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년
왕이된태종
이방원은
얻을것을
다이루었고
더이상
정적이없는
상태라
칼날을
자신을
도와
왕이되도록
힘써준
처가로
향했다
사실
처가민씨
형제들의
세력이
너무커진
상태라서
이방원은
자식들이
왕권을
이어받는데
위태로울수
있고
자신도
왕자의
난들을
겪어면서
이런
생각들을
굳혔다
이복
동생들과
형등
정적들을
죽여가면서
이룬
왕권이기에
다른
사람들도
믿을수가
없었고
특히
인척과
처가를
적으로보고
철저한
배척을
시작했다
현대로
보면
처가의
도움을받아
회사의
대표가된후
처가
인척들을
똥가리
시키고
회사비서나
점방
괜찮은
여직원들과
바람이
나는
형국과
비슷한데
그만큼
민씨와
민씨의
친정가문의
도움이
지대했다
이방원이
취한행동은
첫째는
후궁제도
였는데
특별히
후궁
간택제를
법으로
만들어
합법화했다
대놓고
바람을
피우겠다는
거지
많이컷네
두번째로는
처가의
세력이너무
강하여
왕권강화를
위해
토사구팽을
실행하는데
원경왕후
민씨의
남동생들인
민무구와
민무질
민무휼
민무희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원경왕후
민씨는
둘째딸로
첫딸은
조박에게
시집갔고
셋째딸은
우의정
노환에게
출가
한것으로
알려져있다
처가의
힘이
너무강하여
방원에게도
부담이된
모양이다
태종이방원
본인도
피로세운
자리라는걸
잘알기에
원경왕후의
반대에도
매몰차게
민무구와
민무휼을
제거한다
태종10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무휼과
민무회도
제거
태종16년
하게되는데
이방원을
도와서
정몽주
제거와
왕자의난때
생사를
같이했던
민무구
형제들은
모두
이렇게
죽고
외가는
거의
멸문이
되어
정치에서
사라진다
이렇게
이방원의
처가는
장인
민제도
1408년
노환으로
떠나고
장모는
1424년
세종6년
별세하여
부부가
합장되었다
원경왕후
민씨의
본가는
고려
세도가이고
외가는
기황후
인척들로
민씨일가의
가문을
짐작
할만하다
태종이
쪼라를
탈만했네
이방원도
처가살이를
하면서
처가의
가풍과
위세를
잘알기에
왕위쟁탈
까지는
동지고
이후는
적으로
보았다
이런
악연이
겹치면서
원경왕후와
태종
이방원
사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방원의
나이
33세에
왕위에
오르는데
원경왕후
민씨는
두살
위이니까
35세가
된다
동고
동락을
같이 하며
왕만된다면
행복할줄
알았는데
남편이
왕이된후
지옥의문을
열줄이야
도시
처녀가
시골
촌놈이
좋아
그렇게
사랑했는데
생사를
넘나들면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남동생들과
본가의
운명을
걸고
모든것을
도와가며
가진
모든
지략을
동원했었고
사랑했는데
왕이
되고나니
인간이
백팔십
도로
바뀌었다
인간이
갈데하고
갔다
올때하고
마음이
같겠나
왕이된후
외척
세력을
제거한다고
동생들을
핍박
하더니
다죽이고
이젠대놓고
중전의
몸종들과
놀아나고
후궁들을
일년
단위로
뽑아서
놀아난다
살판난거지
이런일로
박터지게
싸우다가
또화해하고
합방하고
하하
엄마없이
잘들놀고
있네
사실
민씨와
이방원은
다른
후궁들과
달리
거의동등한
관계로
정치적
동반자이고
본처이고
죽도록
미워하지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사이이기도
하다
이렇게
박터지게
싸워도
자식사랑
에는
의견이
찰떡같이
맞고
지극하다
그러나
권력은
절대로
나누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효빈으로
들어온
김씨는
원경왕후의
몸종
이었는데
왕이된
2년후
1402년에
강녕군을
낳았고
후일
이들모자를
핍박한
죄를물어
중전의
남동생인
민무휼과
민무회를
숙청했다.
신빈
신씨도
원경왕후의
몸종으로
태종의
눈에띄어
후궁이
되었는데
3남7녀를
낳아
태종의
가장많은
총애를받은
여인이다
하하
인간이
언제
될라카노
원경왕후가
이런
사실을안후
악명을
표출하려
할때
또다른
나인과
하룻밤을
보냈다는
소식을듣고
효빈도
아니고
선빈도
아니고
저번
그
신상궁
아이도
아닌
뭐
나인하고
기가
막혔다고
한다
본처의
몸종들을
탐하는것도
흥미를
잃었는지
이번엔
아예
후궁제도를
정비하고
간택령을
법으로
만들어
당당하게
탐하기로
했다
하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제명에는
못죽겠다
선빈
안씨는
궁녀인데
태종의
눈에잡혔다
잡혔으면
끝난거지
의빈
귄씨는
간택령에
의해
간택된
후궁이다
숙의
최씨도
간택후궁
이다
소빈
노씨도
간택후궁
이다.
안씨
최씨
이씨등등
공식적인
마누라가
10명이다
조선의
왕은
모두27명
이었는데
후궁은
모두
175명
이었고
이방원의
후궁이
19명으로
최대이고
그다음이
광해군
14명
등이다
왕이된후
왕의
부부
관계는
나이지극한
9명의
숙직상궁
들이
각각의
옆방에서
감시하는
상태에서
종묘사직을
위해
후손생산
이라는
미명아래
진행
되었다
서로
애틋한
시절은
지나버린
과거가
되어버렸다
영화
촬영장에서
수십대의
카메라와
스텝들이
보는앞에서
러브씬을
찍는
배우들과
거의
비슷했다고
하니
왕비나름의
공로를
인정
해달라고
싸우고
후궁제도를
식음을
전폐하고
대항했지만
태종의
후궁들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가고
시기와
투기로
몰아가
한해에
한명씩
후궁들을
들이고는
후궁정치를
했다
그래도
원경왕후가
40살이
넘어서도
자식을
3명이나
낳았는데
마지막
요절한
공주는
민씨의
동생들이
죽고난후에
낳은
자식이라서
싸우면서도
서로
부부관계는
하는
그런애증의
사이였던것
같다
언제
인간될련지
그래서인지
조선왕실
에서
왕과의
사이에서
가장
자식을많이
낳은
왕비가
원경왕후
이다
조강지처인
원경왕후가
병으로
55세로
떠나고
2년뒤
태종도
54세로
같은묘지인
쌍릉에
뭍혔다
원경왕후의
지극한
자식사랑과
태종이
나라에
기틀을
마련하고
그아들
세종이
나라를
훌륭하게
꽃피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