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의 <바보 사냥>
1. <하녀>, <화녀>, <충녀> 등 일련의 ‘~녀’ 시리즈로 한국 영화에서 독보적인 개성을 보여주었던 김기영 감독은 1984년 <바보 사냥>을 발표한다. 이 영화도 80년대의 특징적인 ‘로드무비’적 성격을 통해 감독의 시선을 반영하고 있다. 감독은 영화의 진행 속에서 당시 사회적, 윤리적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를 제기한다. ‘인구증가, 환경파괴, 안락사, 폐광문제’ 등 우리 사회가 직면해야 했던 미래의 고민을 적극적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방식은 조금은 엉뚱하고 무계획적이며 지극히 단순하다.
2. 모든 음식이 오염되었다며 먹기를 거부하는 A와 자살을 꿈꾸는 B는 몰래 정신병원을 탈출한다. A가 항상 말했던 그들만의 낙원인 토끼섬을 가기 위해서였다. 남해안에 있다는 작은 무인도에 벌과 토끼를 키우고 문명과 인간의 오염에서 탈출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그 곳에 가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다. 그들이 했던 엉뚱하면서 일상적인 일은 어쩌면 현실과 이상의 끝없는 괴리를 상징하는 듯했다. 포장마차에서 병아리를 참새라고 속이고 팔기도 했으며, 가짜 약장수를 따라다니며 차력쇼를 벌이기도 했고, 결국 탄광에서 일하게 된다.
3. 탄광에서 그들을 따뜻하게 도와주었던 탄광주임의 사고사 이후 그들의 여정은 다시금 시작된다. 탄광주임의 딸 C가 그들의 여정에 합류한다. C는 B에 대하여 호감을 보이며 섬에서의 행복을 꿈꾸게 한다. 결국 해안가 식당에서 숙박하면서 배를 구하고 그들은 섬으로 떠날 준비를 갖춘다. 이 과정은 조금은 어수선하고 엉뚱하다. A의 일방적인 계획에 불만을 가진 B, C는 몰래 돈을 가지고 도망하려 했으나, A에 발각되어 돈을 빼앗긴다. A는 섬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준비를 마무리한다. 섬으로 떠나기 전날 B는 배를 고치다 부상 때문에 치료를 받고, 혼자 있는 A앞에 C가 나체로 등장하며 유혹한다. 섬을 향한 계획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토끼섬’에 대한 계획을 입안하고 실행하던 A는 C와 함께 계획을 포기하고 사라진 것이다.
4. 어쩌면 영화의 진정한 메시지는 그들의 탈출 이후에 등장한다. 사라진 A, C 때문에 낙심하던 B는 과거의 무력하고 추종적인 형태에서 벗어난다. 아무도 없지만 그는 혼자만이라도 ‘토끼섬’의 낙원을 꾸미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진정한 자아의 발견이자 자신감의 회복이었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았면 살아갈 수 없었던 존재가 진정한 주체적인 존재로 변환한 것이다. ‘자아’의 발견, 1980년대를 휩쓴 중요한 윤리적 질문이자 화두였다. B의 계획에 식당노부부도 합류한다. 그들의 세계가 시작된 것이다.
5. 영화의 진행은 컬트적 분위기로 일종의 헛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경우가 많다.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대사와 동작 그리고 상황전개는 영화 속에 말해지는 무거운 주제와는 끝없이 상충한다. 사람들은 끝없이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문제를 제기하지만 그것은 진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상투적인 방식으로 다른 누군가의 의견을 반복할 뿐이다. B가 A의 ‘토끼섬’ 계획에 합류한 것은 우리들이 지닌 수동성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자각은 ‘의존’에서 벗어날 때 시작된다. A, C가 사라지자 그때서야 B는 자신의 존재와 의미를 깨닫는다. 또한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갖게된다. 비록 불안하고 두려운 출발이지만 그는 섬으로 떠난다. 소설 <데미안>에서 멀기 날기 위해서는 “알을 깨뜨려야 한다”라는 말처럼 자신의 진정한 깨달음이 바탕되어야만 모든 것을 시작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결 또한 개인의 인식적 변화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첫댓글 80년대의 대학생활을 보냈지만, 전혀 공감하지 못한 문화적 이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