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호반 가에 있는 김유정문인비와 문암(門岩 : 예전에 춘천으로 들어올 때에 문 역활을 했었던 바위)
그런 슬픔이 아니라는 것을
섣달 그믐날, 종(鐘)소리 같은 것으로 한해의 슬픔을 씻을 수가 있다면, 묵은 달력을 찢는 것으로 저 퇴색한 벽(壁)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 망년회(忘年會)의 한잔 술로 잊을 수가 있다면,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싼 포장지 같은 것으로 모든 상흔(傷痕)을 포장할 수가 있다면, 코를 풀듯이 답답한 밀어(密語)들을 풀 수 있다면, 화분(花盆)갈이를 하듯이 의식(意識)을 바꿀 수가 있다면, 연을 날리는 아이들처럼 한숨으로 납덩이 같은 생활을 치켜올릴 수 있다면, 낡은 신발짝을 버리듯이 모든 기억(記憶)을 버릴 수 있다면 ……
춘향(春香)이처럼 형장(刑場)에서도 십장가(十杖歌)를 부를 수 있다면, 김유신(金庾信)처럼 천관녀(千官女)에게로 가던 작기 자기 애마(愛馬)의 목을 단칼에 벨 수 있다면, 성삼문(成三問)처럼 독야청청(獨也靑靑)하거나 화젓가락의 당근질 속에서도 호통칠 수 있다면, 고난(苦難)의 이야기도 참고 듣기만 하면 콩쥐팥쥐처럼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된다면, 혹은 흥부의 박에서 기적의 보석(寶石)이 쏟아져 나온다면, 홍길동(洪吉童)처럼 둔갑술로 자기 몸을 없앨 수 있다면 …….
없앨 수 있다면 부끄러움과 비탄과 파리한 제 자신의 몸뚱아리를 없앨 수 있다면, 그래서 우화등선(羽化登仙)한다면, 그래서 대나무밭에 달이 뜬다면, 그래서 무릉도원이라면,
붓을 꺾어버리고 글을 쓰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시인(詩人)은 밤을 지키며 찬 마루방에서 떨지 말라. 햇솜을 둔 이불 속으로 들어가거라.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책을 덮고, 썰매를 타거라. 광대(廣大)처럼 줄이나 타거라. 혹은 저녁놀이 떨어지는 그 시각에 중학교 학생처럼 하모니카를 불거라.
그런데도 당신이 아직 당신의 언어(言語)를 버릴 수 없어 흰 종이 위에서 시계 소리를 듣고 있다면 알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글을 쓰게 하는 그 슬픔은 제야(除夜)의 종(鐘)소리 같은 것으로 말끔히 씻어버릴 수 있는 그런 슬픔이 아니라는 것을……
글쓴이 :이어령
출처 : 『문학사상』 1972. 12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 1954~ )
1981 중앙일보신춘문예 시부문 <사평역에서>로 등단
《사평역에서》(1983), 《전장포 아리랑》, 《한국의 연인들》(1986), 《서울 세노야》(1990), 《참 맑은 물살》(1995)
< 눈 내리는 저녁 >
장 석
바람에 날리는
휘파람으로 시작하더니
어느덧 백 개의 관현악단이 연주하고
만 명이 함께 부르는 교성곡처럼
보이지도 않는 손의 지휘로
진심을 다해 부르는 노래처럼
눈이 내리네
저물어 가던 도시는
다시 밝아지네
눈이 아주 느리게도 내리네
눈 내리는 소리보다도 더 늦게
침묵보다도 커다랗게
그대는 이 안에 있는가
그대 생각은 눈이 퍼붓는
길거리의 한 가운데에 있네
눈을 맞고 있네
눈에 갇히지 말고
눈에 덮이지 말고
눈속에 묻히지 말고
그대는
무너져 버린 기억을 다시 빚기를
죽어버린 사랑을 다시 일으키길
눈을 뭉쳐 빈 가슴을 다시 채우길
내리는 눈의 한 송이는
다음 세계가 들어 있는 씨앗
어리디 어린 신의 고치
진심을 다해
밤을 새워 내리는 이 눈 속에서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기를
이 눈 내리는 밤에는
한 개의 별도 죽지 않기르.
장석(1957~ ), 1980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분 <풍경의 꿈>으로 당선.
《사랑은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니》2020, 《우리 별의 봄》2020, 《해변에 엎드려있는 아이에게》2021,
《그을린 고백》2023
< 별 키우기>
문정희
나만의/ 별 하나를 키우고 싶다
밤마다 홀로 기대고
울 수 있는 별
내 가슴 속
가장 깊은 벼랑에 매달아두고 싶다
사시사철
눈부시게 파득이게 하고 싶다
울지마라
바람부는 날도
별이 떠 있으면
슬픔도 향기롭다
문정희(1947~)
1969년 월간문학 시 '불면', '하늘' 당선
『꿈꾸는 눈썹』 1990, 『제 몸속의 새를 꺼내주세요』 1990,『어린 사랑에게』 1991,『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1992, 『구운몽』 둥지 1994, 『남자를 위하여』 1996, 『오라, 거짓 사랑아』 2001,『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2004,
이 외에도 다수의 시집 발간
2023년 12월 21일 목요일, 16:00 시에 유정독서 모임, 커먼즈 필드에서 진행됩니다. 이번 모임은 2023년의 대미를 장식하는 모임입니다. 지난 한해 동안 우리가 꿈꾸고 계획했었던 것, 이제 섣달 그믐을 앞두고 어디까지 이루어왔나를 돌아보도록 합시다.
이번 유정독서 모임에서 대미를 장식할 김유정 소설작품은 <솥>입니다.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만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