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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호 시문학 신인상 심사기
치열한 삶의 현장언어, 죽음 속에 담긴 삶의 향기, 현대적 감각의 시간 이미지
신인상 응모작품을 읽는 심사위원들의 눈길은 각자 다양하지만 텍스트 속에 담긴 진정성과 시적 긴장감에 대한 기대는 일치한다. 그 기대는 상투적인 사물인식에 대한 거부를 바탕에 깔고 있다. 김남권의 시편들의 현장언어가 전달하는 삶의 치열성과 진정성, 김혜천의 시편들에서 발견되는 현대문명을 응시하는 새로운 시각과 죽음 속에 담긴 삶의 향기, 유수진의 시편들이 보여주는 현대적 감각의 시간 이미지는 심사위원들에게 긴장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세 분의 등단을 축하하며 대성할 것을 기대한다.
김남권의「흑백 필름을 주목하다」는 강원도 삼척탄광 막장 광부를 “정액마저 까매진 남자”라는 충격적 표현으로 무거운 감동의 울림을 준다. 시인은 현장의 리포터가 되어서 대대로 이어져오는 광부들의 삶의 현실을 시의 언어로 생생하게 형상화하여서 보여주고 있다.「철암역에서 길을 잃다」에서는 퇴락한 탄광촌의 풍경이 40년 전의 영상과 결합되어서 생동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이미지는 영화의 몽타주 기법과 유사한 시적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어서 현대적인 언어감각이 감지된다.「화사도花蛇圖」에서는 뜨겁게 달은 아스팔트 위를 횡단하다가 자동차 바퀴에 깔려 죽은 꽃뱀의 영상을 “소신공양으로 그려진/ 탱화 한 점”으로 부각해서 ‘와불’로 승화시키는 정신적 경지가 높게 느껴진다. 그것은 그의 시편의 내면을 흐르는 뜨거운 생명의식이 빚어낸 이미지로 인식된다. 그런 의식의 흐름을 자신의 감정이나 판단이 억제된 가상현실의 영상을 통한 시각적 이미지 속에서 객관적으로 재현해내는 기법은 오랜 시적수련의 결과라고 생각되어서 기대감과 신뢰감을 갖게 한다.
김혜천의「푼크름의 향연」은 현대문명의 시각적 현상을 현란한 빛의 이미지로 포착하여 개성적인 감각의 언어로 표출하고 있다. ‘현대문명과 빛’의 관계는 허상과 실상의 단순한 경계를 넘어서 허상의 실상화, 실상의 허상화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열어준다. 이런 생각의 지점을 여는데 어떤 관념에도 갇히지 않고 자신이 감지한 빛의 현상에만 인식의 렌즈를 열어놓고 집중하고 있는 것이 주목되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드라이 풀라워 (Dry flower)」에서는 말라 죽은 꽃에서 “빛의 음성”을 포착하여 듣는다. 그것은 죽음 속에 담긴 삶의 향기를 암시하며 시의 공간을 확대시킨다.「바라춤」에서는 삶과 죽음의 현실이 역동적인 이미지로 구체화 되고 있다. 북한산 기슭 어느 집 방에서 연탄불을 피워 놓고 알몸으로 껴안고 죽은 부부를 대상으로 죽음 속의 삶을 기원하는 이미지가 춤사위 곁에서 부부와 아이(애벌레)를 상징하는 팔랑거리는 나비 세 마리로 염사(念寫)된 것이 그것이다. 김혜천의 시편들이 보여준 개성적 시각은 그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하고 기대감을 주고 있다.
유수진의 「우편함」은 시간을 바늘땀으로 촘촘히 홈질하고 “여닫을 수 있는 지퍼까지 달아놓은 시간에 튼튼한 가죽실로 파란색 손잡이를 붙였다”는 시간의 사물화가 독특한 감각을 느끼게 한다. 시간의 세계는 불가역적(不可逆的)인 4차원에 속하는 무형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그 상상이 더 흥미로움을 준다. 이런 그의 젊은 감각은 「주민등록증」에서 주민등록증의 뒷면에 적힌 거주지 이동의 기록들을 보면서 지나간 시간을 ‘초록별자리’ ‘옛집 처마 거미줄’ ‘이슬’ ‘시멘트 틈에서 자란 들꽃’ 등으로 비유하면서 시간의 이미지를 싱싱한 감성의 언어로 열고 있다. 「서울지하철 2호선」에서는 시계의 반대방향으로 운행하는 2호선 전철을 표현하는 “초단위로 날려 보내는 말들이 돌아오는 외선순환선” “관성의 법칙이 수시로 바뀌는 꺾은선그래프”라는 현대적 언어가 시적 사유의 물리적 프리즘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향한 시적 공간 확대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 덜 익은 사유와 감당하기 어려운 언어가 난수표 같은 느낌을 주지만 난해한 이미지도 현대시의 덕목이 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수용되었다.
최종심까지 올랐다가 아깝게 선외로 밀려난 시편 중 좌정묵의 「언어의 외장(外裝)」외 9편은 활달한 시상의 전개에서 넘쳐나는 사설적(辭說的)인 언어가 흠이 되었다. 유세진의 「우산이었던 기억」은 서정시로서 온화한 이미지가 좋았으나 현대적인 사유와 감각의 부족이 지적되었다. 전세중의「두 개의 얼굴」외10편도 일상적인 정서표현은 인정되었으나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점이 지적되었다. 신승민의「정육점」외 9편은 젊은 패기의 언어가 평가되었으나 사설적인 능숙한 언어구사로 인해 이미지의 내면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지적되었다. 이런 점을 유의하여 재도전하기 바라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심사위원: 문덕수 유승우 심상운(글) 손해일
신인 우수 작품상 (시)
김 남 권
흑백 필름을 주목하다
뼈를 통과하지 못한 빛이
암실 밖에서 흰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광부가 사라지고 남은 필름 한 장
엑스레이에 비친 가슴뼈가 앙상하다
막장에서 막장으로 향했던
광부의 마지막 소원은
햇빛 한 번 실컷 마셔보는 것이었으나
하루하루 탄가루만 폐부에 쌓인
광부의 호흡은 멈추었다
몸속으로 까만 물이 흘러
정액마저 까매진 남자들
연탄불에 구운 비곗살에 한 잔 소주로
탄가루를 씻어 내리는 날에야
믿고 따른 아내를 안아주는 날
광부의 어머니도 광부였다
가난과 배신으로 콩팥까지 까매진 어머니는
잠들지 못하는 판잣집 구석에서
까만 십구공탄을 피워 놓은 채
등신불이 되었다
삼척탄좌 목욕탕에 걸려 있는
광부의 엑스레이 사진 속에서
하얗게 타고 있는 내 어머니를 보았다
철암역에서 길을 잃다
폐광촌 철암역 앞 다리를 건너자
가파른 산자락을 간신히 이고 있는
잿빛 파문을 만나게 된다
사람이 비켜 가기도 비좁은 골목
마중 나온 봄 햇살마저 없었다면
벽 속에 갇혀서 콜록거리는
광부의 눈빛도 몰랐을 것이다
사십 년의 시간이 담벼락에 갇힌 채
퇴락한 지붕, 가로등에 매달려
가끔씩 날아드는 새들의 발자국 소리와
꽃과 아이와 아낙들의 낮은 비명 소리가
합판 한 장이 전부인 집의 경계를 풀고 있다
개구리처럼 언덕을 올라온 예닐곱 살 여자아이가
연신 엄마를 부르다가
건너편 철암역 저탄장을 망연하게 쳐다보다가
막다른 골목을 돌아 나오는 엄마, 소리를 주워담는다
골목길은 모두 막혔거나 모두 이어졌다가 사라진다
사람들은 모두 누웠거나 흩어졌다가 사라졌다
골목 끝 더 이상 우물이 아닌 두레박에서 건져 올려진
엄마의 치마, 그 치맛자락 꽃무늬가
구불구불 미로의 담벼락을 따라 피어났다
나비도 없는 쓸쓸한 꽃잎, 입을 틀어막고 피어났다
화사도花蛇圖
뜨겁게 달아 오른 아스팔트 위
너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삶터를 갈라놓은 검은 도로를
비늘로 건너야만 하는 버거운 길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살점이 탁본 된 꽃뱀 한 마리
한낮의 아스팔트를 말고 있다
아가리는 아직 붉다
일주문을 지나 온 구름이
적광전 용마루에 걸려 있다
붉은 아가리에서 주문이 쏟아진다
얼음의 온도로 누워 있는
선명한 꽃자국 하나
사랑할 때의 온도로 벗은 허물
소신공양으로 그려진
탱화 한 점
정선으로 가는 42번국도 한 가운데
와불로 누워 있다
신인 우수 작품상 (시)
김 혜 천
푼크툼의 향연
빛의 보폭을 조절한다
색조를 맞추는 조리개가 어지럽다
동공에 포착된 먹잇감이
125분의 1초 스투디움* 안에 갇힌다
누가 나를 정보의 틀 안에 가두는가
내 안에 창은 언제나 열려있다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마라토너의 발놀림
흩어졌다 모아졌다하는 구름
비를 몰고 다니는 바람소리
찰나에 일어나는 수많은 우연
하찮게 버려진 것들의 아우성
빛 뒤에 숨어 있는 섬광에 촉수
탯줄로 이어지는 깊숙한 곳을 찌른 상처
수없이 망설이는 손가락 끝의 떨림
꿈틀거리는 창 안에는
빛의 속도로 끝없이
푼크툼**의 향연이 이어진다.
* 스투디움(studium)-사진 기법으로, 사물이나 혹은 사람에 대해 열성적이긴 하지만 강렬함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일반적 감정
** 푼크툼(punctum)-라틴어로 점(點)을 뜻하며 화살처럼 아프게 찌르는 강렬한 요소
드라이 플라워(Dry flower)
인사동 오래된 전시실
미로에 갇힌 꽃
흑백 사진에 담긴 명암을 본다
레몬잎 아이리 억새 해바라기 잇꽃
연밥 다북쑥 냉이꽃이 말라간다
말라간다는 것은
세상 밖으로 밀려나는 것
절벽에서 어둠으로 허물어지는 것
헐거워진 그물같이 멀어져간
너와 나
풍장 되어 바싹 말라가는 몸
다시 젖을 수 있을까
내 안에 말라버린 물관을 찾아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사이로
빛의 음성이 들린다
바라춤*
상여도 없이 떠났다
북한산 기슭 비워두었던 방에 연탄불을 피워 넣고 주말을 맞았다
신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
알몸으로 껴안은 부부를 자욱한 안개가 삼켰다
그녀의 몸 안에 애벌레 한 마리도 함께 잠들었다
어허이 어헝
비도 울지 못하고 추적대는 날 이승의 경계를 넘었다
그들의 하늘은 어디일까
부부가 살던 무릉도원에 해마다 흐드러지게 피는 복사꽃
춤사위 곁으로 나비 세 마리 팔랑거린다
* 죽은 자를 위로하고 천도하는 춤
신인 우수 작품상 (시)
유 수 진
우편함
잘라놓은 시간의 기억들을 붙잡고 바늘에 마음 한 줄을 꿰어 촘촘하게 홈질을 시작한다 바늘을 넣었다가 뺄 때마다 조금씩 붙어가는 조각들 이어진 시간들을 포개어 놓고 마음을 두 줄로 꿰었다 아래의 시간부터 한 땀을 뜨고 땀의 중간과 맞닿을 곳에 공그르기를 한다 시간이 맞물리며 모양을 잡아갔다 바늘땀이 감쪽같이 사라진 공간 중심을 맞추고 뒤집은 시간들을 맞잡았다 깊은 땀을 떠가며 반박음질을 한다 여닫을 수 있는 지퍼까지 달아놓은 시간에 튼튼한 가죽실로 파란색 손잡이를 붙였다 파란 끈을 어깨에 둘러매고 돌아오는 오후 시간에 담은 마음이 달랑거리며 따라온다 우리 동 입구 우편함을 지나치는데 삐죽이 꼬리를 내미는 관리비명세서 편지 하나 따라 나와 바닥에 떨어진다 언제 적에 살았던 이름일까 나의 영역에 찾아온 불청객 반송함에 넣고 돌아선다
미처 데려오지 못한 나의 조각도
어느 어두운 구석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끌어당겨지지도 않는 때와 곳 그 순서쌍
주민등록증
이 땅의 주민임을 증명하여주는 작은 기록
뒷면이 꽉 찼다
작은 글씨로 빼곡히 적힌 움직임의 길이와 넓이
나침반이 설 때마다 곳곳에 남겨놓은 그림자
초록별자리를 따라 하나씩 되짚어간다
같이 오지 않겠다고 떼쓰는 조각을 달랜다
너무 오래 기다리다 토라진 조각에게
옛집 처마 거미줄의 사연을 늘어놓고 돌아오는 길
모퉁이에 앉아있는 낯익은 쪽지에게 멈춰 서서
이슬의 안부를 물으니 대답대신
시멘트 틈에서 자란 들꽃을 보여준다
걸어오는 내내 가슴으로 전하는 풀 비린내
떨어졌다 붙은 안쓰러운 자국이 실금처럼 남았다
지나간 달력을 들춰보고 싶은 날
지갑 속 기억을 꺼내 뒷면을 본다
헌책방에서 만난 옛 참고서 같은
서울지하철 2호선
시간의 반대방향에선
1시간 27분 동안 낮과 밤이 51번이나 왔다가 간다
허가와 금지가 교차하는 48. 8 Km
타원의 우주로 내려온 구름입자의 인식번호는
스스로 걸어놓은 비밀번호를 풀어야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원색을 배달하는 10량의 1500V는 지정좌석이 없는데
흔들리는 철구름 안에서 꿈의 각도를 재느라 바쁘다
초 단위로 날려 보내는 말들이 돌아오는 외선순환선
출발역에서 도착역까지 구간별로 구분하는 요금체계
고정 출연 자리를 찾아가는 자릿세 매김
관성의 법칙이 수시로 바뀌는 꺾은선그래프에 탑승 중이다
서식지의 풍향과 풍속은 가늠할 수 없지만
그래도 시간을 지키기에 안전한 방법
초록구름을 타고 간다
*서울지하철 2호선의 외선순환운행계통은 시계반대방향으로 운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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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부하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즐거운 글쓰기를 하겠습니다
시문학을 사랑합니다
유수진 올림
수고하신 손길 깊이 감사드립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시문학, 모지에 부끄럽지 않은 시인으로 거듭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