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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선생 2009.07.28 00:00 원본글:http://blog.daum.net/dream6838/531
경열사 입구 진입로(광주)
공의 휘(諱)는 지(地)요, 초명(初名)은 준제(準提)였다. 호(號)는 퇴암(退菴)이시며, 밀직공(國龍-국룡)후 금성군(盛-성)의 손자이시다.
공은 1347년(고려 충목왕 3년. 丁亥)에 지금의 나주(羅州) 문평에서 태어나셔서, 광주(光州) 평방(平坊) 죽곡(竹谷)에서 살으셨다. 공은 인물이 걸출(傑出)하고 성품이 관후(寬厚)하여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힘이 남달리 세었으며, 대의(大義)를 통하여 사람들과 더불어 해설(解說)함이 활달하였으며, 독서 또한 좋아하셔서 출입할 때도 항상 책을 가지고 다니셨다.
공이 어느 날 성(城)안에서 놀고 있을 때, 소를 몰고 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소가 갑자기 주인을 들이받으므로, 공이 그것을 보고 재빨리 달려가 몸을 날려 그 소의 두 뿔을 잡고 들이치니 소는 즉사하고, 주인은 구사일생 살아났는데, 그 때 그 광경을 고을 사또 박춘(朴椿)이 성루 위에서 달려와 보시고는, 장하게 여겨 공을 사위로 삼으셨다. 공의 나이 열아홉살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시고 다음해 1366년(공민왕 15년. 丙午)에, 또 전시대책(殿試對策)에도 장원급제하셨다.
1374년(공민왕 23년)에 중랑장(中郞將)을 제배 받았는데, 그때 왜구가 남해 연안 고을을 침범하여 우리나라 백성들을 괴롭혔으므로, 공민왕이 이를 근심하던 중,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 이희(李禧)가 상서(上書)하여 수전(水戰)익히기를 청하니, 임금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희(禧)는 초야(草野)의 신하인데 오히려 꾀를 드림이 이와 같거늘, 백관(百官)과 위사(衛士)가운데는 일찍이 한 사람도 희와 같은 자가 없느냐”고 하시어, 나라에서 처음으로 수군(水軍)을 훈련시키려는 뜻을 가졌다. 이때 위사 유원정(柳爰廷)이 나와 말하기를 “중랑장 정준제가 일찍이 도적을 평정시킬 계책을 지었으나, 다만 드리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하니 마침 그때 공이 속고치(速古赤)로써 전계(殿階)에서 왕을 모시고 있는지라. 임금이 돌아보고 물은 즉, 공은 마침 준비해 두었던 수군에 대한 헌책(獻策)을 내어 드리니, 임금이 보고 크게 즐거워하여 공은 그때부터 왕의 신임을 받아, 곧 전라도 안무사(按撫使)로 특명되고, 이희(李禧)도 양광도(楊廣道-경기도)안무사가 되었으며, 또 두분 다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을 겸하게 되었다.
이때 또 만호(萬戶) 최신길(崔臣吉)과, 박덕무(朴德茂)등이 또한 공과 같은 계획을 올리니, 덕무를 경기왜인추포부사(京畿倭人追捕副使)를 삼고, 재상(宰相)들에게 말하기를,“이제 희 등에게 벼슬을 준 것을 그대들은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그 공을 이룩하여 인심을 격동시키기를 바람이니, 다음에 공(功)이 없으면 또한 마땅히 용서하지 않으리라.”하시고 또 동의 마하사(摩下士) 85인과, 희의 마하사 6인에게도 첨설직(添設職)을 주었으며, 밀직사를 시켜 공과 희(禧)에게 천호공명첩(千戶空名牒) 20과, 백호첩(百戶牒) 200을 주었다.
그 뒤 두 분께서는 세 번에 걸쳐 무릇 수십조(數十條)의 헌책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깊은 육지의 백성은 노를 젓는데 익숙하지 못하니, 왜적을 막기가 어려운지라. 다만 해도(海島)에서 자랐거나, 아니면 수전(水戰)을 스스로 청하니 자만 등록하여서, 신(臣)이 거느리게 해주시면 5년내로 가히 해도(海島)를 숙청할 것이요, 도순문사 같은 것은 한갓 군량만 허비하고, 민생만 흔들 뿐이니 청컨대 이를 파하옵소서」하니 임금이 순찰사(巡察使) 최영(崔塋)을 불러 의논한 즉, 최영(崔塋)이 처음 육도(六道)를 순찰하여 전함 2000척을 만들어, 모든 도의 군사들을 시켜 왜인을 잡게 하는지라.
백성들이 다 싫어하고 괴롭게 여겨서, 집을 버리고 도주하는 자가 십(十)에 오륙(五六)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건백(建白)함으로서 최영의 작전이 중지되었다. 이리하여 공은 수군을 쇄신 향상시켰으며, 1376년(우왕2년)에 왜구가 광주(光州)와 능성(綾城) 화순(和順)등지에 침입하니, 원수(元帥)이신 공이 전라도에서 방어하였다. 그리고 1377년(우왕3년) 여름에 왜구가 순천(順天), 낙안(樂安)등지에 침입하여, 당시 예의판서(禮儀判書)인 공은 순천도병마사(順天都兵馬使)가되어, 크게 쳐서 18급을 베고 3인을 사로잡아, 판사(判事) 정양기(鄭良寄)를 보내어 첩보를 올리니, 왕이 기뻐하여 양기에게 백금 50양과 그 어머니에게 쌀 10석을 주고, 공에게는 안마(鞍馬)와 비단을 하사하셨다.
겨울에 또 왜구를 쳐서 40여급을 베고 2명을 사로잡아, 판사 정용(鄭龍)을 보내어 첩보를 올리니, 왕이 용에게 베 2백필과, 말 1필을 하사하셨다. 1378년(우왕4년)에 왜구가 영광(榮光), 광주(光州), 동복(同福) 등지에 침입함으로, 공이 도순문사(都巡問使) 지용기(池湧奇)와, 조전원수(助戰元帥) 이임(李淋), 한방언(韓邦彦) 등과 같이 옥과(玉果)에까지 추격하니, 적군이 미라사(彌羅寺)로 들어감으로 아군이 포위하여 불태우고 치니, 적군은 거의 다 죽고 말 100여필을 얻었는데, 이 싸움에서 공은 많은 전공을 세우시니, 공과 지용기에게 은(銀) 각 50양을 하사하셨다.
또 담양(潭陽)에 왜구가 심하게 침입하여, 동년 12월에 크게 쳐서 17급을 베고, 이어서 전라도 순문사가 되고, 또 1382년(우왕 8년) 공이 36세 때에, 왜구가 비인현(庇仁懸)의 진포(鎭浦)에 50여척을 몰고 침입하여, 밀직(密直)인 공이 해도원수(海道元帥)가되어, 군산(群山) 앞바다까지 추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배 4척을 노획하였다. 1383년(우왕 9년)에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인 공이 왜구 침공을 대비하여, 당시 수성방어(守城防禦)에만 사용되었던 화포(火砲)의 위력을 공격전술(攻擊戰術)에 응용, 화포 그 자체가 육중한 무기인데다, 당시 도로(道路)의 사정이 불비했던 까닭에 신속한 기동성(機動性)이 요구되는 육전공격(陸戰攻擊)에는 적합지 못했으므로, 자유자재로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는 함선(艦船)에 장치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하시어, 화포를 장치한 근대적 함대를 제도(諸道)에서 건조하여(만들어서), 왜구를 방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소청(所請)하니 왕께서 기꺼이 청종(聽從)하심으로, 전함을 건조하여 왜구를 크게 무찌르니, 왕께서 금대(金帶). 일요(一腰)와 백금 50양을 하사하셨다.
때가 마침 봄이라 역질이 크게 일어나 주사(舟師-수군)가 태반이나 죽어 가는 데, 해상에서 죽은자가 있으면 바로 육지로 내어다가 장사(葬事)지내 주니, 군사들이 감동하여 울었으며, 이 때 공도 병을 얻어 계시니, 왕께서 산기(散騎) 하국충(河國忠)을 보내어 술을 가지고 위문하였다.
우왕 9년 5월 당시 연이은 대승으로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어 전함 47척을 거느리고, 나주 목포(木浦)에 계실 때, 왜적이 대선 120척을 몰고 경상도 연안에 침구 하니, 바닷가의 주군(州郡)이 크게 진동하는지라, 합포원수(合浦元帥) 유만수(柳漫殊)가 급보를 보내 왜구들이 가히 무인지경으로 약탈을 자행하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은 다음과 같은 시(詩)로써 당시의 감회를 남기고 출진(出陳)하셨다.
「錦城山屹屹 木浦水溶溶 生我非忠孝 山川不我容」
「금성산흘흘 목포수용용 생아비충효 산천불아용」
「금성의 산은 우뚝우뚝 솟아 있고 목포의 강물은 조용하게 흐르는데
내 이 땅에 태어나 충효를 하지 않는다면 산천도 나를 용납지 않으리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隨家賀若弼 晋室祖將軍 杖劍渡江水 歸來誓歸雲」
「수가하약필 진실조장군 장검도강수 귀래서귀운」
「수나라 하약필이요, 진나라 조적(祖狄)이로다,
장검을 빼어 들고 강수(江水)를 뛰어넘어
내 맹세코 저 도적을 섬멸하고 개선하리라.」하셨다.
공은 이러한 충성심과 의기에 찬 말씀을 남기시고, 해전 사상 최초로, 화포를 장치한 근대적 함대 47척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군사를 독려하고, 때로는 자신이 손수 노를 저으니 군사들이 사기가 충천하여, 섬진강에 이르러 합포(合浦) 군사들을 합쳐 적정을 살피니, 적이 이미 남해의 관음포에 집결 중이나, 적의 기세가 대단하여, 적의 깃발은 무수히 많아 하늘을 가리고, 예리한 창날은 온 바다에 번쩍였다.
이렇게 적군이 위세 당당하게 사방으로 포위를 하여 오는데, 바람마저 아군에게 불리하게 불고, 비바람이 극심하여 적을 공격하기에는 너무 불리함을 알고, 지리산 신사(智異山 神祠)에 기도하기를, “나라의 존망(存亡)이 이 해전에 달려 있으니, 나를 도와서 신(神)의 수치(羞恥)가 되지 말게 하소서”하고, 산신의 가호(加護)를 빌어 군사들의 동요를 막고, 공이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올리니, 하느님이 감동했는지 과연 비가 그치고 바람이 아군에게 유리하게 불었다.
그래서 공은 이 때를 놓칠세라, 일제히 전군에 명(命)을 내려 중류(中流)에 돛을 올리니 배가 빨라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맹렬히 돌진하여 박두양(朴頭洋)에 쳐들어가, 왜적 선봉 20척을 단번에 박살내고, 연이어 적의 본진(本陣)을 각종 화포로 공격 전멸시키니, 자욱한 포연(砲煙)에 바다를 뒤덮은 왜적의 시체는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병마사 윤송(兵馬使 尹松)이 적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 이렇게 공은 관음포(觀音浦)에서 사상(史上) 최초로, 또 고려 해전 사상 최대의 전공을 세우면서, 왜적 대선단(倭賊 大船團)을 통쾌히 부셔 버렸으며, 공이 이때 함재화포(艦載火砲)의 묘를 후일 이순신에게 전하여 준 것이 되었다.
그리고 공은 전투가 끝난 뒤에 부장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일찍이 육전(陸戰)에서 수많은 적을 무찔렀지만, 오늘과 같은 쾌승(快勝)은 거둔 적이 없다.”며, 그 통쾌한 기분을 다음과 같이 읊으셨다.
「盡掃倭奴奏凱廻 鳳城春暖花正開
진소왜노주개회 봉성춘난화정개
應看音日雲臺峻 老子不須歸去來
응간음일운대준 노자불수귀거래」
「왜적을 다 소탕하고 개선하여 돌아와 왕께 아뢰니
서울엔 따뜻한 봄이라. 백화가 만발했고
후한명제(後漢明帝)가 공신(功臣)을 모셨든 운대(雲臺)를 회고할 정도는 못되나,
변변치 못한 사람일지라도 어찌 고향에 숨을 수 있겠는가」하셨다.
왕께서 공의 대첩 소식을 들으시고 크게 기뻐하시어, 이극명(李克明), 안소연(安沼連)을 보내 궁온(宮醞)을 내려 위로하셨다. 이때에 군기윤(軍器尹), 방지용(房之用)이 일본에 봉사(奉使)하고 돌아오다가, 길에서 왜적을 만나 잡히어 목에 자물쇠를 채워 배 밑에 갇혔는데, 싸울 때 적군들이 말하기를 “만약 이 싸움을 이기지 못하면 반드시 먼저 죽이리라”하였지만, 싸움이 끝난 뒤에 보니 적이 다 죽었으므로, 지용(之用)이 화를 면하였다.
이리하여 공은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해도원수 양광, 전라, 경상, 강릉도, 도지휘 처치사(海道元帥 楊廣, 全羅 慶尙, 江陵道, 道指揮處置使)에 제수 되셨으며, 또 1384년(우왕 10년)에는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제수되었다. 이때 이성계가 판삼사사(判三司事) 심덕부(沈德符)와, 판개성부사 배극렴(判開城府事 裴克廉)과, 문하평리(門下評理)인 공으로 더불어, 우왕을 황이부(黃黟府)에서 향연(饗宴)하였다.
1387년(우왕13년. 丁卯) 8월에는 글을 올려 왜구(倭寇)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와 일기(壹岐) 두 섬을 정벌(征伐)할 것을 왕에게 청하기를 『근자에 중국(中國)이 왜(倭)를 정벌한다고 떠들고 있으니, 만약 우리 국경에까지도 전함을 나누어 정박시킨다면, 다만 그 지대(支待)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허실(虛實)을 엿볼까 두려워하나이다. 왜는 온 나라가 다 도적질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일본 정부를 배반한 백성들이 대마도와 일기의 두 섬에 응거하여, 이 섬들이 우리나라와 가까움으로 무시로 침구하여 옴이니, 만약 그 죄를 들어 밝혀 먼저 이 섬들을 쳐서, 그 소굴을 전복하고, 또 일본에 글을 보내 도망한 적을 본국으로 귀순케 한다면, 왜의 근심도 덜고 중국의 군사 또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수군은 잘 훈련되어 있으니 때를 순응하고 바람을 기다려 움직인다면 성공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다만 배는 오래되면 썩고 군사는 늙으면 피로 하는 것이며, 또한 지금 수군이 요역(徭役)에 피곤하여 날로 도망하고 흩어지려고 하니, 마땅히 이 기회를 타서 모책을 결단하여 소탕할 것이요, 가히 늦추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우왕 14년, 경상도 해도원수 박위(朴葳)의 대마도 정벌 개선도, 모두 공의 전략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공은 당시 약세에 몰려 있던, 고려의 해군을 중흥시켜 화포로 중무장(重武裝)한 근대적 해군 함대를 출범시킨 선구적(先驅的)인 장군이었다. 1388년(우왕 14년)5월, 우왕이 이성계를 보내 요(遼)를 치게 한지라, 공은 안주 도원수(安州 都元帥)로서 종군하셨다가 회군(回軍)하니, 이때에 왜구가 3도(三道-전라. 경상. 충청)에 침입하여 여름부터 가을까지 주군(州郡)을 무찌르고 불태워도, 우리나라 장수와 수령이 방어하는 자 없으니, 공의 위명(威名)을 왜구가 겁내는 고로, 나라에서 공을 양광. 전라. 경상도, 도지휘사(道指揮使)를 삼아, 제장들과 같이 가서 치라는 명을 내려 공이 명을 받고, 도순문사 최운해(都巡問使 崔雲海), 부원수 김종연(副元帥 金宗衍), 조전원수 김백흥(助戰元帥 金伯興), 진원서(陳元瑞) 전주목사 김용균(全州牧使 金用鈞), 양광도 상원수 도흥(揚廣道 上元帥 都興), 부원수 이승원(副元帥 李承源)등을 거느리고 출진하니, 왜구가 함양(咸陽), 운봉(雲峯)을 넘어 남원(南原)으로 쳐들어옴으로, 군사를 독려하여 달려가 무릇 7,8회를 접전하였으나, 싸울 때마다 승전하여 왜구 58급을 베고, 말64필을 얻으니 남은 적은 밤에 어둠을 타서 도망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번 싸움이 아니었다면 3도 백성이 거의 다 죽었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이 첩보를 들은 우왕은 술과 고기를 하사하셨다.
1389년(공양왕 1년)에 양광, 전라, 경상도, 절제 체찰사(楊廣 全羅 慶尙道 節制 體察使)가되어, 초토영전선성사(招討營田繕城事)를 겸총(兼總)하니, 구신(舊臣) 김저(金佇)가 변안렬(邊安烈)등과 더불어, 이미 쫓겨난 우왕(禑王)을 복위(復位)시키려고 일을 도모하다가 발각되매, 공이 제일 끝에 연좌되어 당시 문하평리(門下評理)이신 공과 이거인(李居仁)등 27인은 외방(外方)으로 유배되었는데, 공양왕 2년 좌헌납(左獻納) 함부림(咸傅霖)을 보내 경주에서 국문 하니, 대간(臺諫)이 소를 올려 법으로써 논하기를 청하므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이 공을 잘 알기 때문에, 지(地)는 죄가 없으며 무함(誣陷)이다고 변론해 주셨으나 구제되지 못하고, 횡천(橫川)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또 윤이(尹彛), 이초(李初)가 김저(金佇)등과 같이 이성계 축출 모의를 명나라에 호소한 사건으로 모두들 원방(遠方)으로 유배되었는데, 왕이 또 공을 의심하여 계속 계림(鷄林-경주)옥에 둘려다, 청주(淸州)옥으로 옮겨, 국문을 받을 때 공은 고문을 당하여도 자복하지 않고 말하기를 “내 나라의 국통지장(國統之將)으로써, 그 절의가 민망스럽지만 이시중(李侍中-이성계)이 장의(仗義)하여 회군하매 내가 이곽(伊霍)의 고사(故事)로써 시중(侍中-이성계)에게 풍유(諷諭)함은 깊은 뜻이 있음인데, 다시 어찌 이(彛)와 초(初)의 편당이 되리오”하고 말마다 반드시 하늘에 맹세하니, 언사의 뜻이 감개하여 족히 사람을 감동함이 있었으나, 옥관(獄官)이 그 말을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이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생(人生)이 필경 한번 죽음은 있는 것이라. 생(生)을 어찌 족히 아끼리요, 다만 왕씨(王氏)가 나라를 회복하였는데 죄가 없이 죽으니 이것이 가히 애통하다”고 하셨다. 이튿날 장차 엄중한 형으로 국문하려 하는데, 수재(水災)로 옥문이 무너져 형을 면하게 되었다. 공양왕 3년에 위화도 회군의 공(功)을 책록할때, 45인중에 공은 여섯째로 책록되어 2등 녹권과 밭 50결(약83정보)을 하사 받았다. 그 뒤 사헌부와 형조에서 아뢰기를 정지(鄭地)를 윤이, 이초의 무리에 연좌시켜 죽임은 너무 원통한 일이며, 변안렬과 편당하였다 하여 죄에 연좌됨은 실로 무함(誣陷)됨이라 하고, 드디어 석방하는지라. 우인렬(寓仁烈)등과 같이 외방으로 풀려났다.
그래서 광주(光州) 별저에 물러가 살으시다가, 이성계(李成桂)를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심덕부(沈德符)를 문하시중(門下侍中) 공은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불렸으나, 병(病)으로 부임치 못하고 1391년 10월 15일 향년 45세로 별세하셨다.
이에 이르러 공과 권중화(權仲化)는 모든 관직이 복직되었으며, 조선 태종이 공의 공적을 협찬하여, 시호(詩號)를 경열(景烈)이라 내리셨는데,
포의행강왈경(布義行剛曰景)이요.
취덕진업왈렬(就德進業曰烈)이라 하셨다.
그리고 공의 묘소(墓所) 주위의 두루 15리의 땅과, 제전(祭典) 1결(結-5000坪)을 하사하셨다.
공의 업적은 역사에 남아, 인조 22년 공의 유지인 광주시 동명동(그 당시 平坊)에 경렬사(景烈祠)를 짓고, 고아주시와 유림(儒林)들이 봄가을로 제향(祭享)을 올리며, 공의 묘비명(墓碑銘)은 소재(疏齋) 이이명(李頤命)이 쓰고, 황승원(黃昇源)이 지었다.
사우(위패와 영정이 봉안된 곳)
정지장군 예장석묘
경열사 유허비 및 유적정화기념비
사적비
내삼문 및 사우
안내판 및 외삼문
정지장군 유적관리소
정지장군 갑옷(환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