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魁峯公(大用) 遺詩 《괴봉공(대용) 유시》
휘 대용(大用․1530~1610)이며, 호는 괴봉(魁峯)이다. 부정(副正) 억문(億文)의 아들이다. 명종(明宗) 1555년(乙卯)에 진사에 합격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2세로 나이가 많은데다 와병 중임에도 동복현감 황진(黃進)의 호남모곡도유사(湖南募穀都有司)로 참여하여 의병과 모곡*에 힘썼다. 7년의 왜란 후 형조좌랑․통정대부․형조참의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고 임천에서 후학을 지도하며 생을 마쳤다.
* 募穀(모곡) : 군량미를 모으는 업무(게재자)
행원종중의 장형(長兄)인 그의 간절한 권고에 따라 상주영장공(尙州營將公) 대경(大經․1555~1623), 수사공(水使公) 대기(大器․1559~1598?), 그의 동생 광양현감공(光陽縣監公) 대택(大澤), 부장공(部將公) 대홍 (大洪․1564~1593), 괴봉공의 친동생인 휘 대방공(大方公)의 아들 장기현감공(長鬐縣監公) 순정(舜廷․1572~1620), 사월파의 휘 중준(重俊)의 증손 공달(公達), 공준(公濬) 등 형제와 조카 등을 의병으로 참전해서 혁혁한 공을 세우게 했다.
한편 공은 문정공(文靖公) 윤두수(尹斗壽)와는 생원시(生員試)의 동기생이다. 윤두수는 임진왜란 때 조선육군의 총사령관이라 할 권율(權慄) 도원수도 그들과 생원동기들이다. 아래의 수창 시는 임란이 발생하기 5년 전(1587)에 윤두수가 안찰사(按察使)로 나주목에 와 당시 전라도 도사로 있던 권율장군 등 출사를 하지 않거나 사직하고 고향에서 지내고 있는 동기들을 불러 모아 어울려 한 때를 즐기면서 지은 것이다.(지장록 p. 1136)
■ 錦城館放會宴酬唱(금성관방회연수창)
幾人靑眼錦城樓 다정한 벗 금성루에 몇이나 모였는고
乙卯年今三十秋 홍안의 을묘년(1555)이 배나 더 생각나네
事業但敎留竹帛 사업은 단지 사기에 남기 위함이요
長生不必問丹邱 장생은 반드시 단구에 묻지 않으리라
芹官勝契回棠旆 태학관의 좋은 약속 당패로 돌아오고
流水心己送玉舟 유수 같은 마음의 다짐 옥주로 보내리라
座上己無閒酬酢 좌상이 이미 한가하여 수작하리 없으니
更催詩令賞淸遊 다시 시령을 재촉하여 청유나 즐기리라
(宣祖 7년 1587년 7월)
■ 附魁峯公의 次韻(부괴봉공의 차운)
共擡靑眼撫夷樓 다정한 벗 무이루에 같이 모이니
倍憶紅顔乙卯秋 홍안의 을묘년이 배나 더 생각나네
一代風流長入夢 한 시대의 풍류는 길이 꿈속에 들어가니
當年二百半成邱 당년 200인이 반쯤은 무덤으로 갔네
錦城雨後靑宜笏 금성산 비 개이니 푸르러 홀과 같고
靈水秋前綠可舟 신령스런 물은 가을을 푸르러 배 띄울만하구나
珍重此筵須勿負 진중한 이 자리 저버리지 말라
明霄赤壁月中遊 내일 밤 적벽의 월중에서 놀리라
乙卯人同元祐人 을묘년 사람들이 원우인과 같으니
淡交無處不爲神 담담하게 사귄 점 간 데마다 신성 않음이 없네
碧梧軒外千竿竹 벽오헌 밖 천간의 대나무는
尙記當年此錦茵 아마도 당년의 이 비단자리를 기억하리
■ 附雪月堂 金富侑의 次韻 (부설월당 김부유의 차운, 당시 동복현감)
七八賓朋百尺樓 벗 7․8명이 백척루에 모이니
淸風明月認新秋 청풍과 명월이 맑은 가을임을 알게 하네
且看遠近山千點 또한 원근의 산들은 천점처럼 보이니
不問興亡土一邱 흥망이 일구의 흙임을 묻지 않으리
豈獨錦城飛玉盞 어찌 금성에서만 옥잔을 날리리
須同赤壁汎蘭舟 적벽(화순)에서도 난주를 띄우리라
靑眸到此窮歡樂 청모가 여기와 환락을 다한 것은
方信人間有勝遊 바야흐로 인간이 승유있음을 믿음이네
蓮榜當年第一人 당년의 소과급제 제일인이니
至今詩句更精神 지금의 시구 다시 정신이 드네
要將滿酌酬佳會 잔 가득 채워 주고받아 가회되길 바라니
莫問樓中醉吐茵 누 중에 취해 자리에서 토할 것을 묻지 마소
■ 附錦湖 羅公士忱 次韻(부금호 나공사침 차운)
相公和氣便薰人 상공의 화기 사람을 따뜻하게 하네
飮復承歡足暢神 마시고 다시 환락을 이으니 정신 상쾌하네
三十年餘成此會 30년 지나서 이 모임을 가지니
各憐華髮照華茵 각각 흰머리 빛나게 비치니 슬프도다
※ 1587년(丁亥) 7월 어느 날 과거시험(1555 乙卯)에 합격한 괴봉공의 동기 중에는 제독(提督) 정인회(鄭仁會), 대사헌(大司憲) 장이길(張以吉), 전라도 도사(都事) 권율(權慄)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그러나 참석자 모두가 시 한 수씩을 남겼을 것이나 실전되어 싣지 못했다.
■ 戒從弟與姪子赴亂書 (계종제여질자부난서,지장록 p.1095)
「壬辰四月七日先生聞倭變移書曰臣子忠孝本無二致吾老且病不能討賊汝其替吾意以成吾志又曰賊勢漲熾乘與播越此正臣子捐身殉國之秋吾年己耄不能袵金君等宜替吾志殲滅賊奴迎奉大駕日夜企望而卽聞同福縣監黃進擧義云君等馳往同福合力討賊可也幸勿虛徐焉」
〈해설〉임진년(1592) 4월 7일에 선생이 왜변을 듣고 이서(移書)하기를 신자(臣者)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함은 본래 두 가지 이치가 없다.
나는 늙고 또 병들어 토적(討賊)하지 못하니 너희들은 내 뜻을 대신하여 이루어라. 또 말하기를 적세(賊勢)가 창치(漲熾)하여 임금의 수레가 피난길을 떠났으니 이는 바로 신자가 몸을 버려 순국할 때다.
내 나이 이미 62세라 갑옷을 입지 못하니 그대들은 마땅히 내 뜻을 대신하여 적노를 섬멸하고 대가를 받들기를 낮과 밤으로 바란다.
바로 동복현감 황진이 의병을 일으켰다고 들었으니 그대들은 동복으로 달려가 힘을 합쳐 도적을 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행여 천천히 하여 시간을 허비 말라.
※ 임진왜란 당시 인근지역인 보성의 박광전(朴光前)과 임계영(任啓英) 등이 주동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으나 괴봉공은 동생들에게 동복 현감 황진(黃進)의 진영에 참여하도록 당부하고 있다.
■ 宣祖大王 傳旨 (선조대왕 전지,지장록 p. 933)
魏大用養志林泉己注宿望當此紛擾尤箸義聲
〈해설〉위대용은 임천에서 뜻을 길러 이미 오래도록 품고 있던 소망을 쏟았다. 이에 주선할 때를 맞아 의성이 더욱 나타나도다.
(144-020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9일차에서는 '괴봉공(대용)의 유시'가 게재됩니다.
※ 주1) 임진왜란시 의병모집 활동 등에 괴봉공(대용)의 역할이 매우 큰 것으로 아룁니다. 후손으로서 큰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며 그 큰뜻을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선조님들의 큰 역할과 공헌에 비하여 역사적인 평가가 높지 않아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 주2) 읽는이의 편의를 위하여 게재자가 단락을 구분하고 일부 제목에 음을 달았습니다
(본문내용- 선조님들의 유시등 계속)/ 무곡
임진왜란이라는 큰 변고를 겪었지만, 그 와중에 위씨문중의 진면목이 제대로 나타난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고경명, 김천일 등의 함자를 많이 들어 왔지만, 위대용(괴봉) 할아버지 등 그 후손들의 활약이 정말 두드러진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무곡
무곡 위상환 !
부장공파의 1대인 대홍할아버지의 연세가 장흥위씨요람(1564년 탄생)과 다르게 표기(1569년 탄생)되어 있어 만 29세까지 사신것으로 수정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24세에 돌아가신것으로 되어 옛날이라해도 너무 빨리 요절한 것으로 보입니다.(행원문중 막내인데 너무 빨리 돌아가셔 후손으로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더구나
부장공파 세거지 운곡이 아닌 장흥에 들렀다가 그 곳에서 돌아가셔서 더더욱 말입니다. 이로인해 세거지 운곡동에는 할아버지 산소는 없고, 1대 할머니 산소만 있습니다.)/ 무곡
괴봉공의 씨족사적 위치를 ①정치가 충렬공, ③종교인 원감국사, ④학자 존재공에 이어 ④괴봉공을 포함해 Big4 인물로 꼽고 있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괴봉공의 주도로 씨족원들 수십 명이 임란의 주역으로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로인해 씨족이 조선사회 주도세력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견해입니다./ 무곡
내용의 위대기(大器․1559~1598?)장군 생졸년에 관한 내용은 몇년전에 백강 위성록 족보편찬연구위원이 자료조사하여 발표한 자료가 있습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특히 무과방목의 1555년생의 기록과 통영 세병관에 걸려있는 좌목중에 1611년(辛亥) 7월 제9대 이경준 삼도수군 통제사 재임 때 군관 참모(절충장군)로 좌목에 기록되어 있어서 생졸년 내용은 1555년 출생 1611년까지 생존의 흔적이 있어서 (1555~1611?)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https://jhwi.or.kr/forum/14978
/ 재치
괴봉공과 윤두수 임진왜란 때 조선육군의 총사령관이라 할 권율(權慄) 도원수도 그들과 생원동기들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1555년 사마시 합격자 200명(생원시 100명, 진사시 100명)중에서 권율은 없습니다. 또한 선조(宣祖) 15년(158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5위(25/35)로 대과에 합격한 권율의 당시 신분은 ‘幼學’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지 않고 바로 대과에 합격했음을 보여줍니다. 조선시대 대과(문과) 합격자들을 망라하고 있는 문과방목에는 1582년 대과 합격자중 조선시대 장흥 위씨 최초의 대과 합격자 청양현감공(21세 휘 천우)의 신상도 발견할 수 있는데 권율과 같은 페이지에 있습다. 선조(宣祖) 6년(157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19위(49/100)으로 합격한 청양현감공의 신분은 ‘생원(生員)’으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괴봉공과 권율의 사마시 합격 동기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권율의 아버지 권철은 영의정을 지냈고 권율의 사위 백사 이항복은 권율보다 2년 빠른 1580년에 대과에 합격했습니다. 권율이 합격한 1582년은 권율의 나이 46세 때였습니다
1587년(丁亥) 7월 어느 날 과거시험(1555 乙卯)에 합격한 괴봉공의 동기 중에는 제독(提督) 정인회(鄭仁會), 대사헌(大司憲) 장이길(張以吉), 전라도 도사(都事) 권율(權慄)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제독 정인회는 1555년 사마시(생원 진사시)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대사헌 장이길은 대사헌이 아닌 사간원의 대사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권율은 위의 댓글과 같이 사마시에 합격하지 않고 바로 1582년 대과(문과)에 합격했습니다./ 재치
독자제위 및 종친분들의 깊은 관심속에 연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혈족의 문예 연재 부분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있는것 같습니다. 매우 긍정적인 신호로 보입니다. 때가 되면
당연히 검토해봐야 되겠죠.
살펴보건데, 지금도 공무원 최종 합격자대장은 영구문서로 분류하여 국기록원에서 보존하고 있습니다만, 예전에도 나름 잘 관리가 되었던것 같습니다. 전쟁등을 수없이 겪은 상황을 고려하면 참 신기할 정도입니다. 더구나 합격자 답안지를 합격자에게 배부한 적도 있는것을 보면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참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지금은 답안지는 절대 공개하지 않고 일정한 기간동안 본인에게열람만 해줌)/ 무곡
아시다시피 6.25때 법원의 판결문과 형사사건부등의 자료가 분실되거나 화재등으로 소실되는 바람에 일제시대 독립운동한 분들도 자료증빙에 큰 어려움을 겪거나 최악의 경우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기록이라고 다 만능일수도 없습니다.
짜가도 있고요 편안한 저녁시간되시기 바랍니다/ 무곡
고려와 조선의 과거 합격자 명단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물론 자료가 남아있어야 가능합니다...누구나 접근과 검색이 가능합니다... 족보에 과거시험 합격하신 선조가 계시면 검색해 보세요...
국조방목(과거합격자)검색
(http://dh.aks.ac.kr/~sonamu5/wiki/index.php/)/ 재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