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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 29호, 장흥문화원, 2007.12. 186-201쪽
장흥땅 장흥사람들의 기록을 따라서 1
釣臺記, 壬癸歎, 獅子山同遊記
김희태(문화재전문위원)
“자네가 소개한 자료 가운데 청태라는 단어가 있는데 한자로 어떻게 쓰는 글자인가?”
“푸를 청(靑)자, 이끼태(苔)자를 썼던데, 왜 그러나.”
“청태전에 대한 기록을 찾고 있는데, 청태란 표기가 있어서 기대하고 연락한 걸세”
“그래, 나도 청태전의 기록을 찾아 봄세.”
더위가 시작할 무렵 2007년 6월 어느 날, 서울에서 법조인 생활을 하면서도 고향의 향토문화에 대한 글을 써 나가고 있는 친구의 전화였다. 차에 대한 자료와 기록을 찾다가 연락한 거란다. 발음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두 단어, 하나는 해산물로서 반찬으로 사용하는 청태(靑苔)이고, 다른 하나는 마시는 음료로서 청태전(靑台錢)이었다.
필자가 소개한 글은 장흥 제암산악회 기념문집에 실은 <장흥의 산을 찾은 선인들의 산행기>로 존재 위백규선생이 지은 <사자산동류기(獅子山同遊記)>를 다른 자료와 함께 일부만 소개하였다. <사자산동류기>는 존재선생이 일행들과 함께 사자산을 유람하고 나서 쓴 글이다. 그 내용 가운데 존재선생 일행이 준비해간 음식물로서 ‘청태’가 나온다. 그 소개 글에는 한글로만 표기했던 터라, 기대를 가질법도 했다.
이를 계기로 장흥땅 장흥 사람들의 기록을 찾아서 공부해 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첫 번째로 추강 남효온선생의 기문인 <조대기(釣臺記)>, 방호 김희조(放湖 金喜祖, 1680~1752)선생의 시 <임계탄(壬癸歎>과 <구폐시(九弊詩)>, 그리고 존재 위백규(1727-1798)선생의 <사자산동류기>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추강 남효온선생의 조대기(釣臺記)
조선시대 초기인 1491년(성종 22), 문인학자이자 생육신의 한 사람인 추강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은 장흥읍의 독실포 조대에 오른다. 예양강이 감고 도는 낮으막한 산자락이다. 그리고 장흥의 산수와 관련된 중요한 기록인 조대의 기문(釣臺記)을 남긴다. 조대의 이름을 지었다는 내용도 실려 있다.
<조대기>는 장흥의 지리를 개괄하면서 당시 교유한 인물들과의 일정을 적고 있다. 그 시기는 1491년(성종 22) 3월 초이다. 함께 한 사람은 경회 윤구(慶會 尹遘), 가진 이침(可珍 李琛), 자미 김세언(子美 金世彦), 인재 김양좌(隣哉 金良佐), 울지 이세회(蔚之 李世薈), 박의손(朴義孫), 최석이(崔石伊) 등이었다.
조대기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녹양 박경래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수령천은 가지산으로부터 나온다. 장흥부 북쪽으로 수리 거리에서 흘러 돌아서 동쪽으로 흐른다. 동정(東亭)을 지나 예양강이 된다. 강은 흘러 또 남으로 내려간다. 성에서 7-8리 거리 독실[獨谷]의 서쪽 기슭에 이르면 강물을 굽어다 볼만한 곳에 기묘한 바위[奇岩]가 있다. 그 바위 위에는 사람이 삼십여명 정도 앉아 놀 수 있으며 맑고 잔잔한 물결이 돌아 흐르고 괴상하게 생긴 바위들은 곁에 서있고 기이한 꽃과 이상한 풀도 그 곁에 섞여 있었다.
북쪽으로 바라보면 작두산(鐯頭山)이 있고 서쪽을 보면 수인산(修因山)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사인암(舍人岩)을 대하고 있고 바위 뒤로는 만덕산(萬德山)이 그 봉우리를 노출하고 있으니 참으로 절경(絶境)을 이루고 있다.
홍치 사년(弘治 四年, 성종 22년, 1491년) 홍치 사년(弘治 四年) : 조선 성종 22년[1491년], 홍치는 중국 명나라 효종[1488-1505]의 연호.
음력 삼월 초순경 나는 장흥 별관(別館)에서 우거하고 있으면서 날마다 향중(鄕中)의 선비[士人]들과 장난도 하고 즐겁게 놀았다.
당시에 윤선생 구(尹遘)라는 분이 있었는데 자(字)는 경회(慶會)이다. 사복 판관(司僕判官)을 그만두고부터 방랑하다가 이곳 장흥읍성(城)밖에 우거(寓居)하고 있다.
이선생 침(李琛)은 자(字)가 가진(可珍)이라 하였다. 함열현감(咸悅懸監)을 그만두고부터 모친상을 당하자 상기[服]를 마치고 난뒤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장흥에 성(城)의 북쪽에서 살았다.
추강 남효온선생의 조대기(<추강선생문집> 권4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제16책 84면)
하루는 윤씨와 이씨 두분 선생이 고기잡는 도구[釣漁具]를 준비해 가지고 나를 남쪽 강변으로 맞이하여 그 바위(奇岩)에 올라가니 위와 아래로 큰 바위가 셋이나 있었다. 풀을 베어서 구덩이로 집어넣고 이중으로 풀자리를 설치한 다음 황어(黃魚)와 잉어(鯉魚)를 낚아서 혹은 굽고 혹은 회를 만들어서 작은 술잔 돌리면서 청아한 이야기[淸談]를 나누었다.
이때 한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김세언(金世彦)의 자는 자미(子美)인데 본고을 부사[俯伯]의 맏 아들이었으며 다음 김양좌(金良佐)의 자는 인재(隣哉)인데 부사의 사위다. 다음은 이세회(李世薈)라고 하는데 자는 울지(蔚之)이며 윤경회(尹慶會)의 사위다.
그리고 시골 노인[野老] 두 분이었는데 하얀 눈썹이 기이하게 생긴데다가 의관(衣冠)은 시골 민간인 의관을 갖추었고 그 가운데 한분은 성명이 박의손(朴義孫)이라 했으며 또 한분은 최석이(崔石伊)라고 했다. 이 두 노인도 역시 윤씨와 이씨 두 선생을 따라온 사람들이었다. 술을 대여섯순배 돌리고 나니 해는 지고 달이 떠올랐으며 바람이 일자 물결이 치기 시작했으며 의손(義孫) 노인은 일어나 춤을 추었고 석이(石伊)노인은 창가(唱歌)를 불렀다.
모든 사람들이 다 기뻐하자 두 선생은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들 여기에서 놀기로 한지가 오래였지만 이 지역에 이러한 기암(奇岩)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 하며 어찌 서로 시골노인들과 합해서 대(臺)를 한번 쌓아 놀고 영구(永久)히 전할 수 있게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두 노인은 절을 하며 이르기를 오직 명령만 내려 주시기를 기다리겠다고 하므로 두 선생이 다 말하기를 오늘의 즐거움은 고기를 낚은 것이 제일 좋은 일이었으니 그 대(臺)이름을 조대(釣臺)라고 한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곧 나에게 기문을 지어달라고 청했다.
나는 생각하기를 천지의 가운데에서 타고난 것은 동일한 그 생명체일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萬物)이 생장하는 것도 타고난 생명들은 동일하게 그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전한 곳으로 쫓아가고 위태로운 곳을 피하며 생(生) 즐거워하고 사(死)를 싫어한 것은 사람이나 미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대체로 사람들은 고기를 보면 잡아먹고 고기가 사람 앞에 나타날 때마다 삶아 먹는다면 고기의 걱정거리고 나의 즐거움을 삼아야 되겠는가?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처음 나뉘어 지고 만물이 머물게 되었으며 이미 머물게 된 다음에 생기를 받게 되었고 생기를 받은 다음에는 반드시 쓸모가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쓸모가 있다는 것은 수용(需用)을 뜻하는 것이니 수(需)라는 것은 먹고 사는[飮食] 길[道]을 말한다. 기왕에 음식(飮食)의 도가 정해져 있다면 약한 것이 강한 것에게 먹히게 되는 것도 이치라고 했다.
그러므로 황제(黃帝)는 그물을 만들었고 우왕[大禹]은 생선을 먹는 법을 알려 주었으며 순(舜)임금도 뇌택(雷澤)에 가서 고기를 잡았으며 공자(孔子)도 비록 그물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낚시질 만큼은 멈추지 않았으며 맹자(孟子)도 왕도(王道)를 논하면서 또한 이르기를 고기와 자라를 이루 다 먹을 수 없이 생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송나라 때 와서 소옹[邵子]은 어부와 초부(漁樵)가 묻고 답하면서 해가 다하도록 시비(是非)를 논하다가 마침내는 섭을 꺾어 고기를 삶아서 먹고 역(易)을 논했다고 하였으니 고기를 낚는 즐거움도 믿음이 가는 말이라 하겠다. 하물며 고기[魚]는 우리에게 먹히고 우리는 조물(造物)주에게 먹히게 되는데 우리가 조물주에 먹히면서 즐거움을 주게 됨을 안다면 또한 고기도 우리에 먹히게 됨이 즐거움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조(釣)자를 써가지고 그 명칭을 하여 높이 걸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記)를 다 쓰고 나서 나는 또 그 두분 선생께 설명을 드리며 이르기를 옛적에 엄자릉(嚴子陵) 嚴子陵 : 후한(後漢)의 여조(餘兆)사람. 자(字)는 자릉(子陵). 어릴때 광무제(光武帝)와 같이 공부하였는데 광무제가 즉위하자 변성명하고 숨어사는 것을 광무제가 찾아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隱居)하였음. 후세에 사람들이 그의 낚시질 하던 곳을 일러 엄릉뢰(嚴陵瀨)라고 한다.
은 동강(桐江)의 칠리탄(七里灘)에 가서 낚시질을 했기에 그가 앉았던 곳을 이름하여 조대(釣臺)라 했다고 하였다.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보고 이르기를 이때와 그때의 명칭은 같지만 취지는 다르다고 여겨졌다. 대개 그 엄자릉(嚴子陵)의 큰 지조는 백세뒤에 널리 전해오면서 일월(日月)과 함께 빛나고 있다. 그러나 억지로 임금과 신하의 의를 끊고 즐거운 마음으로 풀과 나무[草木]가 함께 썩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은 아마도 공자께서 말씀하였듯이 등용되면 자기의 뜻을 시행하고 놔둬버리면 은둔해야 한다는 의미를 잃었다고 생각된다.
만일에 그 윤경회(尹慶會)와 같은 분은 나와함께 머리 싸매고 더불어 종유(從遊)하면서 그분의 학식이 관대하고 엄정하다는 것을 자세히 알았다. 그리고 마음이 즐겁고 편안하며 재능과 지혜가 원대(遠代)하며 국정에 참여하여 쓰일만한 인재로서 참으로 보배로운 존재이다. 행실은 효(孝)와 청렴[廉]을 겸비했고 재질은 문(文)과 무(武)를 겸하였으며 일찍이 선정(善政)으로써 함열(咸悅) 지역을 다스렸기에 그 명성과 공적도 나타나있다.
두 분 선생은 참으로 자잘하게 절의나 숭상하고 고고함을 양성하며 시가나 읊조리고 날을 보내는 무리들과 견줄 바가 아니며 이른바 토야[江湖]의 먼 곳에 처하면서도 그 임금과 국가를 걱정하는 분이었다. 뒷날에 천은(天恩)이 항간에 미치게 되었을 때 조정에서 부르는 문서[鶴書]를 가지고 이 조대로 달려 오면은 두 분 선생은 반드시 짚신을 벗어 던지고 낚시줄도 걷어 치우고 그 낚시질 하던 솜씨를 바꾸어서 임금을 보좌하여 선정을 베풀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으리니 어찌 변통성 없는 엄자릉에 비교하랴!
곧 바로 강태공[太公]의 조황(釣璜)과 함께 의당 서로 천년[千載]의 세월을 두고 선후를 논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예양강(汭陽江)의 조대(釣臺)도 후세 사람들이 위수(渭水, 강태공 낚시터)가에 있는 조대와 같이 명소라 지적할 것이니 필연코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이것으로써 기대하노니 그대들은 여기에 힘쓰기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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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강 남효온, 본관 의령(宜寧). 자 백공(伯恭). 호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로 김굉필(金宏弼)·정여창(數汝昌)·김시습(金時習)·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1478년(성종 9) 세조에 의해 물가에 이장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의 복위를 상소하였으나,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저지로 상달되지 못하자 실의에 빠져 유랑생활로 생애를 마쳤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는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것과 소릉 복위를 상소했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문집으로 <추강집(秋江集)>, 저서로 <추강냉화(秋江冷話)>,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귀신론(鬼神論)>, 사육신(死六臣)의 전기인 <육신전(六臣傳)>이 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조선왕조실록>의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남효온(南孝溫)이 젊어서부터 글을 읽어 큰 뜻이 있었다. 성종조(成宗朝)에 상서(上書)하여 일을 말하다가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옥에 갇혀 국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자 스스로 그 뜻을 세상에 행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방임하여 얽매이지 않아 시속과 더불어 오르내리지 않았고, 노(老)·장(莊)의 고허(高虛)한 논을 본받아서 혜강(嵇康)·완적(阮籍)의 방달(放達)한 행동을 하였으며, 문장(文章)을 함에 있어서도 역시 초매(超邁)하여 고체(固滯)한 누습이 없었다. 더욱이 시에 능하여 당(唐)나라 시인의 풍격이 있었는데, 불공평한 세상에 격분하여 유리하여 이단(異端)이 되어 죽음에 이르도록 깨닫지 못했으니, 진실로 우리 도의 죄인이라 하겠다.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 연산 31권, 연산군 4년(1498 무오 ) 8월 16일(기묘) 기사]
그러면 추강선생은 왜 장흥을 찾게 되었을까? 장흥에서 함께 한 사람들과는 어떠한 연고가 있을까? 그 장흥 사람들이 남긴 글이나 자료는 없을까? 그들의 생활터전은 어디였을까? ‘의손(義孫) 노인은 일어나 춤을 추었고 석이(石伊)노인은 창가(唱歌)를 불렀다’고 했는데, 그때 그 노래와 춤은 무어라 불렀을까? 혹 전해지지는 않았을까? 황어나 잉어는 지금도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남은 숙제로 생각하고 찾아보련다.
다만 한가지,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알려진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년 - 1493년)이 남행기 <유호남록(遊湖南錄)>을 남기는데, 서로 연관이 있는지 찾아 볼 만 하다.
방호 김희조선생의 <임계탄>과 <구폐시>
몇 년전 <장흥문화> 25호에 가사 <임계탄>이 소개된 바 있다. 조선시대 후기, 18세기 초엽[1732년, 1733년]의 재해 현상과 향촌사정을 가사로 형상화 한 내용이다. 이 가사는 이미 이형대의 논문(18세기 전반 농민현실과 임계탄, <민족문학사연구>22, 2003)과 임형택의 편저(<옛노래, 옛사람들의 내면풍경>, 소명출판, 2005)를 통해 학계에 소개된 바 있다. 그리고 <임계탄>의 작자와 관련하여 존재 위백규(1727-1798)의 부친인 영이재 위문덕(1704-1784)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흥문화> 26집에 누가 임계탄을 썼는가 제하의 박형상 변호사 글에서는 간암 위세옥(1689-1766)을 가사 <임계탄>의 작자로 추정하였다. 존재 위백규를 병계 윤병구에게 연결시켜준 스승이었다.
가사 <임계탄>과 달리 동일한 제목의 시 ‘임계탄(壬癸歎)’을 방호 김희조선생의 문집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가사 <임계탄>이 지어진 시기에 활동한 문신이다.
방호 김희조(放湖 金喜祖, 1680~1752)선생은 본관이 영광으로 자는 경선(慶先)이다. 김순(金洵, 1654~1709)의 아들이며 문장으로 널리 알려졌고 특히 시를 잘했다. 1713년(영조 39) 과거에 급제하였고 성균관에 있을 때, 무신란(戊申亂)이 일어나 모든 유생들이 다투어 도피하여 공관(空舘)의 지경에 이르자 뜻을 같이 하는 5명의 유생(鄭鳳徵, 曺弘業, 趙德禧, 柳용, 朴淳愚)과 직임을 나누어 성묘(聖廟)를 수호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들 여섯 선비는 충신이라 찬사를 받았다.
이 해(1728년) 영조가 구언교(求言敎)를 내리자 올바른 인재를 발탁하라는 요지의 봉사(封事, 만언소)를 올렸으며 문장은 물론 경륜과 절의로서도 추앙을 받았다. 만년에는 장흥 향리에 돌아와 산수를 벗하며 수 많은 시작을 남겼다. 그의 시는 자연 풍광이나 교류인물과 차운한 시도 많지만, 임계탄(壬癸歎)과 구폐시(九弊詩)는 당시 사회의 어려움과 폐단을 적시한 것이다.
<방호집>은 2권 2책의 활자본으로 1829년 후손인 김채규, 김종진 등이 주도하여 1832년경에 간행하였다. 방호집의 체재는 다른 문집들과 약간 다르다. 권수에 방호시집서 3편(1831년 鄭在勉, 1832년 金尙學, 1832년 金益洙)이 있고 별도로 「방호집서」(1829년 金德鉉)가 있다.
이어 목록이 유별로 간략히 있으며 권1에 오언절구(28편), 오언율시(23편), 칠언절구(71편), 칠언율시(136편), 육언절구(3편), 오언장편(1편), 고사(5편)가 있고, 권2에 소(1편), 서(8편), 제문(2편)
그리고 무신란때의 수관사적(守舘事蹟)이 첨부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다른 문집류에서 보이는 부록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권1에는 다양한 형식의 시 270여편이 실려 있다. 이들 시 가운데에는 장흥․강진․화순일대의 산천을 읊은 것이 많아서 주목되는데 이중「夫山八景」을 비롯하여 수인산(修仁山), 부춘정(富春亭), 일림사(日林寺), 화방사(華方寺), 죽림정(竹林亭), 만덕사(萬德寺), 금능사(金陵寺), 만덕루(萬德樓), 만경루(萬景樓), 사인암(舍人岩), 도림사(道林寺), 도갑사(道甲寺), 보림사(宝林寺), 천관산(天冠山), 송석정(松石亭), 죽림사(竹林寺) 등등 오늘날도 이름 있는 유적들을 비롯하여 누정, 사찰 등에 대한 시가 많다. 부산팔경은 이미 <장흥문화> 제11호(1989)에 필자의 선친(김숙환, 1930-1998)께서 소개한 바 있다.
방호 김희조의 시 가운데 현실 사회의 비판에 대한 내용도 있다. 당시의 현실을 관조하면서 깊은 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작품이 많다. 시 ‘임계탄(壬癸歎)’은 18세기 초반 재해 등에 의한 향촌 현실이 어려움을 표현한 것이다. 한시를 전공한 외우(畏友) 최한선 교수(전남도립대)의 도움을 받아 국역한 글을 옮겨 본다.
임계탄 壬癸歎
회간연화절궁려 回看烟火絶窮閭 눈을 돌려보니 궁벽한 시골에 연기 끊겼는데
생리망연단무염 生理茫然但撫髥 살아갈 이치 막막하여 수염만 만지작 거리네
청맥출용간작죽 靑麥出舂艱作粥 청보리 베어와 방아 찧어도 죽 만들기 어렵고
황소입정핍조염 黃蔬入鼎乏調鹽 시든 채소 솥에 끓이지만 간도 맞출 수 없구나
연명구우유운부 淵明九遇猶云富 도연명의 한달에 아홉 번 먹음이 되레 부유하고
중자삼인가소렴 仲子三咽可笑廉 진중자의 오얏 세 번 삼킴이 청렴이라니 우습구나
차아이비주리자 嗟我已非周利者 아, 나는 이미 이익에 두루 밝은 자가 아니거늘
흉년견살고무혐 凶年見殺固無嫌 흉년에 죽게 되도 진실로 아무런 혐의가 없도다
그리고 칠언율시 가운데의 「糴糶之弊」등 9개조의 폐단지적은 그중 주목되는 것이다. 그의 현실인식과 사회모순에 대한 재야시인으로서의 이 술회는 당시 일반화되어 있던 기강문란과 사회경제적 곤핍을 잘 대변하고 있고, 재야비판지식인으로서의 면모까지 느끼게 해준다. 그가 거론하는 당시의 폐단들은 조적․학교․붕당․이서․관서․군정․남초(담배)․염문․추노 등의 9개조였다. 이 구폐(九弊)의 지적은 2권의 만언소와 짝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에 <구폐시>를 옮겨 본다. 이 시의 국역 또한 최한선 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구폐시>의 명칭은 문집에서는 쓰지 않고 있으나 필자가 붙여 본 것이다.
糶糴之獘
진진홍부매하류 陣陣紅腐痗何流 오래 묵어 불게 변질된 쌀 병 어디서 왔나
전환기권별처우 轉幻奇權別處優 갖다 쓰는 기이한 변통 희한한 광대놀음 탓
곡면가모추수원 斛面加耗推髓怨 쌀에 붙인 이자는 골수까지 스미는 원한인대
산두생잉이신모 筭頭生剩利身謀 머릿수 헤아려 덤을 붙여선 일신의 이익 꾀하네
세무한사이민지 世無漢史移民地 한나라 역사에 풍년 든 땅으로 백성 옮겼단 말 없지만
인유한시기자구 人有韓詩棄子溝 한유의 시에는 자식을 도랑에 버렸단 말 있다네
수부규혼교차폐 誰復呌閽矯此獘 누가 다시 대궐에 부르짖어 이 폐단 고칠 수 있으랴
보방유재완주구 保邦惟在緩誅求 나라를 보호한 길 오로지 가렴주구 늦추는 일인 것을
學校之獘
학교오문사소의 學校吾聞士所依 내가 알기로 학교는 선비가 의존하는 곳으로
국가원기차위비 國家元氣此爲肥 국가의 근원과 기운은 이로써 살찌는 것이라
도견세매연어화 陶甄世昧鳶魚化 인재를 양성하여 어두운 세상을 제대로 교화해야커늘
포철인다해시기 哺啜人多亥豕譏 공짜로 밥만 축내는 사람 많아 엉터리란 기롱 받는다네
변작양정도포산 變作良丁逃逋藪 좋은 젊은이 변화시켜 학교로 도망 들어간 사람 많지만
층생편당전쟁기 層生偏黨戰爭機 여러 편당 만들어서 싸움할 구실만 만들고 있구나
여장강과초위적 如將講課抄爲籍 만약에 공부의 성과를 가지고 선발하여 명단을 만든다면
제제장간유무재 濟濟將看有茂才 훌륭한 인재들이 무성하게 자라남을 볼 수 있으련만
朋黨之獘
제배원구양분운 擠排援救兩紛紜 끌어주기 아니면 배척하는 두 갈래 어지러움으로
평지풍파군불문 平地風波君不聞 평지에 일어나는 풍파를 그대 듣지 못했는가
입주출노망한이 入主出奴亡漢餌 들어가면 주인 나가면 노예는 망한 한나라의 먹이요
도문할호상당근 屠門割戶喪唐斤 가문을 도둑질하고 집안을 베는 것은 상한 당나라의 도끼라
기미방휼권상날 幾微蚌鷸權相埒 야릇한 낌새 꾸밈은 조개와 도요새의 다툼과 서로 같고
효상훈유취각분 爻象薰猶臭各分 사귀는 모습은 좋은 풀과 나쁜 풀의 냄새처럼 서로 다르네
성대즉금회태운 聖代卽今回泰運 태평성대인 지금에 이르러 큰 국운이 돌아왔느지
조정방사탕평운 朝廷方事蕩平云 조정에서 바야흐로 일마다 탕평책을 쓴다고 하네
吏胥之獘
아국장위서리망 我國將爲胥吏亡 우리나라는 장차 서리들 때문에 망할 것이라고
남명차어아문상 南溟此語我聞嘗 남쪽 바다에 있는 나도 이 말을 일찍이 들었다네
도재절부분증감 盜財窃簿紛增減 재물을 도둑질하고 장부를 훔쳐 늘리고 줄이기 요란하고
청벽규렴교부앙 聽壁窺簾巧俯昻 벽에 귀대어 엿듣고 주렴을 훔쳐보며 아첨하기 교묘하다
관고몽롱용궐죄 官故矇聾容厥罪 관청에서는 알고도 모른척 그 죄를 용납해 주고 있으니
인수가어제기방 人誰駕馭制其方 어느 누가 있어 그 것을 제어할 방도를 낼 수 있을까
여장신법행효시 如將新法行梟市 만약에 새로운 법을 만들어 시장에서 효시를 실행한다면
징려유능후폐방 懲勵猶能後獘防 사나움을 징벌하여 능히 훗날의 폐단을 막을 수 있으련만
官屠之獘
자상범지법불행 自上犯之法不行 위에서부터 어기니 법이 행해지지 아니한대
무우기가망추성 無牛其可望秋成 소가 없으면서 가을의 성공을 바라고 있네
주교민실권경업 周郊民失勤耕業 주나라 근교에선 백성들이 부지런히 밭갈기를 잃었는데
연시관개선판정 燕市官開善販程 연나라 시장에서는 관에서 장사 잘하도록 길을 열었다지
세류영중장산적 細柳營中長筭積 가는 버들 영중(관청)에는 길이 계산 장부만 쌓여 가고
감당얼하남상영 甘棠臬下濫觴盈 팥배나무 말뚝 아래엔 넘치는 술잔들이 가득하구나
춘추교원우하사 春秋校院尤何事 봄과 가을로 교원에서는 무슨 일을 했다고
포철기도색육갱 哺啜其徒索肉羹 무위도식 하면서도 고기국은 꼭 찾는구나
軍丁之獘
욕언군정루선첨 欲言軍丁淚先添 군정에 대해 말하려니 눈물이 먼저 뚝뚝 떨어지는데
원의쟁영반의겸 怨意崢嶸叛意兼 높고 높은 원망의 목소리 속에는 반란의 뜻도 들어있지
초골백전징포안 楚骨白塡徵布案 줄을 지은 뼈다귀들이 하얗게 징포 문서를 메꾸었고
당해황팔모정첨 唐孩黃八募丁簽 황당하게도 어린아이 겨우 팔세인데 군대 오라 부르다니
도선산곡민무발 逃禪山谷民無髮 도망가서 중이 되니 산 속의 백성들은 머리털이 없고
비위조정부유염 備位朝廷婦有髥 품계를 갖추어야할 조정엔 부녀자들만 수염을 길렀구나
완급전두하소시 緩急前頭何所恃 급한 일이 생기면 미리 늦추어야 하거늘 무엇을 의지하랴
도연무희우문념 徒然武姬又文恬 한갓 무인의 희롱뿐만 아니라 문인도 편안해 하네
南草之獘
부하요얼세간행 夫何妖孼世間行 무릇 정말 이상한 재앙이 세상을 활개치고 다니는데
불포불온현속정 不飽不溫眩俗情 배도 안 부르고 따숩지도 않은 것이 세상인심을 현혹시키네
명혹신농상종루 名或神農嘗從漏 이름이 혹시 신농씨 때 있었는지 잊혀진 지 오래인데
종응후직파전생 種應后稷播前生 종자는 아마도 후직 이전부터 파종되었나 보다
열전거화천금중 列廛居貨千金重 상점에 진열되어 돈을 모아들이는 데는 천금보다 중하고
옥토수공오곡경 沃土輸功五穀輕 기름진 땅에다 공력을 들이기는 오곡보다 수월하다
약사수통엄금령 若使收筒嚴禁令 만약에 담배통을 거둬들이고 엄하게 금령을 내린다면
저간화서대기경 佇看禾黍代其耕 가만히 서서 곡식이 담배 경작 대신함을 볼 수 있으리라
廉問之獘
막료염문자횡행 幕僚廉問恣橫行 관리들의 탐문 행위가 멋대로 이루어지니
우피제주우각영 于彼諸州又各營 저기 각 고을은 고을대로 각 진영은 진영대로
백금선칙정다소 百金先勅情多少 많은 돈을 먼저 요구하여 액수에 따라 정황이 달라지니
삼척하논죄중경 三尺何論罪重輕 법률이 어찌 죄의 가볍고 무거움을 말할 수 있으랴
관위특지종중매 官威特地從中賣 관의 위엄은 특별한 것인데 매점매석으로 생겨나니
민막공문재상맹 民瘼公門在上盲 백성의 아픔은 관청에 있는데 임금은 눈이 멀다
안용차류동제사 安用此流同濟事 어찌 이러한 유행으로써 함께 일을 이루겠는가
막여폐격색기정 莫如廢格塞其程 폐단을 바로 잡아 그 길을 막아버림만 못하리라
推奴之獘
일가역유소군신 一家亦有小君臣 한 집안에도 작으나마 군신의 관계가 있는 것이라서
이합중간분의균 離合中間分義均 만나고 헤어지는 사이에도 분별과 의리는 같으니라
약시추관분가주 若施推關紛假主 대문을 열고 나가게 하면 가짜 주인 되어 요란하지만
여행금령갱양민 如行禁令更良民 만약에 법을 엄히 한다면 다시 좋은 백성되리라
포망유수현허자 逋亡有藪懸虛藉 도망한 숫자가 많으니 사람 없는 이름만 드러나 있고
반살무상범중륜 叛殺無常犯重倫 반란을 하고 살인을 일삼으니 윤리를 범함이 심하도다
위속위도생교흔 爲贖爲逃生巧釁 환속이나 도망하여 사는 법을 꾸밈이 교묘하거늘
의개창법영도신 宜皆刱法永圖新 법을 만들어 길이 새 삶을 도모케 함이 모두에게 마땅하리
<방호집> 권2의 만언소는 영조의 구언교에 응해 올린 장문의 봉사소로서 1728년 무신란(이인좌의 난)이후 사회모순을 타개하려는 영조의 요구에 답한 것이다. 그는 이 만언소에서 당시의 난국을 타개하는 요체를 인심을 모으고(結人心), 인재를 거두며(收人才), 군정을 수리하는 것(修軍政)으로 요약하고, 이를 설명하는 가운데 수십개 항에 이르는 민폐들을 지적하고 있다. 이 만언소는 그의 경세론을 집약한 것으로 실학자적 분위기를 엿보게 한다.
권2의 서문으로는 「동약계 서문(洞約契序)」와「천관산 탑산암 중수 서문(天冠山塔山庵重修序)」,「보림사 대광적전 중수서문(宝林寺大光寂殿重修序)」가 수록되어 있다, 동약계서는 1734년 부산의 7개 마을 사람들이 결속하여 만든 것으로 양란 이후의 향촌사회 구조변화에 대응하는 사족들의 면모를 읽게 하는 자료이다. 이 시기에 유주기 장흥부사[현감]의 주도로 주현향약이 실시되는데 서로 비교하면 당시 향촌사회의 운영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리라 본다. 천관산탑산암 중수서는 천관산의 불교유적에 대한 자료이며, 보림사대광적전 중수서는 보림사의 대적광전(문집에는 대광적전)의 중수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병사(전라병사)의 도움이 있었음을 적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불사에 민과 관이 합세하였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권2의 끝에 수록된「수관사적(「守館事蹟)」은 무신란때 성균관을 수호하던 육의사(김희조, 정봉징, 조홍업, 조덕희, 유용, 박순우)의 자․호․본관․거주지, 그리고 守舘時의 完議를 첨부한 것이다.
<방호집>은 조선후기 장흥출신 재야지식인 김희조(1680~1752)의 사상과 시문을 수록한 것으로서 특히 그의 거주지였던 장흥․강진․화순 등 전라도 서남해안지역의 산천과 당시 사정을 주된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의 사회 비판적인 현실인식의 면모를 조망할 수 있는 자료이다. 만언소나 구폐(九弊)를 지적한 칠언율시는 바로 그의 실학적 면모가 집약된 내용으로 간암 위세옥(1689-1766)의 만언소, 존재 위백규(魏伯珪, 1727∼1798)나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실학저술과 비교, 검토될만한 의미있는 자료라고 생각된다.
존재 위백규 선생의 사자산동류기(獅子山同遊記)
오늘날의 등산이라면 그때는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무엇을 가지고 갖고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갔을까? 그리고 무엇을 먹었을까?
조선시대 후기 문인이자 다양한 실학저술을 남긴 존재 위백규(1727-1798)선생은 1791년(정조 15) 친구들과 장흥 사자산 사자산(獅子山) ; 부의 동쪽 9리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7권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 산천조))
정자천(亭子川) 군의 북쪽 8리에 있으니, 일명은 죽천(竹川)으로서 장흥부(長興府) 사자산(獅子山)에서 나와서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순천부(順天府) 낙수진(洛水津)이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40권 보성군(寶城郡) 산천조)
을 등산을 나선다. 천관산은 명산으로 잘 알려 있고 찾는 사람이 많지만, 천관산과 함께 장흥의 진산이면서도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고 찾는 사람도 적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일정과 경관, 일행들에 대해서 기록은 남긴다. <사자산동류기>(獅子山同遊記>가 그것이다. 사자산에 대한 중요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사자산은 장흥의 진산으로 천관산과 함께 알려진 산이다. 신해년 3월, 그러니까 1791년(정조 15) 65살때 봄날이었다. 지금도 고희를 앞둔 나이면 힘이 들 터인데, 사자산을 오른 것이다. <同遊>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박사용(朴士用)과 이문찬(李文贊)에게 기별하니 즐거운 마음으로 왔다. 모두 열두명에 이르렀다. 당대의 향촌 지식인들이 아닐까. 먹거리는 삼해주(三亥酒)와 구운 굴비, 청태(靑苔)에 백반이었다. 서로 밀고 끌면서 제암의 돌사다리도 보고, 의상암도 지난다. 산 위에 오르니 5-60명은 앉을 수 있는 돌 마당이 앞에 펼쳐진다 여기에 앉아 술도 한잔 기울여 보고 주위도 조망해 본다. 여러 생각에 잠기다가 이런 저런 말을 나누다가 다시 내려온다. 그리고 다음날 지나갔던 과정과 함께 한 사람들을 기록해 둔다. 그 기록이 <존재집>에 실린 <사자산동류기>이다. 다음에 국역문을 옮겨 본다. 이 또한 녹양 박경래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존재집>의 간행 경위에 대한 내용은 본서에 주해하여 실었다.
<獅子子山同遊記> 원문, <존재집> 권 21
산수(山水)는 본래부터 사랑스러운 풍물에다 밝고 수려함과 청신하고 정밀히 살펴보면 기이하고 괴상함과 웅장하고 험준함에 가끔 가다가는 이상한 경관을 깨닫게 되고 눈을 옮겨서 볼 때도 동일한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진실로 산수(山水)의 밖에서 산수를 관찰해 보지 아니한 사람은 능히 그 참다운 산수의 취를 터득하지 못하며 또 능히 그 참다움을 터득하지 못하고 등급을 매기거나 평정하는 것은 망상일 것이다.
장흥(長興)에는 진산(鎭山) 두 곳이 있는데 천관산(天冠山) 천관산(天冠山) ; 부의 남쪽 52리에 있다. 예전에는 천풍(天風)이라 불렀고, 혹은 지제(支提)라고도 하였는데, 몹시 높고 험하여 가끔 흰 연기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서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7권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 산천조))
과 사자산(獅子山)이다. 천관산은 전부터 관내에서 명승지로 알려져 있기에 놀러 다니는 사람들이 사철 끊이지 않으며 모두가 다 말하기를 좋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사자산은 명승이라는 소문이 나지 않았으므로 놀러 다니는 사람도 없다. 나는 혼자서 그 기이함을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한번 놀러가 보고 싶었지만 오래도록 가보지 못했다.
신해(辛亥)년 3월 봄이 저물어갈 무렵에 마침 그 산 아래를 왔을 때 어른과 아이가 함께 봄 가을로 등산가는 것을 보고 예전에 마음먹었던 일이라 기쁜 감동이 나도 모르게 떠올랐다.
박사용(朴士用)군과 이문찬(李文贊)군도 소식을 듣고 찾아왔으며 좌우에서 공부하는 학생들과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 또 열두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삼해주(三亥酒)를 사고 조기[石首魚]도 굽고 백반(白飯)과 청태(靑苔)를 싸가지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올라갔다.
겨우 중턱에 이르렀을때 기이한 바위와 험준한 골짜기가 뛰어난 경관이 아닌 곳이 없었으며 잇달아 뻗은 산등성이가 원효암(元曉庵)과 의상암(義相庵)에 까지 이르렀고 무너진 담장과 깨진 기와 조각이 비록 전성시대는 아니지만 그 경내의 명승고적 만큼은 다른 산에서 얻어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인해서 정상에 오르고 보니 이른바 제암(帝巖)이라고 하는 바위로 돌사다리[石梯]를 타고 기어올라 가야했다. 이미 다 올라가고 나니 석굴(石窟)을 맞아서 몸을 솟구쳐 가지고 들어가니 머리만 겨우 굴로 들어가고 몸은 장애물에 걸려서 뜻을 이룰 수 가 없었다.
마침내 물러선 뒤에 발을 잡고 밀어주니 배와 등을 뽑아 올리나니 대롱속에서 솟아나온 것 같았다. 이미 굽혔다가 펴게 되면 별안간 몸이 가벼워짐을 깨달으며 우뚝 하늘을 절반쯤 오른 것 갔다. 역내(域內)의 모든 산들이 다리아래 다 죽 늘어 놓은 것 같았고 바위 정상은 돌 바닥이 편편하지 못하지만 오륙십명 정도 앉을만 하였으며 오직 노래 부르고 피리 부르면서 구름사이로 찾아온 손님에게 보답을 할 수 없음이 한탄(恨歎)스럽다 하겠다.
잠깐 동안에 골수가 상쾌해지고 정신이 쌀랑해지면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장차 내려가려고 한즉 좁은 굴을 지나오면서 징험하였기에 진로를 바꾸어서 동쪽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손으로 바위틈을 강하게 잡으며 발이 닿는 대로 뒤로 가면서 손을 옮기고 또 손이 닿는 대로 뒤로 발을 옮기면서 이마는 앞으로 하고 발칙을 뒤로하니 마치 한(漢)나라 때 봉토를 쌓아놓고 하느님에 제사 지내며 땅을 깨끗이 쓸고 산천에게 제사지내는 봉선(封禪)의 의식과 흡사했다.
이미 내려와서는 또 한잔씩 돌렸는데 대개 술을 함께 가지고 올라가지 않았던 것은 취중에 미끄러질 것을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동쪽으로 고갯길을 따라서 길을 바꾸어 내려가는데 이른바 병풍암(屛風岩)이라는 데가 기이하고 으슥하면서도 이상하게 트이는 곳이 또 한 장면의 절경(絶境)을 이루었고 뜻하지 않는 의상암(義相庵) 다음으로 또 이러한 곳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런 다만 좋은 암자가 있어가지고 금상첨화(錦上添花)를 이루지 못한 것이 한탄스러웠다.
여기는 동천(洞天)으로서는 가장 깊은 곳이었으며 오르고 내리면서 다 찾고 보면 그 여러번 기이한 장관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모(日暮)의 저해로 걸음을 재촉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세 걸음 가다 한 번씩 고개를 돌리고 보니 비로소 옛날 분들이 우리보다 먼저 명승을 다녀 갔음을 알 수 있었다.
대체로 산에 가서 기암(奇岩)과 괴석(怪石)이 절벽으로 우뚝서 겹겹이 지탱되어 있고 직선으로 우뚝 솟아 의지하고 있으며 앞이 탁 터지면서 천문(天門)을 이루는 곳도 있고 바르게 서서 석주(石柱)를 이루기도 하며 죽 나열한 모습이 제불(諸佛)들 같기도 하고 또 팔짱을 동자(童子) 모습으로도 보이며 가로 누운 모습은 구름다리를 이루고 빼어난 모양은 연화(蓮花)모양 같기도 하며 자못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으나 다만 이름이 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구경을 오는 사람들은 심히 안목을 바꾸어 보지 않더라도 기이함을 칭하게 될 것이다.
또 여기에서 비로소 옛적에 정(鄭)나라 사람이 공손교(公孫僑)를 보고 당시 제일가는 사람이라 하고 동문(東門)을 지나가는 객(客)이 진실로 요순(堯舜)보다 낳음을 알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산수(山水)도 자기를 알아주는 종자기(鐘子期)같은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아! 서글픈 일이라 하겠다.
세상에서 만물(萬物)을 논평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자기의 입장에서만 보게 되므로 공평한 안목이 없고 달통한 평논이 없는 것이다. 나는 본래 천관산(天冠山)쪽 사람이므로 어찌 천관산이 지역 내의 명산이라고 하고 싶지 않겠는가? 만약 제갈공명[孔明]을 촉나라[蜀中]에서만 보았다면 덮어놓고 나는 공근(公瑾 : 오나라 주유)이 보다 못하다고 칭했을 것이니 어찌 그것이 달통한 선비의 말이 되겠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의상암(義相庵)과 제암(帝巖)같은 곳은 천관산에는 없으며 이산(사자산)에만 독히 있다. 병풍암(屛風岩)에 가서 보아도 천관산을 당할만한 곳이 여섯 일곱군데가 있다. 만약에 여섯일곱 군데의 많은 비경을 거론하여 두산의 절경을 비교한다면 천관산이나 사자산 두 산중에서 어느 쪽이 더 웅산(雄山)인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다음날 같이 놀러갔든 사람들의 성명(姓名)을 나열하여 써놓으며 장차 후일에 산중의 고사(故事)로 삼기로 하고 대략 여러 곳을 돌아온 그 개요(槪要)를 기록하여 서두에 붙여 두기로 하였다.
박사용(朴士用)과 이문찬(李文贊)이 남긴 글을 없을까? 열두명이라는데 같이 간 다른 사람은 또 누구일까. 그들은 장흥의 어디에서 살았을까? 당시 음식, 삼해주(三亥酒), 구운 굴비, 청태(靑苔), 백반 등은 누가 준비했을까? 장흥만이 특산이었을까? 돌사다리도 보고, 의상암도 가 보아야지.... 등등의 상념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장흥 땅 장흥사람들의 기록 찾기가 계속 되어야만 연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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