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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문명의 성립
그리스 후기(Hellenistic period)는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기원전 323년부터 그리스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시기인 기원전 146년 사이의 기간을 이른다. 이후 로마 제국의 지배는 헬레니즘 사회와 문화를 단절한 것은 아니며 기독교가 로마 전역으로 확산되기 전까지 그 본질을 유지해왔으나, 그리스의 정치적 독립은 이때 종식된다.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한 지역은 알렉산더 사망 직후 휘하 장군들이 정치적, 군사적 갈등을 일으켜 여러 왕국으로 분열됐다.(디아도코이 시대)
제국은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 왕조를 멸망시킨 '안티고노스 왕조',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왕조', 시리아-이란의 '셀레우코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분열되었다. 그 뒤로는 더욱 잘게 분열하거나 왕조가 교체되었으며, 크게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의 대립 구도가 정착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어권 세계에서 그리스 본토(대체로 현대 그리스의 영토)의 중요성은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도시는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케이아로, 각각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의 도읍이었다. 페르가몬, 에페소스, 로도스, 셀레우키아같은 도시들도 중요했으며, 이 시기에 동부 지중해에서 도시화가 진전되었다.
'헬레니즘(Hellenism)'이란 용어는 그리스어로 원래 그리스인 자신을 지칭하던 Ἕλλην (Héllēn)에서 나온 말이다.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이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한 非그리스 지역의 그리스 문화와 식민화의 확산을 일컫는 말로 이 용어를 만들었다. 그는 1833년 자신의 저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역사》에서 고전 그리스 문화를 동경하던 알렉산드로스가 정복 사업과 더불어 광범위한 지역에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여, 그리스적 정신과 동방 정신이 융합한 범세계적 문화를 일컬어 그리스적 문화, 즉 '헬레니즘 문화'라 명명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은 서남 아시아(근동 혹은 중동)에서 고대 이집트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그리스 문화와 언어가 그리스인 지배자들과 함께 새 제국 전역에 널리 퍼졌으며, 반대로 헬레니즘 왕국들은 각지 토착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어 필요나 편의에 따라 지역 관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헬레니즘 문명은 고대 그리스 세계와 중동, 서남 아시아의 문화가 융합된 산물이었다.
헬레니즘 시대 문화의 성격을 총괄하면, 실질적으로 기술적ㆍ자연과학적인 것에 편중되어 융성하였고, 철학ㆍ문학 기타 정신적ㆍ내면적 요소에 관한 문화적 영위는 오히려 쇠락했다고 본다. 자치국가였던 폴리스가 광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의 도시로 포함되면서 시민들의 공적 생활이 크게 변화했다. 즉, '특수성'의 상실로 인해서 '보편성'이 시대의 표지가 되었고, 폴리스 공동체 의식에 대신해서 보편 인류 의식(코스모폴리터니즘)과 개인주의가 시대정신이 된다. 철학은 폴리스적 대응을 잃고, 보편주의적인 스토아 및 에피쿠로스 철학이 되었다. 이제 개인의 영혼 구제가 철학의 핵심 주제가 된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미술, 그 중에서도 특히 조각이다. 이 시대의 조각은 고전 시대 작품과 마찬가지로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었으나, 이전의 작품들과 달리 이상(理想)보다는 개인의 감정을 충실히 그리려 노력했다. 그 결과 이 시대 작품들은 그 이전 조각들이 갖지 못했던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 유연한 자세, 감미로운 표정 등을 선 보이고 있고, 소재 역시 이방인, 술 취한 사람, 운동 선수, 노인, 그리고 육감적인 포즈의 나체상 등으로 다양성을 보였다.
그렇다고 헬레니즘 양식이 과거와 단절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고전기 미술이 이룩한 비례와 균형, 세부 묘사력, 생동감 넘치는 동작, 정신과 감정의 표출을 계승하되 이를 대폭 강화하고 심화시킨다. 예를 들어 <밀로의 비너스>는 고전기 미술의 중요 가치였던 비례의 정점에 해당한다. <밀로의 비너스>는 인체의 수학적 비례를 통해 여성미를 구현한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인간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찾아내려 한 그리스인의 예술적 표현이 도달한 경지를 잘 보여 준다.
후기 그리스(헬레니즘 시대) 건축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서면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건축에서도 주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고전기에 여러 가지 문화적인 면에서 영광의 절정에 있던 그리스 본토는 이제 헬레니즘 군주들이 선전용으로 제공해준 공공건물이나 신전 등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신전을 건축해서 헌정하는 행위는 여전히 기증자에게 커다란 명망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이제 코린토스 양식이 특히 동부 지중해에서 일반화되어, 이 지역에서 코린토스 양식의 신전들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들과 로도스 섬은 이 시대에도 계속 번영했지만, 지중해 동부의 세계는 마케도니아의 펠라(Pella), 시리아의 안티오케이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수도를 두고 있는 헬레니즘 왕국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리스 문화가 동쪽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에, 그리스 건축도 다시 한번,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헬레니즘 건축의 근본적인 특징은 그리스적이었다.
이 시기 건축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실용화, 표준화, 대형화, 장식화 등으로 볼 수 있다.
실용화와 표준화는 국가 체제가 거대한 제국 체제로 전환하면서 정치에서는 중앙집중화가 일어났으며, 해상무역이 급증하고 물류 이동이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늘어남으로써 효율이 최우선의 요소가 되었고 건설 행위 전반에서 실용화의 요구가 급증하였다. 또한 이를 충족 시키기기 위한 기본적인 표준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히포다모스가 설계한 밀레투스(Miletus)의 도시 계획에서는 바둑판 같은 격자가로가 처음 등장하였는데, 처음부터 휴먼 스케일을 초월한 웅장한 일직선 구성으로 시작되었다. 일직선 길은 수십 킬로미터를 뻗어나갔으며 중심부에는 대형 공공건물들을 인위적으로 첨가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정복지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도시들을 세웠다. 그 중 제일 크고 유명한 것은 이집트에 있는 것으로 수십만 권의 장서를 갖춘 도서관을 비롯해서 바둑판식 가로와 수많은 공공건물과 공원 등을 갖추었으며 135m 높이의 등대를 세웠고 성벽에까지 장식을 하였다.
제국의 규모에 걸맞게 건물들도 커졌으며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나 디디마의 '아폴론 신전'과 같은 대형 신전의 건설을 불러왔다.
후기 아르테미스 신전은 대형화의 시작을 알린 건물이다. 홍수, 방화 등으로 세번씩이나 새로 지어진 이 신전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세번째로 다시 세우지기로 하였으나, 착공은 알렉산드로스 사후(死後)인 기원전 323년에 시작되었다. 세 번째 신전은 규모가 더 커졌다. 길이 137m, 너비 69m, 높이 18m에 127개의 기둥을 가지고 있었다. 건물 전체를 대리석으로 지은 당대 최대 신전이었다. 이 신전이 바로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기원후 401년에 최종적으로 파괴되었고, 현재는 신전의 토대와 조각 파편만이 남아있다.
디디마의 아폴론 신전은 기원전 8세기에 처음 건축되었다가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됐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에 오자 그에 의해 재건축이 시작됐다. 이 신전에서는 실내 구성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었다. 바깥 본체 안에 작은 실내 신전을 한 채 더 지었다. 이를테면 '신전 속 신전' 개념으로 실내 집회를 위한 장치였다. 규모는 후기 아르테미스 신전과 비슷한 크기로 길이 109.3m, 너비 51.1m였고 지름이 2m, 높이가 19.7m의 기둥이 120개가 있었다.
두 신전 모두 대형화에 맞는 장식화 경향도 함께 보여준다. 제국의 권위에 맞는 웅장미를 후기 그리스의 직설법으로 표현하여 자연주의와 자극성 강한 조각 등을 동원했다.
아폴로 신전의 이오니아식 오더에는 아키트레이브에 사자상과 고르곤 상을 새겨서 맹수와 신화 속 동물을 직접 구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각 주초마다 다른 종류의 장식으로 처리해서 화려함을 더했다. 실내에는 이례적으로 벽기둥의 주두에까지 신화 속 동물을 새겼다.
후기 아르테미스 신전은 주신의 밑동 부분에까지 상당히 높은 지점까지 장식을 새겼다.
장식경향은 건물에서 시각효과를 중시하는 경향을 낳았다. 대표적인 예가 '페르가몬의 제우스 제단(Great Altar of Zeus)'과 같은 ‘ㄷ’자형 신전의 등장이었다. 신전 평면이 사각형에서 탈피하는 이런 경향은 신전의 대형화와 함께 후기그리스건축을 이끈 중요한 변화였다.
헬레니즘 건축은 풍경과 조화를 이루는 것보다는 풍경을 지배하는 장대함을 과시하였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건축이 페르가몬 건축군이다.
페르가몬(Pergamon)은 기원전 281년~133년 동안에 아탈로스(Attalos) 왕조가 다스린 페르가몬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이들은 이곳을 그리스 세계의 주요 문화적 중심지 중 한 곳으로 탈바꿈 시켰다. 이곳에 남아 있는 많은 기념물들의 잔해는 여전히 볼 수 있는데, 경사가 매우 가파른 극장, 길게 이어지는 스토아(stoa), 3면이 테라스인 체육관(Gymnasium), 페르가몬 대제단(Great Altar of Pergamon), 분묘, 유압 수도관, 도시 성곽, 칼레 언덕과 완벽하게 나란히 놓인 키벨레 성역(Kybele Sanctuary) 등 뛰어난 기념물들이 이 유산 안에 포함되어 있다. 특히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페르가몬의 대제단'이 걸작으로 유명하다.
이 신전은 직사각형 몸통을 중심으로 삼아 양끝에서 측동이 돌출해서 ‘ㄷ’자형 평면을 이룬다. 기둥은 ‘ㄷ'자형 윤곽의 외관 전체를 돌아가며 에워싸고 있다. 건물 윤곽이 ’ㄷ‘자형이 됨에 따라 정면에서 봤을 때 일소점 투시도 효과에 의해 초점식의 집중이 일어난다. 그 효과를 높이기 위해 건물을 높은 계단 위에 올렸다.
이 축조물에는 헬레니즘 미술의 걸작품으로서 거인들과 신들의 전쟁을 묘사한 소벽(Frieze)들로 구성되어 있다. 페르가몬 대제단은 폭이 35.64m이고 높이가 33.4m이다. 앞 계단만 해도 너비가 거의 20m이다.
코린트식 오더
후기 그리스 건축에서는 코린트식 오더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코린트 양식은 이오니아 양식의 일종의 변형이라고 보아도 좋다. 이오니아식 오더에 장식적 목적을 위해 이오니아식의 소용돌이 문양 대신 아칸서스(acanthus) 잎을 본뜬 장식으로 주두를 교체하여 장식성을 더 높이는 형식이었다. 아테네의 조각가 칼리마코스(Callimachos)가 코린트 소녀의 무덤 위에 놓인 바구니에서 자란 아칸서스 잎사귀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것으로 전해진다. 코린트식 오더는 세 양식 중에서 변형이 제일 심했다. 주두의 장식으로 아칸서스 잎 모양이 표준적인 장식이었으나 다양한 식물 모양의 장식 부재가 쓰였으며 주두의 크기도 다양해졌다.
코린트식 오더는 '바세(Bassae)의 아폴로 에피큐리우스 신전'(기원전 429~)의 실내에 최초로 사용되었다. 이 기둥머리는 정규의 아칸투스 잎의 꾸밈이 아니다. 그러나 의심할 것 없이 코린트식 기둥머리이다. 코린트식 오더는 이후 기원전 4세기에 들어와서도 계속 실내에 국한되어 쓰였다. 이 경우 외관에는 도리스식 오더를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구성은 신전 외관에는 도리스식 오더를, 실내에는 이오니아식이나 코린트식을 사용하는 고전기의 종속 구도가 아직 남아 있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기원전 370년 경에 세워진 원형신전으로 유명한 '델포이의 아테나 성소'는 세 개의 동심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부에는 20개의 도리아식 기둥이 있고, 내부에는 10개의 코린트식 기둥을 세우고 있었다. 안쪽의 코린트식 오더는 벽에 부착된 벽기둥 형태로 처리되어서 아직 독립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코린트식 오더가 건물 외관에 쓰이기 시작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그 첫번째 예는 '리시크라테스 기념비'(Choragic Monument of Lysicrates)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이경우에도 아직 독립 원형 기둥이 아니라 외벽에 부착된 반원형 벽기둥으로 남은 점에서 아직 독립성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 기념비는 건물이라기보다는 조각 같은 조형물에 가깝다. 실내 공간 없이 1.8m 정도의 안쪽 지름을 가진 원통형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구조물 외벽을 따라 코린트식 벽기둥을 6개 덧붙였다. 리시크라테스 기념비는 현존하는 코린트식 기념비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고 또 가장 아름답다.
그리스 건축에 관한 한, 코린트 양식은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 양식은 그리스가 로마의 지배 아래에 속하기까지는 충분한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다. 기원전 4세기 말경, 마케도니아의 위세 아래에 이오니아에 있어서 코린트 양식이 비교적 자유로이 응용되었다고 해도, 이 양식만으로 된 중요한 신전의 건축은 드물다. 코린트 양식은 로마인에게 계승되어서 그들의 호사스런 취미에 맞추어 다시 화려하고 매우 정교한 것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아테네의 올림피에이온'(제우스 올림피오스 신전)이 로마의 건축가 코스티우스에 의하여 페이시스트라토스 시대의 옛 부지에 다시 건축될 때에 새로운 코린트 양식이 쓰였다. 공사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176∼165년경이다. 그러나 작업이 중단되어 완성을 보는 데에 이르지 못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재차 공사를 계속했으나, 완성된 것은 기원후 120∼130년경, 즉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의 일이다.
이 신전은 직사각형 몸체를 돌아가며 대형 코린트식 오더 104개가 에워싸는 구성이다. 기단의 크기는 가로 44.3m, 세로 110.5m이며 기둥의 지름이 1.9m, 높이 17m로 후기 그리스건축의 대형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