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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문학제 시낭송 강의
민문자
며칠 전 평소에 존경하는 시인으로부터 정지용문학제에서의 시 낭송강의를 제안받았다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쾌히 하겠다고 수락을 하였다.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경구를 가슴에 안고 그동안 강의한 경험도 꽤 쌓았고 ‘계속은 힘이다’ 라는 생각에 자신을 갈고닦는 공부를 끊이지 않고 하면서 살다 보니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란 생각이 들어 반가웠다.
옥천 정지용문학제는 해마다 정지용 시인의 생일인 5월 15일을 전후해서 열린다. 올해는 13일부터 15일까지이다. 십 년 전에 처음 갔을 때 얼마나 감개무량했는지 방명록에 정지용 시인 → 박두진 시인 → 정공채 시인 → 민문자 라고 기록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첫 번째 시 스승은 고 정공채 시인이다. 정공채 시인은 박두진 시인이 천의무봉 시인이라며 아끼던 시인이었다. 박두진 시인은 청록파 시인 중 한 분으로 정지용 선생님 추천으로 문장지로 등단 된 분이다. 그러므로 시 족보를 따진다면 정지용 시인은 나의 증조부가 되시는 셈이다.
십 년 만에 다시 지용제에 참가하게 되어 감개무량하다.
지용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전국각지에서 몰려든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시낭송 강의를 해야 한단다.
14일 토요일과 15일 일요일 오후 4시에 강의 시간을 배정받았으니 1박 2일 여행이 되겠다. 우선 기차표를 예매해 놓아야겠다. 우선 함께 강의에 참여할 분들을 대표하여 영등포역사로 가서 기차 시간표 옥천행은 14일 10시 4분 영등포 출발 무궁화호로, 15일은 옥천 출발 저녁 7시 32분 무궁화호로 예매하였다.
제29회 지용제 시낭송 강의
(2016년 5월 14일 강사 민문자)
■ 발음과 발성 연습
1. 한 마디 한 마디 크고 정확하게 큰 소리로 발음한다.
2. 반복하여 연습의 효과를 높인다.
■ 음정 연습
1. 아 어 오 우 으 이 아 어 오 우 으 이
2.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도 시 라 솔 파 미 레 도
■ 유음과 파열음 연습
1. 어 - 엘, 애 - 림 - 포, 엘 - 박 - 파
2. 로 - 얄, 사리 - 톨, 막 –파
3. 수네이 - 파 – 젤
4. 프렌 - 마 - 네 – 푸
■ 단발음 연습
1. 싸, 패, 쑹, 썬, 쭉, 헉, 훅, 땅
2. 떱 열, 력, 랠, 탑, 땁, 턱, 퍽
3. 를, 을, 릴, 얄, 물, 불, 풀, 쭐, 출
■ 겹발음 연습
1. 유-훅-혈, 팡-팡, 펑-펑, 쌩-쌩, 훨-훨, 활-활, 쏴-아-
2. 산들산들, 살랑살랑, 방긋방긋, 토닥토닥
으렁으렁, 쭈룩쭈룩, 살금살금, 와글와글
■ 음성 높이기 훈련
■ 같은 발음하기
1. 사람이 사람이라고 다 사람인줄 아는가?
2. 사람이 사람구실을 해야 참 사람이지.
3. 저기 있는 저 분이 박 법학박사이시고
4.여기 있는 이 분이 백 법학박사이시다.
5.상표 붙인 큰 깡통은 깐 깡통인가, 안 깐 깡통인가?
6.저기 저 뜀틀이 내가 뛸 뜀틀인가, 내가 안 뛸 뜀틀인가?
■ 모음소리 - 입모양
1.아 어 오 우 으 이
2. 아 버 지
■ 말꼬리 분명하게 하기 / 속도감 유지 / 음량과 음폭 살리기
1.낭송 - 리듬감을 기본으로 고저장단
발음속도, 강.약, 행과 연, 분위기, 감성
2.낭독 - 문장의 이해를 거친뒤 글의 정서를 잘 나타내는
방법으로 또박또박 읽는다.
■ ‘의’ 발음의 세 가지. 의는 위치에 따라 다음 세 가지로 발음 된다.
1.첫음절의 ‘의’는 으와 이의 합음으로 제대로 발음 한다.
예) 의사. 의논. 의지. 의정부. 의성어
2. 소유격조사의 ‘의’는 영어의 e 에 가깝게 발음한다.
예) 나의 집. 우리의 사명. 사랑의 학교. 진리의 소리
3. 그 외의 자리에서의 ‘의’는 이로 발음한다.
예) 의의, 민주주의
* 말이 빠른 사람은 입모양을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정확하게 한다.
* 말이 너무 느린 사람은 입모양을 조금 적게 하면 말이 빨라진다.
향수/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호수 / 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湖水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유리창(琉璃窓) 1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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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2
내어다보니
아주 캄캄한 밤,
어험스런 뜰 앞 잣나무가 자꾸 커 올라간다.
돌아서서 자리로 갔다.
나는 목이 마르다.
또, 가까이 가
유리를 입으로 쪼다.
아아, 항 안에 든 금붕어처럼 갑갑하다.
별도 없다, 물도 없다, 쉬파람 부는 밤.
소증기선처럼 흔들리는 창
투명한 보랏빛 유리알 아,
이 알몸을 끄집어내라, 때려라, 부릇내라.
나는 열이 오른다.
뺨은 차라리 연정스레이
유리에 부빈다, 차디 찬 입맞춤을 마신다.
쓰라리, 알연히, 그싯는 음향―
머언 꽃!
도회에서 고운 화재가 오른다.
바람 /정지용
바람.
바람.
바람.
늬는 내 귀가 좋으냐?
늬는 내 코가 좋으냐?
늬는 내 손이 좋으냐?
내사 왼통 빨개졌네.
내사 아무치도 않다.
호호 칩어라 구보로!
바다7 / 정지용
바다는
푸르오,
모래는
희오, 희오,
수평선 우에
살포-시 내려앉는
정오 하늘,
한 한가운데 돌아가는 태양,
내 영혼도
이제
고요히 고요히 눈물겨운 백금 팽이를 돌리오.
[생애]
고향에서 초등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에서 중등 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京都)에 있는 도지사대학(同志社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곧바로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8·15광복과 함께 이화여자대학교 문학부 교수로 옮겨 문학 강의와 라틴어를 강의하는 한편, 천주교 재단에서 창간한 경향신문사의 주간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슨 까닭인지 확인된 바 아니나, 이화여대 교수직과 경향신문사 주간직은 물론, 기타의 공직에서 물러나 녹번리(현재 은평구 녹번동)의 초당에서 은거하다가 6·25 때 납북된 뒤 행적이 묘연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최근 평양에서 발간된 「통일신보」(1993.4.24., 5.1., 5.7.)에서 가족과 지인들의 증언을 인용해 정지용이 1950년 9월경 경기도 동두천 부근에서 미군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의 행적에 대한 갖가지 추측과 오해로 그의 유작의 간행이나 논의조차 금기되다가 1988년도 납·월북작가의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로 작품집의 출판과 문학사적 논의가 가능하게 되었다.
[활동사항]
정지용의 시단 활동은 김영랑(金永郞)과 박용철(朴龍喆)을 만나 시문학동인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화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시절에 요람동인(搖籃同人)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일본의 유학 시절 ≪학조≫·≪조선지광≫·≪문예시대≫ 등과 경도(京都)의 도지사대학 내 동인지 ≪가 街≫와 일본시지 ≪근대풍경 近代風景≫(北原白秋 주간)에서 많은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정지용의 이런 작품 활동이 박용철과 김영랑의 관심을 끌게 되어 그들과 함께 시문학동인을 결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첫 시집이 간행되자 문단의 반향은 대단했고, 그를 모방하는 신인들이 많아 ‘지용의 에피고넨(아류자)’이 형성되어 그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의 이런 시적 재능과 활발한 시작 활동을 기반으로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과 함께 ≪문장 文章≫ 지의 시부문(詩部門)의 고선위원(考選委員)이 되어 많은 역량 있는 신인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가 신인을 추천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시만큼 갈고 다듬고 하여 ‘대성(大成)의 영광(榮光)’을 함께 나누려는 자세로 임했다 함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장≫지를 통해서 추천한 박두진(朴斗鎭)·조지훈(趙芝薰)·박목월(朴木月) 등 청록파(靑鹿派)를 위시하여 이한직(李漢稷)·박남수(朴南秀) 등이 후에 펼친 시작 활동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그 동안 우리는 정지용의 시적 특색에 대한 논의를 언어의 감각미 이미지의 공간적인 형상화에만 한정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가 주제, 곧 내용이나 사상성이 배제되고 단순히 ‘모더니즘’이라는 문학사조적인 지평(地平)에서 진단해 왔기 때문에, 그의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시적 속성을 잘 살피려 하지 않았다.
단순히 모더니즘이나 이미지즘의 차원에서만 논의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어느 작가이든 자신의 문학적 체험이 제한된 공간에만 고정되고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할 때, 정지용의 시작 과정도 어느 하나의 공간이나 체험으로 국한된 범주로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시적 변모(變貌)를 시도한 통시성(通時性)의 원리와 구조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의 시작 전반을 크게 두 단계로 구분해서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바다’시편들을 포함한 전기시작에서 한 사물의 감각적 인상이나 공간성의 이미지를 특색으로 들 수가 있다. 이들 시작들이 지니는 감각성과 공간성, 이런 시적 속성들이 반드시 표현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사물의 깊이를 투시(透視)하는 시인의 시적 체험은 훨씬 깊이 자리하고 있다.
그 새로운 시어나 이미지로 하나의 사물을 재창조한다고 할 때, 그 사물의 깊이를 투시하여 실체(實體)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바다’로 향하는 정지용의 시적 상상력은 그 깊이에 자리한 생명의 신비성(神秘性)을 추구하는데 있고, 나아가서 이런 깊이의 시적 체험은 그의 신앙 시편들에서도 같은 맥락이다.
‘나무’의 직립성(直立性)이나 ‘불’과 ‘태양’의 이미지로 형상화된 그의 성신(聖神)으로 향하는 상승작용은 물론, 인간의 온갖 고뇌(苦惱)를 녹이려는 종교적 신앙의 열도(熱度)를 ‘불’로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산’의 시편들로 구성된 ≪백록담≫에 이르러서는 그 전기 시에서 보인 심혼(心魂)의 갈등과 동요와는 전혀 다른 정밀(靜謐)한 화평(和平)의 시세계를 보이고 있다
자기소멸과 일체의 세속적인 것에서 일탈(逸脫)하여 자연으로 되돌려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무화(無化)시키고 ‘지인무기(至人無己)’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소박하고 원초적(原初的)인 ‘삶’을 영위하는 그런 마음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상 정지용의 시세계를 통시적 차원에서 두 단계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한마디로 정지용은 우리 근대시사에서 하나의 큰 봉우리라 할 수 있다. 1920년 대 초의 외래 문학사조의 영향을 받아 문예사조의 혼류현상(混流現象)을 이루고 있었다면, 그 중엽에 등장한 정지용은 우리의 목소리를 가다듬어 노래한 것이다.
그는 우리말의 세포적 기능(細胞的 機能)을 추구하여 그 속성을 파악하고 언어의 감각미(感覺美)를 개척한 시인으로 1930년대 한국 시단을 주도해간 것이다. 유작으로는 ≪정지용시집 鄭芝溶詩集≫(시문학사, 1935)·≪백록담 白鹿潭≫(문장사, 1941) 등 두 권의 시집과 ≪문학독본 文學讀本≫(박문서관, 1948)·≪산문 散文≫(동지사, 1949) 등 두 권의 산문집이 있다.
그의 산문집에는 <수수어 愁誰語>·<다도해기 多島海記>·<화문행각 畫文行脚> 등과 같은 수필류와 시론(詩論) 및 기타 역시(譯詩)와 일반 평문 등으로 편성되어 있다. 이외에도 이들 단행본에 실리지 않은 시작과 산문의 상당수가 집성되어 1988년도에 민음사에서 시집과 산문집으로 구분하여 전집(全集)이 간행되었다.
■ 실제 발음 연습용 시
참 멋진 사람 / 민문자
미소 띤 얼굴로 다정히 인사도 건네시고
몸 튼튼 마음 튼튼 남의 건강도 살피시며
인생사 진지한 문제도 멋스러운 유머로
필요한 때에 적절한 말씀 즐겁게 이야기해
늘 진리와 지혜, 참 삶을 가꾸시는 사람
시낭송이나 세레나데도 수준급이어서
그를 만나면 이유 없이 기분 좋아
한밤중에도 전화로 목소리 듣고 싶은
먼 나라에 한 보름쯤 함께 여행하면서
카메라 렌즈에 담고 싶은 바로 당신
참 멋진 사람
■ 짧고 여운이 긴 시
그 꽃 /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풀꽃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능소화 / 임보
지가 무슨 화냥년이라고
분홍 속살 다 드러내 놓고
남의 집 담장에 기어올라
한여름을 흔들며 가네
고별사(告別辭)/정공채
세상 떠나면서 운다
그때 태어날 때와 지금 운다
눈물 소리 못 내고 한두 방울
이 빗방울에 말도 없이 고별사 안긴다
잘 있거라 내 사랑아
-월간문학(2008. 3월호)/한국문인협회 발행
■ 낭송하기 좋은 시
지상의 하루 / 임보
우리가 여기 오기 위해
몇 억만 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가
우리가 여기 이렇게 서기 위해
몇 억만의 우리 조상들 몸을 빌어
그렇게 숨어 흘러내려 왔는가
아 우리가 바로 이런 우리이기 위해
이 손과 발
이 가슴과 머리
바로 이러한 우리이기 위해
끝도 없는 저 우주로부터
무량의 빛과 구름을 모아
이 육신을 그렇게 빚었거니
오늘의 이 청명한 지상의 일기
산과 바다 저 찬란한 자연의 풍광
천둥과 바람 저 감미로운 자연의 운율
이보다 더 고운 낙원이 어디 또 있겠는가
천국을 팔아 지상을 더럽히는 어리석은 자들아
혹 그대 오늘의 삶이 그렇게 고되고 괴로움은
그대의 헛된 욕망과 미망 때문일 뿐
눈부신 이 지상의 하루
몇 억만 년만의 황홀이거니
깨어있는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면
그대의 집 뜰이 낙원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음을
비로소 눈물겹게 맞게 되리니
오빠가 되고 싶다 / 임보
나팔바지에 찢어진 학생모 눌러 쓰고
휘파람 불며 하릴없이 골목을 오르내리던
고등학교 2학년쯤의 오빠가 다시 되고 싶다
네거리 빵집에서 곰보빵을 앞에 놓고
끝도 없는 너의 수다를 들으며들으며
푸른 눈썹 밑 반짝이는 눈동자에 빠지고 싶다
버스를 몇 대 보내고, 다시 기다리는 등교 길
마침내 달려오는 세라복의 하얀 칼라
오빠! 그 영롱한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토요일 오후 짐자전거 뒤에 너를 태우고
들판을 거슬러 강둑길을 달리고 싶다, 달리다
융단보다 포근한 클로버 위에 함께 넘어지고 싶다
네가 떠나간 멀고 낯선 서울을 그리며그리며
긴 편지를 지웠다 다시 쓰노라 밤을 새우던
열일곱의 싱그러운 그 오빠가 다시 되고 싶다
산책 / 홍해리(洪海里)
산책은 산 책이다
돈을 주고 산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책이다
발이 읽고
눈으로 듣고
귀로 보는 책이다
책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도
산책을 하며 산 책을 읽는다
느릿느릿
사색으로 가는 깊은 길을 따라
자연경自然經을 읽는다
처음이라는 말 / 홍해리
'처음'이라는 말이 얼마나 정겨우냐'
첫'자만 들어도 가슴 설레지 않느냐
첫 만남도 그렇고
풋사랑의 첫 키스는 또 어떠냐
사랑도 첫사랑이지
첫날밤, 첫새벽, 첫정, 첫걸음, 첫나들이
나는 너에게 마지막 남자
너는 나에게 첫 여자이고 싶지
첫차를 타고 떠나라
막차가 끊기면 막막하지 않더냐
"처음 뵙겠습니다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살 수는 없을까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지만
세상은 새롭지 않은 것 하나 없지
찰나가 영원이듯
生은 울음으로 시작해 침묵으로 끝나는
물로 시작해 불로 끝나는
홀로 왔다 홀로 가는 긴 여로
처음이란 말이 얼마나 좋으냐
마라도에 닿거든 / 임승천
마라도에 닿거든 되돌아 제주를 보라
거기
일렁이는 물결 위
한라산 위로 떠나온 만큼의 시간이 출렁일 것이다
마라도에 닿거든 왼쪽 절벽을 보라
밀려오는 물결 거듭 깨어지되
변하지 않는 마음 속 시간까지 꿰뚫어 보라
마라도에 닿거든
왼쪽으로 펼쳐진 풀밭
아주 낮게 속삭이는 강아지풀
그 낮은 기막힌 사연을 들어 보라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그릴 수 있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려거든
가파초등학교 마라분교 앞에 서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그려 보라
바다와 물결
온몸으로 부딪히는 바람
영혼까지 뜨거운 마음을 파도 위에 띄워 보라
빗물/임승천
이미 내린 빗물에는
깊은 단절이 고여 있었다
어느 밤에도 머무르지 않고
다가오는 꽃잎의 향기
마지막 고독의 만남이
잠시일지라도
내린 빗물은 고독의 길에서
떠날 줄 모른다
내린 만큼의 자유와
버린 만큼의 향기로
뜨겁게 떨어지고 있다
모든 욕망이 녹아내린
끊임없는 단절 앞에서
청춘 / 민문자
갈래 머리에 꽃분홍 블라우스를 입고
오솔길에서 오빠와 마주쳤을 때
두 방망이질하던 가슴
다시 내가 열일곱 소녀가 된다면
오빠의 여동생에게 들려 보낸 연애편지
거절하지 않고 받아 읽고 답장도 쓸 텐데
휘파람 불며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자전거로 달리던 오빠의 멋진 뒷모습
이제는 마음 놓고 바라볼 수도 있을 텐데
토요일 오후마다 오빠와 함께
너른 봄티 뜰을 가로지른 냇가 긴 뚝방을
기분 좋게 달려볼 수도 있을 텐데
일요일에는 맛난 김밥을 싸 둘러메고
등산하며 비탈길을 오르다가
오빠의 손을 살짝 잡아볼 수도 있을 텐데
오빠가 멀리 함께 떠나자고 유혹하면
보따리 몰래 싸들고
따라나설 수도 있을 텐데
아, 아까운 나의 청춘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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