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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더 위험한 ‘내면아이’
1부에서 드린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심리학은 위험하다!’입니다. 지금부터 드릴 말씀의 핵심은 ‘‘내면아이’는 더 위험하다!’입니다. 왜 심리학이라는 나무보다 ‘내면아이’라는 열매가 더 위험할까요? 숲에 있는 나무보다 가게에 진열된 열매가 눈에 더 잘 띄고 훨씬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아무리 예쁘고 매력적인들 열매만 하겠습니까?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나무는 볼 수만 있지만 열매는 먹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열매에 나무가 가진 모든 독소가 농축되어 들어있으니 얼마나 더 위험하겠습니까? 심리학의 열매인 ‘내면아이’의 위험성을 여섯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자아(簏銌)’가 아니라 ‘아이(child)’인 ‘내면아이’
이 글에서 ‘내면아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2018년 여름의 저처럼 말입니다. ‘내면아이’라는 표현 자체를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자주 접하는 단체의 홈페이지에서 ‘내면아이’ 세미나를 알리는 게시물을 수시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저는 ‘내면아이’의 ‘아이’가 알파벳 ‘I(나)’인 줄 알았기에 ‘내면아이’를 ‘자아(自我)’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면아이’ 세미나를 자아를 훈련하고 극복하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행여 저랑 같은 분이 계실까 해서 부끄러운 고백을 했습니다만 ‘내면아이’는 ‘내면의 자아’가 아니라 ‘내면의 아이’, 영어로는 ‘inner child’입니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전혀,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여기서 헷갈리면 미궁에서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내면아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아’가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나와는 구별되는 다른 ‘인격체’입니다. 아파하고, 소리 지르고,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아이(child), 대화가 가능할 뿐 아니라 내 안에서 자라나는 아이(child)가 ‘내면아이’입니다.
‘내면아이’ 이론과 상담을 대중화한 일등 공신이자 절대 권위자인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의 저자 존 브래드쇼(1933-2016)는 ‘내면아이’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아마 어린아이가 어른의 몸속에서 계속해서 자란다는 내 얘기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릴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과거에 무시당하고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바로 사람들이 겪는 모든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아이를 잘 발견해서, 상처 난 부분을 회복시켜 주고 잘 돌보아 주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성인이 된 우리의 인생에 계속 악영향을 끼치면서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 것이다.”(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31. 이하 ‘상처’로 표기)
성인의 몸속에서 계속 자라나는 아이, 그 아이가 받은 상처가 사람들의 불행의 원인이 되는 아이, 그 상처를 치유해 주지 않는 한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아이가 바로 ‘내면아이’입니다.이런 ‘내면아이’가 정말 존재할까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만났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매일 자기 속의 ‘내면아이’와 대화하고, ‘내면아이’와 편지를 주고받고, ‘내면아이’와 시간을 보내면서 행복을 되찾았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현상이 가능할까요? 무엇엔가에 혹은 누군가에게 속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내면아이’로 현대인을 속이는 무엇인가는 무엇이며 누군가는 누구일까요?
2. 심리학이 낳은 ‘내면아이’
검색창에 ‘‘내면아이’’를 입력해서 얻은, [나무위키]에 수록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어린 시절의 아픔과 상처로 인한 자아가 있다는 상담 기법으로 칼 융의 원형(archetype) 개념에서 분리되어 나왔으며, 현대에는 교류 분석과 함께 유사 정신분석적 치료법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 간략한 설명에서 ‘내면아이’와 심리학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면아이’는 프로이트가 고안한 ‘무의식’을 배경으로 하고, 칼 융이 고안한 ‘원형 개념’에서 분리되어 나온, 유사 ‘정신분석적 치료법’의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의 내면에 있는 아이’라는 개념이 19세기 심리학이 처음 고안한 것은 아닙니다.
심리학자 찰스 휫필드에 의하면 지난 이천 년 동안 인류 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해 온 개념입니다. 이 개념을 원형 이론으로 유명한 자신의 심리학에 도입한 학자가 칼 융(Carl Jung, 1875-1961)입니다. 스승이던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심리학 체계를 구축한 융은 심리학에 영적, 종교적 옷을 입힌 사람입니다.
그는 ‘필레몬’이라는 영적 존재의 인도를 받아 7년 동안 무의식 세계를 여행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정신 병리학보다 사람들의 영적 필요에 더 관심이 많았던 융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환자들은 심리치료사들에게 제사장의 역할을 강요하며, 또한 심리치료사들이 자신을 고뇌로부터 해방해 주기를 기대하고 요구한다. 그것이 신학자들에게나 속한 문제들을 왜 우리 심리치료사들이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다.”(신이 된 심리학, 27)
융의 정신분석이 얼마나 영적, 종교적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런 융이 ‘내면아이’ 개념을 자신이 체계화한 심리학에 심었습니다. 융이 그 아이를 ‘신성한 아이(divine child)’라고 부른 것은 영적이며 종교적인 그의 취향을 고려할 때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긴 세월 허공을 헤매던 ‘내면아이’가 심리학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심리학이 제공하는 영양분을 먹고 자랐습니다.
심리학 역사 속에서 ‘경이로운 아이( wonder child)’, ‘참 자아(true self)’, ‘잊혀진 아이들(forgotten children)’, ‘과거의 ‘내면아이’(inner child of the past)’, ‘마술적 아이(magical child)’, ‘창조적 아이(creative child)’, ‘흥겹게 노는 아이(playful child)’, ‘영적인 아이(spiritual child)’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지만 다 같은 아이입니다.
이 다양하고 복잡한 아이들을 ‘내면아이’로 단순화하고 대중화한 사람이 존 브래드쇼입니다. 이런 복잡한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내면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유행이 아니며, 쉽게 사라질 상담 도구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심리학이 존재하는 한 ‘내면아이’는 사라지지 않고, 과학으로 인정받은 심리학 교실에서 배우는 ‘내면아이’도 자연스럽게 과학적인 것으로 인식될 것입니다. ‘내면아이’가 심리학이라는 나무의 열매인데, 심리학은 과학이지만 ‘내면아이’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또 말씀드립니다. 심리학은 위험하고 ‘내면아이’는 더 위험합니다.
3. 모든 문제의 원인인 ‘내면아이’
앞에서 인용한 존 브래드쇼의 글을 다시 옮기는 이유는 ‘내면아이’ 이론의 핵심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곧 “나는 과거에 무시당하고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바로 사람들이 겪는 모든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아이를 잘 발견해서, 상처 난 부분을 회복시켜 주고 잘 돌보아 주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성인이 된 우리의 인생에 계속 악영향을 끼치면서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 것이다.”(상처, 31)
존 브래드쇼의 ‘믿음’에 의하면 상처받은 ‘내면아이’는 인간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입니다. 그의 책 31-58 쪽에 수록된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일으키는 문제를 대략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상호 의존증(정체성 상실), 공격적 행동(전쟁, 성범죄), 자기애성 성격장애(실망과 좌절), 신뢰감 장애(너무 믿거나 안 믿거나), 표출된 행동(폭력, 반항), 내면적 행동(자기 학대, 질병), 마술적 믿음(미성숙), 친밀감 장애(버려질까 두려움), 무질서한 행동(반항적, 충동적), 중독적이고 강박적인 행동(술, 마약, 도박, 섹스, 분노, 기쁨), 사고의 왜곡(전부 아니면 전무), 공허감(우울감, 무관심) 등.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문제가 있을까요?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내면아이’가 받은 상처입니다. 심지어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안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조용하고, 착하고 또 오랫동안 고통을 인내해 온 사람들로 주위 사람들에게 비쳐지곤 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 상처받은 아이가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폭력과 잔인함에 대한 책임이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히틀러를 생각해 보자 .”(상처, 35)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원인도 ‘내면아이’가 받은 상처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책이 대학 강의실에서 심리학 수업 교과서로, ‘내면아이’ 상담 세미나의 교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면아이’ 이론이 왜 이런 주장을 할까요? 사람에게서 ‘죄’의 개념을 빼앗고 감추고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죄책감으로부터 해방하여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책감이야말로 심리학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자아 성취를 방해하는 인간 행복의 최대 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심리학과 ‘내면아이’ 이론에는 ‘죄’와 ‘죄책감’이 없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모든 문제의 원인이 죄라고 말합니다. 스스로는 죄를 해결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인간의 어떤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성경적 기독교입니다.
반면에 ‘내면아이’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상처받은 ‘내면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내면아이’의 상처만 잘 치유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결국 예수님 없이 인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내면아이’ 이론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내면아이’를 통해 현대인을 기만하는 방법입니다.
4. ‘네 책임이 아니다’라는 ‘내면아이’
그렇다면 ‘내면아이’는 왜 상처를 받았을까요? 상처만 받지 않았다면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브래드쇼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곧 몸을 가진 인간의 내면에는 그와 구분되는 인격적 존재인 ‘내면아이’가 있습니다. 경이롭고 낙천적이며 순진하고 쾌활한 ‘놀라운 아이(wonderful child)’입니다.
융이 인간의 원형으로 제시한 ‘신성한 아이(divine child)’이기도 합니다. 이 내면의 아이가 몸과 함께 성장하면 존 브래드쇼가 나열한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든지 ‘놀라운 아이’가 상처를 받으면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되고, 성장을 멈추며, 앞에서 언급한 문제들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상처를 받지 않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환경, 모든 관계가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일단 태어나면서 고통을 느끼는 것부터 상처입니다. 배고픈 것도, 기저귀가 젖는 것도 상처입니다.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것, 혼나는 것, 잠시라도 혼자 있게 되는 것, 서운한 말을 듣는 것은 심각한 상처입니다.
자존심을 훼손하고 ‘나 됨’을 깨트리는 폭력입니다. 한마디로 무조건 사랑받지 못하고, 충족되지 않고, 이해받지 못하는 모든 것이 상처입니다. 이러니 ‘놀라운 아이’가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되지 않을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이런 상처를 찾아서 치유해야 한다는 것이 ‘내면아이’ 이론입니다.
누구로부터 가장 많은 상처를 받을까요? 당연히 부모입니다. 유아 시절에 받는 대부분 상처는 부모가 주는 것들이니까요. ‘내면아이’가 말하는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자식을 낳고 키울 수 있는 부모는 없습니다. 따라서 ‘내면아이’ 이론에서 모든 부모는 자녀의 ‘내면아이’에게 상처를 입히는 가해자가 됩니다.
그렇게 상처를 주는 가정을 브래드쇼는 ‘역기능 가정’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이 ‘내면아이’ 상담의 첫 단계가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를 찾아내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놀라운 아이’였던 ‘내면아이’가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되었고, 그 상처로 인해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 ‘내면아이’ 이론입니다.
따라서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아니라 부모에게 있습니다. ‘내면아이’ 이론에 따르면 세상 모든 사람은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피해자’가 되며 자신의 책임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것도 내 책임이 아니며 나는 피해자일 뿐이라는 ‘내면아이’ 이론, 사실 여부를 떠나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소심함과 우유부단함,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 게으름은 내 책임이 아닙니다. 참지 못하는 성격이나 폭력적인 행동도 내 책임이 아닙니다. 심지어 술이나 마약 중독도 내 책임이 아니라 상처받은 ‘내면아이’ 때문입니다.
책임은 ‘놀라운 아이’였던 내면의 아이에게 상처를 입힌 부모와 주변 환경에 있고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니 회개할 필요도, 돌이킬 필요도, 도와달라고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면아이’의 상처를 찾아서 치유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내면아이’가 매력적인 동시에 위험한 이유입니다.
5. 자기 사랑의 극치인 ‘내면아이’
자, 모든 문제의 원인이 상처받은 ‘내면아이’ 때문이라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면아이’를 만나야 하고, 온갖 정성을 다해 상처를 치유해 주는 일이 남았습니다. 그러면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다시 원형인 ‘신성한 아이’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아이를 어디서 어떻게 만나겠습니까? 더러는 자기 혼자의 노력으로 ‘내면아이’를 만났다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상담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내면아이’ 상담에서 상담사가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 ‘내면아이’의 존재를 믿게 하고 만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일단 ‘내면아이’를 만나면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존 브래드쇼의 책에 적힌 대로 하면 되므로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존 브래드쇼에 의하면 ‘내면아이’의 상처 치료는 유아기–영아기–아동기–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순서대로 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유아기에 받은 상처를 먼저 찾아내야 하는데 그 무의식의 영역에 있는 상처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상담사의 역할입니다. 이 과정에서 상담사에 의한 기억 조작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최면술도 이용합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든 ‘내면아이’를 만나고 나면 존재를 믿고 집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만난 사람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평생에 그렇게 많이 울어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어린 시절에 상처받은 분신(分身)과 같은 존재를 만났으니 왜 안 그렇겠습니까?
몇 시간 우는 것은 기본이고 밤새도록, 혹은 며칠씩 울기도 합니다. 그렇게 강렬하게 만난 ‘내면아이’가 그 사람의 정신과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내면아이’를 만났으면 그때부터 치유에 모든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존 브래드쇼의 책에 기록된 돌보고 성장시키는 법은 이렇습니다.
1) 매일 한 시간씩 묵상하라
2) 규칙적으로 대화를 나누라
3) 편지를 쓰라
4) 함께 기도하라
5) 격려하는 글을 써서 매일 읽어주라
6) 맛있는 음식과 예쁜 옷을 사주라
7) 함께 영화관에 가라
심리학의 위험 중 세 번째로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십니까? 자기 숭배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제 위에 열거한 ‘내면아이’ 돌보는 방법을 다시 보십시오. 자기 속에 있는 ‘내면아이’를 한 시간씩 묵상하고, 규칙적으로 대화하고, 편지를 쓰고, 함께 기도하는 것보다 더 자기를 숭배할 수 있을까요? 요가에 도통한 요기(yogi)들이 거울에 비친 신을 보며 절하고 예배하는 것만 자기 숭배가 아닙니다.
이처럼 어떤 부담감이나 죄의식도 없이 자기를 마음껏 사랑하고 숭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내면아이’ 이론입니다. 그 허접하고 말도 안 되는 이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자기 사랑에 미치고 자기 숭배에 빠지고 싶은 현대인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무한대로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경고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딤후 3:2)하는 말세의 징조가 아닐까요?
6. ‘자기완성’을 약속하는 ‘내면아이’
‘신성한(divine) 아이’가 부모를 비롯한 주변 환경으로 상처를 받으면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됩니다.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찾아서 모든 상처를 다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심리학에는 ‘무의식’의 영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무의식이 집단 무의식으로까지 확대된 이상 인간의 상처를 모두 찾아내서 치유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며, 당연히 필요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내면아이’ 이론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치유가 끝나면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존 브래드쇼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발견하고, 그 아이를 잘 보살피고 양육하게 되면, 그들 안에 감추어져 있는 훌륭한 선천적인 아이(wonderful natural child)의 창조적인 힘이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내면의 통합이 이루어지면, ‘내면아이’는 그 사람의 새로운 재생과 원기가 되는 자원이 될 것이다.”(상처, 14)
상처가 다 치유된 ‘내면아이’는 창조적인 힘을 가진 ‘훌륭한 선천적인 아이’가 되고, 그 아이와 자신의 통합이 이루어질 때(合一) 창조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면아이’ 이론의 종착점입니다. 이 이론이 맞다 하더라도 상처를 모두 찾아서 치유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그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종착점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 주장은 뉴에이지의 핵심 사상이기도 합니다. 1875년, 심리학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뉴에이지는 인간의 내적 능력을 개발시켜 우주의 차원에 도달하는 것을 구원으로 정의한 운동입니다. 이 운동의 핵심은 진리 추구가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무한한 잠재력과 신적 능력을 개발시켜 자기 무지에서 해방되고 치유 받는 것입니다.
이런 뉴에이지가 말하는 ‘인간의 내적 능력’과 ‘무한한 잠재력과 신적 능력’은 ‘내면아이’ 이론의 ‘신성한 아이(divine)’와 상처가 치유된 ‘훌륭한 선천적 아이(wonderful natural child)’와 같습니다. 폴 비츠라는 그리스도인 심리학자가 쓴 [신이 된 심리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9장 전체를 심리학과 뉴에이지의 관계를 밝히는데 할애했습니다.
심리학에 문외한인 제 눈에도 심리학과 뉴에이지는 쌍둥이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둘이 함께 약속하는 것이 자기 안의 신성한 능력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 능력으로 자기완성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없어도 예수님이 안 계셔도 됩니다. 내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성한 불꽃을 찾아서 불을 붙이면 가능합니다. 이런 심리학, 이런 ‘내면아이’, 이런 뉴에이지, 얼마나 위험합니까?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