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양명한 길지 화양(華陽)라고 했다. 한양도성 동쪽 들녁(東郊) 살곶이벌 중심을 그렇게 불렀다.
수북산남(水北山南)은 곧 양명한 땅 양(陽)이라고 했다.북한산은 퍽 아름다웠다. 또 조선 중심의 산을 이뤄
그 이름을 화산(華山)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산이며 조선 산의 중심이 된다는 화산(華山)이다.
그 화산의 남녁 땅 생기(生氣)가 넘치는 땅 화양(華陽)이다.
서울 광진구 화양동 122번지 화양정 옛터다.화양동 주민센터 앞 느티나무 공원 안에 화양정 옛터는 있다.
화양정 터
華陽亭 址
화양정은 사복시(司僕寺)의 말 목장(牧場) 안에 있던 정자로
1432년(세종 14)에 세워져 군사훈련 사냥 계회(契會) 등에 이용되었다.
1911년 낙뢰(落雷)로 소실되었다.
화양정은 그 내부가 100여칸 이상으로 아주 웅장한 행궁이었다.
화양정은 사각형의 정자로 기둥 둘레가 한아름이 넘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문신 양성지 (1414~1482)는 화양정의 풍광을 이렇게 노래한다.
한가할 제 말이 가는대로 세상밖에 나오니
저 멀리 들판에 풍경이 새롭네
하늘다은 먼 산은 푸른것이 그린 눈섭같고
비온뒤 싱그러운 풀은 푸른요를 깔았네
꾀꼬리 오르락 내리락 아침 햇볕에 울고
소와 말은 부산하게 사방으로 흩어지네
흥겨운 봄바람에 3월도 늦은데
술 가지고 나가서 좋은경치 구경하네.....
-양성지의 화양정(華陽亭) 에서-
그 명당길지 화양 땅을 오랜 세월 지켜온 노거수(老巨樹) 느티나무이다. 그 노거수 느티나무는 슬픈 역사를 말한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서 쫓겨난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귀양을 떠나는 길에 화양정에서 하룻밤을 묶는다.
단종이 이곳에서 하룻밤 머문 이유는 세조가 환관 안노(安璐)를 시켜서 노산군을 전송하기 위해 화양정에서 약간의 잔치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세조실록 8권, 1457년(세조 3년) 6월 22일 갑인 2번째기사는 '영월로 떠나는 노산군을 화양정에서 전송하게
하다'이다.
노산군(魯山君)이 영월(寧越)로 떠나 가니, 임금이 환관(宦官) 안노(安璐)에게 명하여 화양정(華陽亭)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노산군(魯山君)이 안노에게 이르기를, "성삼문(成三問)의 역모(逆謀)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이다."
하였다.
내시 안노는 단종에게 술을 권하며 성삼문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고 있노라고 넌지시 말했다.
세조가 혈육의 정으로 전송 연을 베푼다고 생각했던 단종은 안노의 말이 너무나 괘씸하여, 술잔을 들어 안노의 면상을 때린다.
단종이 영월 유배길의 첫날밤을 이곳에서 지낸 뒤, 정자 이름을 한양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회행정’(回行亭)이라고 지었다는 설과 단종과 마지막 밤을 보낸 정순왕후 송씨가 “꼭 돌아오라(回行)”며 남긴 마지막 인사말이라는 얘기도 있다
화양정에서 하룻밤을 지낸 단종 일행은 6월 22일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내려가 6월24일에 여주의 이포나루에 닿아
육로로 6월 28일 영월 청령포에 도착했다.
단종은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하는 계유정란 때 이미 실권을 삼촌 수양대군에게 빼앗긴다.
가장 믿을만한 세째 삼촌 안평대군도 계유정변 때 저 세상 사람이 된다. 수족이 다 잘린 셈이다.
종실의 어른 양녕대군까지도 수양 숙부의 손을 들어준다. 여섯째 숙부 금성대군은 영주로 귀양간다.
노산군은 창덕궁에 철저히 '유폐'되어 살았다. 감금생활이나 다릉없었다.
영월로 떠나는 날이다.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광희문 혜화문 서소문 등 사소문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였다.
백악 동쪽 자락에 있는 대문을 이용한다. 너무 외져 사람도 다니지 않는 숙정문이다.
노산군은 심야에 숙정문으로 겨우 한양도성을 나갈 수 있었다. 그것도 밝은 낮이 아닌 심야에.
이렇게 심야에 숙정문을 이용케 한 것은 민심의 동요를 막기위한 계책이었는지 모른다.
노산군이 숙정문을 나서자 도성 밖 반촌(泮村) 가난하고 힘없는 유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의 제자인 이들 유생들은 낙산 자락 청룡사까지 노산군을 배웅했다고 전한다.
노산군은 청룡사 우화루에서 정순왕후 송씨와 마지막 밤을 보내고 청계천 영미교에서 '영영이별'을 한다.
비극의 주인공은 조선의 27대 왕 고종의 명성왕후 민씨이다.
고종 19년(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난다. 훈련도감 소속 옛 구식군인들이 창덕궁을 공격한 것이다.,
목표는 명성왕후다. 이들은 창덕궁 돈화문을 뚫고 궁궐로 돌친한다. 명성왕후는 궁녀의 옷으로 갈아 입고 탈출한다.
홍계훈의 엄호를 받으며 돈화문으로 달렸다.그때 마침 시어머니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가 가마에서 내리고 있었다.
명성왕후는 시어머니 가마를 타고 손쉽게 궁궐을 빠져나왔다.홍계훈은 명성왕후를 수락산으로 피신시켰다.거기서 하루밤을 보낸다.
명성왕후는 이튿날 화양정에 들린다. 이 동네는 암컷 말을 키우는 목장이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자마장리(雌馬場里)이라고 했다.
다시 자양동(紫陽洞)으로 바뀐다.
명성왕후가 수락산을 떠나 서둘러 화양정에 도착했다. 충북 음성군 장호원으로 가는 길이다.
그때 상황을 야사는 이렇게 전한다.
화양리 사람들이 귀한 가마를 반겼다. 마을 여인네들은 가마의 문을 열고 한마디씩 거둘었다.
"아이고, 예쁘기도 해라. 저토록 젊은 여자가 장안에 제 집 두고 민비라는 못된
왕비 북새통에 피난 가는가 본데세상이 하 뒤숭숭하니 언제 다시 돌아올 날 있을라구."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임오군란을 피해 신행으로 가장하여 달아나 한강을 건넌 민비의 가마를 보고 "새색시가 민비인지 여우인지
고년 때문에 고생한다"는 말을 했다.민왕후는 이에 앙심을 품었다. 뒷날 환궁하여 그 여인을 찾아내라고 명하니
죽음 앞이라 모두 시치미를 뗐다. 결국 온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섭정을 다시 요청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다시 전권을 행사한다.
흥선대원군은 "왕비께서 10일 오시(午時) 경에 난군중에서 이미 승하하신바, 다만 그 체백(體魄: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모든 군졸들은 퇴산하라"는 내용의 교지를 선포케 하여 국상(國喪)을 공식화하고 군인들을 해산시켰다.
대원군은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여 3군부를 부활시켰고 무위영 대신 훈련도감을 다시 세웠다.
민씨 친족과 친일세력이 숙청되고 대원군 측근들이 등용되었다.
임오군란 중에 입은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일본군대가 인천에 상륙했고 7월 7일에는 일본공사 하나부사가 2개 중대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거만하게 임금을 알현했다. 청나라는 이번 군란의 중재역을 자임하면서 7월 7일 4천명의 병력을 남양만 마산포로 보냈다.
이어 7월 21일 병력을 동대문 밖 종묘에까지 진출시켰다. 일본과 청나라의 무력 앞에서 대원군도 속수무책이었다.
청나라와의 무력충돌을 꺼린 일본이 중재를 요청하자 청나라는 조선의 보호자 행세를 하면서 완강히 저항하는 대원군을 7월 31일
납치하여 청나라의 보정부(保定府)에 유폐시켜 버렸다. 대원군이 다시 실각하고 임오군란 발발 이후 50여일만인 8월 1일 장호원에
있던 명성왕후는 영의정 이하 대신들과 청군의 호위를 받으며 창덕궁으로 되돌아 왔으나 조선은 조금씩 조금씩 외세에 의해 허물어지고 있었다
고종의 '무당정치의 산실' 북관묘 터다. 명성왕후는 종로구 명륜동 1가 2번지에 사당을 지어서
무당 박씨를 그곳에서 살게 하였다. 그 사당이 북관묘이다. 무당에게는 진령군(眞靈君)이란 봉작도 내렸다.
지금 서울과학고 앞에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이 들어선 자리다. 옛날 송시열선생 집터라는 표시석이 있다.
이 자리가 북묘 터다.
명성왕후는 장호원에서 피난생활을 할 때 무당 박씨를 만난다.
임오군란 때 민비가 장호원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난을 와서 초조하게 서울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때이다.
근처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에 있는 백운봉 밑에 무당 박씨가 있었다. 그의 점술이 뛰어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이에 명성왕후가 시험을 하기 위해 초라한 옷을 입고 찾아가자 무당이 황급히 내려와 무릎을 꿇고 부복하면서
“왕비님이 어인 일로 오셨나요?”며 “마마님의 환궁날짜는 오는 음력 팔월 보름입니다.”
고 자신 있게 예언했다.
"환궁하다니, 공연히 남의 마음만 들뜨게 하는 게 아니요?"
"제 관상과 점은 영험합니다. 이래도 관운성제(關雲聖帝)님 신령의 딸입니다.
마마님께서 장차 귀하게 되시면 제 점괘를 잊지 마십시오."
실제로 그가 말한 날짜에 남편인 고종으로부터 사자가 왔다. 이에 기쁘고 놀란 왕비는 그를 데리고 궁궐로 돌아왔다.
민비는 자신에게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해줬던 그 무당을 잊을 수 없었다. 보답하기로 했다.
민비는 관우를 모시는 북묘를 지어 거주하도록 했다. 또 그를 신관 대우를 하고 그 북묘에서 때때로 성대한 굿을 지냈다.
당장 그 무당을 진령군으로 봉했다. 이 무당은 아무 때나 임금과 중전을 뵈었으며 한번은 웅장한 복장으로 단장하고
나타난 그녀를 가리켜 “군이 되니 더더욱 믿음직스럽군” 하고 고종과 민비가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상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금은보화를 주었다고 한다.
진령군의 세도가 직접 민비와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재상집 부녀자들은 그 줄을 타고 남편 재상들의 출세 운동을 하려고
뇌물을 싸가지고 찾아 다녔다.
"진령군 누님"
"진령군 아주머니"
하고 고관대작들도 이 무당에게 아첨했으며, 늙은 재상은 주책도 없이 수양딸로 정하고 갖은 아첨을 했다.
진령군이 거처하는 북묘 앞에는 구관 기복하는 사람들이 보낸 금은보화를 실은 수레가 끊이지 않았다.
명성왕후를 손에 쥐고 있는 무당의 권력은 하늘을 찔렀으니 아무도 그녀를 대적할 자가 없었다.
12년 동안 명성왕후의 수호신으로 자처하며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진령군의 권세도 명성왕후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났다,
친일세력이 득세하자 진령군의 재산은 모두 몰수되고 북묘에서도 쫓겨나 삼청동 골짜기에 숨어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