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대떡’의 어원과 유래
빈대떡의 어원과 유래에 대해서는 대략 3가지 가설이 있다. 하나는 빈대떡이 ‘빈자(貧者)들의 떡’이라는 데서 ‘빈자떡’이 ‘빈대떡’으로 불렸다는 설이다. 사실 빈대떡은 일제강점기를 비롯해 해방 후 남한의 서민들이 주점에서 안주로 먹는 대표적인 음식이었다.
다른 설 하나는 예로부터 잔치에 빈대떡은 필수였고 그래서 손님을 대접한다는 의미로 ‘빈대(賓對)’떡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해방 후 종로나 남대문 일대의 빈대떡집에서는 백지나 신문지에 한자로 ‘賓對떡’이라 써서 붙이기도 했다.
마지막 세 번째 설은 밀가루를 기름에 지진 중국 전병을 조선시대에서는 ‘빙쟈’라고 불렀고, 그러한 빙쟈가 ‘빈대’가 됐다는 설명이다. 중국어 학습서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1517년)에는 ‘빙져 餠(병)’이라는 해석이 등장한다.
조선시대 <음식디미방>에서는 녹두를 갈아 기름에 부치는 병자(餠子)법에 관한 설명이 있다. 현재까지 이 ‘빙쟈떡>빈대떡’론은 가장 권위 있는 설로 통한다.
▲ 맷돌을 이용한 비지와 두부의 역사가 빈대떡의 비밀이다 |
하지만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빈대떡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존재한다. <음식디미방>이나 다른 기록에서 보이는 빙자(餠子)는 오늘날 우리가 즐겨먹는 푸짐한 빈대떡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빙자에는 돼지고기나 숙주나물과 같은 것이 들어가지 않고, 녹두 간 것에 팥소를 넣어 지진 후 제사상 고배(高杯)에 고기를 놓는 받침으로 사용했다. 이로부터 우리는 오늘날의 빈대떡과 빙쟈떡이 처음부터 다른 음식으로 발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오늘날 빈대떡은 냉면과 함께 이북 평안도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그런데 정작 북한에서는 이 음식을 빈대떡이라고 부르지 않고 ‘녹두지짐’, 또는 ‘부침개’, ‘지짐이’로 불렀다는 사실이다. 모양과 크기, 재료도 해방 후 남한의 서민들이 먹던 빈대떡과는 다른 존재였다.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언어학자 이기문 서울대 교수는 이 점을 항상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해방 후 서울에서 처음으로 녹두지짐을 ‘빈대떡’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썼다.
그러면서 이기문 교수는 빈대떡의 어원을 추적하다가 도대체 이 음식이 언제 어떻게 남한에 전파됐는지를 알아야 어원이 풀릴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러면 이상하지 않은가. 오늘날 돼지고기와 숙주와 야채들이 들어간 푸짐한 웰빙 빈대떡은 결코 ‘빈자들의 떡’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빈대떡의 ‘빈대’는 빈대골의 빈대도, 가난한 빈자(貧者)도, 손님을 접대한다는 빈대(賓對)도, 그리고 팥을 소로 넣어 제사상에 고기받침으로 썼던 빙쟈(餠子)도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는 잠시 고구려 시대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빈대떡은 고구려 음식일까?
고구려에서는 콩을 비(非)라고 불렀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편에 등장하는 압록강 이북에 있는 고구려의 대두산성(大豆山城)는 원래 명칭이 ‘비달홀(非達忽)’이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비지’라는 말이 콩과 관련된 말이라는 것을 간파한 학자가 있었다.
바로 <국어어원사전>을 출판한 서정범 교수였다. 그는 비지가 ‘비+지’로 된 말이며 이때 ‘비’는 고구려어로 콩을, ‘지’는 먼지나 귀지에서처럼 ‘부스러기’일 수 있다고 봤다.
사실 콩을 갈은 것이 비지라면 정확하게 들어맞는 해석이었다. 더구나 콩을 뜻하는 고구려어 비(非)는 역시 콩을 뜻하는 몽골어, 위구르어와 동원관계를 갖는 ‘bur/bir’과 같았다
▲ 고구려 고분 벽화 속의 식사 콩은 고구려의 주요 식품이었다 |
필자는 서정범 교수의 해설로부터 ‘빈대떡’의 어원에 상당한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콩에 관한 한 고구려가 중국으로부터 한 수 배울 것이 없었다는 점 때문인데 오늘날 메주콩이라 불리는 대두(大豆)의 최초 재배지가 중국 동북부, 즉 길림성과 같은 만주지역으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주지역은 야생 콩들이 가장 다양하게 자생하고 있으며 길림성에서 발견된 탄화된 재배 콩의 기원은 약 3000년 전으로 소급된다. 그렇다면 이 지역의 강자였던 고조선과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콩을 활용한 요리가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실제로 만주족들은 콩을 삶아 말안장 아래에 깔아놓고 다니며 먹었다. 다름 아닌 청국장의 기원이다.
고구려의 콩음식과 두부
고구려의 주요 음식에도 장(醬)이 있었다. 쌀과 밀이 부족했던 고구려 산악지형의 여건에 비춰 볼 때 고구려의 장(醬)은 콩이 매우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아울러 한국의 된장 ‘메주’(meju)와 일본의 된장 ‘미소’(miso)간에 존재하는 어원적 동계성은 이미 여러 학자들에 의해 자세히 연구된 바도 있다. 그렇기에 ‘메주’가 콩의 나라, 고구려에서 탄생했을 거라는 추정도 생각해 볼 만하다.
그렇다면 콩에 관한 한, 고구려에서는 ‘비지’의 제조 방법도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만일 콩을 삶아 으깬 비지가 고구려의 음식이었다면 이제 이 비지를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지질 경우를 생각해 보자. 즉 중국의 전병(煎餠)처럼 만드는 방법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콩지짐을 고구려는 무어라 불렀을까.
앞에서 기술한 바대로 콩은 고구려어로 비(非)였다. 이 비(非)의 상고대 한자음을 한어고음(漢語古音) 사전을 통해 확인하면 꼬리자음이 달린 ‘bi-d’와 같다. 따라서 이제 콩지짐은 고구려어에서 ‘bid-’로 시작되는 말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의’와 같은 조사가 개입하면 ‘콩+의~’라는 말의 고구려 어형은 ‘bid+ei~'와 비슷했을 것이다. 즉 ‘비듸~’로 들리는 말이 바로 고구려인들이 ‘콩으로 만든~’ 음식을 지칭하는 어두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떡이 붙으면 ‘비듸-떡’이 된다.
이 ‘비듸떡’은 구개음화 되기 쉬운데 아마도 ‘비지떡’이라는 다른 존재와 혼동되지 않기 위해 음운이 첨가돼 ‘빈듸떡’이 됐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추론해 보자.
하지만 ‘빈듸’와 같은 어간에 대한 이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민속어원적인 해석이 가해지게 된다. 그래서 ‘빈듸’와 같은 말은 ‘빈대’로 통용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고찰이 타당하다면 이제 우리는 한자로 두부(豆腐: 썩은 콩고기)라는 것이 오히려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콩음식을 중국인들이 민속어원적으로 쓴 표시는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중국에서 두부에 대한 기록은 의외로 짧다.
중국에서 두부에 관한 최초의 문헌은 오대(五代) 말부터 송나라 초기(서기 약 960년경) 도곡(陶穀)이 쓴 <청이록>이다. 두부라면 사족을 못 쓰는 중국인들치고는 두부의 공식적인 기록이 이렇게 늦게 나타난다는 사실이 매우 의아하게 생각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떨까. 한국 문헌에는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 이색(李穡)의 <목은집>에 등장한다. 우리 역시 두부에 대한 기록은 짧다. 그런데 두부를 제주도 방언에서는 ‘둠비’라고 하고, 함경도에서는 ‘드비’ 경북에서는 ‘디비’라고 한다.
또 ‘조피’, ‘조패’라는 방언도 있다. 이런 어휘들은 중국의 두부(豆腐)로부터 차용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tu-fu’라는 모음조화가 이뤄진 외래어가 모음조화를 지키는 알타이어적 특성의 한국어에서 모음조화가 파괴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비(非)가 고구려어로 콩이라는 사실을 견지한다면 이 모든 말들은 ‘두부’의 발생처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열어 놓게 된다.
2011년 미 오레곤대학의 고고학팀은 경남 진주에서 약 4200년전 탄화된 메주콩, 대두를 발굴했다. 조사 결과 그 탄화된 대두의 크기는 이제까지 발굴된 것 가운데 가장 작은 크기였고 야생종에 가까웠으나 분명히 재배종이었다.
한반도에서 콩의 재배가 중국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중국 신화에서 콩은 농업의 신 신농(神農)이 전해줬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중국 한족(漢族)들이 스스로 조상으로 생각하는 농업의 신은 다른 존재다. 바로 후직(后稷)이라는 주왕조(周王朝)의 조상신이다.
시대적으로는 BC 2500년을 넘지 않는다. 후직은 사람들에게 농사를 짓는 법을 가르쳐 주고 오곡을 재배하는 방법을 알려줬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농업의 신 신농(神農), 다른 말로 선농(先農)은 누구의 신인가? 오늘날 중국학자들이 골머리를 앓는 질문이다.
출처;역사정책연구소 글슨이 스토리
자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