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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안 ♣
서안은 아테네, 로마,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고도(古都)로 꼽히는 도시로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 중 하나이다. 기원전 11세기부터 서기 10세기까지 13개의 왕조나 정권이 서안에 도읍을 정하거나 정권을 세웠다. 서안 11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서주(西周), 진(秦), 서한(西漢), 당(唐)이 가장 흥성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과거 동양과 서양의 문화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의 기점이었던 서안에서는 수많은 역사인문경관을 볼 수 있다. 서안의 오랜 역사를 함께 해온 고성벽과 돌로 된 서고(書庫)라 불리는 비림, 대안탑, 소안탑 등의 건축물은 물론이려니와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세계 8대 기적' 중 하나인 진시황 병마용갱 그리고 중화민족의 발상지 중 하나로 반파(半坡)유적, 모계사회부터 부계씨족까지의 변천을 볼 수 있는 앙소(仰韶)문화와 용산(龍山)문화의 유적지 등 중화고대문명의 진귀한 유적들이 보존되어 있으니 "오천년의 중국역사를 서안에서 볼 수 있다"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외국인들이 중국을 여행할 때 서안을 필수 코스로 잡는 것도 당연하다.
오늘날 서안의 인구는 약 650만~700만 명이며, 중국의 신흥 내륙 공업 지역 가운데 하나로 20여 개의 대학과 연구소들을 갖춘 교육 도시이기도 하다. 지금은 중국의 군수 공장, 우주연구센터 등 핵심적인 산업체가 있다.
▶'장안'의 역사
장안은 당(唐)나라 때의 서안을 부르던 이름으로 우리에게도 친근한 명칭이다. 당 태종 때까지만 해도 장안의 재정이 궁핍했는데, 당 고종 때부터 조금씩 사정이 나아지다가 현종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루며 로마와 함께 세계의 중심지로 등장했다. 당시 장안은 동서 10Km, 남북 8Km에 이르는 영토를 가진데다가, 인구는 150만 명이었다. 이 중 외국 사신들의 수는 약 4천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 관 광 지 ★
⊙소안탑
당나라 중종 684년에 문황고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헌복사로 지은 절이 '천복사'이며, 소안탑은 당나라의 고승 의정이 인도에서 가지고 온 경전을 번역하고 보관하기 위해 절 남쪽에 세워진 탑이다.
의정은 672년 중국 광주에서 배를 타고 인도로 건너갔으며 인도네시아 지역까지 갔다 온 그의 여행은 무려 20 여 년이나 걸렸다. 귀국할 때 그는 400부의 경전을 가지고 돌아왔으며 이 경전의 보관을 위해 15층에 높이 42m의 탑을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꼭대기 2층이 무너져 내려 13층밖에 남지 않았으며, 대안탑과 달리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당나라 때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대안탑의 남성적인 선에 비해, 곡선이 두드러져 여성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안탑
대안탑은 서안시내에서 4km 떨어진 자은사(慈恩寺) 내에 자리잡고 있다. 자은사는 648년 당대 황제 고종이 어려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만든 절로 현재의 모습은 청대에 재건축한 것이다.
대안탑은 중국에서 유명한 불탑 중 하나로, 652년에 당(唐)나라 현장(玄奬)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과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7층의 누각식전탑으로 총 높이가 64m에 기반부 둘레는 25미터이다. 외부는 벽돌로 지어졌지만, 탑 내에는 나선형의 계단이 있어서 걸어 올라갈 수가 있다.
매 층의 사방에는 각기 하나의 아치형 문이 있어서 먼 곳까지 내려다볼 수도 있다. 그리고 당대의 두보 등 많은 저명한 시인들이 대안탑에 올라와 본 후 많은 문구들을 남겼다. 탑 내부로 올라가는 데에는 따로 입장료를 받고 있다.
또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대 중엽에는 진사에 급제하면 먼저 곡장(曲江), 행원(杏圓)에서 잔치를 한 후에 대안탑에 올라와서 탑 벽에 기념 친필을 남기는 것을 대단한 영예를 여겼다.
유명한 당대시인인 백거이(白居易) 역시 진사에 합격하고 난 후, "자은탑에 친필을 새긴 17명 중 가장 어린 사람이다. (慈恩塔下題名處, 十七人中最少年)"라는 유명한 귀절을 남겼다.
⊙명대성벽
< 명대성곽에서 바라본 서
명대에 당대의 장안성을 기초로 해서 만들었으며 현존하는 완전한 형태의 대형 성벽이다. 6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둘레 11km, 높이 12m, 너비 12~14m로 자동차가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성벽의 네 모퉁이에는 각루가 하나씩 있으며 성벽 위에서 보는 성내 외의 전망도 좋다. 성벽을 모두 돌아볼 수는 없지만 많은 부분이 개방되어 새롭게 정비된 성벽을 올라가 산책할 수도 있으며 성벽 밖에 둘러진 해자에서 낚시도 가능하다.
⊙진시황릉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 진시황이 여기에 묻혀 있다. 능묘는 37년간이 걸려 완공되었는데, 무덤의 둘레가 6㎞, 높이는 40m에 달한다. 무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야산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내부는 개발이 되지 않아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고 해도 내부는 볼 수가 없다. 진시황이 무덤을 설계할 때 훗날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수은 등을 이용한 여러 가지 함정들을 설치해 두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그 비밀을 풀 수 없어 과학이 조금 더 발전하여 그 비밀을 풀 수 있을 때 발굴 한다고 한다. 따라서 진시황릉 까지 간다고 해도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고, 밖에서 사진 촬영을 하거나 릉 위에 오르는 정도의 관광을 할 수 있다. 요새는 릉 주변을 아름다운 공원으로 만들어 미니 전동카나 마차로 릉 주위를 돌거나 공원 주변에 전시해 놓은 옛 유물을 구경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 교통 : 기차역에서 녹색 306번 관광전용선 버스를 이용
☞ 개관 시간 :
⊙진시황 병마용갱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진시황이 사후에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거대한 규모와 정교함을 갖추고 있다. 서안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거리에 있으며, 진시황릉에서 북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4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고, 그제서야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현재에도 발굴이 진행 중이다. 현재까지 3개의 갱이 발견되었으며 700여개의 실물 크기의 도용(陶俑)과 100개가 넘는 전차, 40여필의 말, 10만 여개의 병기가 발굴되었다. 병기들 대부분이 실제무기이며 현재는 창고에 보관 중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도용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헤어 스타일을 갖고 있어 그 섬세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병마용갱은 총 3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1호갱은 당시 농민이 처음 발견한 것이고, 후에 2, 3호갱이 발견되었다. 1호갱은 세 곳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동서 길이가 230m, 넓이는 612m로 총 면적이 12㎢이다. 1호갱은 동서쪽을 향한 긴 모양으로 장군과 병사가 배열되어있고, 2호갱은 면적이 약 6000㎡이며,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2호갱은 발굴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전시되어 있다. 3호갱은 면적이 520㎡으로 凹모양이며, 병마용들은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역시 현재까지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학자들은 발견된 3개의 갱 외에도 진시황릉 근처에 아직 발굴될지 않은 더 많은 병마용갱이 묻혀 있을거라고 보고 있다.
☞ 개관시간 :
☞ 입 장 료 : 90위안(12월-2월까지는 65위안)
☞ 교 통 : 기차역 입구에서 306번 버스나 7번 관광버스를 타면 병마용갱까지 바로 갈 수 있으며, 요금은 5위안이다.
⊙화청지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규모의 당나라 왕실 원림이다. 고대부터 수려한 풍경과 질 좋은 지하 온천수 때문에 역대 제왕들의 관심을 받아왔던 장소이다. 화청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는데, 일찌기 서주(西周)시기, 주유왕(周幽王)이 이곳에 려궁(驪宮)을 지었으며, 후에 진시황과 한 무제도 이곳에 행궁(行宮)을 건립하였다.
특히, 당 현종 천보년 간에 건설한 궁전누각이 가장 화려하며 이때 정식으로 "화청궁(華淸宮)"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당시(唐詩) 중에는 화청지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는 시가 비일비재할 정도로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했다.
화청지 동쪽구역에는 정말약(郭沫若)이 쓴 "화청지" 금자편액이 걸려있으며, 구역 내에는 하화각, 비하각, 오간정(1936년 서안사변 당시 장개석이 머물던 곳) 등의 건축물이 있다. 그 중 온천석벽에 있는 <온천송비(溫泉頌碑)>는 중국 비석예술 중에서도 우수한 예술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중앙구역에는 당 화청궁 어탕유적박물관이 있으며 연화탕, 해당탕, 태자탕, 상식탕, 성진탕 등의 당나라 때 현종과 양귀비가 온천을 즐기던 탕과 문물 진열실이 있다.
화청지 온천의 수질은 매우 깨끗하며, 수온은 항상 43℃를 유지한다. 다량의 화학물질을 포함하고 있어서 관절염,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 또한 매일 육각정 무대 앞에서는 당나라 시기를 재현한 공연이 열린다.
☞ 개관 시간 :
☞ 교통 : 기차역에서 306번, 307번 버스를 타면 30분 정도 소요된다. 두 버스 모두 녹색이며 보통 10분에 한대 꼴로 온다. 화청지, 진시황릉, 병마용갱을 모두 거친다.
⊙비림
서안의 삼학가(三學街)에 자리잡고 있는 섬서성 비림박물관 내에 위치하고 있다. 북송 철종(哲宗)년간(1090년)에 처음 지어져 현재까지 90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비림은 현재 7개의 대형 진열실과 8개의 회랑 그리고 8개의 비정(碑亭)에 한대부터 청대까지 2300여 개의 비석을 수장하고 있으며, 그 중 1000여 개를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전서, 예서, 초서, 행서 등의 각종 서체를 비교할 수 있으며 유명 서예가들의 필체를 직접 감상할 수 있다.
비림은 중국 고대 서예 예술의 보고이자 고대 문헌서적과 비석의 조각 도안 등이 집대성되어 있는 곳으로, 대외 문화 교류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유적지이다. 서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꼭 가볼 만한 곳이다.
☞ 교통 : 14번,402번,239번 버스 이용 박물관 역에서 하차.
☞ 개관 시간 :
⊙영원불사를 꿈꾸던 진시황의 흔적, 아방궁(阿房宮, 아팡궁) 유적지
서안과 중국, 중국역사를 통틀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진시황(秦始皇)의 황궁이다. 지금은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고 흔적만이 있지만, 그 흔적만으로도 규모를 알 수 있을 만큼 거대하다.
서안시 서쪽 교외에 있는 이 유적지는 동서 2,500m와 남북 1,000m의 크기로 앞의 전(殿)과 뒤의 궁(宮),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전의 유적지는 동서 1,300m와 남북 500m의 60만 평방미터의 면적으로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방궁의 건설은 한편으로는 황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함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황제에게 알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하나의 국가로서 정복하는 과정에서 경성(京城-북경), 함양(咸陽-서안)의 궁궐들을 다시 짓게 했는데 이것을 "육국궁전(六國宮殿)"이라 불렀다. 한번은 진시황이 각지의 12만 영주와 부상(富商)들을 함양으로 모았는데, 함양궁에 숲처럼 빽빽히 들어서서 입구까지 꽉 찼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은 남쪽으로는 위강(渭江), 북으로는 고원을 접하고 있어서 앞으로 넓힐 수가 없었다. 이에 진시황은 위강을 메워 남쪽의 평원까지 확장시켰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9년(서기 212년)에는 서주(西周)의 풍고 근처에 아방궁의 전전(前殿)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아방(阿房)'이라는 것은 '근방(近旁)', 즉 함양의 근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처 공사가 다 끝나기 전에 진시황이 죽고, 그 2세가 이어 공사를 계속하게 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방궁의 크고 작은 전우(殿宇)만 700여 곳에 이르고, 같은 하늘 아래에 있다고 해도 각각의 방이 모두 기후가 틀렸다고 한다. 진시황 생전에는 주변의 육국(六國)에서 가져 온 보석과 미녀들을 궁내에 보관해 두었고 매일 돌아가며 하루씩 각각의 방에 머물렀는데, 죽을 때까지도 다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진왕조의 정치제제와 경제가 서서히 붕괴되고 농민봉기가 일어나 항우(項羽)가 병을 이끌고 함양을 함락시키면서 아방궁도 폐허로 남게 되었다.
또한 이곳은 1961년에 국무원에 의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서안성벽
서안성벽은 중국에서 보전하고 있는 건축물중에서 가장 완벽한 고성중의 하나다. 전체 길이가 13.6km, 높이가 12m, 폭이 15m로 높고 두터운 고성벽이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 성벽은 명나라 홍무제 3년에서 11년까지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그 역사가 이미 600년에 이른다. 고대 전쟁사를 보면, 이 성벽은 유일한 출입통로로서 통치자에게 있어서는 방어를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성벽은 동서남북의 4개문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고, 주변에는 넓고 깊은
1982년 7월에는 섬서성정부의 주창아래 서안시민 몇 십만 명이 힘을 합쳐 독특한 풍격의 환성공원(環城公圓)을 조성했는데, 성 정상부분에는 조그마한 화원을 여러 개 만들어 놓았다.
서안성벽은 단지 역사적인 건축물의 의미를 넘어서 공원과 성, 길, 물이 어우러진 공원이 조성 됨으로서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서안성벽은 입장료를 받고 오를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넓은 성을 둘러보게 하기 위해 모형전동차도 운행한다. 더운 여름 저녁에는 이곳에서 더위를 식히는 서안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한다.
☞ 개방시간 :
☞ 가는방법 : 종루행 버스를 타고 종루 다음 역에 하차.
⊙항일운동의 정신이 담긴, 팔로군서안변사소기념관
팔로군 서안변사소기념관은 해방이후에 건설된 전쟁기념관으로 항일전쟁 당시의 혁명근거지이다. 이곳에는 공산당 설립 이전부터 항일전쟁 전후까지의 현대사가 연루된 역사적인 곳이다. 서안 기차역 주변의 혁명공원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과거엔 외관상으로는 독일 치과의사의 병원인척 하면서 실제로는 연안(延安)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에게 신분증을 발행해 주는 곳이었다. 주은래, 주덕, 등소평 등 공산당 간부들이 묶었던 곳이기도 하며,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작품의 저자인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가스노도 이곳에서 묵었었다.
1935년 10월, 모택동이 이만오천리장정(兩萬五千里長征)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연안(延安)에 입성하면서 연안은 중국 공산당 혁명의 총사령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국민당의 장개석도 서안을 섬서성과 감수성 침공의 주요기지로서 사용하게 된다.
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 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 전쟁정책의 영향아래 전국 항일운동이 고조되면서 국민당의 동북군과 서북군이 발병하는 '서안사변(西安事變)'이 일어나고 이어 모택동과 장개석의 제 2차 국공합작이 진행되면서 농공민들로 이루어진 홍군이 집합한 '홍군연락처(紅軍聯絡處)'가 집합된다. 이 기관은 이후 1년 뒤에 이름을 '팔로군주서안반사처'로 바꿨는데, 이 곳은 공산당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현재 이곳은 그당시 항일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관으로서 항일전쟁 당시의 비참한 중국의 상황을 담은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일본인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 개관시간:
☞ 입장료: 5위안
☞ 교통: 기차역 앞에서 610번 버스 이용
⊙대당부용원
수(隋)나라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1300년에 이르는 유서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어서인지 고풍스럽고, 깊이 있는 매력과 분위기가 물씬 풍기며 주변 환경의 아름다움도 일품이다.
오늘날의
특히 매력적인 야경으로 최근 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밤 어스름이 찾아올 때면
화려하고 몽환적인 야경은 관광객들에게 국제도시로 그 어느때보다도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당나라시대로 돌아간 듯한 환상적인 체험을 선사한다.
참고로 이 곳을 배경으로 촬영된 중국 드라마 "대당부용원"은 국내에서도 방영된 바 있다.
⊙섬서역사 박물관
서안시 소채동로(小寨東路)와 취화로(翠華路)의 교차로 입구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섬서역사박물관은 전체면적 7만여평방미터의 국가급 역사박물관으로 중국에서 가장 큰 규모와 가장 현대화된 역사박물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중앙에 위치한 건물은 2층 높이, 면적은 6㎢ 로, 원시시대부터 1840년 아편전쟁 중에 섬서성에서 출토된 각종 전시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서쪽에는 2500㎡의 주제 전시관이 있는데, 주로 실크로드 등 섬서성의 역사, 문화 등에 관련된 문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주요 전시품은 청동기, 도용, 금·은 장신구, 당나라 무덤 벽화 등이다.
동쪽에 있는 2555㎡의 역사문화전시관에는 주로 중국과 외국의 문화 교류를 주제로 한 전시품들이 있으며, 전국 각 성과 시의 문화 전시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은 현대적인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전시관 내에는 문물보호 센터, 도서관, 다용도 학술보고실 등이 갖춰져 있다. 컴퓨터를 이용한 전시품과 자료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자동 조절 에어컨과 인공 조명시스템, 6개국어 동시통역 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다.
☞교통: 5번, 24번, 27번, 527번, 610번 버스 이용
☞입장료: 35위안
☞개관시간:
⊙가장 보전이 완벽한 명대의 건축, 종루(鐘樓, 쫑로우)
종루(鐘樓)는 서안중심에 위치한 동서남북 4방이 연결되어 있는 교통중심지역이다. 우리나라의 동대문이나 남대문과 비슷한 위치로 총 높이가 36미터, 총 면적이 1377.4 평방미터다. 서안의 종루는 중국에 남아있는 수많은 종루중에서 제일 크고 보존이 완벽하여 서안의 상징적인 건축물일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종루는 명태조 주원장 홍무제 17년인 1384년에 시간을 알리기 위해 건설된 것으로, 외관 3층, 내부 2층 정방형의 누각형태다. 처음 건축되었을 때는 지금의 서안시 광제가(廣濟街) 입구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명나라 만력 10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건물의 특징은 못을 사용하지 않고 건물을 올렸다는 것인데, 사면에 회랑이 둘러져 있고 내부에 계단이 있어서 올라가 서안시내를 둘러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또한 누각 안에 보전되어 있는 종은 고대시대때 아침을 깨우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서, 새벽에 종이 울리면 종루의 문을 열고 저녁에 종이 울리면 종루의 문을 닫았다고 한다.
종루가 서안 중심에 위치해 있고, 종루를 기준으로 교통이 4방으로 통하기 때문에 이 주변에는 크고 작은 상점과 먹거리 장터가 열려 있다. 종루가 있는 곳은 8차선의 넓은 도로로, 종루에서 서안성벽까지 양쪽의 도로변에 새로 지어진 건물과 백화점, 은행,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고 성벽 왼편으로 고가(古街)가 펼쳐져 있다. 이곳은 북경의 유리창 거리처럼 그림, 옥, 도장, 장식품 등 고물건을 판매하는 상점거리인데 거리 끝에는 비림(碑林)으로 들어서는 문이 있다. 종루에서 이 거리까지는 대략 300미터 떨어져 있으며, 종루로 가는 버스를 이용하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 개방시간 :
▷ 요금 : 비수기 20위안 / 성수기 30위안
▷ 가는방법 : 1번,6번,8번,11번,45번 버스이용
⊙취화산(翠華山 : 추에이후와산)
서안시에서 남쪽으로 약 23킬로미터 떨어진 진령산맥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취화산은 해발이 약 1500미터에 달하며 태을산(太乙山)이라고도 불리운다.
중국 내에서 일찍이 "종남독수(終南獨秀: 취화산의 주봉인 종남의 수려함은 비길 곳이 없다는 뜻)"와 "중국지질지모박물관(中國地質地貌博物館)"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취화산의 관광지는 벽산호(碧山湖)와 천지(天池), 산붕(山崩) 경관구,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2001년 3월 국토자원부에서 최초로 지정한 11개 국가 지질공원 중 하나이며 , 2002년 중국 관관청에서 AAAA급 관광지로 선정할 만큼 지질학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동시에 아름다운 자연미와 빼어난 경관도 매력적인 곳이다.
주봉(主峰)인 종남은 해발 2604미터에 달한다.
⊙회족거리 요리
서안은 역사의 고도이다. 이곳에 도읍을 정한 왕조는 서주(西周), 전한(前漢;서기전 202-서기8), 후한(後漢;190-195년간), 서진(西晉;313-316년간)을 들 수 있다.
또한 5호16국시기에도 전조(前趙;319-329년간), 전진(前秦;352-394년간), 후진(後秦;384-417년간)이 도읍을 정하였고, 서위(西魏;535-557), 북주(北周;557-581), 수(隋;581-618년간), 당(唐;618-907년간)으로 이어졌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때문에 서역과 페르시아 등지에서 많은 이민족이 장안으로 몰려들었고, 이곳은 다양한 문화가 숨쉬는 세계문명의 용광로였다.
서안시의 서북쪽에는 대략 30만명의 회족(回族)이 살고 있다. 이들이 사는 지역을 회방(回坊)이라 하는데, 회족들은 무슬림의 문화를 유지하며 서안시내의 또다른 독특한 이국문화를 선보인다,
당나라 시기에 페르시아 상인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장안에 들어왔는데 일부의 페르시아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북원문과 묘후가 일대에 정착하기 시작해서 오늘날의 회족문화를 이루었다. 남자들은 수염을 기르고 여자들은 수건을 머리에 썼다. 이들은 무슬림의 전통에 따라 이슬람교당인 청진대사(淸眞大寺)에서 예배를 본다.
혼인하는 경우가 있으면 회방의 거리는 온통 떠드는 소리와 양고기 냄새가 진동한다.
청진사를 중심으로 그 일대에는 이슬람교도들이 많이모여살고있다. 이거리의 중심에 뻗어있는 대맥가(大麥街)에는 이슬람요리를 하는 크고 작은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메 뉴 : 양러우촤얼(羊肉串兒)
양고기,소고기(고기,심줄)돼지고기,닭고기(다리,날개,허파,똥집),야채(감자,고구마,양파,버섯) 등이있다
⊙교자연
교자연은 서안시 해방로에 위치한 교자관(餃子館)에서 처음 만든 것으로,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남북의 교자를 모두 모아 놓은 것이다.
우리가 보통 '만두'라 부르는 속이 들어간 전병쌈을 중국에서는 '교자'라 부르며, 정작 중국에서의 만두는 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밀가루떡을 말한다. 토지가 비옥한 남방에서 쌀을 주식으로 먹는 반면, 척박하고 추운 기후의 북방에서는 밀로 만든 국수나 만두, 교자를 즐겨 먹었다. 지금은 지역에 상관없이 누구나 좋아하는 전통음식이면서도 별미가 되었는데, 중국인들은 춘절(설날)에 가족끼리 교자를 빚고 찌어 먹음으로서 새해를 맞는다.
돈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중국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교자라는 음식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반달형의 교자모습은 옛날 돈의 모습과 유사한데, 고대부터 돈을 좋아하던 중국인들이 음식을 돈의 모양처럼 만들어 먹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설날에 교자를 가족끼리 만들어 먹으면서 일부러 동전을 몇개 넣어 두는데, 그 동전을 깨무는 사람에게 돈복이 온다고 믿는다고 한다.
북경의 유명한 훈둔(만두국)부터 광동의 얌차에 이르기 까지 교자의 모습과 맛, 재료가 각양각색인데, 고기, 야채, 버섯 등의 다양한 재료와 물고기, 꽃, 나비 등의 다양한 모양의 교자를 찌거나, 삶거나, 굽거나, 튀겨서 내 놓는다. 이런 다양한 교자의 종류가 180여 종 이상이라고 하니, 역시 음식의 천국은 중국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서안의 한 음식점에서 시작된 서안의 교자연은 이미 2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해외 관광객에게까지 그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넓다란 대륙 곳곳에서 맛볼 수 있는 다양한 교자의 맛들을 이곳 서안에서 한번에 맛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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