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부寧海府에 새로 지은 소학小學의 기문
예주(禮州)의 소학은 장서기(掌書記) 이천년(李天年)이 지은 것이다. 이군이 부사(府使)를 보좌하는 관원이 되고 나서 제생(諸生)을 보고 말하기를 “본국 향교의 제도는 사당과 학교가 한집 안에 있으니 설만(褻慢)한 데에 가깝다. 여기에 또 동자들을 끌어들여 대성전(大成殿) 뜰에서 시끄럽게 떠들게 하니 무례한 정도가 더욱 심하다고 하겠다.”라고 하고는, 제생과 함께 부로(父老)와 상의하여 부의 동북쪽에 땅을 마련한 뒤에 농한기에 공사를 시작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완공하였다. 중앙에 전각을 지어 노사구(魯司寇)의 영정을 걸고, 좌우에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지어 동자들을 가르치는 장소로 삼았는데, 이렇게 해서 낭무(廊廡)와 담장이 갖추어진 가운데 규모가 크고 아름답게 단장되었다. 이에 제생 중에서 조금 나이가 든 자를 뽑아 동자들을 가르치게 하고는, 이군이 하루에 한 번씩 들러서 그 근만(勤慢)을 고과(考課)하며 권면하고 징계하였는데, 비록 엄동설한이나 장마철을 당해도 감히 그 일을 게을리 하는 경우가 없었다. 이 때문에 그 고을 백성의 아이들이 입에서 젖을 떼기만 하면 소학에 나와서 배우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이군이 표전(表箋)을 받들고 정해년(1347, 충목왕 3) 원단(元旦)을 축하하기 위해 서울에 왔는데, 교관에 결원이 생기자 임시로 성균 학유(成均學諭)에 보임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군이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에 온 영해의 제생을 길에서 만나 말하기를 “그대 부(府)의 소학이 규모는 일단 이루어졌으나, 옥우(屋宇)를 제때에 수리하지 않으면 쉽게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글을 좋아하는 자에게 부탁해서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게 함으로써 이루어진 그 공이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제생이 마침내 나를 찾아와서 기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본국의 문풍(文風)이 부진한 것이 오래되었는데, 이는 대개 공리를 급선무로 여기고 교화는 뒷전으로 미루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리하여 왕궁과 국도(國都)로부터 주현(州縣)에 이르기까지 교육 사업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폐기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는데, 이군이 여기에 제대로 뜻을 두었으니 먼저 힘써야 할 일을 알았다고 하겠다. 다만 한 가지 모를 것은 소학에서 어떤 글을 읽게 하고 어떤 일을 익히게 했는지 하는 그 규정의 내용이다. 만약 구두만 익히면 그만이지 쇄소(灑掃)ㆍ응대(應對)ㆍ진퇴(進退)의 예절을 따질 것이 뭐가 있느냐고 한다든가, 시문만 잘 배우면 그만이지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의 글을 배울 것이 뭐가 있느냐고 한다면, 이는 그저 촌스러운 시골 서당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니, 제생을 위해 내가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다. 제생은 노력해야 할 것이다. 기타 옥우의 흥폐(興廢)에 대해서는 응당 책임을 진 자가 있을 것이니, 여기에서는 논하지 않는다.
지정(至正) 7년(1347, 충목왕 3) 5월 16일에 적는다.
[주1] 노사구(魯司寇) : 노(魯)나라의 대사구(大司寇)를 지낸 공자를 가리킨다. 대사구는 법을 맡은 관원의 우두머리이다.
[주2] 만약 …… 한다면 : 주희(朱熹)의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에 “사람이 태어나 8세가 되면, 왕공 이하로부터 서인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에 입학시켰다. 그리고는 물 뿌리고 쓸며 응하고 답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과 예ㆍ악ㆍ사ㆍ어ㆍ서ㆍ수에 관한 글을 그들에게 가르쳤다.〔人生八歲 則自王公以下 至於庶人之子弟 皆入小學 而敎之以灑掃應對進退之節 禮樂射御書數之文〕”라는 말이 나온다.
寧海府新作小學記
禮州小學。掌書記李天年之所作也。李君旣佐府。見諸生曰。本國鄕校之制。廟學同宮。幾乎䙝矣。而又引諸童子。使之群聒於大成之庭。其爲䙝益甚矣。乃與諸生謀於父老。卜地於府之東北。役以農隙。不日而成。當中而殿。以垂魯司冦之像。左右爲廡。以爲擊蒙之所。迺廊迺垣。旣輪旣奐。於是擇諸生之稍長者爲之敎誨。君日一至。考其勤慢而勸懲之。雖祈寒暑雨。不敢或怠。由是凡民有子口可離乳者。莫不就學焉。居一年。君捧牋賀丁亥正旦。旣至京。敎官有闕。權補成均學諭。一日。塗遇寧海諸生之應擧赴京者曰。而府之小學。其䂓已成矣。但其屋宇。苟非時葺。則易至於頹壞。子宜託好文者。錄其始末而示諸後。使無墜成功。諸生遂來求余記。余惟本國文風之不振也久矣。盖以功利爲急務。敎化爲餘事。自王宮國都以及州縣。凡曰敎基。鮮不廢墜。李君乃能留意於斯。可謂知所先務矣。獨不知小學之䂓當讀何書。當隷何事。若曰習句讀斯可矣。何必問洒埽應對進退之節。工篇翰則足矣。何必學禮樂射御書數之文。此乃鄕風村學耳。予爲諸生耻之。諸生勉旃。其屋宇之廢興。當有任其責者。玆不論。至正七年五月旣望。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