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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최홍준 목사의 제자훈련과 목양훈련을 향한 삶과 신앙적 조명”
최홍준 목사 약력
1945년2월25일, 태생
1970년, 동아대학교 법경대학 상학과 졸업
1970년, 회사원, 유승희와 결혼, 슬하에 최윤정 등 3자녀를 둠
1977년, 서울 구로공단, 철물계통사업경영
1979년(35세), 합동신학원(신학대학원) 입학
1979년, 서울 “장성교회” 대학부 교육전도사(제자훈련 담당)
1980년5월, 서울 “강남은평교회”(현,사랑의교회,옥한흠목사)교육전도사 부임
1982년, 합동신학원(현,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제1회 졸업
1882년, 서울 “사랑의교회” 강도사
1984년, 서울 “사랑의교회” 수석부목사
1986년, 사랑의 교회 “국제제자훈련원”개원, 옥한흠 목사님 원장 취임
1986년, 부산새중앙교회(호산나교회전신,하단) 청빙(400명출석교회)
1987년2월15일, 부산 “호산나교회” 담임목사(1987~2010.12)
1987년9월1일, “평신도제자훈련” 사역 시작
1988년1월17일, “여자다락방모임”시작
1988년4월10~13일, “제1회대각성전도집회”(현,사랑나눔축제) 개최
1989년6월12일, 최홍준목사 위임예배, “남자다락방모임”시작
1989년7월, “제1회 전도폭발훈련” 시작
1995년, 리폼드신학대학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목회학 박사학위(D.Min)
박사학위논문 : “a study of the discipleship monistry training program and its effects on established churches”(제자훈련이 전통교회에 미치는 영향)
1997년, “한민족복지재단” 명예이사장
1997년1월27일, 교회비전21 “미래,꿈,소망”발표
1997년10월3일, 교회설립20주년기념예배(KBS부산홀) 인도
1997년11월3~8일, 북한 나진,선봉방문(2000년7월, 2002년6월 북한방문)
1998년, 부임 11년만에 300명에서 장년기준 2,380명 교회로 10배 성장
1999년1월10일, “비젼21예술원”설립
1999년5월27일, “지역주민을 위한 제1회열린음악회”개최(다대포아파트단지내)
1999년9월4일, “지역주민을 위한 제2회열린음악회”개최(을숙도)
2000년1월1일, “호산나교회”로 교회명 변경
2000년, “호산나복지재단” 설립 이사장 취임
2000년9월29일, 한민족복지재단 제2대 이사장 취임(~2004년)
2001년9월18일, 제86회 합신교단총회 총회장 선출
2001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사(~2010)
2003년, 합신교단신문 “기독교개혁신보” 이사장(~2007)
2003년4월3일, 사회적기업 “굳윌코리아”오픈(강서구녹산공장,장애인7명)
2006년4월16일, 호산나교회, 명지에 지하3층 지상13층의 새성전 입당
2007년5월27일, “부산대부흥2007대회”(해운대해수욕장) 집행위원장
2007년6월17~20일, 교회설립30주년,제자훈련20주년기념 “3020기념축제”개최
2007년10월18~21일, “부산BFGF”(부산프랭클린그래함페스티벌)집행위원장
2008년3월26일, “제1기 치유학교” 개학
2008년8월21~23일, “부산기독교사회복지엑스포2008” 조직위원회 대회장
2008년11월20일, “부산성시화운동본부” 5대본부장(2008~2014)
2008년11월27일, 상담목회컨퍼런스:상담목회를 통한 건강한가정과 교회세우기
2009년5월24~27일, 제22회 사랑나눔축제“내인생의 청신호”
2009년10월26~27일, 제1차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목사와 장로의 행복한 동행
2009년11월23~24일, 제2차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
2009년, D단체,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혐의로 고발 “공소권 없음” 무혐의
2010년,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 3차(3월14~15일), 4차(6월13~14일), 5차(10월18~19일)
2010년(65세)11월7일, 최홍준목사 원로목사추대공동의회 88%찬성으로 추대
2010년12월1일, 65세에 목사 은퇴(2000년, 장로들에게 65세 조기은퇴약속)
2010년, 호산나교회32년 사역보고 : 장년9,800명, 주일학교3,000명으로 성장
2011년, 호산나교회 수요예배 기록 5,662명 달성
2011년,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 6차(3월14~15일), 7차(6월13일~14일), 8차(8월21일~23일), 9차(8월23일~30일), 10차(10월24일~25일), 11차(12월13일~14일)
2011년10월12일, “국제목양사역원”개원(부산시 강서구 명지동 서진프라자7층)
2012년, S단체로부터 고발당함, 무혐의 처리
2012년,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 12차(3월12일~13일), 13차(9월4일~6일), 14차(9월10일~12일), 15차(10월22일~23일)
2012년4월29일, 국제목양사역원 공식홈페이지 개설
2013년,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 16차(3월11일~12일), 17차(10월1일~2일), 18차(10월8일~9일), 19차(10월21일~22일)
2014년,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 20차(3월10일~11일), 21차(9월30일~10월1일), 22차(10월6일~8일), 23차(10월20일~21일)
2015년1월20일, “국제목양사역원” 독립기관으로 출범
2015년2월21일, 국제목양사역원 본원이전:부산시 서구 암남공원로39 풍림아이원 103동2202호
2015년, “부산성시화운동본부” 이사장
2015년, “부산S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2015년, “부산S 부산본부건물 신축반대를 위한 부산시민연대” 상임위원장
2015년8월20일, 국제목양사역원 공식 홈페이지 업그레이드 개설
2015년,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 24차(3월9일~10일), 25차(5월18일~20일), 26차(5월26일~27일), 27차(10월19일~20일)
2016년3월10일, “동성애치유상담학교”(서울 홀리라이프부설) 개교, 상임고문
2016년,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 28차(3월14일~15일), 29차(5월2일~3일), 30차(5월11일~12일), 31차(10월17일~18일)
2017년,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 32차(3월20일~21일), 33차(11월6일~7일)
2018년4월, “대한예수교독립교단 한국개신교미래연합총회” 참여
2018년6월, 한국개신교미래연합총회 사임 및 탈퇴
2018년,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 34차(5월14일~15일), 35차(11월12일~13일)
부산 호산나교회 원로목사 최홍준의 6대사역
1. 목양사역 : “국제목양사역원” 원장
2. 가정사역 : “하이패밀리”, “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 이사장(대표:송길원 목사)
3. 문화사역 : “팻머스문화선교회” 이사장(대표:선량욱문화선교사)
4. 복음사역 : “고구마글로벌미션” 이사장(대표:김기동목사)
5. 선교사역 : “러시아선교회” 이사장(이용권장로)
6. 연합사역 : “부산성시화운동본부” 고문, “부산기독교복지협의회” 대표회장
저서 :
“잠자는 교회를 깨운다”(규장,1998)
“새가족을 위한 12가지 복음이야기”(두란노,2007)
“복음전도-당신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두란노,2007)
“교회, 처음 나오셨다구요?”(팻머스문화선교회,박명아공저,2008)
“장로,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국제제자훈련원,2010)
1. 최홍준, 세상의 길에서 멈추어 하늘을 바라보다
1960년대, 동아대학교를 졸업한 최홍준은 학창시절 만난 “유승희”와 결혼을 한 후 빈곤계층의 삶과 애환을 경험하면서 세계적인 사업가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결혼과 함께3명의 자녀를 둔 가장으로서 어깨 위에는 언제나 무거운 짐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난 최홍준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있는 삶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 휴가 기간중에는 금식을 하며 말씀에 대한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직장생활은 주일 출근이 당연시 되었습니다. 주일성수 문제가 신앙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현실에서 최홍준은 결단을 해야만 했습니다. 교회봉사와 주일출석이 충돌하는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 최홍준은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구로공단에서 철물계통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초기 사업은 번창하였고 무슨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있었습니다. 사업을 확장하여 복음사업을 위해 많은 일들을 감당하고 싶은 욕심이 문제였을까요? 친구 소개로 만난 사람으로부터 어이없는 사기를 당하여 그로 인한 부채를 갚기 위해 1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최홍준은 기독교인으로서 음주와 가무를 하지 않았고 성실하게 일하였는데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까?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위해 최홍준은 금요철야기도에 매진하였습니다. 혹독한 환경적 시험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가장 많은 성경을 읽었던 시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했을 만큼 기도와 성경은 최홍준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습니다.
사업을 정리하고 최홍준은 하나님으로부터 깊은 소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35세의 가장으로서 사랑하는 아내 “유승희” 사모와 어머니와 아이 셋을 둔 최홍준에게 신학공부는 매우 부담스러운 결정이었습니다. 신학을 하려는 최홍준의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은 주경야독의 야간신학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최홍준은 주간신학을 결정하였습니다. 신학은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일이 아니라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포기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최홍준은 당시에 새롭게 설립된 “합동신학원”(현,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제1회 입학생이 되었습니다. 전세보증금이 올라서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해야 하는 위기에 봉착했을 때 학교에서 장학금이 나와 필요를 채워 주었고, 가정의 경제가 학업을 중단하거나 지체하도록 하는 환경적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최홍준의 신앙적 신념과 가치의 힘이 그러한 풍랑을 바라볼 수 없도록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최홍준은 자신을 인도하고 자신의 삶을 결정해 준 성경의 위대함을 직접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은 향후 최홍준과 “제자훈련”이라는 하나의 철학과 개념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최홍준의 위대한 스승이었으며 인도자였습니다.
2. 35세의 신학생 최홍준이 박윤선 박사와 김명혁 교수를 만나다
1979년, 35세의 고령에 총회신학대학원과 합동신학원에서 신학의 길에 들어선 최홍준에게 고3 수험생과 같은 수업과 진도는 쉽지 않았습니다. 20대 청년들과 경쟁아닌 경쟁속에서 뒤따라 가기도 바쁜 일정은 3년의 시간을 고단하게 하였습니다. 신학생 시절, 최홍준은 당대 최고의 보수주의 신학자 박윤선박사와 김명혁 교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김명혁 교수님이 기억하는 최홍준은 언제나 열등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로서의 최홍준을 기억하는 교수님은 언제나 자랑스러운 제자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최홍준은 네비게이토와 베델성경연구모임 활동을 하며 부족을 채우려 노력하였습니다. 박윤선 박사는 목회서신 강의를 통하여 목회자로서 소명을 받았는지 다시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하였습니다. 박윤선 박사는 하나님 중심의 철학으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언제나 기도하는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김명혁 교수님은 진실한 태도와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는 겸허한 신앙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수님의 소중한 아들 김철원이 뇌종양으로 4세의 어린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김명혁 교수님은 좌절과 절망의 나락속에서도 아들에게 천국에 대한 소망을 끊임없이 들려줌으로서 사망이 영생으로 꽃피우도록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후 김명혁 교수님은 평신도 한 분이 자신의 사재로 교회를 세웠을 때 그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개인교회인 듯 교회를 독단적으로 운영하려는 집사님을 바라보며 다툼과 분쟁으로 그 집사를 공격하기 보다는 조용히 사임하는 것을 지켜본 최홍준은 진정한 목자상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한국 최고의 명문 서울대 출신으로서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김명혁 교수님의 겸손과 신앙적 삶은 최홍준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3. 제1기사역 : 장성교회 : 서울 장위동 장성교회의 대학부 교육전도사의 길에 서다
최홍준은 서울 장위동에 소재한 장성교회의 교육전도사로 부임하였습니다. 1980년대, 한국교회는 성령운동을 통하여 양적으로 크게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큰 미래를 대비하기엔 성도들의 성경적 지식과 영적 토대는 매우 취약하였습니다. 신학입문생이었던 최홍준 전도사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영적상황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다음세대를 향한 대학지성들을 대상으로 “디사이플”(Disciple)의 필요성을 절감한 최홍준 전도사는 당시에는 생소하였던 “제자훈련”을 시작하였습니다. 새롭게 태동한 제자훈련이라는 개념은 20대 청년들에게 반향(反響)을 일으키며 도전을 받게 하였습니다. 최홍준 전도사는 교회내의 99%를 차지하는 평신도를 깨우는 일의 중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우리가 다니는 가견적(可見的) 교회는 생활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자신의 삶을 통해 구현해야 하는 평신도의 교회라는 인식이 요구되었습니다. 이러한 평신도들은 어떤 측면에서 영적으로는 다소 방치되어 있거나 방목되어 있었습니다. 교회의 객체가 아닌 교회의 주체자로서 평신도를 진정한 주님의 제자로 구현하는 것이 시대적 사명이며 절대적 요구라는 것을 확신하며 디사이플십을 체계화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최홍준 전도사의 대학부는 제자화되어 가며 성숙한 사례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4. 제2기사역 : 사랑의 교회 : 제자훈련의 대명사, 옥한흠 목사를 만나다
신학교 수업과 장성교회 대학부와 사목활동으로 분주한 한주를 보내고 있는 1980년 3월이었습니다. 당시 강남은평교회를 개척한 옥한흠 목사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최홍준 목사는 장성교회 대학부 사역으로 여념이 없었고 무엇보다 “디사이플십”(Discipleship) 2년차로 한참 성공적인 사역을 하고 있을 때 였습니다. 1978년 7월, 강남 서초동 2층 40평 공간을 전세로 강남은평교회를 개척한 옥한흠 목사님은 9명과 함께 예배를 시작한 이후 평신도 제자훈련에 깊은 관심과 열정이 있었고, 이러한 제자사역을 함께할 동역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1970년대 미국생활에서 “평신도훈련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고 귀국후 체계적인 평신도훈련운동을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1980년 초, 한국교회는 양적팽창을 경험하면서 부흥운동이 확산되어 갔지만 교회와 평신도들의 세속화와 기복주의, 물질주의, 소비주의 현상이 심화되어가는 경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들은 양적성장이 영적성장이라는 자아도취적 사고에 취해 내부적인 문제를 간과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옥한흠 목사는 교회의 가장 주도적인 생산자인 평신도를 세상속에 방치할 수 없는 강한 열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옥한흠 목사에게 있어서 평신도는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서 교역자와 동일한 위치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옥한흠 목사님은 초기 태동기에 제자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이러한 사역에 동참할 동역자를 기대하였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교회는 후기 개척기 또는 태동기에 접어 들면서 새로운 전임교역자가 요구되었습니다. 초기에는 부목사를 찾았지만 제자훈련에 대한 경험이 없거나 목적의식이 분명하지 않는 목회자들로 인해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하게 장성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하고 있는 최홍준 전도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최홍준 전도사는 전도사 초년생에다가 어머니와 아내와 세명의 아이들까지 6명의 가족을 거느린 청빙 기피 1호의 환경이었지만 옥한흠 목사님은 최홍준 전도사와 함께 사역의 꿈을 그리며 그를 청빙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달의 시간이 지나고 4월 초순경, 옥한흠 목사는 다시 최홍준 전도사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최홍준 전도사는 옥한흠 목사님의 부름을 거절하고 춘계방학을 맞아 동두천 “미디안기도원”에서 교회개척을 향한 10일 금식기도에 들어갔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최홍준 전도사는 ① 본인의 나이가 많고, ② 어머니와 아내와 자녀 3명 등 6명의 가족이 많고 ③ 특별한 재능이 없는 교회청빙에 있어서 모든 단점을 다 가지고 있어서 교회개척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0일의 금식기도가 끝나갈 무렵 다시한번 옥한흠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알기로는 전도사가 아닌 부목사를 청빙한다고 들었습니다.” “부목사로 청빙을 하려 했지만 제자훈련 경험이 있는 사역자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새롭게 교역자를 훈련하여 목회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없는데 다행히 전도사님께서 저와 같은 비전의 제자훈련을 하고 있어서 지금이라도 오실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감도 없었고, 탁월한 능력도 없었던 30대 중반의 가장은 개척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1980년 5월, 36세의 최홍준 전도사는 강남은평교회의 교육전도사로서 제2기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개월의 거절 끝에 함께하게 된 옥한흠 목사님과의 대면에서 최홍준 전도사는 그동안 어슬프게 해오던 제자훈련에 대하여 목사님의 지도가 필요하였습니다. 한 시대, 가장 훌륭한 목사님을 만나게 된 최홍준 전도사는 평생의 존경하는 스승과 함께 “제자훈련”이라는 한국교회의 새로운 전기가 될 역사적인 출발점에 서 있었습니다.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옥한흠 목사님과 동아대학교 상과를 졸업한 최홍준 전도사의 학부이력 또한 동일하게 신학이 아니었으며, 제자훈련을 향한 철학과 가치관 또한 일치함으로서 두사람의 관계는 훌륭한 파트너십(Partnership)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강남은평교회는 옥한흠 목사님이 개척한 이후 독립적인 교회당이 없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는 “헌신의 목회자”였습니다. 형식과 불필요한 절차를 혁신하고 순수한 신앙으로 생활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전통적 목회의 구습을 혁신하고 형식과 권위와 외식을 모두 내려 놓으며 오직 그리스도인 다운 섬김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목회자였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성도들을 신앙적으로 육성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교육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옥한흠” 하면 “청빈순수”와 “제자훈련”이 떠오를 만큼 청빈순수한 목회적 삶과 제자훈련에 모든 것을 집중하였습니다.
최홍준 전도사가 부임한 후 새벽기도회때의 일이었습니다. 한번도 빠지지 않으셨던 옥한흠 목사님께서 새벽기도회를 오지 못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최홍준 전도사가 인도하여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한 명의 성도가 교회 입구에서 옥한흠 목사 사모님과 성도들 앞에서 “개척교회 목사가 새벽기도회도 나오지 않는다”며 매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러한 새벽의 소란스러운 사건을 알게 된 옥한흠 목사님은 매우 분노하였습니다. 당일 저녁, 학교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최홍준 전도사에게 옥한흠 목사님은 새벽기도회 후 시간에 일어난 상황에 대하여 자세한 보고를 요구하였습니다. 최홍준 전도사는 새벽에 있었던 일을 순서대로 있는 사실 그대로 옥한흠 목사님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보고를 들으신 옥한흠 목사님께서는 그 성도에게 전화를 직접 걸어 보라고 말씀하셨고 전화를 하여 옥한흠 목사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최홍준 전도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통화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최홍준 전도사는 목사님께서 몸이 많이 불편해서 새벽기도회를 나가지 못했다고 양해를 부탁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옥한흠 목사님은 전혀 다른 질문을 하였습니다. “집사님, 신앙생활 하신지 몇 년이 되었습니까? ~~ 신앙생활 한지 20년이 되신 분이 목사가 사정이 있어서 새벽기도회에 빠질수도 있는 일을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는 일이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라고 하시며 되려 꾸중을 하였습니다. 그 분이 초신자였다면 목사님은 또 다른 방향으로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교회의 기둥으로서 교회의 여러 가지 잡음을 해결하고 교회공동체를 세워 나가야 할 분으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를 순수한 마음으로 알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부교역자들의 생활과 화장실과 부엌 살림에 대하여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옥한흠 목사님은 언제나 사랑과 배려와 자상함이 넘치지만 신앙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강한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탁월한 지도자였습니다. 옥한흠 목사님과 함께하는 사역에서 중요한 역동성은 “예배”(Worship)였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하시는 주일 낮예배 설교는 “복음의 강력한 메시지”가 선포되어 성도들의 성벽과 성전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최홍준 전도사는 주일저녁예배 설교를 통하여 복음을 향한 성도들의 삶을 조명하는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복음과 생활의 영역에서 성경이 무관하거나 무력해지지 않도록 성경말씀이 생활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낮과 밤예배를 통하여 구체화 하였습니다.
영국성공회 요크시 미카엘 벨프리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세계적인 설교자이며 영국교회 갱신을 위해 헌신한 “데이비드 왓슨”(David Watson)은 “복음전도”와 “제자훈련”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왓슨 목사는 “제자훈련”(제자도)으로 번역된 “디사이플십”(Discipleship)이라는 책에서 제자도와 제자훈련을 진정한 교회의 가치로 보았습니다. 왓슨 목사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로서의 교회속에서 성령의 생활을 강조하였으며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제자교육과 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제자도의 생활은 근면, 성실, 검소, 희생, 기도, 복음, 소망과 같은 기독교인의 삶과 직결되는 과제들을 순조롭게 해결하는 중요한 가치가 된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강남은평교회는 1983년, 사랑의 교회로 교회명을 변경하고 새성전에 입당을 하였습니다. 1978년, 강남은평교회 개척부터 7년동안 연간 40%의 성장률을 보여 주었던 사랑의 교회는 1984년, 3,600명으로 성장하였고, 오랫동안 25%의 성장율을 나타내며 2천년, 4만5천명의 교회로 확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성장의 초기에 최홍준 전도사는 강도사와 목사안수에 이르는 1986년 까지 옥한흠 목사님과 함께 제자훈련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았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목회철학은 평신도들의 제자화 동력화에 기초하였고 이를 위해 최홍준 전도사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교회는 한국 복음주의교회의 목회와 평신도 사역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러한 제자훈련 사역은 “국제제자훈련원”(DMI)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랑의 교회는 평신도 운동의 중요성을 한국교회에 선포한 일대 혁신운동의 본산지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교회는 교회가 갖는 두가지 측면을 강조하였습니다. “부르심”과 “보냄”이라는 초청과 파송의 원칙을 상기시켰습니다. 평신도는 교회의 주체인 동시에 세상속에서도 주체라는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로서 한국교회의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무한한 책임의식과 복음구현이라는 사도성의 대명제가 끊임없이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였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에게는 “5대 원칙”이 있었습니다. ①궤도수정불가의 원칙과 ②분산시키지 않는 총력집중과 ③자기 발전을 위한 지속적인 활동과 ④훈련을 받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역불가 방침과 ⑤은혜로운 균형을 이루어 평형을 놓치지 않는 긴장감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목회자에게 훈련되지 않은 그 어떤 평신도들에게도 교회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도록 제도화하였으며 이로서 사랑의 교회 모든 평신도들은 이것을 당연한 책임과 의무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원칙은 타교회에서 사랑의 교회로 이명하였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그 어떤 예외규정을 두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성경대학과 가정생활 세미나 등을 통하여 수시 보충교육을 지속적으로 시행하였으며 이러한 훈련으로 평신도들을 주님의 거룩한 제자로 세워 가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옥한흠 목사님의 꿈은 1984년에 발간한 자신의 저서 “평신도를 깨운다”에서 선포되었고, 1986년, “국제제자훈련원”의 설립으로 실천화 되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2003년, 은퇴이후에도 국제제자훈련원의 원장으로서 2010년까지 열정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2007년 이후, 72세에 소천하기 까지 교회갱신을 위한 첫 번째 타겟으로 목회자의 갱신을 주도하였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청빈, 순수성”을 본 것은 최홍준 전도사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사랑의 교회 목사로서 옥한흠 목사님을 보필하고 사역을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자랑이었고 행복이었습니다. 어느날, 옥한흠 목사님이 최홍준 목사에게 주일오후 설교를 부탁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일 오후 설교를 부담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마친 후에 옥한흠 목사님께서 이번에는 주일 오전 설교를 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당황한 최홍준 목사는 “목사님께서 하시는 주일 오전예배 설교를 제가 한다니 무슨 말씀인가요?” 하고 여쭈었더니 옥한흠 목사님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난 너무 피곤해서 좀 쉬련다. 그동안 쉼없이 달려왔더니 그날 주일은 좀 쉬러 갈테니 최목사가 하게” 혹시 기도원에 가시려는가 하고 되물어 보았지만 옥한흠 목사님은 그냥 좀 쉬러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일 주일이 되어 최홍준 목사가 주보를 보았을 때 다시 한번 깜짝 놀랐습니다. 주보광고에는 “옥한흠 목사님이 쉬러 가셨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목사가 거짓말하지 않는데 성도들이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목사가 간음을 하지 않는데 성도들이 간음을 하겠습니까? 목사가 재물에 욕심이 없는데 성도들이 욕심을 내겠습니까? 한국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모두 목사들의 책임입니다. 목사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부패한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청빈의 목사”로 알려져 있지만 스스로 광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순수의 목사”로 알려져 있지만 설교때 자신이 자랑하듯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거짓말을 허락하지 않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양심적”으로 살려고 노력하였지만 그렇다고 말만 무성한 목사님이 아니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휴식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휴식을 말했고 그대로 휴식을 취했을 뿐이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성도들을 진실로 사랑하였기 때문에 제자훈련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것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것이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는 교육전도사로서 분명한 증인이 되었고, 강도사와 목사로서 그것을 함께 사역함으로서 증인이 되었습니다.
(1) 제자훈련
옥한흠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제자훈련이란 무엇인가? 최홍준 목사님이 함께 사역하며 최초의 은퇴 부목사가 되고 싶었을 만큼 매력을 주었던 제자훈련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제자훈련이란 교회속에 존재하는 99%의 평신도를 교회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도록 훈련하여 평신도 중심의 건강한 교회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오순절의 경험은 그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출발한 교회는 평신도들에 의해 새롭게 조직되었습니다. 평신도들은 교역자와 평등하게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이라는 의식개혁이 요구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각각의 은사를 주셔서 몸의 지체로서 조화로운 기능을 효과적으로 유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생산적인 구조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에서 평신도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거나 소비자이거나 관전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제자훈련을 통하여 평신도들을 본래의 위치로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교회는 교역자의 교회도 아니고 평신도의 교회도 아닌 부름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교회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이로서 교회는 “초청”(부르심)과 “파송”(보내심)이라는 두가지 개념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을 주님의 제자로 만든다” 이것이 옥한흠 목사님의 제자훈련의 목표이며 철학이었습니다. 1천만명의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국가종교와 다름없는 우리나라에서 교회는 무엇을 갱신하고 무엇을 변화시켰는가? 하는 질문에 의구심을 가진 옥한흠 목사님은 ① 나와 내 가족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신앙자세”, ② 나만 복받으면 된다는 “무사안일의 신앙자세”, ③ 주일만 잘 지키면 된다는 “이원론적인 신앙자세”, ④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무능력한 신앙자세”가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사랑의 교회는 이러한 구습을 깨뜨리고 새로운 창조적 제자로 육성하기 위해 “제자훈련”을 시작하였습니다. 사랑의 교회는 타교회 교육과 달리 느슨하고 유연한 훈련이 아니라 강도높고 군대와 같은 훈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내적인 훈련과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외적인 훈련으로 구별되었습니다. 내적인 훈련은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과 인격이 주님을 닮아 가도록 훈련하는 것으로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내면이 변화되는 훈련입니다. 내적인 훈련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훈련입니다. 외적인 훈련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훈련으로 사회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봉사와 섬김을 통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는 공격적인 훈련입니다.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에는 제자가 되기 위한 32주 과정의 제자훈련과 리더(순장)가 되기 위한 34주 과정의 사역훈련이 있으며 초기에는 초급제자훈련과 고급제자훈련으로 호칭하였습니다. 32주 과정의 제자훈련은 제자훈련의 기초를 다지고 구원의 진리를 깊이있게 깨달으며 신앙의 인격을 바로 세워 제자로서의 삶을 정립시켜 나가는 훈련입니다. 사역훈련은 32주 과정의 제자훈련을 반드시 졸업한 사람에 한해서 34주간 실시하며 새생활의 키워드:성령, 교회와 평신도의 자아상, 소그룹 모임과 리더십, 신구약성경의 주제와 내용 등 4대 주제를 중심으로 영성을 강화하는 훈련입니다. ① “새생활의 키워드:성령”과정은 신구약성경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로마서 8장을 중심으로 구원의 확신, 구원의 감격,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는 삶을 체험하는 훈련입니다. ② “교회와 평신도의 자아상”과정은 교회론을 통하여 제자훈련의 철학을 이해하고 제자도를 통하여 제자훈련의 필요성과 태도전환에 관한 훈련입니다. ③ “소그룹 모임과 리더십”과정은 제자훈련에 가장 적합한 환경인 소그룹활동에 대하여 배우고 소그룹의 리더(순장)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과 인도에 관한 리더십, 인도법, 성경공부와 적용에 관한 귀납법적 성경공부를 하는 훈련입니다. ④ “신구약성경의 주제와 내용”과정은 신구약성경 66권 각권들이 말씀하는 주제와 배경과 내용을 배우고 정립해 가는 훈련입니다.
제자훈련의 기원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마태복음28장18~20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세상 가운데로 나아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거행하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교훈한 모든 말씀을 가르쳐 그것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제자들의 제자들에게 항상 함께 있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제자를 명령하신 분은 누구인가요? 우리가 신앙하며 모든 권세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십니다.제자의 대상은 모든 족속이며 제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세례를 거행합니다. 결국 제자훈련의 모든 센터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훈련의 내용을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모든 말씀”이라고 규정하였고 이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3년동안 제자를 세우고 그들을 양육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들이 배운 과정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찾지 않았습니다. 12명이라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시고 소수정예화로서 다수를 동력화 하는 것이었습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화를 복음화로만 이해하였습니다. 그 후로 1700년 이상의 세월속에서 이러한 제도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 후 선교단체들을 통하여 제자훈련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속에서 제자훈련은 필요를 갖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교회가 강남은평교회로부터 시작된 제자훈련을 영속적인 비전으로 세운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과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교회가 세상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발현하였습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제자훈련은 소수정예화와 함께 교회의 총력화를 가져 왔습니다.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의 성공적 안착에는 일관성이 있었습니다. 흔들림 없는 규칙과 준수를 통하여 예외규정 없이 전교인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은 서울, 인천, 등 대도시 교회뿐만 아니라 농촌, 변두리지역, 중심가지역, 공단지역, 주택단지 등 어디에서나 제자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제자훈련은 훈련되어진 교역자들에 의해 소그룹을 통하여 이루어 지고, 제자훈련을 받은 성도들은 교회안에서 유기적인 협력관계를 질서있게 유지하며 함께 세워감으로 세상앞에 그리스도의 제자로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교회를 갱신하고 개혁적인 교회로 세상앞에 담대하려면 제자훈련외에 다른 대안이 없을 것이라고 옥한흠 목사님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30년 동안 국제제자훈련원을 이끌며 끊임없는 동력이 되게 하였습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교회등록을 마치고 1년이 경과하고 세례자로서 3년이 경과하였다면 제자훈련은 가장 기본적인 코스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모든 성도들 또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다른 어떤 교회로 가든지 그는 훌륭한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님과 함께 담임목사님의 목회철학을 가장 잘 이해하고 소통하였던 최홍준 목사는 사랑의 교회 수석 부목사로서 제자훈련을 독립기관으로 설립하는데 전념하였습니다. 1978년, 9명으로 시작한 사랑의 교회는 8년간의 제자훈련을 통하여 3,600명의 성도로 급성장하였으며 전체 성도의 80%에 해당하는 2,800명이 제자훈련을 받는 놀라운 성과를 가져 왔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그런 최홍준 목사를 “제자로 살고 제자삼는 제자로 남겠다는 각오로 달려온 목회자”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랑의 교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부목사로서 은퇴까지 고려하였던 최홍준 목사에게 1986년 10월, 부산 새중앙교회 원로목사이면서 교단의 원로이신 노진현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당시 부산 새중앙교회는 300명이 출석하는 낙후된 사하지역의 교회로서 새로운 지도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제자훈련의 성과를 통해 나타난 열매를 바라볼 즈음 최홍준 목사는 여기에 만족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제자훈련을 통하여 나타난 성도들의 변화속에서 최홍준 목사는 수석부목사라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목회할 수 있다는 확신을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과 같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조직체가 아니라 생명체라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으며 이로서 교회는 건강성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속에서 성도 각 개인과 교회가 함께 자라는 것은 너무나 큰 기쁨이었고 최홍준 목사는 이것을 실현하는 중요한 동역자였습니다. 사랑의 교회의 부흥을 바라보며 최홍준 목사는 교회개척과 단독목회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접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의 수석 부목사로서 국제제자훈련원을 섬기며 한국 최초의 원로 부목사가 되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서울의 모 교회에서도 최홍준 목사를 청빙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홍준 목사는 옥한흠 목사라는 정신적 지주의 높은 벽이 두렵고, 옥한흠 목사님과 같은 목회를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사랑의 교회 수석 부목사로서 옥한흠 목사님을 섬기고 있는 자긍심 또한 스스로를 붙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갑자기 걸려온 노진현 목사님의 전화는 매우 당황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교단의 어른에게 거절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머리숙여 정중하게 사양하면서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에만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노진현 목사님께서는 매주 월요일 마다 전화를 주셨습니다. 지나친 거절도 교만이고 예의가 아니었지만 이렇게 부담스러운 기간은 4개월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결국 허락아닌 허락과 같은 애매모호한 답을 하게 된 최홍준 목사는 이런저런 고민으로 잠을 이룰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이 진행되는 동안 부산 새중앙교회 노진현 목사님은 허락으로 받아들이고 공동의회까지 개최하여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버렸습니다. 신학교 초년시절에는 농촌 산간 벽지도 좋습니다라는 심경이 있었지만 오랜 서울 생활은 최홍준 목사를 타성에 젖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 보다 자녀들이 염려되었습니다. 서울 생활에 익숙한 아이들을 데리고 낯선 땅 부산으로 간다는 것은 진학문제와 정착문제에 있어서 걸림돌이었습니다. 사람이란 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천명의 사랑의 교회는 한국을 대표하는 리더교회로 자라고 있고, 최홍준 목사는 그곳의 가장 촉망받는 수석 부목사로 있었습니다. 국제제자훈련원의 설립으로 제자훈련은 더욱더 박차를 가하며 한국교회 성장의 새로운 원동력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부산 새중앙교회 노진현 목사님의 전화는 이러한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최홍준 목사는 옥한흠 목사님께 모든 것을 위임하였습니다. 최홍준 목사는 옥한흠 목사님께서 자신을 놓아 주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최홍준 목사 스스로가 생각해 보아도 국제제자훈련원의 설립으로 자신의 일이 더욱더 많아질 것이 당연하였고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옥한흠 목사님의 대답은 너무나 의외였고, 최홍준 목사의 귀를 의심케 하였습니다. “최목사, 그곳으로 가게나”, “최목사라면 잘 할 수 있으리라 믿네. 전통교회에서도 제자훈련이 가능한가에 대한 하나의 시험장소가 될 수도 있으니 하나님께서 최목사에게 주신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최홍준 목사는 옥한흠목사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상실감에 섭섭함을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내심 붙들어 주기를 너무나 바랬었는데 “혹시 그동안 내가 떠나 주기를 바랬던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 마져 들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는 한동안 할 말을 잃었습니다. 평생동안 옥한흠 목사님을 모시며 제자훈련을 반석위에 세우고 싶었던 최훙준 목사는 이제 혼자가 된 듯한 마음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최홍준 목사의 생각은 짧았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김영순 사모님은 옥한흠 목사님께서 허락한 그날로부터 3일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전하였습니다. 최홍준 목사를 보면 허락을 취소할 것 같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옥한흠 목사님은 자신의 필요보다 노진현 목사님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고민하는 분이었습니다.
“최 목사, 난 자네가 여기서 떠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서운하네. 그러나 언제까지나 여기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곧 50세가 되고, 60세가 되어서도 부목사로 목회하는 것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자네는 담임목회를 해도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는 그릇이네. 나이가 들어서 갈등하지 않고 부목사로 있을 자신이 있는가? 그때는 후회해도 너무 늦어 버린거야. 결혼 적령기가 있듯이 최 목사에게도 지금이 적령기일세. 지금 내가 자네를 붙잡고 있다가 나중에야 놔주면 그때는 갈 곳도 없고 하나님 앞에서 자네가 받은 여러 은사들을 펼칠 수 있는 기회도 없을 것 아닌가? 그러니까 여러 생각 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그곳으로 가게나.”
옥한흠 목사님의 진심을 듣고 바라본 최홍준 목사는 담임목사님에 대한 존경심을 잊지 못하였습니다. 최홍준 목사는 20대 청년기 직장생활을 하였고, 훌륭한 기독사업가로서 교회를 돕는 부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35세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하였고, 옥한흠 목사님이라는 훌륭한 스승이자 동역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7년의 시간동안 “제자훈련”이라는 놀라운 기독교 교육의 실현을 통하여 제자훈련의 열매와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풍성한 열매의 증거들을 바라보면서 이제 자신이 직접 독립된 교회라는 광야에 나가서 이것을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5. 제3기사역 : 호산나교회 : 호산나교회를 부산의 성시화 기지로 육성하다
부산 새중앙교회는 부산 중앙교회에서 분리된 교회로 부산 중앙교회 담임목사님이신 노진현 목사님을 원로로 섬기며 10년이 흘렀습니다. 분열과 상처투성이의 부산 새중앙교회에 노진현 목사님이 원로로 부임하고 신임교역자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지만 장로님들과의 마찰과 교회내의 문제 해결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청렴 결백하신 노진현 원로목사님께서 인격적 목회를 하시며 성도들을 어루 만지는 정성에도 불구하고 500여명의 성도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중심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부산 새중앙교회 성도들은 모두 부산 중앙교회 출신으로 전통교회의 전형 그대로 였으며, 사실상 42년의 역사를 계승한 교회였습니다. 당회원들은 50대 후반의 장로들로서 전임 목사님과의 잦은 마찰로 전임목사님은 자신의 추종성도들과 함께 교회를 떠나 개척을 하였습니다. 이로서 부산 새중앙교회는 40~50대의 공동화 현상이 심화되고 청장년층은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하였습니다. 50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알고 있었던 최홍준 목사님이 부임하였을 때 그곳에는 400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다시한번 상처를 겪고 있었습니다. 재정은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있었고, 성도들은 상호 불신과 감정의 골이 깊어서 대화다운 대화가 불가능하였습니다. 교회일은 많지만 정작 일을 해야 할 사람은 찾을 수 없었고,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짜증스러운 불만이 표출되었습니다. 교회는 어느 곳에서도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활력을 잃었고, 예배는 죽어 있었습니다. 1987년 2월15일, 두려움과 기대가 교차하는 마음으로 부산 새중앙교회 담임으로 첫발을 내 디딘 최홍준 목사는 이제 부목사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당회와 의논하고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담임목사이며 당회장이었습니다.
(1) 부산새중앙교회 : 왕초보 담임목사 최홍준을 믿어 주십시오.
부산 새중앙교회는 제자훈련으로 무장된 사랑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모두가 병원에서 치료해야 할 부상병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스스로 환자가 되어 버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이제 담임목사로서 그들을 말씀으로 치유하고 회복해야 했습니다. 용기가 요구되었고, 그것을 성취해 나갈 리더십이 필요하였습니다. 부산으로 내려갈 때 선배 목사님들로 부터 담임목사 1년차에는 개혁하려는 의욕보다 관찰하는 자세로 일하라는 조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부임과 동시에 주보담당 장로님께서 이번 주일 설교 원고를 주보부에 제출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매우 당황했지만 설교문 대신에 인사말을 적어 주보부에 원고를 제출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보검열 장로님은 설교원고를 제출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였습니다. 주일 말씀이 선포되기 전에 설교원고를 미리 달라는 요구를 이해할 수 없었던 최홍준 목사님은 설교를 사전에 주보에 게재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라 강의와 같고,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일부 내용이 수정되기도 하는 이유를 들어서 인사말로 가늠하겠다고 장로님에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던 장로님은 곧바로 당회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였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설교원고를 주보에 게재하는 제도가 왜 그렇게 중요하고 왜 이 제도가 공식화 되었습니까?”하고 질의하게 되었고, 장로님들은 전임 목사님께서 매주 같은 말씀으로 반복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으며 설교준비를 하시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설교원고를 주보에 게재하는 방식으로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매주 다르게 하도록 당회에서 결정하였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 하나의 공동체의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할 당회가 이렇게 불신의 벽으로 높이 쌓여 있다는 것에 대하여 최홍준 목사님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약속했습니다. “장로님, 잘 알겠습니다.앞으로 제가 했던 설교를 다시 반복하거나, 같은 내용을 또 다시 전하는 일을 하게 된다면 장로님들이 원하는 대로 설교원고를 사전에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당분간은 저를 믿어 주시고 이 문제를 맡겨 주신후 지켜 보셨으면 합니다.“ 그후로 부산새중앙교회와 호산나교회 당회에서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에게 있어서 설교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비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하나님과의 가장 은밀하고 밀접한 관계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때로 사랑의 교회가 그립고 그곳의 성도들의 응원과 격려에 눈물이 날때도 있었습니다. 3년만 힘을 내어 해보자!!는 용기로 시작하였지만 어느것 하나 쉬운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최홍준 목사님은 누구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목회자의 잘못이고 목회자가 만든 덫과 그림자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새롭게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부산 새중앙교회는 분립 1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곳곳의 시설이 낙후되어 교체 또는 보수가 불가피하였습니다. 교회지붕에 누수가 있어서 비만 오면 물이 떨어져 내렸고, 엠프시설은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하였습니다. 교회의 시설이 이 지경이 되도록 장로님들은 왜 손을 놓고 있었는지 이해할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답은 교회재정에 있었습니다. 교회의 재정은 그야말로 최악의 구도였습니다. 400여명의 성도가 있는 중형교회에서 재정의 부족은 이해할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교회 인근 대부분의 상가로 부터 부채가 있었고 담임목사 사택 또한 세입자를 내 보내고 입주를 해야 하는데 그마져도 전세금을 대출하여야 하는 위기가 계속되었습니다. 사례비는 어떨까요? 재정부장이 매월 다른 곳에서 융통하여 지급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가운데 그 또한 몇일씩 밀리기가 일쑤였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기초수급자이거나 빈곤계층이었습니다. 단 한명의 선교사에 대한 지원도 없었고 구제헌금도 전혀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동절기 유류대가 없어서 교회난방이 단절되어 추위속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그야말로 시스템불능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좌절과 절망에 빠져있고 희망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교회의 중요성을 잃어 버렸고 각자의 삶은 기댈곳이 없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담임목사로서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전한 편지의 글처럼 교회를 살리기 위한 헌금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함께읽는 성경에서 믿음이란 들음에서 나는 것이라고 저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설교할 때 마다 여러 곳에서 잘 들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럴 때 마다 여러분들을 돌볼 책임이 있는 저 자신이 얼마나 마음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말씀을 듣는 기능이 마비되어 있다면 그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에 새롭게 등록하는 새신자들에게도 말씀이 들려야 믿음에 굳게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전혀 들리지 않는 앰프 시설로 인해 우리 모두가 답답해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이 일을 감당할수 없다면 후일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사는 것이 어렵고 힘든 가운데 있지만 우리가 조금만 힘을 낸다면 우리는 이 일을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손으로 우리 교회의 앰프를 교체하고 새롭게 설치하도록 용기를 냅시다!!”
장로님들의 우려와는 달리 성도들은 힘을 보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결국 모두의 참여와 감탄속에서 성취되었으며 성도들은 설교와 찬양에 감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이 낸 헌금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사용되고 있음에 자긍심을 가졌습니다. 성도들은 작은 것에서 힘과 용기와 은혜를 누리게 되었으며 최홍준 목사님은 이렇게 성도들의 마음과 심령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부산 새중앙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리 주일 예배시간에 성도들이 헌금한 십일조와 감사헌금 명단을 모두 낭독해야 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이 황당한 일을 매주일 마다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생각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장애물은 장로님들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장로님들은 일단 제동부터 걸고 전통을 고수하려 합니다. 그러나 최홍준 목사님이 물러 서지 않고 결과를 보자고 하면 그 결과에 만족하는 도마의 원칙을 준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결국 예수님 스스로가 자신을 증명하였을 때 그때서야 믿음의 반열에 이르렀습니다. 부산새중앙교회 장로님들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예배시간에 헌금자 명단을 일일이 호명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주보에 모두 게재하는데 그것으로 대신하고 예배시간에는 헌금기도만 하면 않될까요?”, “절대 않됩니다. 안그래도 헌금이 적게 나와 아무일도 할수 없는데 자신의 이름마져 부르지 않는다면 헌금은 절대적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 만큼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 또한 최홍준 목사님이 증명을 해야만 했습니다. 주일 예배시간에 헌금 호명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 그 주간에 헌금이 어떻게 되는지 테스트(Test)해 보기로 장로님들과 합의를 보았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개월의 테스트 기간중 그 이전의 헌금에 비하여 2배의 성과를 나타내었습니다. 헌금이 잘 나오게 하려고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애를 써 보지만 교회 만큼은 다르게 적용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번엔 교회 냉난방시설 교체 건이 당회에서 쟁점이 되었습니다. 1980년대 말, 당시 부산지역의 교회들은 냉난방시설에 다소 둔감하였습니다.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은 부채와 수박이 여름을 이기는 비결이라고 말하고, 장로님들은 선풍기로도 충분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바라보는 최홍준 목사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자신이 옳다고 정의한 일에 대하여 중단의 의지가 없었습니다. 설득하고 설명하여 기회를 얻고 그 기회로 자신의 생각을 증명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도하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라도 교회 내 냉난방시설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요. 우리는 여름을 참고, 찐득한 냄새를 이기며 예배를 드릴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 교회를 다니지 않던 사람들은 무엇이 부족하여 무덥고 후덥지근한 교회로 나올까요? 불신자들이 다니는 술집과 음식점과 다방같은 곳을 가본적이 있나요? 한결같이 냉난방 시설이 잘되어 있어서 누구나 찾는 곳입니다. 설교도 생소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마져 어색하기 짝이 없는 교회에서 후덥지근하기 까지 한다면 여러분의 불신앙 친구들은 교회로 쉽게 나올수 있을까요? 추운 겨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뜻한 음식점과 커피점과 아랫목이 있는데 굳이 추운 교회로 나와 앉아 있으려 할까요? 믿는 사람들만 나와서 예배드리는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언제나 평화로운 휴식처요 피난처이며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시설투자는 결코 사치이거나 낭비가 아닙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수요예배 시간 “에베소서 강해”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올바른 교회관과 평신도 지도자관을 가르쳐 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문제는 성경적인 삶의 원리가 무엇인가? 하는 기본적인 가치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이 부임한 후 등을 돌렸던 청장년층이 교회로 돌아 왔고 조금씩 마음문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도들이 힘을 모으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논쟁보다 그것이 가져오는 유익을 먼저 생각해 본다면 그것을 누리는 당사자는 결국 자신들이 될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쉽게 알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최홍준 목사님의 가치를 “최씨고집”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최홍준 목사님이 고집을 피웠기 때문에 그것은 성취되었고 그로 인한 잡음들은 한결같이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어떤 경우에도 경륜과 식견이 높은 장로님들을 도외시 하거나 정치적 대립각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분들의 리더십과 삶을 존경하고 공동목회자로서 함께 가야한다는 의지가 강하였습니다. 사실 최홍준 목사님은 오랜 부교역자생활로 인하여 사랑의 교회에서 당회에 관한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채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은 회의중심의 당회를 지양하고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 수시로 모여서 대화형식의 자유로운 의견교환을 하셨기 때문에 전통적인 교회의 당회운영에 관하여 전혀 알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부목사로서 당회참여율이 매우 낮아 회의 진행에 필요한 동의, 재청, 가부 등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서 전통적인 당회운영 방식은 장로님들을 통하여 배워야만 했고 회의 진행에 많은 시행착오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홍준 목사님은 현재의 직선적이고 날카로운 당회운영을 유연하고 대화가 가능한 회의와 토론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과 눈물의 시간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1980년대 말에는 오늘날 상상할 수 없는 논쟁이 끊임없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가지는 “복음성가를 예배시간 중에 부를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부산새중앙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는 당회에서 새로운 쟁점이 되어 논란을 빚게 되었습니다. 한가지를 해결하고 나면 또다른 한가지가 터져 나오고, 어떤 때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확산되기도 하는 것이 교회라는 사실을 최홍준 목사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통적인 보수주의 목사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시대의 환경과 변화에 대처해 나가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을 능히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세상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구현해 내는 것 또한 교회의 존재 목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앞문과 뒷문을 모두 잠근채 폐쇄적이라면 젊은청년들은 교회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청년들이 즐겨 부르던 복음성가를 지금까지 예배시간에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도 앞으로도 부를 수 없다면 옛날을 기억해 보십시오. 남녀가 어떻게 한 장소에서 서로 얼굴을 맞대며 예배를 드릴수가 있었습니까? 그러던 어느날 중간의 휘장을 치우게 되었을 때 교회는 양분되었고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오늘날 그것으로 시비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마루바닥에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던 어느날 의자가 들어올때도 수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오늘날 의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시대가 변하여도 본질인 성경은 그대로 있습니다. 본질이 아닌 다른 문제들로 인하여 분쟁과 다툼이 일어난다면 성도들은 지도자들의 목소리에 두려워 하고 불안해 할 뿐입니다. 복음성가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송가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곡조있는 기도요 우리의 고백입니다. 이것을 예배중에 부르는 것으로 지금은 논쟁이 있지만 앞으로 수년내에 이 문제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후로 부산새중앙교회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는 자연스러운 찬양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장로들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장로가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최홍준 목사님은 생각했습니다. 젊은 시절 최홍준 목사님은 그렇게 주장과 논리를 앞세우며 새 기치를 올렸고, 전통주의와 보수주의에 익숙한 장로님들은 미우나 고우나 최홍준 목사를 세우며 함께 성장해 가는 교회를 감당해 내고 있었습니다.
전임목사가 떠난후 부산새중앙교회는 1년간이나 담임목사님이 없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운영은 물론 심방이 거의 정지 상태로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성도가정의 심방이 시급하였던 최홍준 목사님은 가장 먼저 환우들과 극빈자 가정을 돌아 보았습니다. 관례대로라면 장로님 가정부터 심방을 시작하여 각 가정마다 풍성한 식탁이 준비되어 있는 환영파티가 연일 계속되는 것이 전통적인 심방이었지만 최홍준 목사님은 그러한 형식주의를 부담스럽게 여겼습니다. 장기간 병원에 누워 있거나 질병과 상해로 고통받는 환우들을 찾은 최홍준 목사님은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간절한 기도로 응답하였습니다. 빈곤계층과 독거노인 가정을 돌아보는 일에서 그들의 문제가 목회자의 문제로 와 닿았습니다. 그 다음 장로님과 권사님과 집사님들의 가정을 차례로 방문하였지만 식사는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대신 시간적 여유를 갖고 형식을 타파하며 자연스러운 대화로 연결하는 삶이 있는 심방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귀납법적인 심방에 놀란 성도들은 그동안의 형식적인 심방에 많이 익숙해져 있어서 당황한 눈빛이 역력했습니다. 그와 함께 성도들은 영적으로 매우 무지한 상태로 있었으며 말씀에 기초하지 못한 위험한 신앙에 놓여져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교회가 겪는 공통적인 것으로 교회교육의 부재가 갖는 가장 큰 리스크(Risk)였습니다.
교회 장로는 목사와 함께 교회를 사역하는 사람들로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도들과 청년들 앞에서 지지와 힘을 갖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교회의 어른으로서 인격적이고 신앙연륜에서 나름대로는 저력이 있는 분들이었지만 말씀의 권위가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 장로님들 대부분이 새벽기도회를 나오지 않는 관계로 성도들로부터 늘 지탄의 대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생활하는 장로님들의 고충을 이해하며 성도들에게 새벽기도회로 신앙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관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목사와 장로는 성도들로부터 존경받는 대상이므로 기도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수요예배후의 시간을 활용하여 기도회를 갖도록 하여 부족한 기도의 분량을 채우도록 하였습니다. 한편으로 장로들과 함께 사역하는 동역목회를 주장하였습니다. 성경의 원리는 동역입니다. 교구를 6개 교구로 분리하여 장로님들이 6개 교구를 맡아 그 교구의 어려움과 문제점을 함께 해결해 나가는 지혜를 모으기로 하였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미리 준비한 교구와 교구내의 문제점과 각 가정의 상황을 정리한 일목표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장로들이 시작한 기도모임으로 교회의 분위기는 예전과 달리 밝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말들속에서는 상처가 발생하였지만 기도모임 속에서는 치유함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기도로 시작한 소규모 모임들이 부산새중앙교회 제자훈련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수요예배후의 기도회는 심야기도회로 더욱더 성숙해져 갔으며 이러한 심야기도회 시간을 통하여 목사와 장로들이 환우 교인들에게 안수기도하는 치유집회로 발전하였습니다.
(2) 제자훈련의 태동과 성장
기도회 모임이 활성화하면서 교회의 각기관과 교구에서 자발적인 기도모임이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기도로서 몸과 마음을 치유한 성도들은 예전의 좌절과 패배주의를 벗어나 새로운 용기와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이러한 기도훈련을 배경으로 “새가족반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당회는 브레이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장로들은 대찬성을 하였고, 장로들부터 이 교육에 참여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에 동참해 주었습니다. 이로서 제자훈련의 기초가 되었던 초기 새가족 성경공부반은 5주과정으로 편성되었으며 교회의 가장 모범적 위치에 있는 장로님들부터 시작되었습니다.
㉮ 제자훈련반 이렇게 편성하면 된다!!
① 집중(Concentrate) : 조금씩 천천히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어 가는 흥미롭고 경이로운 작업은 제자훈련이 갖는 참맛인 동시에 인내심입니다. 훈련의 점진성과 철저성을 위해 목표와 과정에 대한 집중이 훈련의 성공을 가늠하는 생명입니다.
② 소수(Few) : 지도자가 담을 수 없는 인원은 과욕에 불과하며 실패하게 됩니다.
③ 세밀한 분류(Fine classification) : 동질적인(Homeogenous) 교인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구성해야 합니다. 연령의 차이, 교육수준의 차이, 고민의 내용과 종류가 전혀 다른 이질적인 집단내에서는 마음문을 열지 않고 나눔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④ 유지점검(Maintenance and inspection) : 조직이 편성된 후에는 불만을 해결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재편성은 불신과 혼선만을 초래할 뿐입니다. 편성을 유지하면서 부족을 보충하는 지혜를 찾고 그것을 해결해가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합니다.
1987년 9월1일, 최홍준 목사는 더디어 부산 새중앙교회에서 제자훈련의 태동을 선포하였습니다. 제자훈련에 참여하는 성도들은 신앙정도, 연령, 학력, 경제수준, 거주지, 등을 고려하여 A,B,C로 분류하는 작업을 통해 조편성을 하였습니다. 부교역자가 어느 반을 맡게 되어도 유감이 없도록 최홍준 목사님 앞에서 편성표를 제비뽑아 배당을 하였습니다. 이로서 반을 지도하는 교역자와 편성된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그 반에서 순종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편성후에 주보에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면 그 가운데 어떤 성도들은 다소 불만을 표출하지만 제자훈련 3개월이 되기 전에 대부분 만족하는 태도를 보여 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특별히 장로들은 최홍준 목사님께서 직접 제자훈련을 인도하였습니다. 전통교회 장로님들과 목사는 상호 경쟁관계이거나 견제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장로님들을 진정한 평신도 리더로 성장시켜서 담임목사와 동질감을 갖고 목회의 가장 훌륭한 동역자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6명의 장로들 가운데 4명의 장로가 사역반까지 졸업하고 모두 순장이 되었습니다. 4명의 장로님들은 제자훈련에 재미를 느끼고 과제에도 적극적으로 순종하며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50대를 넘어 60대 어르신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훈련은 매우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모두가 좋은 분들이지만 한분씩 맨투맨(man to nan)으로 설득하려 해도 전혀 듣지 않는 분들에게는 강제로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분들 가운데 어떤 분은 실수로 아픔을 조금이라도 건드리게 될 경우 매우 큰 상처로 발전하여 감당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로서 가시같은 성도까지 안으면서 가야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것을 감내하는 것 또한 최홍준 목사님의 몫이었습니다. 상대방을 설득하기 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이 최홍준 목사님이 해야할 지혜로운 발견이었으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최홍준 목사님은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러한 불같은 성격으로 인하여 초기 사역에서는 스스로 병이 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나아졌다고 하지만 그 성격이 어디 갈까요?
㉯ 탈락위기에 놓인 훈련생을 격려하는 법
1. 무엇보다 목회자 스스로가 제자훈련에 대한 확신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2. 난관에 직면한 훈련생의 영적, 육적, 사회적 상황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3. 단순히 의무감에 호소하거나 직분, 신앙, 연조 등을 이유로 열심을 재촉하지 말고 제자훈련의 당위성과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을 함께 나누고 영광과 보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고취시킵니다.
4. 생활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장애물들, 일례로 입시공부, 군대 훈련, 스포츠 훈련과정, 신입사원 연수, 마라톤 등의 예를 통하여 모든 훈련에는 어려움이 존재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특히 영적인 훈련인 제자훈련에는 세상의 훈련보다 강한 악의 제재와 거부감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함께 그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5. 제자훈련은 많은 굴곡과 망설임으로 인하여 더욱 더 가치있고 보람있는 것임을 잘 설명하고 다시금 동기를 부여해서 끝까지 갈 수 있도록 기도와 격려로 힘을 더합니다.
제자훈련의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양극단에서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제자반에서 신학적인 논쟁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는 지극히 더물었습니다. 아주 사소하고 별 문제될 것이 없을 것 같은 작은 문제에서 발화하여 조금씩 커져가는 것입니다. 서로간의 마음을 조금씩 상하게 하지만 명확히 규명되기도 어려운 농담이나 후일담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특별히 경계해야 했습니다. 이것을 조기에 수습하지 못할 경우 중도 탈락하는 성도가 나오고 리더도 지치게 되면서 반이 균열되는 현상까지 일어납니다.
㉰ 제자훈련을 힘들어 하는 4가지 이유
1. “나는 이렇게 밖엔 살지 못하는데” : 자신의 생각과 삶의 수준이 적나라하게 드러날까 염려하고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2. “저 사람만 나오지 않는다면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팀 내 불편한 사람이 있어서 마음 열기가 힘들고 나누는 것 조차 부담스럽습니다.
3. “저 분은 왜 저럴까?” : 지도자와의 충분한 신뢰형성이 없어서 본질을 벗어나 자꾸만 떠도는 경향이 있습니다.
4. “또 날 시키면 어쩌지?” : 처음부터 반 배정에 문제가 있어서 훈련을 따라 가기가 매우 힘들고 부담스러워 합니다.
제자훈련에 있어서 리더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리더자를 세울 때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 가지로 점검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었습니다. 리더자는 특별히 제자훈련 과정에서 탁상공론식 이론에 집착하거나 잡담과 주제를 벗어나는 경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이러한 균형의 유지는 전적으로 리더자의 리더십에 달려 있으므로 지혜로운 진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최홍준 목사님이 부임하기 전부터 부산새중앙교회에는 청년부부 중심의 “에덴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최홍준 목사님은 기관 재편성을 통하여 해체하려 하였지만 에덴회원들의 반발과 함께 회의 존속을 강력히 요구하였기 때문에 몇 명의 회원을 추가하고 담당 교역자를 두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12명의 반원 가운데 순장으로 쓰임 받은 사람은 그 가운데 3명에 지나지 않았고 결국 에덴회는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최홍준 목사는 아무리 목표가 선하고 비전이 있어 보여도 교회내의 사조직은 결국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자훈련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은 교재중심의 훈련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제자훈련을 시도하는 리더들은 대부분 교재중심으로 진행을 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고 당연한 것이라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훈련의 목적은 지식 습득이 아니라 훈련을 통하여 사람을 변화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소명을 받은 일군으로 성장하게 하는 것이므로 교재중심이 아니라 사람중심으로 훈련을 함께 이어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말합니다. “교재만 눈에 들어 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제자훈련이 아닙니다. 사람이 보일 때 그때 누구에게 어떤 질문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 되심을 발견하고 감격한 형제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 맞을까요?반대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전혀 없는 형제에게 하나님께서 네 모든 소유를 요구한다면 전적으로 위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매우 위험하고 비효과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은 사람을 보고, 사람을 읽고, 심령을 살피는 매우 세심한 영적 활동입니다.”
제자훈련이 본격화하면서 교회조직 정비의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현재의 구역조직은 교제모임으로 전락하고 명목상 유지되는 매우 비효율적인 조직으로 방치되다 시피 하였습니다. 어떤 구역은 칠순이 되어가는 할머니께서 구역장을 맡고 계셔서 젊은 층을 흡수하며 예배를 인도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대대적인 교회조직을 혁신하기 위해 당회를 소집하였습니다. “이제부터 구역을 조직적으로 분류하고 구역모임을 ”다락방 모임“으로 변경하겠습니다. 각 구역장은 제가 직접 임명한 순장이 맡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당회는 이제 최홍준 목사님에게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습니다. 모든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최홍준 목사님을 통하여 성장해 가는 교회를 바라보며 지지를 보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순장을 임명하기 위해 구역장들을 순장교육에 참여토록 하였습니다. 순장교육은 성경문제지를 나누어 주고 그것을 귀납적으로 훈련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교육에 뒤쳐진 60세 이상의 여성도들에게 “마리아반”을 새롭게 편성하고 매주 금요일(1998년 이후 수요일) 오전 10시~12시까지 2시간동안 부교역자가 전담하여 성경교육을 개설하였습니다. 남자성도들을 위해서도 “갈렙반”을 신설하고 마리아반과 동일한 방식으로 운영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교육을 받기 위해 한주동안 세 번씩이나 교회를 찾아야 했지만 나름대로는 열심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며 가속페달을 밟았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듯이 하나님을 믿는 지상교회도 거듭난 성도가 반드시 요구되었습니다. 1987년, 부산새중앙교회는 주일 400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60명이 제자반에 편성되어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훈련에 참여하지 않는 성도들에 대한 교육이었습니다. 그래서 최홍준 목사님은 5주과정의 “새가족반”을 편성하여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매주 90분 강의계획을 실천하였습니다. “새가족반” 5주 프로그램은 부산새중앙교회의 정체성과 철학을 배우는 과정으로 장로로 부터 권사, 집사, 일반성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도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1단계 코스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을 수료하지 않으면 제자훈련을 할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례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이 새가족반의 중요성을 체험한 것은 새가족반 교육을 수료한 90%의 새가족이 교회에 정착하는 통계와 일치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타교회에서 부산새중앙교회로 등록한 중직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로든, 권사든, 안수집사든 모든 등록교인은 반드시 새가족반을 수료해야만 했습니다. 1987년 10월, 17명의 새가족이 첫 번째 열매로 탄생하고 그때부터 부산새중앙교회의 새로운 전통으로서 새가족반이 자리 매김 하였습니다.
1989년 말, 최홍준 목사님은 쉼없이 달려가는 길을 잠시 멈추어야만 했습니다. 간경화로 인하여 체력이 고갈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고신대 복음병원 특실 11호실에 절대안정을 요구하며 입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일오후, 장로 4명을 포함하여 남자 20명이 순장으로 임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감당하였기에 각자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병실에서 링거를 맞는 가운데 침대에 앉은 최홍준 목사님은 20명의 사역반 명단을 부르며 순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감격의 순간, 병실은 통곡의 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목사도, 스탭진도, 임명받은 순장들도 모두 감격과 이러한 사역을 위해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헌신하신 최홍준 목사님을 생각하며 한마음이 되어 모두가 그렇게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경화로 인한 몸의 불균형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1년의 세월이 흐르자 최홍준 목사님은 성도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부임 초기부터 시작한 수요강해설교는 중단되었고 제자훈련만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힘에 부딪힐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상실감에 빠진 최홍준 목사님은 하나님과 겨룬 야곱처럼 “하나님, 목사는 성도를 돌보기 위해 존재하는데 성도가 목사를 염려하고 돌보는 처지가 되었으니 차라리 본향에서 쉬고 싶습니다.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떼를 쓰듯 기도하였습니다. 그순간 최홍준 목사님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고 그 눈물이 온몸을 데우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최홍준 목사님만이 아는 놀라운 체험때문이었을까요? 최홍준 목사님은 강대상에서 성도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파워있는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성도들이 불필요하게 대궐같은 집을 구입하거나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하는 일들과 아주 비싼 고가의 승용차와 귀중품을 구매하는 일들을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당시 교회들은 반대로 이들이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축복의 설교가 넘칠 때 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후, 소화도 잘되었고, 알부민(albumin) 수치 또한 2.6에서 3.6으로 상승하여 간경화 상태는 그대로지만 나머지 모든 기능이 활성화 하였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간경화라는 질병은 오히려 최홍준 목사님의 신앙을 더욱더 단단하게 고정시켜 주었으며 이때부터 제자훈련은 부산 새중앙교회를 넘어 호산나교회의 대명사로 자리매김을 하였습니다. 이제 부산새중앙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되려면 제자훈련을 받아야 하고, 안수집사와 권사가 되려면 제자훈련은 필수코스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부산새중앙교회의 교인이 되려면 “새가족반 교육”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1987년 9월에 시작한 제자훈련과 함께 1988년 4월10일에 새롭게 출발한 “제1회 대각성 전도집회”(4월10일~13일)로 부산 새중앙교회는 1,000명 시대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1,000명 교회는 대형교회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1987년에 부임한 최홍준 목사님은 부임 3년만에 1,000명의 교회로 성장시켰습니다. 이제 교회조직은 팀사역으로 전환해야 했습니다. 제자훈련 철학을 공유하고 함께 인식하며 체계적으로 훈련하고 점검해 나갈 헌신적인 부교역자들이 요구되었습니다. 이제 책임감과 제자훈련 철학과 의식이 투철한 부교역자 중심으로 제자훈련이 본궤도에 올라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최홍준 목사는 ①장로사역과 함께 ②교역자사역을 병행하며 ③대각성 전도집회까지 매진해야 했습니다. 정예화된 교역자를 제자훈련 사역에 참여하여 반원상황과 반원개개인 정보와 교재의 단원훈련 팁과 코치를 하는 방법을 교육하였습니다. 제자훈련의 목적은 무엇인가?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졸업한 성도들에게 순장의 직분을 맡겨야 하는데 반원은 없고 순장만 존재한다면 제자훈련이 갖는 궁극적인 전도의 기능은 상실한 것이었습니다. 잘 훈련된 성도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열매를 창출하고 교회의 분위기를 쇄신하여 새신자 정착율을 높이는데 일조합니다. 이것은 제자훈련이 교회성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공식이었습니다.
제자훈련은 교회성장을 위한 일시적 유행이거나 방법론이 아니라고 최홍준 목사님은 말합니다. 제자훈련은 신구약성경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으로 이루어지는 중요한 가치인 것입니다. 성경을 재미있게 가르치는 것은 사람을 모으는 기능은 할지라도 사람을 변화 시키는데는 실패할 것입니다. 수많은 교회들은 진정한 목회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관이 불분명하고 교회의 존재이유가 선명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제자훈련을 통하여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 존재의 이유를 가르쳐야 합니다. 설교와 심방을 통하여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깨달음을 갖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역자를 위한 “특별소명”과 달리 모든 성도들은 제자로서 세상에 파송하는 “일반소명”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이러한 관점에서 제자훈련은 성경공부가 아니라 인격을 변화시켜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고 사역자로서 비전을 갖게 하는 훈련이라고 정의합니다. 제자훈련은 모방도 아닙니다. 제자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철학과 가치이지 시스템의 모방과 접목이 아니라고 최홍준 목사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 제자훈련은 왜 해야 하는가?
1.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았다는 것은 천국가고, 살아있는 동안 죄짓지 말고 살자는 소극적인 생활양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예수님을 나타내는 온전하고 역동적인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제자요 증인의 삶은 선택(Option)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명령, 모든 성도를 향한 보편적인 명령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제자로 살면 좋고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해서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3. 제자는 탁상공론과 정적인 관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믿고 따르는 분에 대한 풍성한 실존적 지식과 그 분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와 그 분의 의지를 생활속에서 관철(貫徹,Accomplishment)하는 철(徹)의 규율이 있어야 합니다.
4.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훈련을 교회에 부탁하셨고 사도들은 이 훈련을 그들 사명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제자훈련은 오늘날에 이르러 가장 첫 번째 계승되어야 할 교회의 사명으로서 목회의 방법(a way of pastoring)이 아니라 목회의 본질인 것입니다.
기존교회의 공통점은 변화를 바라고 요구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변화에 저항하는 체질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변화는 자신을 제외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변화를 추진함에 있어서 겪게되는 진통과 난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지혜가 필요할까요? 최홍준 목사님은 먼저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직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을 인정하는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1차적인 조치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과 생활은 일치점이 있는가? 봉사는 즐겁고 기쁜일인가? 주일이 즐겁고 매주 기다려지고 있는가? 예배가 은혜되고 교회생활과 사회가정생활에 갈등은 없는가? 교회에서 갖는 영적교제에 만족하는가? 하는 문제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현실인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공유되고 공감되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그대로 방치해 둘 것인가?”하는 질문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막연하고 모호한 성경구절인용과 권면과 구호는 이제 더 이상 변화의 축이 될 수 없습니다. 비전있는 삶을 제시하고 그 목표를 이루어 가는 방법을 함께 나눌 때 극복할 용기의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역의 가장 선도적인 출발지는 당회가 되어야 합니다. 장로님들이 앞서서 비전을 공감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줄 때 모든 성도들이 용기를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혜와 지혜와 특별히 요청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교회의 사명을 회복하는 일에 성령의 역사가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는 새들백교회의 담임목사로서 교회성장학의 바이블이라고 알려진 “새들백교회 이야기”를 저술하였습니다. “목적에 의해 이끌려 가는 교회”(Purpose Dfiven Church)라는 개념을 정의하는 가운데 몇가지의 교회를 소개하였습니다. ①우리는 언제나 이런 방법으로 해왔다고 말하는 전통이 이끄는 교회, ②특별한 능력을 가진 지도자로서 그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가 주요쟁점인 한 명의 인물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 ③탄한한 재정을 가졌는가 가지지 못했는가와 상관없이 언제나 비용이야기가 등장하는 재정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 ④프로그램을 유지하고 지속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는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 ⑤우리가 건물의 형태를 만들지만 후에는 건물이 우리의 형태를 만든다(윈스턴 처칠)는 건물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 등을 제시하며 릭 워렌 목사는 계획과 프로그램과 사람들은 영원히 지속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에게 있어서 제자훈련은 목회의 선택사항이 아니었습니다. 목회란 성도를 성숙케 하여 세상에 파송하고 그들로 하여금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하는 총체적인 훈련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때로 목사로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가 중심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일만 벌려 놓고 방치할때가 있지는 않은지 매순간 다시한번 점검하고 체크하는 노력을 경주하려고 애를 써 보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을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위해, 맡겨주신 성도들을 위해 충성해야 할 위치에 있음을 망각하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회전판에 서 있는 최홍준 목사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 야망의 목회로 가는 증후군
1. “나 중심”(me-centered)으로 교회와 목양을 생각합니다.
2. 비본질적인 것들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신경을 쏟아 붓습니다.
3.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둘러싸여 다른 것을 들으려 하거나 보지 못합니다.
4. 건물, 숫자 등에 조급한 마음을 갖고 정작 중요한 전도와 양육에는 무관심합니다.
5. 교제를 과장하고 출석교인을 거짓으로 말합니다.
최홍준 목사님에게 있어서 옥한흠 목사님은 “비전목회”의 스승이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개척교회에서 예배에 출석하는 성도의 숫자를 파악하는 일에 무관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무리에 속지 않고 오직 그 분의 관심은 제자삼는 일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또한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최홍준 목사님은 주보에 성도들의 출석상황을 정확하게 기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울타리안에 들어오는 양들의 숫자를 무시한 채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목동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일을 지키는 성도와 지키지 않는 성도들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주일이 지난후 출석체크를 점검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그것을 주보에 기록하였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목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양을 위하여 용기가 필요하고 때로는 생명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목사의 몫인 것입니다. 교회의 한 축이자 파트너인 장로를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최홍준 목사님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영어단어 “Understand”는 “under”(~아래)와 “stand”(선다)의 합성어로 동일한 눈높이에서 마주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는 것을 이해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본능적인 것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함께 공동체를 세워 가야할 중직자를 향한 것이라면 얼마나 큰 이해와 사랑과 배려가 필요할까요? 젊은 목사가 60대 장로들을 고착화된 기성세대, 답없는 구세대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교회는 진실로 답이 없습니다. 어떤 장로가 목사의 목회에 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면 그 분 속에 있는 상처를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를 세속적인 것과 같이 보는 장로가 있다면 그분은 영적 훈련이 제로 상태로 되어 있는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하나님중심의 교회에서 자기 중심적인 장로가 있다면 하나님 중심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지 그를 도외시 하거나 제외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최홍준 목사님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드럼 사용문제라든지, 복음성가를 예배시간에 할수 있는가 하는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는 장로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가르치려고만 한다면 답은 없습니다. 그런 분들은 한가지에 꽂혀있는 분들입니다. 그것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다른 곳을 백번 가리켜도 보지 않습니다. 제자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제자훈련?”을 말하는 장로들은 어쩌면 자신의 무지에 대한 비겁함과 교육에 대한 거부감과 피곤함 때문일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변화하려 한다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거부감을 갖게 마련입니다. 교회의 장로들은 어쩌면 이런 면에서 더욱더 심화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장로부터 솔선수범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중직자들과 성도들도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최홍준 목사님은 결국 새가족반부터 장로님들에게 교육을 함으로서 성공적인 안착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럼 목사들은 어떤가요? 강대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태복음6:25)고 외치면서 또 한편으로는 노후대책과 노후보장을 부르짖는 행태는 무엇으로 설명을 해야 이해가 될까요?
최홍준 목사님은 평신도 제자훈련과 함께 목양장로훈련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부산새중앙교회 당회는 좋은 습관이 자리매김하였습니다. 3부 본당예배(12시)전에 당회원 전원이 당회실에 회집하여 기도를 한 후 예배실로 함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후에는 함께 당회실에서 점심 식사를 나누며 성도들을 돌아보거나 당회아닌 당회를 자연스럽게 진행할때가 많이 있습니다. 불필요한 규칙과 내용을 혁신하면 서로 불신의 벽이 허물어지고 때로는 마음의 글이 당회회의록에 새겨지는 것을 모두가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사와 장로의 평화가 성도들을 안정화하고 평화롭게 유지하며 존경심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목사에게는 좋은 장로를 세워야 할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좋은 장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워져야 합니다. 신앙연륜과 봉사로만 성숙함을 확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사역하는 일 가운데 가장 곤란한 입장에 서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 가운데 중직자들의 장례를 집례하는 일이었습니다. 소천하신 분의 삶을 돌아보며 은혜를 나눌 이야기가 많을때는 참 좋지만 어떤 분은 아무런 소개할 내용이 없어서 상주들은 물론 참여한 모든 성도들에게 제가 미안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많은 간증거리가 풍성해지는 삶이 되도록 날마다 충성하는 분들이 되기를 바라며, 저 또한 제 삶이 끝난후 하실 이야기가 많도록 돌아보며 더욱더 헌신하겠습니다.”
장로제도를 비판하는 목사들이 있지만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자질의 문제일 것입니다. 부산새중앙교회는 최홍준 목사님의 결단으로 장로사역 활동비를 예산에 반영하였습니다. 목사가 심방할 경우에는 말씀만으로도 만족하는 성도가 있지만, 장로가 심방할 경우에는 조금 다른 경향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사정이 어렵거나 환우들에게 방문할 경우 장로들이 빈손으로 갈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각자 살아가는 생활수준이 다르고 경제사정이 다른데 작은 일에 상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교회 차원에서 사역비를 책정하면 문제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1998년,1500만원책정) 1995년, 최홍준 목사님은 안식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제자훈련의 성과는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생물과 같아서 최홍준 목사님이 교회를 비운 상황속에서도 연평균 150~200명의 새가족이 새가족반 교육을 졸업하고 제자훈련에 참여함으로서 사역장로님들의 사역활동이 얼마나 열심이었는지를 가늠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제자훈련의 정의에 대하여 “긍정적인 목표와 목표에 기준한 구체적인 훈련방법과 훈련에 합당한 대상을 찾는 것과 훈련의 성과를 통해 나타나는 실제적인 효과”라고 하였습니다. 담임목사는 스스로 제자훈련 목회철학을 재정립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목회철학을 수정하여 평신도를 동역자로 세워 함께 일하게 하는 결의와 확신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확신없는 모방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관을 정립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가 지상속에서 존재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예배의 심장이 살아 있는지 돌아 보아야 합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기성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는 10대원리”를 말하였습니다. ① 목회철학(Philosophy) : 보호목회를 선택할 것인가 훈련목회를 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목회철학을 정립하는 것입니다. ② 영적토양진단(Soil Check Up) :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파악하여 그들의 진정한 편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권면과 책망보다 위로와 격려가 먼저 요구되는 한국교회 성도들입니다. 자신이 속한 교회의 목회 토양을 바르게 진단하고 평가하여 그것에 합당한 처방이 필요한 것입니다. ③ 교회론(Ecclesiology) : 위로와 격려로서 종결된 것이 아니라 용기와 도전이 필요합니다. 목회철학에 기준한 교회론을 증거함으로서 성도들이 어떤 존재이며 교회의 존재이유를 분명하게 알도록 가르치고 교훈해야 하는 것입니다. ④ 훈련(Discipline) : 오늘날 교회가 왜 힘을 잃었고 성도들이 세상속에서 왜 능력을 펼칠수 없을까요? 전쟁을 준비하는 군인들에게 훈련이 필요하듯이 성도들에게도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⑤ 장로그룹훈련(Elder Discipline) : 제자훈련의 출발점은 장로들입니다. 장로부터 제자훈련을 해야만 모든 성도들에게로 확산될수 있으며 목사와 장로가 목표가 선명한 공동체 사역을 아름답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⑥ 성공적인 모델그룹(First Group) : 시작과 동시에 첫 번째 그룹사역에 모든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귀납법적인 방법을 활용하여 이끄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설교식의 소그룹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모일수 있도록 영적인 갈증을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이 훈련은 해도 되고 않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중요합니다. ⑦ 비전(Vision) : 목회철학에 기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예배를 갱신하고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소명을 세워가는 꿈과 성도의 자녀들에게 참다운 꿈을 제시하는 일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억지와 강요가 아니라 성경적인 모습들이 함께 그려질 수 있도록 목적이 이끌어가는 그룹이 되어야 합니다. ⑧ 배려(Generosity) : 제자훈련 제도권 밖의 성도들과 60세 이상 고령반을 위한 특화된 성경그룹을 조직해야 합니다. ⑨ 인력관리(Man Power) : 제자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조직 책임자로 등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내에서 지도자들이 제대로 훈련되지 않았을 때 문제는 곳곳에서 충돌합니다. 대화가 되지 않고 이질감이 형성되어 마찰을 해결하는데 모든 진액을 쏟아 붓지만 결과는 좋지 않습니다. ⑩ 섬김과 나눔(Touching) : 감동입니다. 제자훈련의 목적은 성경공부와 교리교육이 아니라 함께 교회를 세워가고 감동을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성인과 교회의 지성인은 다른 색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지성인이 교회속에서 겉돌거나 관전자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교만과 자만심에 기인한 측면도 있으나 한국교회 목사들이 그렇게 만들어 가는 토양을 갖는 것 또한 문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 속으로 조금만 발을 디디면 인격과 신앙의 성숙도를 진단하기 전에 직분을 주고 봉사자로 섬기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그래서 영적 능력부재의 지도자, 인격적 미성숙의 지도자, 비전 없는 세속적 지도자가 지속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가 사회적으로 어떤 신분을 가졌는가? 어떤 부를 누리고 있는가? 에 따라 좌지우지 되고 직분을 세우는 곳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훈련을 통하여 변화되도록 하는 것임을 최홍준 목사님은 증명하였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물질과 일정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오히려 장로님들이 사례를 올려 드리려 했지만 최홍준 목사님은 수차례에 걸쳐 자신의 사례를 동결하고 1996년에는 부교역자들까지 가세하여 사례를 동결하기도 하였습니다. 교회가 점차적으로 대형화 하면서 당회는 신속한 결정과 집행을 위해서 당회분과를 신설하고 당회분과에서 결정과 집행을 하여 불필요한 절차를 생략하도록 하였습니다.
(3) 대각성전도집회
최홍준 목사님에게 있어서 제자훈련과 함께 중요한 또 하나의 핵심적인 가치는 “대각성전도집회”였습니다. 제1회 대각성집회는 1988년 4월10일에서 13일까지 4일간 진행되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D.L무디(Dwight L(yman) Moody)는 대각성운동을 통하여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시작한 복음운동은 유럽과 아시아를 향하며 전 세계적인 부흥운동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대각성운동은 율법화, 윤리 도덕화한 형식적인 종교생활이 복음을 통하여 새롭게 갱신되는 운동이었습니다. 기존교인들이 대각성을 통하여 새롭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헌신의 다짐과 전도의 열정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인 것입니다. 대각성운동의 핵심은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으로 최홍준 목사님은 대각성전도집회를 3일간 개최하는 것을 고집하였습니다.놀라운 것은 새신자를 위하여 시작된 대각성 전도집회를 통하여 기존신자들에게도 새롭고 신선한 촉매제가 되어 상처가 치유되고 마음의 평화가 도래하는 복음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집회때 마다 150~200명의 새신자들이 교회를 찾아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무반응을 보이던 사람들 가운데 심령이 뜨거워지고 눈물로 회개하며 결신하는 사람들을 눈앞에서 바라 볼 때 대각성 전도집회는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이로서 대각성전도집회는 새신자와 기존신자가 모두 함께 복음의 능력으로 은혜를 받고 치유함을 받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매년 5월에 개최하는 대각성전도집회를 앞둔 1월부터 200여명의 순장들은 전도의 동력을 확신하며 전도를 준비합니다. 집회를 앞두고 최홍준 목사님은 매월 첫 주일 교회론을 중심으로 전도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교인에게 선포하였습니다. 또한 순장들을 대상으로 집회 1개월 전에 별도의 특별교재를 가지고 다락방공부를 직접 주관하였습니다. 전도를 촉진하는 설교가 시작될 때 전교인들은 태신자를 대상으로 “이슬비전도편지”를 반복적으로 발송합니다. 이것이 관계전도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집회를 앞두고 불신이웃과 가족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교회출석을 권유할 때 이슬비전도편지는 유익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슬비전도편지는 전도에 대한 실제적인 동기부여가 되어 교회의 부흥성장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매주 받게 되는 이슬비전도편지를 읽다보면 복음은 친근함을 갖게 하고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주는 놀라운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슬비전도편지를 읽고 대각성전도집회에 참석한 사람과 읽지 않고 참석한 사람의 현격한 차이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슬비전도편지를 읽고 참석한 사람은 대각성전도집회에서 거절감, 거부감이 없이 첫째날 마음문을 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읽지 않고 참석한 사람은 3일이 되어도 불신감, 거부감, 의구심으로 차단벽을 높이 쌓은 채 고립되어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두종류의 사람 모두가 불신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슬비전도편지을 읽은것과 읽지않은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1994년, 교회내에 최초로 “이슬비전도학교”가 개교되었을 때 대각성전도집회는 놀라울 정도로 성과가 있었습니다. 이로서 1997년 대각성전도집회에는 1,000여명의 새신자가 참석하였습니다. 대각성 전도집회에는 최근에 예수를 믿고 변화된 초신자 1명과 모태신앙 또는 유년시절 신앙생활을 하다가 낙심하여 교회를 떠난후 다시 돌아온 회심자 1명 등 2명의 간증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두 부류의 간증속에는 대각성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져 있고 모두가 공감대를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홍준 목사님께서 평안한 마음으로 다가가 마음을 열어보는 설교와 결신으로 연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결신자들을 강단앞으로 나오게 하였으나 1997년에는 참석자 650명 가운데 400명의 결신자가 있었고 이들은 배포한 전도책자에 자신의 이름과 결신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 대각성전도집회 성공의 3대 요소
① 영적의미 점검(Significance) : 대각성 전도집회는 기존신자에게 생산성을 증대하고 불신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② 철저한 준비(Preparation) : 잔치를 준비하는 신랑신부의 부모님들과 같이 철저한 사전준비와 업무의 분담을 통한 팀웍(협력,Teamwork)이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불신자들을 위한 두명의 간증자와 설교자가 집회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③ 사후관리(After-Ssevice) : 일회성집회가 되지 않으려면 냉담자, 관전자, 무반응자,결신을 미루는 자 등을 상세하게 분류하여 다음 전도집회의 초청대상으로 삼아 지속적인 관리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4) 새로운 도전과 한국교회의 부름에 응답하는 최홍준 목사
1987년 2월15일, 부산새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최홍준 목사님은 400명이 출석하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제자훈련을 시작하여 20명의 첫 열매를 고신의료원 병상에서 임명해야 할 정도로 쉼없는 고삐를 죄며 달려 갔습니다. 아주 작은 상처도 제대로 치유할 수 없는 좌절과 절망의 땅을 개간하여 옥토로 변화하는 놀라운 역사를 모두가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부임 1년만인 1988년 4월10일, 대각성전도집회라는 놀라운 계획을 실현하였고, 이를 통하여 “제자훈련”과 “대각성전도집회”라는 두 개의 위대한 날개로 하늘 높이 오르는 성장의 발판을 구축하였습니다. 1987년 7월에는 제1회 “전도폭발훈련”을 시작하였고 중단없는 전진을 통하여 부산 동남부지역의 수영로교회와 함께 서부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자리매김해 나갔습니다. 1988년1월17일, “여자다락방모임”을 시작하고 이듬해인 1989년 6월12일에는 위임예배와 함께 “남자다락방모임”을 출범시켰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하는 목회자였습니다. 한층 더 진일보한 제자훈련과 더 전진된 대각성전도집회와 더 깊은 곳에서 발견한 영적 우물물을 성도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학습자였습니다. 1995년, 최홍준 목사님은 미국 개혁주의 신학교인 리폼드신학교에서 “제자훈련이 전통교회에 미치는 영향”(a study of the discipleship monistry training program and its effects on established churches)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목회학 박사학위(D.Min)를 받았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제자훈련의 성과를 미국에 소개하며 제자훈련만이 침몰해 가는 미국기독교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임을 강조하였습니다.
1997년1월27일, 최홍준 목사님은 “미래, 꿈, 소망”이라는 3대주제로 “교회비전21”을 선포하였고 10월3일에는 부산KBS홀에서 교회설립2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비전21은 21세기를 준비하는 호산나교회의 미래전략으로 예배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교제와 양육과 제자훈련으로서 성도를 섬기고, 전도와 선교로서 세상을 섬기는 세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와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세상과의 관계속에서 성도는 훈련되어져야 하고, 훈련을 통하여 성숙되어져야 하고, 성숙한 사역자로서 소명을 실행하고 계승하는 것이 호산나교회가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고 소망을 선포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1997년, 한민족복지재단 명예이사장에 취임한 최홍준 목사님은 11월3일부터 8일까지 북한의 나진과 선봉지역에 로뎀제약공장 설립건으로 방북하였습니다. 그후 2000년 7월과 20002년 6월까지 3차례에 걸쳐 북한지역을 방문한 최홍준 목사님은 뜻하지 않은 일로 인하여 평양의 호텔에서 감금을 당하는 위험한 상황을 겪으면서도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함으로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2002년 6월, 방북에서 최홍준 목사님은 한민족복지재단 단장으로 297명의 방북단과 함께 평양 고려호텔 식당에 있었습니다. 북한측과의 의견차로 인하여 긴장과 대립 관계 속에서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주일을 몰수당한 방북단은 북한법률상 금기시 되어있는 금식기도를 선포하고 5시간동안 기도와 찬송을 이어 갔습니다. 당시 위급한 상황속에서의 기도와 찬송은 북한을 더욱더 자극하기에 충분하였지만 최홍준 목사님은 생명을 각오하고 기도회를 진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북한정권으로부터 허가를 받아내는 기적같은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평양에서 300분의 시간은 두렵고 떨리는 공포의 순간이었습니다.(mms://itv.or.kr/sunday/choi20020623_a.asf) 한민족복지재단은 2000년 9월29일, 최홍준 목사님을 제2대 이사장으로 선출하고, 평양에 1,200평 규모의 어린이전문병원을 설립하는 것과 함께 재빵공장을 준공하여 하루 12,000개의 빵을 생산해 영양실조에 걸린 어린이들의 생계용으로 지원하였습니다.
1998년, 최홍준 목사님이 부산새중앙교회에 부임한지 11년째 되던 해에 교회는 장년만 2,380명이 출석하는 부산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1999년1월10일, 최홍준 목사님은 “비전21예술원”을 설립하고 5월27일, 사하구 다대포아파트단지내에서 지역주민을 위한 “제1회 열린음악회”를 성황리에 개최하여 많은 호응과 찬사를 받았고, 이어 9월4일에는 을숙도에서 “제2회 열린음악회”를 개최하여 교회가 세상속에서 평화의 빛으로 조명해 가는 놀라운 시간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지역에 사는 불신자들이 교회가 이러한 좋은 행사를 개최해 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는 등 문화선교사역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2000년1월1일, 부산새중앙교회는 “호산나교회”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새출발을 하였으며 새성전 건축이라는 과제를 해결해야 할 만큼 교회당은 이미 포화상태가 되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호산나복지재단”을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와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용기와 희망을 전달하는 기지로서의 교회적 사명을 선포하였습니다. 2001년9월18일, 21개 노회 948개의 교회로 구성된 “합신교단 86회 총회”는 최홍준 목사님을 총회장으로 선출함으로서 교단의 위상을 높이고 교단의 가치와 철학을 기독교계와 연합단체들에게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사(2001~2010)와 교단기관지인 “기독교개혁신보” 이사장(2003~2007)을 역임하면서 교회는 물론 교단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합신교단은 22개 노회 산하 948개의 교회에 152,000명의 교세를 가진 정통교단으로서 1981년에 창립되었으며 함동신학대학원대학교가 총회 산하에 있었습니다.
2000년, 호산나 복지재단에 이어 2003년 4월3일에는 강서구 녹산공장에 장애인 7명을 고용한 사회적기업 “굳윌 코리아”(Goodwill Korea)를 OPEN하여 장애인 자활사업에 높은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굳윌”(Goodwill)은 1905년, 미국에서 시작하여 2003년 현재 3천여개의 스토어(Store)와 17개의 계열회사가 운영될 만큼 자리매김하였으며 특별히 꿈을 잃은 장애인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오픈예배를 통하여“장애인에게 자선이 아닌 기회를” 이라는 개념을 주장하였습니다. 새롭게 오픈한 매장에 100여명의 성도가 참석한 개업예배에서 “왜 우리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가운데서도 굳윌을 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주님이 좋아하는 일인 동시에 이 시대를 감당하는 교회본질로서의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선한 사역으로 출발한 한국 최초의 굳윌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아시아로 확산되어 가장 중요한 복음과 함께 전파되기를 소망하는 것이 최홍준 목사님의 바램이었습니다.
(5) 호산나교회 명지비전센터 : 사막을 에덴같게,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같게
2006년4월16일, 부산 강서구 명지동에는 지하3층 지상13층의 거대한 호산나교회 비전센터가 세워져 첫 예배로 “사랑나눔부활주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녹산국가공단외에는 사람이 살지도 않고 다니지도 않는 곳에 세워진 교회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당황해 하였습니다. 모두가 "NO!!"라고 말할 때 누군가 "YES!!"를 말한다면 TV광고처럼 박수를 쳐 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19절 말씀과 같이 최홍준 목사님에게도 예만 허락되었을까요? 여하튼 수많은 목사님들이 하단의 발전을 바라보고 사하지역에서 새성전을 건립할 것을 권면하였지만 명지동 허허벌판에 믿음의 기초를 세우고 사람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바다 건너편으로 갔을 때 마치 달음박질하며 달려간 사람들처럼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호산나교회로 달려간 사람들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이사야51:4)는 말씀의 성취처럼 태신자 2,000명 등 총 8,500명이 참석한 첫예배는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3,000명을 수용하는 호산나홀(본당)이 1부에서 4부까지 빈자리 없이 가득 메운 놀라운 예배가운데 옥한흠 목사님이 설교하신 2부와 3부 시간에는 복도끝까지 인산인해를 이루며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2002년 9월, 기공예배를 드린 이후 3년7개월만인 2006년, 450억의 공사비로 건립한 호산나교회는 연건평 7,700평 규모로 한국교회 최대급에 해당하는 대성전이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사도행전적 교회의 꿈”(사도행전28:30~31)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지난 20년의 목회를 회상하며 성도들에게 감동의 비전과 꿈을 선포하였습니다.
“교회가 크든 작든 교회건축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교회건축을 두려워 하는 어두운 세력들의 치열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오직 주의 은혜로 성취됨을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교회건축을 시작하면서 많은 시험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하고 교회가 완공될 때 까지 등록교인과 헌금재정이 모두 성장한 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보통의 교회들은 건축중에 외부지원을 중단하는 것을 보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통로를 차단하는 비겁한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더 큰 축복을 받기 위해 교단과 교계적으로 구제와 선교를 줄이거나 없애지 않고 끝까지 감당해 왔으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슴을 고백합니다. 근검, 절약, 절제로서 정성껏 힘을 다해 헌금하고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해 준 성도들과 가족들과 평신도 지도자 모든 분들께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저는 교회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중단없이 기도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주님을 위해 더욱더 열심히 충성 봉사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해운대 백사장에서 개최된 “2007부산대부흥운동”(Awakening BUSAN 2007)의 집행위원장으로서 부산성도 20만명을 결집시켰습니다.(경찰추산,15만명) “회개와 회복, 도시와 민족의 축복”이라는 주제로 2007년 5월27일, 오후 4시에 개최되었으며 나아감의 기도(1부), 경배와 기도(2부), 파송의 기도(3부)를 통하여 1907년 평양에서2007년 부산까지, 2007년 부산에서 2107년 평양까지 한국부흥의 원동력이 되는 놀라운 역사임을 증명하였습니다. 1974년 여의도 집회이후 순수 기독교인의 참여만으로 20만명을 결집시킨 운동은 2007부산대부흥운동 뿐이었습니다. 특별히 2007부산대부흥운동은 그동안의 나눠먹기식 이전투구 양상이 사라지고 교회연합운동에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더 나아가 마지막 엔딩행사로 10만명의 참가자 모두가 동시에 자신의 휴대폰으로 자신의 전도대상자에게 전도문자를 보내는 총력전도를 함으로서 회개와 회복이 복음으로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5개월후인 10월18일부터 21일까지 부산 아시아드 경기장에서 개최된 “부산프랭클린그래함페스티발”, 즉 “BFGF”에서도 집행위원장을 맡아 31만명을 결집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재현하였습니다. 특별히 부산 전지역에서 초대된 불신자 가운데 8,601명이 결신하는 등 놀라운 성과가 있었습니다. 900여 교회가 동참하고 18,000명의 상담양육요원과 3,00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4일동안 아시아드 대운동장으로 집결하는 응집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집행위원장으로서 부산 성도들이 전도에 너무 수동적이었고, 교회별로도 관전자적인 입장이 다소 있었다고 평가하였지만 2007부산대부흥운동과 함께 BFGF라는 두 개의 초대형 행사를 총괄집행하면서 교회연합으로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기적적인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2007년 6월17일, 호산나교회는 교회설립30주년, 제자훈련20주년기념으로 “3020기념축제”를 4일간 개최하였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디지로그 시대 목회적 접근과 개발”이라는 설교를 통하여 제자훈련과 함께 목양사역을 강조하였습니다. 특별히 박명아전도사의 “호산나교회 새가족반 운영의 실제”와 정재원 목사의 “호산나교회의 제자훈련과 양육시스템”, 그리고 김인성 목사의 “호산나교회 다음세대 사역, 교육부서”와 원기태 목사의 “호산나교회 예배, 그 감격의 모델”, 최상근 목사의 “호산나교회 대각성전도집회 준비와 진행” 등은 높은 관심을 보여 주었습니다. 축제기간 호산나교회에서는 “사역박람회”와 “제자훈련박람회”, “사랑나눔축제박람회”, “교육부서박람회” 등이 개최되어 부산경남경북지역 목회자와 평신도들에게 다양한 사역콘텐츠를 제공하였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부산의 대표적인 리딩교회로서 다양한 경험과 성장모델들을 그대로 전수하고자 노력 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부산의 많은 교회들이 도전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8년 3월, 최홍준 목사님은 부산지역에서 가장 빠르게 "치유학교"를 개설하였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고, 좌절과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우울감에 젖어있는 교회내의 많은 성도들에게 치유사역은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었고, 최홍준 목사님은 "케어 프로세스"(Care Process)를 통하여 교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상처는 최초발견시기가 중요하고 조기에 치료하면 건강성을 유지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영적건강진단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에 최홍준 목사님은 “양떼들을 돌봄에 있어서 예전에는 굶는 사람이 없는지, 너무 가난해서 자녀공부를 하지 못하는 가정은 없는지, 병원에도 못가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없는지를 돌보는 시대였지만 지금은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는 성도들을 속히 찾아 내는 것과 조기에 치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웃을 품에안고 희망여는 한국교회, 섬기고 나누는 교회, 신나고 행복한 세상”이라는 주제로 2008년 8월21일부터 23일까지 동서대학교와 경남정보대학에서 개최된 “부산기독교사회복지엑스포2008” 조직위원회 대회장으로서 최홍준 목사님은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너무 숨기면서 사회운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서 개인이 하는 일은 여전히 남모르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교회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선행은 세상에 알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라고 당위성을 강조하였습니다.
2009년, 10월26일, 제자훈련과 함께 최홍준 목사님의 숙원사업이었던 “국제목양사역원”을 교회부설기관으로 설립하였고 제1회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를 “목사와 장로의 행복한 동행”이라는 주제로 개최하였습니다. 제1회 컨퍼런스는 향후 지속적으로 추진될 “국제목양사역원”의 "페어 컨퍼런스"(Fair Conference)로 상호 대치국면으로 고착화된 목사와 장로와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열린 대화의 창이 되었습니다. 감동과 긍정화의 물결로 폐막된 1회의 아쉬움으로 27일만인 11월23일, 제2차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가 다시 개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도전과 달리 2009년에는 D단체 측의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고발을 당하였고 재판에서 공소권 없음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이후에도 이단종파들의 고소고발건에 최홍준 목사님은 언제나 중심에 서 있게 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2010년 은퇴한 이후에도 2012년, 부산성시화운동본부장에 취임하면서 S단체로부터 다시 고발을 당하였고, 2015년에는 “부산S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과 “부산S 부산본부건물 신축반대를 위한 부산시민연대” 상임위원장을 맡으면서 다시 고발을 당하는 위기에 직면하였으나 최홍준 목사님은 단 한번도 두려움에 떨거나 비겁하게 뒤로 숨지 않았습니다.
2010년, 최홍준 목사님의 연세는 이제 65세를 맞이 하였습니다. 3월과 6월과 10월에 각각 3차, 4차, 5차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를 개최한 최홍준 목사님의 호산나시계는 참으로 빠른 속도로 달려 갔습니다. 지난 2000년, 최홍준 목사님은 당시 장로님들에게 65세에 조기은퇴하겠다고 약속을 하였으며 이제 이것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32년의 사역을 회고 하였습니다. 1987년, 400명의 좌초되어 가는 부산 새중앙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2010년 11월7일, 88%의 찬성으로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12월1일, 은퇴축하예배를 드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호산나교회 32년 사역으로 교회는 장년 9,800명, 주일학교 3,000명 등 12,800명의 메가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평생의 스승인 옥한흠 목사님의 모습을 닮았을까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 명성교회가 새벽기도운동으로 한국기독교에 새바람을 주었다면, 수요예배는 호산나교회가 한국교회에게 교훈을 주었습니다. 한국교회 모두가 않된다고 포기해 버린 수요예배 평균출석 3,500명!!, “NO!!"라고 말하지 않고 ”YES!!"만 허락되었던 최홍준 목사님은 그렇게 한주간의 중심에 있는 수요예배를 회생시켜 놓았습니다. 2011년, 호산나교회 수요예배에 5,662명이 참석함으로서 한국기독교 목회자들을 다시한번 놀라게 하였으며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말을 합니다. 기적은 기도로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최홍준 목사님은 꿈을 버리지 않았고 기대함을 믿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람을 찾기 어려운 명지 대파밭 평원에 13층의 교회를 세우고 10km 거리 이상의 사람들을 달음박질하게 하는 원동력은 분명 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목자요 제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66세에 호산나교회 원로목사가 된 최홍준 목사님은 이제 은퇴목사님들의 요람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청년정신으로 무장한 채,교회속으로 복귀하였습니다. 2012년, 최홍준 목사님은 부산에서 가장 할 일이 많은 “부산성시화본부”의 5대 본부장에 취임하였습니다. 2015년 10월27일은 문화사역을 통하여 다음세대를 세워 나가는 “팻머스문화선교회”가 10주년을 맞는 기념일이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선교회의 이사장으로서 뜻깊은 행사에 참석하였습니다. 팻머스 선량욱대표에게 있어서 최홍준 목사님은 아버지와 같은 든든한 지원군이었습니다. “빛을들고 세상으로”는 송정미 교수와 함께 팻머스 간사들에게 새로운 다짐을 주는 찬양이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팻머스는 권일, 길정화 선교사님을 캄보디아에 파송하는 감격스러운 사역을 진행하였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그리스도인에겐 “겸손”이 장고의 무기가 된다고 위로하면서 언제까지나 아버지같이 든든하게 서 있을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하이패밀리”, “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송길원목사)의 이사장으로서 건강한 가정사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호산나교회 사랑나눔축제를 통하여 호산나교회와 성도의 가정에 대한 건강진단과 함께 치유와 회복에 앞장 섰습니다. 2015년, 최홍준 목사님은 “카이캄”(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과 전략적 제휴관계를 맺고 회원가입을 하였으며 새롭게 창립되는 독립교회에서도 겪게 될 목양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2016년에는 서울 홀리라이프 부설 “동성애치유상담학교”를 개교하여 상임고문에 취임하며 무너지는 양성평등과 경계의 담을 높여야 할 성평등 문제의 중심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최홍준 목사님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2015년, 호산나교회로부터 독립한 “국제목양사역원”의 사역이었습니다. 2000년, 최홍준 목사님은 목양장로사역을 바라보며 장로의 시무 연한을 65세 정년으로 하였습니다. 그때,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65세에 반드시 조기 은퇴하겠다고 하였으며 2010년 그 약속은 실행되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대다수가 최홍준 목사님의 조기은퇴를 강력히 반대하였지만 그는 그 어떤 말에도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습니다. 32년 목회를 하면서 한국교회의 중요한 문제가운데 목사와 장로의 불협화음이 원인이 되었던 사례가 결코 적지 않았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진리가 아닌 비진리의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며 한치의 양보없는 대치가운데 무너지는 성도들을 바라보며 최홍준 목사님은 가슴이 아팠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성경에서 바라보는 장로의 역할을 생각했습니다. 장로는 교회행정을 지도하거나 감시하는 기업가들이 아니었습니다. 장로는 목회자와 함께 양들을 보살피는 목양하는 사역자라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평신도 제자훈련과 함께 목양사역이라는 중차대한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에게 있어서 장로는 목회의 가장 위협적인 걸림돌이 아니라 함께 손을 잡고 가야할 디딤돌이라는 확신하고 목양장로세미나를 개최하였습니다.
6. 제4기사역 : “국제목양사역원” : 성경의 본질로 회복하는 목양장로사역
최홍준 목사님은 지난 2000년, 지도자로부터 모든 성도에 이르기 까지 다툼과 분쟁이 종식되는 교회, 성도들이 신앙생활로 행복해 하는 교회, 청소년과 청년들이 꿈을 비상하는 교회라는 이상적인 모델을 생각하면서 “목양사역”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가장 중심축인 목사와 장로가 존경받는 지도자로서 어둠의 세력과 맞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상호 경쟁, 상호 견제관계로서 마치 여야관계에 놓인 국회와 같은 구습을 답습하고 있는 모습을 안타까워 하였습니다. 또한 평신도 제자훈련만으로는 장로들에게 목양의 본질을 회복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로서 기초체력인 제자훈련과 함께 목양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2011년 10월12일, 호산나교회 부설기관으로 “국제목양사역원”을 설립하고 개원예배를 드렸습니다.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님은 개원예배 설교를 통하여 “믿음으로 나아가 하나님앞에 충성스러운 사람을 만드는 목양사역원이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 세우게 되기를 기원”하였습니다. 개원식에는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님을 비롯하여 거룩한빛광성교회 정성진 목사, 온천교회 안용운 목사등이 참석하였으며 최홍준 목사님은 9차까지 진행된 사역보고에서 175개 교회 927명의 목사와 장로가 참여하여 성경의 본질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어 가는 것을 목격하게 됨을 설명하였습니다.
2009년10월26일과 27일, 양일간에 걸쳐 호산나교회에서 개최된 제1차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PASTORAL ELDER MINISTRY CENFERENCE)와 11월23일에 개최된 제2차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를 통하여 목사와 장로의 행복한 동행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어떤 장로는 은퇴를 눈앞에 두고 20여년간 장로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늘 담임목사와 대립각을 세웠던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스스로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자기고백이라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은 없고 그것은 교회사역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우리 자신을 변화하려 한다면 우리는 먼저 거부감부터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어떨까요? 목양장로사역원은 바로 목사와 장로가 믿는 하나님께서 목사와 장로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배려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힘과 위로를 주고, 서로 하나됨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는 단순한 원리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2010년에 들어서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심은 매우 고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3차(3월15일)를 시작으로 4차(6월14일)와 5차(10월18일)에 이르기까지 은퇴를 앞두고 있었던 최홍준 목사님은 쉴 틈이 없이 달려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2014년23차 컨퍼런스까지 국내 295개 교회 1,890명이 참여 하였고, 미주지역 등 국외에서도 202교회 653명이 참석하는 등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2015년, 최홍준 목사님이 설립한 국제목양사역원은 호산나교회에서 독립하여 홀로서기에 돌입하였습니다. 서울의 “국제제자훈련원”과 함께 국제목양사역원은 한국교회가 반드시 거쳐야 할 프로세스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는 가운데 최홍준 목사님의 독립은 참으로 중요한 선택과 결정이었습니다. 이제 호산나교회가 아닌 수영로교회(이규현목사)에서 3월9~10일에 24차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를 개최하며 새로운 다짐과 함께 1987년, 황무지를 개척하는 청년의 마음으로 다시 출발점에 섰습니다. 미국 동부지역에서 개최되는 25차와 서부지역에서 개최되는26차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등록을 마쳤고, 10월 대전 새로남교회에서 개최되는 27차 컨퍼런스에도 관심은 높아져 가고 있었지만 언제나 기대함과 기도함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목사와 장로가 갈등을 겪는 중요한 원인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최홍준 목사님은 본질에서 이탈되었기 때문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본질이란 예수께서 요한복음을 10장11~12절 말씀을 통하여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만 목자가 아닙니다. 목사와 장로는 교회의 영적부모로서 동일하게 목양에 자신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가 성도들 앞에서 다투고 싸우고 서로 견제하는 동안 양들은 모두 상처를 입고, 심한 경우 불안감과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교회가 대다수라는 것입니다. 모두 본질에서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주장을 앞세우고 목사와 장로들이 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본질에서 떠나 있을까요? 본질은 목양인데 행정과 지시, 지적사항에만 골몰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부교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필요한 행정이 너무나 많고 자기 태만이 충만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의 본질은 동일하게 목양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1517년, 종교개혁에서도 교황제도에서 폐기되었던 장로제도를 복원하였습니다. 현재에도 카톨릭에서는 장로제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 캘빈“(John Calvin)은 제네바에서 최초로 목사와 장로의 목양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목사 장로로 구성된 ”컨시스토리“(Consistory,장로회)를 설립하여 제네바 시민들의 무너진 도덕적 삶을 개혁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제네바로 피난하였던 ”존 낙스“(John Knox)는 여기에 도전을 받아 스코틀랜드에서 목양장로를 복원하였습니다. 이렇게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정착한 장로교가 미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네덜란드에 전파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왜 목양장로 사역에 집중하는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최홍준 목사님이 부임한 호산나교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호산나교회는 제자훈련의 성과로서 대각성전도집회를 매년 5월에 개최하였습니다. 이로서 교회는 성장하였지만 지도자 그룹의 알력과 힘겨루기로 높이 쌓아 올린 성은 언제나 무너질 수 있는 토양이 될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홍준 목사님은 “목양장로시스템”으로 교회 체질을 전환하였습니다. 교회 정관을 개정하고 시무장로의 시무기간을 7년으로 한정하였으며, 시무기간이 종료된 후에는 목양사역에 전념하도록 하였습니다. 아울러 장로 정년을 담임목사와 함께 65세로 하향 조정하였습니다. 시무기간이 종료된 장로는 무엇을 하는가? 시무기간이 종료된 장로는 이제 본격적으로 목양장로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15~20명의 순장(筍長)과 순(筍)모임 관리로 풍부한 경험이 있는 장로들에게 목양사역의 책임이 맡겨진 것이었습니다. 목양장로는 담당 순장이 순모임에 참석하지 못할 때 임시순장 역할과 함께 사역에 힘겨워 하는 순장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그 일을 지속적으로 감당하도록 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순에 속한 성도의 경조사에 참여하고 심방하는 등 준교역자로서 성도를 섬기는 일에 주력하며 이러한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교회는 장로사역 예산을 별도로 편성하였습니다. 성도의 정보는 모든 사역자가 공유하고 함께 관리하였습니다. 심방내용은 목양장로, 담당부교역자, 교구총괄수석목사, 사역원총괄목사, 담임목사, 원로목사, 전산팀장이 공유하며 기밀을 유지하도록 하였습니다.
목양장로 사역을 통하여 발생하는 유익은 무엇인가? 그것은 담임목사님의 영적 리더십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질서가 균형감각을 갖고, 목양장로는 동역자로서 공동사역에 관한 책임감과 함께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장로가 순장과 성도들을 심방하고 돌아 보면서 성도 만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지 않고 기뻐하며, 사역의 보람은 물론 교역자의 말못할 고충도 함께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양장로는 심방전후를 통하여 영적 기도의 분량이 증가하고 경건생활이 깊어지게 되며 성도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수시로 발생하는 성도들의 다양한 생활과 예기치 못한 상황들을 담임목사와 교역자와 목양장로가 함께 공유함으로서 상황에 맞는 지혜로운 사역조치가 가능하고 성도들의 만족도가 상승하며 새신자의 정착율 또한 배가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거룩한빛광성교회(정성진목사)와 선한목자교회(유기성목사), 대전문창교회(성종근목사)등 많은 교회가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 이후 달라진 자신의 교회를 증언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도래한 변화는 당회에서 사라진 다툼과 분쟁과 예측불허의 돌발상황들입니다. 이전의 당회는 절차와 내용과 단어 하나에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상호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성도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목사와 장로가 함께 목양을 하면서 상호 긴밀한 공동체가 되었고, 성도들도 평화로운 당회를 바라보면서 존경심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다툼과 분쟁만 없어도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당회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이라는 측면에서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의 필요성은 확인된 것이었습니다.
“어느 교회에 불신남편을 둔 여집사님이 있었습니다. 남편을 지극히 사랑한 여집사님은 어느날 목양장로에게 자신의 남편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전도집회 기간이 되어 여집사님은 남편에게 딱 한번만이라도 교회에 함께 가 달라고 부탁을 하였고, 남편은 아내를 위해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목양장로가 처음으로 교회를 찾은 남편을 만나 ”김선생님, 제가 계속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하며 함께 친교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도 삼세판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왕 큰 맘 먹고 나오셨으니 새신자반 5주과정까지 해보고 계속 나오실지를 결정하면 어떨까요?“ 하며 매우 따뜻하게 맞이 하였습니다. 이렇게 5주과정을 빠짐없이 다 마친 남편이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 집사님에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사실 고교시절 3년동안 교회를 다녔는데 그때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된 이유가 친구 아버지께서 장로였는데 교회에서 주인 행세하는 꼴이 보기 싫어 교회를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25년 전에 남편이 만난 왕 장로는 교회와 성도들의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난 목양 장로는 ”디딤돌“이었습니다. ▶대전문창교회(성종근목사)는 목사와 장로 모두가 컨퍼런스에 참석한 후 ”섬기겠습니다“라는 명찰을 가슴에 달고 말이 아닌 실천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포항제일교회(예장통합,이상학목사)는 장로19명과 목사 11명이 훈련받은 후 성도들과 같은 삶의 자리에서 동일한 고민을 믿음으로 극복해 온 간증이 있는 삶과 섬김을 통하여 성도들의 삶에도 승리가 주어 질 수 있도록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였습니다. ▶울산교회(예장고신,정근두목사)는 목사 11명, 장로 23명, 집사 4명 등 33명이 컨퍼런스에 참여한 이후 성도들의 분위기가 매우 긍정적으로 변화하였습니다. 행정에만 관심을 기울이던 장로님들이 자기가 속한 교구 가정의 문제와 어려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세심한 배려와 위로로 성도들의 아픔을 만져주는가 하면 교역자에 대한 이해도 높아져 상호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갔습니다.
목양사역컨퍼런스는 지난 2009년 1차로부터 2017년 32차까지 600여 교회에서 목사 891명, 장로 2,289명, 기타 집사 등 171명으로 모두 3,351명이 참석하여 매회 평균 105명의 목사와 장로들이 컨퍼런스에 참여하였습니다. 컨퍼런스의 주제는 “목사와 장로의 행복한 동행”이었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장로의 본질은 “목양”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본질중심의 교회로 전환하기 위해 당회중심과 시무장로 중심의 교회를 목양장로 중심의 사역으로 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목양사역은 제자훈련과 함께 교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장로교는 목사는 장로위에 있고, 장로는 성도위에 존재하는 수직적 관계의 권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목사와 장로는 협력관계가 아니라 언제나 상호 견제와 긴장관계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제자훈련이 성공적으로 끝나도 당회의 중심은 “행정시스템”에 올인하는 경향에 변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목사와 대립각을 세워 여야관계 인듯한 인상을 주며 성도의 형편보다는 자신의 권위와 세력확장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오늘날 당회의 모습입니다. 장로들이 교회에서 왕권을 쥐려고 하며 감사권을 획득하여 목사를 좌지우지 하려고 부단히 애를 씁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장로상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목사들의 책임이 분명하였습니다.이러한 관습적이고 구습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목사와 장로가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아름다운 동행이 있는 사역을 위해 목양장로사역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목양사역을 위해 우선 “목양장로제”에 관한 “정관”을 교회가 만들어야 합니다. 정관에 의하여 시무장로와 목양장로의 기준을 정하고 목양장로를 선출하여 목양사역을 목양장로에게 전적으로 맡겨 줍니다. 목양장로는 오직 목양사역에만 전무한다는 서약서를 받아 일체의 행정사역에 관여하지 않도록 규정합니다. 또한 담당교역자를 충원하여 사역 전반을 관리하도록 하되 중소교회는 행정간사(자원봉사자)를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새가족, 결혼,출산, 육아, 이사, 질병, 입원, 개업, 장례, 상담, 장기결석 등 목양내용에 관하여 교구교역자와 목양장로와 담임목사간에 이메일과 휴대전화(카톡,메신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정보교환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담임목사와 목양사역자의 원활하고 긴밀한 정보교류가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목양사역에 관한 점검표를 게시해서 진행사항과 달성율을 항상 점검하여 긴장감을 늦추지 않도록 합니다. 메일 작성법과 사역표 작성, 점검표 작성, 상담기술, 예배와 심방훈련은 매주 확인해야 주기적이고 반복적인 활동이 습관으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제자훈련과 목양장로사역으로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 길은 오늘날의 교회가 가야할 가장 기초적이고 본질적인 길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늘 다툼과 분쟁을 계속한다면 자녀들은 불안해 하고 이겨내지 못한 자녀는 가출을 선택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때 어떤 부모들은 가출한 자녀를 냉대하고 체벌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자녀가 왜 가출하게 되었는지 스스로 돌아보지 못하는 부모에게서 그 자녀는 다시 가출을 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건강성이 부모에게 있듯이, 교회의 건강성은 목사님과 장로님들의 건강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바른 길로 가고자 노력하는 목자로서 교회의 건강성을 위해 목양장로사역컨퍼런스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20대, 기업가를 꿈꾸었던 청년 최홍준은 35세의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하였고, 한국의 위대한 스승, 옥한흠 목사님과 함께 제자훈련의 철학과 가치를 정립하는데 일조하였습니다.그리고 1987년, 부산 새중앙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단 한사람도 살지 않는 땅 위에 거대한 성전을 지어 사람을 채우는 놀라운 기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부산의 가장 큰 부흥 행사마다 집행위원장과 대회장의 이름으로 부름을 받아 해운대 백사장에 20만명을 채우고, 아시아드 대운동장에 31만명을 채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단과의 전쟁에서는 장수로 선택을 받아 고소고발을 당하는 위기속에서도 강하고 담대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승리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평양의 고려호텔에서 통성기도회와 찬양인도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북한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2009년, 제자훈련 시즌2로 국제목양사역원을 설립하고 2018년 5월까지 34차에 걸쳐 4,000명의 목사와 장로의 손을 하나로 연결하였습니다. 목사와 장로가 하나되기 위해서라면 국내 어디든, 해외 어느 장소든 마다 하지 않고 달려 갔습니다. 최홍준 목사님은 여전히 청년과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립교단에 소속한 교회들의 상처와 문제도 함께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지만 교계의 오해와 마찰을 불러 오면서 까지 사역을 계속할 수는 없었습니다. 2018년 6월, 최홍준 목사님은 교단의 평화와 불안감을 불식시키기 위해 “카이캄”(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을 공식 탈퇴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최홍준 목사가 변하였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럴까요? 최홍준 목사는 400명의 부산새중앙 교회를 1만명 호산나교회로 성장시킨 후 어떤 영광과 영화를 바랬습니까? 65세 은퇴기에 수많은 성도들은 자신의 은퇴를 반대하였지만 그는 물러날때를 알고 약속을 지켰습니다. 호산나교회 안에서 국제목양사역원을 계속할수도 있었지만 그는 후임 담임목사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사역원을 독립시키고 홀로서기를 감행하였습니다. 그는 원로목사의 자리에서 더 이상 현장목회를 계속할 포지션을 갖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을 위하여 목양사역컨퍼런스를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짧은 기간 동안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인간 “최홍준”을 만났습니다. 그가 30대때 자신의 기업이 문을 닫지 않았다면 오늘날 그는 목사가 아니라 장로의 위치에서 목양장로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는 분명 어느 직분의 자리에 있었든지 분명 평화와 평안을 위해 노력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강하고 담대한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곳이 평양이든, 이단의 문턱이든, 기세 등등한 정치 장로든 그 어느 것도 두려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최홍준 목사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빈곳에 성전을 건축할 생각과 행동을 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최홍준 목사였기 때문에 목사와 장로의 주먹쥔 손을 악수의 손으로 변화하는 국제목양사역원이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분명 최홍준 목사님이라는 바로 뒤편에 서 계신 예수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은퇴 10년을 향하고 있지만 부산교계는 여전히 최홍준 목사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끝없는 질주와 지치지 않는 날개로 여전히 비상하는 최홍준 목사님의 내일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혜가 더욱더 충만해 지기를 기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