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주 譯注, (능가산방,1997)
대승입능가경-해제 <大乘入楞伽經> 解題
달마대사는 일찍이 <능가경(楞伽經)>을 ‘如來心地의 要門’ 이라고 하였다. 또한 본 경은 모든 先佛께서 설한 법이며, 微妙第一의 眞實了義인 까닭에 ‘佛語心品’ 이라고 한다. 아울러 ‘最上乘禪의 지침서’ 요, ‘禪宗의 뿌리’ 이다.
達摩대사 이래 초기의 禪宗을 능가종(楞伽宗)이라 하고, 그 禪을 楞 伽禪이라고 한다. 달마대사는 二祖 慧可대사에게 四卷本 <능가경>을 주면서 말하였다.
“내가 보건대 중국에 오직 이 經이 있을 뿐이다. 仁者가 이에 의지하여 행한다면 스스로 證得하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3)
또 惠可는 그의 제자 那禪師와 慧滿 등에게 항상 四卷 <楞伽經>을 지니고 心要로 삼으라고 당부하였다.4) 이렇게 <능가경>에 의거한 心印相傳의 5) 맥이 선종의 진정한 모습이요, 본모습이다.
초기 선종의 전승을 기록한 <楞伽師資記>는 四卷 <능가경>을 처음 중국에 번역 소개한 구나발다라(求那跋陀羅)三藏을 楞伽禪의 初祖로 올려 기술하였다.
또 同書의 達摩 條에서 이르길, 「보리달마대사께서 또 좌선하는 대중을 위하여 <능가경>을 해석한 <楞伽要義>1권을 기술하셨는데, 분량이 12․3紙이고, 또 <達摩論>이라고도 한다.」6)고 하였으니,
달마대사가 四卷本 <능가경>에 대해 간략히 주석한 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續高僧傳>권16達摩傳의 末尾에는 「그 가르침을 기록한 書가 세상에 流布되고 있다.」
하고 있어, 道宣이 <續高僧傳>을 저술할 무렵인 貞觀19년(645년)경까지는 그 책이 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道宣의 <續高僧傳>感通篇中7) 法沖傳에 의하면 달마대사가 <능가경>을 南北에 전하였다고 하였으며,
慧可의 제자 가운데 善師(<능가경抄>4권 저술) ․ 豊선사(<능가경소>5권)․ 明선사(<능가경소>5권)․ 胡明師(<능가경소>5권)․ 大聰師(<능가경소>5권)․ 道蔭師(<능가경초>4권)․ 沖법사(<능가경소>5권)․ 岸법사(<능가경소>5권)․ 寵법사(<능가경소>8권)․ 大明師(<능가경소>10권) 등이 각기 <능가경>에 대한 주소(注疏)를 저술하였다고 한다.
그 후 五祖弘忍대사에 이르러 어렵고 분량이 많은 <능가경> 대신에 쉽고 간결한 <金剛經>을 주로 권하고,
六祖惠能 대사가 <金剛經> 四句偈를 듣고 悟道하였다는 故事, 그리고 당 후기에서 五代에 이르는 전란기에 敎를 충분히 공부할 수 없는 여건 등으로 <능가경>이 점차 외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당말송초(唐末宋初)에서부터 ‘不立文字․敎外別傳․以心傳心’의 語句가 선종계에 난무하고, 게다가 話頭禪이 크게 유행하게 되면서 諸佛 공통의 成佛의 길이었던 敎禪一致의 정신은 갈수록 쇠퇴하여 갔다.
그러나 위의 구절도 실은 敎에 있는 내용이며, 그 뜻을 올바로 알려면 敎의 원만한 會通과 禪의 수행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宋代의 소식(蘇軾 : 소동파)은 <능가경>4권본인 <능가아발다라보경>의 序文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 불교계의 풍조를 한탄하고 있다. 「요즈음의 배우는 사람들은 각기 그 師를 宗으로 삼아 간편함에만 힘써 따른다. 一句一偈(일구일게)를 얻고는 스스로 자신이 증득하였다고 말한다. 심지어 婦人이나 어린애에 이르기까지 기분좋게 웃으면서 禪悅(선열)이 어떻다느니 하면서 다투어 말한다.
위에 있는 이들은 명예를 위해서, 아래에 처한 자들은 이익을 위해서 그러하며, 그밖의 末流들은 이리저리 쫒아다니지 않음이 없어, 佛法이 쇠미하게 되었다. - - - -」
교종은 대체로 당 후기에서 오대에 이르는 전란기에 교학을 이어갈 만한 층이 크게 몰락하였고,
폐불 등의 사건으로 약세가 되어 간 반면, 선종은 「以心傳心 敎外別傳」을 내세우며 선종의 우위를 선전하고, 산간벽지에서 수백명이 자립자족의 형태로 선원을 일굼으로써 중앙정치의 소용돌이에 거의 휩싸이지 않을 수 있었던 점 등으로 소위 선종의 황금기를 구가하게 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선종의 뿌리라 할 이 <능가경>은 점차 외면되다 보니 결국 화두선과 같은 방편을 크게 내세우는 경향도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慧可가 설법을 마치고 자주 “이 <능가경>이 四世 후에는 名相이 변할 것이니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此經四世之後 變成名相 一何可悲’ ; <續高僧傳>卷16慧可傳)라고 하였으니,
달마의 후예인 선종에서조차 이 경을 크게 도외시하여, 楞伽宗이라는 용어까지도 생소하게 되고 말았던 후대의 사정을 비추어보면 慧可가 한탄한 이유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선종과 교종의 구분도 六祖惠能代까지만 해도 없었으니, 천태나 화엄의 초기 大師들은 거의 모두 禪師로 호칭되고 있는 것이다.
달마 이래 초기 선종의 법맥을 전하는 <楞伽人法志> ․<楞伽師資記>의 書名에서도 <능가경>과 禪宗의 밀접한 관계를 알 수 있다.
약 1세기전 펠리오와 스타인에 의해 돈황에서 발견된 <傳法寶記>와 <楞伽師資記>에 의해 그간 어렴풋이 전해져 오던 초기 선종의 역사의 많은 부분이 새로 밝혀지게 되었다.
<楞伽人法志>와 후자의 兩書는 모두 唐 중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傳法寶記>는 현존하는 초기 선종사서로서 가장 오랜 책으로,
神秀의 대표 제자인 寶寂과 義福이 처음 구도시절에 師事했다고 전하는 두비(杜朏)의 편찬인 것으로 전한다.
<楞伽人法志>의 편찬자는 五祖 東山弘忍의 제자 현색(玄賾)인데,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그 일부 내용이 <楞伽師資記>에 인용되어 전한다. <楞伽師資記>의 저자는 현색의 제자 淨覺이다.8)
원효대사는 <대승기신론소>에서 이 <능가경>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으며, <금강삼매경론>에서도 4회 인용하고 있다. 또한 <楞伽經疏> <楞伽經料簡> <楞伽經宗要> <入楞伽經疏> <楞伽宗要論>등을 저술하고 있어,9) 그가 이 <능가경>을 얼마나 중요시 하였는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능가경>에 대해 가장 많은 저술을 이룬 분이 곧 원효대사이다. 그러나 <능가경>에 대한 그의 저술들이 모두 失傳되었으니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저술들이 모두 전해지고 이해되었다면, 현재의 불교계 모습은 크게 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二 <楞伽經> 梵本(범본)은 十萬頌本, 三萬六千頌本 및 略本인 四千頌本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번역한 것이四種인데 모두 略本인 四千頌本의 譯이다. 그 가운데 담무참(曇無讖)의 譯本인 <능가경>四卷은 오래 전에亡失되었고, 대장경 가운데 현존하는 것이 다음의 세가지이다. <楞伽阿跋多羅寶經(능가아발다라보경)>(4卷本) 남북조 劉宋(유송)의 元嘉(원가)12년(435년)에 천축(天竺 ; 인도) 三藏法師 구나발다라가 金陵의 草堂寺에서10) 譯하였다.
四卷인데 현존하는 세가지 譯本 가운데 가장 분량이 적다. 7권경인 <대승입능가경>과 가장 가까운 내용인데 맨 앞의 라바나왕근청품과 다라니품(1권)및게송품(2권)이 없다. 문장이 간결하고 古風이어서 句讀하기에 어려운 편이다.
賢首法藏은 이 本에 대해 「----英哲한 인재도 이해할 수 없게 하고, 어리석고 범용한 자들이 잘못 이해하게 한다.」고11) 하였다. 또 소식(蘇軾)은 이 경의 序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능가경의 義는 그야말로 幽玄하고 문자는 簡古해서 讀者가 句讀하지 못하기도 하는데, 하물며 (完本 구하기 어려워) 遺文(흩어지고 일부 남은 경문)으로 뜻을 얻고, 허망한(잘못 이해한) 義로 心을 了達한다고 하는 자들이야 어떠하겠는가. 이 경이 세간에서 적막해지고,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달마대사가 혜가에게 전한 것은 바로 이 譯本이다. 달마대사 在世時에는 이 <4권본>과 함께 <11권본>이통행되고 있었으나 <능가경 7권본>(<대승입능가경>)은 아직 없었다.
달마대사는 당시 통행되고 있던두가지 <능가경> 가운데 <11권본> 보다는 더 정확한 이 <4권본>을 택하여 전수케 한 것이라 하겠다. <入楞伽經>(11卷本)
남북조 北魏의 延昌2년(513년)에 菩提流支(보리유지)가 낙양의 汝南王宅과 金華寺에서 譯하였다.
빠진 부분을 보완해서 譯하였는데, 三品經을 11卷 18品으로 하였다. 이 譯本의 분량이 가장 많으나, 어긋난 부분이 또한 많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다른 두 경문의 번역 스타일이나 字句의 용례가 서로 비슷한 반면, 이 경문은 색다르고난삽하다. 賢首法藏은 이 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평하였다.12) 「문장과 여러 品(章)은 비록 갖추어졌다 하지만 聖意가 드러나기 어렵게 되어 있을 뿐 아니라, 加字와 混文(혼문)으로 뜻을 파악하는데 헤메게 만들거나 잘못 이해하게 만든다.」
<大乘入楞伽經>(7卷本)
당 중기 則天武后(측천무후)의 청에 의해 入唐한 우전국(于闐國) 三藏 실차난다(實叉難陀)와 沙門 復禮등이 華嚴經 80卷本을 번역하고 나서,
<능가경>의 兩譯本이 별로 유통되지 못하였고(<4권본>), 뜻이 어긋나 있는 부분이 많으니(<11권본>)새 역본을 만들라는 則天武后의 간청에 의해 새로 가져온 梵本을 토대로 하고 이전의 兩本을13) 대조 취사선택하여 나오게 된 것이 바로 이 <7권본>이다.
賢首法藏의 <入楞伽心玄義>에 의하면,14) 처음 神都의 佛授記寺에서 시작하였고, 나중에 황제의 令으로 궁정에 가까운 淸禪寺에 移居하여 번역을 마쳤으나, 교감(校勘) 하지 못한 채로 실차난다(實叉難陀)가 귀국하게 됨에(于闐國王의 令), 일찍이 인도에서 2년간 遊歷하며 三藏,
그 중에서도 특히 <능가경>에 밝은 토화라국의15) 彌陀山(미타산) 三藏과 沙門 復禮에게 再勘譯(재감역)하게 하여 완성하였다. 周 武則天 久視元年(700년)에서 시작하여 唐 中宗의 長安4년(704년)에 번역을 마치었다. 현존하는 梵本과 순서와 항목이 같은 7卷 10品이다. 이 譯本은 앞의 두 譯本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고, 이전의 譯本과 새 梵本을 바탕으로 한 만큼 가장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楞伽阿跋多羅寶經>(이하 <4권경>)과 <入楞伽經>(이하 <11권경>) 및 <大乘入楞伽經>(이하 <7권경>)의 분량 비율은 대략 순서대로 3 : 7 : 5 정도이다.
이는 <7권경>이 <11권경>의 번잡하고 난삽함을 가다듬고, <4권경>의 비교적 소략(疎略)함을 보완해주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4권경>의 분량이 적은 것은 맨 앞의 찬탄과 권청부분 및 맨 뒤의 게송품이 없기 때문이고
본문의 내용과 분량은 대체로 <7권경>과 거의 비슷하며, 어떤 단락은 <7권경> 보다 더 많은 내용으로 된 곳도 있다.
그리고 <7권경>은 前譯의 잘못되고 어긋난 부분과 古風의 어려운 譯文을 修正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세가지 譯本 가운데 <7권경>을 택하여 번역 소개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7권경>에도 곳에 따라서는 두 경 보다 더 난해하게 번역된 부분이나 誤譯에 가까운 부분도 있고, 誤字 탈자도 있기 때문에 잘 통하지 않거나 미심쩍은 부분은 필히 나머지 두 경을 대조하여 보완 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실차난다(實叉難陀)의 傳記는 <宋高僧傳>卷第二에 전한다. 于闐國人(우전국인)으로16) 大․小乘에 정심하고 異學에도 통달하였다고 한다. 唐의 則天武后가 于闐(우전)에 華嚴經의 梵本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舊華嚴經의 未備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經과 譯經僧을 청함에 중국에 오게 되었다.
전기한 두 경전외에 <文殊授記經>와 <起信論>(新譯) 등 19部를 譯出하고 59세 되던 景雲元年(710년)에 입적하였다. 다비 후에 아직 혀(舌)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다. 유해는 본국에 옮기어 탑에 모시고, 다비한 곳에는 후인이 칠층탑을 세웠는데 華嚴三藏塔이라고 하였다. 三 <능가경>에서 말하는 내용을 모르는 채 최상승선이니, 여래선, 조사선을 말할 수 있을까.
본 경 卷三 集一切法品第二之三에서 禪을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 관찰의선(觀察義禪)․ 반연진여선(攀緣眞如禪)․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으로 나누고, 「무엇을 諸如來禪이라 하는가. 佛地에 들어가 自證聖智의 세가지 樂에 머물러 제중생을 위해 不思議事를 하는 것을 말하여 諸如來禪이라 하느니라.」고 하였다.
佛地에 아직 이르지 않은 조사라면 중생을 위해 佛地와 같은 차원의 不思議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요컨대 如來禪이란 여래의 果를 얻기 위한 수행단계가 아니라, 중생과 보살을 위해 不思議事를 행하는 것이다. 이 여래의 不思議事에 대해 그 일단만 소개한다면 同卷同品 第二之三에 이르기를, 「또한 대혜여, 諸佛에게는 두가지 加持로 제보살을 加持하여 부처님의 발에 頂禮하고 여러 뜻을 聽聞케 하나니라. 두가지가 무엇인가 하면 삼매에 들게 하며, 그 보살의 앞에 몸을 나타내어 손으로 灌頂하는 것이니라.
대혜여, 初地菩薩마하살이 諸佛의 加持力을 입은 까닭에 菩薩大乘光明定에 들고, 들고 나면 十方諸佛이 그 앞에 두루 나타나시어 身과 語로 加持하시나니, 금강장보살과 그밖에 이와같은 공덕상을 성취한 보살마하살이 그러함과 같나니라.- - - - - (중략) - - - -, 또한 대혜여, 제보살마하살은 삼매에 들어 신통을 나타내어 설법을 하나니, 이와 같은 모든 일은 모두 諸佛의 두가지 加持力에 말미암은 것이니라. - - - - - - - (중 략) - - - - - - - - -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슨 까닭에 여래께서 그 加持力으로 제보살로 하여금 삼매에 들게하고 수승한 菩薩地(보살第十地)에 이른 보살에게 손으로 灌頂하시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만약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 보살들은 곧 外道와 聲聞, 魔境 가운데 떨어져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이룰 수 없나니, 이 때문에 여래는 加持力으로 모든 보살을 거두어주시느니라.”」
이상의 내용이 如來禪 즉 如來 不思議事의 일단이다. 이러하거늘 이 이상의 禪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나중에 唐末에 仰山慧寂(840-916)선사가 香嚴선사에게 「그대가 如來禪은 얻었으나 祖師禪은 얻지 못하였네」라 한 것이 이후 如來禪과 祖師禪을 구분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仰山이 말한 如來禪이 어찌 앞의 <능가경>에서 明言하고 있는 如來禪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四種禪에서 如來禪의 아랫단계인 반연진여선(攀緣眞如禪)은 얼핏 보면 眞如라는 法相을 반연(攀緣)하고 있는 것 처럼 생각되기 쉬우나, 본 經文에 의하면 이미 人無我見과 法無我見의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단계이다.
즉 일체의 분별을 이미 떠나 있는 단계의 수행이다. 사실 眞如라는 法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어느 一法에도 머무르지 않음이 곧 眞如이니,
眞如에 반연(攀緣)함이란 一切의 法相을 떠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 經 卷第二 集一切法品 第二之二에서 「성인은 妄法 보지 아니하니, 中間(世間 :<11권경>) 또한 진실 아니고, 妄法이 곧 진실인 까닭에 中間(世間) 또한 진실이라네. 만일 妄法 떠나서 相이 생김이 있으면 이는 도리어 妄이니 병든 눈 같아 청정치 않네.」라 한 것이니,
妄法 그대로에서 일체 분별을 떠나 있을 뿐, 따로 眞如라는 相을 내면 이것이 도리어 妄이 되는 것이다.
仰山이 말한 祖師禪이 곧 <楞伽經>의 四種禪 가운데 세번째인 바로 이 반연진여선(攀緣眞如禪)에해당함이 분명하다.
仰山이 말한 如來禪은 四種禪 가운데 두번째인 觀察義禪 단계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그렇다면 仰山은 이를 ‘如來禪’이라 칭하지 않았어야 했다. 즉 다른 용어를 써서 祖師禪에 대비하여야 했다.
祖師禪이란 眞如․ 열반등의 法相을 떠나 있어 따로 얻거나 취할 一法도 없는 차원이다.
이러한 祖師禪의차원은 기본적으로 無功用 즉 有爲로 하지 않으며, 억지 수행 떠난 無修의 任運行이며, 이로써 無相을 성취하고 오직 마음 뿐임을 了達하여 無生法忍을 성취한 자리를 菩薩第八地 또는 不動地라 하고, 퇴보가 없게 되어 不退轉地라고도 한다(이에 대해서는 본 경문에 자세히 설명되고 있음).
그래서 祖師禪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선 菩薩第八地와 그 이전의 억지러 이어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단계로 나누어지며,
八地 이전의 경우에도 다시 無相의 차원이 어느 만큼 익어져 있느냐에 따라 많은 차등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無相의 깊이와 그것이 이어지는 시간의 차이가 個人別로 천차만별한 것이다.
仰山이 말한 祖師禪이 최상승선이고 가장 빠르며 정통의 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仰山은 祖師禪에 아직 이르지 못한 단계를 如來禪이라 지칭함으로써 이후 막대한 오해와 오류를 야기시킨 셈이다.
게다가 唐末宋初에 화두선(간화선)이 대두됨으로 부터 일부에서 화두선하는 것이 곧 祖師禪하는 것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작태를 연출하게 되었다.
無相의 祖師禪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第一義․一心․ 無生의 理法에 통달하여야 하는 것이니,
이는 일단 대승경전의 深深義를 원만히 해통함으로부터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엉뚱한 길로 빠져 외도나 二乘 三乘의 길에 처하여 있으면서 스스로는 최상승선에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특히 이 <능가경>에서는 이러한 가능성을 크게 경계하여, 그야말로 구구절절하게 누차 반복하여 당부하고 또 당부하고 있다.
사실 第一義․一心․無生의 理法을 통달하였다면 화두를 따로 챙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無心이니, 조금이라도 마음을 어떻게 할려고 하면 이미 그것은 조사선이 될 수 없다. 無心이요 一心인데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이 화두를 타파하면 바로 佛地(妙覺)에나 오른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조차 있으니, 이는 부처님을 크게 욕되게 하는 것이다.
대승경전에서 말하는 妙覺이 어떠한 것인지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어찌 그러한 망발이 나올 수 있겠는가.
마음닦는 길은 길없는 길이니 더더욱 알고 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능가경>은 中觀․唯識등 여러 법문이 망라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를 외도나 二乘 三乘과 대비하여 그 갈래를 명확히 드러내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최상승선의 길이 훤히 비쳐지는 것이다. 달마대사가 이 <능가경>을 크게 강조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四 <楞伽經>의 略名은 ‘랑카와타라 수트라(Laṅkavatāra-sutra)'로서 ’랑카城에 들어가 설한 가르침‘이란 뜻이다.
4권본인 <능가아발다라보경>은 곧 이 원명을 음역한 것이다. 자세한 經名은 ‘Ārya-saddharma-laṅkāvatāranāma -mahāyanasutra’ 인데 ‘(불교의) 성스러운 正統敎義를 간직한 능가아발다라라고 불리우는 대승경전’이란 뜻이다.
랑카(능가 楞伽)는 가기 어려움․ 이르기 어려움․ 들어가기 어려움(難往․不可到․難入)의 뜻이다.
그 정상인 마라야 山頂은 신통력이 없으면 오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오르기 어려운 곳이라고 한다. 이는 이 곳에서 설하는 법이 究竟의 第一義요 一佛乘임을 說法處로서 나타낸 것이다(<明注>). 한편 이 랑카는 지금의 스리랑카 또는 스리랑카 동남부에 있는 아담峯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능가경>에서 등장하는 분들은 부처님과 대혜보살을 上首로 하는 菩薩衆, 능가성의 라바나야차왕을 비롯한 야차중등이다. 특이한 것은 석가불의 제자들이 한분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대승경전이란 인간계의 역사성 내지는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그 성립내역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보살지위에 오른 분들은 깊은 선정 가운데서 부처님을 親見할 수 있는 것이며,
바로 그 자리에서 부처님으로부터 법문을 들을 수 있고, 경전을 전수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八地菩薩 以上은 아직 佛地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佛智를 훤히 비추어볼 수 있어, 佛의 위신력을 받아 경전을 펼 수 있는 것이다.
석가불이 입멸하심은 그러한 모습을 중생에게 보이신 것 뿐이며, 부처님은 어디에나 언제나 常住하신다. 단지 범부가 보지 못할 뿐이다. 필요에 따라 보살들께 여러 법문이나 경전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은 一切法界의 大導師이시니, 욕계의 일부인 인간계에서만 법을 설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범부의 차원에서는 부처님이 인간계에서 설하시는 장면 밖에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이 <능가경>의 법문을 라바나야차왕은 이전에 무량한 부처님으로부터 들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법문이 본래 常住하는 것이어서 새로 생겨서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그리고 대혜보살이 모든 보살중과 야차중을 위해 부처님께 佛地에 이르는 길을 낱낱이 질문하고 있다. <羅婆那王勸請品>
부처님께서 大海의 용왕궁에서 7일간 설법하신 후, 마라야산정의 능가성에 오시어, 라바나야차왕과 그 권속의 찬탄과 공양 권청을 받는 장면, 부처님께서 대위신력으로 無量한 華嚴의 佛國土를 나투시었다가 다시 사라지게 하여
라바나왕이 오직 自心임을 증득하고, 분별없는 자리에 住하게 되었으며, 보살의 諸地를 거쳐 올라가는 相을 잘 파악하며, 항상 즐거이 心(第八識)․意(第七識)․意識(第六識)을 멀리 떠나고,
세가지 相續見(業相․轉相․現相)을 끊어 외도의 집착을 멀리 떠나 自心에서 깨우쳐 여래장에 들고 佛地에 나아가는 체험을 하게 되는 장면이 이어진다. 여기에서 라바나왕이 체험하게 된 내용이 이 <능가경>의 뼈대이다.
라바나왕이 한 찰나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이러한 경계를 증득하게 된 것은 한량없는 오래 전 부터 심어온 善根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라바나왕이 無生法忍을 증득한 것을 아신 부처님이 化作한 사물들을 다시 처음대로 나투시고 이어 크게 웃으시며 大放光을 하신 후 말없이 不動하심에 라바나왕의 청을 들은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법을 청문하게 된다.
여타의 경전의 序品과는 달리 이 <능가경>에서는 이 첫 품에서부터 二種義(法과 非法등)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시작되고 있는데,
요컨대 法(존재)이란 실체가 없으니 이 法을 버려야 하고, 그 법을 버리게 하는 법인 非法(無性無相觀, 법을 버리게 한 가르침)도 모두 버려야 하며,
또한 性相이 없이 말만 있는 非法(‘토끼뿔’, ‘石女의 子’)의 분별도 버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二義를 버림은 곧일체의 분별을 버리는 것이 된다는 것을 설한다.
序品에 이 二義를 버려야 함을 설한 것은 ]이를 크게 강조함이요, 이어 설해지는 非法(법을 버리게 한 가르침)의 法相에 取着하게 되는 잘못을 염려한 때문이다.
이어서 제법 또한 無聞 無說이고, 법과 非法은 오직 분별일 뿐인데, 분별하는 까닭에 버리지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하며, 오히려 더욱 일체의 허망을 증장하여 적멸을 얻지 못한다 하고,
적멸이란 곧 一緣(對象을 따로 취하지 않고 있는 경계,
無相地, 즉 能所가 따로 있지 않아 如一不動한 경지)을 말하며,
이 一緣이 가장 뛰어난 삼매이고 이로써 능히 自證聖智가 나와 如來藏을 경계로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如來藏을 경계로 하는 것이 一緣이 되는 것은 如來藏이란 無相이기 때문이다.
無相인데 如來藏이라 함은 자칫 일체의 분별을 떠남을 허무에 빠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고자 함이다. <集一切法品>
먼저 대혜보살이 「어떻게 사량분별이 일어나며, 어떻게 사량분별을 청정히 합니까」에서부터 시작되는 약 140여가지에 이르는 다양한 질문이 한번에 이어지고,
이어 부처님께서 앞의 문항들을 재차 간략히 반복하면서 아울러 질문받지 않은 새로운 문항을 더 지적하여 제시한다.
그리고 이 문항은 곧 과거 諸佛께서 일찍이 설하셨던 108句이며, 이 句 하나하나의 相이 상응하여 諸見과 세속을 멀리 떠나게 하는 언어로 된 법이라고 정의한 후, 곧이어 「生句非生句, 常句非常句-- - - - - -」와 같이 相對의 108 法句를 나열한다.
이후 經文은 대체로 위의 문항이 하나하나 질문․ 답변되고 있는 형태를 띄고 있다.
단지 몇몇 문항은 보이지 않고 있는데(뒤의 <게송품>에 일부 설명되고 있음), 아마 그 이유는 한역된 범본<능가경>이 10만송, 3만6천송의 長本이 아니고 4천송의 略本인 때문이 아닐까 한다. 또 앞의 경문을 요약 정리 반복하는 끝의 <게송품>에 앞의 본문에 언급하지 않았던 내용들이 다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인 듯 하다.
첫 번째의 질문으로서 諸識에는 몇 가지의 生․住․滅이 있는가에 대한 답변에서 두가지 生 住 滅(각각 相續과 相)이 있고, 諸識에는 세가지 相(轉相․業相․眞相)이 있으며,
識을 넓게 말하면 여덟가지, 줄여말하면 現識과 分別事識이 있다 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이어진다.
원효대사는 <대승기신론소>에서 특히 <능가경>의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인용 의거하고 있다. 요컨대 唯識의 총체적인 체계가 매우 간결하게 축약되어 설파되고 있다 하겠는데,
본 경문은 그러한 ‘오직 마음일 뿐’이라는 것이 여래의 궁극의 가르침이며, 자칫 정법과 혼동하기 쉬운 外道의 설에 미혹되지 않을 수 있는 지침이 되는 것임을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어서 일곱가지의 自性과 일곱가지의 第一義가 明示되고, 외도의 惡見이란 어떠한 것인가를 자세히 설파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惡見에 미혹되지 않는 수행자는 일체경계가 幻과 같고, 꿈과 같아, 마음을 떠나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알아,
無相의 道를 행하면서 점차 보살의 諸地에 오르며, 삼매경에 머물러 三界가 오직 自心임을 了達하고, 如幻定에서 影像을 끊고 지혜를 성취하여 無生法忍을 증득하고,
金剛喩三昧에 들며, 마땅히 佛身을 얻어 영원히 如如함에 머무르면서 모든 변화를 일으키는 힘에 통달 自在하게 될 것이라고 言明한다.
먼저 대혜보살은 心(第八識), 意(第七識), 意識(第六識), 五法自性相(名․相․妄想․正智․如如)의
衆妙法門에 대해 질문하면서, 이 법문은 諸佛께서 自心境에 들어 所行相(識, 識의 相)을 떠나 眞實義라 칭하신 心要법문임을 밝히고 있으니, 이는 이 법문의 위치를 드러내고자 함이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諸識이 어떻게 轉識하며, 혹은 頓生하고 혹은 漸生하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이어서 제수행자가 삼매에 들어 습기의 힘이 미세해지면 아직 습기의 종자가 멸한 것이 아님을 모르고 諸識이 멸한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을 경계한다.
藏識의 行相은 미세하여 오직 諸佛과 初地 이상의 보살을 제외한 일체의 二乘 외도의 定慧力으로는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을 明言한다.
특히 여덟가지 識이라 하였지만 이는 중생을 開悟키 위해 나누어 설한 것일 뿐, 각기 別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能相과 所相이 없어 諸識心을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게송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能取 所取의 분별경계가 모두 自心所現임을 깨닫고자 하면, 加行精進으로 自心의 분별상을 통달하여야 하고,
보살은 上聖智의 三相(無影像相․一切諸佛願持相․自證聖智所趣相)에서 힘써 수행하여야 하며, 이 相을 획득하고 나면 智慧心相을 버리고 無功用의 菩薩第八地에 들어가 이 三相의 수행을 無功用으로 이어가야 한다고 당부한다.
한편 五法自性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이 단락에서 바로 답변이 나오지 않고,뒤쪽에서 설명되고 있다. 이어 외도의 有․無 二見이 잘못된 것임을 설파하시고,
이 二見에 떨어지는 것은 唯心임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自心에서 분별을 증장한 것임을 밝히며, 자칫 외도의 見에 빠지게 되는 것을 크게 경계한다. 다음은 제중생의 自心 망상의 흐름을 청정히 하는데 있어서, 점차 청정이 이루어지는 것인지(漸淨), 단번에 청정이 이루어지는 것인지(頓淨)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제불여래가 제중생의 自心 망상의 흐름을 청정히 함은 점차 이루어지는 것이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漸淨), 한편 제불여래가 제중생의 자심망상의 흐름을 청정히 하는데 있어서는 일체의 無相境界와 불가사의한 제불여래의 지혜경계를 단번에 示現한다고 하여 (頓淨), 漸淨과 頓淨의 두 면이 있음을 明言한다.
이어서 報身佛과 法身佛및 化身佛의 설법을 대비하여 설명하신 후, 궁극에는 반연(攀緣)함이 없어서 一切所緣과 一切所作相및 根量등의 相을 멀리 떠난 法身佛(法性佛)의 自證聖智所行에 따라 노력하여 修學할 것을 당부한다.
여래가 설하는 常不思議 自證聖智 第一義境은 외도가 설하는 常不思議作者와 다르다. 여기에서 외도가 말하는 作者(창조자)는 常不思議라 할 수 없는 까닭을 매우 상세하게 설한다.
소위 五種의 種性 즉 聲聞乘種性․緣覺乘種性․如來乘種性․不定種性․無種性을 하나하나 설명하신 후, 게송에서 小乘四果의 성인도 그 마음은 미혹하며, 색계의 諸禪과 무량한 無色界의 삼매 내지 滅受想定도 唯心不可得(오직 마음일 뿐이어서 얻을 바 없음)이다.
또 일천제(一闡提 ; 열반에 들 수 없는 자)에는 보살승을 비난하여 일체선근을 버린 一闡提와, 제보살이 本願 방편으로 한 중생이라도 열반에 들지 못하면 나는 끝내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서원한 보살 一闡提가 있는데, 이 가운데 前者는 부처님께서 일체중생을 버린 때가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언젠가는 선근이 생겨 열반에 들 수 있게 되나, 後者의 보살一闡提는 끝내 열반에 들지 않는다.
三自性相 (妄計自性․緣起自性․圓成自性)에서
圓成自性이란 名相 事相의 일체 분별을 떠난 自證聖智 所行眞如 如來藏心이다.
五法自性 가운데 名․相․妄想(分別)은 妄計自性(遍計所執性)과 緣起自性(依他起性)이고, 正智․眞如(如如)는 圓成自性이다.
보살은 二無我相(人無我相․法無我相)을 잘 관찰하여야 한다. 蘊(온)․界․處가 我와 我所를 떠나 있고, 일체 세간은 藏識(장식)이 나타난 것으로 찰나 변괴하는 것이며,
虛僞의 習氣가 因이 되어 끊임없이 유전하는 것임을 잘 알면 이것이 人無我智이다. 일체법을 관찰하여 心(第八識)․意(第七識)․意識(第六識)과 五法自性을 떠남을 보살마하살의 法無我智라 한다.
이 지혜를 얻고 나면 境界 없음을 알고, 諸地의 相을 了知하며, 곧바로 보살初地에 들어 心生歡喜하고, 점차 진전하여 내지 善慧(보살第九地)및 法雲地(보살第十地)에 이르러서 모든 행을 이미 다 갖추어 이룬다.
이 地에 머무르고 나면 大寶蓮華王衆寶로 장엄되고, 그 華 위에 寶宮殿이 있어 그 모양이 蓮華와 같은데, 보살은 거기에 가서 幻性法門의 성취를 닦으며, 그 위에 坐하며, 同行 佛子가 前後에 둘러싸고
일체 佛刹의 여래께서는 모두 그 손을 펴시어 轉輪王子의 灌頂法과 같이 그 머리에 灌하면, 佛子의 地를 넘어 自證法을 획득하여 如來 自在身을 성취한다. 이를 이름하여 法無我相을 보는 것이라 한다.
이 부분에서 佛地에 이르는 수행 증득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제시되어 있다. 다음은 외도의 ‘建立誹謗相’(常見을 건립하여 斷見을 비방하는 相, 斷見을 세워 常見을 비방하는 相)에 대해명확히 論破한다.
空이란 妄計性의 句義로서 이를 설한 것은 斷․常의 치우친 생각을 멀리 떠나게 하고자 한 것이다. 空에 대한 取着을 크게 경계하여
‘차라리 我見을 수미산처럼 일으킬지언정 空見을 일으켜 增上慢(증상만)을 품지 말라’ 고 재차 뒷편(卷第四 無常品)에서 반복한다.
無生․無自性․無二相도 마찬가지니 마땅히 뜻에 수순하고, 언설에 집착하지 말것을 재삼 당부한다.
佛敎의 如來藏과 외도가 말하는 我가 어떻게 다른가.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은 범부를 無我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아울러 如來藏이란 無分別 無影像處임을 밝히어 미래 현재의 제보살마하살이 이를 我로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니, 외도가 설하는 我와는 다르다. 창조자로서 神我 또는 勝自在天이 있다거나, 여러 緣의 화합, 미진(微塵)등으로 법이 생한다고 외도들이 말하는 것은 단지 마음의 분별일 따름이다.
보살마하살의 네가지 대수행 즉 觀察自心所現․ 遠離生住滅見․ 善知外法無性․ 專求自證聖智이 설해진다.
遠離生住滅見에서 제법의 如幻性을 증득하고 즉시에 無生法忍을 얻어 菩薩第八地에 머물러 意生身을 얻게 되는데,
이 意生身이란, 비유컨대 생각이 움직임에 신속하고 걸림이 없는 것과 같이 어디에나 곧바로 이르고 통과하며, 如幻三昧의 힘으로 신통자재하여 諸相을 장엄한다.
여섯가지 因으로 생긴다거나 漸生이니․頓生으로 보는 것은 모순이다. 오직 識에서 스스로 분별의 견을 일으킨 것일 따름이니, 生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분별을 떠나야 한다.
이어 네가지 언어분별상(相言說․夢言說․計著過惡言說․無始妄想言說)이 설해지는데 여기에서의 언설상은 범부의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살의 깨우침이 진전되면서 설해지는 언설(분별을 버리라는 언설)이다.
그리고 第一義란 聖智의 內自證境이고 오직 自心일 뿐이어서, 언어 분별 차원에서의 지혜경계가 아니니 언어분별로는 나타낼 수 없다.
<능가경>에서는 自相共相이란 용어가 자주 나온다. 自相이란 하나하나의 개별 존재를 가리키고,
共相이란, 無常․空․無我와 같이 自相에 공통한 성품을 가리킨다.17)
이 共相은 곧 중생의 自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방편으로 설한 가르침이며 法相이다.
이 <능가경>에서는 이 방편으로 설한 共相(法相)에서 떠나야 함을 반복하여 설하고 있다. 아울러 일체제법의 自相․共相은 化身佛의 說이고, 法身佛의 설이 아니며,
化身佛의 설법은 단지 어리석은 범부가 일으키는 생각에 따른 것이니, 自證聖智 三昧樂의 경계를 나타내지 않은 것임을 강조하고, 마땅히 聖智로 증득된 법 가운데서 일체분별을 떠나야 할 것을 당부한다.
諸佛의 설법은 煩惱障과 所知障의 二障을 청정하게 하며 차례로 108句의 無相法 가운데서 安住하게 하고, 諸乘의 修證 단계의 相을 잘 분별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어서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愚夫所行禪․觀察義禪․攀緣眞如禪․ 諸如來禪의 四種禪이 설해진다. 禪修行 必參의 지침이 아닐 수 없다.
열반이란 무엇인가. 一切識의 自性習氣와 藏識․意(第七識)․ 意識(第六識) 諸見의 習氣에서 轉依(識相에 取着하던 習氣에서 벗어남)한 것이며 , 自證聖智의 所行境界이다.
執着言說自性相과 執着諸法自性相의 두가지 自性相이 있다.
諸佛은 제보살을 加持함에는 두가지가 있으니, 삼매에 들게 하는 것과, 그 보살 앞에 몸을 나타내어 손으로 灌頂하는 것이다. 제보살은 두가지 加持에 加持되는 까닭에 일체제불을 親見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親見할 수 없다. 제보살마하살이 삼매에 들어 신통을 나타내어 설법을 하는 것과 같은 모든 일은 모두 諸佛의 두가지 加持力에 말미암은 것이다. 여래가 만약 이렇게 보살들을 加持하여 주지 않는다면 저 보살들은 곧 外道와 성문, 魔境 가운데 떨어져 無上菩提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여래는 加持力으로 모든 보살을 거두어 주시는 것이다.
또 眞如란 迷惑法을 轉함(미혹법에 取着하는데서 轉依함)을 말하는 것이니, 眞如의 相이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분별을 떠나 있는 것이다.
이어서 如幻과 無生을 설하는 뜻, 無記와 네가지 記論(一向 또는 直答․返問․分別․置答)의 뜻, 일체법이 不生․無自性․無來無去․不滅인 까닭이 설해진다.
다음에 小乘四果의 차별경계를 소상히 밝히고 있으니, 이는 그러한 경계를 自覺하여 넘어서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들 小乘四果의 諸聖人 경계는 모두 마음의 妄有에 의지함이다.
단지 아라한에는 三種이 있고, ‘一向趣寂’(항상 오로지 적멸만을 추구함)을 제외한 ‘退菩提願’(소승열반에서 물러나와 大菩提願을 발함)과 ‘佛所變化’(부처님이 아라한으로 化現하심)의 두 아라한은 善巧의 方便願을 발하여, 諸佛과 그 會衆을 장엄하기 위해 아라한에 생함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大種(地水火風)이 色相을 만든다는 外道說의 모순을 설파하여 재삼 이러한 惡見에 빠지지 말 것을 당부하신다.
또한 諸法自性涅槃․ 種種相性無性涅槃 ․覺自相性無性涅槃 ․斷諸蘊自共相流注涅槃의 네가지 열반은 외도의 뜻이고
佛의 설이 아니며, 佛이 설하는 열반은 분별하는 이 炎識(불타는 識, 여기서는 意識을 가리킴)이 滅한 것을 말한다 하고,
6․7․8識의 뜻을 설하여, 意識의 滅만 설하고 7識이 멸하는 것은 설하지 않는 이유를 설하고 있으니, 요컨대 意識이 멸할 때에 第七識 또한 멸하기 때문이다.
범부가 집착하고 있는 12가지 妄計自性差別相을 자세히 드러내어 이러한 경계를 自覺하여 빠지지 않도록 당부한다.
어리석은 범부 위해 여려 乘의 차별을 설한 것일 뿐, 세울 乘 없음을 一乘이라 하는 것이며,
성문은 現行번뇌를 멸했으나, 아직 習氣에 묶이어 있고, 究竟․不退轉도 아니다. 성문은 三昧身 얻어도 겁이 지나도록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비유컨대 술에 흠뻑 취한 자가 술기운이 가신 뒤에야 깨어나듯이, 성문도 이와같아 깨달은 후에야 성불하게 된다. <無常品>
意成身에는 三種이 있으니, 보살初地에서 부터 점차 증득한다. 먼저 入三昧樂意成身은보살 3․4․5地에서, 覺法自性意成身은 보살8地에서, 種類俱生無作行意成身은 如來位에서 증득된다.
이어서 外五無間業과 內五無間業의 구분, 諸佛의 體性은 二無我를 깨닫는 것, 二障(煩惱障,所知障)을 제거하는 것, 二種의 死 (分段死․不思議變易死)를 떠나는 것, 두가지 번뇌(現行번뇌․習氣번뇌)를 끊는 것이 설해진다.
세존께서 “나는 과거 一切諸佛이다”고 하신 까닭은 일체제불과 네가지 평등(字平等․語平等․身平等․法平等)함이 있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무상정등각을 이루신 이후부터 열반에 드시기까지 一字도 설하지 않았다”, 또 “이미 설해 마친 것도 아니고 또한 설할 수도 없으며,
佛이 설한 것이라 하지 않는다”고 하신 뜻은 두가지 密法(自證法과 本住法)에 의지하는 까닭이다.
言說法相을 떠나 宗趣法相에 의지해야 한다.
허망분별상에 대한 질문에 대해, 일체가 自心所現이니 분별이 不生不滅인 것이나, 단지 범부가 自心의 제법을 분별하여 種種相에 집착하는 까닭에 그렇게 설한 것이라고 한다. 요컨대 여래께서 설하심은 心量(唯心․一心․無生이니 唯心, 唯心이니 無生) 뿐이다.
業을 採集함이 心識이요, 법을 관찰함이 智이며, 慧는 능히 無相을 증득하여, 自在의 威光에 이르게 한다.
외도의 아홉가지 轉變論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이들 見에 빠지는 것을 自覺케 한다. 일체법에 집착함에는 무수한 종류가 있으나, 이 가운데는 相續과 相續相이 없으며, 이 가운데는 얽매임도 없고 풀어나옴(解)도 없음을 밝힌다.
여래는 無始이래 有에 분별집착하는 중생 위해 寂靜法에서 聖智自性으로 설한 것임을 밝힌다.
일체제법이 不生(無生)이라는 가르침이 佛法의 大義이고要諦이지만, 이를 宗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이니, 왜냐하면 본래 있지 않은 까닭이며, 그 宗(‘一切法不生’)이 因이 되어 生相 즉 一切法不生이라는 법이 생긴 것이 되어 無生에 스스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自心所現임을 깨달으니, 지혜를 그 가운데서 얻을 수 없고, 얻을 바 없는 까닭에 번뇌의 불이 일어나지 않으며,
三解脫門 (空․無相․無願)에 들어智體 또한 잊는 것이다.
三世의 여래에게는 言說法과 如實法의 두가지 법이 있다.
언설법이란, 중생심에 따라 방편으로 설한 가르침이며, 如實法이란, 수행자가 心所現에서 모든 분별을 떠나, 四句(一, 異, 一而異, 不一而不異)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일체의 識을 뛰어넘으며, 自覺聖智의 所行境界에서 諸因緣相과 能․所의 取相을 떠나는 것이다.
世論(順世派 유물론), 세간의 논법등에 대한 모순을 드러내고, 조금이라도 心識의 움직임이 있어 대상을 분별하는 것은 모두 다 世論(外道)임을 강조하신다. 아울러 有란, 외도가 능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왜냐하면 바깥 법에 허망 분별하여 집착을 일으키는 까닭이다. 만약 일체 모두가 自心이 나타난 것임을 능히 了達하여 분별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바깥 경계를 취하지 않는다면, 自處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며, 自處에 머무른다는 것은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여래의 법이나니, 외도의 법이 아니다.
이는 수많은 외도의 가르침에 자칫 혼란을 일으키거나 빠지게 될 것을 염려하여 외도와의 궁극적인 차이를 드러내어 강조한 것이다.
여래 응정등각은 作도 아니며, 非作도 아니고, 果도 아니고 因도 아니며, 相도 아니고, 所相도 아니며, 說도 아니고 所說도 아니며, 覺도 아니고 所覺도 아니다.이러한 까닭에
일체의 量(헤아림,분별,인식)을 넘어섰으며, 일체의 量을 넘어선 까닭에 오직 언설만 있고, 오직 언설만 있는 까닭에 生이 있지 않으며, 生이 있지 않은 까닭에 滅이 있지 않고, 滅이 있지 않은 까닭에 곧 허공과 같음을 밝힌다.
단지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허공과 같다’란 말이 ‘곧 허공이다’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生滅이 없고, 作도 아니며 所作(만들어 진 것)도 아닌 허공의 측면이 곧 여래와 상통하기 때문에 비유로 말한 것일 따름이다.
부처님이 설하는 無生이 곧 여래이며, 意生身․法身은 그 異名이다.
일체 외도와 성문․독각․七地菩薩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함을 言明한다.
또한 第一義라 한 것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며 방편의 언설인데, 이를 文字따라 취하는 것을 경계한다.
여래가 설하는 不生不滅이 외도가 설하는 不生不滅․不生․無常論과 같지 않은 까닭을 설한다. 요컨대 외도가 설하는 것은 實性相이 있어서 이것이 不生不變한다는 것이다.
有無에 떨어진 이들과 달리 여래가 설하는 법은 非有․非無이고, 生과 滅을 떠났으며,- - - - - -, 三界唯心인 까닭이며, 能取․所取의 일체분별로 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며, 能造․所造를 분별하지 않는 까닭이다.
<現證品>
일체 聲聞 緣覺의 入滅 次第相은 能取와 所取에 떨어져 있어 諸法無差別相에 이를 수 없음을 言明하고,
諸菩薩地의 次第 경계상은 이와 어떤 면은 같고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자세히 설한 후, 모든 단계의 菩薩地와 佛地도, 오직 心 뿐이라 影像 없다는 것이 곧 삼세제불께서 설하신 바임을 言明하신다.
모두가 如來의 自在地인 까닭에 菩薩十地가 곧 初地이고, 初地가 곧 八地이며, 第九地가 곧 七地이고-------, 無相이라 位次가 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如來常無常品>
如來가 常인가 無常인가에 대한 질문에대해 여래는 常도 아니요 無常도 아님을 먼저 설명하고,
別義로서 또한 常이라 할 수 있음을 설한다. 요컨대 여래는 常과 無常을 멀리 떠나 있으면서 常과 無常을나타내는 것이니 항상 이와 같이 佛을 보아야 악견이 생기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刹那品>
보살마하살이 勝法(第一義諦)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여래장에서 藏識이라 이름하는 것을 淨化해야 한다. 제성문으로 하여금 法無我를 깨우치도록 하기 위해 승만부인과 그밖의 여러 보살에게 여래장에서 藏識이라 이름하는 것과 七識(1 ~ 7識)이 함께 일어나는 것임을 설한 것이라고 한다.
맨끝의 게송품에서 第九識인 암마라식이 단 한번 나오고 있으나, 앞의 경문에서 第九識의 실례는보이지 않는다. 단지 여기에서 보듯이 ‘여래장에서 장식이라 이름하는 것’이란 말로 양자를 구분하고 있다.
이어 五法自性의 하나하나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 이어 三性(遍計所執性․依他起性․圓成實性)․ 八識및 二無我 모두 이 五法 가운데 들어가며, 이들은 일체 불법을 두루 다 포섭한다고 한다.
진실여래는 心(第八識)․意(第七識)․意識(第六識)의 所見相을 뛰어넘어 있어, 그 가운데서 비유를 세울 수 없으나, 또한 때로는 語言을 건립하기도 하는 것임을 밝힌다.
여래장에서 藏識이라 이름하는 것고, 意(第七識)등의 諸習氣가 함께 어우러진 것이 찰나법이고, 無漏習氣는 찰나법이 아니다. 이 無漏習氣는 범부의 刹那論者가 능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요컨대 일체법에서 刹那想을 내지 말 것을 당부한다.
(六)바라밀에는 세간․ 출세간․ 出世間上上의 세가지 차별이 있음을 제시하고, 出世間上上의 六바라밀을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한다. <變化品>
아라한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授記하신 이유에 대해, 아라한이 有餘涅槃에 머무르지 않고 無餘涅槃을 얻도록 보살행을 은밀히 권한 것이라 하고,
그 授記는 化身佛이 應化한 성문에게 授記한 것이어서 法性佛이 授記한 것이 아니며, 화신불의 授記는 秘密說이라고 한다.
佛과 二乘․三乘이 차별없다는 것은 양자 모두 번뇌장을 끊어 解脫一味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所知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二乘(二乘과 三乘)에서는 所知障이 아직 남아 있다.
여래의 正知에는 妄念이 없어, 思慮한 연후에 설법하는 것이 아니며, 久遠 이래로 이미 四住번뇌를 끊었고, 二種의 死를 떠났으며, 二障을 제거하였다고 설하신 후, 化身佛과 眞實佛이 어떻게 구분되는가를 밝히신다.
끝으로 ‘自心分別은 그것이 本際인 까닭에 얻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 분별 떠나면 곧 해탈 얻을 수 있다고 천명하신다. 여기에서 本際란 能․所를 떠나 있어, 인식할 수도 없고, 인식의 대상도 얻을 바 없는 一心․唯心을 뜻한다. <斷食肉品>
이 品에서는 전체 내용이 모두 肉食을 해서는 안되는 이유로 채워져 있다. 육식을 금하는 강도와 열정이이 곳보다 더한 경론이 없을 것이니, 그야말로 구구절절하게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초기경전에서 소위 ‘세가지 청정한 고기’는18) 먹어도 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단번에 육식을 끊게 하기 어려워 임시방편으로 말한 것일 뿐이라 하고, 이 品에서는 이러한 ‘세가지 청정한 고기’란19)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초기경전의 그 말이 그 경우의 육식을 허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재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일찌기 세존께서는 육식을 허용한 적이 전혀 없으며, 어찌 허용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육식의 폐해를 낱낱이 들어 제시하고 있다. <陀羅尼品>
三世諸佛이 모두 설하신 두가지 楞伽經呪(능가경주)가 설해진다. <偈頌品>
이 偈頌品은 대부분 앞의 경문에서 설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지만, 새로운 내용도 있다. 그리고 그 분량이 앞의 경문의 약 30%에 이를 정도로 많다. 또한 앞에 나온 문장이나 字句를 그대로 옮겨 정리한 것이 라기 보다는 새로운 문장과 순서로서 새롭게 가다듬어 설하신 것이다. 앞의 경문이 108句를 하나하나 단편적으로 설명한 것이어서 통일성과 연결성이 부족한 것에 비해 이 게송품은 물흐르듯 이어가며 요점을 드러내고 있다.
<楞伽經>의 要諦(요체)는 이 게송품에 모두 갈무리 되어 있다 할 수 있으니, 이를 게송으로 다시 가다듬은 것은 이 要品을 암송하도록 하여 항상 受持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 게송품이야 말로 佛法의 요체가 일목요연하게 망라된 寶庫이며, 자랑이라 하겠다.
五 이상에서 각 品의 내용을 소개하는 뜻에서 간략히 요약하여 보았다. 경문을 이해한다면, 마음을 어디에 둘 바가 없고, 한 생각 일으킬 수도, 취할 바도 없다. 唯心이니 一心이고 無生이며, 無生이니 一心이고 唯心이라, 버릴 것도 취할 것도 따로 없는 것이다. 妄法에서 분별 떠남이 眞如라, 妄法에서 眞如를 따로 구하는 것이나, 따로 眞如라는 相을 내면 이것이 도리어 妄이 되는 것이다. 망상이다. 오직 일체법은 能․所를 떠나 있고 일체의 분별 떠나 있나니, 이것이 곧 決定義이다. 無生이고 一心이며 唯心이나니, 이 까닭에 일체법은 決定이다.
요컨대 <능가경>은 究竟의 決定義를 了達토록 이끄는 법문이다. 이 楞伽의 心義는 줄곧 禪家에서 지침으로 受持해온 바가 있다. 그러나 경문의 이해를 통해 이 心義가 제대로 터득되어 있지 않다면, 이 지침이 修禪에서 제대로 활용될 수 있을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않고
달그 자체를 볼 수 있을려면, 그 가르침의 心義를 통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 無生인가를 自心에서 명확히 了達하여야 無生이라는 法相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이며, 自心의 修行分上에서 지혜의 등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六
<능가경>에 대한 역대의 주요 주석서 및 연구서, 역서는 다음과 같다. . 龍樹菩薩 : <楞伽經釋論> 20) . 提婆菩薩 : <提婆菩薩破楞伽經中外道小乘四宗論> (<大正藏>第32卷) . 提婆菩薩 : <提婆菩薩釋楞伽經中外道小乘涅槃論> (<大正藏>第32卷) . 達磨大師 : <釋楞伽要義>1권 . 元曉 : <楞伽經疏> ․ <楞伽經料簡> ․ <楞伽經宗要> ․ <入楞伽經疏 > ․ <楞伽宗要論> -----현재 모두 失傳 . 초기 선종(능가종) 僧 12人 각각 <능가경>의 注疏 저술, 총 70여 권 -----현재 모두 失傳 . (唐)智儼 : <楞伽經注> (<新編漢文大藏經>1523), 一部만 現存(2권․5권, 전체 권수는 미상) . (唐)賢首法藏 : <入楞伽心玄義>一卷 (<大正藏> 第39卷) . (宋)寶臣 : <注大乘入楞伽經> (<大正藏>第39卷) . (明)宗泐 ․ 如玘 : <楞伽阿跋多羅寶經註解>(<大正藏>第39卷) . (宋)正受 : <楞伽經集註>(<4권경>의 集註임), (上海古籍出版社, 1993.9) . 작자미상 : <佛說楞伽經禪門悉談章> (<大正藏>第85卷) . 南懷瑾 : <楞伽大義今釋>(<4권경>의 釋文임) (北京師範大學 出版社, 1993․1995)
< 國 譯 > . 金栽根, <大乘入楞伽經(7권본)> (덕문출판사, 1978 ; 명문당, 1983) . 圓照覺性, <入楞伽經(11권본)> (도서출판 敎林, 1989.12) . 譯經委員會, <入楞伽經(11권본)> (<한글대장경>, 東國譯經院, 1993.5) 1) 달마대사가 二祖 慧可대사에게 心印을 전하면서 한 말 ; “이 <능가경>4권을 너에게 부촉한다. 이 경은 如來心地의 要門이며 모든 중생을 開示悟入하게 할 것이니라.” (<楞伽阿跋多羅寶經>의 蔣之奇 序文) 2) 소동파(소식)의 <능가아발다라보경>序 3) <續高僧傳>권제16習禪篇初僧可(惠可)傳. 4) 위와 같음. 5) 소동파(소식)의 <능가아발다라보경>序에 「달마조사가 二祖에게 부촉하여 말하길 “중국에 있는 經敎 가운데 오직 <능가경>4권이 印心할 수 있게 할 것이다” 한 이래 祖祖相傳하여 心法으로 삼았다.」 6) 「菩提師又爲坐禪中, 釋楞伽要義一卷, 有十二三紙, 亦名達摩論也.」 한편 이 글에 바로 뒤 이어, 이 <달마론>을 僞造한 3권본의 책이 있고, 그 글이 번잡하고 理가 산란하여 의거하여서는 안될 것이라는 당부의 말이 있다. 7) <大正藏>에 수록된 <續高僧傳>은 권제21 이하의 卷數 표기가 실제 순서와는 어긋나게 되어 있어 卷數를 인용하지 아니하고 <속고승전>의 분류 篇名 만을 기재한다. 8) <楞伽師資記>․<傳法寶記>에 대한 자세한 해설과 원문 및 그 해석은, 柳田聖山 著,楊氣峰 譯 <初期禪宗史 --능가사자기 전법보기-->(김영사, 1990) 참조. 또 하나의 주요 자료인 <역대법보기>는 同著 同譯의 <초기선종사2>(김영사, 1991)에 원문과 해석 해설이 실려 있음. 9) <능가경>에는 세가지 역본이 있고(후술) 원효대사 在世時에는 제일 나중에 나온 <대승입능가경>은 아직 나오지 않은 때였다. 따라서 <대승기신론소>에서 인용하고 있는 <능가경>은 그 이전에 나온 <능가아발다라보경>과 <입능가경>이다. 원효대사는 어느 곳에서는 前者를, 어느 곳에서는 後者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부분의 두 경문 가운데 잘 되어 있는 쪽을 고른 때문으로 생각된다. 10) 賢首法藏은 丹陽의 祗洹寺에서 번역하였다고 한다. <入楞伽心玄義>(<新修大藏經>第39卷,p.430) 11) 위와 같음 12) 위와 같음 13) 賢首法藏에 의하면 이 때 梵本5種과 두 漢譯本을 참조하였다고 한다. 이 五種 가운데는 實叉難陀의 初譯을 교감하게 되는 彌陀山이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梵本도 포함된다. 앞의 <入楞伽心玄義> 14) 위와 같음 15) 吐火羅國 : 六朝時代 西域에 있던 나라. 16) 于闐國(우전국 Kustana) : 또는 우치․우둔․계단․굴단․구살단나․홀탄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중국 신강성 화전지역이다. 서쪽으로는 인도서북부의 대하․안식국과 동으로는 중국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대품반야경>․<열반경>․新․舊의 <화엄경>․<법화경>등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들을 중국에 전래 하였다고 한다. 17) 이와는 달리 이밖의 두세곳에서 共相은 소나무․돌․집과 같은 군집명사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소나무 한그루 한그루는 自相인데, 어느 한 소나무를 볼 때 동시에 ‘소나무’라는 共相이 함께 어울려 인식되는 것을 말한다. 18) 세가지 청정한 고기 : 그 고기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은 것, 죽이도록 하지도 않은 것, 얻고자 한 것도 아닌 것, 또는 不自死․不他死․不疑殺, 혹은 不見․不聞․不疑 19) 세가지 청정한 고기 : 그 고기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은 것, 죽이도록 하지도 않은 것, 얻고자 한 것도 아닌 것.또는 不自死․不他死․不疑死의 고기 20) 賢首法藏의 <入楞伽心玄義>에 「또 전하기를, 인도에 현재 용수보살이 지은 釋論이 있다고 한다」고 하였다. <大正藏>제39권, p.430
용수보살은 또 <釋摩訶衍論>(<大正藏>제32권)에서 <능가경>의 많은 부분을 자주 인용 해설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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