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배반
Antinomy
二律背反
‘시간은
무한한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이
어려운 문제의 답은 세 개다.
그것은
‘시간은
무한하다’,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즉
유한하다’,
‘모른다’이다.
답은
무엇일까?
‘모른다’이다.
언뜻
보면 당연한 것 같은 이 답에는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인간은
시간의 유무한을 알 수 없다’라고
논증한 것은 칸트다.
칸트는
이율배반으로 시간의 유무한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논증했다.
이율배반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반대되는(antí)
법(nómos)’이다.
어원에서
보듯이,
이율배반은
두 개의
법이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어떤 법이 옳은지 판정할 수 없다는 법학 용어였는데,
칸트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간단히
말하면,
이율배반은
두 개의 주장이 서로 모순되는 명제다.
이율배반과
유사한 역설은 두 명제가 반대되는 것이다.
이율배반은
역설의 일종이면서 하나가 참이면 하나는 거짓인 모순(contradiction,
矛盾)에
근거한다.
이율배반은
동일한 대상에 관한 명제가 모두 타당성과 필연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것이 참인지 알 수 없는 대립된 명제다.
일찍이
제논(Zenon)은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는
역설(paradox)을
주장했다.
이런
역설을 아포리아(aporia)라고
한다.
아포리아는
‘내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처럼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닌 역설(逆說)이다.
칸트는
아포리아와 모순을 연결했다.
그리고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인가?’를
밝히고자 했다.
칸트의
결론은 이성이 경험 세계를 넘어서면 (비판을
거치더라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그 과정에서 이율배반을 이용했다.
예를
들면,
‘신이
있다’와
‘신이
없다’를
동시에 증명할 수 있다.
‘신이
있다’와
‘신이
없다’는
모순관계이므로 하나가 참이면 하나는 거짓이다.
이처럼
서로 모순되는 두 명제를 동시에 참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성은 모순되는 두 명제인 ‘신이
있다’와
‘신이
없다’가 모두
타당하고 동등한 참이라고 논증한다.
그
과정은 이렇다.
①‘신은
있다’에
대해서는 ‘처음
시작 또는 제일 원인이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생겨서 인과계열이 성립한다.
최초로
시작한 존재가 있다.
그
초월적 자유 존재가 신이다.
그러므로
신이 있다’로
논증한다.
한편
②‘신은
없다’는
‘모든
존재는 인과법칙에 따른다.
무한한
인과가 계속된다.
최초로
시작하는 존재는 없다.
그러므로
신은 없다’로
논증한다.
이처럼
상반되는 두 명제가 모두 참이라면 어딘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칸트는
그 오류의 원인을 이성의 독단으로 지목했다.
이성은
경험 세계에 있는 제약자만 추론할 수 있는데 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무제약자까지 추론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를 낳는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제약자와 달리 초월적 무제약자는 영혼,
신,
세계,
시간,
공간
등이다.
칸트는
네 개의 이율배반을 제시했다.
제1
이율배반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다.
정립(thesis)은
‘시간의
시작이 있고 공간은 유한하다’이고
반정립(anti-thesis)은
‘시간은
시작이 없고 공간은 무한하다’이다.
제2
이율배반은
부분과 전체의 문제다.
정립은
‘전체는
부분으로 구성된다’이고
반정립은 ‘전체는
부분으로 구성되지 않는다’이다.
제1,
제2의
이율배반을 수학적 이율배반이라고 한다.
수학적
이율배반은 수와 양에 관한 것이며,
정립과
반정립 모두 거짓이다.
제3
이율배반은
자연인과와 자유의지의 문제다.
정립은
‘자유에
의한 인과가 있다’이고
반정립은 ‘자유에
의한 인과가 없다’이다.
‘자유에
의한 인과가 있다’는
참이다.
왜냐하면
인과의 자유가 있어야 최초 인과의 계열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에
의한 인과가 없다’도
참이다.
왜냐하면
인과의 자유가 없어야 세계가 통일적이고 필연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역시
이율배반이다.
이
문제는 자유의지와 도덕적 실천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
제4
이율배반은
보편적 존재의 유무다.
정립은
‘보편적
존재가 있다’이고
반정립은 ‘보편적
존재가 없다’이다.
제3,
제4의
이율배반은 역학적 이율배반이라고 한다.
역학적
이율배반의 두 명제 모두 참이다.
네 가지
이율배반에서 보듯이 이성은 초월적인 무제약자 즉 형이상학적 영역을 추론할 때,
오류를
범한다.
이율배반의
오류는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에서
모두 나타난다.
그러니까
칸트는 이성의 한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이성이 할 수 있는 일과 이성의 의미를 분명히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경험을 초월한 선험종합(a
priori synthetic)보다
경험에 근거한 추론이 타당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러니까
이율배반은 이성의 독단과 이성의 한계를 논증하면서 경험의 의미와 필요성을 강조한 논증이다.
칸트의
이율배반은 모순관계가 아닌 반대관계로 추론한 문제가 있고,
범주와
층위를 나누면 이율배반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개신학사 김승환)
*참고문헌
Immanuel
Kant, Critique
of Pure Reason,
translated by and edited by Paul Guyer and Allan W. Woo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참조
<경험>,
<경험론/경험주의>,
<공간>,
<귀납⦁연역⦁귀추>,
<논증⦁추론>,
<동일률⦁모순율⦁배중률>,
<물자체>,
<순수이성>,
<시간>,
<실천이성>,
<아
프리오리/선험⦁후험>,
<역설>,
<이성>,
<이성론/합리주의>,
<인과율⦁인과법칙>,
<인식론>,
<자유의지>,
<판단력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