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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씨족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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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본)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원산 위정철 ㅁ 魁峯公(大用) 遺詩 《괴봉공(대용) 유시》
야운처사 위이환 추천 0 조회 31 23.05.13 23:22 댓글 1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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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3.05.13 23:23

    첫댓글 19일차에서는 '괴봉공(대용)의 유시'가 게재됩니다.

    ※ 주1) 임진왜란시 의병모집 활동 등에 괴봉공(대용)의 역할이 매우 큰 것으로 아룁니다. 후손으로서 큰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며 그 큰뜻을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선조님들의 큰 역할과 공헌에 비하여 역사적인 평가가 높지 않아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 주2) 읽는이의 편의를 위하여 게재자가 단락을 구분하고 일부 제목에 음을 달았습니다


    (본문내용- 선조님들의 유시등 계속)/ 무곡

  • 작성자 23.05.13 23:24

    임진왜란이라는 큰 변고를 겪었지만, 그 와중에 위씨문중의 진면목이 제대로 나타난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고경명, 김천일 등의 함자를 많이 들어 왔지만, 위대용(괴봉) 할아버지 등 그 후손들의 활약이 정말 두드러진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무곡

  • 작성자 23.05.13 23:25

    무곡 위상환 !
    부장공파의 1대인 대홍할아버지의 연세가 장흥위씨요람(1564년 탄생)과 다르게 표기(1569년 탄생)되어 있어 만 29세까지 사신것으로 수정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24세에 돌아가신것으로 되어 옛날이라해도 너무 빨리 요절한 것으로 보입니다.(행원문중 막내인데 너무 빨리 돌아가셔 후손으로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더구나
    부장공파 세거지 운곡이 아닌 장흥에 들렀다가 그 곳에서 돌아가셔서 더더욱 말입니다. 이로인해 세거지 운곡동에는 할아버지 산소는 없고, 1대 할머니 산소만 있습니다.)/ 무곡

  • 작성자 23.05.13 23:25

    괴봉공의 씨족사적 위치를 ①정치가 충렬공, ③종교인 원감국사, ④학자 존재공에 이어 ④괴봉공을 포함해 Big4 인물로 꼽고 있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괴봉공의 주도로 씨족원들 수십 명이 임란의 주역으로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로인해 씨족이 조선사회 주도세력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견해입니다./ 무곡

  • 작성자 23.05.13 23:25

    내용의 위대기(大器․1559~1598?)장군 생졸년에 관한 내용은 몇년전에 백강 위성록 족보편찬연구위원이 자료조사하여 발표한 자료가 있습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특히 무과방목의 1555년생의 기록과 통영 세병관에 걸려있는 좌목중에 1611년(辛亥) 7월 제9대 이경준 삼도수군 통제사 재임 때 군관 참모(절충장군)로 좌목에 기록되어 있어서 생졸년 내용은 1555년 출생 1611년까지 생존의 흔적이 있어서 (1555~1611?)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https://jhwi.or.kr/forum/14978
    / 재치

  • 작성자 23.05.13 23:26

    괴봉공과 윤두수 임진왜란 때 조선육군의 총사령관이라 할 권율(權慄) 도원수도 그들과 생원동기들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1555년 사마시 합격자 200명(생원시 100명, 진사시 100명)중에서 권율은 없습니다. 또한 선조(宣祖) 15년(158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5위(25/35)로 대과에 합격한 권율의 당시 신분은 ‘幼學’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지 않고 바로 대과에 합격했음을 보여줍니다. 조선시대 대과(문과) 합격자들을 망라하고 있는 문과방목에는 1582년 대과 합격자중 조선시대 장흥 위씨 최초의 대과 합격자 청양현감공(21세 휘 천우)의 신상도 발견할 수 있는데 권율과 같은 페이지에 있습다. 선조(宣祖) 6년(157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19위(49/100)으로 합격한 청양현감공의 신분은 ‘생원(生員)’으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괴봉공과 권율의 사마시 합격 동기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권율의 아버지 권철은 영의정을 지냈고 권율의 사위 백사 이항복은 권율보다 2년 빠른 1580년에 대과에 합격했습니다. 권율이 합격한 1582년은 권율의 나이 46세 때였습니다

  • 작성자 23.05.13 23:26

    1587년(丁亥) 7월 어느 날 과거시험(1555 乙卯)에 합격한 괴봉공의 동기 중에는 제독(提督) 정인회(鄭仁會), 대사헌(大司憲) 장이길(張以吉), 전라도 도사(都事) 권율(權慄)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제독 정인회는 1555년 사마시(생원 진사시)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대사헌 장이길은 대사헌이 아닌 사간원의 대사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권율은 위의 댓글과 같이 사마시에 합격하지 않고 바로 1582년 대과(문과)에 합격했습니다./ 재치

  • 작성자 23.05.13 23:27

    독자제위 및 종친분들의 깊은 관심속에 연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혈족의 문예 연재 부분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있는것 같습니다. 매우 긍정적인 신호로 보입니다. 때가 되면
    당연히 검토해봐야 되겠죠.
    살펴보건데, 지금도 공무원 최종 합격자대장은 영구문서로 분류하여 국기록원에서 보존하고 있습니다만, 예전에도 나름 잘 관리가 되었던것 같습니다. 전쟁등을 수없이 겪은 상황을 고려하면 참 신기할 정도입니다. 더구나 합격자 답안지를 합격자에게 배부한 적도 있는것을 보면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참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지금은 답안지는 절대 공개하지 않고 일정한 기간동안 본인에게열람만 해줌)/ 무곡

  • 작성자 23.05.13 23:28

    아시다시피 6.25때 법원의 판결문과 형사사건부등의 자료가 분실되거나 화재등으로 소실되는 바람에 일제시대 독립운동한 분들도 자료증빙에 큰 어려움을 겪거나 최악의 경우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기록이라고 다 만능일수도 없습니다.
    짜가도 있고요 편안한 저녁시간되시기 바랍니다/ 무곡

  • 작성자 23.05.13 23:28

    고려와 조선의 과거 합격자 명단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물론 자료가 남아있어야 가능합니다...누구나 접근과 검색이 가능합니다... 족보에 과거시험 합격하신 선조가 계시면 검색해 보세요...

    국조방목(과거합격자)검색
    (http://dh.aks.ac.kr/~sonamu5/wiki/index.php/)/ 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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