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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숙종1 - 경신환국(庚申換局)(1)
(96) 숙종2 - 경신환국(庚申換局)(2)
(97) 숙종3 - 서인의 복귀와 노론, 소론 분열
(98) 숙종4 - 숙종의 여인 장희빈
(99) 숙종5 - 장희빈(2)
(100) 숙종6 - 장희빈(3)
(101) 숙종7 - 장희빈(4)
(102) 숙종8 - 장희빈(5)
(103) 숙종9 - 장희빈(6)
<조선왕조실록(95)> 숙종 1
- 경신환국(庚申換局)(1)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숙종대 초반의 정국에서 정국을 이끌어간 인물은 공작정치의 달인 김석주입니다.
서인의 대표적 명문가 출신에 현종, 숙종의 가까운 외척 이기도 한 김석주는 송시열을 스승으로 모신 서인 출신이었으나, 송시열이 김석주의 조부인 김육(대동법 추진)과 반목하는 바람에 송시열과 관계가 좋지 않아졌습니다.
김석주는 한직에 머무르다 현종 말년의 2차 예송 논쟁에서 서인임에도 자신의 스승인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결국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 정권이 권력을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14세의 소년 임금 숙종은 즉위 후 곧 과거 예송 논쟁에서 송시열이 했던 주장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송시열 등 서인들을 줄줄이 내쳤고, 이로써 인조반정 이후 50여 년 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남인들이 허적 등을 중심으로 하여 세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소년군주 숙종의 지원에다 김석주의 은밀한 공작을 발판 삼아 집권을 하게 된 남인세력은 오래지 않아 송시열 등 서인에 대한 강한 처벌을 요구하는 측과 비교적 온건한 측으로 갈리게 되었는데, 전자의 사람들을 청남(淸南)이라 불렀고, 후자측 사람들을 탁남(濁南)이라 불렀습니다.(남인의 분열)
권력을 잡은 남인은 너무 오래간만의 집권이어서 그랬는지 힘이 강해지고 도가 지나치면 임금의 의심과 버림이 있다 는 것을 간과하고 안일에 젖기 시작했습니다.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무사안일이 불러온 대가는 혹독 했습니다.
한편 소년 숙종은 성장해가면서 권력에 눈이 트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서인을 악으로 간주하고 남인에게 힘을 주었으나 남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면 결국 임금도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숙종이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에는 김석주의 처세와 공작의 힘이 컸습니다. 원래 서인 출신인 김석주는 남인 정권 탄생 에 기여했지만 허적이 이끄는 남인 정국을 그대로 두고 볼 생각은 당초부터 전혀 없었습니다.
김석주는 뛰어난 처신으로 자신은 근왕파라는 것을 숙종 에게 강하게 인식시키는 한편 허적 등 남인에 대한 숙종의 경계심을 한껏 자극시켰습니다.
<조선왕조실록(96)> 숙종 2
- 경신환국(庚申換局)(2)
1680년(숙종 6년) 2월, 남인의 리더 영의정 허적은 조부의 시호를 받은 것을 축하해 대신들을 불러 축하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날은 비가 많이 내렸는데, 숙종은 허적을 위해 왕의 잔치 때 쓰는 유악(油幄-궁중에서 사용하는 기름 먹인 장막)과 차일을 영상에게 갖다 주라는 지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허적은 이미 유악과 차일을 갖다 쓰고 있는 중 이었습니다.
이를 안 숙종은 "과인의 허락도 없이 임금의 물건을 가져갔단 말이냐. 한명회도 못한 짓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라며 대노했습니다.
숙종은 그날로 남인이 맡고 있던 훈련대장, 총융사 등의 병권에 관한 요직을 서인측 인사로 물갈이 해버렸고, 승지와 대간마저 대거 서인으로 교체했습니다.
이어서 남인인 좌의정, 우의정, 대사헌이 사직 소를 올리자 즉시 이를 수리해버렸습니다.
또 새로 제수된 서인 대간들이 남인의 비위를 들먹이며 파직과 유배할 것을 아뢰자 숙종은 이를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전격적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된 사건 을 "경신환국"이라 합니다.
그러나 경신환국의 원인으로 늘 제시되는 이러한 유악사건은 갑작스런 환국을 만들어내기 위한 소설이라고 보여집니다.
허적의 잔치는 숙종이 이미 아낌없는 지원을 한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고, 특히 임금의 유악을 말도 없이 가져다 쓰는 일은 매우 신중한 허적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 입니다
그렇다면 경신환국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김석주가 오래도록 준비한 드라마였고, 김석주의 노련한 공작에 세뇌된 숙종의 전격적 뒤집기 한판이었습니다.
김석주는 곧이어 정원로 등에게 허견(남인 실세)이 종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아들들 로, ‘삼복’이라 불이었음)과 함께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하게 하였습니다.
일찍이 정원로의 집에서 허견과 삼복이 모인 일이 있었는데, 이 때 복평군이 허견에게 “왕은 곧 돌아가실 것이오. 그대의 아비는 나를 왕으로 세우려 했는데 나는 곧 병조판서가 될 것이오. 그대와 피를 나누어 마셔 맹세하고 함께 의논하여 서인을 몰아냅시다”라고 말한 것을 김석주 가 정원로로 하여금 고변하게 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남인의 실세 허적과 허견 그리고 삼복(三福) 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김석주가 주도한 정치 공작은 결과적으로 남인 축출, 서인 득세의 권력 교체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김석주 가 확실한 증거 없이 역모 사건을 조작한 것으로 이해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97)> 숙종 3
- 서인의 복귀와 노론, 소론 분열
전회에서 본 경신환국의 연출자는 김석주이지만, 결국 남인이 떠난 자리를 채운 건 서인이었습니다.
서인은 곧바로 잃어버린 6년의 복구에 나서, 먼저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복권시켰습니다. 임금도, 대비도 높이 받들고, 영상 이하 대신들도 모두 다 제자들이니, 송시열은 예전의 그 권위를 모두 되찾았다 할 만 했습니다.
송시열의 유배생활은 사형수의 하루하루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남인들은 틈만 나면 자신의 목숨을 원했고, 결단이 빠른 왕이 언제 ‘아뢴 대로 하시오’라고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남인 정권을 몰아낸 김석주는 구원자나 다름이 없었고, 이런 이유로 송시열은 여러 방면에서 김석주와 뜻을 같이 했습니다.
최강 권력자의 꿈을 이룬 김석주는 남인의 복귀 가능성을 우려해 남인을 사실상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우고, 어영 대장 김익훈을 파트너로 삼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김익훈은 남인들을 역모로 엮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무리수를 둔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 때 외척의 발호와 공작정치에 크게 염증을 느낀 서인측 신진사류들은 증거도 없이 사건을 만든 김익훈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펼쳤습니다.
이러한 순간에 서인들의 주목을 받으며 등장한 송시열은 김익훈을 싸고돌며 그 처벌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송시열의 한 마디로 사태가 잠잠해 졌겠지만, 송시열이 김석주로 인해 변했다고 생각한 신진 사류들이 이번에는 반발했고, 이때 사림에서 송시열 다음으로 존경을 받던 박세채가 소를 올려 신진사류들을 옹호 했습니다.
이에 신진사류들이 박세채를 떠받들었고, 박세채는 일약 신진사류들의 영수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소론이라 불렀고, 송시열을 따르는 이들을 노론이라 불렀습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가 된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선조 때 동인, 서인으로 파당이 형성되었다가, 동인이 남인 과 북인으로 분파하고, 남인이 청남과 탁남으로 분파 했으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한 것입니다.
한편 공작정치의 달인 김석주는 자신과 송시열에 반대한 박세채를 겨냥해 세찬 공격을 하던 중 51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빠른 죽음이 그에게 다행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방자함이 그를 어떤 불행에 빠트렸을지 넉넉하게 예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98)> 숙종 4
- 숙종의 여인 장희빈
숙종 6년에 왕비 인경황후가 세상을 뜨고, 그 이듬해에 새로 왕비를 들이니 이 사람이 노론 핵심인사인 민유중의 딸 인현황후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인현황후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있었으니, 이 사람이 뒤에 장희빈으로 불리게 된 여인 장씨입니다.
장희빈(아직 희빈이 아니나 편의상 장희빈이라 함)은 1659년 장경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 오빠이자 맏아들은 장희재입니다.
장희빈의 가계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숙부가 역관 장현 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역관은 중인이었지만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그것을 매개로 권력도 어느정도 누릴 수 있었는데, 장현은 남인들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장희빈의 어릴 적 환경은 비빈의 자리에 오른 것에 비하면 매우 한미(寒微-가난하고 지체가 변변하지 못함)하다 할만 했는데, 이러한 배경의 여인이 입궁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안온한 환경이 여유와 평화를 준다면, 험난한 조건은 그것 을 이겨낼 의지와 강단을 부여할 수 있는데, 장차 나타나는 장희빈의 행동과 품성은 이런 환경과 무관치 않다 하겠습니다.
“숙종실록”에는, 장희빈의 어머니 윤씨는 우의정 조사석 처가의 종이었는데, 조사석과 사통(私通)한 사이였고, 조사석은 인조의 후궁 조귀인의 손자 동평군에게 정부(情婦)의 딸을 입궁시켜 달라고 부탁했으며, 그런 요청에 따라 장희빈이 나인으로 입궁했는데, 그녀는 미모가 특출나게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희빈은 인경황후가 죽은 그 해 21세의 나이에 처음 숙종의 성은을 입었고, 이때부터 이미 큰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장희빈의 꿈은 바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습니다. 당파적 색채가 강한 왕대비 명성왕후가 장희빈으로 인해 남인이 진출할 수도 있다고 보아 그녀를 내쫓았기 때문 이었다.
그 이듬해인 1681년 노론 핵심 가문 출신의 인현왕후가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나이는 장희빈이 8세 위였습니다.
장희빈을 내쫓은 왕대비 명성왕후가 죽자 장희빈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인현왕후가 명문가 출신의 현숙한 여인답게 숙종에게 “성상의 은혜를 입은 여인을 사가에 둘 수 없으니 불러들이소서”라는 청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숙종은 장희빈을 불렀습니다.(얼씨구나~) 이 때 장희빈의 나이 25세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99)> 숙종 5
- 장희빈(2)
인현왕후의 청으로 다시 궁궐로 돌아온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매우 컸습니다.
숙종은 장희빈을 숙원(종4품)을 거쳐 소의(정2품)로 승급 시켜 주었고, 장희빈은 이러한 숙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왕실의 큰 어른 자의대비의 환심을 사는 한편, 오빠 장희재와 그의 첩 숙정을 통해 밀려나 있는 남인과 연대를 구축 했습니다.
이에 집권 서인은 긴장했고, 부교리 이징명과 김만중이 나서 장희빈을 견제하는 소를 올렸지만, 숙종은 오히려 이들을 유배형에 처했습니다. 그만큼 장희빈이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장희빈의 권세가 높아지자 현숙한 여인 인현 왕후로서도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은근히 장희빈을 경계하는 말을 하기도 했고, 숙종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게 구는 그녀를 불러다 종아리를 치기도 하였습니다.
장희빈은 이를 악물고 종아리를 맞으며 반드시 중전의 자리를 차지하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688년 장희빈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왕자 윤(뒤의 경종)을 낳았습니다. 그녀의 나이 29세에 찾아온 거대한 행운이었습니다.
나이 스물여덟에 처음으로 아들을 얻은 숙종의 기쁨은 참으로 컸고, 특히 그 아들이 총애해 마지않는 장희빈이 낳은 것이니 그 기쁨은 말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숙종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 했습니다. 장희빈의 모친이 옥교를 타고 대궐에 들어오자 사헌부 지평 이익수가, 당하관의 아내가 뚜껑이 있는 옥교 를 타고 왔다는 이유로 그 종들을 잡아다 다스리게 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 일을 알게 된 숙종은 전교에 따라 입궐한 왕자의 외조모에게 모욕을 주었다며 크게 분개해 사헌부 법리들을 잡아다 다스리게 했는데, 이들을 얼마나 세게 때렸던지 둘 모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숙종 15년 1월, 대신들을 모두 불러들인 숙종은 마뜩치 않아 하는 대신들의 뜻을 누르고 아직 뒤집기도 하지 못하는 장희빈 소생의 아들에게 원자의 명호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장희빈을 희빈(정1품)으로 책봉 하였습니다.
숙종과 인현왕후는 아직 젊었고(28세와 21세), 따라서 정비인 인현왕후가 대군을 낳을 가능성은 충분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국본(國本)을 확정한 것은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총애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상당한 부작용이 우려되는 무리수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무리한 결정은 거대한 정치적 사건으로 번졌습니다. 아니 어쩌면 뒤집기의 달인 숙종이 또다른 뒤집기를 위해 거대한 정치적 사건을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100)> 숙종 6
- 장희빈(3)
원자 책봉이 강행되자 팔순의 나이에도 파이터 기질이 여전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원자 책봉은 아직 이르다며 정면으로 반대하는 소를 올렸습니다.
그동안의 방식대로 이번에도 숙종의 대응은 성급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신속하고 단호했습니다.
숙종은 이미 명호가 정해졌는데도 이를 재론하는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일 것이라며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문외 출송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어서 송시열의 토벌을 청하지 않았다 하여 도승지 이하 네 승지와 대간들을 파직한 후 삼정승에 권대운, 목래선, 김덕원을 임명한 것을 시작으로 조정을 남인으로 완전히 물갈이를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로 임명된 대간들의 청을 받아 송시열을 제주에 안치한 후 대부분의 서인을 파직하고 유배보냈습니다.
이와 같이 기사년에 느닷없이 정치적 국면이 확 바뀌니 이것이 기사환국입니다.
경신환국때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이 뒤집혀버렸습니다.
서인 집권 시절에 있었던 사건들을 재조사하여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고, 전에 김석주와 공작정치를 일삼던 김익훈이 일흔의 나이에 형신을ㅈ 받다가 죽었으며, 김환, 이희 등이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이처럼 기사환국은 지난 번 경신환국과 닮아 있었지만, 경신환국이 숙종 묵인 아래 김석주가 각본과 연출을 한것 이라면, 기사환국은 숙종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각본과 연출을 직접 담당하였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하겠습니다.
돌아온 남인의 핵심 표적은 서인의 우두머리 송시열과 김수항이었습니다.
- 저들의 죄는 찰대로 차서 김안로나 정인홍을 넘어서옵니다.
먼저 송시열이 가장 아끼던 김수항이 특별한 죄명도 없이 사사되었습니다.
숙청의 분위기가 고조되던 즈음 숙종은 느닷없이 이런 말 을 꺼냈습니다.
-중전이 "꿈에 선왕께서 말하기를, 장희빈은 본디 복이 없어 아들도 없고, 궁 안에 두게 되면 남인과 결합해 나라에 해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원자가 탄생하지 않았느냐. 중전의 투기가 선왕까지 들먹일 정도로 극에 달했으니, 더 두고 볼 수가 없다.
아무리 장희빈 덕분에 환국되어 정권을 잡은 남인이지만, 결정적 하자도 없는 한 나라의 국모를 폐하자고 하는 일에 선뜻 동조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동조했다가 일이 잘못 되어 멸문지화를 입은 연산군 시대의 일이 떠올랐을 것 입니다)
<조선왕조실록(101)> 숙종 7
- 장희빈(4)
숙종이 폐비의 뜻을 거두려 하지 않자, 86명의 대신, 대간이 폐비 반대 상소를 올렸습니다.
대노한 숙종은 이들의 상소가 모반대역보다 더하다면서 국청을 설치하고 친국을 시작하였습니다.
숙종은 이들이 임금을 배반하고 부인을 위해 절의를 세우려 한다며 고문을 가하였고, 박태보 등이 모진 고문 에도 의연히 대처하자 이들에게 압슬(壓膝-무릎을 꿇리고 무릎 위에 돌을 올려놓는 전근대 중국과 한국의 고문법)을 가하는 등 이해 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주었습니다. 결국 박태보, 오두인이 대표로 고문을 받고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숙종의 이러한 행위는 미치지 않고서는 할수 없는 것 이겠지만, 사실은 모두 숙종의 의도된 과잉행위였습니다. (“이래도 반대할래?”)
더 이상 반대가 없자 드디어 숙종은 1689년(숙종 15년) 인현왕후를 폐서인하여 친정으로 쫒아내고 장희빈을 새 중전으로 책봉하였습니다. 한 나라의 국모가 특별한 잘못 도 없이(희빈을 투기했다는 죄목) 폐서인되는 전대미문의 일이 너무나도 쉽게 일어난 것입니다.
곧이어 장희빈의 친정은 3대가 의정에 추증되어 부는 영의정, 조부는 우의정, 증조부는 좌의정의 직함을 받았고, 이듬해 원자는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장희빈과 그 가문의 영광이 정점에 오른 것입니다.
얻을 것을 모두 얻은 숙종은 이제 남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리라 맘먹고, 송시열의 처분을 신하들에게 맡겼습니다.
더 이상 왈가불가할 일이 없었습니다. 남인들은 “송시열의 죄상이 흉역하나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국문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했고, 숙종은 “대신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사사하되 금부도사가 만나는 곳에서 즉시 죽게 하라”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제주에 안치되어 있던 송시열은 어명에 의해 바다를 건너 상경하던 중 정읍에 이르러 금부도사를 만나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조선 후기의 거목이 특별한 죄목 없이 스러져 간 것입니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이 사람은 사림이 ‘송시열의 조선’이라 할 정도로 조선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그는 우리나라 학자중 ‘자(子)’ 자를 붙인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일명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송시열은 죽어서도 서인, 특히 노론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사관의 인물평은 송시열과의 관계를 최우선의 잣대로 삼았습니다.(“김 아무개는 평생을 송시열의 뜻에 따른 사람으로서~~~”)
숙종으로 하여금 위와 같은 거목 송시열마저 한방에 보내 버리게 할 정도로 숙종의 마음을 완전히 장악한 장희빈의 비기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전하는 문헌은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102)> 숙종 8
- 장희빈(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했으나 집권세력다운 면모를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두 번의 환국을 통해 언제든지 또 다른 환국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남인은 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른 중전의 오라비 장희재와 유대를 돈독히 하고 임금의 뜻에 순종하는 등 복지부동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사환국이 있은지 4년이 흐른 숙종 19년, 남인을 긴장시키는 일이 있었으니, 숙종이 새로이 궁인 최씨를 숙원으로 삼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실록에는 별 기록이 없으나, 야사에는 언제나 폐비에게 의리를 다하는 모습이 숙종의 눈에 띄었다는 것입니다.
숙종은 이즈음부터 숙원 최씨를 총애하기 시작했고, 중전인 장희빈의 경계심이 커졌으며, 남인의 긴장감도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언제 환국이 있을지 모른다!)
한편, 기사환국으로 물러난 서인 진영에서는 일군의 무리가 비밀 자금을 모우고 궐내와 연결해 궁중의 소식을 수집하는 등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이 남인측에 포착되었고, 남인 최고 실세 우의정 민암은 그들 중 “함이완”이란 자를 협박해 역모를 고변하게 하였습니다.
함이완의 고변에 따라 관련된 서인들을 잡아다 고문을 하던 중, 이번엔 유학, 김인 등이 “장희재가 김해성을 매수해 최숙원을 독살하려 했다”라는 고변을 하였습니다.
내용상 정반대되는 고변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니, 조정 안팎은 초긴장 상태가 된 채로 숙종이 있는 대전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또 다시 뒤집기를 할 것인가!)
이러한 때에, 고심하던 숙종이 드디어 비망기를 내렸습니다.
- 우의정 민암(남인)이 함이완과 혼자 만나 수작한 것은 의심스럽기 그지없다. 증좌도 없이 임금을 우롱하고 진신을 함부로 죽이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럽다.
- 국청에 참여한 대신은 모두 삭탈관직하여 문외출송하고, 민암과 금부 당상은 절도에 안치하라.
숙종은 집권 남인 세력의 고변을 무고로 단정하고 영의정 권대운 이하 남인들을 모조리 쫒아내고 즉시 영의정, 훈련대장, 병조판서 그리고 승지와 삼사 관원들을 서인들로 채워버렸습니다.
그야말로 삽시간에 일어난 환국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숙종이 1694년(숙종 20년) 남인에서 서인으로 순식간의 물갈이를 해 버린 일련의 사건을 갑술환국이라 합니다.
<조선왕조실록(103)> 숙종 9
장희빈(6) ▶마지막회
기사환국으로 남인으로의 권력 교체와 장희빈으로의 중전 교체가 이루어졌듯이, 갑술환국으로 서인으로의 권력 교체와 인현왕후로의 중전 교체가 이루어지는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숙종은 전 회에서 본 것과 같이 단칼에 권력 교체를 해버린 후 곧 “예로부터 임금은 참작하고 선처하여 용서하는 도리를 잊지 않았다. 이제 은혜가 아주 없을 수 없으니 폐비를 별궁으로 옮겨 수직하고 늠료(봉급)도 주도록 하라”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숙종은 인현왕후가 별궁으로 옮기는 날 직접 편지를 썼습니다.
- 때로 꿈에 만나면 그대가 내 옷을 잡고 비 오듯 눈물을 흘리니... 이제 별궁으로 옮기면 어찌 다시 만날 일이 없겠는가
이에 인현왕후는 다음과 같이 답장하며 숙종이 보내 온 의대를 사양하셨습니다.
- 천만 뜻밖의 옥찰이 내려오니 감격에 눈물만 흘릴 뿐 무슨 말씀을 하리이까
의대를 받네 안 받네를 두고 몇 번의 연애편지를 더 주고받은 후 인현왕후는 궁궐로 다시 들어왔고, 숙종은 자신의 경솔을 용서하라며 버선발로 맞이했습니다.
그리고는 중전 장희빈을 희빈으로 강등시켜 별궁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장희빈이 왕비가 된 지 5년 만의 일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35세였습니다. 이어서 인현왕후를 중궁전의 주인으로 삼은 것은 물론입니다.
한편 숙원 최씨는 이 일로 숙종과 인현왕후의 사랑을 동시에 받게 되었고, 숙빈의 직첩을 받은 뒤 급기야 왕자를 생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이 왕자가 훗날 영조가 됩니다)
졸지에 중전에서 밀려난 장희빈의 충격과 낙담은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과연 장희빈은 장희빈...
장희빈은 제주에 유배된 오빠 장희재, 그리고 그의 첩이었던 숙정과 일부 남인을 동원해 중궁전을 탈환하고자 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한 번 더 바뀌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장희빈의 뜻대로 일은 이루어치지 않았고, 그로부터 7년 후 오히려 비극의 종말이 다가왔습니다.
1701년(숙종 27) 8월 14일 인현왕후가 승하하였는데, 그 직후 장희빈이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왕비가 죽기를 기도했던 일 등이 모두 발각된 것입니다.
안 그래도 죽은 인현왕후에게 부채의식이 있던 숙종은 “내 그럴 줄 알았다”며 대노해, 장희재를 참형에 처하고, 장희빈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 남구만 등 소론을 몰락시켰으며, 드디어 장희빈에게는 자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대신들은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를 생각해 사사만은 면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숙종은 요지부동이었고, 결국 장희빈은 내전을 질투해 모해했다는 죄목으로 42년의 생애를 마감하고 사사되고 말았습니다.(묘소는 서오능)
장희빈의 인생 역정은 궁중 여인으로는 우리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했다 할 수 있습니다.
장희빈으로 인한 개벽할 역사적 결과는 지금까지 본 것처럼 비교적 명쾌하게 드러나 있지만,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연유와 경위로 하늘과 땅을 거푸 밟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장희빈의 인생은 영원히 드라마의 극적인 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