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027 / 그래도 믿습니다. (열왕기하 2:1-14)
세상에서 하는 말로 ‘용두사미’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은 좋으나 끝이 좋지 않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이에 대한 반대말로는 처음에 세운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는 의미로 ‘초지일관’을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는 용두사미의 반대되는 말이 뭔지 아십니까? 욥기 8:7에 나오는 말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욥의 친구로, 나중에 하나님께 책망 받은 빌닷이 한 말이긴 합니다. 게다가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의 초지일관과는 상응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두사미와 반대되는 개념이자 초지일관하는 신앙의 모습을 엘리사에게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엘리사 이야기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시작이 어떠했든 끝까지 믿는 자가 복을 받는다.’입니다. 믿음은 끝까지 믿는 자가 승리하며, 끝까지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이 있고 문제가 해결됩니다.
인간에게는 늘 ‘양신이 역사’합니다. 양신이란 성신과 악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신이신 성령님과 반대 개념을 표현하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사탄을 일컬어 ‘악신’이라고 하긴 했지만 사실 사탄은 신적인 반열에 들지 못하는 미물에 불과합니다.
어쨌든 사람에게는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동시에 사탄도 늘 붙어 다니는 것도 사실입니다. 때문에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영의 분별력’입니다.
기억나십니까? 예전에 말씀드리기를 하나님과 사탄이 사람에게 하는 똑같은 질문이 있다고 했던 것을?
하나님과 사탄이 사람에 대해 역사할 때면 똑같은 것이 있고 다른 것이 있습니다. 똑같은 것은 둘 다 사람에게서 믿음이 있나 없나를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이 있게 하시려고 역사하시는 반면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없게 하려고 시험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 영의 분별력을 가지고 우리 중에서 일어나는 이 두 가지 영역을 동시에 대처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과 사탄은 어떤 상황 속에서건 늘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이래도 믿을 거냐?”
다만, 하나님은 이래도 믿을 거냐시며 우리의 믿음을 촉구하시지만, 사탄은 이래도 믿을 거냐며 우리를 협박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양쪽 모두에 대응해야 하는 데 그 때 우리가 말할 대답은 하나뿐입니다. '그래도 믿노라!
하나님을 향해서는 ‘그래도 믿습니다.’ 해야 할 것이며 사탄을 향해서는 ‘그래도 믿는다.’ 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 3장 18절을 보세요. 믿음 좋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풀무 불에 던져질 위기 앞에서도 ‘이래도 믿을 거냐.’는 느브갓넬사르 왕의 협박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이 부분은 개역 한글 버전이 이해하기가 더 쉽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끝을 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중간에 결론을 내리게 하려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대답을 재해석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결론은 승리인 줄 믿기에 지금 당장엔 내 뜻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나는 끝까지 하나님을 믿겠노라.’
이 믿음과 이 고백이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좋다 나쁘다로 우리의 신앙을 마무리하려 하면 안 됩니다. 좋으면 감사함으로, 나쁘면 인내하고 기도하면서 끝까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믿음의 끝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승리와 기쁨과 웃음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엘리사 이야기도 그런 맥락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당시 엘리야는 요즘으로 치면 신학 대학 학장의 위치에 있었으며 열왕기상 17장에도 기록되었듯이 죽은 사람도 살리는, 그의 믿음으로 행한 기적적인 사건들로 인해 이미 전국적인 인물로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의 휘하에는 늘 수많은 선지 생도들 즉 신학생들이 모여 들어 신학과 신앙을 배우고 있었는데 엘리사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죽이지 않고 하늘나라로 데려가시기 위해 그간의 모든 일들을 정리하고 마지막 순례 여행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엘리야가 그렇게 떠나는 구나하며 벌어지는 상황을 받아들였지만 오직 엘리사만은 스승 엘리야의 여정을 따라 나섰습니다.
엘리야가 길갈에서 벧엘로 갈 때, 또 벧엘에서 여리고로 갈 때도 스승인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너는 여기 머물러라.’ 고 했습니다. 즉 요즘 말로 하자면 ‘더 이상 따라오지 마라.’ 그랬습니다. 동료 신학생들조차 ‘야 선생님이 가시는 곳에서 가서 니가 할 일이 뭐 있다고 따라 가냐.’며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반응은 초지일관 했습니다. 스승을 향해서는 ‘당신이 어디로 가든 함께할 것’이라고, 동료들을 향해서는 ‘나도 아니 너희는 잠잠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런 상황을 장소만 바꿔가며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했는지? 그 의도를 확인해 봐야 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엘리사에게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 했던 엘리야는 당시 엘리사의 믿음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너 이래도 따라올래?”
반면 남은 생도들은 따라가 봤자 빈손으로 돌아올 것을 알았기에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너 그래도 따라갈래?”
그 상황에서 엘리사에게는 양신이 역사했던 것입니다. 이런 스승과 동료들을 향해 엘리사가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믿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끝까지 따르기를 고백했고 사탄들을 향해서는 잠잠하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드립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똑같은 것을 물어온다면 우리가 대답할 말도 오직 하나뿐이라는 것을. ‘이래도 믿을래?’- ‘그래도 믿습니다!’
그렇게 둘은 요단강까지 왔습니다. 8절을 보면, 엘리야가 겉옷을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 고 했습니다. 누가 건넜다구요?
엘리야 혼자가 아닙니다. 두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끝까지 자기를 따른 엘리사를 데리고 요단강을 건넌 것입니다.
이어서 엘리사에게 묻습니다. 9절에 보니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그리고는 엘리사와 엘리야가 이런 말들을 주고받습니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기도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이루어주시기를 청하는 것. 그것이 기돕니다.
엘리사의 기도에 대해 엘리야가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래서?
엘리사의 청이 어렵다고 엘리야가 거절했나요? 아닙니다. 응답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다만 응답 받을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뭐라 했지요?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이것이 응답 받을 조건이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엘리야가 이 세상을 떠나면, 즉 하나님이 이 땅에서 엘리야를 완전히 데려가심으로 그의 사명이 끝나는 것까지를 보면.’ 이란 말입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엘리사 니가 끝까지 나를 따라오면!’ 이란 말인 것입니다. 끝까지 따라오면 원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조건이자 약속인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를 향해서도 '너희가 끝까지 믿으면 원하는 것을 얻으리라.' '끝까지 기도하면 원하는 것을 얻으리라.' '끝까지 순종하면 원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서는 끝까지 믿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가 불 수레와 불 말들을 타고 회오리바람에 이끌려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세요. 엘리야는 그렇게 하늘로 가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남겨진 엘리사의 소원은 어떻게 된 걸까요?
가타부타 말 한마디 없이, 그 흔한 안수 한 번 해주지 않고 엘리야는 떠나갔습니다. 엘리사에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 하나만 남았습니다. 이미 그의 동료들이 예상했던 대로 엘리사에겐 빈손만 남았습니다. 그렇게 끝나고 마는 걸까요?
그렇게 되돌아 올 때 엘리사는 이전에 스승의 능력에 힘입어 건넜던 요단강을 홀로 다시 건너야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그러면서 그도 엘리야의 겉옷으로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 엘리사는 빈손으로 돌아섰습니다. 기껏 있다고 해봤자 엘리야가 입던 누더기 겉옷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누가 봐도 빈손인 엘리사였지만 그에게는 엘리야의 믿음과 능력이 계승되었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자기의 빈손을 보았지만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믿음과 능력도 알았습니다.
한편, 성경을 보세요. 이런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는 강 건너 편에서는 다른 생도들이 멀리서 이 모든 것을 구경만 했더라고 했습니다. 그들도 엘리야를 라오긴 따라왔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따른 것이 아니라 구경꾼으로 따랐던 것입니다. 구경하러 왔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나타났을 때도 그들은 그저 구경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끝까지 믿고 따랐던 엘리사만이 은혜와 능력을 받았습니다.
기억하세요. 하나님님의 은혜 앞에서는 축복자가 있고 구경꾼이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차이를 만들어 냈을까요? ‘그래도 믿습니다.’하고 끝까지 따른 자는 축복자가 되었고, ‘그래서 못 믿겠습니다.’했던 사람들은 구경꾼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방법은 간단합니다. 사탄을 향해서는 ‘잠잠하라’ 선포하시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믿되, 끝까지 믿으시면 됩니다.
이 시간 여러분이 엘리사의 믿음을 갖고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엘리사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라고 부르며 찾고 기도할 때 엘리야와 엘리사의 하나님은 여러분을 향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비록 어려운 일은 구한다 할지라도 너희가 끝까지 믿으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질 것이니라."
우리가 기도하는 것들 중에 쉬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 어렵고 때론 다 불가능하기까지 합니다. 그럴지라도 '그래도 믿습니다.' 하며 끝까지 기도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는 반드시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이 그 능력과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 제목)
1. 상황에 따라 ‘그래도 믿습니다.’ 하지 못했던 삶을 회개
2. 각종 문제와 시험을 향해 ‘사탄아 잠잠하라.’고 선포
3. 어려운 일일지라도 응답하실 줄 믿고 끝까지 기도(원하는 것)