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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 누군가 잠시 머물다가 간 자리
조민경
봄날에 시작된 나의 스무 살은 추운 겨울 잠시 누군가 머물다 간 자리와 닮았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전해지는 짧고도 강렬한 미량의 온기가 남아있어서다.
차디찬 바람이 코끝부터 서서히 스며든다.
‘쿵쾅쿵쾅!’
요동치는 심장의 박동은 움츠릴수록 더 격렬하다. 남몰래 여미는 옷자락 안으로 시끄럽던 소리는 그럴 듯 고요했다. 누군가 머물다 간 잠시라는 찰나의 여운. 내가 머무른 스무 살이 딱 그 느낌이었다.
“대학생이네! 입학 축하해!”
부모님께서 미소를 지으며 꽃다발을 한 아름 안겨주셨다. 서로의 미소 너머로 못다 한 이야기가 스친다. 노오란 주인공 프리지어, 빼곡히 자리를 채운 하얀 군중 안개꽃. 코를 갖다 대며 나는 깊은 들숨을 쉰다.
순식간에 코안으로 가득 퍼지는 봄 향기에 앞서 설렘이 문고리를 잡을 때면 어떤 각오가 필요하다. 마라톤을 출발할 때 하듯 나는 내 안에 가득 차버린 봄 향기를 깊은 한숨으로 내뱉는다.
달력을 보니 어느새 ‘전국 공익광고 아이디어 공모전’의 작품 제출 시한이 6일 전이다. ‘오늘은 누구한테 컴퓨터를 빌리지?’ 지난번 과제로 친구에게 빌렸던 노트북을 돌려준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새로운 친구를 찾아야 한다.
다행히 집 근처에 사는 친한 언니가 노트북을 빌려주기로 했다. 대신 대여는 어렵고 집에 와서 작업하고 가는 조건이었다. 집중이 필요한 디자인 작업이라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집을 나섰다. 빈손으로 가기가 뭐해 약간의 간식을 사 갔다. 언니와 언니의 어머니가 반겼다.
“이것 좀 먹으면서 하렴~”
“아니에요, 어머니! 가족들과 함께 드세요.”
“그래도 일하면서 먹어요!”
언니 방에서 작업을 준비할 때 내가 사 온 떡볶이와 아이스크림은 결국 우리의 간식으로 돌아왔다.
언니는 컴퓨터가 무려 두 대나 있었는데, 기꺼이 나에게 더 좋은 사양의 컴퓨터를 건넸다. 한참을 작업하며 시간을 보니 어느새 저녁 8시가 다 되어 갔다.
‘아, 너무 오래 있었네!’ 부랴부랴 디스켓에 파일을 저장하고 감사의 인사를 마치고 문밖을 나섰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금세 세상은 캄캄해졌지만, 달빛은 유독 환했다.
며칠 후 드디어 공모전에 출품할 최종 완성본을 꼭 출력하는 날이 왔다.
“야! 너 어느 과 몇 학번이야!”
“죄송합니다. 금방 작업 끝나요!”
“정도껏 해야지, 여기가 너 작업실이야? 오늘까지 벌써 며칠째니?”
“내일 공모전 제출일이에요! 정말 한 번만 봐주세요!”
디자인학과 출력실에는 디자인 프로그램이 깔린 컴퓨터가 무려 다섯 대가 있었다. 인쇄용으로 작업물을 넘기면 담당 조교님께서 출력물을 건네주는 식이었다. 4개의 디자인학과 학생들이 오는 곳으로 간단한 업무만 할 수 있었다.
“잠시만요, 저는 오래 걸리니 먼저 하세요!”
학생들이 학교 출력실에서 출력할 때면 잠시 파일을 내려놓고 뒤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자리가 생기면 이어 작업을 하는 식이었다. 과제가 있거나 공모전이 있는 날에는 줄곧 이렇게 출력실에서 눈치를 보며 작업했다.
나는 늘 화가 나 있는 조교님께 철판 면상을 준비하여 욕먹을 각오로 출력실을 작업실로 이용했다. 그래도 상을 탈 때나 과제를 훌륭히 해 갈 때면 욕먹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몇 시간을 서 있느라 다리가 퉁퉁 부어도 상관없었다. 물론 집에 컴퓨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디자인 프로그램을 켜기만 하면, 꺼지기 일쑤인 저사양 컴퓨터는 동생의 전용 축구 게임기가 되었다.
공모전 출품을 마친 얼마 후 나는 등록금의 무려 80%를 준다는 학생회장 선거에도 도전했다. 감사하게도 나는 득표율 90% 이상을 얻어 기존 과 대표를 꺾고 학생회장이 되었다. 나에게 ‘성공’이 줄줄이 찾아왔다.
“야, 너 지난번 전국 공모전은 어떻게 됐니?”
조교님이 물었다. 난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 그거 입상했어요!”
“정말? 오, 고생한 보람이 있네. 축하해! 그리고 너 시각디자인과 학생회장이라며? 교수님께 들었어!”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가끔 와서 여기서 작업해도 될까요?”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교님에게 부탁을 드렸다. 당황하던 조교님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시며 허락하셨다. 당시 컴퓨터 도난 등 각종 사고를 줄이기 위해 컴퓨터실은 수업이 없는 날에는 늘 굳게 닫아 놓았다. 이때부터 나를 포함한 학생들이 수업 후 컴퓨터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오후 5시까지 개방해 주셨다.
평범한 인문계 고교를 다녔던 학창 시절, 나는 미대를 반대하신 부모님을 속여 고등학교 3학년 때 예체능으로 시험을 준비했다. 세 남매 중 둘째로 미대를 꿈꾸던 나는 비싼 미술학원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늘 주변만 배회했다.
돌이켜 보면 자녀 세 명을 길러내셔야 했던 우리 집은 자녀 교육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을 것이다. 반에서 늘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언니와 반장은 물론 각종 경시대회 상을 탔던 동생은 언제나 우리 집의 자랑이었다.
반면 나는 유년 시절부터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럼에도 난 미술학원 근처는 못 가봤다. 이 역시 부모님의 ‘선택과 집중’ 탓이리라. 아, 생각해 보니 미술학원 근처에는 가봤다. 같은 동네에 살던 친척 동생은 미술학원이 가기 싫다고 운 적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들 몰래 대신 내가 학원에 나갔던 적이 있었다.
이후 중학생이 되면 미술학원을 보내주신다는 부모님은 결국 고등학생이 된 나를 서예 학원을 보내셨다. 20여 년 전 내가 살았던 방배동의 입시 미술학원 비용은 한 달에 무려 50만 원 웃돌았고, 방학이면 종일반이 되어 비용은 배가 되었다. 이에 비해 서예 학원은 엄청 저렴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만 원에 배울 수 있었으니까.
내가 다니던 서예 학원 바로 아래층에는 통유리로 된 작은 미술학원이 있었다. 그곳은 1:1 맞춤 미술학원으로 선생님과 학생이 나란히 수업하는 곳이었다. 아그리파 석고상을 그리는 또래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당시 입시 미술은 대게 4B연필로 4시간 동안 2절지에 2차원의 석고상을 3차원으로 묘사하는 소묘, 일명 ‘데생(dessin)’이었고, 이것이 미대 입시의 정석이었다.
나는 어느 날 서예 학원이 끝나자마자 아래층 미술학원 쪽으로 달뜨는 마음으로 뛰어 내려갔다.
“어떻게 왔어요. 학생?”
“아, 학원비는 어떻게 돼요?”
나는 미술 선생님께 다짜고짜 물었다.
“부모님과 이야기하고 온 거에요?”
“아, 아뇨. 제가 궁금해서 왔어요.”
“그 이야기는 부모님과 할게요, 연락처 줘봐요, 학생!”
“아…선생님! 저 여기 매일 청소할게요, 그림 그리는 거 알려주시면 안 돼요? 나중에 대학 붙으면 여기서 아르바이트비용 안 받고 무료로 학생들 가르쳐주고 그럴게요!”
난 마음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른, 전혀 준비하지 않았던 ‘아무말 대잔치’를 하고 있었다.
“음….”
내가 엄청난 실수를 했다고 알아차린 건 선생님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나서였다.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쏘아붙였다.
“아까 오다가 김밥집을 봤는데, 세상에 김밥이 1,000원이더라고! 싸구려 동네인지 김밥 가격에 놀랐는데, 지금은 학생 말에 또 한 번 놀라겠네!”
우리 동네는 사당동이었다. 그런데 그때 ‘김밥천국’이라는 체인점은 빠른 서비스와 저렴한 가격으로 서울 압구정, 청담동 등 강남권은 물론 전국적으로 퍼져가던 시절이었다.
“학생! 나 9수 해서 홍익대 갔어요. 돈은 어떻게 벌었게? 때밀이하면서 벌었지. 학생도 가서 때 밀면서 돈 모아 다시 와요. 그리고 어머니한테 가서 당장 나한테 전화하라고 하세요!”
생각이 어지러워졌다. ‘아, 와장창 깨져버린 나의 신비한 통유리 미술관은 복구될 수 있을까?’ 나는 깨진 멘탈을 붙잡고 서둘러 집으로 걸어갔다. ‘그래, 뭐라도 해서 돈을 벌자!’ 가는 길에 비장한 마음으로 벼룩시장 신문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구인 코너를 보며 빨간색 연필로 줄을 그어가며 정말 수백 통을 걸었다.
유일하게 고등학생을 받아주는 곳이 하나 있었다. 그건 과자 팔기였다. 주로 등록금을 마련하는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과자를 팔기 위해 모였다. 나는 미성년자였다. 판매꾼들은 혹시라도 과자를 팔다 걸리면 대학생이라고 속이라고 하셨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불법 ‘앵벌이’인 셈이다.
키만큼 큰 포대 안에 과자가 넘칠 듯 쌓여있는데, 과자 한 봉지당 2,000원으로 하나를 팔면 나에게 700원이 떨어졌다. 그리고 이 포대 하나를 다 팔아야 당당하게 봉고차에 탈 수 있어서 나는 부지런히 과자를 팔았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이 생각뿐이었다.
‘나는 방학 동안 집중해서 돈을 벌어 당당히 미술학원을 가리라.’
어느 날 내가 고깃집 안으로 들어가 과자를 팔고 있었다. 그런데 또래 친구들이 가족과 함께 맛있게 식사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럴 때면 아무도 없는 건물 안에 들어가 눈물을 훔친 기억이 난다.
과자를 팔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달리던 오토바이를 멈춰 세워서 과자를 3개나 사주시던 짜장면 배달부 아저씨, 우리 딸이 끼던 장갑이라며 맨 손이었던 얼어붙은 내 손에 꼭 맞는 장갑을 끼워주시던 노래방 아줌마, 또 과자 한 봉지를 사시며 다시 한 봉지를 더 사주신 철물점 할아버지와 할머니다. 정말이지 ‘내가 성공해서 다시 찾아뵙겠노라.’라며 곱씹었던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부모님의 만류에도 미대를 고집했던 고3 어느 날. 아버지는 나에게 모의고사 성적표를 갖고 오라고 하셨다.
“너 왜 인문계 모의고사가 아니냐?”
당연히 평범한 입시를 기대하셨던 부모님의 바람과 다르게 예체능 모의고사 성적표를 꺼내 보였다. 나는 부들부들 떨며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저 미대 가고 싶어요.”
당시 교육계에 계셨던 아버지는 적잖은 충격을 받으시고 목덜미를 잡으시며 당장 미술학원을 보내라고 어머니께 소리를 지르셨다.
그렇게 어머니를 따라 나는 미술학원에 갔다. 늦게 간만큼 쉬는 시간도 없이 그리고 또 그렸다. 남들과 비교해 한참 뒤 쳐진 나는 남몰래 울면서도 그리고 또 그렸다.
몇 달 만에 친 전국 실기 평가에서 나는 몇 년을 준비한 친구들보다 월등히 좋은 성적을 받았다. 미술학원 원장님께서 부르셨다.
“민경이는 실력이 남들보다 이만큼 이만큼 오르고 있어! 원하는 대학에 꼭 갈 수 있을 거다!“
당시 빈말이 없으셨던 냉정한 원장님의 말씀은 곧 입시 결과였던 터라 나는 너무 흥분된 나머지 버스도 타지 않고 집까지 뛰어갔다.
그러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친구가 물었다.
“민경아 너 미술학원 그만둔다는 게 진짜야?”
나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뭐라고? 누가 그래?”
“선생님께 얼른 가봐!”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나는 선생님을 찾아갔다. 심각해 보이는 선생님은 이내 따뜻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민경아, 어머님께서 전화가 왔어. 앞으로의 수업은 어렵게 되었구나.”
그토록 어렵게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들어갔던 미술학원 겨우 두 달째 된 날이었다. 부모님은 내 학원비를 내는 게 어려웠던 모양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을 지나 내 이름표가 달린 이젤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학원 계단을 내려오는데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른 오후, 결국 나는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내 인생 5개월의 입시 미술은 그렇게 끝났다. 자녀 세 명을 길러내셔야 했던 그때, 우리 집은 자녀 교육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당연히 이해하고말고. 결국 원하는 대학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인생은 반전이 있다. 나는 내가 간절히 원하는 미술과 디자인 분야 일을 하며 열심히 살았다.
내 스무 살은 추운 겨울 동안 온몸으로 온기를 내어도 금세 차가워진 자리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누군가 전해준 온기는 미량일지언정 오래 기억될 것이다. 그 차디찬 세상을 너무 일찍 만난 스무 살이 두 번째 스무 살에는 따스한 봄날 만개한 꽃들을 준비하고 있다.
의자는 언제든 쉬이 날아오라며 나비, 벌까지 맞이하고 있다. 내가 머무른 그 자리는 당신이 앉기에 더 따뜻하기를 간절하게 바라며.
조민경
시각디자인을 전공하여 대학원에서 영상디자인을 공부했다. 아름다울 수 있는 것들을 더욱 아름답게 디자인하는 것을 좋아하는 시각디자인 전문가이다. 패션 브랜드, 뷰티 브랜드 등 다양한 브랜드 디자인 및 브랜딩을 비롯한 공간 브랜딩의 기획팀 팀장으로도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의해 창조주께서 주신 밤과 낮을 감히 바꿔가며 일만 하다 큰 수술을 경험했다. 그 이후로 열심히 살기보다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추구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워커홀릭 독신주의자’가 결혼하게 되었다. 지금도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의 비밀을 나누고자 ‘결혼 장려’의 삶도 꿈꾸고 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삶에 가치를 두고 새로운 비전을 발견해 나가고 있다. 스무 살의 계절은 겨울이었지만, 두 번째 맞이하고 있는 스무 살은 분명 이전보다 성숙하고 가장 아름다운 봄날이다. 앞으로 다양한 저서를 통해 차디찬 겨울에서 화창한 봄날로, 인생이라는 계절의 변화를 함께 나누고 싶다. 어쩌면 나와 같은 계절에 머물렀을, 혹은 더 추웠을 당신의 모든 애써온 삶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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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추운 겨울, 누군가 머물다 간 자리에 남은 온기를 통해 스무 살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첫댓글
고생이라고는 안 했을 것 같은 맑고 고운 눈망울에 이렇게 한가득 눈물이 고였었다니.. 두 번째 스무 살은 벌써부터 따뜻한 것 같으니 걱정할 필요 없겠어요~ 답글로 어색한 부분만 살짝 손 본 교정본 올려둡니다.
네, 너무 감사합니다. 실장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