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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1세)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에서 출생. 본명은 서기학(徐夔学)이고 초명은 서정학(徐正学), 호는 백포(白圃), 당호(堂号)는 삼혜당(三兮堂), 본관은 이천(利川)이다. 이천 서씨의 시조는 신라의 개국공신 서두나의 후손인 아간공 서신일(徐神逸)로 알려지고 서일은 아간공 서신일의 36세손으로 헤아려진다. 서일의 선친은 서재운(徐在云)으로서 서일은 3대독자로 태어남을 보인다. 서일의 아들 서윤제도 독자이니 4대독자로 내려 온다. 서윤제에게 아들 형제가 있어 서경섭, 서만섭이니 4대독자에서 벗어나게 된다.
소년시절
어린 시절에 고향의 서당 김노규 스승의 문하에서 여러 해 한학(汉学)을 배우며 지식과 민족의식을 키우다가 경성함일사범학교 전신인 "유지의숙"에 입학, 유지의숙은 함경북도 근대화운동의 선구자 이운협 선생이 창설한 의숙, 몇 해 후에 유지의숙은 경성함일사범학교로 개칭되었다.
1902년 (22세)
1902년에 경성함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이해 봄부터 1911년 봄까지 10년간 고향에서 계몽운동가 교육사업에 종사.
1905년 (25세)
이해 11월 17일, 일본에 의해 이른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압적으로 체결되면서 나라는 한개 독립국가로서의 당당한 지위를 잃고 이른바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말았다. 이 분통한 소식이 전해지자 온 나라는 울음의 바다, 분노의 바다로 되고 서일은 매일이다시피 같은 학교 선생으로 친구인 박기호 등과 더불어 나라의 비운을 통탄.
1907년 (27세)
1907년 새해 벽두에 친구 박기호가 서울의 『대한매일신보』를 들고 서일을 찾았다. 신문에는 고종황제가 이른바 1905년 을사늑약은 짐이 아는바가 아니라고 부인한 6항목의 친서수교가 실려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늘 고종의 무능함을 통탄하며 고종을 욕하던 서일로서는 고종황제를 다시 이해하는 신선한 뉴스였다. 훗날의 대종교 제1대 교주 나철이 1907년 1월부터 을사오적 암살계획 추진을 위해 자신회(自新会)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3월 25일을 거사일로 잡았으나 실패하고 만다. 서일은 이 실패의 뉴스를 『대한매일신보』에서 보고 맹랑하여 신문을 내동맹이 친다. 그러다가 4월 2일자 서울의 한 친일신문에서 3월 25일 주모자인 나철이 동지들과 함께 을사오적인 박제순, 이지용 등 암살을 꾀하다가 또 실패하고 오기호, 김동식과 함께 평리원(平理院) 에 자수했다는 뉴스를 보고 진정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언녕부터 사귀며 지내던 신채호와 교감하면서 시국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1907년 7월의 신채호 소개로 서일은 이해 봄에 조직된 비밀정치단체—신민회에 가담하며 자기의 생명과 자산을 다 하여 신민회를 후원하기로 맹세하였다.
1909년 (29세)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한반도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이 중국 할빈역두에서 안중근의 권총에 맞아죽었다. 서일은 여러 신문과 소문을 통하여 김치보와 안중근의 거사를 알게 된 서일은 김치보, 안중근과 같은 반일지사들이 있는 한 나라는 희망이 있다며 선후로 현천묵, 박기호 등을 만나 안중근의 할빈거사를 주고받으면서 "안중근은 영웅이오. 우리도 안중근처럼 싸워 보자구!" 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1910년 (30세)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이완용 따위들과 조선강점의 조약(한일병탄조약)을 맺고 8월 29일에 반포하니, 허수아비뿐이던 나라는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분노한 서일은 고향에서의 근 10년 계몽교육을 접고 행동으로 반일독립운동에 나서기로 결의한다.
1911년 (31세)
1911년 봄에 서일은 반일독립을 결의하고 일가족들인 부친 서재운, 부인 채씨, 맏딸 서×× (출가후 병고로 이름조차 알 수 없음, 당시 10세), 둘째딸 서죽청(6세), 아들 서윤제(4세) 등 다섯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두만강이북 왕청현 덕원리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왕청현 덕원리는 천교령 부근에 발원지를 둔 가야하와 십리평, 소왕청쪽에서 흘러 나오는 대왕청하와 합수되는 부근 동북쪽 산기슭, 지금의 왕청역에서 북으로 약 7〜8리 되는 곳에 자리 잡은 아담한 조선이주민 마을이다. 관련 자료연구에 따르면 덕원리는 19세기 말에 이르러 개척됨을 보인다.
1911년 이해 3월, 서일은 재기를 도모하는 반일의병들과, 대종교인이자 동지들인 현천묵, 계화 등과 손잡고 항일독립단체인 ‘중광단’(重光团, 중광이란 대종교의 중광을 환호하고 단군을 숭상하며 민족의 혼이 의연히 살아 있다는 뜻)을 조직하고 그 본영을 덕원리에 두었다. 서일이 중광단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1909년 음력 정월 15일에 애국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나철선생이 동지들과 더불어 서울에서 전래의 단군신앙을 부활시키고 이듬해 7월 30일에 교명을 ‘대종교’(大倧教)로 바꾸었다. 그리곤 활동지역을 두만강 너머로 넓히고저 1911년 7월에 화룡현 청파호에 이르렀다. 왕청현 덕원리에서 이 소식에 접한 서일은 화룡현 청파호에 가서 나철선생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서일은 스승의 당호 ‘일지당’(一之堂)에 따라 자기의 당호를 ‘삼혜당’(三兮堂)으로 하였다. 대종교의 교리인 삼일철학(三一哲學)을 모방한 명명이었다.
1912년 (32세)
1912년 음력 8월, 서일은 수명의 동지와 협의하여 청파호에 동원당을 조직하였다. 나철선생의 지도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 김동환의 연구에 따르면 동일당은 "독립운동을 완수하기 위한 체계적 활동을 결정하고 이를 지도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이해 10월에 서일은 대종교에 정식 입교하며 대종교 포교활동을 맹렬히 벌였다.
1913년 (33세)
대종교에 입교한 후 서일은 1913년 10월에 대종교의 영계를 받고 참교(参教)의 교질(敎秩)을 수여 받음과 동시에 시교사(施敎師)에 임명되었다. 그 후부터 서일은 방향을 돌려 교리를 찬술하는 저술사업에 정력을 쏟았다. 짧디 짧은 몇 년 기간에 그는 『삼일신고강해(三一神誥講解)』․『회삼경(會三經)』․『구변도설(九变图说)』․『진리도설(眞理圖說)』․『신리주해(神理註解)』․『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삼문일답(三問一答)』․『신사기절안(神事記節案)』 등을 저술하였는데, 특히 『삼일신고강해』와 『회삼경』은 홍암 나철의 『신리대전(神理大全)』과 무원 김교헌의 『신단실기(神檀實記)』와 더불어 대종교의 주요 경서로 언급된다.
서일은 왕청현 덕원리에 이주한 후 중광단을 조직하고 나철을 만나고 대종교 포교에 전력하는 한편 여러 사람들과 힘을 합쳐 1913년 4월 1일에 덕원리에 명동학교를 정식으로 설립하였다. 시초의 학생 수는 32명이고 교원은 2명이며 학제는 5년이었다. 교장은 서일이고 서일이 직접 교수에 나섰다.
1914년 (34세)
1914년 5월 13일, 대종교총본사는 서울에서 대종교 동도본사 1사가 자리 잡은 화룡현 청파호로 이전한 모습을 보인다. 나철은 대종교총본사를 화룡현 청파호에 두고 총본사 산하에 동도본사(왕청현), 서도본사(상해), 북도본사(노령 소학령), 남도본사(조선 경성) 등 4개 도본사를 설치하고 각지에 시교당 48개소(연변에 22개소)를 설치하니 서일을 왕청현에 설치된 동보본사의 책임자로 내세운다. 서일은 중광단의 중심인물들을 지도하여 화룡현, 왕청현, 연길현으로 나뉘어 포교활동을 벌이면서 독립운동의 힘을 키웠다. 후일 대종교 전성기에 교도가 30만을 헤아렸다는 것도, 그 기반에는 나철과 서일 등의 노력이 지극했다.
1914년 11월, 용정 간도일본총영사관의 명령을 받은 투도구영사분관에서는 화룡현 지사를 핍박하여 대종교를 즉각 해산하라고 아우성쳤다. 후일 투도구영사분관의 일경들이 청파호에 들이닥쳐, 대종교 중견인물들을 체포해갔다. 이어 집요하게 대종교활동 전반을 어렵게 하자, 대종교총본사는 동도본사 제2사가 자리 잡은 왕청현 십리평 쪽으로 옮겨 가야만 했다.
1915년 (35세)
대종교총본사의 화룡현 청파호 이전과 대종교의 놀라운 발전은 적들을 긴장시켰다. 당황망조한 일제는 1915년 10월에 드디어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였다. 종교통제안에 의하면 대종교는 불법단체이기에 합법적 활동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철(대종사)은 당국을 찾아 여러 차례 교섭을 벌렸으나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였다.
1916년 (36세)
나철은 대종교 정상 활동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어찌할 수 없는 그는 1916년 음력8월 상교(尚教) 김두봉(金抖奉)을 비롯한 수행자 6명과 함께 단군신앙의 성지로 불리우는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하였다.
이해 음력 8월 15일 자시(子时)정각에 나철 대종사는 수행자들과 함께 제천의식을 행했다. 따라서 수행인원들에게 “내 절식수행에 들어가겠으니 방문을 열지 말라"고 말하고는 3일 동안의 수도에 들어갔다. 그 뒤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16일 새벽에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스승님은 「순명삼조(殉命三條)」 등 유서를 남기고 조식(调息)의 폐기법(闭气法)으로 운명하였다.
서일은 스승의 순국과 「순명삼조」를 마음에 아로 새기었다. 그만큼 나철의 순국이 서일한테는 너무도 타격이 컸고 너무도 느끼는 바가 컸다. 두 주먹을 불끈 틀어 쥐였다. 포교만으로 안되고 민중을 깨우치는 일만으로는 안되니 무장항쟁의 길로 나가야 한다는 것, 서일은 마음의 결단을 내리었다.
1917년 (37세)
1917년 경에 이르러 명동학교에 중학부를 설치하였다. 교사는 토목구조로서 소학부는 유수하 동쪽기슭에, 중학부는 서쪽기슭에 자리 잡았다. 중학부의 과목으로는 수신, 국어, 한어, 작문, 국내외역사, 기하, 삼각, 부기, 주산, 산술, 동식물, 화학, 법제, 경제, 실업, 농사, 창가, 체조 등등이고, 학교 학생들은 모두가 대종교 신앙자들이었다. 중학부 학생 특성을 보면 소학교 졸업생이 위주로 보인다. 그 밖에 구국열에 불타는 청년들과 타현의 청소년들, 연길도립중학교 재학생들 중에서도 달려오니 중학생 수는 100여명으로 늘어났다. 교원으로는 교장 서일이 직접 교수를 맡아 나서고 고평, 계화 등 동지들도 교편을 잡았다. 졸업반 학생 최관에게는 소학부의 일부 과목을 맡기었다. 일제하 서일과 대종교 교인들에 의해 꾸려진 대표적인 학교들은, 화룡현 청일학교, 창동학교, 연길현 문명학교, 연길현 세린하 이화동에 있는 광진학교, 훈춘현 진동학교, 영안현 대종학교 등으로 나타난다. 이런 학교는 거의가 소학부와 중학부를 설치하고 진보적 지식인들이 강의를 맡아 나섰다. 그들 중에는 서일, 윤세복, 이장녕, 김규식, 김백, 최관, 김정 등 출중한 정치가, 군사가와 학자들이 적지 않았다.
1918년 (38세)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이 내놓은 ‘민족자결론’은 해내외 각지의 조선인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이에 힘을 얻은 서일은, 그의 대종교 동지들을 중심으로 내세워 39명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케 하고 전 민족의 독립운동을 발기하였다.
1919년 (39세)
1919년 3월 1일,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에서 전민족적인 반일운동이 폭발하였다. 3월 13일, 용정에서도 3.13 반일운동이 폭발하고 독립 만세소리가 화룡현과 연길현, 왕청현, 훈춘현 각지에서 맹렬히 터져 올랐다. 대략의 통계에 의하면 남만 등 지구를 제외한 연변지구에서 1919년 3월 13일부터 5월 1일까지 도합 30여 개 곳에서 반일집회와 시위가 53차 열리고 8만여 명의 조선인들이 동원되였다.
왕청현에서는 서일의 지도하에 덕원리 중학부의 중학생들을 중심으로 각지 사립학교 학생들과 많은 대종교인들이 만세운동에 떨쳐나섰는데, 덕원리 중학부의 중학생들은 일제히 칼을 차고 보무당당히 나섰다. 이 무렵에 나철 대종사의 유언대로 제2세 교주로 등극한 무원종사 김교헌이 서일에게 대종교 교통을 넘기려고 하였다. 서일은 제2세 교주의 간곡한 권유를 5년간 보류키로 하고 무장투쟁준비에 심신을 쏟아 부었다. 서일은 시위나 만세소리, 적수공권으로서는 일제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 낼 수 없다는 것을 깊이깊이 느끼었다. 이해 1919년 4월에 서일은 중광단의 토대 위에서 대종교 교인들을 핵으로 하고 반일의병들과 공교회(孔教会) 회원들을 더 규합하여 대한정의단을 발족하고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서일은 정의단 내에 순수 우리글 신문 『일민보(一民报)』와 『신국보(新国报)』를 꾸리고 무장항쟁을 고취하면서 결사대원을 모집하였는데, 응모하여 등록한 결사대원이 1,037명에 이르렀다. 서일은 이해 8월에 또 대한정의단 산하에 순 무장조직인 대한군정회를 조직하고, 신민회 출신들이면서 남만의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인 김좌진, 조성환, 이장녕, 양림, 박찬익, 박성태 등 한패의 남만 출신들을 초빙하여, 군정회를 맡아 보도록 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정의단은 덕원리와 그 일대를 떠나 본영을 왕청현 서대파구 십리평에 두고 연변 각지에 5개 분단, 70여 지단을 설치하였으며 ‘단지(断指)결사대’ 1,000여명을 두었다. 1919년 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서일은 이 임시정부의 지도를 받기로 하고 1919년 12월 ‘국무원 제205호’ 정신에 따라 중광단으로부터 발족된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로 개편하였다. 대한군정부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에 의해 그 명칭을 ‘대한군정서’로 즉각 개칭, 서간도의 대한군정서를 "서로군정서"로 명명한데 비추어 대한군정서는 ‘북로군정서’라는 별칭을 가지었다. 서일은 북로군정서 총재로 추대되었다.
새롭게 탄생한 북로군정서는 중앙조직 체계를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누었다. 총재부가 주로 대한정의단의 중심인물들로 구성되었다면, 사령부는 주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사령부는 총재부의 절대적 지도를 받았으며 총재부와 사령부의 거의 모든 인물들이 대종교 교도들이었다.
북로군정서는 왕청현 십리평 마을 뒤 잣덕의 펑퍼짐한 산기슭 밭 가운데 자리 잡았다. 본부와 병영은 5〜6헥타르에 달하는 산허리를 평지로 만들어 건설했는데 나무를 찍어 만든 중국식 6칸집 5개와 5칸집 2개 등으로 이루어졌다. 본부와 조금 떨어진 남쪽의 광활한 평지에 사방 100미터 좌우의 연병장 두개가 건설되었다.
1920년 (40세)
북로군정서 산하 사관연성소는 1920년 3월 1일에 정식으로 개학하였다. 사관연성소 예비훈련반은 북로군정서 본부와 약 300미터 떨어진 남쪽의 조금 경사진 잣덕 평지에 교사 6채를 짓고 위치했다. 한편 사관연성소 본부는 동북쪽 계곡을 따라 약 15리 쯤 되는 곳에 자리 잡았다.
사관연성소 소장은 신흥무관학교 출신 김좌진이 맡았다. 그 외 박영희가 학도단장을, 이장녕, 이범석, 김규식, 양림, 김홍국, 최상운 등이 교관을 맡았다. 사관생은 300여 명이었는데, 주로 대종교 산하의 청년들과 덕원리 명동중학교의 학생들로 이루어졌다. 나이는 보통 20〜40살 사이었다.
한편 서일은 병력 확대, 무기 장만, 핵심 군사 양성이란 세 가지 과업을 내세우고 군정서 산하에 모금대 8개대를 두고 전력을 다했는데, 1920년 초에 이르러 20여 만원의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서일은 재무담당 계화와 함께 전문 병력 확대와 무기구입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0년 6월, 총재 서일과 계화가 이끄는 무장경비대가 무기운반대 200여명을 무장보호하면서, 러시아 연해주에 가서 무기를 많이 운반해 왔다. 1920년7월과 9월 사이에도 수차 러시아 연해주를 드나들며 무기를 많이 사들여 사관생들 전부가 무장을 지니게 되었다. 이 결과 북로군정서는 처음 병력 500여명에, 보총 500자루, 권총 40자루, 기관총 3정으로 나타났으나, 일제측의 자료인 「간도에 있어서의 불정선인단의 상황」에 의하면, 1920년 8월 현재로 북로군정서의 무력은 독립군 약 1,600여명, 군총 1,300자루, 기관총 7정이라고 나타난다. 1920년 8월 일본군은 정식으로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확정하고 9월에는 출병 대기 중인 각 부대에 전투태세에 들어갈 것을 명령하였다. 중국 지방당국은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연길 주둔 중국육군 제2혼성여보병제1퇀 퇀장 맹부덕을 본지 토벌장관으로 내세웠다. 육군퇀장 맹부덕은 토벌을 앞두고 1920년 9월 5일에 산하의 중국군 160여명을 십리평 잣덕에 보내어, 북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사령관 김좌진 등을 만나 독립군부대들이 일본군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빨리 퇴각할것을 전했다. 1920년 9월 7일 마지막으로 러시아 연해주 무기구입에서 돌아 온 서일은, 바로 부총재 현천묵과 수하 사령관 김좌진으로부터 길림육군 제1혼성여보병 제2퇀 퇀장 맹부덕의 수하들이 다녀간 회보를 받고 전략적 이동을 결단했다. 그리고 9월 9일 오전 10시에 십리평 잣덕의 본부에서 산하 사관연성소 제1회 사관생졸업식을 앞당겨 치르고 298명을 졸업시켰다. 서일은 북로군정서 지도부와 함께 전문회의를 갖고 북로군정서 부대를 동부와 서부 2개 전선으로 나누기로 결정하였다. 서부전선에 소속된 1,000여명 주력부대는 선발대와 본대로 나누어 총과 탄약 등 군수품을 4대의 손수레에 싣고 9월 17일부터 십리평 잣덕 본부를 떠났다. 이어 화룡현 삼도구 심산 속에서 추격하는 일본침략군을 일망타진하기로 계획했다. 한편 서일은 동부전선에 속하여 직접 북로군정서 기관과 가속(家屬) 그리고 후방부대를 이끌고 동으로 움직이며 기회를 보아 적들과 조우전을 벌이면서 새 근거지 창설에 진력하기로 하였다. 1920년 9월 17일과 18일에 김좌진 사령관은 서일 총재의 명령을 받고 북로군정서 부대를 이끌고 서부전선의 서쪽으로 진군하여 10월 12일과 13일에 화룡현 삼도구 일대로 이동하였다. 10월 21일 아침 8시 경에 북로군정서 주력부대는 청산리 백운평 직소에서 나남주둔 제19사단 73연대 야스가와(安川)소좌가 인솔한 야마다(山田)연대의 전위부대를 매복 습격하였다. 적들은 별반 반격도 못하고 약 200명이 eP죽음을 당했다. 야마다연대의 주력부대도 기관총, 산포 등 중무기를 앞세우고 발악적으로 달려들다가 역시 200〜3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하고 말았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전역 첫 전투에서 찬란한 승리를 얻었다. 이것을 흔히 백운평전투라고 한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6일 간에 홍범도가 이끄는 연합부대와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 부대는 선후로 백운평 부근 전투, 천수동전투, 왈리구(曰日沟전투, 어랑촌전투, 고동하전투 등, 대소 10여 차의 전투를 치르면서 일제 정규군 1,000명 정도를 섬멸하는 자랑찬 전과를 올리었다.
이것이 서부전선이라면, 동부전선은 일본군이 획분한 토벌지대로서 훈춘 동북부와 왕청의 동녕 이서지구를 가리킨다. 일본군은 이 지구에 나남주둔 제19사단 제 38여단의 주력과 시베리아 파견군 제11, 13, 14사단의 부분 병력 도합 1만 여명을 풀었다. 우리 반일무장부대의 병력은 서일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유수(留守)부대와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 부대, 신민단, 의군부, 나자구의사부, 훈춘한민회 등 800여명이다. 이들 동부전선의 반일부대들은 서일 등의 지휘하에서 10월 23일의 왕청현 십리평전투를 서막으로 왕청현 나자구, 노무주하(老母猪河), 장가점, 하마탕, 훈춘현의 삼도구, 우두산(牛头山), 소수분하(小水芬河), 팔가자 등 수차의 전투를 펼치며 많은 적들을 소탕하였다.
1920년 10월을 계기로 연변 내 반일무장단체들은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으로 나뉘어 청산리전투 등을 감행하며, 이른바 대토벌에 나선 일본침략군을 호되게 족친 후, 여러 갈래로 무사히 밀산현으로 이동하였다. 서일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과 신민단, 도독부, 의군부, 혈성단,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등 9개 반일무장부대 3,500여명 대오는 밀산현 당벽진에 모여 겨레 항일운동사상 전례가 없는 대회합을 이루면서 처음으로 되는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서일을 신생한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로 추대했다.
1921년 (41세)
대한독립군단은1921년 1월에 국경을 넘어 노령 자유시로의 이동 길에 오르고 서일은 보다 큰 승전과 장래를 위해 일부 소부대를 거느리고 이동하지 않고 당벽진에 남아 후방기지 건설에 나선다. 독립군부대의 둔병제(屯兵制)를 실시하려는 것이 후방기지 건설의 주요한 내용이었다. 1921년 6월 28일 노령 자유시로 간 대한독립군단은 뜻하지 않게 러시아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서로의 무력충돌에서 많은 독립군 사람들이 쓰러지고 체포되었다. 러시아령 자유시사변으로 하여 서일장군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은 치명적 타격을 입고 풍비박산이 났다.
그러던 1921년 8월 26일, 한 무리 마적들이 서일장군이 머무르는 마을을 야습하여 살인방화하고 약탈하며 무법천지로 돌아간다. 서일의 부하 열두 의사(义士)가 이에 대항하여 분전하다가 중과부적이 되어 마침내 몰사한다. 밀산에 둔병제를 바탕으로 한 독립군 후방기지를 건설하고자, 서일과 함께 남았던 마지막 한 부분의 병력마저 피바다에 쓰러졌다. 서일은 철저히 맥이 풀리었다. 러시아 자유시사변, 밀산 당벽진에서의 마적의 습격은 서일에 대한 타격이 너무도 컸다. 서일한테는 이 모든 것이 자기의 밀어 버릴 수 없는 책임으로 느껴졌다. 서일은 그해 1921년 8월 27일 오전, 밀산현 당벽진 마을 뒷산의 산림 속에서 곧게 앉은 모습으로 자결 순국했다. 서일은 스승인 홍암 나철이 순명삼조를 남기고 5년 전 1916년 음력 8월 15일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함을 상기하면서, 나철선생의 유서 한 구절을 읊조리면서 순국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