기는 전혀 배제하고 있다.
아악기는 그 재작재료에 따라 쇠(金)·돌(石)·실(絲)·대(竹)·바가지(匏)·흙(土)·가죽(革)·나무(木) 등 모두 8종의 재료로 된 것인데, 문묘악은 이 8종의 악기가 하나도 빠짐없이 고루 사용되는 것이 우선 다르다. 쇠붙이 악기에는 편종(編鐘)과 특종(特種)이 있고, 돌로 된 악기에는 편경(編磬)과 특경(特磬)이 있다. 실붙이란 현악기를 뜻하는데, 등가에서 아뢰는 금(琴)과 슬(瑟)이 이에 속하며, 대는 대붙이의 관악기가 되는데 소(簫)와 지, 약과 적 등이 있다. 바가지란 박(朴)을 재료로 하는 생황(笙簧)이 있으나 현재는 이악기만은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흙은 흙을 고아서 만든 훈(塤)과 부(缶)가 있고 가죽은 짐승의 가죽을 메운 북 종류들로 등가에 놓는 절고(節鼓), 헌가에 두는 진고(晉鼓)와 노고(路鼓), 노도 등이 있으며 나무로 된 악기에는 축(祝)과 어와 박(拍)이 있으나, 박이란 악기는 원래 아악에 쓰이지 않던 것이 뒤에 추가된 것으로 생각된다. 8음이 구비되기 위해서는 생황이 들어야 하고 순정한 아악기를 고수하려면 박이 제외되어야 하지만 박은 악장격(樂長格)인 전악(典樂)이 들고, 일종 지휘봉에 해당하는 악기이다.
음계[편집]
문묘제례악 즉 순정한 아악 음계는 비록 그 음넓이가 12율(律) 4청성(淸聲)으로 고작 16음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그 음계는 7음계로 이루어진 것이 특이하다. 참고로 당악에서는 6음계로 되고 한국 고유의 향악은 거의 5음계로 구성된 것과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예외 없이 주음으로 시작하여 주음으로 종지되고 있는 점도 이 문묘악에서만 볼 수 있는 악곡 구조이다.
리듬[편집]
문묘악은 2분음표 길이의 4음을 소절로 하여(4/2) 모두 여덟 소절로써 한 곡을 이루는데, 매 소절 끝음에는 북을 두 번 쳐서 그 북소리로 한 악절이 끝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악장[편집]
문묘악에서는 악장(樂章)이라 하여 1음에 1자(字)씩 4자 1구, 모두 8구 32자의 한문으로 된 가사를 음악에 맞추어 부른다. 이것을 악장이라고 하고, 이를 부르는 차비(差備)를 특히 도창(導唱)이라고 일컫는다.
시조는 3분법 3음절 4음절을 율려로 하여 1구를 이루어 6구 3장으로 한다
3의 등배수열 9+9=81
문묘악의 악장은 2분법이다. 인화가 빠진 것이다 천시 지리 4자 1구로 4장 32자로 한다
2의 등배수열 8*8=64괘
복식= 강사포(絳紗袍)와 통천관(通天冠)을 착용하고 있다
* 면류관(冕旒冠) : 면복 차림시 머리에 쓰는 검붉은 빛깔의 관모로, 원통형의 관모 위에 긴 나무 판을 댄 형태이다. 나무 판 위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日), 월(月)의 문양을 그려넣으며, 나무 판의 앞은 둥글며, 뒷 부분은 각진 행태다. 또한 앞이 사선으로 조금 더 낮고 뒤가 더 높은 형태이며, 나무 판의 앞 뒤에는 7가지 색채의 구슬을 12개씩 12줄을 늘어뜨렸다. 나무 판과 원통형 관모는 옥으로 된 긴 막대를 대어 서로 연결시켰고, 원통형 관모에는 옥비녀를 가로질러 꽂으며, 앞, 뒤와 비녀가 꽂는 곳, 턱끈이 달린 관자 놀이와 테두리 부분에는 금속 장식을 단다. 턱끈은 관자 놀이 부분에 각각 1개씩 달려서 내려오는데, 이 끈을 턱에 보내어 동심결(同心結)로 묶어서 늘어뜨린다.
* 의(衣) : 면복의 겉옷으로 흑색이어서 현의(玄衣)라고도 부른다. 의에는 6가지의 장문을 그림으로 그려넣는데, 양 어깨에는 일(日), 월(月), 등에는 성신(星辰)과 산(山), 양쪽 소매 바깥쪽에는 용(龍)과 화충(華蟲)이 있다.
* 의(衣) : 흑색의 겉옷이다. 조복의 의와 형태는 같으나 색상에서 차이가 있다. 현행 종묘제례에서는 흑색의 항라를 사용하고 있다.
4.1. 역사와 구성[편집]
종묘제례악 등 아악으로 분류되는 제례음악은 북송의 휘종이 창제한 《대성아악》(大晟雅樂)(1105년)에서 기원(발원)했다. 이것이 한반도에 전해진 것은 1116년(고려 예종 11년)으로 편종과 편경 스물두 틀ㆍ일현금ㆍ삼현금ㆍ오현금ㆍ칠현금ㆍ구현금ㆍ슬ㆍ지ㆍ적ㆍ소ㆍ소생ㆍ화생ㆍ우생ㆍ훈ㆍ박부ㆍ진고ㆍ입고ㆍ축ㆍ어 등 아악기 20종을 북송으로부터 전수 받았다.
그러나 불교를 우선하던 고려에선 유교식 제사음악인 《대성아악》이 크게 발전하진 않았고, 여몽전쟁을 거치며 서서히 쇠락하다가 조선에 접어들어 세종과 세조 두 임금이 대대적으로 재정비했다.[22]
현행 종묘제례악은 세종대왕 치세 때 창작되거나 중국의 제례악에서 편곡 혹은 개작된 곡들이 주를 이루는데, 크게 《보태평》(保太平) 그리고 《정대업》(定大業)이라는 두 묶음으로 구성된다. 세종은 《보태평》과 《정대업》을 제사용이 아닌 회례용으로 만들었다.[23] 음악 두 묶음을 정리하고, 일부 수정/축소해서 제례악으로 바꾼 때는 세조 10년(1464년)이었다.
《세종실록》 세종 29년(1447년) 6월 5일자 기사#
"又作文武二舞, 文曰保太平, 武曰定大業, 譜各一卷"
"...또한 문과 무 두 개의 춤을 만들었는데, 문은 "《보태평》"이라 하고, 무는 "《정대업》"이라 하며, 기록이 각 1권이며..."
《세종실록》 세종 31년(1449년) 12월 11일자 기사#
"新樂節奏, 皆上所制, 以柱杖擊地爲節, 一夕乃定"
"...새로운 음악의 박은 임금이 다 만들었는데, 지팡이로 땅을 치면서 박자를 맞추어 하루 저녁에 완성했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이 기록은 '현재 모습'으로서 종묘제례악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이전의 조선, 고려 또 그 이전 신라에도 종묘는 존재했었으며, 종묘제례도 존재했었고, 종묘제례악도 존재했다. 돌아가신 부모를 생각하는 의식을 진행하는 것은 매우 보편적인 인류문화이다.
《보태평》은 조선왕조의 학문적인 업적, 즉 문덕을 찬양하는 곡으로 기본 조성은 본래는 임종음을 기본으로 하는 임종평조였다. 세종 때는 <희문>ㆍ<계우>ㆍ<의인>ㆍ<형광>ㆍ<보예>ㆍ<융화>ㆍ<승강>ㆍ<창휘>ㆍ<정명>ㆍ<대동>ㆍ<역성> 11곡이 묶여 만들어졌지만, 이 역시 세조가 정리하면서 여러 번 개작하고 첨삭하였다. 조성도 마찬가지로 황종음을 기본으로 하는 황종평조가 되었다.
확정된 순서: <희문>(熙文)-<기명>(基命)-<귀인>(歸仁)-<형가>(享壽)-<집녕>(輯寧)-<융화>(隆化)-<현미>(顯美)-<용광정명>(龍光貞明)-<중광>(重光)[24]-<대유>(大猷)-<역성>(繹成)
《정대업》은 조선왕조의 군사적인 업적, 즉 무공을 찬양하는 곡으로 기본 조성은 처음에는 남려음을 기본으로 하는 남려계면조였다. 세종 때는 <소무>ㆍ<독경>ㆍ<선위>ㆍ<탁정>ㆍ<혁정>ㆍ<신정>ㆍ<개안>ㆍ<지덕>ㆍ<휴명>ㆍ<순응>ㆍ<정세>ㆍ<화태>ㆍ<진요>ㆍ<영관> 15곡이 묶여 만들어졌지만, 세조가 정리하면서 각 곡의 순서가 바뀌고 몇 곡이 삭제, 수정 또는 추가되어 11곡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기본 조성도 남려계면조에서 황종음을 기본으로 하는 황종계면조로 바뀌었다.
확정된 순서: <소무>(昭武)-<독경>(篤慶)-<탁정>(濯征)-<선위>(宣威)-<신정>(神定)-<분웅>(奮雄)-<순응>(順應)-<총유>(寵綏)-<정세>(靖世)-<혁정>(赫整)-<영관>(永觀)
《보태평》과 《정대업》 두 묶음 모두 황종음이 기본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용되는 악기가 모두 같은 황종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서 평균율 기반의 서양음악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음고가 불안정하다는 인상을 종종 받게 된다. 실제로 제례악에 동원되는 악기 중 대금과 해금, 태평소의 황종은 서양 평균율에 (억지로) 대입시켜보면 내림마(Eb) 음에 해당되지만, 나머지 악기들의 황종은 다(C) 음이다.
세조가 종묘제례악을 완성한 이후로 의식이나 음악, 무용에 큰 변화는 없이 쭉 전승되어 왔지만,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본 제국의 갖은 방해와 협박 등으로 제례와 공연 양식 보존에 어려움을 겪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몇 가지 절차를 수정하거나 생략하여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25]이 주최하여 매년 이어진다. 제례는 종약원 회원들이 담당하고, 음악 연주와 무용은 국립국악원 정악단과 무용단이 주축이 되어 맡았으나 현재는 종묘제례악 보존회에서 맡는다. 다만 국립국악원의 정악단과 무용단에서 소수의 단원을 파견/지원하는 정도로 참여한다.
참고로 국립국악원은 신라시대의 음성서(音聲署), 고려시대의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房), 조선시대의 아악서·전악서·장악원(掌樂院), 대한제국 시대의 교방사(敎坊司), 일제강점기의 이왕직아악부로 이어져 오다가 1945년 해방 후 궁중음악기관이 해체되며, 한때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로 존속하다가 1951년 이후 국립국악원으로 격상된 국가 최고의 음악 연구/보존/재현 기관으로, 전신(前身)들을 쫓다보면 1,000년에 달하는 유구한 기관이다. 이런 곳이 종묘제례의 음악과 무용의 재현에서 배제되었음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제례와 함께 연주되는 음악인 만큼, 모든 절차에 각 음악이 배당되었고 순서를 바꾸어 연주함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리고 연주자와 악기의 배치, 음악에 곁들여지는 노래나 춤도 마찬가지로 엄격한 절차에 따라 편성되고 공연된다.[26] 다만 1990년대에 들어서는 1년에 한두 번 정도 밖에 못 듣는다는 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인지, 종종 국립국악원 등에서 연주회 형식으로 축약해 따로 연말 때 공연하기도 한다. 이때는 연주와 관람의 편의상 의식 절차나 악곡ㆍ악기ㆍ무용이 일부 생략되기도 한다.[27]
4.5. 장단에 대한 연구들[편집]
흔히 국악 관련 이론 서적들에서는 제례악의 박절법은 일정하지만, 장단은 불규칙하다고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제례악이 전해지고 있는 《세종실록》과 《세조실록》, 《대악후보》, 《속악원보》 등의 고악보에 대한 해독과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내용에 수정이 가해지고 있다.
가령 <희문곡> 같은 경우, 《대악후보》에 기재된 <정간보>에는 비교적 정확한 형태의 장단이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 판명되었다.[40] 물론 제례악의 곡들이 전반적으로 장단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히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어지간한 전문가들이 아닌 이상 장단을 알아맞추기는 쉽지 않다.
시조창은 박절이 문묘재례 종묘재례를 따르는 창이다
일무
문묘제향에서 추는 일무(佾舞)는 8일무로 64인이 추며 문무(文舞)는 오른손에 약, 왼손에 적(翟)을 들고 추며, 무무(武舞)는 왼손에 간(干), 오른손에 척(戚)을 들고 춘다. 문묘일무는 중국 고대의 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