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보통 강화도령이라 부르는 이는 철종(哲宗)을 말하는데 그는 바로 신유교난 때 안동 김 씨 일파에 의한 박해에 희생되었던 정조의 서제(庶弟) 은언군(恩彦君)과 부인 송 마리아의 손자이다. 헌종이 승하하면서 당시 궁궐의 큰 어른이신 순조의 부인 순원왕후(純元王后)에 의하여 옹립된 것이다. 철종 등극 후 3년 동안 순원왕후가 정사를 맡아보며 1851년 9월 25일에 그의 친족 김 문근(金汶根. 1801 -1863)의 딸을 철종의 왕비로 들인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박해를 가했던 풍양조 씨 일파는 헌종의 재위시절 후반기에 몰락의 길을 밟고 있었다. 기해박해 당시 세 개의 대신직을 독차지한 우의정 이 지연은 박해 도중인 1839년 10월에 함경도 명천으로 유배되어 죽었고 박해를 일으킨 장본인 조 만영은 1846년 두 눈 시력을 잃고 신음하다 병오교난 때인 1846년 죽었다. 또한 이 지연을 대신하여 우의정이 되었다가 현종 말년 영의정이 된 조 인영도 철종이 즉위한 바로 그해 12월 6일 연회석상에서 독약을 마시고 죽었으며 많은 천주교 신자를 처형 한 형조판서 조 병헌도 그해 7월 전라도 나주 목지도로 귀양가 다음날 죽는다.
3년 동안 수렴청정으로 안동 김씨들의 세도를 부활시킨 순원왕후는 1851년 9월에 김 문근의 딸을 왕비로 들여 앉힌 뒤 12월 28일에 세도권을 김 문근에게 넘겨주고 정계에서 물러섰다. 그는 1852년 6월 4일까지 살아 있으면서 은연중 천주교를 돕는 일에 앞장선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세도를 잡은 김문근은 1852년 1월 13일에 금위대장(禁衛大將)이 되고 각종 요직을 독점하게 된다. 이후 철종이 1863년 12월 8일 승하할 때까지 12년 동안 국사를 처리하여 그가 재직하는 동안 천주교 박해가 거의 없었다.
순원왕후는 철종을 왕위에 세운 후 다음달 7월 12일 신유교난 때 사형받은 철종의 조부모 은언군 내외 죄를 씻어주고 1856년 4월 6일에는 이 신규(李身珪)의 청원에 따라 교회를 창설한 이 승훈의 죄도 면해 주었다. 다시 1862년 7월 18일 기해교난 때에 앵베르 주교의 소재를 고발한 배교자 김 순성이 왕족 이 하전을 임금으로 삼으려는 음모를 꾸며다면 26일 대역 무도죄로 그 일당 모두와 함께 참형에 처하였다. 이와 같이 철종이 왕권을 잡고 있을 때 천주교에 대하여 위정자들이 관대했던 이유는 철종의 할아버지가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과 철종 즉위 후 재위기간 내내 서양 여러 나라 선박들이 15회 걸쳐 조선 해안에 나타나 큰 위협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러시아, 영국, 미국이 많이 출몰하였었다.
철종 즉의 후 조선천주교는 괄목할 만큼 발전하게 된다.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조선입국을 맞아들이고 이듬해 순교하였으나 다행스럽게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화를 면하였다. 그것은 박해에 중심에 섰던 조 만영이 급서 한 이유 때문인 것 같다. 1848년에는 새 신자 946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다음 해에도 770명의 영세자를 배출하게 되면서 많은 성직자들이 입국하게 되어 복음전파에 열기를 더해 가기 시작하였다. 김 대건 신부의 뒤를 이어서 입국하려던 메스트로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외방전교회가 홍콩으로 옮겨 간 홍콩으로 1847년 1월에 가서 8월에 프랑스군함을 타고 고군산 신치도까지 왔으나 입국하지 못하고 상해로 돌아갔다. 이들은 다시 중국배를 타고 1848년 백령도까지 왔으나 영접하는 조선교우를 만나지 못해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상해로 돌아 간 최 양업 부제는 남경 주교 마레스카(Maresca) 주례사제에게 1849년 4월 19일 신품성사를 받은 후. 5월에 요동으로 건너 가 만주교구 부주교 베르뇌(Berneux.張敬一) 신부 아래에서 전교에 매진하며 입국하기를 기다렸다.
당시 부제였던 조선인 신부 최 양업 토마스는 고국 입국을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지만 실패를 거듭하면서 침체기를 겪으며 고난에 빠질 적 마다 상해 예수회 본원에 머물며 기도와 묵상으로 용기를 얻으며 이겨내었다. 특히 예수회 본원에 설치된 천주당 장서류라는 도서관에 자주 들러 책을 읽고 이곳저곳에 보낼 편지를 작성하기도 하였다고 추측이 된다.
메스트르 신부도 11월에 요동으로 건너와 함께 조선입국을 원하였으나 최 양업 신부만 12월 감시자가 없는 틈을 타 의주 성문 지나 한양에 도착하게 되었다. 조국을 등지고 마카오로 간지 13년만에 귀국이었다. 감회가 깊었을 최 양업 신부는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전교에 나섰다. 6개월 동안 5천 리를 걸어 다니며 37,115 명의 교우를 만나 성사를 주고 730명에게 세례를 준다. 그러한 결과가 1850년 들어 신자수는 1만 1천 명이나 되었다. 다블뤼 신부와 최 양업신부는 다 섯명의 신학생을 모집하여 라틴어, 한문을 가르쳤다. 이 신학생들을 위하여 1856년 충청도 진천 배티재 아래에 신학교를 세우게 된다. 이럴 즈음 만주에서 조선입국을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던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입국을 함께 할 동지를 구하게 된다. 같은 목적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장수(Jansou. 張) 신부가 조선입국을 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두 신부는 1852년 1월, 중국배를 타고 해안으로 나왔으나 영접인 조선 교우를 만나지 못해 실패하였다. 마침 프랑스 배가 파선되었다고 달려온 조선 교우와 함께 메스트르 신부는 상해로 돌아가고 장수 신부는 홍콩으로 옮겨갔다. 이후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교우와 함께 중국배를 타고 8월 중순에 상해를 떠나 고군산열도를 거쳐 29일에 전라도 지방에 상륙하여 한양으로 들어온다.
이 무렵 페레올 주교는 과로로 병을 얻어 오랜 시간 누워 지내다 메스트르 신부를 맞이한 후 1853년 2월 3일 한양에서 45세 일기로 선종한다.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입국하려고 하였던 장수 신부도 1854년 4월 중국배를 타고 입국 길을 찾다 3명의 신학생을 패낭(Penan) 섬으로 보내기 위하여 실어 나르는 배를 만나 교우들의 안내로 한양으로 들어왔으나 며칠 후 중병을 얻어 6월 18일 29세 나이로 선종하게 된다. 이때 페레올 신부는 조용한 곳에 학당을 만들어 최 양업 신부에게 6명의 신학생을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그곳은 바로 배티 산기슭이었다. 이 학당은 곧 제천 배론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러한 일이 있을 무렵 만주교구의 부주교이던 베르뇌 張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뒤를 이어 1854년 12월에 조선교구 제4대 주교로 임명된다. 베르뇌 주교는 신병을 치료한 뒤 다음 해 9월 상해로 가 입국 준비를 하다 조선으로 입국하기 위하여 대기하던 외방전교회 소속 프티니콜라(Pettitnicolas. 朴) 신부와 푸르티(Pourthie. 申) 신부를 만나게 된다. 세 성직자는 중국 배를 타고 1856년 1월 상해를 출발하였으나 풍랑으로 두 달 동안 산둥반도 해역에서 보내다 청나라 어부 안내로 황해도 해역에 이르러 조선 교우를 만나 배를 갈아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 3월 26일 한양에 도착하게 된다
이로서 조선교회는 6명의 성직자를 모시고 운영하게 되었다. 베르뇌 주교는 함께 입국한 푸르티 산부를 배론으로 가서 10여 명의 신학생을 가르치도록 하고 1857년 3월 다블뤼 신부를 부주교로 임명하고 한양에서 첫번째 성직자 회의를 열어 교회발전에 대하여 숙의한다. 이 회의를 개최한 후 각자 지방을 다니며 전교에 힘썼다. 3월 31일에는 1명의 신부가 한양으로 들어오니 바로 그 신부는 상해에서 조선 교우를 만나 입국한 페롱(Feron. 權) 신부였다. 12월 들어 李 신부는 충청도 덕산(德山)에서 병으로 선종하고, 1861년 4월 7일에는 4명의 신부가 조선교구에 충원되어 한양으로 들어오는데 이 신부들은 중국 배를 타고 중국 지부를(芝罘) 떠난 후 백령도에서 조선의 배로 갈아타고 한강을 통하여 한양으로 들어온 랑드로(Landre.洪) 신부, 조안노(Joanno,吳) 신부, 리델(Ridel.李) 신부, 칼레(Calais.姜) 신부 였다. 그러나 1861년 6월에는 경상도 지역에서 사목을 이어가던 조선인 신부 최 양업 토마스 신부는 문경 초입 주막거리를 들어서다 전염병에 걸려 쓰러져 선종에 이른다. 걸어서 수천리를 오가며 사목을 하였던 신부님에게 교우들은 땀의 순교자라 부르며 슬퍼하였다. 제천 배론에 안장되어 지금도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다. 그러나 이어서 또 몇 년 후 1863년 6월 31일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로서 패낭으로 유학하다가 귀국하는 조선 유학생 2명을 만나 백령도 부근으로 쉽게 입국하게 되어 성직자는 충원된다.
이렇게 많은 수의 성직자들이 조선교구에 충원되므로서 황해도를 이어 평안도까지 천주교는 퍼져 1863년에 신자수는 2만여 명으로 증가된다. 이때부터 프랑스에서 많은 자금이 들어와 각종 교회사업을 벌이게 된다. 1858년부터 교회서적을 목판본으로 간행하기 사작하였고 교회서적은 철종이 승하는 1863년 말까지 8종류에 13권을 순수 국문으로 간행하게 되어 많은 일반인과 함께 지체 있는 사람들도 입교하게 되는데 철종의 장인 김 문근 친척도 입교하였으며 이 하응(李昰應, 훗날 興宣大院君) 집안에서도 유모 박 말다의 감화로 부인 민 씨도 교리를 배우고 있었으며 승지 남종삼도 (承旨 南鍾三) 세례를 받는다. 이때 천주교를 성교(聖敎)라 불렀다. 그리고 중요한 도와 읍에는 약방을 두어 병자들을 구제하고 43명의 고아를 구제하는 사업도 병행하였다. 천주교는 철종 말년들어 크게 확장되어 가는 것을 본 경주출신 최 재우는 유교, 불교, 도교의 좋은 즐거리만 뽑아 1860년부터 동학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최교주는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라는 주문을 지어 외우게 하여 제세주(濟世主) 말하고 천주교 서학을 물리치자 하였으나 그 역시 1863년 11월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