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무식과 비천 / 이현필(1913-1964)
가난과 무식과 비천은
이 세상 지상에서는
쓰레기보다 더 천하게 못 쓸 것으로 여기나
이같이 빛나는 보배들이 없으니
한탄하시지 말고 잘 간수하셔서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빼앗기고 보면
한 그릇 음식을 탐해
장자의 직분을 판 것보다 못하지 않게
원통하고, 절통하고, 후회되고,
부끄러움을 씻을 길이 없을까 하여 권하는 바이니
행여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극히 조심해서
가난과 무식과 천대를
달게 은혜스럽게
감사하게 걸머지고 나아가심 바랍니다.
거룩한 길입니다.
천사들이 기뻐하고,
찬송하고, 환영하고, 존경하는 길입니다.
사람들의 무시와 몰라줌을
원통히 여기지 마시고,
손해라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몰라주고 멸시하기 때문에
우리의 것이 되었고,
안전한 길이 된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십시오.
참 목자가
오늘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시니
그 음성 듣고 따라 나가면
우리 심령,
마르지 않는 푸른 풀밭,
맑은 시냇가로 인도함 받을 것이니
목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거룩한 것도 세월이 지나면 때가 낀다. 이를 ‘거룩한 때’라 우긴다 해도 속수무책 해어져 너덜거릴 것이 분명하다. 근자에 들어 표독스런 신앙에 적잖이 염증이 난다.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는 공허한 우리의 영혼’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새롭게 할 수는 없을까. 쓴물이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날이 많다.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사람 노릇을 못하고 있단 말인가. 급기야 교회가 정치 최전방에 나서서 극단을 몰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괴감마저 든다. 이렇게 타락할 수는 없다. 부패정치에 부패종교라니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망가져야 했는가. 참회와 고백이 사라진 뻔뻔스런 시대에 침을 뱉으면 내 얼굴에 떨어질 것이 뻔하다.
돌이켜보자. 참나, 사람 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덕목이라 했던 가르침으로 말이다. 하나님 사랑에 사로잡혀 ‘가난을 사랑했고, 질병을 찬양했으며, 순명과 청빈의 삶’을 살았던 이현필 선생의 영성, 대중화되지 못한 것이라 일축할지 몰라도 성공과 번영신학으로 몰락하는 시대에 양심 있는 회개를 실천하며 살았던 선생의 삶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가난과 무식과 비천」을 함께 묶어 시작詩作하기에 앞서서 세 가지를 따로 쓰고 있다. 첫 번째 「가난을 감사하나이다」에서는 “가난을 감사하나이다./가난의 자유여!”라고 선언한다. “가난의 자유”라니 이는 “헛된 기쁨을 누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며, “인생의 밑바닥까지/가치를 들추어 볼 수 있는” 복이 되고, “육체의 자유가 없어지지만,/참 양심의 자유가 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 「무지에서 행복이 옵니다」에서는 “지식이 없으므로,/하나님 아는 일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아는 것이 없는 소치로/다른 데 취미 붙일 데가 없어” 행복하다며 감사하고 있다. 세 번째 「가난을 축복하소서」에서는 “모멸도 가난의 식구입니다./가난하면 모멸이 축복으로 오시나이다.” “거짓 존귀와 대접보다/차라리 투명한 멸시가 더 귀하나이다.”라는 뭇 사람이 형언할 수 없는 비움의 영성을 진술하고 있다.
“가난과 무식과 비천”을 한마디로 “거룩한 길”이라 하는 데는 앞에서 읽은 세 편의 시를 함께 묶으면 나오는 명제이다. 세상 탐욕으로부터 자유 하는 이것들은 “빛나는 보배들이”며 “우리의 것이 되었고,/안전한 길이” 되기에 “빼앗기지” 말 것이며, “잘 간수”해야 할 일이고, “인도함 받을” 것이기에 “걸머지고 나아가”길 권고하고 있다.
시편을 통해 선생이 “예수 잘 믿으려면 오장치 짊어지고 나서야 한다”고 한 말의 의미가 선명해진다. 빈자의 영성이다. 선생이 추구한 영성은 소승적인 영성이 아니다. 현실에 뛰어들어 ‘구제와 교육 사업에 헌신’한 사람 중심의 영성을 실천하였다. 그 한 예로 결핵환자를 돌보다 본인도 결핵으로 생(51세)을 마치고 갔으니 말이다.
갈릴리 예수도 아닌, 예루살렘 예수도 아닌 멸망의 빙거를 세우기 위해 부글거리고 있는 시대. 간수(-水)처럼 선생의 삶 한 방울이라도 받아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오늘도 너무 시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