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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전쟁의 승리① - 진리의 허리띠
(엡 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 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엡 6: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엡 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엡 6:17) 구원의 투구와 셩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꼬마 셋이 모여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는데요. TV에서 주인공들의 가벼운 키스신이 나오자 4살 짜리가 “형! 형! 저 사람들 뭐하는 거야? ”그랬더니 5살 짜리가 “저건 사랑하는 사람들이 키스하는 거야!”라고 답했답니다. 그랬더니 6살 짜리가 하는 말이 “근데...어찌 좀 서툴다.”라고 하더랍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육교 밑에서 세 꼬마가 놀고 있었는데 이 때, 육교 위에서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조심스레 내려오고 있었는데 이를 본 꼬마들 중 6살 짜리가 “이야~ 삼삼한데.”라고 하니 8살 짜리는 “임마, 저런 모습은 삼삼하다고 하는 게 아니고 섹시하다고 하는 거야“ 라고 했답니다. 내려오면서 꼬마들이 하는 얘기를 다 들은 여자가 다가와서는 꼬마들에게 알밤을 주면서 꾸짖기를 ”쪼그만 것들이 아주 못돼 먹었구나!“ 이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10살짜리 꼬마가 정중하게 말을 하더랍니다. “아가씨, 제 동생들의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사과하는 의미에서 커피라도 한 잔 사 드리면 안될까요?”
물론 누군가 웃자고 만들어 낸 유머입니다. 그러나 이 속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웃을 일만은 아닌 조숙증(早熟症)에 걸려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들여다봅니다. 순진함은 사라지고 다양한 매스컴을 통해 비뚤어 진 인성이 아무 거리낌 없이 표출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22일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가톨릭상지대학교 간호학과와 연세대학교 간호대학이 2012년 서울 소재 2개, 충청 2개, 강원 소재 2개 등 총 6개의 4년제 대학교에 재학 중인 대학생 56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대상자 중 65.5%(368명)가 성경험이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성별로는 남학생이 71.5%, 여학생이 60.2%가 성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학년별로는 1학년 중 56.4%가 3학년 73.5%와 4학년 84.7%가 성경험이 있다고 밝혀 학년이 높아질수록 성경험 비율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결혼의 신성함과 남자 여자의 만남의 정절이란 개념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혼탁한 가치관은 사람들로 부평초(浮萍草)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갑니다.
요한계시록 12:17에서는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신앙을 지키려는 수많은 성도들을 향하여 넘어뜨리고 타락시키기 위하여 악한 영들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서 있다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하였습니다. 전쟁은 이기는 자와 지는 자로 나뉘게 됩니다. 지는 자는 이기는 자에게 굴복당하고 그의 모든 자유와 소유 그리고 인격까지도 빼앗겨 버립니다.
고대 중국 당(唐)나라 역사서중 하나인 구당서(舊唐書)의 배도전(裵度傳)에서 유래한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란 말이 있습니다. 즉 군사를 두고 있는 병가(兵家)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할 때도 또한 실패를 할 때가 항상 있다는 뜻으로 어떤 실수나 잘못을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가벼이 여길 때 주로 쓰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는 실패도 성공도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 물리면 절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귀를 우는 사자에 비유하고 있는데 사자는 먹잇감을 발견하고 달려들어 목덜미를 덥석 물면 쓰러질 때까지 물고 늘어져 목이 부러질지언정 입을 떼지 않습니다. 이 영적인 전쟁에서도 지고 나면 영원한 파멸이요 마귀의 수종자가 되어 악한 마귀의 노략질에 영원토록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비결을 오늘부터 차근하게 풀어가 보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내용은 두 가지 요점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10절에 보면 주 안에서와 주님의 힘의 능력 안에서 강건해지라는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강건하여지고'의 헬라어'엔뒤나무스데'(ἐνδυναμοῦσθε)는 수동태로서 '강건하여지라'(be empowered, NEB)는 의미이며, 현재로서 '강건하여짐'이 날마다 순간마다 경험되어져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강건함을 입는 것이라면 두 번째는 믿음의 성도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받은바 능력으로 전신갑주를 취하여 마귀와의 대적에서 승리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전신갑주가 무엇입니까? 전신갑주는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자기 몸을 보호하고 적군을 무찌르기 위하여 완전무장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주후 1세기는 로마 제국이 세계를 정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신갑주를 취한 로마 군인들을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자주 군인과 비유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의 힘의 능력 안에서 강건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는데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을 해야 합니까? 그 대답이 히브리서6:11절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우리 다함께 읽어봅시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는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여기서 간계란 메도데이아(μεθοδεία)는 교활함, 속임수, 책략, 계략, 거짓으로 계산 교묘한 속임수를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지혜와 총명으로는 도무지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공중의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을 대적하기 위해서 우리는 '진리의 허리띠'로 허리를 동여야만 합니다. 여러분, 우리 몸 중에 허리가 참 중요합니다. 성경에서는 허리가 생명의 근원이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허리는 오스퓌스(ὀσφύος)로서 히브리서 7:10에서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했습니다. 내 생명뿐만 아니라 힘의 근원이 됩니다. 허리에 이상이 생기면 우리는 무거운 물건을 들을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습니다. 균형이 깨집니다. 그러므로 허리를 튼튼하게 해서 허리띠를 꽉 조여 매는 것은 군인은 물론이고 보통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허리띠를 매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바지춤이 내려와서 도저히 전투를 하려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이 허리띠를 말할 때 그 당시 로마 군인들이 착용했던 가죽으로 만든 앞치마(leather apron)를 의미할 수 있는데, 이것은 병사의 하복부(lower abdomen)와 성기(groin)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했습니다. 아니면 군인이 칼을 꽂기 위하여 허리에 둘러맨 벨트를 지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군인이 허리띠를 착용함으로서 몸의 균형을 잡아서 행동이 민첩해질 수 있으며 또 허리띠에 칼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무기들을 주렁주렁 매달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허리띠는 진리로 묶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모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Logos입니다. 이 말씀을 자기 식대로 이해하고 행한다면 이는 진리가 아닙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제로 전했으니 이 말씀은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런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에서 쫓겨나가게 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회원을 불러 그 이유나 알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당회원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목사님의 설교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은 크게 화를 내면서 “나는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를 그대로 받아서 설교하였는데 그렇 수 없잖습니까?”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문제입니까? 나라는 사람을 교회의 말씀 전하는 자로 세워서 나라는 사람의 인격과 삶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해석되어지고 그 교회의 성도의 처한 상황 속에 걸맞은 말씀을 전해야 됩니다. 서울의 유명한 목사님은 그 교회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진리는 기록된 말씀이 오늘이라는 현실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오셨지만 그 분도 말씀을 전하실 때 자의적으로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성령의 민감한 활동을 인정하고 그 성령에 이끌려 말씀을 전하셨기에 그 말씀을 진리라고 하십니다.
나에게 부딪히고 있는 삶의 현장 속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 들려지고 그 말씀이 나를 움직이십니다. 그 말씀으로 나의 힘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좇아 살아 갈 때 마귀의 간계를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사탄은 어떠한 방법이든 사용하여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그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을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탄의 술책을 모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지배 밑에 들어가고 맙니다. William Gurnall이「The Christian in Complete Armor」 에서 사탄의 술책 5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사탄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로챈다고 합니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생각해 볼 틈을 주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방해합니다. 우리 중에 누군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집요한 반대에 부딪칩니다. 아내가, 부모가, 형제들이 반대합니다. 셋째,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결단의 시기를 지연(遲延) 시킵니다. “그런 일은 내일 해도 늦지 않아!” 하면서 결단의 시기를 뒤로 미루게 합니다. 넷째, 사탄은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온갖 공작에도 넘어가지 않는 사람에게 사탄은 뒤로 후퇴하는 척 하면서 타협안을 내 놓습니다. 마지막으로 사탄의 술책 가운데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무지(無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 법에서는 무지해서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정상을 참작해서 관용을 베풀어 줍니다. 그러나 영적인 무지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영적 무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저지르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구원의 길을 봉쇄(封鎖)합니다. 실제로 무지한 사람에게는 어떤 설득도 통하지 않습니다. 설명을 해 줘도 깨닫지 못합니다. 좀 깨달으려고 하면 사탄은 쉽게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해.” “하나님이 네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 줄 알아? 네가 지금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 되는 거야.” 이런 그럴듯한 사탄의 말에 속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우리들은 그토록 사탄의 공격에 대하여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기에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으로 그는 진리 가운데 거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내 삶속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적용시켜야 비로소 진리의 사람이 되고 마귀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사도행전 1:1에서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라고 말씀을 시작합니다. 이 글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누가에 의하여 쓴 글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하기 전에 누가복음을 썼는데 그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행적에 대하여 5개의 동사로 압축하여 설명했는데 그것은 행하시고 가르치시고 제자를 택하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역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행하시며’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행함 즉 모범이 없는 가르침은 허공을 치듯 무의미합니다. ‘행하다’ 는 원어는 포이에오(ποιὲὠ)인데 ‘어떤 것을 만들다. 무에서 창조하다’라는 뜻으로 이것은 위에 계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그의 행동으로 나타나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행함이 먼저 있었기에 그 말씀의 전파력이 온 세상으로 전파될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의 그분의 마음과 생을 본받아 살기를 원했습니다. 바울 사도도 행함이 있은 다음 가르침이 있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1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예수님의 행함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행하는 대로 나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명하시기를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천사의 말처럼 부드럽게 그리고 친절하게 도움을 주는 듯 말합니다. 또한 사랑을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랑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해석하고 판단한 것을 말하고 행동한 것이 진리를 행했다고 자신을 내세웁니다. 고대에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의 깃털로 먹물을 찍어 죽인 송아지가 아닌 자연사한 송아지 가죽을 말려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습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는 글을 쓰려면 반드시 목욕을 하고 써야했고 다른 글은 잘못 쓰면 오려서 붙인 다음 써도 되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나온 글을 잘못 쓰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습니다. 모세 오경을 토라라고 하는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6083번 나옵니다. 그러면 서기관들은 그만큼 목욕을 하면서 글을 틀리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 썼고 그 옆에는 오류가 없는지를 살펴보는 사람이 지켜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요 경외의 행위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질책하셨습니다. 사랑 없는 행위일 수 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진리에 의한 사랑이란 내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잘 이해하고 상대편에서 서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반대에도 죽도록 사랑해서 미국으로 도망치듯 해서 결혼한 남자와 사이에 태어난 가장 사랑했던 맏아들은 스물다섯 꽃 같은 나이에 돌연사 하고 암(癌) 선고를 받고. 그 이후에 태어난 아이는 다섯 살 아이는 특수자폐 판정을 받았으며 자신은 실명(失明)을 당하며 위기에 빠졌던 이어령 전 문화공보부 장관의 딸 이민아 목사의 간증이 있습니다.
그런 그가 1981년 졸업하자마자 떠났던 미국에서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한 사랑이었는데 스물두 살, 너무 어리고 철이 없을 때 5년간 지속된 결혼생활이 많은 고통을 겪어내야 했습니다. 흑인들도 마다하는 일자리, 밤을 새우는 주유소 일을 최소 일당을 받으며 했고 낮에는 햄버거 가게에서 일했습니다. 반대하는 결혼을 했으니 남편은 자존심에 더욱 이를 악물고 자기 일에 몰두하면서 서로를 돌아 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주말에 차고를 깨끗이 청소하며 부인의 가사를 돕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부인은 주말만이라도 남편과 손잡고 바닷가를 거니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몰라서 남편과 관계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힘들어 가기만 합니다.
'여보 내가 맛있는 거 해놨어’ 하면 ‘나 지금 밥 먹을 기운 없어’ 하고, ‘나랑 얘기 좀 해, 나 안 좋아?’ 하면 ‘왜 이렇게 귀찮게 해!’ 하면서 아내를 무시하고 음성이 높아졌습니다. 서로의 사랑의 감정이 무녀지면서 그들은 결국헤어지게 됩니다.
사랑은 진리로 허리띠를 띠어야 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면서부터 진리가 들어옵니다. 내게 주어진 삶의 환경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알면서 진리가 이해되고 그 진리의 옷을 걸치게 됩니다. 진리가 어렵다고 생각 마십시오. 진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셔 들이면서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믿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으로 감동받지 않은 것은 진리처럼 보이지만 참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대로 행한다고 하지만 사실 진리대로 행하지 않고 사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2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예수님께 나와서 고백하며 자기를 인정해 주실 것을 구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답변을 들어 보십시오!“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지 않습니까! 왜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임의대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16에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억지로 풀다가'에 해당되는 헬라어 '스트레블루신'(στρεβλοῦσιν)은 '왜곡하다', '비틀다'라는 의미로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바울 서신과 다른 성경을 자신들의 뜻에 맞게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무지한 생각과 논리로 성경의 교훈들을 왜곡시키고 복잡하게 만들어 고집함으로 멸망당함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이 같은 단호한 주장은 그리스도인들이 난해한 말씀을 접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성령의 도우심과 조명 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바르게 해석할 것을 권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49에서 예수님은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내 자의로’는 ‘에마우토’(ἐμαυτοῦ)로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육신으로 오셨을 때 자신의 것으로 말하시지도 않고 행동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직 성령을 통하여 절대적인 통제를 받으시고 그 분의 인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지도를 받아야 됩니다. 성령을 늘 나와 함께 계셔서 나를 깨닫게 하시고 환경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폭을 넓혀 주십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행할 수 있습니다.
진리에 의한 말씀을 행한 다음에 가르침에 권세가 있습니다. 그 가르침에 감동이 있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진리에 의한 행함이 없는 가르침이 난무(亂舞)하기에 오늘날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잃어버렸습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있다는 것은 내 힘의 방향을 오직 성령의 감동을 받은대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언제 교통사고가 잘 나는지 아십니까? 어벌쩡하다가 결단을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순간에 사고가 일어나는 것처럼 진리로 말미암지 않고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혼돈 속에 있을 때 우는 사자와 같이 마귀가 덤벼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1:18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은 진리를 모를 때 젊었을 때는 자기 임의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으로 거듭나고 나면 이제는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팔을 벌리다'가 십자가 처형에 관련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따라 순종하는 예수님의 삶은 순교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사자성어 중에 감탄고토(甘呑苦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으로, 사리(事理)에 옳고 그름을 돌보지 않고, 자기(自己) 비위에 맞으면 취(取)하고 싫으면 버린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 중에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리라고 하면 그것이 내게 손해를 끼치고 설령 죽음으로 몰아가더라도 오직 진리에 의하여 살겠다는 사람이 진리의 허리 띠를 띠고 사는 사람입니다.
나의 방향이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감동주신 방향을 뚜렷하게 바라보고 나가는지 스스로 점검해보십시오! 고린도후서 13:5에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성막을 다루면서 제사장은 매일 성소에 들어가서 일곱 금 촛대의 기름을 보충하고 불똥을 제거하는 일들을 날마다 해야 됩니다. 우리는 진리의 허리띠를 잘 매려면 이렇게 자신을 살펴보면서 내 안에 성령이 활동하고 계시는지를 잘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늘 활동하도록 하려면 성령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고 데살로니가전 5: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속한 더러운 생각 분노의 감정 원망하는 마음 절망 곤고한 자기 연민 등은 성령을 근심하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 분의 현존성을 거부하며 하나님을 무시할 때 성령을 내 곁에서 더 이상 활동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기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김의 대상은 악한 마귀입니다.
요하일서 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므로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김의 비결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진리로 말미암아 됩니다.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것을 요한계시록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그러면서 요한계시록 21:7에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하나님이 그 아들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셨습니다. 참 진리는 하늘의 속한 것을 이 땅에서 깨닫고 행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행하는 사람은 하늘에 철저한 소망을 둔 사람입니다. 나는 하늘에 속한 것이 이 땅의 것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십시오. 내 마음을 하늘에 두어 보십시오. 그 나라에 주실 상급에 관심을 가져 보십시오 그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내 안에서 이뤄진 것을 믿고 인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진리의 영이 나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