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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치료의 명암
배정규, 김연수 (2013). 잡초인생, 저서의 5장
“정신장애는 병 자체보다 병의 결과를 극복하기가 더 어렵다.
(William A. Anthony)
입원치료
1. 어느 당사자의 수기 : '삶이 무너진 과정'
이종찬이 자랑한다. “솟대문학 홈페이지 수필 난에 ‘삶이 무너진 과정’이라는 수필을 올렸는데 제 글이 조회 수가 제일 많아요.” “그래? 출력해 와봐. 안 그래도 첫 발병에 대한 거 써야하는데 보고 괜찮으면 내 책에 실어줄게. 이종찬 글이라고 써 줄게.” 1쪽 분량이다. 첫 발병까지의 얘기는 대강 이렇다.
“주위엔 친구들이 공부하고 있다. 대학을 준비하는 친구는 학원과 도서실에서 쳇바퀴 돌듯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다. 다른 친구는 단지 졸업만이 목표다. 이 둘 사이에서 나는 고민했다. 갈라진 교실의 분위기에서 나는 선생님 말씀에 순종했다. 음악시간에도 영어단어를 외웠다. 경북대 건축공학과 오직 그 목표뿐이었다. 전교조 하시던 선생님이 전교조를 탈퇴하고 무릎 꿇고 학교로 돌아왔다. 실망했다. 학교교육이 참되지 못하다 생각했다. 이기적 엘리트를 만드는 교육일 뿐이다. 수업시간에 손을 들고 선생님께 ‘전교조에 가입하여 참교육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주장했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창밖으로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공간을 자유로이 날다가 사뿐히 내려앉는 모습이 그나마 답답한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집에 돌아오며 친구에게 말했다. ‘이 저녁은 유난히 쓸쓸해. 그지 친구야.’ 껍데기만 가르치고 오직 대학이 목표인 학교에 환멸을 느꼈다. ‘인생에서 느끼고 경험하며 마음에서 우러나는 글을 적어야겠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학교를 그만뒀다. 도서관과 집을 오가며 온종일 공부했다. 어머니와 말다툼이 잦아졌다. 내 행동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렇게 1년을 버텼다. 내 행동을 감당하지 못하신 어머니가 결국 나를 강제입원 시켰다.”
이종찬에게 물었다. “내용이 너무 간략해. 왜 학교를 그만뒀는지? 왜 입원 당했는지? 짐작은 되지만 글만 읽어서는 잘 모르겠네.” “어머니가 미웠어요. 말을 안 하고 지냈어요. 2학년 겨울에 공부를 안했어요. 일부러.” “왜 안했지?” “어머니를 시험했던 거 같아요. 내가 삐딱하게 나가면 어떻게 나올까?” “그래서?” “겨울 방학 내내 공부를 안했더니 성적이 뚝 떨어졌어요.” “그래서?” “교재가 필요했어요. 돈 없다며 안 사줘요. 교재가 없어서 1달 동안 공부를 못했어요. 처음에는 친구들 교재 빌려봤는데 친구들이 교재를 안 빌려주고 오히려 경계해요. 공부한다는 게 이런 건가? 실망감이 들었어요. 선생님께도 실망했어요. 공부 잘하는 학생들만 챙겨요.” “그랬구나.” “학교 그만 두겠다 하니, 어머니가 내 말 안 믿어주고, 책도 안 사주고, 용돈도 안 주고, 때리고.”
아내 생각이 났다. 둘째 애가 학교 다니다 선생님께 실망했다. 선생님이 학생들을 차별한단다. “배울 게 없어요. 학교 그만두고 검정고시 칠래요.” 아내가 가슴이 철렁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해도 돼. 그런데 하나만 부탁할게. 1달만 생각해보자. 1달 뒤에도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 그러고는 1달 동안 지극정성으로 공을 들였다. 애가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목욕시켜주고 안마해줬다. 학교 일로 화 부리고 선생님을 비난하면 “그래 속상했겠다. 뭐 그런 선생님이 다 있나?” 하며 그 얘기를 다 들어줬다. 그렇게 그 위기를 넘겼다.
이종찬에게 물었다. “엄마가 언제부터 미웠는데?” “엄마는 항상 돈! 돈! 했어요. 내가 속으로 ‘돈만 아는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빨리 독립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실업계 고등학교 가겠다.’했어요. 그때는 인문계와 실업계의 차이를 잘 몰랐으니까. 그때도 엄마는 몇 날을 때리면서 화를 냈어요. 결국 제가 굴복했죠.” “그랬구나. 엄마가 늘 미웠구나. 그래도 뭔가 일이 있었으니 강제입원 당했을 텐데. 증상이 뭐였는데?” “엄마가 돈 안 준다는 순간에 화가 나서 문을 발로 차서 부쉈어요. 경찰이 와서 병원에 강제입원 됐어요.” “뭔가 다른 증상도 있었을 거잖아. 환청이나 망상 같은 거.” “그런 건 없었어요.” “진단이 뭐로 나왔는데?” “진단서에 보니까 불안, 우울, 편집, 가정 내 폭력성 있음. 그렇게 되어 있었어요.” 더 물어봐도 엄마하고 싸운 것 이외의 다른 증상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눈빛이 슬프다. “왜? 슬프나?” “엄마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강요만 하고 들어주지 않아요. 엄마는 늘 힘들어 했어요. 지금도 현실적인 욕심쟁이예요. 엄마는 ‘남한테 자기 거 1%라도 주는 사람은 쇼다.’라고 해요. 나보고 ‘너도 이제 건강해졌으니 돈도 벌고 건강한 사람 만나야지.’라고 해요.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각박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 내가 변해야 하는지, 엄마가 변해야 하는지. 내 식대로 하자니 엄마와 부딪히고.” 잠시 한숨을 쉰다. 20년 세월이 지났어도 엄마의 태도는 여전하신가 보다. 그래도 5년쯤 전부터 엄마도 많이 바뀌시긴 했단다.
2. 발병과 첫 입원 : 낯설고 혼란스러운 경험
병은 갑자기 오기도 하고 서서히 오기도 한다. 발병과 첫 입원은 당사자들에게 낯설고 혼란스러운 경험이다. 한 당사자는 자신의 첫 발병을 이렇게 기억한다.
“대학 2학년 때였어요. 제가 좋아하던 오빠가 있었어요. 그 오빠는 성당 주일학교 담임, 저는 부담임 그랬죠. 우리 둘이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같은 성당 다니던 언니가 그 오빠를 가로채갔어요. 속이 많이 상했죠. 예전에 살던 동네에 갔어요. 아래로 내려다 보니 바닷물이 까만 먹물로 보여요. 그냥 발을 디뎌도 빠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뛰어내리려 했는데 ‘멍멍’하는 개소리에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개가 나를 구출해줬네.’ 생각했어요. 언덕을 올라가는데 주변이 깜깜해요. 공동묘지도 보였어요. 저 멀리 불빛이 보여서 불빛만 보고 걸어 올라갔어요. ‘불빛 하나는 천국이고 깜깜한 건 다 지옥이다.’ 생각했어요. 올라가보니 성당이었어요. 그런데 기도해도 안돼요. 힘들고 괴로웠어요.” “많이 힘들었구나.”
“예. 당시에 많이 힘들었어요. 학교까지 거리도 멀었고, 성당 유치부 부담임도 하고, 엄마 식당에서 서빙도 도와야 하고.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한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기력이 쇠해 있었어요. 하루는 학교 가다가 지갑을 날치기 당해서 당황했어요. 지하철을 탔는데 어디로 가는지 헷갈리고. 어떻게 간신히 집에 왔는데 텔레비전 방송에서 내 말을 하는 것 같았어요. ‘엄마! 텔레비전에 내 나온다.’ 하니, 엄마가 ‘얘가 무슨 소리하나?’ 하고 놀래요. 누워있는데 너무 무서웠어요.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 떠니까 엄마가 놀라서 여기저기 알아보시더니 응급입원 시켰어요. 지나고 생각해보니 1년 정도 잠복기가 있었던 거 같아요. 성당수련회 갔을 때 분열 있었던 거 같아요. 불빛이 이상하게 보이고, 군중 속에 있어도 고립돼서 혼자 있는 거 같고, 누가 떼거지로 달라붙는 거 같고 그랬어요.”
마르티노는 발병 전에 막노동, 자재관리, 나이트클럽 영업부장, 대학가 책방 총무, 환경단체 간사, 하회탈 장인 등의 직업을 가졌다. 레코드판을 600장 소장할 정도로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디스크자키를 할 뻔도 했다. 집에 가보면 지금도 “세계로 열린 창”, “예감”, “리뷰” 같은 문화예술잡지가 수북이 쌓여있다. 젊은 시절 문화예술 방면으로 상당한 열정이 있었던 것 같다. “첫 발병 때 어떤 증상을 보였는데?” “제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라는 망상, 누군가 감시한다는 망상이 있었어요. 제 망상 얘기 들으면 엄청 재밌을 거예요. 다락방에 누군가 숨어있는 것 같아서 무서웠어요. 이외수씨는 딸 없죠? 이외수씨 딸 2명이 환시로 보이는데 엄청 예뻤어요. 광주 다녀오면 결혼시켜준다 해서 광주까지 갔어요. 광주 시내 한복판에서 애국가도 불렀어요. 차비가 없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100원씩 구걸했어요. 천 원짜리 주는 사람에게는 900원 거슬러줬어요. 그렇게 차비를 마련해서 또 딴 데 가서 돌아다니다가 서울 왔어요. 자면서도 실실 웃고 집에서 화분 집어 던지고 해서 강제입원 당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제가 입원 전에 3년 정도 잠복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 관련 없는 일들을 서로 관련지어 생각하는 관계사고가 있었던 거 같아요.”
호덕이는 발병 전에 신문배달, 자장면 배달, 선원생활, 막노동 등을 했다. 막노동 하면서 보니까 도배사가 일당을 많이 받는 것 같아서 도배기술을 배워서 10년간 죽어라고 일했다. 돈 많이 버는 게 삶의 목적이었다. 주식에 투자해서도 돈을 벌었다. 20대 후반에 아파트 전세 얻고 결혼도 하고 딸도 낳았다. 저축도 몇 천 만원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흰줄기가 등으로 타고 올라오는 거예요. 다음날부터 각 종교단체를 다 찾아 다녔어요. 단학선원에서 제일 친절하게 대해줘서 그때부터 단학선원 다녔어요. 일주일 다녔더니 몸이 흔들리면서 눈물, 기쁨, 슬픔, 희열 온갖 감정이 엄청나게 올라와요. 버스 타니까 귀에서 톱니바퀴 가는 소리, 폭포수 소리, 관중들 함성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려요. 그리고 또 한 열흘 지나니까 배의 근육이 저절로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거예요. 그때부터 기에 빠졌어요. 처갓집 가서도 말 한마디 안하고 마음속으로 기를 모아야 된다는 생각만 계속하면서 집중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증상 있었는데?” “망상, 환시, 환청 모든 증상이 다 있었어요. 신이 될 수 있다. 정성의 에너지가 사랑, 우정, 긍정적인 단어들과 같이 운명을 좌우한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어요. 아내가 집에 연락해서 강제입원 당했는데 의사를 딱 보니 기가 쫙 오는 거예요. 의사에게 ‘기 안 보내주셔도 됩니다.’ 하고는 제 발로 병동 올라갔어요.”
첫 발병에 대한 당사자 기억은 전문가들의 견해와 조금 다르다. 첫 발병 때의 주요증상에 대한 생각도 다르고 발병원인에 대한 생각도 다르다. 당사자들은 실연, 왕따, 군대에서의 선임병의 괴롭힘, 남편과의 불화, 고부갈등, 또는 심리적 충격 등을 발병원인으로 언급하곤 한다. 당사자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본다.
3. 병동생활 (1) : ‘종종 화나는 경험. 직원들이 친절해야 한다.’
“입원했더니 참 좋아요.” 마르티노는 말한다. “어디 놀러온 거 같고 마음이 편안하고 밥도 잘 나오고. 그런데 한 달 보름쯤 있으니까 답답해서 못 있겠어요. 부모님께 퇴원시켜 달라 해서 퇴원했어요. 그런데 밖에서 생활해보니 뭔가 불편했어요. 제가 안기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안기부 직원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다니는 데마다 검은 차가 지나가고, 추적하는 사람이 나타났어요. 무서웠죠. ‘내가 문제가 있구나.’ 싶어 제 발로 병원에 재입원했어요.”
마르티나가 낀다. “답답했어요. 계속 퇴원시켜달라고 졸랐어요. 저는 근 8년 정도를 거의 계속 입원해 있었어요.” “그렇게나 오래?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퇴원하면 엄마가 다음 날로 다른 병원에 또 입원시켰어요.” “왜?” “엄마가 저보고 ‘너는 죄지었으니까 병원에서 반성하고 속죄해라.’ 했어요.” 마르티노가 말한다. “증상이 심해서 그랬어요. 집에서 감당이 안 되니까 계속 입원 시켰던 거죠.”
다른 쉼터 회원이 말한다. “무섭고 슬펐어요. 엄마 오기만 기다렸어요. 혹시 엄마 오나 싶어 문 쪽으로 가면 보호사가 나무 막대기를 휘둘러요. 한 번은 맞아서 멍이 퍼렇게 들었어요. 직원들이 너무 무섭게 하고 강압적이라 힘들었어요. 창가에 앉은 비둘기가 잊혀 지지 않아요. 너무 부러웠어요.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자유가 구속되었다는 게 힘들었어요. 엄마가 면회 왔을 때 울면서 퇴원시켜 달라 했어요. 그 병원 퇴원해서 대학병원에 다시 입원했어요. 직원들이 친절해서 좋았어요.”
이 원고를 보더니 당사자가 말한다. “비둘기 얘기를 조금 더 강조해주세요. 비둘기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거 보니까 부러웠어요. 창문에서 쇠창살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바깥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 슈퍼 가는 사람들 보여요. 그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비둘기에게 소원을 빌었어요. ‘엄마한테 전해주렴. 나를 구해달라고.’ 하루 종일 비둘기 오기만 기다렸어요. 퇴원하고도 한 동안은 비둘기만 보이면 내가 입원하러 가야되는지 생각했어요. 아무튼 그때 창가에 앉아 있던 비둘기가 지금도 생생해요. 지금도 비둘기만 보면 좋아요. 평화의 상징 생각나고.” 그러더니 또 다른 얘기를 한다. “보호사 얘기도 더 해야겠어요. 구타당한 게 한동안 너무 억울했어요. 남자만 보면 화가 났어요. 험상궂은 남자보면 무서우면서도 엄청 화났어요. 지금은 용서했지만 너무 화나는 기억이에요. 그리고 독방에 갇힌 후로 갇힌 곳이 싫어요. 지금도 어디든 가면 문을 조금씩 열어놔요.”
“저도 입원했을 때 환자와 시비가 붙어서 싸우고 두 번 묶여 봤습니다. 혼자 묶여서 있을 때 눈물이 나더군요. 언제가 되면 나갈지 알 수 없는 게 입원 시에 가장 힘듭니다. 의사들은 하루에 한 번 왔다가고 약물 적응기간이 보통 몇 주가 걸리는데 중간에 약이 바뀌면 절망에 빠집니다. 게다가 주변에 몇 년씩 입원한 환자들을 자주 접하면 그 절망은 공포심으로 변하더군요. 약물부작용으로 인한 무력감과 좁은 공간에 갇혀있다는 사실, 그리고 기약 없는 퇴원. 병이 병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어떤 당사자가 이 책의 초고를 읽고 댓글로 올려준 글이다. 또 이렇게 말하는 당사자도 있었다. “6년간 입원시켜 놓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내가 무슨 죄를 졌나요? 차라리 교도소가 낮죠. 교도소는 그래도 형량이라는 게 있잖아요. ‘언제 되면 나간다.’ 하는 게 있잖아요. 이건 언제 나갈지 기약도 없고. 재판도 없이 사람을 이렇게 가둬둬도 되는 겁니까? 치료목적이 아니에요. 돈벌이 목적으로 사람을 가둬두는 거지. 6년간 갇혔다가 퇴원하니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사람이 바보가 되서 나왔어요.”
4. 병동생활 (2) : ‘자칫 심하게 놀랄 수 있다.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다.’
“입원해 있을 때 뭐가 제일 힘들었어요?” “제가 죽는 줄 알았어요. 처음 약을 강제로 먹이는데 좀 지나니까 목이 안 돌아가요. 눈동자도 뒤집히고. 그래서 저는 여기가 어딘가? 내가 납치되어 왔나? 내가 지금 인체실험 당하고 있는 건가? 생각했어요. 내가 끔찍한 병에 걸려서 죽게 되는 건지 알았어요. 그게 제일 무서웠어요.” 약물부작용이다. 미리 설명을 듣지 못해서 많이 놀란 경우다.
처음 항정신병 약물을 복용하면 흔히 이삼일 못 일어난다. 그 뒤에는 발을 질질 끌며 다닌다. 발을 들 힘이 없어서다. 밥 먹을 때 숟가락 들 힘이 없어서 개밥 먹듯이 고개를 숙이고 식판에 입을 대고 먹는 사람도 있다. 턱을 들어 올릴 힘이 없어서 입을 ‘헤~’ 벌리고 다닌다. 입가로 계속 침이 흐른다. 얼굴도 무표정하다. 얼굴근육이 경직되어 그렇다. 흔히 목이나 팔다리 근육이 뻣뻣해진다. 손이나 다리가 심하게 떨린다.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계속 왔다갔다 안절부절 한다. 모두 약물부작용이다.
오래 전 일이다. 외가 친척이 전화했다. 20대 중반인 딸이 이상하단다. 많이 우울한 거 같다 한다. 저녁에 집으로 찾아갔다. 방에 가보니 웅크리고 앉아 있다. 옆에서 이런저런 말을 시켜도 대답이 없다. 농담을 해도 반응이 없고 손으로 쿡쿡 찌르며 집적거려도 반응이 없다. 우울증이 아니다. 조현증이다. 극도의 긴장상태다. 모든 게 너무 두려운 상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태. 움직이면 해칠 것 같아서 죽은 척 꼼짝 않고 있는 상태.
그래서 차근차근 설명했다. 아무 대꾸도 반응도 없지만 듣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네가 지금 아픈 거 같아. 내일 사람들이 집에 와서 너를 병원에 입원 시킬 거야. 놀라지 않아도 돼. 너를 해치려는 게 아니라 도와주려는 거야. 병원에 가면 문이 쇠로 되어 있을 거야. 그래도 놀라지 마. 문만 쇠로 되어 있고 쇠창살이 있을 뿐이야. 감옥이 아니고 병원이야. 너한테 약을 먹일 거야. 약 먹고 몇 시간 지나면 팔다리가 뻣뻣하고 잘 안 움직일 수 있어. 고개가 안 돌아갈 수도 있어. 그래도 놀라지 마. 약물부작용일 뿐이야. 처음에만 힘들지 한두 달 지나면 괜찮아져. 석 달이나 길면 여섯 달 정도 입원해 있게 될 거야. 병원에 있는 동안 잘 지내길 바라. 퇴원하면 찾아올게. 그때 얘기 나누자.” 그렇게 설명해줬다.
몇 달 지나 퇴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찾아 갔더니 반갑게 맞는다. 그때 내 얘기를 다 들었단다. “병원생활하면서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안 그랬으면 많이 놀랐을 거예요. 친절히 설명해줘서 고마워요.” 한다. 첫 입원 때 약물복용과 약물부작용에 대해, 그리고 병동생활에 대해 반드시 설명해줘야 한다. 안 그러면 자칫 심하게 놀랄 수 있다.
약물치료
1. 외래진료 : ‘충분한 면담이 필요해.’
마르티나가 집에 가서 일찍 잘 거란다. 내일 오후에 병원 진료 가야한다면서 살짝 들떴다. “갈색바지에 흰 티에 젤리잠바를 입을까? 꽃 반팔티를 입을까? 소라색 바지를 입을까?” 주치의 샘께 예쁘게 잘 보이고 싶단다. 한 달에 한 번 진료 간다. 마르티나는 대학병원을 다닌다. 이전에는 재발이 잦아서 여러 병원을 거쳤다. 지금은 3년째? 재발 않고 잘 지내고 있다. 지금 병원에서 약을 제대로 잡은 것 같다한다. 증상이 많이 잡혔단다.
남편 마르티노는 발병 후 17년째 쭉 한 주치의께 진료 받고 있다. 마르티노가 첫 입원했을 때의 병원 주치의였는데, 곧 개인의원을 개업했다. 주치의 얼굴은 본 적 없다. 딱 한 번 통화한 적 있다. 5년 전쯤 내가 상담 하던 친구가 시내에서 갑자기 호흡곤란과 팔다리 마비 증상을 보여 바로 앞에 보이는 정신건강의학과의원에 들렸다. 마르티노의 주치의였다. 내게 상담 받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전화를 해서 내 의견을 물어보셨다. 고마운 일이다. 진료 때 상담자에게 연락하여 의견을 물어보는 정신건강의학전문의는 없다. 거의 없다. 현재 내 주변 친하게 지내는 당사자들 중 그 주치의 환자가 여럿 있다. 만난 적은 없지만 참 괜찮은 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진료하는 환자의 상당수를 호전시켜 놓았다. 면담도 시간여유를 갖고 충분히 하고 당사자의 삶 전반을 고려하신다. 애정이 많으신 분 같다.
부부는 외래진료를 항상 같이 다닌다. 오늘은 남편 마르티노의 진료를 먼저 보고 아내 마르티나의 진료를 봤단다. 파란마음쉼터에 들어서며 마르티나가 조금 시무룩하다. “오늘 병원 갔는데 약이 올랐어요.” “왜? 환청 땜에?” “예” 그러더니 “제가 오늘 24개를 적어가서 주치의 샘 앞에서 읽었어요. 그랬더니 하나씩 읽을 때마다 ‘으흠, 으흠’ 해요.” 하며 주치의 흉내를 낸다. “주치의 샘이 면담시간을 꽤 내 주셨네.” 생각했다.
보통은 2~3분 안에 면담이 끝난다. 길어야 5분이다. 이런저런 얘기할 틈이 없다. “요즈음 어때요?” “잘 지내요.” 하면 끝이다. “조금 힘들어요.” 하면 “뭐가요?” 묻는다. 몇 마디 대답하면 “아~ 그래요? 약을 조금 높여야겠네요.” 하고 처방전을 써준다. 그게 끝이다. 거의 그렇다. 하긴 의사 입장에서는 하루에 외래진료 60명을 봐야 자기 월급 값을 한다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환자들도 요령이 생긴다. “힘들다.” 하면 약이 올라가니까 상당수 환자가 “괜찮아요. 잘 지내요.” 한다.
면담시간을 길게 충분히 내주는 주치의가 좋은 주치의다. 면담이 짧으면 아무리 유능한 의사라도 환자 상태를 파악하지 못한다. 하루는 전화를 받았더니 어떤 회원이 속상해한다. “오늘 진료 받았는데 약을 받아보니 약이 바뀐 거예요. 당황스러웠어요. 너무 무성의하지 않나요? 약이 바뀌면 최소한 약을 바꾼다고 설명은 해줘야 하잖아요.”
마르티나가 주치의 흉내를 내다가 “보실래요?” 하며 노트를 꺼낸다. 김연수 소장이 “내가 주치의 할께 읽어봐.” 했다. 마르티나가 한 줄씩 읽을 때마다 김연수 소장이 “으흠” 한다. 듣고 있자니 내용이 생생하고 재밌다. 이렇다.
1. 환청이 들려서 힘들다.
2. 자살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살고 싶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재미난다.
3. 음식이 많이 땅긴다. 담배를 많이 피운다. 사람들을 만나면 먹는 것을 즐긴다.
4. 살림살이가 흥미 있다.
5. 때론 남편의 얼굴만 보면 무서워진다.
6. 아침에 아빠가 전화 올까봐 한 번씩 간이 두근거린다.
7. 요즘은 아주 잘 먹는다. 예전에는 서둘러지긴 했지만 지금은 마음이 편안해진다. 살림살이도 조금 힘들지만 이겨낼 만하다.
8. 센터장에 김연수라는 선생님이 계시는데 “나는, 나는 당신을 볼 때마다~” 그리고 “친구야, 친구야” 노랫소리가 들리면 괴롭다. 그러나 지금은 참을만하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
9. 연수 선생님만 보면 “뭐든지 시켜주세요.”라고 말한다.
10. 가만히 있기가 불안해서 일을 하고 싶어진다. 대변이 나올까봐.
11.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그러나 담배를 많이 피운다.
12. 연수 선생님의 노랫소리가 많이 들린다. 그럴 때마다 괴롭지만 이겨낼 만하다.
13. 살이 쪄서 샤워도 하기 싫어진다.
14. 샤워도 억지로 한다(일주일에 한두 번).
15. 아빠가 전화 오면 왜 간이 두근거리냐면 치질 수술했냐고 물을까봐. 그러나 지금은 “내일은 고비가 있다.”, “아빠의 핸드폰 소리” 이런 소리가 종종 난다.
16.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먹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리고 담배를 많이 피운다.
17. 지금은 시누이 환청소리가 예전보다는 많이 덜하다.
18. 연수 선생님의 목소리가 제일 많이 들린다.
19. 한 번씩 답답해진다. 그래서 옷을 벗고 싶을 때가 있다.
20. 예전에는 새벽에 많이 먹었지만 지금은 덜하다.
21. 먹고 나서 뒤돌아서면 배가 고파진다.
22. 남편이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그래서 새벽 3시까지 간호해준 적이 있다.
23. “아무 것도 몰라도 된다.”라고 말하고 싶다. 아빠 엄마의 환청.
24. “고칸다고 아빠한테 이길 것 같더나. 끄떡없다. 끄떡없어.” 아빠의 소리
다 읽고 나더니 “인베가 6mg에서 9mg으로 늘었어요. 하루 두 알이었는데 한 알 더 먹어야 되요.” 한다. 김연수 소장이 “내 환청 땜에 약이 늘었으니, 늘어난 한 알은 내 몫이네. 내가 먹어야겠네.”라고 농담한다. “예. 소장님 환청 땜에 그런 거니까 책임지세요.” 대꾸한다. 같이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재미있다고 깔깔 댔다. “이거 책에 쓰자. 괜찮나?” 물으니, 두 말 않고 “예 괜찮아요.” 한다. 24개 항목을 옮겨 쓰기 시작했다. 노트를 보고 깜짝 놀랐다. 글씨가 반듯반듯 또박또박하다.
마르티나 부부에게 3달 전쯤 노트를 한권씩 사준 적 있다. 그냥 1,000원짜리 노트다. 내 노트 사는 김에 하나씩 더 사서 줬다. 그랬더니 마르티나가 엄청 좋아했다. 그 길로 바로 엎드려서 뭔가를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 다 적고는 보여주는데 몇 페이지에 걸쳐서 쭉 환청 얘기다. 글씨를 휘갈겨 써서 엉망이다. 그 날부터 환청 내용도 적고 자기 하고 싶은 말도 적고 이것저것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 만에 금세 노트 한 권을 다 썼다. 한 권 더 사줬다. 그랬더니 어느 날부터는 일기를 쓴단다. 가끔 보여주는데 갈수록 내용도 좋아지고 글씨도 예뻐졌다. 24개 항목을 다 옮겨 적고 잠깐 노트의 앞부분을 보니 글씨며 내용이 꽤 괜찮다. ‘많이 좋아졌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따지면 약을 꼭 늘여야 하는지 의문이다. 전보다 많이 부지런해졌다. 집안 살림을 혼자 다 하고, 밖에서도 설거지며 청소며 자발적으로 부지런히 한다. 얼굴 표정도 많이 좋아졌고 전에는 어려워하던 사람들 옆에도 먼저 다가가서 이런저런 말을 건넨다. 대화내용도 좋아졌다. 전보다 수준이 높아졌다. 전에는 책을 전혀 못 읽었는데 지금은 한두 쪽 정도는 쉽게 읽는다. 일기 내용도 전에는 환청과 자신의 욕구 위주였는데 지금은 현실적인 얘기가 많다. 오늘 주치의에게 읽어준 24개 항목도 자신이 겪는 여러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잘 적었다. 이래 보자면 마르티나는 전보다 엄청 좋아졌고 최근 3개월 사이에도 생각과 말과 행동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환청은 늘 있었던 거다. 몇 년 전까지는 진짜 너무 심해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게 많이 호전되었는데 요즈음 1달 정도 잠깐 심해진 거다. 왜 심해졌을까? 몸에 어떤 생리적 변화가 있나? 아니면 전보다 이런저런 활동을 많이 하고 사람들 많이 만나고 해서 그런가? 심심하고 무료해서 그런가? 뭔가 가치감을 느낄 수 있는 일감이 있어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의사가 아니라 약에 대해 잘 모르지만, ‘생활 전반을 다 고려한다면 굳이 약을 높여야 할 이유가 없는 게 아닐까?’ 싶다. 파란마음쉼터를 나서며 마르티나가 하는 말. “오늘도 이겨냈다.” 손을 번쩍 들어 만세 하는 시늉을 하며 나선다.
2. 약이 줄지 않는 이유
호덕이가 때때로 묻는다. “교수님 저 입원해야 돼요?” 그때마다 대답한다. “아니. 입원 안 해도 돼. 대신에 약만 줄여.” 호덕이는 약에 절었다. 작년까지는 정신이 맑았다. 통닭집 호객행위 아르바이트도 3개월하고 목욕탕 시다 아르바이트도 1개월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수님 저 억울해요. 남들은 저보다 더 말짱한 데 다들 정신장애 2급이에요. 저만 3급이에요. 저도 2급 돼야 되겠어요.” 한다. 기초생활수급자에 장애 2급이면 1인당 월 50~60만원 정부보조금이 나오는데, 장애 3급은 그보다 10만원쯤 적다. 호덕이도 생활에 많이 쪼들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날부터 병원에 가서 일부러 미친 척했다. 사소한 증상을 과장해서 말하고. 그랬더니 2급으로 올라간 게 아니라, 약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터미널에서 서울 가려고 고속버스 기다리는 데 전화가 온다. “호덕인데요. 중국 도착하셨어요?”, “뭔 소리가? 웬 중국?”, “교수님 중국 가신다고 안 하셨어요?”, “너 지금 정신 휘황하다. 중국은 무슨 중국. 서울 간다 했지.”, “아~ 그래요?” 내가 서울 다녀올게 했더니, 멀리 간다 싶었던 모양이다. 나하고 떨어지는 게 싫었던 가보다. 그래 서울 간다는 말이 아주 멀리 가는 느낌으로 와 닿았던 것 같다. “너 휘황한 소리하는 건 약이 세서 그런 것 같아. 주치의 샘께 약 줄여 달라 해라.” 그런데 주치의는 약을 줄여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늘리기만 한다.
점점 문제가 심각해진다. 어느 날 초인종이 울려 인터폰을 받았다. “호덕인데요.” “웬 일이고?” “교수님께서 오라 안 하셨어요?” “너 지금 또 정신없다. 내가 언제 오라 했나?” “예... 저 갈게요.” 여기까지 왔는데 싶어 “괜찮다. 이왕 온 김에 올라와서 차라도 한 잔 하고 가라.” 하고 불러들였다. 하루는 “아내는 오늘 학교에서 소풍 갔어요. 고기도 구워먹고 과일도 먹고 올 거예요.” 한다. 다음날 호덕이 아내와 통화할 일이 있어 “소풍 잘 다녀오셨어요?” 하니 “웬 소풍이요? 6월 달에 가요.” 한다. 호덕이가 또 착각했나 보다.
약이 세지면서부터 착각이 심해졌다. 기억도 뒤죽박죽이다. 어제 일을 일주일 전 일이라 하고, 일주일 전 일을 어제 일이라 한다. 그래서 스토리가 이상해진다. 없던 일도 있었다 하고, 있었던 일도 그런 일 없었다 한다. 그래서 맨 날 “잠 푹 자라.” “쓸 데 없이 사람들 만나러 다니지 마라.” “집에서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해라.” “마음 안정시켜야 한다.”고 당부한다. 주치의 샘께 말씀드려서 약을 줄이라고 해도 안 된다. “착각이 심하다.”하면 주치의는 자꾸만 약을 높이는 것 같다.
호덕이한테 물었다. “너는 도대체 왜 약이 안 줄어드는데? 의사한테 약 줄여 달라 했나?” 하니 “약은 의사가 전문가예요. 환자가 이 약 써 달라 저 약 써 달라 하면 안돼요. 약을 늘려 달라 줄여 달라 해도 안돼요. 환자는 단지 요즈음 제가 이래요 하고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말하는데서 그쳐야 해요. 의사가 판단하고 처방하면 거기에 따라야 해요.” 한다. 정신장애인 리더라고 자처하면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의사가 약에 대한 전문가이긴 하지만 면담시간이 짧아서 환자를 제대로 파악 못한다. 환자 자신이 자신의 상태를 가장 잘 안다. 약을 먹었더니 어떻더라 하는 것도 환자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약이 세면 세다 해야 하고, 약하면 약하다 해야 한다. 그래야 의사가 알아듣는다. 의사가 그랬단다. “이대로 참고 1년만 먹읍시다. 그러면 정신장애 2급 판정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둘 다 생각이 굳어있다. 호덕이도 의사도 2급에 꽂혀 있다. 차라리 2급 안되고 평생 3급으로 사는 게 낫다. 매월 10만원씩 적게 받더라도, 약물부작용이 없고 정신만 맑다면 어떤 일이든 해서 매월 몇 십만 원 정도는 벌수도 있다. 마르티노가 “형은 2급 안돼요. 처음 장애등급 받을 때 잘 받았어야 되요. 한 번 3급 받으면 웬만해선 2급 안돼요. 계속 3급이에요.” 한다.
호덕이는 작년보다 자신감을 많이 상실했다. 가끔 “저는 영원한 정신장애인이에요.”라고 한다. 나는 “호덕아 나는 그 말이 듣기 싫어. 요즈음 제가 상태가 안 좋아요. 그렇게 말하면 좋겠다. 매일 매일 기복이 있는 건데 그렇게 단정 짓는 말은 안하면 좋겠다.”고 대꾸하곤 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좀 더 얘기해 보고 그래도 말 안 들으면 주치의를 바꾸라고 권해야겠다. 내가 의사가 아니라도 약에 절어서 헤매는 건 눈에 보인다. 그런데도 답답하다. 호덕이도 그 아내도 “약은 의사가 전문가예요. 주치의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되요.” 한다.
호덕이는 약이 세서 사고정지, 빈번한 착각, 주의집중 결함 등을 심하게 보이고, 호덕이 아내는 약이 세서 잠에 취하고 몸이 처지고 힘이 없고 만사가 귀찮다. 호덕이는 ‘정신장애 2급 될 욕심’과 ‘약은 의사가 전문가라는 신념’ 때문에, 호덕이 아내는 ‘환청이 심해질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약을 못 줄이고 있다. 둘 다 세상살이에 대한 자신감을 많이 상실했다. 세상살이에 대한 의욕과 자신감을 어떻게 되찾게 할 수 있을까?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을 터득하면 약을 줄여도 충분히 잘해 나갈 수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 방법을 익히고 그 이치를 터득하게 할 수 있을까?
3. 약 조절이 중요하다.
파란마음센터에서는 당사자와 가족, 전문가, 그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정신건강의학전문의 권영탁 원장이 매달 한 번 약물교육을 한다. 이번 달에는 서울에서 한 아버지가 오셔서 참석했다. “제 딸이 중 3때 발병했어요. 이름난 병원에 2달 입원시켰죠. 입원비가 1,000만원 나왔어요. 1년간 그 병원에서 약을 타먹었어요. 전교 1등 하던 애가 1년 만에 전교 꼴찌 성적표를 들고 왔어요. 친구들이 비웃고 놀리고 그랬어요. 애가 마음에 상처를 받아 학교를 자퇴했어요. 제가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보고 권영탁 원장님을 알게 됐죠. 원장님께 데리고 갔더니 약이 너무 세다고 확 줄이시데요. 그전에는 자이프렉사 20mg, 세로켈 25mg, 리스페달 4mg, 랙사프리 20mg, 인데놀 20mg, 벤즈트로핀 2mg 이었는데, 권영탁 원장님은 모든 약을 다 빼고, 리스페달 1mg만 처방해줬어요. 부작용 방지약도 이것저것 먹었는데 다 빼버렸죠. 그러고는 애 학습능력이 이전처럼 돌아왔어요. 6개월 만에 검정고시 합격하고 지금은 대학입시 공부하고 있어요. 먼저 번 주치의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나요. 손해배상 소송을 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권영탁 원장이 말한다.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약 조절이에요. 약 적게 주는 의사를 찾아야 해요. 의사 스스로 최소용량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의사를 만나야 해요. ‘의사들이 왜 약을 높게 처방하는가?’ 하면 환자를 깊게 관찰하고 면담하지 않고 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래요. 예로써 병동 내에서 다툼이 있었다 하면 약을 높여요. 환청, 망상, 착각 있다 하면 무조건 약을 높여요. 그러고는 1년이 지나도 약 내릴 생각을 안 해요. 약을 단순하게 처방해야 해요. 1가지만 처방하는 게 원칙이에요. 이것저것 섞어서 처방하면 안 돼요. 약 조절을 위해서는 먼저 평가를 정확히 해야 해요. 그래서 1달 정도 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하고, 임상심리사에게 심리검사, 심리평가도 받게 하죠.”
어떤 가족이 묻는다. “약을 끊는 것도 가능한가요?” 권영탁 원장이 대답한다. “조울증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가능해요. 자연치유효과가 있어요. 30% 정도의 환자는 단약해도 잘 지내요. 그런데 조현증은 절대 단약하면 안돼요. 99%가 재발해요. 조현증은 최소용량은 복용해야 돼요. 최소용량을 잘 찾아내야 해요. 그런데 상당수 의사들이 그 노력을 안 해요. 한 번 약 높이면 1년이든 2년이든 그냥 가는 경우가 있어요. 잘못된 거예요. 내 경우에는 병원에 입원하면 일단 약을 높게 써요. 그리고 계속 줄여나가죠. 그리고 식탐생기고 비만 오는 약은 절대 안 써요. 당사자들 보면 50킬로그램 나가던 여성이 1년 만에 80~90킬로그램 되는 경우가 많아요. 또 남자는 70킬로그램이던 친구가 1년 만에 100킬로그램 넘게 살찌는 경우도 흔해요. 의사 잘못이에요. 식탐 안 생기고 비만 안 오는 약이 있는데 왜 굳이 그런 약을 쓰죠? 무관심해서 그렇죠. 환자들 생활이 어떻게 되는지 관심 없고 그냥 ‘증상만 없애면 된다.’ 식이죠. 그런 의사 만나면 병원을 바꿔야 해요.”
4. 약물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권영탁 원장은 인터넷카페 ‘정신분열병을 이겨낸 사람들’의 운영을 맡고 있으며, 그 곳 ‘싸이프리 칼럼’에 약물치료와 관련된 글을 많이 수록해 두었다. 그 글들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해가며 어떤 약을 어떤 이유로 선택했는지, 또 치료용량과 유지용량을 어떤 근거로 결정했는지를 매우 친절하게 설명해 두고 있었다. 내가 모르던 내용들을 많이 알게 되어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싸이프리 칼럼’의 ‘사례연구 17’과 ‘사례연구 19’에 수록된 글의 일부를 짧게 인용한다.
“소생이 30년 동안 정신과의사 생활에서 터득한 정신분열환자들의 최소유지 용량은 리스펜 1~2mg/day, 피모자이드 0.5~2mg/day, 할돌 0.75~3mg/day, 몰린돈 10~35mg/day, 클로르프로마진 100~200mg/day, 클로자핀 25~150mg/day, 설피라이드 100~500mg/day, 솔리안 50~300mg/day입니다. 즉 소량의 용량으로도 90% 이상이 관해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신과의사는 경험적으로 진료실에서 깨달아야만 합니다.”
“찾아오는 환자 모두에게 항정신병약을 복용한 후 조금의 호전만 있어도 약을 증량하지 않았고 오히려 재발이 우려될 정도로 감량을 시도했습니다. 기다리며 환자에게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것을 주문하고 보호자들에게도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도록 강권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사실로 아무 일도 안 하면 결국은 폐인이 된다는 점을 역설했습니다. 따라주는 환자는 모두 정상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의사로, 치과의사로, 교수로, 목사로, 간호사로, 택시기사로, 세무사로, 공무원으로, 대기업체 회사원으로, 환경미화원으로, 통닭집 사장으로, 기업체 사장으로, 피아노학원장으로, 주부로 정신병이 없는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권영탁 원장은 팬도 많고 안티도 많다. 이 책에 수록된 권영탁 원장과 관련된 글을 읽고 몇몇 당사자가 강한 어조로 불만을 표현해왔다. 권영탁 원장의 글을 읽고 또는 처방을 받고 약물감량을 시도했다가 좋아진 환자도 있지만, 재발한 환자도 있기 때문에 권영탁 원장과 관련된 내용은 책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나도 권영탁 원장의 모든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약을 지나치게 높게 쓰고 있다. 약물감량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만큼은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권영탁 원장도 “약물감량을 시도하다보면 30% 정도의 환자에게서는 재발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재발은 무섭고 괴롭다. 하지만 재발이 겁나서 평생을 과량의 약물복용으로 사회생활도 못하고 약에 절어서 잠만 자며 무기력하게 사는 건 더더욱 끔찍하다. 몇 차례의 재발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자신에게 적합한 약물과 최소의 유지용량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 노력은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 의사도 실수할 수 있다.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약을 지나치게 줄이거나, 약을 끊자고 권했다가 잘 지내던 환자를 재발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의사를 찾아야 한다. 안전위주로, 혹시나 재발할까 겁나서 약을 줄이려고 노력조차 않는 의사를 주치의로 두고 있다면 불행한 일이다.
약물은 양날을 지닌 칼이다. 적당한 정도의 약은 도움이 되지만 과도한 약은 독약이다. 따라서 의사는, 또한 가족과 당사자도, 가장 적합한 약이 어떤 약인지, 가장 적절한 용량이 어느 정도인지 찾아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당사자와 가족도 약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한다.
쿠키가 메일을 보내왔다. 의약품 검색사이트 리스트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운영하는 ‘의약품안전정보시스템’과 ‘KMLE 의학검색엔진’이 유용하단다. 그리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홈페이지의 ‘정보’ 난에서 ‘약제정보’ 난에 들어가서, 다시 ‘약품정보’ 난에 들어가도 약물에 대한 검색이 가능하단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몇 자 적어 보냈다.
“의약품검색사이트가 회원가입 등 유료 사이트가 많지만, 국가운영사이트 및 의약품 무료 검색사이트를 이용하면 부담이 없을 듯합니다. 네이버, 다음과 같은 검색사이트에서 해당 의약품을 검색하시면 경험담 같은 정보를 접할 수 있습니다. 정신질환을 이기는데 자신의 증상을 알고 약물과 자신의 심리상태를 알면 병을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저는 제가 먹는 약에 대해, 약이 바뀔 때마다 모두 검색해서 공부했습니다. 부작용방지약이 또 다른 부작용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던 적도 있습니다. 약에 대해 아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의 결과 : 불리한 여건
1. 당사자들은 삶의 기반이 약하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종종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한다. 개인의 행동과 인간관계는 많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그 중에는 성격, 흥미, 능력과 같은 개인적 요인도 있고, 사회적 지위, 경제력, 인맥과 같은 사회적 요인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개인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 중 어떤 요인이 인간관계와 사회적 성공에 더 큰 영향을 주는가? 아마도 답이 쉽지 않을 것이다. 정신장애인은 대체로 제반 사회적 여건이 모두 취약하다. 이것은 병 자체가 아니다. 병의 결과다.
1) 인맥이 약하다.
우리는 흔히 “혈연, 지연, 학연이 중요하다.”는 말을 한다. 개인의 사회적 성공도 단지 개인의 능력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인맥, 즉 인적 네트워크가 튼튼한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 특히 정치인 또는 사업가로 성공하려면 인맥이 튼튼해야 할 것이다. 조그만 가게를 하나 해도 인맥은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명문대 출신은 지방대 출신에 비해 여러모로 유리하다. 같은 업무를 맡았다 하더라도, 명문대 출신은 같은 회사 내에, 또 협력업체에 같은 학교 동문이 수두룩하다. 업무 협조가 잘된다. 능력이 같아도 인맥의 도움이 있기에 업무실적에서 앞서간다. 실상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본인 스스로도, 주변사람들도 착각한다. ‘명문대 출신은 역시 지방대 출신과 달라.’
인맥이라는 점에서 볼 때 당사자는 불리하다. 특히 조현증은 흔히 고등학교 또는 대학 때 발병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매우 드물지만 초등학생 때 발병하는 경우도 있고, 늦게는 30대, 40대에 발병하기도 한다. 아무튼 정신장애인은 고등학교 중퇴, 고졸, 또는 대학중퇴 비율이 높다. 따라서 일반인보다 학연이 약하다. 또 그 학연도 유지를 못한다. 투병생활과 백수생활이 길어지면서 동창회를 멀리 하고, 학교 때 친구들과 소원하게 지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혈연도 약하다. 투병생활과 백수생활로 친척들로부터 소외되고 무시당하기 때문이다. 지연도 약하다. 이웃에서 정신질환자라는 사실을 알고 꺼리기 때문이다.
물론 당사자 중에도 예외는 있다. 서울대 법대 출신도 있고, 박사학위 소지자도 있다. 동창회 총무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고, 학교 때 친구들의, 또는 가족과 친척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평균적으로 보자면 당사자들은 일반인보다 인맥이 약하다.
2) 백수가 많다.
발병 후 오랜 투병기간을 거치며 상당수 정신장애인이 백수로 전락한다. 정신장애는 병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당사자들은 병 자체보다 병의 결과, 즉 백수라는 처지 때문에 힘들어한다. 백수는 고달프다. 내세울 게 없다. 사회 속에서만 무시당하는 게 아니라 가족 내에서도 무시당한다.
당사자들은 왜 백수로 전락하는가? 투병기간이 길고 재발이 잦기 때문이다. 대체로 학창시절에 발병하기 때문에 일반인보다 학벌도 낮고 취업준비에 전념하기도 어렵다. 어렵게 취업해도 재발로 인해 직장을 그만 두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이 있었다. 오늘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인데 정신장애인 직원이 나타나지 않는다. 온갖 행사준비물이 서류함 속에 있는데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서 열 수가 없다. 어찌어찌 행사는 치렀는데 이후에도 연락두절이다. 보름이 지나서야 출근했다. “제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서 쉬었어요.” 보름동안 심한 우울증에 빠졌던 거다. 비슷한 일이 몇 차례 반복되고 결국 해고됐다.
이보다 좀 더 황당한 경우도 있다. 행사 때 접수를 보던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갑자기 증발했다. 밀려드는 손님들로 정신없이 바빠서 견뎌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수업도중에 아무 말 없이 정신장애인 교사가 집으로 가버린 경우도 있다. 갑자기 증상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트레스가 심하면 때로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그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처신을 하기도 한다.
정신장애인이 직업유지에 실패하는 이유는 주로 재발조짐 또는 재발 때문이다. 특히 회사가 정신없이 바쁠 때 정신장애인은 견뎌내지 못하고 “잠시 쉬겠어요.” 한다. 회사로서는 용납이 안 된다. 하지만 당사자는 재발조짐을 느끼기 때문에 쉬어야한다. 계속 출근하면 결국 재발한다.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해주는 회사면 정신장애인도 직업유지가 가능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나라에 그런 직장은 거의 없다.
20대까지는 그래도 재취업이 가능하다. 기회가 열려 있다. 하지만 30대가 되면 점차 재취업이 어려워진다. 정규직을 갖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40대가 되면 재취업은 거의 불능에 가까워진다.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하기 힘들다. 결국 상당수가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한다. 수급자가 되면 일할 기회가 있어도 대개 포기한다. 재발에 대한 두려움과 직업유지에 대한 자신감 부족 때문이다. 취업하면 기초생활수급 자격이 취소된다. 아르바이트로 몇 만원 받았다가, 고용주가 임금지급명세서를 세무서에 제출하는 순간, 기초생활수급자 지정이 취소된다. 따라서 대다수 기초생활수급자들은 근로의욕을 상실한다.
3) 돈이 없다.
상당수 당사자가 가난하다. 요즈음 많이들 스마트폰을 쓰고 있지만 당사자는 다수가 구형 핸드폰을 쓰고 있다. 당사자들이 가난한 이유는 오랜 투병생활로 치료비가 많이 들어서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이다. 더하여 오랜 백수생활로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신장애는 흔히 20대에 발병한다. 부모는 50대다. 20대 환자와 50대 부모는 경제력이 있다. 부모의 수입과 재산이 있고, 본인도 취업 또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환자는 주로 대학병원을 이용한다. 유료심리치료도 많이 받는다. 치료비 지출이 과다하다. 하지만 ‘병이 나을 수만 있다면.’ 하고 좋은 건 다 하려 한다. 부모는 ‘병을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여기저기 헛돈을 뿌린다.
30대가 되면 부모는 60대다. 서서히 돈에 쪼들리기 시작하지만 그래도 필요한 돈은 어찌어찌 마련된다. 40대가 되면 부모는 70대다. 본인도 아르바이트가 어렵고, 부모도 수입이 없기에 돈을 대줄 수가 없다. 형제들이 있지만 대다수는 돈을 보태주지 않는다. 50대에는 몸이 여기저기 아파오기 시작해서 치료비 지출이 점차 늘어난다. 60대가 되면 치료비 지출이 더더욱 늘어나서 생활이 더 어려워진다. 자칫 자녀가 취업이라도 하게 되면 그나마 지원되던 기초생활수급비마저 끊기는 경우도 생긴다.
따라서 정신장애가 발병하면 ‘치료’만을 목표로 하면 안 된다. 자칫하면 백수로 평생을 살게 될 수도 있다. 재산도 없고 수입도 없어서 40대 이후에 고생할 수 있다. 40대가 넘어서면 상당수 당사자가 ‘돈 없이 사는 법’을 터득해서 견딘다. 심지어는 한 달에 10만원 이내의 돈만 쓰고 생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20대와 30대 환자의 부모는 가급적 치료비를 절약해야 한다. 아픈 자녀를 위해 재산을 어떻게 남겨줄지, 매달 안정적 수입을 어떻게 확보해줄지 고민해야 한다. 자녀가 백수인데 남겨줄 재산도 없고, 매달 지원할 돈도 없다면 자녀가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도록 조치해야 한다.
물론 모두가 다 가난한 건 아니다. 부모를 잘 만나 엄청 부자인 경우도 있다. 형제가 매달 넉넉한 돈을 지원해 주는 경우도 있다. 본인이 군복무 중 발병하여 국가유공자 지정을 받아 생계에 아무 걱정이 없는 경우도 있다.
2. 당사자들 간의 연대가 약하다.
당사자들은 인맥, 사회적 지위, 경제력 등 제반 사회적 여건이 취약하다. 그렇다고 당사자들끼리 뭉쳐서 서로 돕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 편견 때문이다. 20대 당사자는 소비자운동에 거의 관심이 없다. 자신의 처지가 덜 아쉽고, 병이 나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일 큰 이유는 편견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정신장애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 20대 당사자는 자신이 편견의 대상이 되기 싫기 때문에 다른 당사자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소비자운동을 주도하는 당사자는 주로 40대, 50대다. 간혹 30대도 있다. 이들은 주로 인터넷카페 ‘파란마음 하얀마음’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오프라인 모임은 빈약하다. 이유는 돈이 없어서다. 사회적으로 잘나가는 당사자는 자신의 병을 숨긴다. 다른 당사자들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소비자운동에 관심 있는 당사자들은 가난하다. 모여도 같이 밥 한 그릇 먹기가 힘들다. 돈이 없으니 모여도 별 재미가 없다. 그렇다고 누가 이들을 후원해주는 것도 아니다.
미국은 도시별 당사자모임이, 일본은 병원별, 센터별 당사자 모임이 활성화되어 있다고 알고 있다. ‘그들은 돈에 다소 여유가 있으니 오프라인 모임이 가능하지 않나?’ 짐작된다. 미국이나 일본의 당사자들은 기초생활수급비를 우리보다 조금 더 넉넉히 받는 것 같다. 또한 ‘정신보건소비자운동’에 대한 사회의 인식과 후원도 우리보다 사정이 나은 것 같다. ‘우리는 돈이 없어서 인터넷카페만 중심으로 당사자들이 교류하고, 그러다 보니 소속감도 약하고, 연대도 느슨하고, 전술전략도 불명확하고, 추진력도 약한 게 아닌가?’ 싶어 안타깝다.
3. 사회적 편견이 심하다.
당사자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위험하다’, ‘불쌍하다’, ‘무능하다’, ‘게으르다’ 등이다. 당사자들은 편견 때문에 결혼과 취업에서 심한 불이익을 당한다. 편견은 결혼과 관련해서 가장 심하다. 그런데 정신보건전문가들이 일반인보다 결혼과 관련된 편견이 더 많다. 즉 상당수 전문가가 ‘자신 또는 자기가족이 정신장애인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사회적 편견이 심하다보니, 결혼할 때 병을 숨기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보면 정작 필요할 때, 즉 재발조짐이 있을 때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한다.
취업원서를 낼 때 당사자들은 고민한다. ‘백수로 지낸 기간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까?’ 사실대로 말하자니 애초에 잘릴 것 같고, 둘러대자니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다. 직장에서 또는 모임에서 약을 먹을 때 당사자들은 고민한다. ‘무슨 약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하나?’ 정신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받아주는 직장이 거의 없기에, 당사자들은 부득이 본의 아닌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혹시 들키지 않을까?’ 조마조마해 하기도 한다. 직장동료에게 병을 숨겨야 하다 보니, 동료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결국 겉도는 관계로 지내기도 한다.
10년쯤 전에 경찰청에서 정신장애인에 대해 운전면허적성검사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전국의 당사자, 가족, 그리고 전문가가 일제히 발끈했다. 그러한 발상 자체가 편견에 근거한 명백한 차별이다. 운전면허는 운전능력에 입각해서 발급하는 것이다. 특정 질병이나 장애를 근거로 운전면허를 제한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편견은 악영향을 미친다. 편견을 가진 사람은 당사자가 남들이 다하는 오해나 실수를 해도 “역시 병이 있어서 그래.” 하며 수군거린다. 텔레비전에서는 범죄 뉴스를 보도하며 “경찰은 정신이상자 또는 인근 우범자의 소행으로 보고...”하는 멘트를 날린다. 통계적으로 볼 때, 정신장애인의 범죄율은 일반인보다 낮다. 그럼에도 정신장애인은 아무 잘못 없이 수시로 우범자와 동격으로 취급된다. 저급한 영화는 정신장애인을 잔혹하고 예측 불가능한 존재로 묘사하고, 코미디 코너는 정신장애인을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묘사한다.
4. 소속집단이 없고,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친구관계는 얼핏 보면 일대일 관계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집단 속에서 만난다. 직장동료, 동창회, 동호회, 계모임 등이다. 특히 친구가 많은 사람들을 보면 각종 모임이 많다. 그만큼 소속집단이 많다는 얘기다. 특정 집단에 속해 있으면 소속감, 동질감, 친밀감 등을 보다 쉽게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정신장애인은 뚜렷한 소속집단이 없는 경우가 많다.
당사자들이 병원을 꾸준히 이용하기는 하지만 병원에 소속된 건 아니다. 치료진은 병원소속이다. 하지만 환자는 이용자일 뿐이다. 치료진과 환자는 신분이 다르다. 친구가 아니다. 병원 친구들이 있긴 하지만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주선해주는 것도 아니니 그냥 외래진료 때 우연히 보거나, 따로 일대일로 만나야 한다. 센터도 병원과 비슷하다. 직원과 회원은 신분이 다르다. 친구가 아니다. 위계가 있다. 회원은 늘 아랫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 회원들끼리는 동질감을 느끼지만 센터 이용을 그만두면 그것도 끝이다. 센터가 졸업생을 위한 동창회 비슷한 모임을 주선해주지도 않으니 센터에서 만나던 친구들을 만나려면 일대일로 만나야 한다.
당사자들은 대체로 소속집단이 없다. 이건 큰 불행이다. 직장과 학교는 소속감을 준다. 직장동료모임, 학교친구모임, 동창회 등에 참석하면 소속감, 자부심, 동질감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당사자들이 이용하는 병원과 센터는 소속감도 자부심도 주지 못하며, 오히려 수치심, 모욕감 등을 느끼게 한다. 일대일 만남은 집단속에서의 만남보다 불리하다. 따로 약속해서 만나야 하기에 꼭 보고 싶은 사람만 볼 뿐이다. 또 아무리 친해도 친밀감만 느낄 뿐 소속감, 자부심, 동질감 이런 걸 경험할 수는 없다.
소속집단이 없고, 결과적으로 소속감을 느낄 수 없다는 건 매우 심각한 문제다.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낄 수 없는 당사자들이 매우 많다. 당사자들은 오랜 투병기간과 백수생활로 동창들과도 멀어졌고 직장동료도 없다. 돈이 없으니 동호회에 가입할 수도 없고 친구들 만나기도 힘들다. 결국 친구가 하나씩 줄어든다. 투병기간과 백수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가족과도 불화가 생긴다. 가족들이 처음에는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지원해주지만 점차 지원이 끊기는 경우가 있다. 자칫하면 “저 놈은 아직 정신 못 차려 저렇다. 일체 도와주지 말아야 한다.”는 지경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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