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 선생 문집 서문〔聾巖先生集序〕
조경(趙絅)
못난 나는 후대에 태어나고 고루하기 때문에 영남의 선정(先正)과 덕망 높은 분들을 마치 책 속의 사람으로 여겼는데, 퇴계 선생의 문집을 읽고서야 비로소 농암 선생이 진 태구(陳太丘)가 여남(汝南)의 뭇 현인들의 으뜸이 된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선생은 성화(成化) 정해년(1467, 세조13)에 나셨으니, 명(明)나라 헌종(憲宗) 순황제(純皇帝) 때이고 장헌(莊憲 세종(世宗))과 강정(康靖 성종(成宗)) 대왕이 밝게 이어간 번창한 시대였다.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에 “호성(弧星) 북쪽의 노인성(老人星)이 태평시절에 보인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렇다면 노인성이 우리 동방을 버리고 어디에 나타나겠는가.
선생께서 90세의 장수를 누리셨으니 반드시 여기에 응했다는 것은 의심할 게 없다. 옛날에 노래자(老萊子)가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의 재롱을 부리며 어버이를 즐겁게 하였으니, 그 어버이가 나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송(宋)나라 태평흥국(太平興國) 연간에 어사 이수충(李守忠)이 길에서 양하거(楊遐擧)라는 이를 만났는데 나이가 80세를 넘었고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생존하여 모두 백세를 넘었다고 한다. 이 3대를 선생의 양대 연세에 비교하면 배가 되지만 그 모친의 연세가 선생의 양친이 모두 계실 때와 같다는 것은 듣지 못했고, 또 높은 작록으로 선생과 같이 어버이를 영광스럽게 모셨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또 아들 다섯이 모두 재주와 학문으로 드러나 번갈아 이웃 고을의 수령을 하여,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 명절마다 노래하고 춤추며 선생에게 예와 공경을 다했던 것이 한결같이 선생이 그 어버이에게 헌수했던 것과 같이 했다는 경우를 듣지 못하였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쓴 〈만석군열전(萬石君列傳)〉에 “석건(石建)이 늙어 백발이었는데도 만석꾼은 오히려 병이 없었다.”라고 하였으니, 오직 이것이 선생과 거의 같다. 그러나 만석꾼 석분(石奮)은 문학은 없고 다만 공손하고 신중한 행실로 황로(黃老)의 술(術)을 좋아하는 시대를 만나 태부(太傅) 벼슬을 지냈을 뿐이다.
대저 어찌 선생이 순수한 유학자로 집안을 일으키고 세 조정을 차례로 섬기며 충직한 말과 올바른 의론이 모두 칭송할 만한 것이 있고, 자손을 가르쳐 모두 후세에 모범이 되었던 것만 하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하늘의 복록을 받아 훌륭한 자손들 또한 모두 아름다운 군자가 되었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을 베푼 것이 어떠한가?
애일당(愛日堂)을 지어 구로회(九老會)에 견주었을 적에, 선생께서 당시 옥당(玉堂) 장관으로 와서 부모님을 뵈었는데, 선생의 독실한 효성은 이미 임금의 귀에 들렸고 사림의 자식 된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 기름진 음식을 마련하여 꾸미고 차려놓아 참으로 고루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마을의 연세 많은 부로(父老)들은 고요하여 장수하는 인자(仁者) 아님이 없었는데, 야인 복장에 비둘기가 새겨진 지팡이를 짚은 이와 화려한 관복의 관리들이 자리를 함께하여 술잔을 받들고 장수를 축하하였으니, 이날 태공(太公) 대가의 화락한 기색은 육 대부(陸大夫)의 전대 속 천금이라 한들 어찌 이것과 바꿀 수 있겠는가. 백거이(白居易)의 구로회 또한 어버이에게 축수한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분천(汾川) 한 고을 수백 리 안에 우리나라에서 수백 년 동안 보기 드문 일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태사씨(太史氏)에게 천문을 잘 점치게 했다면 동한(東漢)의 진순(陳荀)에게 모였던 덕성(德星)이 반드시 농암의 구로에게 구십 리는 더 양보했을 것이다.
아, 선생은 덕행이 실질이고 문장은 여사(餘事)였지만, 그 저술을 읽어보면 순박함이 흩어지지 않고 옛 칼이 새로 날 선 듯하여 말씀마다 모두 참되니, 후세에 교묘하게 다듬고 꾸미는 자는 여기에 미칠 수 없다. 또 서로 수창(酬唱)한 군자로서 김모재(金慕齋 김안국(金安國)), 박눌재(朴訥齋 박상(朴祥)), 주신재(周愼齋 주세붕(周世鵬)), 권송정(權松亭 권벌(權橃)), 이용재(李容齋 이행(李荇)), 어자유(魚子游 어득강(魚得江))는 앞장을 섰고, 소퇴휴(蘇退休 소세양(蘇世讓)), 신영(申瑛), 조신(曺伸)은 그 뒤를 이었다.
퇴계 선생께서 또 덕 높은 유림의 종장으로 선생의 사적을 드러내어 조금도 빠트림이 없는데, 후생으로서 전해들은 자가 어찌 감히 그 사이에 한마디 말을 덧붙이겠는가. 지금 선생의 외증손 김계광(金啓光) 씨가 외람되이, 내가 수(壽)를 누리며 지금 장수하는 어버이를 모시고 있다고 《농암집》 발간에 한마디 말의 도움이 없을 수 없다고 하였다.
돌아보건대 재주 없는 내가 선친을 여읜 외로운 몸으로 겨우 모친의 가르침을 더럽히지 않고 살면서 이런 성대한 일을 보게 되었으니, 한 줄기 눈물을 흘릴 뿐이다. 어찌 감히 말을 하겠는가. 계광 씨가 한사코 요청하기에 감히 문집의 총체적인 말 중에서 발췌하여 종이를 더럽히니, 쓸데없이 사설을 덧붙였다는 기롱을 어찌 피하겠는가.
을사년(1665, 현종6) 8월 16일 후학 80세 늙은이 한양(漢陽) 조경(趙絅)이 쓰다.
[주1] 진 태구(陳太丘)가 …… 것 : 진 태구는 동한(東漢)의 진식(陳寔, 104~187)으로, 자는 중궁(仲弓)이다. 뜻이 있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환제(桓帝) 때 태구의 장에 제수되었고 당고(黨錮)의 화를 당하였다가 사면되었다. 진식이 향려(鄕閭)에 있을 때 마음을 공평히 가져 사물을 대하니, 향려에 송사가 있으면 그에게 판정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졸(卒)했을 때 조문객이 3만여 명이었고 상복을 입은 이도 수백을 헤아렸다. 시호는 문범(文範)이며, 아들 기(紀)ㆍ심(諶)과 함께 삼군(三君)이라 일컬어졌다. 《後漢書 卷62 陳寔列傳》
[주2] 호성(弧星) …… 보인다 :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에 “호성(弧星) 북쪽의 큰 별 하나를 가리켜 노인성(老人星)이라 한다. 나라가 잘 다스려져 태평하면 이 별이 나타나는데, 이 별이 나타나면 군주가 장수하고 창성한다. 늘 추분(秋分)에 남쪽 교외에서 그것을 관측할 수 있다.[嘉置弧北, 指一大星, 爲老人星. 治平則見, 見則王壽. 常以秋分, 候之南郊.]”라고 하였다.
[주3] 태평흥국(太平興國) : 송(宋)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로, 976~983년이다.
[주4] 송(宋)나라 …… 한다 : 송나라 태평흥국(太平興國) 연간에 이수충(李守忠)이 승지로 있다가 남방으로 사신이 되어 나갔는데, 경주(瓊州)의 경내를 지날 적에 양하거(楊遐擧)라는 81세의 노인을 만나 그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의 집에 가서 보니, 아버지인 양숙련(楊叔連)은 122세였고, 할아버지인 양송경(楊宋卿)은 195세였는데, 모두 함께 살고 있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차에 서까래 위에 있는 닭둥우리에서 한 어린아이가 머리를 내밀고 내려다보았는데, 양송경이 그를 가리키면서 “이분은 나의 선대 조상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說郛 卷39 洞微志》
[주5] 석건(石建)이 …… 없었다 : 〈만석군열전(萬石君列傳)〉은 《사기(史記)》 권103에 실려 있다. 만석꾼은 석분(石奮)이고 석건은 맏아들이다. 아들 석건, 석갑(石甲), 석을(石乙), 석경(石慶)이 모두 2천 섬의 관직을 지내, 합하여 만 섬이므로 만석꾼이라 한 것이다.
[주6] 황로(黃老)의 술(術) : 황로는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병칭으로, 도가(道家)를 가리킨다.
[주7] 애일당(愛日堂) : 이현보(李賢輔)가 1512년 46세 때에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지은 별당이다. 부모를 봉양할 날이 많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며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에서 ‘애일당’이라 하였다. 1975년 안동댐 수몰로 영지산(靈芝山) 남쪽 기슭으로 이건하였다가 2008년 농암 종택을 복원하면서 현재 위치인 도산면(陶山面) 가송리로 재이건하였다.
[주8] 구로회(九老會) : 백거이(白居易)가 만년에 형부 상서로 치사하고 향산거사(香山居士)라 자칭하며, 여덟 원로들과 함께 풍류를 즐기고자 결성한 모임인데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라고도 한다.
[주9] 비둘기가 …… 이 : 비둘기가 새겨진 지팡이란, 나이 70이 되어 치사(致仕)한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한(漢)나라 때 나이 70이 되면 옥장(玉杖)을 주고 그 손잡이 끝에 비둘기 모양의 장식을 하였는데, 이는 비둘기가 체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노인도 체증(滯症)이 없기를 바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15 禮儀志中》
[주10] 육 대부(陸大夫)의 …… 천금 : 한(漢)나라 육가(陸賈)가 남월(南越)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환할 무렵에 월왕 위타(尉他)가 ‘그의 행장에 천금의 가치가 있는 보물을 싸 주며 선물했던[賜陸生橐中裝, 直千金]’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97 陸賈列傳》
[주11] 분천(汾川) : 안동시 도산면 분천으로, 이현보의 고향 마을이며 부내 또는 분강촌(汾江村)이라 한다. 영천 이씨(永川李氏)의 집성촌으로, 입향 시조는 고려말엽에 군기시 소윤을 지낸 이헌(李軒)이다.
[주12] 태사씨(太史氏)에게 …… 덕성(德星) : 진순(陳荀)은 후한 때의 진식(陳寔)과 순숙(荀淑)으로 어진 사람들을 말한다. 일찍이 진식이 그의 자질(子姪)들과 함께 순숙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덕성(德星)이 마침 그 분야(分野)에 닿았으므로, 태사(太史)가 황제에게 “500리 이내의 현인(賢人)이 한데 모였다.”라고 아뢰었다. 《後漢書 卷62 荀淑列傳》
[주13] 김계광(金啓光) : 1621~167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겸(景謙), 호는 구재(鳩齋)이다. 166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박사ㆍ직강ㆍ풍기 군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구재집(鳩齋集)》이 있다.
[주14] 조경(趙絅) : 1586~1669.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ㆍ주봉(柱峯),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626년(인조4)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ㆍ교리ㆍ헌납 등을 지냈다. 형조 참의ㆍ대사간ㆍ대제학, 이조와 형조의 판서를 거쳐 1653년 회양 부사를 지내고 포천에 은퇴하였다. 저서로 《용주집(龍洲集)》, 《동사록(東槎錄)》이 있다.
聾巖先生集序
不佞絅。生也后。且坐孤陋。於嶺南先正鉅人長德。蓋若黃卷中人然。及讀退陶先生文集。而后始知聾巖先生若陳太丘之汝南群賢之首也。先生生於成化丁亥。則明憲宗純皇帝時。而我 莊憲,康靖大王繼照之盛世也。元命苞言。苴弧北老人星。時平則見。果爾則老人星舍吾東何見。先生享期頤壽。其必應此也。無疑。上古有老萊子者。衣綵衣作嬰兒戱。以娛其親。其親之大年可知。宋太平興國中。御史李守忠。道逢楊遐擧者年八十有餘。其父若祖方在堂。俱過百歲云。是之三世。較先生兩世之壽。固有倍焉。然未聞其天只之壽如先生具慶時也。又未聞以隆爵厚祿。致榮其親如先生也。又未聞子姓五人。俱以才學顯。迭宰旁邑。及先生懸車之日。逐節歌舞。盡禮敬於先生。一似先生壽其親也。太史公傳萬石君。建老白首。萬石君尙無恙。唯此得庶幾埒先生。而奮無文學。只用恭謹。遭好黃老時。致位太傅。夫豈若先生以純儒起家。歷事三朝。忠言正論。皆有可稱道。敎子孫皆可爲後世法。由是受天之祿。停鸞峙鵠。亦皆彬彬君子者矣。天之報施善人。其何如也。當作愛日堂而擬九老會也。先生時以玉堂長來覲省。而先生誠孝之篤。固已徹四聰矣。固已聳士林之爲人子者矣。其治具淳熬。粉飾飣餖之盛。固已無不備矣。仁里中父老鮐背鯢齒。無非仁者之靜而壽者。黃冠野服刻鳩之杖。與金貂華組爭席。而奉觴而上壽。是日太公大家和悅之色。雖陸大夫橐中千金。惡能易此也。不知胡白九老亦有壽親事否。汾川一鄕數百里內。有此吾東數百年希覯之事。如使太史氏善占天象。則德星之聚東漢陳荀。必讓聾巖九老三舍矣。噫。先生德行實。餘事文章。而讀其所著。若大樸未散。古劍新㓸。語語皆眞。非後世餙羽雕蟲者之所及也。且相與酬唱諸君子。金慕齋,朴訥齋,周 茂陵,權松亭,李容齋,魚子游爲之先焉。蘇退休,申瑛,曺伸爲之後焉。退陶先生。又以大雅儒宗。闡揚先生事蹟。無毫髮遺。後生耳食者。何敢贅一辭於其間。今先生彌甥孫金啓光氏。謬謂不佞享幸壽。方奉喜懼之親。不可無一語相聾巖集剞劂氏。顧不佞孤露餘生。堇不忝主績之敎。已獲覩如此盛事。一涕而已。何敢容喙。啓光氏猶執不改。敢摭集中總語。以汚赫蹄。架屋疊床之譏。何處以逃。旃蒙大荒落南呂旣望。後學八十歲老畸漢陽趙絅。 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