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탐방과 애국지사들의 민족정신 체험 / 김찬일
조선조 왕궁인 경복궁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 줄기 산자락에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이 있다. 지하철로 독립문 역에 내리면 바로 서대문형무소 담장이 보인다. 붉은 벽돌로 튼튼하게 높이 쌓은 담장 따라 매표소 입구로 간다. 죄수들의 탈출을 감시하는 큰 팔각기둥 모양의 망루를 지나면서 우리나라 근 현대사가 뇌리에 돌개바람을 일으킨다.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고 우리나라를 발판으로 만주와 중국까지 점령하고자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1875년 4월과 9월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이것을 빌미로 1876년 2월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어 침략의 발톱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조선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와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이 곤궁해 지면서 1984년 무력에 의한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조선조정은 어이없게도 농민군에게 연전연패 전주까지 빼앗기자, 당시 종주국이던 청나라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일본도 질세라 군대를 파견,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1894년 1895년 1년간 전쟁에서 청나라는 완패하여 굴복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조선은 일본에 넘어간다. 당시 청나라 이홍장은 일본을 격파하기 위해 일본함대 보다 훨씬 우수한 북양함대를 창군했으나, 해군의 훈련과 포탄 부족으로, 풍도해전 황해해전 위해해전에서 참패한다. 북양함대가 바다 속으로 사라진 것은 순전히 청나라 지도부의 무능과 부패, 신무기에 대한 전술의 미개발에 기인한 것이다.
청일전쟁을 승리한 일본에게 역사 이래 숙적인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까지 합세 간섭하자, 일본은 이에 굴복한다. 이것이 “삼국간섭”이다. 그 후 일본은 조선에서 주도권을 다시 잡기 위해 1895년 경복궁을 습격하여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이 사건으로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이 “아관파천”이다. 일본은 조선침략의 최대 장애가 러시아 인 것을 알고 다시 러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한다. 그 결과 영일동맹의 개정,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고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한다는 미일의 가쓰라 - 태프트 밀약, 그리고 러시아와 맺은 포츠머스 강화조약 등으로 열강으로부터 조선의 지배권을 사실상 인정받는다. 서구 열강의 간섭이 없어지자 1905년 일본은 궁궐에 무장군대를 보내 을사늑약을 체결, 조선을 보호국으로 한다. 고종은 이를 무효화하기 위해 헤이그에 비밀 특사를 파견했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 사건으로 오히려 퇴위를 당하고 순종이 대한제국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제 더욱 꺼릴 것이 없어진 일본은 조선 군대를 해산시키고 국내정치까지 장악한 뒤, 결국 1910년 대한제국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넘긴다는 한일합병 조약문을 강제로 체결, 대한제국은 주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격변기를 거치면서 조선말기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야욕과 을미사변 단발령으로 분노한 백성들이 1896년 1월 궐기하여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이를 을미의병이라고 한다.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어난 을사의병, 그리고 고종 폐위와 군대 해산으로 일어난 1907년 정미의병, 1908년 13도 창의군이 서울을 되찾기 위하여 진격하였으나 실패하고 그러나 그 후 계속하여 의병전쟁은 1910년까지 이어졌다.
이에 일제는 우리나라의 독립의지를 꺾기 위해 1907년 평양 대구 공주 해주 광주 진주 함흥에 지역 이름을 딴 감옥을 세웠다. 서울에는 경성 감옥을 세웠는데 이것이 서대문형무소의 시작이다. 1923년 서대문 감옥이 서대문 형무소로 바뀌고 1945년 해방 전까지 23년간 서대문 형무소는 독립지사를 혹독하게 탄압한 상징적인 명칭이 되었다. 이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둘러보면서 우국지사들이 받았던 피의 고통과 억울했던 여한을 체험해 본다.
정문에서 바로 마주보이는 2층 건물이 보안과 청사인데 현재 전시관으로 아용되고 있다.
보안과 청사 1,2층은 행정을 보는 사무실과 창고 무기고가 있었고, 지하에는 취조실이 있었다. 지하 취조실로 내려가 본다. 일경이 독립지사를 취조하면서 잔인한 고문을 가한 지옥 같은 곳이다. 잔인한 고문의 사례를 보면 『물이 있는 욕조에 강압으로 머리를 집어넣거나, 독립지사를 거꾸로 매달고 코나 입에 물을 부어 숨을 쉴 수 없도록 하는 물고문』이 있다. 그리고 『날카로운 꼬챙이를 손톱 밑에 찌르는 고문과 심지어 입안을 꼬챙이로 찌르는 고문』도 있다. 또 『크고 날카로운 못이 가득 박힌 상자에 독립지사를 넣고 마구 흔들어 온몸에 못이 박히도록 하는 고문』도 있고, 『벽에 세워져 있는 좁은 관에 독립지사를 오래 가두어 앉거나 움직일 수 없는 고통을 주는 벽관의 고문』도 있다. 게다가 수형자들을 괴롭혔던 수감도구, 요(3m길이 쇠사슬에 5kg 쇳덩이를 달아 수감자가 사역할 때 도망을 막기 위해 허리에 채움), 수갑(손목에 채웠던 철재 수갑), 용수(감옥을 옮길 때 얼굴을 가리는 머리에 씌운 기구) 등을 관람한다. 이러한 고문은 너무나 비인간적이며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잔인하고 악독한 방법이었다. 의당 고문의 후유증으로 불구가 되거나 순국하는 독립지사가 많았다.
다음은 중앙사와 옥사로 간다. 중앙사는 1923년에 지어진 2층 건물로 적은 인원으로 많은 수형자를 감시하기 위한 곳이다. 옥사는 중앙사를 중심으로 10, 11, 12옥사를 부채꼴 모양으로 빙 둘러 지었다.
그리고 옥사에는 양쪽으로 감방이 나란히 있고 각 감방 벽에는 시찰공과 패통이 붙어 있는 데, 간수가 감방안의 죄수를 감시하기 위한 것이 시찰공 이고, 감방안의 죄수가 일이 생겨 간수를 부를 때 패통을 눌렸다고 안내에 적혀 있다. 감방 안에 들어 가본다. 몇 평되기 않는 작은 방에 바닥은 마루이다. 일제 때는 한방에 수 십 명이 갇혀 누울 자리가 없어 교대로 잠을 잤다고 한다. 게다가 변기통을 감방 안에 두고 배변을 보도록 했기 때문에 특히 여름에는 가스가 차고 전염병이 돌았다. 그야말로 지옥도이다.
식사도 그 양이나 질이 아주 나빠 죄수들은 늘 배고픔에 허덕여야 했다. 죄의 질이나 노역의 종류에 따라 1등급에서 10등급까지 밥 양을 정해서 “가다”라고 하는 통에 밥을 찍어 주었는데 그것이 가다 밥이다. 이런 옥중생활로 병에 걸리거나 죽는 죄수가 많았다.
다음 공작사 건물로 간다. 공작사는 서대문형무소내의 공장건물이다. 죄수들이 밤에는 감방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공작사에서 주어진 일을 했다. 일제는 공작사에서 다양한 물건을 만들어 공급했다. 전국 형무소의 죄수복과 교도관복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거의 만들었다.
다음에는 9옥사로 간다. 9옥사는 중앙사와 동떨어져 있는 건물로 독립지사들을 특별히 감시 감독하고 전향시키기 위한 옥사로 둘러보고, 조금 높은 곳에 독립적으로 있는 한센병사로 간다. 한센 병이나 전염병을 앓고 있는 죄수를 따로 가두기 위한 감옥으로 큰 감방하나와 작은 감방 두 개가 있고, 그나마 난방을 할 수 있는 아궁이가 있어 병사로서 기능을 엿 볼 수 있다. 한센병사를 지나면 사형장이다.
사형장은 높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여 안팎이 분리되어 있다. 사형장 입구에는 큰 미루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사형장으로 가는 사형수들이 붙들고 통곡한 나무로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부르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1923년에 지어진 사형장 건물이 있고, 이곳에서 많은 우국지사들이 원한을 품고 순국했다. 현재는 사적 3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형장 내부는 배심원들의 의자가 있고, 사형은 교수형으로 집행 됐다. 시신은 지하실에서 수습되어 시구문을 통해 공동묘지로 운반 매장했다.
하루 중 단 30분 동안 운동을 할 수 있는 격벽장을 둘러본다. 격벽장도 입구에서 반원을 그리며 담을 쌓아 감시와 통제가 수월토록 했다. 다음은 오늘의 마지막 관람인 여옥사로 간다. 일제가 여성 애국지사들을 가두었던 곳으로 지상 1층 지하 1층으로 되어 있다. 지하에는 여러 개의 독방이 있었는데 입구의 방이 유관순 열사가 갇혀 순국한 곳이다. 유관순 열사 외에도 많은 여성 애국지사가 여기서 희생되었다. 그 사적은 나의 마음을 갈래갈래 찢어 놓는다.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조국을 위해 희생한 그 원통한 넋에 어떤 위안의 기도를 해 드려야 할 것인가. 고개를 숙여 잠시 묵념을 한다.
탐방을 마치고 주차장에 나온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너무 행복하다. 풍요로운 물질과 자유를 만끽하며, 세계로 뻗어가는 우리의 국력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2022년 음력설에는 수십만이 넘는 한국인이 외국 관광을 나갔다고 한다. 조상을 모시는 설날에 외국 나가니까. 우리 조상들의 혼백도 외국 관광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대단한 기세로 한류가 요동을 친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행복이 애국지사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가능 했을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본다. 오후의 서울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비가 올려나. 아름다운 서울이며 애국지사의 아픈 영혼만은 꼭 기억하고 편안하게 모셔다오. (끝)
첫댓글 심후섭 이사장님. 잘계시죠. 김찬일의 원고 제출합니다.
잘 살펴 봐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