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대한 궁금증
이두희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아니 즐겨 듣는 편이라고 해야겠다. 오랜 시간동안 한 장르를 좋아해 왔다면 상식 수준을 뛰어넘는 정도의 지식은 갖고 있어야 할 텐데 그게 아직 일천한 수준이다. 대중음악과 클래식음악이란 두 대양(大洋) 사이에 경계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단지 태평양 한 가운데에 남북으로 그어져 있는 날짜변경선처럼 둘 사이를 구분 짓는 경계가 어디엔가 있지 않을까 하고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런데도 음악에 대한 글을 한 번 써보고 싶었다. 음악을 많이 듣다보면 묻고 싶은 의문점이 하나 둘 늘어서 그런 것 같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어지간한 궁금증은 인공지능(AI)에게서 답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이건 나의 느낌에 대한 문제라서 인공지능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자칫 전문가처럼 답하는 인공지능의 관점에 나의 느낌마저 담보로 묶이고 싶지 않아서다. 인공지능을 회피하고 싶은 건 어쩌면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거나 반항심리일지도 모른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선생이 될 수는 없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인공지능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시험점수를 올려주는 개인과외교사 정도 될 거라고 여긴다. 개인과외교사가 못 미덥다는 말도 아니다. 나에게 닥치는 의문점을 때론 스스로 파헤치고 들어가 그 속살을 직접 들여다보고 싶을 따름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에 비해 내가 가진 의문점이란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길 한가운데 불쑥 솟아올라온 돌부리 같은 것이다. 음악이 조성하는 분위기와 느낌을 우리나라와 서양 사람들은 약간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예를 들면 <A Comme Amour>라는 제목의 음악을 한국에서는 <가을의 속삭임>이라고 번역을 해서 듣는다든가, <Serenade to Spring>이란 곡을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처럼’또는 ‘사랑의 이야기’에서 오는 느낌과 ‘가을의 속삭임’의 그것은 분위기인식 면에서 상당한 거리가 있다. 우리에게 사랑은 봄의 느낌에 가깝다. 가을은 오히려 떠나가는 사랑이나 이루지 못한 사랑의 느낌이다. 혹시 <A Comme Amour>를 지은 작곡가가 이별의 아픔을 안은 채 사랑의 느낌을 표현하려 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봄을 향한 세레나데’를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로 해석하고 가사를 붙인 것은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정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인식의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외에도 <Autumn Leaves>는 ‘낙엽들’이지만 우리는 ‘시들어 마른 잎’이란 뜻의 ‘고엽(枯葉)’으로 해석했다. 이곡의 원곡명은 프랑스어로 ‘말라 죽은 잎’이란 뜻이었다고 한다. 영어로 번역되면서 <Autumn Leaves>가 되었으나 우리말로 해석하면서 원곡의 느낌을 살리려했다는 노력으로 봐 줄 수 있겠지만, ‘낙엽’과 ‘고엽’의 느낌은 엄연히 다르다.
이에 반해 <월광 소나타>는 베토벤의 <C#단조 피아노 소나타 14번, 작품번호27-2>와 같이 한참 긴 본래의 이름이 있다. 베토벤은 이름만으로는 전체적인 느낌을 전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환상곡처럼 자유로운 소나타”란 부제를 붙여놓기도 했단다. 하지만 어느 음악평론가이자 시인이 ‘호수에 비친 달빛의 느낌’이라고 말해 <월광 소나타-Moonlight Sonata>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음악을 들으면‘월광’이란 제목에 사로잡혀 나도 모르게 달빛이 교교한 숲속 오솔길을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혹시 ‘월광 소나타’란 제목을 몰랐어도 그런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혹시 나만 그런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음악의 제목이나 가사가 지정하는 선입견이 그 음악의 느낌을 좌지우지하고 있지 않는지 묻고 싶다. 또는 작곡가의 성향이나 그가 작곡한 다른 음악의 색깔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얼마 전 두 살 박이 손녀와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 지나가는데 “할아버지, 매미가 맴맴 울어요.”라고 했다. 하지만 내 귀에는 “빼에에∼”하는 날카로운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잠시 귀를 기울였더니 또 다른 종류의 매미 소리도 들렸는데 “쉐∼엑, 쉐∼엑” 하는 단속적인 음을 내고 있었다. 사람마다 다르게 들릴 수 있겠지 라고 백보 양보를 해도 매미의 울음소리에 ‘ㅁ’이나 ‘ㅇ’과 같은 부드러운 비음이 들어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 갓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 아이에게 “맴 맴”으로 들린다니, 아무래도 그녀의 엄마아빠가 주입한 교육효과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사춘기가 올 때까지 그녀에게 매미는 그저 “맴 맴”하고 낭만적으로 울어댈 것이다.
말 춤으로 상징되는 <강남스타일>의 가수 싸이가 인기절정에 도달했을 무렵,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초청강연을 한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나는 한국어로 강남스타일을 부르고, 한국어를 모르는 여러분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강남스타일로 이해해서 따라 부르며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서로 다른 느낌으로 함께 즐길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이냐?”란 말로 마무리 지었다. 그의 재치 있는 말솜씨에 두 번 놀랐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그렇다면 서두에 제기했던 ‘왜 사랑의 느낌을 가을분위기로 인식하고, 봄노래를 가을노래로 해석하는지’의 의문은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어떻게 하면‘월광소나타’처럼 제목이 지정해 주는 선입견을 벗어나 들리는 그대로의 음색을 느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숙제로 남는다. 그러면서도 음악은 수필처럼 감정을 언어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곡조와 리듬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라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생각은 변함없다. 가능하면 그 종류나 제목, 가사의 의미, 작곡가의 의도가 아니라 그때그때의 분위기와 떠오르는 감정에 순응하며 있는 그대로의 음악을 즐길 수 있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